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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시사평론가 박가분 씨의 저서를 다루고 있습니다. 김선희 교수의 저서에 대한 내용은 혐오 미러링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DDD><colcolor=#000> 도서명 | 혐오의 미러링: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
발행일 | 2016년 9월 10일 |
저자 | 박가분 |
출판사 | 바다출판사 |
ISBN | 9788955618761 |
#교보문고 |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일베저장소와 메갈리아, 워마드가 본질적으로 유사한 반사회성을 지니고 있으며, 진보진영은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에 무지하다고 주장하는 비판서이다. 본서는 일견 메갈리아/워마드의 악행을 아카이빙하고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폭로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2장에서 그런 내용이 상당수 소개되긴 하지만, 그것은 본서의 핵심 메시지가 아니다. 본서는 엄연히 인식론적 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인터넷 문화 연구자 로런스 레시그(L.Lessig)의 《Code: Version 2.0》 의 관점을 따르고 있다. 즉, 저자는 본서에서 "왜 혐오발언이 이토록 활개치는가?" 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인터넷 공간이 이용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 이라는 환경적 개입을 강조하는 접근을 취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구태의연하게 "인권의식이 덜 계몽되어서 그렇다" 는 식의 정치적 올바름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본서는 2013년에 앞서 출간되었던 저자의 다른 도서, 《일베의 사상》 의 속편이자 보론이다. 이 도서에서는 일베 이전까지 '어그로' 와 '패드립' 은 인터넷 일각의 문화였으나, 일베로 인하여 인터넷 전반에 널리 확산되어 오프라인의 남성 또래문화에까지 보급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본서는 메갈리아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메갈리아 역시 특정 커뮤니티에 그치지 않고 포털사이트의 곳곳에서, SNS에서 출몰하면서 남성혐오 분위기를 보급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일베를 야갤, 코갤, 구 정사갤, 합필갤 등의 남초 커뮤니티에서 유래한 "놀이화된 백색 테러" 로 볼 수 있듯이, 메갈리아/워마드 역시 남연갤, 해연갤 등의 여초 커뮤니티에서 유래한 "놀이화된 적색 테러"(이상 p.10)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은 억울해한다. 이들은 흔히 "왜 일베에 대해서는 비판의식이 없느냐", "왜 일베의 여혐에는 지금껏 침묵했느냐", "왜 일베는 가만히 놔 두고 우리만 뭐라고 하느냐" 고들 말한다. 그러나 본서는 그런 항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카운터이다! 당장 저자 본인부터가 《일베의 사상》 에서 이미 일베를 철저하게 문제시했으며, 그들의 여성혐오 성향 역시 어물쩍 넘기지 않고 예외 없이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저자의 눈에 비친 메갈리아와 일베가 유사하게 보인다면, 다시 말해서, 이미 일베를 분석해 봤던 사람이 메갈리아를 보았더니 일베와 유사한 점들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면, 막무가내로 일베와 메갈리아는 다르다고 주장하긴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하단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되겠지만, 단순히 "일베나 메갈이나" 식으로 치부하는 피상적인 결론은 저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저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분석을 하는 것이지, 메갈리아를 비난할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이트가 비슷해지게 되었는가?" 라는, 논리적으로 보아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건설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두 사이트는 '공론장이 실종되어 설득 대신 혐오를 일삼게 된 한국사회' 라는 동일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고, '행패와 분탕질이 일상화될 만큼 병적인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 라는 동일한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다. 저자에게 두 사이트의 유사성은 전혀 뜻밖의 현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진보진영이나 학계가 메갈리아/워마드 신드롬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하지 못했는가? 저자는 서론에서 이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성차별의 만연함에 대한 원죄의식 때문에 섣불리 비판하기보다는 입단속을 해야 했다. 둘째, 아직까지 소위 '혐오발언', '증오발언', '헤이트 스피치' 같은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메갈리아/워마드가 남성혐오 사이트라고 선뜻 규정할 수가 없었다. 셋째, 메갈리아/워마드의 혐오발언을 마치 생존전략 내지는 분노의 표현인 것처럼 억지스럽게 정당화하려다 보니 용어가 점점 현학적으로 변해 가게 되었다. 여기에 덤으로, 저자는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를 설득력 있게 분석할 수 있는 연구방법론이 없다고 비판한다. 결국 모두들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해 "자신의 이념적 환상과 기대를 제멋대로 투사한 결과"(p.13) 잘못된 분석만이 양산되었다는 것이다.
본서는 안티페미니즘 도서라고 볼 수 있는가? 적어도 저자는 본서가 그렇게 독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저자는 단지 본서의 초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페미니즘에만 비판을 가할 뿐이며, 페미니즘이 불평등한 가부장제를 공격하려는 이념이라면 저자 또한 얼마든지 동조할 수 있다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한다. 2장에서도 저자는 "여성혐오 발언은 한참 전에 이미 위험 수준을 넘었다"(p.101)면서 명확하게 문제시하고 있고, 심지어 미러링에 대해서는 '한남충', '6.9' 같은 용어 정도라면 "일종의 정당방위"(p.95)라고까지 인정했다! 본서라면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페미니스트들이나, 저자를 페미니즘과의 젠더전(gender戰)의 최전선에 내세우려는 일부 남성들이나, 저자의 이러한 스탠스에 대해서는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가부장제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이 현실에 대한 오도된 분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본서가 지적으로 게을렀던 과거의 자기 자신, 그리고 진보진영 전체에 대한 내부고발이자 자아비판이라고 그 성격을 규정짓는다. 쉽게 말하면, 본서는 흔히 생각할 법한 "저놈들 진짜 문제야" 의 메시지를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서는 "우리들 진짜 문제였어" 라고 괴롭게 고백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이처럼 페미니즘 이슈를 남의 문제처럼 취급하지 않고 해당 이슈를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저술의도는 저자의 차기작인 《포비아 페미니즘》 에서 좀 더 구체화되고 있다.
저자의 경우 해당 문서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으며, 포비아 페미니즘 문서에서도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으므로 중복된 소개는 생략할 것이다. 다만 본서에서 유독 드러나는 것은, 인터넷 문화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 저자가 논의의 흐름을 바꾸는 답을 내놓기 위해서 고민한 흔적이다. 저자는 교과서 같은 "따라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인권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혐오발언을 더 엄히 처벌해야 한다" 같은 뻔한 답을 내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그 정도 조언만을 기대하고 본서를 펼친 독자들은 그 이상의 성과를 얻어갈 수 있다. 그 외에 본서에서 제공되는 저자의 사소한 디테일로서, 저자는 루리웹 유머게시판에서 주로 활동한다고 한다(…).
참고로, 본서에서는 혐오발언이라는 단어를 가장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수준에서 정의하고자 하였다. 2007년경의 차별금지법 관련 논란 당시에, 차별은 "개인이나 집단에 대하여 신체적 고통을 가하거나 수치심, 모욕감, 두려움 등 정신적 고통을 주는 일체의 행위" 로 정의되었는데, 본서에서 혐오발언이 차별적이라고 말할 때는 이 맥락을 따를 것이라고 한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1부. 메갈리아 신화를 넘어서
- 1장: 다르면서도 비슷한 일베와 메갈리아
- 2장: 사이버폭력과 메갈리아의 사건사고
- 2부. 혐오의 시대와 돌팔이 의사
- 3장: 사람들은 왜 인터넷에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할까
- 4장: 인권 담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 5장: 충격요법은 효과가 없다
- 6장: 혐오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흔히 메갈리아/워마드는 페미니즘의 정치적 실천이자 대항폭력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그 본질은 일베저장소의 반사회성과 다르지 않다.
- 이런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는, 메갈리아/워마드에 옹호적인 진보 논객들이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의 특수성에 흔히 무지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혐오 발언을 줄이려면 인권의식의 고취를 제안할 것이 아니라 인터넷 공간 자체를 혐오의 모니터링이 가능하게 바꾸어 가야 한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메갈리아 측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페미니즘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퍼뜨리고 있는 소위 '건국신화' 에 대해, 저자가 그것이 왜 틀렸다고 반박하는지를 소개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메갈리아의 유희성을 언급하는 다른 문헌인 《혐오 미러링》 과 본서를 대조하면서, 어떤 부분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달라지게 되는지를 살펴보겠다. 다음으로는 저자가 메갈리아/워마드에 얽힌 담론에 대해서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를 '인터넷 커뮤니티 인식론' 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할 것이다.- 1. 다르면서도 비슷한 일베와 메갈리아
메갈리아는 자신들이 메르스 갤러리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분노를 미러링으로 승화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건국신화적 포장에 불과하다. 실상 메갈리아는 남연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의 목적 없는 유희적 남성혐오와 일베에서 수입한 용어들을 뒤늦게 정당화했을 뿐이다. 동일한 배경을 갖고 있는 이상, 일베와 메갈리아는 매우 많은 유사점을 가지며, 심지어 자신들의 혐오에 자부심을 느끼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 2. 사이버폭력과 메갈리아의 사건사고
묻지마 폭력에 가까운 일베와는 달리, 메갈리아는 거창한 대의명분으로 정당화하는데, 이는 백색테러와 적색테러의 전형적인 양상이기도 하다. 이들이 재미 삼아 무차별적으로 벌이는 난반사적 남성혐오의 피해는, 연예인들과 웹툰 작가들, 성 소수자들과 장애인, 어린이들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이들은 비장한 정치적 대의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며, 악성 안티팬 활동 및 금기 위반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고자 할 뿐임을 알 수 있다.
- 3. 사람들은 왜 인터넷에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할까
흔히 메갈리아는 대안적이고 수평적인 정치 공론장이라는 찬사를 받지만, 인터넷 환경은 정작 공론장으로서의 어떠한 요건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메갈리아가 여성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들 것이라는 낙관 역시, 그들의 원자화된 정치적 의사표현 양상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재검토되어야만 한다. 인터넷 문화 연구는 왜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보다 더 부도덕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그 이유는 사이트의 환경적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 4. 인권 담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결혼과 연애를 둘러싼 젠더 갈등의 원인을 흔히 성비불균형에서 찾곤 하지만, 진짜 원인은 남녀 모두 결혼을 불공정거래로 여긴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또래문화는 너무나 단절되어 있어서, 이런 문제를 남녀 간에 나누고 소통함으로써 적절히 대처할 역량을 보장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조건적인 인권 계몽의식이나 정치적 올바름만을 강요하는 잘못된 방법에만 의지하고 있다.
- 5. 충격요법은 효과가 없다
진보진영은 전통적으로 충격요법을 통한 의식화를 도모해 왔으나, 그 결과는 공론장의 붕괴와 맹목적 대중, 냉소적 반동집단의 출현으로 되돌아왔다. 진보진영은 어떤 끔찍한 사건을 개인의 일상과 연결시키는 전형화 전략을 사용하지만, 이는 현실을 왜곡할뿐더러 사건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게 한다. 이와 같은 알레고리화는 반대파를 냉혈한으로 규정하는 근거로 공감능력을 들지만, 이는 공감이 아니라 단지 피해자에게 투사한 자기연민에 불과하다.
- 6. 혐오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지금까지도 메갈리아/워마드는 변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진보진영은 빈약한 인권의식을 규탄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정당화 및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혐오 발언의 원인은 부족한 인권의식 때문이 아니며, 인권에 대해서 다 이해하면서도 그런 가치를 비웃고 조롱하는 냉소주의 때문이다. 따라서 혐오 발언을 줄이려면, 계몽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아키텍처', 즉 인터넷 환경을 변화시켜서 모두가 혐오 수준을 모니터링할 수 있어야 한다.
2.2. 메갈리아 건국신화 바로잡기
메갈리아/워마드에 호의적인 여론에 따르면, 메갈리아와 그들의 콘텐츠인 "미러링" 은 단순히 반사회적인 성격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들은 메갈리아야말로 장기간 이어져 온 인터넷 여성혐오 풍조에 대항하는 거의 유일한 사이트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미러링은 일베의 문제적 언행을 모방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각성시키는 사회 운동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들은 메갈리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비슷한 요지로 설명한다. 태초에 여성혐오가 있었고, 메르스 사태 당시 격리를 거부했다고 알려진 여성들이 여성혐오적인 비난을 받자, 분노한 여성들이 메르스 갤러리로 몰려가서 '발랄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하지만 저자는 이런 이야기가 "메갈리아의 건국신화"(p.30)라면서, 선량한 진보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자못 비장한(?) 서사를 곧이곧대로 신뢰하는 순진함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어떤 집단이나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의 첫 시작 이야기를 거창하게 치장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나라나 그런 거창한 건국신화는 다 가지고 있으며, 메갈리아 또한 후대에 인위적으로 포장해 놓은 '장엄한 이야기' 를 똑같이 갖고 있다. 다시 말해, 메갈리아는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진보 운동의 성격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멋진 정당화' 는 메갈리아/워마드를 잘 알지 못하는 외부에서 소통되었으며, 최소한 메갈리아 외부로부터 내부로 역수입되었다. 마치 국가의 행정부가 그 대변인을 따로 두는 것처럼, 기업체가 대외홍보 전담부서를 따로 두는 것처럼, 메갈리아 역시 (오늘날 '메갈리아4' 라고 알려진) 대외 홍보용 SNS 계정들을 갖고 있었다. 이들 계정주들이 과연 메갈리아 내부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혐오발언들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런 계정들은 그 내부의 혐오발언들과 범죄모의는 은폐한 채로 페미니즘의 대의를 빙자하여 거창한 합리화를 늘어놓았다. 저자에 따르면, "미러링이라는 명분은 메르스 갤러리보다는 애초에 메갈리아 페이지에서 발명되었다고 해도 좋다"(p.54). 하지만 처음부터 그것은 미러링이 아니라, 남연갤에서 출발한 '남성혐오 분탕질' 에 불과했다. 단지, 남연갤을 알지 못하고 뒤늦게 유입된 여성들이 그것을 어떻게든 합리화하기 위해 독자연구를 했을 뿐이었다.
사실, 메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르스 갤러리가 아니라 남자 연예인 갤러리를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1장에서 DC 내부 검색을 통해서, 메갈리아가 탄생한 계기는 남연갤 측의 유희적 분탕질이었지, 메르스 사태 당시의 여성혐오 여론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간순으로 입증해 보인다.
- ~ 2015년 5월 25일 : 다양한 팬덤이 실시간으로 충돌하는 남연갤에서는 기본적으로 상호비존중 문화가 존재했다. 팬덤 간의 비방이나 루머 유포, 고소고발 사건 때문에 자체적으로 '싸패력' 이나 '타퀴' 같은 은어들이 생겨났을 정도로 분위기는 흉흉했다. 마치 일베가 오유에 대해서 '씹선비' 라며 멸시하듯이, 남연갤은 상호존중을 강조하는 다른 여초 커뮤니티들을 억압적이고 가식적이라고 여겼다. 추후 나타나게 될 남성혐오 성향 또한 거창한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기존의 상호비존중 문화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 2015년 5월 26일 : 강된장남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여초 커뮤니티가 일베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 계기와 비슷하게 남성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즉, 자기 커뮤니티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어그로를 끄는 유입 이용자에 대한 반감이 그것이었다. 다른 여초 커뮤니티의 경우에는 그들이 '일베' 로 스스로를 소개했을 따름이었지만, 강된장남 사건에서 그 남성은 남연갤러들에게 자기 자신을 '남성' 으로 소개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김치남', '실잦', '상폐남' 같은 용어들은 남연갤러들에게 낯설지 않았다.
- 2015년 5월 29일 11시~13시 : 메르스 사태가 이슈화되었다. 이 무렵, 강된장남 사건으로 남성에 대한 적개심이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남연갤에서는 남성혐오적인 감염자 비난 게시물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첫 혐오 게시물 주소
- 2015년 5월 29일 18시 : DC인사이드에 메르스 갤러리가 생성되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남연갤은 마음껏 남성혐오 '분탕질' 을 칠 수 있는 놀이공간을 간절히 원했고, 마침 메르스 갤러리가 열리자 재밌겠다며 즐거워했다. 이때의 남연갤러들은 "미러링이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혐오하는 특정 남성들을 욕하고 비난하는 재미가 우선"(p.48)이었다. 당시 남연갤러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명확히 '남성혐오' 라고 반복하여 자칭하고 있었다.
- 2015년 5월 29일 18시 13분 : 메르스 갤러리에서 저자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젠더 관련 혐오발언이 게시되었고, 그것은 남성혐오를 담고 있었다. #첫 혐오 게시물 주소 비슷한 시각, 남혐 게시물을 게시한 이용자와 동일인물로 보이는 이용자가 남연갤 측에 '포탈' 을 열었다. #해당 게시물 주소
- 2015년 5월 30일 : 홍콩을 여행한 여성들의 격리수용 거부 소식이 뉴스로 전파되었다. 해당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여성혐오 발언은 바로 이때서야 시작되었다. 이처럼, 남연갤의 메갤 점령과 한국인 여성의 격리수용 거부로 인한 여혐 풍조는 서로 별개의 사건이지만, "누가, 언제부터, 무슨 동기로 크게 관련이 없는 저 두 사건을 '미러링' 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관련짓기 시작했느냐"(p.49)의 의문은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다.
- 2015년 6월경 : 페이스북 등에 새롭게 개설된 메갈리아 홍보 계정들을 통하여 '미러링' 이라는 용례가 대중화되었다. 이를 통해 인터넷 문화에 무지했던 외부 평론가들과 언론인들이 메갈리아에 대해 긍정적인 첫인상을 갖게 되고 그들의 대의명분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메갈리아 이용자들은 외부에서 멋대로 붙여놓은 '미러링' 이라는 이상한 용어에 대해 황당해하면서 비웃었다.
최초 남연갤러들과 메갈리아 이용자들은 자신들의 혐오발언을 소비하기 위한 자원으로서 일베저장소의 콘텐츠들까지 끌어다가 단어만 치환해서 활용했다. 처음부터 메갈리아의 '미러링' 언어는 남연갤의 것이었고, 남연갤의 언어는 일베의 것이었다. 저자가 《일베의 사상》 에서 분석했듯이 일베는 혐오발언에 대한 권리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메갈리아 역시 혐오발언에 대한 권리의식을 정확히 똑같이 드러냈다. 일베가 선호하는 신상털기와 스포츠화된 타인 모욕, 공론보다는 화력과시를 우선시하는 방법론이라는 병리적인 인터넷 문화를 메갈리아가 고스란히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베가 당초 DC측의 코갤, 야갤, 합필갤, 구 정사갤 등에서 생산된 (유머로 포장된) 혐오자료들을 아카이빙하기 위해 출발했듯이, 메갈리아 역시 메갤과 남연갤 측의 혐오자료를 아카이빙하기 위해 출발했다. 혐오자료의 데이터베이스라는 두 사이트의 출발점은, 그 이용자들이 자신들의 혐오발언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소속감과 자부심마저 갖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저자 왈, "혐오 발언의 신조어들을 끝없이 생성해내는 능력을 자신들의 '자부심' 으로 삼는 곳은 지금까지 일베와 메갈리아/워마드 두 곳밖에 없다"(p.62). 처음에 저자는 《일베의 사상》 에서 일베를 가리켜, '타인을 설득할 힘을 잃은 촛불시민들의 거울쌍' 이라고 말했다. 온라인에서 진지한 설득과 토론이 부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일베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갈리아를 분석한 이후, 저자는 생각을 바꾸어서 일베의 거울쌍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촛불시민이 아니라 메갈리아라고 고쳐 말했다.
더 지독한 것은, 심지어 메갈리아/워마드는 그 일베보다도 더 심각한 지점들도 있다는 것이다. 우선 언급할 만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남초/여초 커뮤니티나, 심지어 일베 역시, 그 커뮤니티의 구성을 잘 살펴보면 혐오와는 무관한 일상적 취미나 화제를 공유하는 공간이 있다. 그런 대화가 오가다가 우연히 성대결 떡밥이 터지거나 심야시간이 되면 혐오발언들이 나타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런데 메갈리아/워마드는 전적으로 혐오발언 단 하나만을 위해 탄생했고 혐오발언만을 통해서 운영되어 왔다. 저자에 따르면, 사이트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 일베조차 평범한 여초 커뮤니티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일 정도이다.
그보다 더 저자가 문제시하는 것은, 일베는 폭력범이라면 메갈리아/워마드는 지능범이라는 데 있다. 저자는 이 맥락에서 일베가 저지르는 반사회적 행위들을 백색테러에, 메갈리아/워마드가 저지르는 반사회적 행위들을 적색 테러에 비유한다. 어느 쪽에서 저질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이 테러리즘이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백색테러를 저지르는 극우파 극단주의자들은 은밀한 납치나 감금, 폭행 등의 묻지마 폭력을 선호한다. 자신의 범죄행위를 정당화하지 않는 백색테러의 특징은 일베와도 상통한다. 그런데 반대로 적색테러를 저지르는 극좌파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의 폭력에 대해 대중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민재판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 방법론으로 대항폭력을 용인하며, 이 때문에 '약자의 폭력' 이 벌어지더라도 섣불리 문제시하지 못하거나 도리어 옹호하기도 한다. 저자는 그 사례로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해 모리스 메를로퐁티(M.Merleau-Ponty)가 옹호했던 것을 들고 있다. 그래서 비판의 날을 세우기가 백색테러보다 훨씬 어려워진다. 이처럼 도덕적 대의명분으로 당당하게 폭력을 저지르는 적색테러의 특징은 메갈리아/워마드와 상통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런 대항폭력은 때로 기득권이 아니라 다른 약자들을 향한다. 그 결과, 엉뚱하게도 극우세력이 그런 극좌 폭력행위에 지지를 표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처음에는 메갈리아/워마드 본인들조차 그런 대중적 정당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미러링에 동정적인 페미니즘 진영과, 심지어 자신들을 향한 모욕조차 겸허하게 수용하려는 남페미들이 "미러링은 진심으로 남성을 혐오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언어적 전시(display) 내지 패러디(parody)일 뿐이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어쩔 수 없는 자기방어 수단" 이라며 애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안, 메갈리아/워마드 이용자들은 그런 메시지에 대해 쌀쌀맞은 비웃음만을 보낼 뿐이었다. 저자의 캡처 자료들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들이 '재미삼아' 남혐을 하는 것이 맞다고 당당하게 주장했으며, 왜 자기들의 혐오를 혐오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도리어 반문했고, 자신들이 남성들을 정말 진심을 담아 저주하고 모욕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본서 출간 이후로는 메갈리아/워마드가 점차로 정치화되면서 자기합리화 논변들을 역수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저자가 본서에서 밝혔듯, 이는 그저 진보진영의 언더도그마 의식을 냉소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외부의 지지자들은 미러링이 소위 '충격 요법' 의 긍정적인 사회적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당초 충격 요법은 도널드 캐머런(D.E.Cameron)이라는 정신의학자가 제기했던 '뇌 리셋' 치료법으로, 인간을 극단적인 충격에 노출시키면 기존의 지식과 인식이 백지로 되돌아가면서 타인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점에 착안한 CIA가 남미 등지에서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하는 테크닉으로 전수하기도 했다고. 그런데 문제는, "충격요법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p.211). 저자는 그 사례로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거론한다. 사건 당시 반미 운동가들은 사고현장을 모자이크 없이 촬영한 끔찍한 사진들을 대중에게 마구 퍼뜨렸는데, 그 결과 대중은 "미군의 계획적인 범죄였다!" 는 음모론에 널리 설득되었다는 것이다. 즉, 심리적 충격은 개선이 아니라 퇴행을 낳으며, 오히려 혐오발언을 증가시키고, 대중에게 맹목성을 퍼뜨린다. 그 당시에 "양키놈들 딸래미 애미 다 죽여!" 라고 외치는 노래가사가 호응을 얻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중의 일각에서는 거꾸로 반동집단이 나타나기도 한다. 광우병 논란을 예로 들면, 당시 확산되었던 온갖 괴담들은 훗날 일베저장소의 자기합리화에 영향을 주었다. 충격적인 메시지는 공론장을 훼손시키고 공론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킨다. 결과적으로, 공론 자체를 조롱하고 냉소하는 반동집단의 출현을 막을 길이 없어진다.
결국 종합적으로 보자면, 저자의 요지는 소위 '메갈리아 건국신화' 라는 것이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인터넷 커뮤니티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에게 메갈리아/워마드를 홍보하기 위해 억지로 해석되고 끼워맞춰진 합리화의 서사라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에 이미 익숙하고 사이버 공간의 사건사고에 대해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저놈들도 일베랑 똑같네" 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뒤늦게 끼어들어서는, 메갈리아 측의 억지스러운 합리화 논리만 접한 상태로, 그 네티즌들에게 인권의식이 없다면서 훈계하고 가르치려 드는 상황인 것이다.[1] 이렇게 하여, 메갈리아의 고삐 풀린 반사회성에 브레이크를 걸어 줄 수 있는 가장 유망한 집단이 메갈리아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회적 방임의 결과는 점차 과격화되는 혐오발언으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저자는 미러링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의 언어적 폭력 때문이 아니라, 지금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내버려두었을 때 그 마지막에 어떤 파국이 도래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우려한다.
2.2.1. 《혐오 미러링》 과의 비교
미러링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본서와 비교할 만한 도서로 김선희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의 《혐오 미러링》 을 들 수 있다. 두 도서는 서로 대비해 볼 때 의견이 모이는 지점도 있고 극적으로 달라지는 지점도 존재한다. 이를 표의 형태로 정리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rowcolor=#000> 《혐오의 미러링》 (박가분 저) | 《혐오 미러링》 (김선희 저) |
Q. 분석 대상은 무엇인가? | |
메갈리아/워마드 | 워마드 |
Q. 인식론적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 | |
아키텍처 이론 by 로런스 퍼시그 | 놀이 이론 by 요한 하위징아 |
Q. 그 분석 대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 |
남성혐오 사이트 | 영페미들의 주체성 실천 장소 |
Q. 그 분석 대상을 페미니즘으로 볼 수 있는가? | |
NO. 본인들부터 그런 대의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 | YES. 성차별의 존재를 인식하며, 이를 없애려 하기 때문 |
Q. 그 분석 대상은 왜 미러링을 시도하는가? | |
그냥 재미삼아서, 대의명분 없이 | 페미니즘의 전략적 수단으로서 |
Q. 미러링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 |
유희성, 놀이, 가벼움 | |
Q. 미러링의 사회정치적 결과는? | |
과격화되는 적색테러임에도 옹호 받음 | 발화자 여성 간의 정치적 연대감을 형성 |
Q. 미러링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 |
부정적임. 비윤리적이며 정당화될 수도 없음 | |
Q. 미러링의 현실적 미래는? | |
지금보다 더 크고 예상할 수 없는 사회적 파국 | 놀이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니, 그때 윤리적 대가를 치르게 될 것 |
Q. 상황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
혐오의 모니터링이 가능하도록 인터넷 환경의 '아키텍처' 를 개조해야 함 | 그들 내부로부터 새로운 변화의 모색이 나타나야 함 |
2.3. 인터넷 커뮤니티 : 어떻게 인식하고 개입할 것인가?
"메갈리아/워마드 신드롬을 여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려는 시도들이 최근까지 있었지만, 이같은 시도는 일부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슬픈 '짝사랑' 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작 메갈리아/워마드 유저 대다수는 운동권과 진보진영에 대한 정치 혐오 정서를 기본적으로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다가가고자 한 대중의 특성과 정서 그리고 인터넷 공간의 특성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 p.169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 p.169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지난 2016년 6월 2일, 《여성신문》 에 실린 한 기사에서 이나영 교수는 메갈리아를 "대안적 하위-공론장" 이라고 지칭했다. 저자에 따르면,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를 늘 '정치적 주체의 탄생' 이니, '새로운 수평적 공론장의 출현' 이니 하면서 환영하던 것은 이슈의 종류를 떠나서 기성 비평계의 오랜 관행이 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분석에 대해 근본적인 의구심을 표한다. "이것은 대부분 현실을 분석했다기보다는 자신들이 믿고자 하는 이론에 입각해서 현실을 미화하는 성격이 강한 담론"(p.143)이라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딱히 진보라서, 페미니스트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념의 문제 이전에, 그들은 인터넷이라는 환경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모르다 보니 뭔가 좋아 보이는 사이트는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뭔가 나빠 보이는 사이트는 지나치게 악마화할 뿐이다.
저자는 일본의 유명한 정치철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논변을 빌려온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개인이 정치문제에 대해서 원자화(atomization)될 때 공익에 무관심하면서도 종종 열광적인 정치 참여를 보인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정치에 대해 냉소하다가도 갑작스럽게 기득권층을 향해 죽창드립을 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원자화된 개인이 드러내는 정치적 주체화는 극렬한 호불호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일종의 '정치인 팬덤 문화' 를 드러내고, 자신들이 싫어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를 드러낼 뿐이다. 그 이상으로 생산적인 대안이나 비전을 추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기성 제도권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통제하기도 힘들고 영 써먹지도 못할 부화뇌동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기성 제도권 정치와 메갈리아가 서로 충돌한 사례로 소위 '녹색당 사태' 를 예로 들고 있다. 페미니즘을 자신들의 정치적 비전에 포함시키는 녹색당은 메갈리아 사이트를 대상으로 당원 모집을 시도했지만, 이용자들은 오히려 녹색당 측을 맹렬하게 조롱하면서 축출해 버렸다. 그 이후로도 이들은 소위 '꿘충' 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제도권 정계와의 접점을 최대한으로 차단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로, 저자는 《우리는 메갈리안》 텀블벅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다. 진보 성향의 남성 언론인 '루시우' 씨가 메갈리아에게 공정한 사회 분위기를 만들겠다면서 책을 출판해서 옹호해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메갈리아는 이를 전혀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험한 악플 도배로 대답했으며, 당사자의 페이스북 계정에는 '재기해' 가 잇달았다(…). 이렇게 조롱당하고도 제도권 진보 진영은 메갈리아에 대한 호의를 여전히 버리지 못한다. 이를 가리켜서 저자는 "슬픈 짝사랑" 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진보 진영이 막연히 낙관하는 바 "인터넷은 개방적이고 공개적이며 수평적이고, 따라서 새 시대의 새로운 공론장이 될 수 있다" 는 관측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메갈리아/워마드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요구했던 '공론장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4가지 요건' 중 어떤 요건조차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공론장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메갈리아/워마드에는 수많은 비하적이고 혐오적인 은어들이 있으니 이해 가능성(Verstaendlichkeit)에서도 불합격이다. 공론장은 사실에 기초한 대화가 오가야 하는데, 메갈리아/워마드는 남혐의 확산을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의혹과 루머와 '주작' 조차 거리낌없이 지어내는 곳이니 진리성(Wahrheit)에서도 불합격이다. 공론장은 같은 도덕규범을 공유해야 하는데, 메갈리아/워마드는 "도덕 버려" 라고 당당하게 외치니 정당성(Richtigkeit)에서도 불합격이다. 마지막으로, 공론장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호의를 갖추어 대해야 하는데, 메갈리아/워마드는 패드립과 어그로가 판을 치고 있으니 진실성(Wahrhaftigkeit)에서도 불합격이다. 요컨대, 메갈리아/워마드는 어떻게 보더라도 공론장이 못 된다.
진보 진영이 그토록 부르짖는 정치적 올바름(이하 PC; 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개념 역시 그런 맥락에서 과도하게 요청되는 개념이다. 저자는 PC가 문제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진보 진영을 강박적으로 억압을 색출해야만 하는 '슬픈 검열관' 으로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심화시킬 뿐이라고 비판한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런 문제들은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 있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또래문화' 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온라인 커뮤니티를 또래문화의 놀이공간으로 삼게 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인터넷은 갈등을 조율하는 공론장으로서는 철저히 낙제점이다. 이 상황에서 진보 진영이 내놓는 PC라는 해법을 적용하게 된다면? 저자는 PC로 인해 공론이 파탄을 일으키고 아무런 대안이나 전망을 내놓지 못한 채 개인 간의 단절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소위 '언PC한' 사람에게는 "블락합니다", "차단합니다", "언팔합니다" 이상의 대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슬라보예 지젝(S.Zizek)이 PC를 비판하면서 지적했듯이, 포스트모던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다른 게 아니라 냉소주의이며, 이들에게 PC는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저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인권의식을 키우자" 는 진보진영의 뻔한 메시지에 대해 비판적인 것이다. 여기서 지젝은 냉소를 끝내기 위해 진짜 적을 글로벌 자본주의로 지정해 주지만, 사실 현대사회의 문제는 진짜 적이 누구인지, 전선이 어디인지 알기 어렵다는 데 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혐오발언을 하면서 자신이 진짜 적과 싸우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들이 혐오발언이 나쁘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자신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혐오발언을 동원할 자격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의 네티즌들은 더 이상, 인권교육을 접한다고 해서 "아하~ 그런 표현은 쓰면 안 되는 거였군요~!" 라고 탄성을 지르는(…) 순진한 존재가 아니다. PC는 무너진 인터넷 세계를 치유할 해독제가 되지 못한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터넷 상에서 혐오 발언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올바름이나 인권 규범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짓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그럼에도 나는 이런 짓을 계속할 거야' 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 p.239
- p.239
마찬가지로, 불구가 되어 버린 인터넷 커뮤니티의 공론 기능은 소위 '공감 능력' 을 전가의 보도마냥 휘두르게 만들었다. 어딘가에서 범죄가 발생했을 때, 이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불안은 적절한 숙의적 절차를 통해 해소되어야 했다. 하지만 진보진영은 지금껏 "그 끔찍한 사건은 지금 여러분이 일상에서 겪는 어떤 사건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고 외쳤다. 저자는 이런 도식을 "범죄의 알레고리화"(p.223)라고 부른다. 어떤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기 위해, 진보진영은 매번 반대파를 '공감능력이 빻은' 냉혈한 취급을 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모르냐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느냐고, 강남역 피해자의 공포를 짐작이나 하냐고 몰아붙인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공감도, 위로도, 연대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피해자에게 멋대로 투사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연민일 뿐이다. 강남역 사건에 대해서는 절대적 공감을 요구하면서도, 구의역 사건에 대해서는 "재기했으니 축하할 일이네" 라며 조롱했던 워마드가 바로 그 단적인 사례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단톡방 성희롱 사건' 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제안한다. 물론, 가해자들이 잘했다고 감싸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또래끼리 서로를 공유하고 대화할 소재를 찾지 못한 남학생들이 여학우에 대한 음담패설을 통해서만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 경각심을 갖자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더 나은 또래 놀이문화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면 안 돼" 라고 따끔하게 주의를 주는 또래압력(peer pressure)이 작용해야 한다. 이와 같은 또래 간의 건강한 문제해결 규칙이 실종되어 버린 대한민국의 현실이야말로 문제인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저자는 각종 대학마다 활성화되어 있는 '대나무숲에서 알립니다' 계정에 대해서도 문제시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일상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그 문제에 당당하게 대처하는 올바른 힘을 기르지 못한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로', '고발', '공론화' 에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무조건 PC함이나 인권의식 같은 계몽주의적인 관점으로 끌고 가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얘기다.
저자가 위와 같이 진단하듯이, 인터넷 세계는 무슨 아름다운(?) 공론장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전쟁터와도 같은 총체적 난국에 가까워 보인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디씨》 라는 도서를 먼저 소개한다. 이 도서는 문화인류학을 배경으로 DC인사이드를 분석한 사례인데, 남초 갤러리의 '야짤', 여초 갤러리의 '팬픽' 과 같은 상호 호혜물의 증여와 답례를 통해서 인터넷 사회가 유지된다는 제안이 골자이다. 저자는 여기서, 그 호혜성이 외부로는 마치 부족 간의 전쟁과도 같은 극렬한 적대성으로 나타난다고 비판한다. 남초 사이트가 적대 사이트를 경계할 때, 그리고 여초 사이트가 적대 팬덤을 경계할 때, 어디서나 똑같이 '보초서기', '화력집중' 같은 군사 용어들이 범람한다. 이런 전쟁이 장기화되면 결국 역사적인 앙금이 되어 "과거에 그런 짓을 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는 도덕적 면책이 나타나고, 더 나아가면 일베나 메갈리아/워마드처럼 커뮤니티 간의 전쟁은 이제 거의 축제 내지는 의례화된 놀이가 되어 버린다. 어찌보면 실로 인류학적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놀이의 "화력지원" 이벤트는 대안적 공론장 따위가 아니라 그저 "화력과시의 민주주의"(p.162)일 뿐이고, 더 많은 민폐를 끼친 집단은 도리어 '사이다' 라며 자축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는 공론장의 붕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개판 5분 전(…)인 인터넷 세상을 불필요한 낭만화 없이 냉정하게 인식하려면, 어디서부터 인식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저자는 '현실의 일베는 얌전하다' 는 데에 먼저 초점을 맞춘다. 《시사IN》 과 같은 매체들에서 뜻밖이라며 알린 사실 중 하나는, 막상 일베 회원들과 인터뷰를 해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반듯하고, 차분하고, 성실하며, 책임감 있고, 자신의 정견을 조곤조곤 야무지게 개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일베뿐만 아니라 메갈리아/워마드도 마찬가지고, 저 유럽의 네오나치들도 현실에서 막상 마이크를 들이대면 똑같이 나타나는 반응이다. 겉으로는 다들 사회 양극화니, 경제 불안정이니, 차별 반대니 하면서 이성적이고 그럴싸한 이유를 든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바람직성 편향(social desirability bias)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인터뷰로는 그들이 어째서 그 끔찍한 혐오발언을 '즐겼는지는' 알 수 없게 된다. 혐오발언의 범람을 문제시하려면, 우선 질문부터가 바뀌어야 한다. 저자 왈, "질문의 초점은 왜 사람들이 일상에서는 하지 않는 짓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하게 되는지에 맞춰져야 한다"(p.151).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인식하기 위한 이론적 조망으로 로런스 레시그의 아키텍처(architecture) 개념을 빌려온다. 이 인식론에 따르면, 인터넷에서의 사회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환경적 조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터넷 사이트의 플랫폼 디자인에 따라서 그 사용자들의 언어와 생각이 방향지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아키텍처는 사용자들이 커뮤니티에 몰입하고 동질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예를 들어, DC인사이드의 경우 '힛갤' 시스템이 있으며, 아프리카TV는 '별풍선' 시스템이 있고, 일베저장소 또한 '레벨'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것들 전부가, 그 사용자들이 커뮤니티에 열성적으로 몰입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카페 같은 모임일지라도 만약 게시물 옆 댓글의 숫자가 빨간색 볼드체로 표시된다면, 전반적인 댓글의 양은 훨씬 증가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식으로, 플랫폼의 설계가 이용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런 영향은 실제로 아키텍처의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여성시대에는 '대빵' 이라는 존재가 있고, DC인사이드에는 '윾식대장' 이라는 존재가 있다. 아키텍처 속에서 권력은 결국 그것을 설계한 서버 관리자, 사이트 운영자, 게시판 운영자 순으로 배분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혐오발언의 범람을 막기 위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이 잡히게 된다. 저자는 6장에서 먼저 "혐오발언의 80%는 그 동조자들의 20%에 의해서 게시된다" 는 진술을 참인 것이라고 전제한 뒤, 따라서 소수의 악플러들을 아키텍처에 입각하여 관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관리의 권력은 공권력을 빌리지 않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또한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을 쓰고 노력한다면, 그 사용자들의 생각과 행동은 순식간에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 개, 돼지처럼 행동하도록 만드는 환경을 내버려두면서 인권 규범 혹은 '차이' 와 '정체성' 그리고 '욕망' 의 권리를 내세우는 담론들은 기본적으로 위선에 불과하다"(pp.245-246).
저자는 자신의 제안이 웹 디자인 분야에는 아마추어적인 것이라고 겸손하게 물러나면서, 당장 취해 볼 수 있는 몇 가지의 환경적 개선들을 조언한다. 우선, 혐오발언의 빈도와 장소에 대해 모니터링한 결과를 공개할 수 있다. 마치 오늘날 미세먼지 농도가 길거리 전광판에 게시되는 것처럼, 인터넷 공간에서 포털 사이트와 같이 사람들이 모여 붐비는 장소마다 '오늘의 혐오지수' 같은 것으로 수치화된 자료가 실시간으로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공중(public)의 감시는 결과적으로 화력지원과 같은 병리적인 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 또 다른 것으로, 특정 커뮤니티에서 소위 '포탈' 을 타고 와서 댓글란을 혐오발언으로 도배하는 것 역시, 아키텍처 수준에서 대응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예를 들면, 악플도배를 감지하여 자동으로 경고표시를 띄우거나, 뉴스기사 유입경로를 자동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가 취해진다면, 그 사회적인 개선의 효과는 분명하리라는 것이다. 적어도, 무분별하게 "올바르지 못하다" 는 딱지를 붙이거나 "공감능력이 빻았다" 고 낙인을 찍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3. 남은 의문점
- 메갈리아/워마드의 놀이는 과연 끝날 것인가?
위에서 비교했듯이 본서는 《혐오 미러링》 이라는 도서와 상당히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해당 도서에서 김선희(2018)는 놀이 이론을 바탕으로, 놀이는 언젠가는 반드시 끝날 것이며, 실제로 워마드의 놀이가 끝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2018년 혜화역 시위 이후로 워마드의 놀이는 끝났고, 더욱 비장하고 거창한 정치적 실천이 그 자리를 채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본서는 일베와 메갈리아/워마드가 갖고 있는 유희적 분위기를 마치 하나의 상수인 것처럼 취급함으로써 그 동학(dynamics)의 가능성을 간과한다. 즉, 본서의 논리대로라면 일베, 메갈리아, 워마드는 마치 영원히 '즐거운 혐오발언 놀이' 를 이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져 왔다. 한때 녹색당을 극렬히 배척하던 넷페미들은, 이제는 (저자의 예측과는 달리) 우리공화당과 친박세력에 대한 지지를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이는 본서가 2016년에 쓰여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납득할 수 있으나, 2010년대 말엽에 들어 변화하고 있는 분위기를 예측하는 데에는 여전히 다소간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또래간 놀이문화는 정말로 부족한가?
저자는 남성들이 놀이 과정에서 문제해결의 규칙을 배울 수 있는 적절한 또래문화 공간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DC인사이드에 존재하는 '너무 많은 수의' 갤러리와 마이너 갤러리들을 간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런 멀쩡해 보이는 동호회와 커뮤니티들 역시, 새벽만 되면 '야짤 달리는' 곳으로 변모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낮에 충분히 놀지 못했기 때문인가? 단톡방 성희롱 사건 역시, 남성들끼리 노는 법을 정말로 몰라서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정말로 놀지 못하고 어울릴 기회가 없는 아싸 남성들은 애초에 그런 단톡방에 소속되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단톡방에서 히히덕댈 정도의 이너 서클에 포함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이 주류 놀이문화에 충분히 사회화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저자의 우려처럼 또래문화 공간이 '양적으로'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공간 자체는 충분하되 또래간 놀이의 콘텐츠가 '질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아키텍처만을 통해 인터넷 공간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가?
저자는 "한국의 파브르"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터넷 상에서 문제시되는 병리적 사이트들에 대한 분석을 주로 수행해 왔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분석의 결과를 토대로 인터넷 공간 전반에 대한 비관적인 일반화를 시도한다. 저자는 아키텍처라는 환경적 관점에서 인터넷을 논의하고자 하고, 이 관점에서는 사실 일베나 메갈리아/워마드만이 특별히 '이상한' 아키텍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인식론적 틀에서 일베와 메갈리아/워마드는 인터넷 공간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신드롬' 이 된다. 하지만 이는 인터넷 문화에 대한 개인의 주체적 수용 역량을 너무 무시하는 주장이다. 네티즌들은 그렇게 스펀지처럼 무비판적으로 혐오발언을 배우고 재생산하지 않는다. 저자는 환경이 어떻게 이용자들을 그렇게 만들까를 고민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이용자들이 그런 환경을 찾게 될까를 고민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이르는 '영페미' 들은 무엇인가?
저자는 일베나 메갈리아/워마드의 패악질이 당초 '혐오자료의 데이터베이스' 라는 정체성을 갖고 시작했다는 점에 기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혐오자료들은 전부 계보상으로 볼 때 코갤, 야갤, 구 정사갤, 합필갤 등의 남초 갤러리, 그리고 남연갤이나 해연갤 등의 여초 갤러리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갤러리들이 있기 전부터, 이미 저 PC통신 시절부터 남성혐오 발언은 멀쩡히 존재해 왔다. 당장 오늘날 통용되는 한남충이라는 멸칭은 남연갤이나 해연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90년대의 저 악명 높았던 페미니스트 신정모라 씨가 이미 "한국 남자들은 전부 기생충이므로 싹 박멸해야 한다" 고 설파했던 것과 정확히 겹쳐진다. 그렇다면, 이 당시의 '영페미' 들이 갖고 있던 데이터베이스는 무엇인가? 본서만으로는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기 어렵다.
- 메갈리아가 혐오 놀이만의 공간이었다면, 왜 남연갤은 메갈리아에 냉소했는가?
페미니즘 도서 《그럼에도 페미니즘》 에서 윤보라(2017)는 남연갤과 메갈리아를 흥미로운 구도에 배치한다. 남연갤의 관점에서 볼 때, 신생 사이트인 메갈리아는 가볍게 혐오발언을 즐길 수 있는 사이트가 아니라, 비장하고 엄숙한 페미니즘 사상을 실천해야 하는 사이트로 비쳤다는 것이다. 본서는 메갈리아가 탄생했을 때 어째서 남연갤러들이 메갈리아로 이주하지 않고 도리어 메갈리아를 비웃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본서의 설명대로 메갈리아가 '아무런 대의명분 없이 그냥 재미 삼아' 혐오발언을 즐기기 위해 탄생한 공간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남연갤러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연갤러들은 메르스 갤러리를 점령했던 것처럼 메갈리아에도 몰려가거나, 적어도 메갈리아에 대해 호의적인 여론을 드러냈어야 했다. 하지만 남연갤러들은 편안히(?) 혐오하기에는 메갈리아가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했으며, "노잼" 인 메갈리아로 넘어가기를 거부하고 남연갤에 남았다. 그들은 놀이 이상의 '무언가' 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이는 "메갈리아는 전적으로 혐오의 유희만을 목적으로 하며, 페미니즘과는 무관한 사이트" 라는 본서의 논리적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반례가 된다.
- 시민사회는 일베와 메갈리아/워마드를 낳을 만큼 공론에 취약한가?
전작 《일베의 사상》 에서도 암시되지만, 여기서도 저자는 대한민국 시민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한계점이나 문제점에 대한 비관적 시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촛불시민" 으로 대변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시민사회 영역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타인을 설득하고 생각을 조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상태이며, 그런 병리적 한계가 인터넷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일베 및 메갈리아/워마드를 낳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 대해 인문학자 이우창 씨가 자신의 티스토리에서 평론한 내용에 따르면, 이는 오히려 "촛불의 실패에 대한 상처" 를 시민사회에 대한 개인적인 환멸감의 형태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의 역량은 분명 광우병 논란 및 그 촛불집회를 계기로 붕괴되었지만, 이는 저자의 시각처럼 시민사회가 그 내적으로 취약해서가 아니라, 그 시민사회조차 압도할 만큼 정부의 힘이 컸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힘이 이만큼 커지게 된 이유는, 신자유주의를 개인의 삶의 원칙으로 삼으려는 사회 풍조 속에서 마치 유일한 '주체' 처럼 보이는 정부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려는 경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 시민사회에 대해 저자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4. 생각해 볼 점
흔히 본서는 페미니즘 진영에게는 굉장히 껄끄럽게 여겨진다. 예컨대 영화평론가 손희정 씨나 강준만 커뮤니케이션학 교수 같은 경우 "일베를 분석하던 그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사라졌다", "여성들이 처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다", "팩트 만능주의에 빠져서 여성들의 고충을 도외시한다" 는 식의 불평을 제기한 바 있다. 한편으로 안티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본서를 들어서 저자를 페미니스트들의 거짓말을 격파하기 위한 선봉장으로 내세우려 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본서는 그렇게 단순히 진영논리적으로 생각하기에는 그냥 넘기기 어려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인터넷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인식론과 방법론이 있는가?
본서에서 저자가 지적하듯이, 소위 '인터넷 문화비평' 의 사례들을 보면 적절하게 합의된 가이드라인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비판을 하는 것을 적잖이 볼 수 있다. 연구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할지(이론적 조망), 그리고 그 문제의식을 어떤 절차를 통해서 분석할 것인지(연구방법론), 그 분석을 통해야만 얻는 이점이 무엇인지(방법론적 정당화)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생략하거나, 사실상 이심전심에 맡기는 식이다.[2] 그렇다면 결국 그 분석의 결과는 분석자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분석 대상을 손쉽게 비난할 근거를 제공하는 반면,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설득력도 갖지 못하게 된다. 인터넷 댓글이 사회구조를 반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인 댓글 몇 개만 가지고도 그 사회구조를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비약이다.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려면 방법론적인 고민이 새로 필요하다.[3]
물론 세상에는 크리스틴 하인(C.Hine)을 필두로 하여 사이버 민족지학(cyber-ethnography)과 같은 연구방법론이 분명 존재하며, 그 역사는 2019년 현재 시점에서 이미 20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의 인터넷 문화비평이 사례연구(case study)는 고사하고 심지어는 단순한 예시화(illustration)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은 그것이 명백히 '학문다움' 에 있어서 미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문제를 무엇으로 인식하고,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라는 학자적인 고민이 늦게 진행된다는 것은, 결국 이심전심이 그 분야 전체에 무난히 통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분야가 동질적이라는 것 역시 보여준다. 관점이 다른 사람이 바라보아야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될 텐데, 그런 지적 자극이 없다는 것은 결국 인터넷 문화비평가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대동소이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학문 공동체는 집단지성이라기보다는 집단사고에 가깝다.
- 가치에 대한 냉소의 시대 : 보편적 가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가?
저자가 본서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 한국 사회는 보편적 가치가 공격받고 있을 때 그 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인문학적인 준비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어떤 일베저장소 이용자가 깐족거리면서(?) 사람들에게 "아니 솔직히, 진짜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평등' 이 그렇게나 좋은 거야? 까놓고 말해서, 사람 밑에 사람 있고 사람 위에 사람 있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 아니야? '평등' 이 무슨 성역도 아니고, 더 우월한 사람이 더 열등한 사람을 지배하는 게 더 합리적인 거 아니야?" 라고 조소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런 주장이야말로 진정한 '팩트' 이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이며, 평등주의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전부 한낱 감상주의가 아니냐고 덧붙인다고 생각해 보자. 현대 대한민국의 진보진영은 이런 주장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저자가 염려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인권이니 평등이니 예의범절이니 하는 것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그것의 가치를 냉소하고 조롱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진보진영에 대해 비판하듯이, 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유사한 도서인 《혐오 미러링》 에서도 암시되듯이) 성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서 교육의 확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관점에서 이는 전혀 유용하지 못한 방법이다.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C.H.Sommers)의 표현을 살짝 바꾸자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떤 가치의 중요성을 내면화하기에 앞서서, 그 가치에 대한 의구심부터 먼저 내면화한다. 서구 지성사에서 평등이라는 테마가 어떤 철학적 계보를 거쳐서 보편적 가치의 지위에 올랐는지 전부 구구절절 읊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다. 그보다는 아마도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다니, 너 제정신이야?" 라는 식으로 '또래압력' 을 가하는 시민의 감시를 강화할 수도 있겠지만, 이조차도 자칫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수준의 배척행위가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저자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회적 공론을 강조하는 만큼, 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단절하는 방안을 좋게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 "신드롬" : 일베와 메갈리아, 워마드를 인터넷 사회에서 분리 가능한가?
저자는 《일베의 사상》 및 본서에서 일베 '신드롬', 메갈리아/워마드 '신드롬' 이라는 표현을 동원한다. 저자가 이를 통해서 일관되게 암시하는 것은, 이미 일베 콘텐츠는 남성들의 인터넷 이용에 있어서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문화적으로 섞여들었다는 것이다. 흔히 남초 커뮤니티들이 "우리도 일베 싫어한다" 고 거리를 두긴 하지만, 이는 명목상 그럴 뿐이고 일베의 영향력은 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본서를 통해서도, 메갈리아/워마드 역시 여성들의 인터넷 이용에 있어서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메갈리아의 남성혐오적 언어들이 여초 커뮤니티에 폭넓게 확산되고 있으며, 혐오 콘텐츠가 여성들의 문화생활과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섞이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저자의 인터넷 세계관은 상당히 비관적이다. 일베는 우리도 '손절' 한다는 남성들의 항변은 저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메갈리아/워마드의 남혐에는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항변 역시, 저자는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 영향력은 오프라인에까지 이른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베를 하는 게 밝혀진 남성은 동료 남성들에게 배척당하지 않으며, 메갈리아/워마드를 하는 게 밝혀진 여성은 동료 여성들에게 배척당하지 않는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 '일밍아웃', '메밍아웃' 같은 건 없다. 이런 극단적 사이트들의 메시지와 혐오문화가 어찌나 폭넓게 퍼졌는지, 그것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을 분리해 내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는 것이다.
저자가 '신드롬' 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드러내는 시민사회의 실패에 대한 비판의식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이들 문제적인 사이트가 인터넷 사회의 선량한 네티즌들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해 보인다. 어딘가에는 '그들과 우리' 사이에 선긋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선긋기가 없다면 결국 세상은 '일베와 정상인' 이 아니라 '일베와 그 암묵적 동조자들' 로 묘사될 수 있고, '메갈리아/워마드와 정상인' 이 아니라 '메갈리아/워마드와 그들을 통쾌해하는 여성들' 로 묘사될 수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들과 우리' 가 아닌, '그들을 낳은 우리들' 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이 너무 나갔다고 말하려면, 우선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그들과 달라지려고 노력하는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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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서에서 언급하진 않았으나, 이후에 출간된 《근본없는 페미니즘》 이라는 메갈리아 옹호 서적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성단체 회합 장소에서 "저희 메갈리아가 남성들에게 공격 받고 있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자, 그때부터 제도권 페미니스트들이 메갈리아를 변호해 주기로 결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들이 인터넷 환경에 어찌나 무지했는지(…) 그 메갈리아 측 여성이 이건 이런 기능이다, 저건 저런 의미다 하는 기초적인 것부터 전부 알려주어야 했고, 다들 무슨 하늘의 계시라도 듣는 눈빛으로 상황을 배우고 있었던지라 겁이 난 그 여성이 "제가 메갈리아 전체를 대표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라고 몇 번씩 주의를 주어야 했다는 것.[2] 이처럼 인식론 및 방법론에 있어서 미비한 사례에 대해서는 《페미니즘 리부트》,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그럼에도 페미니즘》, 《그런 남자는 없다》 등을 들 수 있다.[3] 연세대 국어교육학과 정희모 교수가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비판적 담론 분석(CDA)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남긴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