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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17:02:33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The War against Boys: How Misguided Policies Are Harming Our Young Men
파일:소년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한국판 표지.jpg
영문판 표지 ▼
파일:The War Against Boys front cover.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장르 교육학
작가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
번역가 서의윤
출판사 Simon & Schuster(원서)
도서출판 좁쌀한알(역서)
발매일 2000년(원서)
2019년(역서)
쪽수 288쪽 (영문판)
384쪽 (한국어판)
ISBN 9791189459055
1. 개요2. 소개 및 출간 배경3. 목차 및 주요 내용
3.1. 챕터별 내용 정리3.2. 여학생 위기설? 남학생 부진설?
3.2.1. "우리 남자들도 힘들어" X 고민 없이 행복한 남성들 O
3.3. 단성 교육인가? 남녀공학 교육인가?3.4. 전통적 교육관 vs. 진보적 교육관
4. 반응5. 남은 의문점6. 생각해 볼 점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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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책은 수백만에 달하는 건강한 남자아이들의 행동을 병으로 취급하는 것이 어떻게 유행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우리는 남자아이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간단한 진실을 잊었다. 일반 남성의 그 에너지, 경쟁, 육체적 용기 등은 세계에서 옳은 부분을 담당한다. 남자아이들의 공격성이 누그러지면서 건설적 목표를 향해가게 될 것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남자아이들은 규율, 존중, 도덕규범을 갈망하며 필요로 한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사랑인내 어린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남자아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질병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 p.11

2.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1990년대 이래로 미국 교육계가 입각해 있던 진보적이고 페미니즘적인 교육 정책에 대해서 전통주의적,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비판서이다. 본서 전체에서 제기되는 저자의 비판은 대략 3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미국 교육계는 여학생들의 위축은 비현실적으로 강조하면서, 남학생들의 학업부진 문제는 줄곧 외면하고 있다. ② 미국 교육계는 남녀 간에 자연적으로 결정된 성차를 무시하고, 소년들이 적응하기 어렵고 소녀스러운 교육 콘텐츠를 소년들에게 강요한다. 또한, ③ 미국 교육계는 소년들의 반사회적인 비행을 막을 수 있는 인성교육과 엄격한 규율 및 훈육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본서는 젠더 서적은 아니며 교육학 카테고리에 속할 만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적 정책들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이다. 특히, 본서는 어린 소년들이 남성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만드는 페미니즘 교육관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90년대 이후로 미국 교육계를 장악한 젠더 운동가들은 남학생들의 거친 활동이나 칼싸움 등을 마치 '폭력의 사회화의 조짐' 으로 여겨서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남중/남고 혹은 여중/여고처럼 젠더분리적인 환경에서 교육하는 것은 "우리 남자들끼리" 의 동류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에 성차별적이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만드는 정책은 남성의 여성화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남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교육정책이 만들어져 봐야, 정작 그 정책적 내용은 여학생에게만 유리한 정책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남학생들의 저학력 및 학업적 실패를 야기한다는 것.

이와 같은 페미니즘과의 대립각으로 인해 저자는 엄청난 유명세와 악명을 동시에 불러왔고(…), 저자로서도 페미니즘을 정면으로 조준하는 것은 좀 아니라고 여겼는지 개정판에서는 톤을 많이 낮추었다. 대표적으로 본서의 부제는 초판에서는 'misguided feminism' 이라는 용어를 포함했으나, 개정판에서는 이를 바꾸어서 'misguided policies' 라고만 에둘러 표현했다. 저자의 의도는 페미니즘 그 자체가 아예 틀려먹었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며, 독자들이 그렇게 오해하지 말아 달라는 것. 저자는 페미니즘의 이상과 여성 압력 단체들을 서로 구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압력 단체란 "대개 협소하고 단호한 특정 이익 단체로서 행동하며 이 세상을 남녀 간의 제로섬 투쟁으로 간주한다"(p.10)고 한다. 저자가 선긋기를 하는 발언을 빌리자면, "페미니즘은 사회 평등을 향한 노력의 결과로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으며 계속 받아 마땅한 신망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 페미니즘의 명성은 기존 이익 집단의 특질과 방식에 편입하고 있다"(p.58). 저자가 이처럼 페미니즘에 대해 톤 다운을 시도하는 이유는, 저자 자신이 비록 페미니즘의 유명한 비판자이기는 해도, 스스로를 바라보기에 안티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저자에 대한 정보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저자는 국내에도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해외에서는 보통 카밀 파야(C.Paglia)를 페미니즘 비판론자로 첫손에 거론한다면 국내에서는 조던 피터슨(J.B.Peterson)이나 바로 이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C.H.Sommers)를 꼽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80년대부터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소속으로 재직해 왔으며, 본서 외의 주요 저서로서 《Who Stole Feminism?》, 《One Nation Under Therapy》 등이 있다. 유튜브에서 "The Factual Feminist" 코너를 진행하는 등 젊은층과의 소통도 적극적인 인물. 전공분야는 다소 애매한데, 출판사에 따르면 저자가 브랜다이스 대학교(Brandeis University)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였지만, 위키피디아에서는 철학 학위라고 소개되고 있다. 물론 해당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철학 이름으로 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저자의 거침없는 비판적 행보는 대한민국 20대 남성의 시각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흔히 페미니즘에 대한 팩트폭격기, 내지는 위기에 처한 한국 남성들이 의지할 만한 구원자처럼 소환되는 인물이 바로 소머스지만, 실상 본서를 읽어보면 저자의 남성관이 미국 보수주의 진영의 일견 '꽉 막힌' 남성상을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 때문에 남성 이익의 대변자를 막연히 기대하고 책을 폈다면 충격을 넘어서 배신감마저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의 보수주의자 노인들이 헛기침을 하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자고로 남자로 고추 달고 태어났으면 말이다, 계집애처럼 굴 게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훈수를 두는 걸 상상해 보면 된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가 "우리 손자놈 사람 좀 만들어 주시오" 라며 교사에게 신신당부하는 장면을 상상한다면, 그게 바로 본서다(…).

이를 좀 더 감이 잘 오도록 표현하자면, 어느날 갑자기 소머스가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으로 취임했을 때 벌어질 일들을 상상해 보면 된다. 우선 유치원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기관들에서 남녀공학이 사라지고 남녀칠세부동석이 현실화된다(1장). 이런 남학교에선 아침조회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의무적으로 하고, 매주 준법교육과 인성교육이 의무적으로 진행된다(8장). 오직 남자만이 버릇을 제대로 들이기 위해 엄격한 훈육과 규율을 필요로 하므로, 전국의 유치원~초교 남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청학동으로 수련회를 가서 훈장님께 예절교육을 받게 된다(8장). 국어 시간은 철저히 단순암기와 반복학습과 쪽지시험으로 채워진다(7장). 전국의 남중생들과 남고생들은 병영체험 캠프를 일정 시간 이상 이수해야 하며(5장) 야간자율학습에도 예외란 없다(3장). 이 모든 특별한 감시와 통제에서 여학생들은 철저히 열외다. 여자애들은 어차피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알아서 곧잘 하니까! 이게 저자의 남학생 교육관이다.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생각하겠나 싶을 수도 있는데, 심지어 저자는 8장에서 인구통계학자 노먼 라이더(N.B.Ryder)의 입을 빌려서 소년들을 "문명화되어야 하는 야만인들"(p.285)에 비유했다! 저자의 이와 같은 "잠재적 야만인" 관점은 저자가 클래식한 미국 보수주의라는 사실을 유념한 상태로 본서를 읽으면 전혀 혼란스럽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번역상의 특징으로서, 본서에서 역자는 '형평성' 을 뜻하는 'equity' 를 전부 '평등' 이라는 한국어로 오역하였다. 평등에 대응되는 단어는 'equality' 이며, 도리어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 운동가들은 형평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반감을 드러내거나 내지는 다소 협소한 의제, 혹은 평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 정도로 생각하므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역자는 저자 이름의 'Sommers' 를 '소머즈' 로 번역하였지만, 이에 대한 역자의 말은 따로 없다. 일단 본 문서에서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표기법을 따라서 저자의 이름을 '소머스' 로 지칭하였다.

3. 목차 및 주요 내용


9장의 분량은 매우 짧으며, 해당 챕터는 결론의 성격을 갖는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3.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페미니스트 교육자들이 주장하는 여학생 위기설이 왜 실체 없는 괴담인지,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남학생 부진설이 왜 시급한 문제인지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다. 이와 관련하여 과잉병리화되고 있는 청소년 문제에 대한 저자의 비판의식을 함께 다룬다. 다음으로 어째서 남녀공학보다 단성 교육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전통적 교육관을 기존의 진보적 교육관과 대비한다.

3.2. 여학생 위기설? 남학생 부진설?

우리나라에도 《다른 목소리로》(In a Different Voice)의 출간으로 잘 알려진 심리학자 캐롤 길리건(C.Gilligan)을 위시하여, 많은 식자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사춘기 소녀을 경고하고 나섰다. 길리건의 신간 《Making Connections》가 1990년에 출간되고 나서 그야말로 사회적인 돌풍을 일으킴에 따라, 마침내 이것은 1990년대 교육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금언이 되었다. 이들에 따르면, 10대 초반의 사춘기 이전 소녀들은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지만, 사춘기를 겪은 이후인 10대 후반의 소녀들은 크게 위축되고 침묵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남성지배적 문화에 있다. 이들의 주장은 길리건이 제시했던 돌봄의 윤리(ethics of care)와도 연결된다. 말하자면, 소녀들은 소년들에 비해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력과 속칭 '센스' 가 매우 뛰어나서 그야말로 타고난 심리학자라고 느껴질 정도이지만, 이러한 상호적 돌봄의 원칙은 소위 하인츠 딜레마로 대표되는 남성지배적 주류 사회의 도덕적 사회화 방향과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도저히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설' 에 대하여 곧 작가 프랜신 프로즈(F.Prose), 칼럼니스트 애나 퀸들런(A.Quindlen), 작가 캐럴린 세(C.See), 언론인 수전 치라(S.Chira), 기타 등등이 10대 소녀의 자화상을 위축되고 움츠러들고 고개 숙인 모습으로 그려 냄으로써 부응했다. 미국대학여성연합(AAUW; American Association of University Women)은 《Shortchanging Girls, Shortchanging America》, 《How Schools Shortchange Girls》 같은 보고서들을 잇따라 출간하면서, 위축된 여학생들은 미국의 비극이라고까지 성토했다. AAUW는 '남학생이 의견을 말하면 교사는 경청하지만, 여학생이 의견을 말하면 교사는 손부터 들라고 한다' 면서, 학교 현장에서 여학생들이 움츠러들고 그저 침묵을 지키려 하는 경향을 바꾸려면 교사들의 교육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일련의 '여학생 위기설' 은 1994년교육 형평성 법안(Gender Equity in Education Act; HR1793)의 통과로 이어졌으며, 미즈 파운데이션(Ms. Foundation for Women)과 같은 비영리 여성단체들은 "딸과 함께 출근하는 날" 같은 운동을 펼쳐서 소녀들의 기를 살려 주려고 애썼다.

잠시 생각해 보자. 만약 학교에서 "거울 앞에 서서 내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미래의 나를 다정하게 격려하는 편지를 쓰고 친구들 앞에서 낭독하기" 같은 활동을 하도록 담임 교사가 요구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저자에 따르면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의 반응은 천지 차이였다. 여학생들은 곧잘 그런 편지를 써 내려갔으며, 낭독이 끝나면 서로 울먹이면서 위로해 주는 훈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헌데 남학생들은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의 집단 멘탈붕괴 표정을 지은 채 펜만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연히 집중이 될 리가 없고, 교사는 그런 그들에게 자연히 "너희들 또 집중 안 하고 장난치지? 태도점수 감점!" 같은 방식으로 반응할 뿐이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벌점들은 이내 처참한 성적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저자가 보기에 여성 단체들이 교육계에 요구한 '자존감 증진' 방법론은 소년들에게는 너무나 부당한 상황이었다. 차라리 여학교에서만 이런 식으로 한다면 모르겠는데, 하단에서 따로 설명하겠지만 여성 단체들은 남녀공학 시스템 속에서 남학생들을 최대한 '소녀스럽게' 만드는 것이 성차별을 척결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어 마지않았다.

여성 단체들의 방법론은 심지어 유치원어린이집 같은, 멋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향했다. 미국 북동부의 유명한 진보주의적 여대웰즐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는 1998년에 낸시 마셜(N.Marshall)의 세션을 통해, 가급적 일찍부터 소년들이 인형을 갖고 놀게 하고, 하이힐, 치마, 원피스 등을 입혀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이 말은 곧 여자는 인형을 가지고 놀아야 하고 하이힐, 치마, 원피스 등을 입어야 한다는 거 아닌가 왜냐하면 젠더 도식(gender schema)은 유아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다가, 이윽고 만2~7세 무렵에 유치원에서의 사회화를 통해 비로소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소년들을 이때 최대한 여성스럽게 키워 놔야 나중에 강간이나 가정폭력 등을 저지르는 '남자' 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 남자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마구 어지럽히고 뛰어다니며 장난감을 던지고 뒤엉켜 노는 것은 모두 폭력적 남성성을 내면화하는 첫 단계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닐 윌리엄스(N.Williams)는 피구의자앉기 게임, 이어달리기 등이 '경쟁 놀이' 로서 약자를 배제하고 패배자의 자존감을 저하시킨다고 경고했다. LA 교육감 리처드 알론조(R.Alonzo)나 캘리포니아의 프랭클린초등학교는 술래잡기 또한 '술래' 라는 피해자를 만들기 때문에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면서 술래잡기를 금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이 저자가 전하는 90년대 미국 교육 현장의 현주소였다.

그렇다면 소녀들은 과연 학교에서 기 죽은 채로 지낼까? 저자에 따르면 전혀 아니다! 자존감 증진 교육은 소년들은 둘째치고 소녀들에게조차 불필요했다. 이런 운동이 시작되던 90년대 초엽에서부터 이미 사회학자 로베르타 시몬스(R.Simmons) 같은 인물들이 비판했지만, 그 목소리는 언론에 거의 실리지 않았다. 언론은 늘 자존감 고양 교육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고,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회의론은 원치 않았다. 앤 피터슨(A.Petersen) 등의 발달심리학자들과 대니얼 오퍼(D.Offer) 등의 정신의학자들에 따르면, 절대 다수의 청소년들은 정상적이고 잘 적응하면서 자신의 발달단계를 넘어간다고 하였으며, 수전 하터(S.Harter)의 여러 연구들은[1][2] 사춘기 소녀들이 젠더 운동가들의 사변적 학설보다 훨씬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간다고 못박았다. 현실은 친구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하교하는 여고생들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그 여고생들은 학교에서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자존감 증진 교육은 심지어 여학생들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 교사가 입만 열면 늘 여자, 여자 하면서 핏대를 세우는 게 부담스럽다고 말하거나, 남성에 대해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기회가 없었다거나, 개중에는 자기들 때문에 남학생들이 자꾸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걱정된다고 말한 여학생도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위기에 빠진 것은 여학생 쪽이 아니라 오히려 남학생들이었다. 남학생 부진설은 1990년대 말엽에 자존감 증진 교육의 효과성에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비로소 솔솔 피어올랐다. 1997년에 공공교육네트워크(PEN; Public Education Network) 컨퍼런스에서는 메트라이프(MetLife)의 후원으로 실시된 연구가 발표되었는데, 이때 아동심리학자 낸시 레퍼트(N.Leffert)는 학생 1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사회조사에서 여학생 위기설이 틀렸다는 결과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건강한 삶을 위한 40가지의 개인적 자산들 중에서 무려 37가지가 여학생 우위였던 것이다. 현대의 한 논문에서는[3] 심지어 유치원 시절부터 여학생들은 정리정돈이나 주의집중, 얌전함 등으로 인해 교사에게 이쁨을 받고 남학생보다 태도점수에서 앞서간다고도 했다. 얼마 못 가서 2000년에는 그 교육부조차 《Trends in Educational Equity of Girls and Women》이라는 보고서에서 여학생들의 우수한 학업성취 수준을 전면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대학입학사정관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College Admission Counseling)는 2002년에 "남학생들은 왜 대학에 입학하지 않는가?" 를 의제로 삼기도 했다. 남학생들이 학업 포기자가 되면서 대학 신입생은 여초로 기울어졌고, 어느 정도 이상 여초가 심각해지자 이번에는 여학생들마저 뒤따라 입학자 수가 줄어들었다. 대학 입학처 입장에선 심각한 문제였다.

남학생들에 대해서 여성 단체들과 젠더 운동가들이 "폭력적 남성성" 으로 규정한 것 역시 문제가 많았다. 소년들이 보이는 여러 경향들은 보기만큼 폭력적인 문제가 없었다. 물론 소년들은 언뜻 경쟁과 과격한 대결을 즐기며, 패배자가 울음을 터뜨리거나 비웃음을 사거나, 심지어는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소년들의 폭력이 과격하고 거친 놀이문화 때문에 생겨나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전혀 아니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서로 뒤엉켜서 레슬링을 하듯이 마구 용을 쓰고 힘자랑을 하는 것을 흔히 신체놀이(R&T; rough-and-tumble)라고 하는데, 언어학자 드보라 태넌(D.Tannen)이나 유아교육학자 앤서니 펠레그리니(A.Pellegrini)는 R&T가 언뜻 공격적인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서로를 뭉치게 하고 친밀하게 하며 협동을 기르는 데 효과적이라고 하였다. 정말 모범적이고 반듯한 남자아이들도 R&T를 즐긴다. 그 놀이 중에 다른 남자아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놀이 중에 누군가 다치거나 우는 등의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날 뿐이다. 반면 정말로 '공격적인' 남자아이들은 오히려 R&T를 즐기지 못한다. 이들은 막상 R&T에 참여하려 해도 다른 남자아이들이 슬슬 피하는 식으로 거부당하거나 기피받기 때문이다. R&T 부정론자들은 대부분의 R&T 양상이 여러 소년들 중 하나가 끝내 다쳐서 울게 됨으로써 끝나게 된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R&T 자체를 금지시키는 것이 정당하냐고 묻는다. 도리어 그것은 중요한 교육적 포인트다. 부모나 교사가 개입하여, 당황해하는 다른 소년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우는 소년에게는 자신의 감정조절 능력을 길러주고 안전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참된 교육이라는 것.

그렇다면 AAUW나 웰즐리 칼리지를 비롯한 젠더 운동가들은 생각을 고쳐먹었을까? 1장에서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우울할 뿐이다. AAUW는 2008년 결의문에서 "우리는 남학생 부진설을 주장하는 모든 개인이나 단체를 백래시 내지 여성에 대한 적대세력으로 규정한다" 고 못박았다. AAUW 상임이사 린다 홀먼(L.Hallman)의 《Where the Girls Are》(2011) 보고서나, 로잘린드 바넷(R.C.Barnett)과 캐릴 리버스(C.Rivers)의 《The Truth about Girls and Boys》(2011) 보고서에서도 계속해서 이 백래시라는 단어는 지치지도 않고 활용되었다. 하지만 90년대의 잘못된 교육정책은 결과적으로 2000년대 대학 신입생 현황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주디스 클라인펠드(J.Kleinfeld)의 백악관 회의 보고서 등에서, 남학생들 4명 중 1명이 기초적인 수준의 독해력을 갖지 못했으며, 고등교육 진학포기율은 모든 인종과 경제적 지위에서 남성이 더 심하게 나타났다. 아니, 오히려 유색인종일수록 남학생들은 뒷골목을 전전한 반면, 여학생들은 인생역전을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에 목숨을 거는 경향을 보였다. 데이터는 백래시가 아니었으며, 실제로 여학생 위기설이 틀렸음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반증되는 사례에 대해서 젠더 운동가들이 귀담아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여성학자 수전 페이너(S.Feiner)는 "여학생이 남학생들을 앞서가니까 갑자기 세상이 망할 것처럼 호들갑이냐?" 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여성들의 저학력을 걱정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만큼, 남성들의 저학력을 걱정하는 것도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한편 AAUW는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는 죄다 남성밖에 없는데 어떻게 여학생들의 성취가 앞서간단 말인가" 라고 반론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상층부에 남성이 더 많은 만큼, 실직자나 수감자 같은 하층부에도 남성이 더 많지 않은가? 물론 여학생들이 정말로 위기에 빠진 거라면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여학생들은 잘 헤쳐나가고 있고, 남학생들이 늪에 빠져 있다면, 그때는 그 남학생들부터 우선적으로 구해줄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성 압력 단체들은 여학생 위기설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2012년 7월, 미국여성교육연합(NCWGE; National Coalition for Women and Girls in Education)은 Title IX의 40주년을 축하하는 《Title IX at 40》 보고서를 내면서, 여전히 여학생들이 '남성중심적인 직업기술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며 위기설을 견지했다. 교육부 산하 시민권사무국(OCR)의 《Gender Equity in Education》(2012) 보고서 또한 AAUW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 보고서는 AP 수학 과정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1만 명 가량 앞서고 있다는 점을 젠더 격차의 사례로 들어서 맹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AP 생물학, AP 미국사, AP 영어에서 여학생들이 남학생을 최소 3만 명 가량, 심지어는 무려 20만 명 가량 앞서고 있다는 사실에는 함구했다. 저자는 이런 오도된 교육 정책으로 인하여, 미국 사회가 유능하게 길러낼 수도 있었던 남성 인재들을 너무 많이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3.2.1. "우리 남자들도 힘들어" X 고민 없이 행복한 남성들 O

여학생들이 위축되어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공방이 이어져 왔다면, 가부장적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남성들은 과연 얼마나 위축되고 기 죽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똑같은 질문을 성별만 바꾸어서 다시 제기해 보자는 것이다. 남성들은 과연 위기에 빠져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성재기로 대변되는 남성권익운동(MRM; Men's Right Movement) 측에서는 결단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소위 맥주 박스나 정수기 물통, 심지어는 우유당번 같은 것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사회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 '남자는 세 번만 우는 법' 같은 이야기에 익숙하다. 남성들에게도 남자답기 위해 요구되는 가혹한 조건들이 존재하며, 남성들은 세계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처럼 그 끔찍한 책임에 눌린 채 하루하루를 견뎌낸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엇갈리는 반응이다. 한편에서는 남성 특권(male privilege)을 주장하면서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권리와 특혜를 누리며 살아간다는 의미인지 알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약간 관점을 달리한다. 흔히 남페미라고 불리기도 하는 남성성 개혁 운동에서는 남성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며, 페미니스트들과 힘을 합쳐서 가부장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MRM 진영에서 토로하는 남성으로서의 삶의 고충들은 여성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각론에서는 서로 극명하게 달라지지만, MRM 진영과 남성성 개혁 운동 양쪽 모두가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남성들도 남성으로서 살아가면서 낮은 자존감과 위축된 자아, 말 못할 고민을 안고 벼랑 끝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즉, 남성들의 어깨야말로 정말 축 처져 있다는 것.

문제는, 저자가 이 두 진영이 공유하는 공감대, 즉 "우리 남자들도 힘들다" 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는 《백래시》의 저자로도 유명한 수전 팔루디(S.Faludi)는 자신의 저서 《Stiffed》에서, 성인 남성들이 감정적인 차단과 사회적인 거부로 인해 심리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전미여론조사센터(National Opinion Research Center) 조사에서 90%의 미국인들이 남녀 무관하게 자신이 행복하다고 답변했던 것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윌리엄 폴락(W.Pollack)은 자신의 문헌인 《Real Boys》에서 소년들에게 무의식 수준의 트라우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제통각검사(TAT)를 활용하여 입증해 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그의 상급자인 맥린종합병원(McLean Hospital) 정신의학과장 브루스 코언(B.Cohen)의 검토를 거치지도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과묵하고 무뚝뚝한 태도가 학업성취에는 더 바람직하다는 논문도 나왔고,[4] 또 다른 논문에서는 소년들은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구구절절 털어놓는 걸 시간낭비라고 여길 뿐이라고도 하였다.[5] 또 데이비드 블랭켄혼(D.Blackenhorn)에 따르면, 경쟁과 냉철함을 가르치고 무심하게 지내는 아버지 밑에서 오히려 가장 얌전한 아들이 나온다고도 하였다. 남성들은 언뜻 억눌린 듯 보여도 심리적으로는 충분히 건강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단순히 "사실은 행복한 남성들이 많다" 고만 온건하게 넘기는 선에서 그치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저자는 6장에서 "남자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남성들" 이라는 자기연민적인 논리에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실상 남성들은 그런 고민이나 괴로움 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MT에 가서 남자만 맥주 박스를 나른다는 국내의 제보는 무엇인가? 이런 산발적인 제보에 대해 저자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다. 본서의 표현을 바로 빌리자면, "몇 안 되는 불행한 소수자들을 전체 집단의 대표자로 간주함으로써 그 집단 자체가 안쓰럽고, 무능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p.232). 요컨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남성들을 왜 자꾸 일부 불행한 사례를 가져다가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처럼 위장하냐는 것이다. 남성들에게는 연민, 동정, 위로, 지지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미국 리버럴들의 병적일 정도의 치료주의(therapism)다.[6] 세상은 고뇌하는 햄릿과 상처받은 오필리어들로 가득 차 있지 않다. 여기서 다시금 저자의 보수주의적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데, 요컨대 남성들은 우리도 힘들다면서 질질 짤 게 아니라, 정신 차리고 남자답게 똑바로 처신할 궁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3.3. 단성 교육인가? 남녀공학 교육인가?

이 주제는 미국 교육계에서 갖는 의미와 우리나라에서 갖는 의미가 다소 다르다. 먼저 우리나라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나라에서 단성 교육이라 하면 일단 남중, 남고, 여중, 여고, 때로는 여대 등의 개념을 떠올릴 수 있으며, 중등교육(중학교~고등학교)에 제한된 떡밥인 경우가 많다. 보통 우리나라 학부모 여론은 보수든 진보든 간에 남녀공학 교육보다는 단성 교육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을 나누어 놓아야지 맘잡고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도 잘 치르고 좋은 대학도 갈 수 있기 때문. 특히 아들을 둔 학부모들은 남녀공학에서 자기 아들이 여학생들의 경쟁력에 밀릴 것을 두려워하며, 딸을 둔 학부모들은 행여나 나쁜 남학생들에게 엮여서 성적이 떨어지거나 심지어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약간 뉘앙스가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 미국에서는 초등교육에서까지 젠더분리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며,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라는 개념보다는 학부모의 정치적 관점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즉, 보수적인 성향의 미국인들은 단성 교육을 지지한다. 남학생들은 남학생들끼리 모아놓고 제대로 싸나이답게 키워야 한다고 믿으며, 여학생들은 또 자기들끼리 모아놓고 소녀스럽게 키워야 한다고 믿는다. 교육에는 필연적으로 남녀유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진보적인 성향의 미국인들은 이를 비판하기 위해 남녀공학을 끌어온다. 즉, 남학생들의 폭력적인 성향을 여학생들을 통해서 통제하고 줄여놔야 하며, 여학생 대상 교육을 디폴트로 삼고 남학생들을 여기에 적응시켜야 비로소 성차별을 척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교과서들과 교보재들이 '남성 역할 모델', '남성 위인들', '남성의 역사', '남성의 가치관', '남성의 논리' 를 주입해 와서 오늘날의 차별적인 사회가 되었으니, 이 디폴트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배경 속에서 저자가 뉴욕 시의 퀸즈 항공고등학교 이야기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본서에서 주기적으로 각종 실업계 고등학교, 특히 용접이나 배관 혹은 자동차 전공 등의 직업기술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런 학교들은 미국 교육계에서 놀라울 정도의 모범사례가 된다고 한다. 교육청 평가에서 항상 최고점을 받고, 출석률 같은 지표에서도 상위권이고, 미국 내 최고의 고등학교로 인정 받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학교들이 성공적일 수 있는 이유로서 젠더가 분리된 환경에서 남학생들이 자기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Title IX이 있는 한 이들 학교들도 여학생은 받는다. 아니, 제발 여학생들에게 들어와 달라고 애원한다. 법적으로 정해진 여학생 할당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 측에서는 입학생의 성별이 아닌 실력을 우선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약이 무효다. 이상하게도 이 학교들은 늘 남초로 유지된다. 그래서 미국립여성법센터(National Women's Law Center)로부터 늘 "여학생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성차별적 학교" 라는 비판을 듣는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진실은 단순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단성 교육은 일종의 자연스러운 평형 상태이며, 심지어 더 효과적이기까지 하다.

학교 자체를 단성 교육에 입각해서 운영하지 않는다 해도, 교육 프로그램을 젠더분리 방식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즉, 여학생들에게는 여학생들에게 맞춰진 기존의 자존감 증진 프로그램을 그대로 유지하되, 남학생들에게는 남성들만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 법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남학생들은 끝장토론이나 키배를 통해서 지식을 쌓을 수 있다. 실제로 이 방법을 지지하는 레너드 색스(L.Sax)라는 교육자는 남학생들의 독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책 읽기 싸움" 대회를 제안했고, 그 결과 해당 교실은 전교 최고 수준의 독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는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이 나서서 소송드립을 치며 연방부처에 성차별적 교육에 대한 항의서한을 보내겠다고 경고한 것이다. ACLU의 논리는 단성 수업이 남녀에 대한 젠더 규범을 강화하는 성차별이라는 것이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실제로는 단성 수업을 할 때 남학생들의 독해력 등의 약점이 가장 빠르게 보완되고 크게 향상되는 것으로 보인다.

2011년에 학술지 《Science》에는 단성 교육의 효과성에 대한 비판적 리뷰가 실렸다.[7] 요컨대, 단성 교육은 비효과적이고, 오히려 기존에 존재하는 성차별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 칼럼 이들은 성차별을 정당화한다는 지표로서 단성 교육을 이수한 남성의 향후 이혼율이 증가했다는 점을 들었고, 공격성이 증가된다는 점도 함께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곧 많은 비판을 받았다. 《Science》 의 다음 호에서는 성차별의 지표변인이 무의미하다는 비판이 가해졌고, 공저자들 역시 그 점에 대해서는 명확한 검토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저자에 따르면, 단성 교육을 받은 여학생이 향후 더 높은 임금 수준을 누린다는 점은 유의미하게 해석하지 않고 넘어갔던 문제도 있었다. 3장에서 저자는 이에 덧붙여, 대한민국 서울에서 실시된 연구[8]를 들어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남녀공학이냐 남/여고냐 하는 진학 문제를 속칭 '뺑뺑이' 로 정하던 우리나라 교육정책을 배경으로 할 때, 남/여고에 무작위로 배정된 학생들이 (vs. 남녀공학에 무작위 배정된 학생들에 비해) 수능 점수도 더 높고 더 우수한 대학에도 진학했다는 것이다.

나무위키에 한하여 생각건대, 이 주제는 생각보다 더 복잡해질 수 있다. 본서에서 지적하는 젠더 운동가들은 젠더 분리주의 교육이 소년들을 거칠게 만들고 남성 또래문화를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문제는 페미니즘의 인식론을 따를 때 정반대의 결론도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소년들은 주위에 소녀가 있을 때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하고 싶어하므로, 반대로 소년들끼리만 있을 때는 자신의 약한 모습 그대로를 꾸밈없이 드러낼 수 있다' 는 논리도 존재한다. 그 사례가 바로 아이슬란드의 대안학교인 햐틀리 뤄이파우스보르그(Hjalli Laufasborg) 유치원이다. 여기서는 여자아이가 주위에 보이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이 '계집애같다' 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므로, 전통적 젠더 규범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여자아이들과의 접촉을 막아야 한다는 교육관을 따른다. 이것은 본서에서 소개된 젠더 운동가들의 남녀공학 옹호 논리와는 정반대이다. 이 유치원은 젠더 운동가들과는 지향점만 동일하고, 저자와는 교육정책만 동일하다. 결국 단성이냐 남녀공학이냐 여부는 젠더 평등을 위해서라면 제각기 장단점이 있을 뿐인 셈이다. 정말로 젠더 사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느냐' 이지, '누구와 배우느냐' 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남녀공학 교육의 해악은, 남녀공학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3.4. 전통적 교육관 vs. 진보적 교육관

교육이란 무엇일까? 교사는 무엇이고, 학생은 무엇일까? 어떤 교육이 참된 교육일까? 이렇게 생각을 시작하면 너무 뜬구름 잡는 것 같을 수 있으니, 잠시 아래의 표를 보면서 왼쪽 생각과 오른쪽 생각 중 어느 쪽에 더 공감이 되고 동의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모바일 환경에서는 열람이 어려울 수 있다.)
  • 이미 완성된 인간이 자신을 발휘할 수 있게 돕는 과정
교육이란?
  • 미완성된 인간을 사회의 일원으로 완성시키는 과정
  • 학생의 자기계발 및 자유로운 자기실현
  •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성인
  • 억압으로 인한 고통 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시민
교육의 목표
  • 학생의 자기규율 및 준법시민화
  • 도덕적이고 윤리의식을 갖춘 성인
  • 사회에 헌신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인재
교육방식
  • 성장의 촉진자 및 지원자
  • 학생과 함께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
교사란?
  • 권위 있는 지식 전수자
  • 완성되어 있는 존재
  • 주체적으로 자기실현해 가는 완성된 존재
학생이란?
  • 통제와 훈육을 필요로 하는 미숙한 존재
  •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고 배우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
교사와 학생의 관계
  •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억압하는 사회화 요소
일탈의 원인
  • 학생의 자기규율 능력의 형성 실패
  • 억압적 사회화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실천
일탈의 예방
  • 예절교육/인성교육을 통한 자기규율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쪽에 더 많이 공감이 되었는지? 왼쪽을 진보적 교육관이라고 한다면, 오른쪽은 전통적 교육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양쪽 모두 일정 부분은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최소한 남학생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의 교육관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교육관에 따르면, 남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을 사람 만들어 놓는 과정' 과도 같다. 이것은 독해력과 같은 학업성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성교육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제멋대로 야생마처럼 내달리는 야만스런 남학생들은, 교육 시스템 속에서 체계적으로 예절, 도덕, 윤리, 규범, 법치 같은 개념들을 거의 외워놓아야만 비로소 교화가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남학생을 교육시키는 데 있어서 저자가 제안하는 유일한 왕도이다.

8장에서 저자는 남학생들이 여학생들보다 자기통제를 잘 하지 못하고 더 부도덕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한 예로, 《Report Card on the Ethics of American Youth》(2010)에서는 미국 고등학생 4만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 남학생들이 기만과 속임수, 위협에 대해 여학생들보다 더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상대를 속일 수 있다" 같은 진술들에 동의하는 윤리인식을 보였다고 하였다. 또한 미국 법무부, 미국심리학회(APA;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기타 등등의 권위 있는 기관들에서도 소년들은 소녀들보다 행동장애, 품행장애, 일탈, 반사회적 행동이 더 심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리고 그 사례로서 1989년 5월 25일에 있었던 글렌 리지 집단강간 사건(The Glen Ridge Rape), 그리고 1993년 3월경에 사회적 충격을 주었던 스퍼 포스(Spur Posse) 연쇄 성범죄 사건을 들고 있다.

이 사건들에 대해 버나드 레프코위츠(B.Lefkowitz) 등의 젠더 운동가들은 '남성성의 사회화' 논리로 설명했다. 즉, 흔히들 이런 끔찍한 성범죄 사건을 보면 '일부 사이코패스', '일진', '정신병' 등으로 예외로 치부하곤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이지 못한 현상이 아니라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젠더 운동가들은 사회의 문화적 분위기가 그런 강간이나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 자체를 긍정하며, 미디어와 남성 또래문화를 통해서 "남자라면 그 정도는 당연", "진정한 싸나이답다", "그런 행동은 범죄도 아니고 괜찮다", "다른 남자들의 동경과 부러움을 받을 것이다" 같은 메시지를 통해 가해자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고 죄책감을 없앤다고 말한다. 요컨대, 성범죄자들은 덜떨어지고 병적인 남성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다움을 가장 극적으로 실천한 남성이라는 게 이들의 논리다.

하지만 본서에서 저자는 전혀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남성들은 원래 유난히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이게 마련이다. 바로 이 문제로 인하여, 국가사회는 체계적인 예절교육과 인성교육을 통해서 남성들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놔야 한다. 남성들에게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하면 안 되고, 무엇은 인륜을 어기는 비윤리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아예 박아놓다시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렌 리지나 스퍼 포스 같은 불행한 사건들은 남성성의 사회화가 아니라, 야만스런 소년들을 문명인으로 교화시키지 못한 교육의 실패라고 봐야 한다. 그 범죄자들로 하여금 "그때 내게 그것이 잘못이라고 따끔하게 혼낸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하고 때늦은 한탄을 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진보적 교육관을 소년들에게 적용함으로써, 마땅히 소년들을 규율해야 할 도덕적 훈육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일련의 사건들은 오히려 어른들이 남자아이들에게 기초적인 도덕 교육을 하지 않고 청소년 테러 행위를 처벌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다"(p.294).

여기서 저자의 관점이 단순한 엄벌주의의 논리가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저자는 본서의 2장에서, 진보적 교육관을 지닌 교육자들이야말로 엄벌주의를 철저하게 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시선만 닿아도 강간죄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처럼, 진보적 교육관의 교육자들은 어린 소년들이 '폭력적 남성성' 을 드러내려 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철저하게 내리눌렀다. 가해자의 가해(?)의 동기나 과거 행실, 위반의 경중은 전혀 융통성 있게 고려되지 않았다. 믿기 힘든 실화로, 2009년델라웨어 주에서는 심지어 만6세 유치원생 남자아이가 자기 소풍 도시락에 캠핑용 다목적 맥가이버칼을 싸 갔다가 45일 동안 소년원에 구금당하기도 했다! 그게 위험한 것인지도 몰랐던 어린아이다운 생각이었을 뿐인데, 그것을 음험한 폭력성의 발현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그 외에도 피자 조각을 권총 모양으로 베어먹고 장난을 치다가 학생부에서 처벌을 받고, 친구와 R&T를 하며 뒤엉켜 놀다가 교장실로 끌려가는 등, 진보적 교육관의 무관용 정책은 소년들을 유독 가혹하게 다루었다. 2007년에 미국에서는 학생 수가 5% 증가하는 동안 정학당한 학생 수는 무려 200% 증가했으며, 그 중의 70%가 남학생이었다고 한다.

소년들을 야생동물처럼 제멋대로 기르는 것이 문제이듯이, 엄벌주의 또한 해결책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상기된 무관용 정책은 "남자아이들에게 해로운 것으로 판명된 잘못된 양 극단"(p.308)의 다른 한쪽 끝일 뿐이다. 저자의 논리는 단순하다. 소년들이 강력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그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을 왜 알려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예방적인 차원에서의 인성교육, 도덕성 교육, 정신교육, 예절교육에 가깝다. 저자는 8장에서 인격강조연맹(Character Counts Coalition)이나 교육학자 캐럴 올레드(C.G.Allred) 등의 인성교육 운동을 소개하면서, 소년들에게 '착하게 사는 것의 중요성' 을 미리 단단히 가르쳐 놓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물론 진보 교육자들은 이런 인성교육 운동에 대해서 "주입식 교육은 자율성과 인간성을 침해하는 세뇌나 마찬가지다!" 라고 항의하겠지만, 저자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남성들이 자율성과 인간성을 발휘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인 '예의' 를 알려주는 교육이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교육만큼은, 선생님이 그렇다면 학생은 무조건 그런 줄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의에 있어서만큼은 타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반응

아마도 본서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타깃팅되어 맹공격을 받은 인물은 《다른 목소리로》와 《Making Connections》의 저자인 캐롤 길리건일 것이다. 길리건이 출판계에 반짝 하고 사라진 인물도 아니고, 2010년대에까지 줄곧 하버드 대학교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학자라는 점 때문에, 길리건에 대한 저자의 공격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특히 본서와 동명으로 저술한 《The Atlantic》 에서의 장문의 칼럼은 저자 소머스가 유명세를 얻게 했다. 이에 대해 길리건 측에서도 입장을 내놓았다. 우선, 저자가 지적한 '양적 엄밀성이 부족한 연구' 라는 점에 대해서는, 연구 질문이 'How often?', 'How many?' 로 시작하는 연구에서나 정당한 비판이 되지만, 자신의 연구 질문은 그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면접법이 더 적절하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자신은 모든 종류의 학문적 비판들을 수용하겠지만, 유독 소머스의 공격만큼은 중상모략적(libelous)이라고 판단한다고 하였다(…). 참고로 현대 심리학에서 길리건의 성과는 '여전히 유의미한 과학적 발견' 까지는 아니지만,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충분히 혁신적인 사상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여겨지고 있다. #관련기사

그렇다면 본서가 소년들에 대해서 서술한 내용은 어떨까? 물론 향후 로이 바우마이스터(R.F.Baumeister)같은 다른 학자들이 《소모되는 남자》와 같은 자기들의 문헌에서 본서의 논리와 상당히 유사한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본서의 주장이 소년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인정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불행히도, 실제로 소년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본서를 의미 있게 취급한다는 징후는 많지 않다. 한 사례로서 《Adolescent Boys》라는 핸드북을 들 수 있다. 서문에서 남성 연구자 마이클 킴멜(M.Kimmel)은 '소년을 구하라' 운동과 '소년을 내버려두라'는 목소리가 모두 틀렸다고 비판했으며,[9] 소년들의 다채롭고 풍부한 삶의 양상이 이 논쟁 속에서 상실된다고 하였다. 소년들이 전문가(pundit)들 사이에서 상대방을 몰아세우고 비판하기 위한 용도로 이용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킴멜은 소머스를 심지어 직접 거론하면서, 이런 류의 사람들은 "소년들의 복지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페미니스트를 상대하는 최신의 무기로 취급했을 뿐"(relatively uninterested in boys' welfare; they were simply the latest weapon against feminists)이라고 말했다. 이 도서는 사춘기 소년들의 정체성 발달, 가족 관계, 교우 관계, 섹슈얼리티와 연애, 학교생활에 대해 학술적으로 논의하는 포괄적 핸드북인데, 소머스의 의견은 해당 도서에서 서문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인용되거나 소개되고 있지 않다. 킴멜뿐 아니라 그 어떤 공저자도 소머스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5. 남은 의문점

6. 생각해 볼 점

흔히 페미니즘 진영에게 본서나 본서의 저자 소머스는 조리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본서는 막연히 백래시라고 매도당하기에는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본서는 남성들에게 전혀 엉뚱한 맥락에서 오용되는 경우도 있으며, 그 메시지가 남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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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arter, S., Waters, P. L., Whitesell, N. R., & Kastelic, D. (1998). Level of voice among female and male high school students: Relational context, support, and gender orientation. Developmental psychology, 34(5), 892-901.[2] Harter, S., Waters, P. L., & Whitesell, N. R. (1997). Lack of voice as a manifestation of false self-behavior among adolescents: The school setting as a stage upon which the drama of authenticity is enacted. Educational psychologist, 32(3), 153-173.[3] Cornwell, C., Mustard, D. B., & Van Parys, J. (2013). Noncognitive skills and the gender disparities in test scores and teacher assessments: Evidence from primary school. Journal of Human resources, 48(1), 236-264.[4] Bybee, J., Kramer, A., & Zigler, E. (1997). Is repression adaptive? Relationships to socioemotional adjustment, academic performance, and self‐image. American Journal of Orthopsychiatry, 67(1), 59-69.[5] Rose, A. J., Schwartz‐Mette, R. A., Smith, R. L., Asher, S. R., Swenson, L. P., Carlson, W., & Waller, E. M. (2012). How girls and boys expect disclosure about problems will make them feel: Implications for friendships. Child development, 83(3), 844-863.[6] 사회비평가 페이 웰든(F.Weldon)이 만든 신조어. 개인이 일상에서 겪는 대부분의 고충과 문제를 타인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통념을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치료주의의 논리가 깔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 토크쇼 및 걸스카우트 단체활동이다. 여기서 개인은 대중 앞에서 솔직하게 자기고백을 하고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대중은 그 개인을 공개적으로 응원하고 지지하며 격려해 준다. 결과적으로 자기 문제를 오픈한 개인은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의 마음 속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7] Halpern, D. F., Eliot, L., Bigler, R. S., Fabes, R. A., Hanish, L. D., Hyde, J., ... & Martin, C. L. (2011). The pseudoscience of single-sex schooling. Science, 333(6050), 1706-1707.[8] Park, H., Behrman, J. R., & Choi, J. (2013). Causal effects of single-sex schools on college entrance exams and college attendance: Random assignment in Seoul high schools. Demography, 50(2), 447-469.[9] Kimmel, M. (2004). Foreward. In N. Way & J. Y. Chu (Eds.), Adolescent boys: Exploring diverse cultures of boyhood (pp. xi-xiii). New York University Press.[10] 우리 사회에는 이런 상황에 대응되는 단어가 존재한다. 잘못된 상황에서의 용기는 무모함이고, 잘못된 상황에서의 명예는 허세이며, 잘못된 상황에서의 규율은 똥군기가 되고, 잘못된 상황에서의 호승심은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한다. 저자가 말하는 긍정적인 남성적 가치라고 해 봐야 결국 그때그때 달라지는 문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