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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1:43:07

혐오와 수치심

도서명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英)
혐오와 수치심(韓)
발행일 2004년(원서)
2015년(역서)
저자 마사 너스바움
(M.Nussbaum)
조계원 역
출판사 Princeton University Press(원서)
주식회사 민음사(역서)
ISBN 978893743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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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및 출간 배경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2.2. 혐오와 수치심
2.2.1. 혐오는 법적 근거가 되는가?2.2.2. 수치심은 법적 근거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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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혐오수치심자유주의 법치 체계 속에서 법리 판단 또는 처벌의 근거로서 신뢰할 수 있는 정동이 아님을 주장하는 법철학이다. 본서는 혐오에 대해, 타인의 존재가 '혐오스럽다' 거나, 그들이 '혐오스러운' 가치관을 갖고 있거나, 그들이 사회의 도덕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 '혐오스럽다' 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 타인을 처벌할 수 없으며, 그 타인에 대해 사적제재를 행사한 것을 참작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수치심에 대해서도, 범죄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형태의 처벌은 존재해서는 안 되며, 기존 사회가 장애인이나 약물 중독자 등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있다면 마땅히 이들을 보호하는 법률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논리는 자유주의에 근거하며, 일차적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J.S.Mill)의 《자유론》에 입각하지만 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즉, 밀이 과도하게 공리주의에 기대어 그 자신의 설득력을 약화시키고 있으며, 더 설득력이 있는 논리는 혐오가 갖는 심리적 의미로부터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 및 문화비평 분야에서 걸핏하면 거론하는 바로 그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현대에서 여성혐오라는 단어의 개념화를 언급할 때 흔히 인용되는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정치철학과 사법 정의, 정서심리학, 대상관계이론,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하는 학술서에 가깝다. 또한 성차별보다는 오히려 장애인 차별에 할애되는 페이지가 훨씬 더 많으며, 의외로 성범죄자에게 가혹한 처벌을 하고 신상공개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그러나 본서의 이론적 기초가 없었다면 이후의 페미니즘사회 정의에서 그 이론을 바탕으로 도출된 수많은 슬로건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별에 대해서 진지한 고찰을 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 된 것. 그와 동시에 페미니즘 비판의 논거로도 사용할 수 있는 문헌이기도 하다.

본서의 메시지는 국내의 현실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범죄자의 처벌 수준이나 사회적 소수자 이슈에 얽힌 법제화 문제는 언제나 본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논란처럼 성 소수자에 관련된 법제화 문제, 근래의 숙명여대 트랜스혐오 사건, 장애인들의 취업쿼터제 등의 논쟁은 이미 본서에서 예견했었던 것들이다. 본서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꾸준히 "그래서, 당신의 그 혐오감이 굳이 타인의 자유를 법으로 제약해야만 하는 근거가 되는가?" 라고 질문하고 있다. 수치심의 경우에도, 앞서 소개한 성범죄자 알림e의 사례도 있고, 흔히 검찰청 포토라인 뉴스보도에서 나오곤 하는 "왜 범죄자에게 마스크를 씌우느냐, 왜 범죄자 인권만 챙기느냐, 마스크 벗겨라!" 여론에 대해서도 저자는 정면으로 비판한다. 어차피 모두가 까딱 잘못하면 법을 어길 수 있는 부족한 존재인데, 왜 범죄자를 마음대로 욕을 보이면서 조리돌림을 하고 돌을 던지느냐는 것이다.

저자 마사 너스바움(M.Nussbaum)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법학 교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많은 이론서들을 남긴 저술가이기도 하다. 국내의 법학, 정치학, 철학 등의 전공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은, 너스바움의 저서들 중 많은 수가 이미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다른 역서로는 《정치적 감정》, 《인간성 수업》,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시적 정의》, 《혐오에서 인류애로》,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분노와 용서》, 《역량의 창조》, 《감정의 격동》,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등이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 《혐오에서 인류애로》 와 《정치적 감정》, 《분노와 용서》, 《감정의 격동》 은 본서와 논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너스바움의 사상에 더 관심이 있다면 찾아 읽어볼 만하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본서는 상당히 분량이 많고 두꺼운 책이어서, 선뜻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서의 요지는 후반부에 꽤 잘 요약되어 있다. 정동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면 602-603페이지, 정동이 법학적으로 갖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원한다면 605-608페이지만 읽어도 된다. 따라서 이 부분들만 읽는 것은 본서 전체에 대한 요약을 읽는 것이기도 하므로, 시간이 없다면 참고할 것.

여기서 본서의 전체적 구성은 (물론 별도의 서문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1장은 인트로, 7장은 아웃트로의 기능을 한다. 또한 3장의 내용은 《페미사이드》 를 먼저 읽은 후에 읽으면 이해가 잘 될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본서 3장은 해당 도서가 제기한 '매 맞는 아내의 정당방위로서의 남편 살해' 라는 법리적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기 때문.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서의 역서에서 번역된 '감정' 은 정동(affect)으로 보이며, 이하에는 계속 정동으로 번역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본서에서 '분개' 로 번역된 부분은 이하에는 일괄적으로 분노로 소개할 것이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본서에서 말하는 혐오와 수치심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는 정동인지를 소개하고, 혐오가 누군가를 처벌하는 근거로 쓰이거나 사적 제재를 가했을 때 참작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지 논의한 뒤, 수치심이 누군가를 처벌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는지 검토하고, 그와 함께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수치심을 느낄 때 법적으로 보호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것이다.

2.2. 혐오와 수치심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다음의 진술들을 읽어 보자.

미리 언급하자면, 저자는 위의 진술들에 대해서 (조금은 놀랍게도) 전부 반대한다. 법학자로서 저자는 위와 같은 사례들을 혐오와 수치심이 법리 판단이나 판결 과정에서 부적절하게 영향을 끼쳐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혐오라는 정동이나 수치심이라는 정동이나 법의 정신의 입장에서는 전혀 믿을 만하지 못한 것들이며, 도리어 자유주의적으로 보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이들이 법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본다. 위의 사례 중에 일부가 다소 설득력이 있어 보이더라도,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그것은 굳이 혐오와 수치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이미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어서이며, 그런 사안을 혐오와 수치심에 입각해서 판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판례가 된다.

저자는 서문과 1장에서 먼저, 일반인들이 흔히 통속적으로 오해할 만한 생각을 바로잡는다. 즉, '법에는 감정이 개입되면 안 된다, 감정은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법적 판단에서는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법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법은 사실상 생각할 수 없다... 법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의 감정 상태를 고려한다"(p.22). 단지, 법의 정신에서 보기에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동이 있고, 좀 더 신뢰할 수 없는 정동이 있을 뿐이다. 정동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합리적 사고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법이 전제하는 합리적 인간(reasonable man)은 명백히 정동을 경험하는 인간이다. 예컨대, 눈 앞에서 가족을 해친 범죄자를 보고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의 감정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 롤스(J.Rawls)의 논변을 통해서 자유주의적으로도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여기서 어떻게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정동과 신뢰할 수 없는 정동을 구분하는가? 이 지점에서 저자는 정서심리학계의 문헌들을 토대로 하여, 각 정동의 근저에 기초한 인지적(cognitive)인 사고의 과정을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혐오가 믿을 수 없는 정동이라는 논리가 세워진다. 여기서 먼저 혐오의 인지적 구성요소들을 살펴보자. 혐오는 흔히 구토로 표현되며, 폴 로진(P.Rozin)의 정의에 따르면 오염물이 을 통해 체내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혐오는 늘 입과 연결되어 작동하는 정동이다. 지독하게 낡고 더러운 공중화장실에 들어갔다고 가정했을 때, 더러운 벽에 손가락을 문지르는 것, 심호흡을 하면서 구린내를 들이마시는 것, 그저 입을 살짝 벌리기만 하는 것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독 입을 벌리는 것을 가장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다. 더러운 걸레를 집어올리는 사람들이 불필요하게도 이를 악물고 들어올리는 것도 하나의 예시. 입은 '더러운 것' 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통로라는 본성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혐오의 심리적 특징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1]

이상의 발견들을 통해서, 심리학자들은 혐오의 핵심적 의미를 발견했다. 혐오는 몸 밖의 유해하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정동, 특히 동물의 분비물이나 체액, 부산물, 배설물, 더 나아가 시체나 음식의 부패까지 막으려는 정동이다. 즉 혐오의 핵심은 취약성을 가진 무언가가 입을 통해 들어오면 자기 자신까지 존엄을 잃고 취약해진다는 느낌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혐오는 자신의 몸 안과 밖이라는 경계와 관련이 있다"(p.168). 여기서 동물성에 관련된 모든 것이 다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것이 취약성에 결부되었을 때 비로소 혐오스러워진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발달심리학자들은 발달 과정에서 혐오가 서서히 나타나며, 나이가 들수록 점점 혐오의 대상이 많아지고 강도도 강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혐오는 "사회적 교육의 강력한 전달 수단이다"(p.182). 구체적으로 '무엇' 에 대한 혐오인지는 사회가 가르치게 되는 영역이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이미 외집단에 대한 혐오를 또래 놀이 중에 드러내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혐오의 근저에는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씩은 갖고 있는 나르시시즘, 즉 개인의 자아가 완전무결하고, 완벽하고, 초월적이고, 고결하며, 신성하고, 독립적이고, 침입 불가능하다는 (그리고 적어도 그렇게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완전성을 위협하고 깨뜨릴 수 있는 오염물이 나타난다면 그것에 대해 자아의 내부에서 '추방시키는' 급격한 반응이 나타난다. 내 자신이 어쩌면 결점이 있고, 덜떨어지고, 범속하고, 부정하며, 불경하고, 의존적이며, 침탈당할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아내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래서 그걸 히스테릭하게 거부하면서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기확신을 하는 과정이 바로 혐오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반문한다. 그런 자아상이 과연 현실적인 것인가? 밑도끝도 없는 나르시시즘에 왜 사법 체계가 부응해 줘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그런 나르시시즘이 다른 선량한 시민들을 혐오해야만 달성될 수 있다면, 정말로 왜 사법 체계가 부응해 줘야 하는가? 법의 정신이 그런 혐오자들에게 대답할 길은 하나뿐이다. "그래요, 당신은 그런 자아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런데 왜 그것 때문에 다른 시민의 자유가 침해되어야 합니까?"

저자는 혐오가 특정 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문헌 속에서 '추정상의 상해' 라는 개념을 말했는데, 이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그 존재 자체가 자신에게 해롭다는 느낌을 받거나, 그 존재가 앞으로 하게 될 해로운 행위를 추정하거나, 그 존재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 집단이 인간의 취약함과 불완전성, 의존성을 상기시킨다면, 그 존재는 일종의 오염물처럼 여겨지게 되어 밀이 말했던 '추정상의 상해' 의 느낌을 줄 수 있다. 그 집단으로 인하여 개인의 자아가,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와 내집단이 오염되고 취약해지며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반동성애라고 볼 수 있다. 게이들로부터 헤테로 남성들은 자신의 육체적 깨끗함을 잃어버리고 분비물과 오염물로 얼룩지게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극단적으로는 단순히 똑바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침범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게이 혐오자들은 법정으로 몰려가서,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금지해 달라', '게이는 때려도 무죄로 해 달라', '게이는 잘못됐다고 말하는 걸 허용해 달라' 같은 요구들을 늘어놓게 된다. 자신의 혐오를 사법 체계가 뒷받침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한 사람을 지구상에서 없애려는 소망" 이며 "이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거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생각"(이상 p.533)일 뿐이다.

혐오가 소수자들을 공동체에서 배척하고 은폐시키는 메커니즘은 꼭 법의 형태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는 법 이외에도 도덕이나 관습, 규범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꼭 불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저자가 문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암묵적이고 규범적으로 작동하는 정상성 혹은 규범성(normativity)이다. 이러이러한 사람들은 정상이고, 이 허들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부 비정상으로 싸잡아 버리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비정상이라며 손가락질하는 혐오를 통해, 사람들은 "따라서 나는 다행히 정상이야" 라는 대리만족을 얻는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사실은 못난 존재일 수 있다는 무서운 현실로부터 보호 받는다. 꼭 소수자 담론만은 아니지만, 이는 소위 '○○이면 인싸' 같은 사회적 메시지에 겹쳐 보면 이해가 쉽다. 예컨대, 혼밥러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언뜻 인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아싸라고 손가락질당할까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정상성은 "차이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자극을 덮어 주는 대리 자궁과 같은 역할"(p.399)과도 같다.

가장 대표적인 정상성 중 하나가 바로 정상가족(normal family), 즉 동일한 문화권 속의 시스헤테로 남녀가 만나서 시스헤테로 자녀를 낳고, 남편은 공적인 곳에서 생계를 부양하고 아내는 사적인 곳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가족이다. 이런 가족만을 정상이라고 취급하게 되면, 편부모가정, 소년소녀가장,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동성결혼에 기초한 시민결합, 동거 관계의 남녀, 이혼가정, 재혼가정 등이 죄다 비정상이 되어 버린다. 또 다른 정상성으로는 이성애규범성(heteronormativity)이 있다. 이것은 이성애야말로 자연의 섭리이며 동성애는 뭔가 치료를 요하는 병리적인 상태라는 규범적 압력이다. 물론 이런 기준 하나하나만 보면 정상인 쪽이 다수이고 비정상인 쪽이 소수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상성의 기준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면에서 빠짐없이 정상인 사람들이 거의 없게 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수많은 정상성의 기준들을 전부 충족하진 못한다. 남자다움의 압력이 확고한 미국인들 중에도 정작 패권적 남성성을 지닌 완벽한 남성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과도 상통한다.

본서에서는 여성혐오 또한 함께 논의된다. 혐오에 대한 정서심리학 도서 《The Anatomy of Disgust》 를 저술한 윌리엄 밀러(W.I.Miller)는, 여성의 육체가 남성들에게는 취약하고 끈적거리는 점액성의 존재로 여겨지며, 특히 남성의 정액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혐오반응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물론 헤테로 남성은 여성의 신체에 성적으로 이끌리지만, 그렇다고 혐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적 이끌림과 혐오감은 양립 가능하며, 도리어 서로에게 섞여들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언급한 음란물에 대한 논의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4장에서 저자가 논의하는 바에 따르면, 성적인 흥분과 혐오스러운 느낌은 심지어 법적으로도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를 "법률적 수수께끼"(p.252)라고 불렀다. 저자에 따르면 법정에서 음란물이나 각종 도착증, 변태성욕에 관련된 이슈가 사건으로 접수될 때마다 흔히 '저런 성적인 건 우리 사회에 혐오스러우니 제작자를 처벌하고 규제해 달라' 는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저자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원칙적으로는 에로티시즘만을 포함해야 하지만 (밀러의 논의를 따라) 현실적으로는 혐오감까지 함께 뒤섞여 있음을 주장한다. 원래, 성적으로 노골적인 것은 꼭 혐오스럽게 받아들여질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개인의 정치적 관점이나 신앙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정도의 사회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여성의 신체에서 에로티시즘과 혐오감이 서로 분리되어야 하는데 분리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월트 휘트먼(W.Whitman)의 시 〈I Sing the Body Electric〉 이 여성의 몸을 시적으로 묘사했음에도 구역질난다며 세간에 논란이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마찬가지로, 음란물이 외설적이니 검열해 달라고 법정에서 호소하는 것도 음란물이 여성의 신체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혐오스러운 이유는 여성의 신체가 갖고 있는 섹슈얼리티가 섹스 이외의 상황에서 공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저자는 보수주의 및 도덕주의적인 음란물 검열론에 반대한다. 음란물 검열론 자체가 여성의 신체를 혐오 섞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여성혐오적 문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2] 음란물 자체는 반유대주의인종차별적 창작물과 같이 취급해야 하지만, 그 제작을 규제해야 할지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하여 많은 법적 논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에서 나르시시즘과 정상성에 대해 논의했던 것으로 다시 되돌아가 보자. 나르시시즘은 개인이 자신의 취약성을 거부하고 완전성을 주장하게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을 잠재적으로 취약하게 하리라 추정되는 오염물을 혐오하게 만든다. 이러한 혐오의 규범은 사회적으로 '이러이러하지 못하면 비정상' 이라는 인식을 따라 작동한다. 그런데 만일, 다른 시민들에 의해서 내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도 성적 지향이나 신체적 장애, 트랜스젠더, 비만한 사람처럼 명백히 자신 쪽이 비정상이어서 왜 자신이 혐오받는지 아는 경우에는 그나마 항의할 수조차 없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비정상성과 취약성에 마주하여 경험하게 되는 정동이 바로 수치심이다. 정상성의 허들이 높고 혐오의 분위기가 강할수록 수치심도 커진다. 예컨대 사춘기 소녀들은 코의 높이, 턱선, 피부의 색과 톤, 머릿결, 어깨의 크기, 체지방량 등등 수많은 요구조건에 자신의 몸이 부합하지 못할수록 큰 수치심을 느끼며, 이는 섭식장애를 유발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실업자들과 구직자들은 '방구석 백수' 이미지가 강한 사회일수록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수치스러워한다.

수치심에 대해 저자는 정신분석학의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을 많은 페이지에 걸쳐 할애하면서 주장하면서도, 가급적이면 존 보울비(J.Bowlby)의 애착 이론처럼 이후의 과학적인 현대심리학에서도 교차검증이 되는 내용들 위주로 소개하고 있다. 어쨌거나 이 모든 논리를 요약하자면, 수치심은 유아가 양육자의 도움 없이는 전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정동으로, 특히나 자존감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이상을 품기 시작하는 나이에 특히 강하게 발달한다. 부모나 선생님처럼 중요한 타인에게 좋게 보이고, 호감을 얻고, 긍정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할 때, 어린이들은 수치심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수치심은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p.338). 저자는 이러한 유아적인 형태의 나르시시즘이 채워지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수치심을 '원초적 수치심' 이라고 특정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이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앞에서 말했던 '도달할 수 없는 완전성과 초월성' 이 될 수도 있고, 이 경우에 원초적 수치심이 발생하게 되지만, 꼭 그런 도달불능의 목표가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던 어느 정도의 상태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수치심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대의 기준은 도덕과 성품, 인격, 자아 등의 본질적인 부분에 관련된 것이기에,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쓸모없고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2.2.1. 혐오는 법적 근거가 되는가?

"순수함에 대한 환상 속에는 건설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종주의자와 부패한 정치인들이 바람직한 행위를 하도록, 나아가 생각을 고치도록 요구해야 한다. 잘못된 행위를 저질렀으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토사물이나 배변 같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우리는 분명 그들을 추방시킬 수 없으며, 설령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중략)

...혐오에 호소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그게 싫어' 라고 말하는 것이며, 누군가의 발을 격렬하게 짓밟는 것과 같다. 그러한 법들이 실질적인 공적 설득의 단편이 될 수 있게 해 주는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되지 않는 것이다."
pp.199-200; 283

여기까지 혐오가 어떠한 정동으로 이해되는지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혐오는 법정 안에서 호소하기에 적절한 정동이 되는가? 정확히 말해, 혐오는 자유주의 사법 체계에서 신뢰할 만한 참작의 근거가 되는가? 저자에 따르면 가장 흔한 사례는 바로 반동성애적 살인 및 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내미는 면피 논리라고 한다. 즉 '저 혐오스러운 게이가 나를 유혹했다, 이건 도발이다' 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때 배심원들이 세 가지 질문을 거칠 것을 제안한다. 첫째, 이 가해자가 느낀 혐오감은 생리적이고 위생적인 의미의 혐오인가, 아니면 자아의 순수성과 오염에 대한 불안인가? 만약 후자라면, 둘째로 그 게이가 가해자에게 어떤 공격성이나 폭력성을 드러냈는가? 만약 아니라면, 마지막 셋째로 가해자는 그 현장을 회피할 수 있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럼 그 가해자를 법이 왜 참작해 주어야 하는가? 결국 법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피해자가 건강에 해로운 것도 아니고, 위협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서 피해 가면 될 일이었네? 합리적 인간이라면 남이 아무리 혐오스러워도 칼로 찌르는 짓은 안 해. 그러니까 당신의 살인 행위는 정당화도 안 되고 도발에 대한 정당방위도 아니야" 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세상에는 한때 동성 간의 성적 접촉 행위를 그 자체만으로도 처벌하는 법률이 있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져서 현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선진 법치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데, 소도미법이 점점 그 정당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보면 혐오에 호소하는 정당화가 사법 체계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 소도미법은 나름대로의 '위해' 논리에 기대고 있었다. 말인즉슨, 동성애 행위를 하는 남성들은 남자답지 못해서 전쟁이 벌어지면 계집애처럼 굴 것이니 국가안보에 피해를 끼친다는 것과, 동성 커플이 자녀를 입양해서 키우게 되면 아빠가 둘이라는 사실이 자녀에게 아동 학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저자가 지적하듯 많은 반박을 받았다. 실제로는 게이들도 전쟁 중에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고, 1999년의 한 판결에서는 게이 커플도 자녀를 잘 양육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더 이상 제시할 '위해' 논리가 다 떨어지자, 동성애 혐오자들은 이번에는 대중의 혐오감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게이들은 분변을 먹는다" 는 찌라시를 은밀하게 뿌리다가 발각되기도 했고, 세간의 혐오적 미신을 선동하기도 했다. 이들도 혐오에 호소하는 것은 위해에 호소하는 것보다 더 약한 논증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소도미법이 법률의 합헌성을 만족한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했고, 법률의 폐지도 막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논객이 나타났다. 혐오를 법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이 심지어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도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댄 케이헌(D.M.Kahan)이라는 진보주의자가 《The Progressive Appropriation of Disgust》 라는 문헌을 출판하면서 제기되었다. 그 말인즉슨, 혐오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라는 주장은 지금껏 보수주의자들의 차별과 불관용, 억압을 위해서 전유(appropriation)되어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진보주의자들이 너무 조급하게 혐오를 폐기하지 말고, 좀 더 긍정적으로 쓸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케이헌은 혐오가 긍정적일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흉악 범죄의 비인간성을 판단할 때에는 배심원들의 혐오감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다. 즉, 배심원들이 범행 수법에 대해 혐오감을 크게 느낄수록, 판사도 주어진 형량의 범위에서 그만큼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혐오를 케이헌의 방식으로 쓰는 것도 문제가 많다고 정면으로 반론한다. 첫째, '흉악하다', '끔찍하다' 는 표현이 법적으로 너무 불분명하게 정의되어서, 단순히 담당검사가 범행을 얼마나 선정적으로 묘사하고 표현하느냐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둘째, 중죄에 수반되는 살인은 혐오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컨대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다가 갑자기 애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면 그건 혐오스러운 살인이지만, 은행털이를 하다가 직원들을 쏘아 죽였다면 상대적으로 덜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셋째, 판례들에 따르면, 오히려 지독한 살해 방식일수록 범행 현장은 소위 '유혈이 낭자한' 상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넷째, 기존의 사회적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 예컨대 흑인 여성을 살해한 백인 남성보다, 백인 여성을 살해한 흑인 남성이 더 끔찍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살인범의 기괴함과 흉악함을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정상적인) 자신과는 경계선을 그으려는 심리의 발로다. 혐오는 악행을 자꾸 '불가해한 괴물이 수풀 속에 엎드리고 있다가 피해자를 덮치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 악행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에 의해 나타나는데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괴물만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종류의 악행이 그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p.308). 하지만 이처럼 인간인 이상 누구나 취약하다는 사실은 배심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결국 배심원들은 손쉽게 범죄자를 괴물 취급하고 손가락질하게 되기 쉽다.

이쯤에서 퀴즈 하나. 그렇다면 혐오자들을 혐오하는 것은 어떨까? 자신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돌려받는다면, 혐오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고귀한 대의를 갖춘' 혐오라면, 억압 받던 집단의 항의와 절규를 반영하는 만큼, 혐오가 진보의 이상을 위해 선용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저 위에 소개된 인용문에 이미 존재한다. 저자는 혐오자들을 혐오하는 것이 어떤 건설적인 가치도 없으며 시도되어서도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가장 바람직한 것은 혐오자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지, 우리 공동체에서 영원히 '추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혐오자들을 혐오하는 것은, 혐오자들을 더럽고 소름끼치는 오염물처럼 취급하여 내쫓겠다는 의미다. 혐오자들의 갱생과 교화, 재통합의 가능성은 아예 거론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누구나 완벽할 수 없다면, 혐오자들에 대한 적절한 조치는 차별금지법에 의거한 처벌이어야 하지, 그들을 오염물처럼 취급하며 멸시해서는 안 된다. 이는 미러링의 가치를 고평가하며 심지어는 미러링 행위를 낭만화하는 국내 페미니즘 진영에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혐오가 범죄자들을 교화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범죄자들에 대해서 어떤 정동을 경험해야 하는가? 일각에서 비꼬는 것처럼, 범죄자에 대한 무한한 아량과 동정심과 이해심을 베풀며, '뭐 사내 대장부가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식으로 토닥여 주는 게 정답이란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저자는 자유주의 법치사회가 범죄자를 대하는 정동으로서 분노를 제안하고 있다. 분노는 여러 면에서 혐오보다 상위호환의 정동으로, 법적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혐오와 분노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예컨대 옆집 반려견의 소음으로 인한 피해를 입어서 분노한 사람들은 '옆집 개 주인이 혐오스럽다' 라고 잘못 표현할 수 있다. 또 혐오와 분노는 여러 법적인 순간들에서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살인범이 경찰과 함께 살인 현장을 재연할 때, 현장에서 계란을 던지는 주민들은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피해자의 시체와 낭자한 유혈에 대해서는 혐오스러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는 혐오와는 분명히 달라지는 정동이다.

혐오와 분노가 다르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2장에서 혐오와 분노를 잘 대조하고 있다. 혐오가 '자신이 오염될 것에 대한 추정된 염려' 라면, 분노는 '부당함이나 위해 또는 자유의 침해가 실제로 발생한 것에 대한 염려' 라고 할 수 있다. 즉, 혐오가 고결함과 순수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이고 규정적인 인간관을 전제한다면, 분노는 인간은 부족하기에 타인에게 얼마든지 위해를 끼칠 수 있다는 현실적이고 기술적인 인간관을 전제한다. 혐오는 범죄자의 인격과 본성을 공격하지만, 분노는 범죄자의 잘못된 행위에만 초점을 맞춘다. 또한 혐오는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오염물이라 손가락질하며 배척하지만, 분노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방식으로 당초의 문제를 해결한다. 저자는 2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정치인 혐오를 예시로 들고 있다. 부패한 정치인에 대해 저자가 '분노' 했다면, 저자는 청원을 하든 가두시위를 하든 사회적인 변화를 위해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한때 자신이 부패한 정치인에 대해 '혐오' 했었다고 토로한다. 그 결과 북유럽 선진국의 정치 문화를 실제보다 과도하게 미화하고 낭만화하는, 일종의 현실도피적인 자국 혐오를 경험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적 사법 체계는 배심원들의 혐오가 아니라 분노에 근거했을 때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배심원들은 범죄자의 인격을 모독함으로써 자신만큼은 그런 '괴물' 이 아니라고 애써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배심원들은 범죄자의 인간성 자체는 존중하면서도 그가 타인의 자유와 행복을 어떻게 침해했는지 따끔하게 지적하고, 다시는 그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그리고 무너진 사회적 가치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합당한 처벌을 요구할 것이다. 이를 통해 배심원들은 범죄자가 그 형벌을 통해 다시 '우리 주변의 선량한 이웃 시민' 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할 것이다. 아무도 도달 불가능한 저 '완전성' 이라는 대의를 빌미 삼아 어떤 시민도 그 공동체에서 내쫓기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은 나르시시즘을 버리고, 자신들이 인간인 이상 서로의 도움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세상은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나뉠 수 없는 복잡한 곳이라는 올바른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분노는 특정 인간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를 바라보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그만큼 세상도 나아질 것이다.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실 혐오가 법적으로 의미 있는 정동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예외적 상황을 남겨 놓는다. 저자에 따르면, 혐오가 법적 제재의 근거가 되는 사실상 유일한 영역이 바로 생활방해법이다. 대표적으로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 옆집의 곰팡이 악취, 건너편 아파트의 소음, 도로 건너편 공장의 유해한 증기, 기타 다양한 환경적 악영향들이 법적 다툼으로 번지는 상황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혐오는 "어떠한 행위가 얼마나 나쁜지를 보여주는 기준이 아니라 법적으로 금지되는 실제적인 위해이다"(p.292). 이것이 앞서의 '위해' 논리와 다른 점은, 실제로 그 혐오의 대상으로 인해 건강상의 상당한 위해가 발생했음을 굳이 증명하지 않고도, 단순히 혐오스러운 느낌 하나만으로 법적 제재가 충분히 성립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비료공장 관계자는 자신들이 호수에 버리는 부패한 침전물이 실제로 침전되는 양이 극미량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인근의 주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호숫물을 생활용수로 쓰는 것 자체가 혐오스럽다고 주장한다면, 법원은 주민의 손을 들어 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많은 법적 다툼에서 이런 종류의 '신뢰할 만한' 혐오는 앞서의 '나쁜' 혐오를 위장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한다. 생활방해법 위반을 주장하는 사례 중 적지 않은 수는 사회적 혐오의 동기가 둔갑한 것들이다. 예컨대, 어떤 이슬람 교도는 옆집에서 돼지갈비 굽는 냄새가 자기 마당에 널었던 빨래에 배어들었으니 옆집을 처벌해 달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떤 채식주의자고깃집에 쳐들어가서 육식을 하는 손님들을 혐오스럽다며 싸잡아 비난했던 행위를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대개 재판관이 "그러니까, 상대방의 행동으로 자신의 도덕적인 자아상이 오염될지도 모른다는 추정이네요?" 라고 간단히 반문함으로써 그 진짜 동기가 드러나게 될 뿐이다. 이런 경우 자유주의 법치 체계는 그 혐오를 신뢰하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것은 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사적인 차원에서 해결을 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옆집에 이슬람 교도가 살고 있다면 돼지고기 굽기 전에 알아서 한번 더 신경써 주라는 얘기.

이상의 혐오와 분노에 대한 설명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혐오에 호소하기질문분노에 호소하기
나와 내 공동체는 고결하고 순수하며 인격적으로 완전해야 한다인간관인간인 이상 모두가 약점과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절대 다수가 도달 불가능한 도덕적 요구조건임인간관의 현실성인간의 약점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함
상대방의 본질 자체가 불순한가?관심의 초점상대방이 잘못된 행위를 했는가?
그가 나와 내 공동체 속의 더러운 오염물이기 때문에타인을 왜 제재해야 하는가?그가 다른 시민에게 위해를 가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가 나와 내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타락시킬 것 같음문제의 본질은?실제로 피해자의 자유와 행복이 침해당한 상태임
그 '오염물' 을 당장 추방시키고 없애버려야 한다문제를 해결하려면?위해를 복구하기 위해 그를 교정해서 갱생시켜야 한다
나와 내 공동체만큼은 정상이라고 믿으며 혐오가 강화됨배심원의 성찰성자신들이 부족한 존재임을 인지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증가함
비정상을 축출했으니 이제 정의가 구현됐다는 현실도피 발생판단의 결과더 나은 사회를 향한 실질적 노력이 시작됨

2.2.2. 수치심은 법적 근거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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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처벌의 대표적인 예시.

앞에서 설명했듯이, 타인의 혐오를 받아서 자기 자신의 취약성을 깨닫게 된 사람은 수치심을 느낀다. 하지만 수치심은 누구나 꺼리는 정동이며, 따라서 사실상 모든 사람들은 법의 이름으로 시민들이 수치심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시민 간의 관계에서 상호존중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범죄자가 처벌 과정에서 느끼는 수치심은 괜찮은가?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 그것은 단순히 모욕을 준다기보다는 범죄자를 계도한다는 건설적인 의미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것처럼, 성범죄자의 인적사항과 주소지를 온라인에 공개적으로 게시하거나,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적발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 그 사례다. 물론 검찰 조사 전에 포토라인에 용의자를 세우고 그나마도 마스크를 벗기거나, 성범죄자가 전자발찌를 차고 밖에 나가게 만드는 것 역시 그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범죄자의 얼굴에 낙인을 찍거나 범행사실을 문신으로 남기는 자자형(刺字形)과 같은 형벌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수치심을 유발시키는 게 정의구현일까? 반대로, 유흥탐정처럼 지탄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경우가 있다면, 판사는 그 사람을 의적으로 취급하여 봐 줘야 하는가?

물론 이처럼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범죄예방 효과에 있어서는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저자 역시 그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수치심 처벌에 대해서 법학계에는 다섯 가지의 반론이 존재한다. 첫째, 제임스 휘트먼(J.Whitman)은 수치심 처벌이 일종의 인민재판이 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사법 제도가 처벌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군중이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처벌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 에릭 포스너(E.Posner)는 수치심 처벌은 사법 현장에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처벌의 대상자를 명확히 특정하지 못하고, 처벌의 강도도 확정하지 못하는 애매한 처벌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로마에서 낙인 형벌은 처음에는 범죄자에게만 가했지만, 이후에는 모든 이교도들에게까지 마구잡이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셋째, 제임스 길리건(J.Gilligan)은 수치심을 느낀 사람이 그 주홍글씨로 인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재범률이 증가한다고 하였다. 특히 이런 처벌을 받는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자 등 유독 자아가 약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취약한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 아예 반사회적인 집단에 합류할 수도 있다고. 넷째, 스티븐 슐호퍼(S.Schulhofer)는 수치심 처벌이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여 전체주의적인 사회를 만든다고 하였다. 물론 이는 전체주의가 나쁜 것이라는 다른 철학적 전제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케이헌처럼 수치심 처벌이 '리버럴' 한 대의를 위해 쓰일 수 있다는 주장에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반론으로서, 저자는 수치심 처벌이 범죄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해치려는 의도가 깔린 처벌이라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처벌은 '당신은 나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라고 표명하지만,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당신은 결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라고 표명한다"(p.420). 수치심 처벌은 범죄자를 공개적으로 비웃게 만드는데, 이는 국가가 범죄자를 포함하는 모든 시민들을 존엄한 인격체로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심지어 그 비웃음의 대상에는 범죄자의 가족들까지도 포함될 수 있으며, 이는 수치심 처벌의 옹호자들로서도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니다. 저자는 수치심 처벌이 도입되면 그 국가는 비난 받는 취약한 사람들과 그들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사람들로 서열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 비웃는 사람들은 자신 또한 자칫하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평범한 시민이라는 점을 애써 회피하며 나르시시즘적인 응보논리를 부르짖게 되고, 범죄자의 부도덕을 비난함으로써 자신만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현대의 법치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범죄자의 행위는 처벌하지만 그 범죄자의 인격은 존중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행위에 대한 처벌이 설령 가혹할지라도 그것이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유독 수치심 처벌과 같은 대중의 조리돌림이 호소력을 갖게 되는 사회적 풍조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것이 바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이라고 하였는데, 이 개념은 70년대 영국의 폭력범죄 사례를 연구한 스탠리 코언(S.Cohen)의 《Folk Devils and Moral Panics》 에서 출발한다. 도덕적 공황은 그 사회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원시적, 본성적인 것이 문명을 위협한다는 인식이다. 기존 사회의 도덕관념이 사라져 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문명에서 야만으로 변해 간다고 믿을 경우, 사법 절차에서 수치심 처벌이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로 70년대 영국에서 조직폭력배 문제로 한창 도덕적 공황이 판을 치던 시절에는, 법정에서 심지어 범죄자의 바지 허리띠를 빼앗아서 판결을 받는 동안 계속 바지가 흘러내리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의 게이에 대한 혐오 또한 성적인 것에 관련된 도덕적 공황의 대표적인 사례다. 게이 활동가이자 《The Trouble with Normal》 의 저자 마이클 워너(M.Werner) 또한 반동성애 현상을 '섹스 공황'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 도덕이 무너진다는 공황에 빠져 있던 시절, 공연음란죄로 가장 먼저 잡혀들어갔던 사람들은 가장 으슥한 곳에 숨어 있던 게이들이었다고.

처벌이 수치심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한다면, 도대체 처벌은 범죄자에게 어떤 정동을 일으켜야 하는가? 앞서 혐오 대신에 분노를 제안했던 것처럼, 저자는 이번에도 더 나은 정동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죄책감이다. 이는 혐오와 분노의 관계와도 상당히 대응된다. 앞에서 인간의 본질 그 자체를 문제삼는지 아니면 잘못된 행위만을 문제삼는지를 구분했던 것을 상기해 보자. 수치심은 범죄자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의미 자체가 부정당하게 만들며, 아무런 희망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물론, 당장 뭇 사람들은 범죄자가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환호하겠지만, 사실 이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재기하지 못하고 끝내 사회의 변두리 또는 밑바닥을 떠돌다가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 있다. 그때에는 이 사람을 범죄의 유혹으로부터 막아 줄 건강한 자아상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역시 이 사람은 우리와는 종자가 다른 쓰레기였다' 면서 자신들의 나르시시즘을 확증할 것이다. 반면, 범죄자가 느끼는 죄책감은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이지만 잘못된 행위를 저질러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한다. 따라서 범죄자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전에 저질렀던 행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범죄자가 언론에 등장할 때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를 한 채 손을 수건으로 가리는 클리셰적인 풍경이 법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흔히들 범죄자 인권만 보호하고 피해자 인권은 무시하냐고 항의하긴 하지만, 거기서 범죄자의 인상착의를 있는 대로 드러내 버리면 그 범죄자는 죄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수사당국은 그때부터는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가 끼친 악영향을 밝히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한 명의 인격체를 쥐 잡듯 짓밟는 것이 되고 만다. 피해자 인권이 흔히 경시된다는 문제는 물론 국내 수사당국의 고질적인 문제이지만, 양측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꼭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이쪽도 보호하고 저쪽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떤 유명인이 수사를 받거나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던 도중에 대중으로부터 조리돌림을 당해서 사회적 평판이 크게 깎였다면, 설령 죄가 있다고 인정되더라도 그 수치심이 반영되어 최종 형량이 감소하기도 한다. 본서 말미의 해제에서 김영란 교수[3]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전자발찌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선고2010헌바I87결정; 선고2011헌바I06/I07(병합)결정)을 소개한다. 여기서는 '범죄자의 수치심은 처벌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부수적 결과물일 뿐' 이라는 의견이 다수의견이었는데, 소수의견이 본서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는 만큼, 향후 국내 법학계에서 지속적인 연구가 요청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수치심이 긍정적일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4장에서 저자는 이것을 '건설적 수치심' 이라고 부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지배적 집단이 피지배 집단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수치심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의 비참한 처지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좋은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미국인이 "우리 미국 사회에 빈부격차가 이렇게나 큰데도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었다니, 대졸자로서 내 자신이 정말 수치스럽다" 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수치심이 긍정적인 이유는, '나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다' 라는 비현실적 나르시시즘을 가정하지 않고서,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의 더 현실적인 자아상을 스스로에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외에도 법 이외의 영역에서 수치심이 중립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을 강화하지도 않고 깨뜨리지도 않는 수치심이 존재한다. 예컨대, 어떤 축구 코치가 전반전을 마친 선수들에게 "이건 용납할 수 없는 경기력이다, 응원하는 팬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라" 라며 다그치는 경우가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감이 저해될 위험이 있다고 덧붙인다. 결국 여기서의 요지는,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자신이 어느 정도의 도덕적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하고 부끄러워하는 건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더욱 내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자는 수치심과 관련하여 굉장히 중요한 이슈로서 장애인 차별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본서는 여성이 겪는 수치심에 대한 논의보다도 장애인이 겪는 수치심에 대한 논의에 한참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저자가 장애인 이슈를 강조하는 이유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낙인을 받아 온 사회 집단은 없었"(p.550)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의 논리가 흥미로운데, 범죄자와 배심원의 관계를 '죄 지은 사람과 죄 지을 수 있는 사람' 으로 보는 것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특이한 신체적 한계가 있는 사람과 일반적인 신체적 한계가 있는 사람' 의 구도로 배치한다. 저자가 전제하는 것은, 어차피 모든 사람들은 신체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100미터를 15초만에 끊지만, 누군가는 20초만에 끊는다. 아예 자동차가 달리듯 내달릴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이런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자전거, 자동차, 지하철, 기차 등이 만들어졌지만, 그런 것을 이용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10미터를 걷기 위해 몇 분 이상이 필요한 지체장애인들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사람들은 그것은 특별하게 바라본다. 똑같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인데도 말이다.

물론 장애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에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우선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 모로 신경이 쓰이게 만들고, 끊임없이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도리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금 세상에 완벽히 자립 가능한 정상인은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모든 시민들은 저마다 "유능하면서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p.563)' 라는 것이다. 비장애인들도 늘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간다면, 장애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전혀 냉대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또 다른 이유로서, 장애인들의 외모나 외양이 아름답지 못하고 다소 불쾌한 느낌을 준다는 (솔직한) 생각이 있다. 물론 이 역시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취약성을 상기시키는 오염물 같은 느낌이라고 해석될 것이다. 그 느낌 때문에 장애인을 멸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클래식한 의미에서의 혐오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장애인들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며, 이들이 장애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면, 사회는 마땅히 그들을 돕기 위해 환경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단지, 장애인은 '우리와 비교해서 비정상' 이라는 혐오적 인식이 그 사회적 재설계를 가로막고 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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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에 이 주제로 연구하는 주요 심리학자들로는 (본서에서는 소개하고 있지 않으나) 요엘 인바(Y.Inbar), 데이비드 피자로(D.Pizarro), 그리고 폴 블룸(P.Bloom) 등이 있다.[2]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에 익숙하다면 아마도 《포르노그래피》 의 저자인 안드레아 드워킨(A.R.Dworkin) 및 캐서린 맥키넌(C.A.MacKinnon)을 떠올릴 수 있다. 저자 역시 본서에서 이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활동 목적이 음란물의 전면 규제라기보다는 음란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이 음란물 제작자를 가해자로 고소할 수 있게 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컨대, 어떤 비현실적인 하드코어 포르노를 본 남성이 자기 아내를 대상으로 그것을 재현하려는 통에 아내가 성적 학대를 당했을 때, 이 아내는 하드코어 포르노를 제작한 사람을 가해자로 고소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음란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 중에는 음란물 출연 여배우 역시 포함되며, 실제로 드워킨-맥키넌 그룹은 이들의 인권을 적극 강조한다.[3] 흔히 김영란법을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서강대 법학대학원 석좌교수이며,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페미니즘 진영에는 국내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라는 기록으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