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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1 23:04:37

인간관

1. 개요2. 철학에서의 인간관3. 종교에서의 인간관4. 현대 생물학심리학에서의 인간관
4.1. 진화론적 인간관4.2. 정신분석학적 인간관4.3. 행동주의적 인간관4.4. 인본주의의 물결4.5. 인지주의의 도래4.6. 뇌과학의 출현과 신경 환원주의 논쟁4.7. 생명공학초인본주의
5. 현대 사회과학에서의 인간관
5.1. 현대 사회학에서의 인간관5.2. 현대 경제학경영학에서의 인간관
5.2.1. X-Y 이론
5.2.1.1. 고전적 인간관: X인간관5.2.1.2. 자기실현적 인간관: Y인간관5.2.1.3. 조직이론에서의 적용5.2.1.4. 심리학의 매슬로와의 비교
5.2.2. Z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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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人間觀, (영어)human condition[1]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념이다. 한줄로 요약하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2. 철학에서의 인간관

흔히 인간관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철학적 성찰의 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사실 그 생각이 맞는데, 인간에 대한 관심은 철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철학은 자연의 보편적 본질과 윤리적 규범이 본질을 묻는 방향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자연을 인식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로서의 인간에게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즉,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은, 그 자체가 우리의 주관에 그대로 받아들여 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인식능력이 가진 모종의 한계로 인해 다소 우리 주관에 맞게 고쳐져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몇 몇 특수한 지각이 있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의 주관적인 인지 능력으로는 초음파방사선을 감지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오감 역시도 다른 동물들보다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 물론 그 동물들보다 나은 부분도 있고 말이다. 또한 사람들마다 신체 상태에 따라 인식하는 능력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과연 그러한 인식들 중 어떤 인식이 가장 정확한 인식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자연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 그 자체의 본래 모습을 탐구하고자 했던 철학자들의 의지는 이렇게 상대주의적인 귀결에 주춤하고 만다. 역사적으로는 고대의 소피스트들이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방법으로 그 이전 철학자들의 주장을 공격했다.

결국 자연 그 자체를 알고자 하던 의지는, 그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에게로 옮아가게 된다. 인간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면 그 너머에 있는 자연의 본질도 생각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윤리적 규범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들이 기존에 신적 질서로 믿어지던 전통적 관습과 법률을 공격해서 상대화함에 따라, 소크라테스 등의 철학자는 그것을 다시 정립하고자 하면서 한편을 윤리적 규범의 행위자인 인간에게로 관심을 옮기게 되었다.

철학에서는 인간관에 대해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 마디로 쉽게 요약할 수 없다. 하지만 대체로 인식 능력의 토대에 따라 합리주의경험주의의 인간관을 대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철학에서는 개인주의적 인간관과 공동체주의적 인간관 역시 계속해서 대립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1. 플라톤

잘 알려진 이데아론에 따르면, 개별적 자아와 개별적인 인간은 현상계의 일종의 가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귀결이 나온다.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서구 사회에 '가장 인간다운, 가장 완전한 인간상이 있을 수 있다'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러한 인간상을 기초로 하여 가장 완성된 상태의 인간성을 갖추고자 하는 노력이 서구 문명에서 계속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중세 기독교 역시 이런 방향으로 수용 되었다.

인간의 내면을 이성욕망으로 대별하고, 둘 중 이데아를 직관하는 능력을 갖춘 이성이 욕망을 적절히 통제 해야 한다고 본 것 역시 플라톤에서 시작된다.

2.2.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 최초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두 명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인간에게는 다른 생물들에게는 없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자연 현상의 원인을 탐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어떤 대상의 원인이란 곧 그 대상의 본질을 의미한다. 예컨대 지금 눈앞에 있는 컴퓨터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그것을 재료적으로는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고, 형태는 육면체이며,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고, 전기를 통해 작동하는 것 등등의 정의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컴퓨터의 원인이며, 구체적으로는 각각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에 해당한다. 이러한 원인들은 곧 컴퓨터의 본질이고 그러한 본질이자 원인인 것을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은 그 대상을 도구적으로 잘 활용할 수도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위계를 설정하고 그 위계상 인간은 다른 여느 동식물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 특별한 존재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후 중세와 근대를 거쳐 서구 문명의 철학 사상과 과학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 되었다.

한편 윤리학과 정치학에서는 그는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 공동체에 속해서 역할을 갖고 참여하는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보았다. 사실 개인주의가 근대에 탄생한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이러한 시각이 보편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3. 르네 데카르트

근대의 데카르트는 중세 기독교의 신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 분위기를 간파하고, 인간 이성이 중심이 된 사고 체계를 만들어 낸다.

사실 현대의 서구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관은 대강 보았을 때 데카르트의 인간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인간관은 다소 장황하고, 이후의 칸트 같은 철학자들의 인간관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크게 세 가지 실체로 나눈다. 즉 , 정신, 물질이 그것이다. 인간은 물질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정신을 갖고 있는 존재자이다. 즉, 인간은 신체적으로는 자연적인 물질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신체적 욕망에 이끌리지만, 내면세계는 정신적인 세계에 속해 있어 물질적 자연법칙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신체 역시 자연적 탐구의 대상으로 다루고자 했던 당시 시대의 흐름에 부응할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과 종교가 물질과학과 독립해서 존립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데카르트는 인간과 달리 동물은 영혼이 없으며, 영혼이 없다는 것은 곧 정신이 없는 것이고, 자유로운 의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만든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2.4. 데이비드 흄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인간은 순전히 생리적 신체일 뿐이다’라고 답할 철학자는 많지 않다. 오히려 그런 대답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 종래의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과정이다.

대체로 철학자들은 ‘인간이 단순히 생리적인 신체일 뿐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자아’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데카르트 역시 자아로서의 이성적 정신을 물질적 신체보다 존재론적, 인식론적 우위에 두고 있다.

하지만 흄은 이런 관념을 해체한다. 우리의 인식과 행위를 통일시켜주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관념일 뿐이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의 이론은 이성적 자아에 기반을 둔 근대의 합리주의적 인간관과 합리주의적 윤리를 분쇄하고, 그 자리에 경험주의적 인간관, 더 나아가 이후 시대의 공리주의적 인간관을 정초하는 작업이 된다.

2.5. 쥘리앙 오프레 드 라 메트리

라 메트리는 근대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을 더 밀고나가면서 흄의 경험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는 인간의 정신으로서의 자아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간기계론’을 제시한다. 인간이란 순전히 물질적 존재일 뿐이며, 물리적이고 생리적인 신체의 작용에 따라 욕망을 품기도 하고 행동을 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행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생리적 신체의 작용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이다.

2.6. 임마누엘 칸트

항목참조.

2.7.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카를 마르크스

항목참조.

2.8. 마르틴 하이데거와 철학적 해석학

서구 철학의 합리주의적 인간관은 경험 과학의 발전에 의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찰스 로버트 다윈의 진화론부터 시작해서 경험적 심리학은 인간의 내면이 합리적 판단에 따르기보다, 오히려 흄의 말대로 욕망과 감정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그저 다른 생명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연적 존재가 되고 만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독자적 특징을 성찰하고 싶었던 철학자들의 기획은 이렇게 무너지는 듯 보였다. 더구나 경험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심화된 근대적 기술 문명의 발달은 기술과 관료 체제 그 자체가 중요하며, 정작 그 기술과 체제를 향유하려던 인간은 도리어 그 체제에 속박되어 버리고, 개체적인 고유함이 중요시 여겨질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만들고 말았다. 즉, 인간소외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필두로 한 독일과 프랑스의 철학적 해석학은 인간의 독특함을, 인간의 언어로 쓰인 역사에서 찾고자 한다. 그들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갖고 있다. 인간만이 단순히 스스로를 자연 현상에 속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또 자신의 시간적 삶 속에서 다층적인 의미를 길어내는 것이다.

2.9. 실존주의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특히나 중요하게 여긴다.

현대 과학은 모든 자연적 현상에는 원인이 있으며, 원인에 따라 필연적으로 결과가 뒤따른다고 말한다. 대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은 이런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연적 사물들은 저마다 본성상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따라 변화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적인 씨앗이 자라 꽃이 되는 것도, 올챙이가 자라 개구리가 되는 것도 자연적 인과관계에 따른 것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자체의 본래 목적을 자연히 따르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만이 이러한 인과관계를 포착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결단할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자유는 과학적 탐구를 벗어나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철학의 고유한 과제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3. 종교에서의 인간관

3.1. 유대교

선민인 유대인과 그 이외의 사람들로 구분된다.

기독교의 모태가 된 유대교는 이러한 타락 속에서 인간은 신의 엄격한 명령, 즉 계명을 철저히 지킴으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여기서는 주인과 노예처럼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3.2. 기독교

서구 종교의 대표격이 되는 기독교는, 철학적 인간관과 생물학적 인간관과는 구분되는 신학적 인간관을 따로 상정하게 된다. 현대에 들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보통 사람들이 대개는 생물학적 인간관만을 갖고 인간을 파악하거나, 아니면 그 위에 합리성과 도덕성, 그리고 역사성이 기초가 되는 철학적 인간관을 더불어 생각하는 반면, 기독교 신자들은 그 위에 신학적 인간관을 하나 더 상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 테마는 과 인간의 관계이다. 또한 기독교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서사', 즉 신과 인간이 펼치는 장대한 이야기를 갖춘 것으로 믿는다. 신은 처음에는 인간을 자신과 닮은 모습으로 만들었지만, 인간은 신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었고, 원죄를 갖게 되었다. 사실 이 원죄의 관념은 고대적인 연좌제적 성격을 갖고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12세기의 신학자 요아킴은 예수의 도래 이후, 신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어 흡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와 같은 관계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예수의 복음을 통해 신의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요아킴은 이후 재림할 메시아의 시대에는 인간이 지적 이성을 통해 신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이외 기독교적 인간관은 여기서 간단히 이야기하기 불과하니 관련 항목을 참조하길 바람.

3.3.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기독교가 전 세계를 선교하겠다는 이념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무슬림이 된다는 것은 단번에 신앙적으로도 모종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을 가장 우위에 놓고, 계전의 백성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그 다음에 놓아 어느 정도 포용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하며, 다른 종교나 무신론자들은 가장 아래에 놓는 수직적인 인간 관념을 갖고 있다.

3.4. 힌두교

인도의 모든 종교는 윤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윤회에 의해 인간과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동물들도 내세에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이 동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도 계열 종교들은 대체로 윤회 상에서 인간이 다른 자연적 존재자들보다 높은 위계를 가진 것으로 그리곤 한다.

힌두교는 카스트 제도 상의 계급 역시 전생의 (業)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즉, 전생에 좋은 일을 했다면 좀 더 높은 카스트로 환생한다는 뜻이다.

힌두교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단계는 윤회의 굴레 자체를 벗어나, 더 이상 다시 환생하지 않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사실 동물과 인간, 그리고 카스트상의 계급 차이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인간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 역시 인간을 고된 현생에 집착하게 하여 계속해서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개별적 자아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 즉 브라흐만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현상 세계의 모든 것이 한갓 가상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유일한 실체인 브라흐만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닫는 자는 해탈하여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3.5. 불교

불교는 인간의 개별적 자아란 한갓 가상이며,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고된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힌두교와 같다. 그러나 불교에 따르면 인간은 거대한 유일 실체인 브라흐만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적인 세계관에서는 실체라 할 만한 것 자체가 없다. 불교의 '(空)' 관념은 이렇다. 세계는 실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공(空)이며, 다만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된 '연기'만 있을 뿐이다.

불교 사상은 귀결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개별적 자아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상은 60~70년대 생태주의의 발전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4. 현대 생물학심리학에서의 인간관

이하에서 보듯이 심리학개론 시간에 줄창 배우는 내용들이 등장한다. 생물학, 특히 심리학의 역사는 그 자체로 이미 인간관의 변화무쌍한 변천의 역사이다.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을 묘사하고 그리는 방식이 천지차이로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전부 교집합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철저하게 대립 관계인 것은 아니다. 크게 보아서 "인간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nature-nurture 논쟁), "인간은 고정 불변의 존재인가 변화 가능한 존재인가"(trait-state 논쟁), "인간은 동물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는가, 아니면 동물과는 다른 무언가인가", "인간은 생물학적이고 생리학적인 구성물의 집합체인가, 아니면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더 큰 무언가인가"(환원주의 대 전체론의 논쟁) 등의 기준들이 있는데, 각각의 입장은 저마다 이에 대해 서로 공감하기도 하고 서로 대립하기도 하는 관계이다.

4.1. 진화론적 인간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arwin_cartoon_(London_Sketchbook).jpg
(출처)
찰스 로버트 다윈의 《종의 기원》 이 서구권의 전통적 인간관을 뿌리째 뒤흔들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의 저서가 출판되기 전까지, 서구의 일반적인 인간관은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존엄한 인간상을 제시했던 중세 이전의 영향을 받아 왔다. 즉 인간의 모습은 곧 신의 모습이었고, 이러한 우월성은 인간을 평범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만물의 영장'으로 격상시켜 주었다. 즉 다윈 이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깊든지 간에 평범한 동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다윈의 등장과 함께 거대한 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다윈의 책들을 통해 일견 정적으로 보이던 생물들의 분류가 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보이게 된 것에 더하여, 인간 역시 동물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하는 인식이 대두된 것이다. 물론 린네처럼 인간을 동물의 한 종류로 보려는 다양한 시도는 있어 왔지만, 다윈만큼 기존의 인간관에 막대한 파장을 몰고 온 사람은 그 이전에는 없었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던 장벽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끌어내렸다면, 다윈은 인간을 동물의 한 종류로 만들었다" 는 얘기까지 나왔다.[2] 이는 동물에 대하여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관점이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찌보면 훗날의 행동주의적 사고는 진화론에 의해 변화된 인간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진화심리학은 이 흐름을 충실히 이어받은 학문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심리학 및 가족심리학, 생물심리학, 정서심리학, 사회심리학 등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인간의 정신에 진화가 영향력을 끼치려면 수만 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양복 입은 원시인에 불과할 뿐이다. 수십, 수백만 년 전에 적응적이던 특징이 지금도 적응적일 거란 보장은 없지만, 진화는 그렇게 빨리 반영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먼 옛날 수렵채집 시절에 맞게 튜닝되어 있고, 맹수의 습격과 식량의 부족을 극복하도록 세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장 비만이 그때 그 시절만 해도 가장 적응적인 건강관리 방법이라는 점만 생각해도...

현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때건 지금이건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우월성 내지는 고유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이며,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이게 되거나 취급받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는 집단은 은연중에 인간 이하의 존재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보고도 많이 있다. 이를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누구도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측면들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발견도 있다. 이는 따로 인간의 동물성 부정(human creatureliness denial)이라고도 한다. 이는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갈아넣어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는 어째서 (종교와는 무관한 경우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의 관점에 그렇게 부담감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4.2. 정신분석학적 인간관

20세기 인류 지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로 항상 거론되는 프로이트는, 비록 그가 극히 논쟁적인 위치에 있다고는 하더라도, 심리학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서구 인간관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이 그의 존재로 인해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오해를 갖기도 하지만, 실제로 20세기 중엽까지 학계를 리드하던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정신분석학자 출신의 볼비(J.Bowlby)는[3] 오늘날까지도 심리학개론 수준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이론인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창시하여 유명해진 바 있다.

정신분석학이 인간관에 끼친 가장 큰 기여는 인간의 천성적이고 고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 그 자체가 현대 생물학에서 말하는 유전자 결정론적인 관점을 취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인간의 성품이 사회의 영향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조성된다는 대립적인 관점과는 사뭇 달랐다.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모자녀 간 관계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지만, 한 인간 내에서 일단 형성된 어떤 (대다수의) 측면들은 이후의 인생 내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인생 전체가 유년기의 경험(특히 5세 이전의 경험)에 의해 사실상 완전하게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단순명료한 아이디어로부터 현대 심리학의 거대한 두 갈래를 이루는 테마, 성격(personality)과 발달(development)이 튀어나왔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두 주제에 대해 물론 프로이트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설명을 하지만, 그 분야를 본격적인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낸 것으로 따지자면, 프로이트는 사실상 시조와도 같은 셈이다. 5세 이전의 인간의 발달, 그리고 그 이후의 평생을 지배하며 불변하는 성격. 한 인간의 내면은 이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했다.

프로이트는 또한 인간에 대해 기본적으로 병들어 있는 존재로 보았다. 물론 이것은 프로이트가 자신에게 찾아온 소수의 내담자들을 바탕으로 만든 관점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를 자유롭게 개인의 생각을 표출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심도 있게 탐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의식의 의식화(unconscious conscious)와 훈습(workthrough)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활용하기로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물론 인간의 의식을 탐구하기로는 자유연상 이전에 최면술을 비롯한 몇몇 방법들이 있었다지만, 프로이트 이전의 인류에게는 "정신이 병들 수 있다" 는 아이디어 자체가 낯설었다. 흔히 말하는 "미친 놈" 에 대해서는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가혹하게 매질을 하거나, 굶기거나, 골방에 처박거나, 수용소에 감금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다. 실제로 프로이트 이전의 정신병 치료법 중 제도권에서 받아들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신병자들끼리 모아 놓고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춤을 추게 하기" 였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가 그 문제가 사실은 무의식 속의 원초아와 초자아의 싸움 때문이라는 (당시로서는) 탁월한 통찰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다윈은 인간을 동물로 끌어내렸고, 프로이트는 인간을 병든 동물로 끌어내렸다" 고도 한다.

4.3. 행동주의적 인간관

행동주의는 그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배경을 철저히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측면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말했던 무의식 같은 것은 애초에 그들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인간의 외현적인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ex. 기억, 감정, 의사결정, 판단, 표상, 통찰 등) 애초에 과학적 연구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 연구를 통해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심리학 연구방법론의 발전과, 톨먼(E.Tolman)의 인지도(cognitive map) 및 쾰러(W.Koehler)의 통찰학습(insightful learning)과 같은 여러 연구들을 통하여 깨지게 되었다.

이들은 자극-반응 이론(S-R theory)에 의거하여 인간을 기본적으로 외부 자극에 대하여 적절하게 능동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존재로 여겼고, 효과의 법칙(law of effect)에 따라서 좋은 결과가 돌아오는 행동은 더 많이, 나쁜 결과가 돌아오는 행동은 더 적게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인간은 매우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행동의 변화를 통해 학습을 측정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학습의 대전제가 되는 여러 기본 가정들을 세우기도 하였다. 손다이크(E.L.Thorndike)가 대표적.

인간이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존재라는 이들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끌었다. 프로이트적인 결정론과는 달리, 이들은 적절한 조건형성만 갖추어진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교하고 어려운 행동이라도 조성(shaping)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아무리 길고 복잡한 일련의 행동들이라도 연쇄(chaining)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건화를 통해 변화하는 행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개인의 본유적인 측면들은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스키너의 상자 속에서 똑같을 뿐이었다. 왓슨(J.B.Watson)이 대표적.

또한 이들 역시 생물학의 선대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행동주의에서 인간을 설명할 때 "인간은... 이러하다" 로 설명하지 않고 굳이 "유기체는... 이러하다" 고 설명하는 것은 그 때문. 가 그렇듯이 고양이가 그러하고, 또한 사람이 그러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얻어진 결과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아도 고스란히 재현되었다고 보고했다. 계속 언급하지만, 인간이나 동물이나 조건형성을 했을 때 반응하기로는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4.4. 인본주의의 물결

인본주의 심리학의 북극성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자 로저스(C.Rogers)를 비롯한 일군의 임상가들은 인간을 그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향하여 현실의 자신을 이끌어 가는 존재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성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며, 현 상태에 만족하거나, 심지어는 자기파괴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슬로(A.Maslow)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의 경우는 긍정적 성장에 반드시 전제되고 우선시되는 다른 욕구들이 미처 채워지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이들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주관적 경험의 가치에 주목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느낌과 기분, 정서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아니, 인간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로저스의 발언처럼, "우리는 석양이 지는 것을 그저 경외심을 갖고 바라볼 뿐,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고 할 수 있다. 행동주의자들이 이 학풍을 싫어합니다. 심리학의 다양한 접근법들 중에서도 행동주의와 인본주의는 공통점을 찾기가 극히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다르다.

이처럼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주관성 자체를 긍정하기 때문에 사회 구성주의와도 접점이 많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나름대로 구성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에 대해서만큼은 타인이 함부로 "터치" 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관점이므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함부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은 인본주의 심리학에서는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오히려 각 개인이 구성한 세계는 무조건적 수용의 대상이며, 여기에는 인간 중심 치료를 실시하는 상담가의 세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4.5. 인지주의의 도래

이 분야의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4] 정보처리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과 같은 새로운 흐름은 종래의 인간관을 다시 한 번 뒤바꾸어 놓았다. 기존의 행동주의가 자극에는 곧바로 반응이 따라온다(S→R)고 주장한 반면, 이들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블랙박스" 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외현적으로 관찰될 수 없는 마음 속의 변화이며, 이러한 심적 과정(mental process)은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심리학의 영역이 되었다.[5] 이는 기존의 학습심리학 분야에서 유기체가 주체적으로 기억하고 판단하고 환경을 표상한다는 근거들이 "더 이상은 양탄자 밑으로 밀어넣기 힘들 만큼"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사후 오랜만에 다시 인간의 보이지 않는 면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6]

이 시점에서 세계는 "컴퓨터" 라고 불리는 새로운 첨단의 기계의 원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철학자 퍼트넘(H.Putnam) 등이 그 효시이다. 오늘날 유명한 인물로 인지철학자 데닛(D.Dennett)도 있다. 일군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도 컴퓨터의 논리와 은유를 빌려다가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7] 라는 상상을 했고, 이를 가지고 컴퓨터로서의 마음 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을 실제로 만들었다. 이것이 다시 몇십 년이 지나서 정말로 인공지능을 비롯한 로봇공학이나 최첨단 컴퓨터공학 분야에 응용되는 걸 보면 정말이지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런 관점을 따르는 인지과학자들은 인공지능 연구에도 자주 협업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알파고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학습 연구 역시 그 원류를 찾아가다 보면 이쪽으로 이어지게 된다. 공학과는 별개로, 이는 또한 심리철학이라는 새로운 학제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이 당시의 많은 인지과학 이론들이 기계로서의 인간을 그리면서, 인간의 심적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들이 크게 뒤바뀌었다. 외현적 행동의 변화 정도로 간주되던 학습의 의미는 이제는 장기기억에 저장되는 정보들의 변화로 환원되었고, 환경적 맥락이나 상호작용, 외부 자극들이 전부 싸잡아서 "정보" 로 환원되었다. 앳킨슨-시프린(Atkinson-Shiffrin) 모형에서의 부호화(encoding)나 반출(retrieving) 같은 용어들, Baddeley-Hitch 모형에서의 중앙집행기(central executive)나 음운루프(phonological loop) 및 일화적 완충기(episodic buffer), 시공간 보조기억장치(visuo-spatial scratchpad) 같은 용어들을 보자면 이 인간들이 지금 인간의 마음을 묘사하려는 건지 아니면 웬 컴퓨터 썰을 푸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그렇다면 이 관점은 인간을 (행동주의처럼) 수동적으로 볼까, 아니면 (인본주의처럼) 능동적인 존재로 볼까? 오늘날의 인지과학자들의 대부분은 어느 한쪽으로 크게 쏠리지는 않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어차피 지나친 결정론적 접근은 위험하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고, 인간에게는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으레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견 이 관점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정보들을 개인이 "단지" 처리할 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작업기억에 관련된 연구들은 인간이 정보를 처리함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능동적 특징을 보여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본성이냐 양육이냐의 논쟁에 있어서도 이들은 양쪽 모두를 함께 고려한다. 즉 인간에게는 타고난 인지적 능력의 한계와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후천적인 개입이나 학습, 변화를 통하여 인지적 처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기억술.

4.6. 뇌과학의 출현과 신경 환원주의 논쟁

이전에도 뇌가 사고의 근원일 것이라는 연구는 지속되어왔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신경영상학(neuroimaging)이 발전하면서 미스터리로 보이던 의 정체를 속속들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신경과학(뇌과학)이 태동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은 결코 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뇌에 대한 사실들이 밝혀질수록 기존 심리학의 질문들이 해결되고 있다. 뇌전도를 측정하고, MRI나 fMRI와 같은 비싼 장비들을 활용하여 뇌의 활성화를 확인하면서, 개인이 경험하는 심적 과정과 외현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에 대응되는 뇌 영역이 있을 거라는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학자들은 심지어 "두뇌혁명" 이라는 표현을 붙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발전에 도취한 일부 학자들은 "모든 심리적인 현상은 곧 생물학적인 현상이다"(Every psychological is biological)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모든 심리적인 과정과 변화는 전부 생물학의 언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의 "기계로서의 인간" 이라는 은유와도 묘하게 연결되는 이 관점은, 이미 생기론이 죽어 사라진 서구 과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단순히 뇌 영역의 활성화를 연구하는 흐름에서 더 나아가, 그 활성화의 패턴이 인간 심리의 전부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학계의 오랜 논쟁이자 서구 지성의 최대의 장점이자 한계로 꼽히기도 하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고 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단지 수많은 다양한 세포들의 집합에 불과한 것이다." 신경윤리학자이자 저술가인 해리스(S.Harris)의 시큰둥한 코멘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사랑과 증오, 모든 격정적인 감정은, 단지 "한 다발의 뉴런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로 인간은 그 정도뿐인 것인가? 신경과학의 발견이 인간 전체를 온전하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는가? 심리학은 마침내 성배를 발견한 것일까?

사실 이는 굉장히 논쟁적인 것이다. 당장 많은 신경심리학자들은 그렇게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며, 비서구권 연구자들이나 사회심리학, 문화심리학 연구자들도 무척 난색을 표하는 발상이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그들의 발견을 통해 인간 자체를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축하는 동안, 이들은 인간의 본질을 새로운 방향에서 조명했다고 평가할 뿐이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퍼즐 조각들을 제대로 맞추었다고 생각하는 반면, 이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새로운 퍼즐 조각 하나를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신경 환원주의자들이 "사랑이란 단지 시냅스 사이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의 흐름 그 자체일 뿐입니다" 라고 말하는 동안, 이들은 "개인이 사랑을 느낀다고 보고하는 것과, 개인 내부의 옥시토신의 분비량 사이에는 상관관계(correlation)가 존재합니다" 고만 말하는 데 그친다. 환원주의자 : "OK! 설명 끝! 야 신난다!" 비환원주의자 : "좋아... 변인 하나를 더 찾아냈어..." 꼭 양자역학에서 확률 및 다중우주론으로 얼버무리는 것과 어떻게든 정확한 원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서로 비교해 보는 것 같다.

물론 사랑이 옥시토신만으로 온전히 설명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는 창발(emergence)이라는 것이 존재하니 문제가 된다. 즉, 인간의 마음은 뉴런들의 상호작용만으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여기서 복잡하다는 것은 설명 자체의 불가능성을 내포하는 "complicated"가 아닌, 더 복잡하게 설명되어야 한다고 암시하는 "complex"를 의미한다. 사랑을 느낄 때 옥시토신 분비량이 증가하는 경향만을 가지고 옥시토신의 이름을 사랑으로 바꾸어 부를 수는 없다. 그 개인이 처한 객관적 상황과 환경, 주관적 맥락, 사회적 상호작용, 문화적 영향 등이 전부 모여서 옥시토신의 분비와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사랑" 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시토신은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폄하와 배척, 거부, 방어적 행동과도 밀접한 정적 상관관계를 보인다. 아직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대해 단언하기에는 너무 많이 모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원주의보다 창발주의가 더 바람직한 것이냐고 한다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창발주의는 그나마 환원주의가 시도하고 있는 설명으로부터 더 많이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창발주의는 당장 그 창발이 무엇인지에 대한 엄밀한 설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창발의 개입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데 그치고 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은 뇌와 그 신경계가 만드는 신호 이상일 수 있지만, 어떻게 그 이상이 되는지, 얼마나 더 큰 개념이 되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그 메커니즘이 정확히 확인될 때까지는 차라리 창발이라는 개념을 배제한 설명을 더 선호할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기능주의에 관련된 심리철학자들의 논쟁과도 연결되어 있으므로, 더욱 정교한 학술적 논의에 관심이 있다면 존 설(J.Searle)의 "마인드" 같은 입문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도서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4.7. 생명공학초인본주의

현대 들어 공학기술이 발전하고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면서, 일부 서구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라는 사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제약 없는 발전과 그 무한한 응용을 주장하면서, 인간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제한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진화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이 진화해 나갈 방향을 예견하는 종이 되었다고 본다. 축적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은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개조하고 뜯어고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하며, 충분히 극복하는 존재가 된다. 이들은 이를 통해서 불로불사와 같은 영생을 획득할 수 있으며, 먹고살기에 급급한 문제를 떠나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생명 자체가 사실상 무한해진 만큼,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로 그들을 위협하는 종교나 각종 이데올로기에 무관하게)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아끼며 더 깊은 깨달음과 자기실현을 향해 애쓰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쉽게 말해서 과학공학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인본주의의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급진적이며 극단적인 형태이다. 기존의 인본주의자들이 교육의 힘을 강조하긴 했지만, 이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거리낌이 없고, 도리어 이를 초인류(transhuman)라 하여 이상적 목표로 삼는 것이다. 권위의 제재와 통제, 정부의 규제, 도덕과 윤리의 죄책감에 대해서 이들은 그것이 그저 낡고 시대착오적일 뿐이라고 여긴다. 특히 종교는 하루속히 던져버려야 할 과거의 유물로 취급한다.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지상주의낙관주의가, 기술을 통해 인류가 유토피아에 도달한다는 발상은 기술만능주의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발상에 모든 사람들이 전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이는 영미권 지식인들 중에서도 급진적인 일부의 담론에 머무르고 있으며, 독일 등을 비롯한 대륙권 지식인들과 비서구권 지식인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이라며 규탄하는 중.[8] 초인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인간에 대해서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의 힘만으로 인류가 한 차원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에는, 인류는 너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기술은 60억 인구에게 100%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채로 일부의 전유물이 될 것이고, 기술을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와 필연적인 간극을 발생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기꺼이 죽이기까지 하며, 이유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배척하려 하는 이 모습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그러한 부족한 모습으로서 350만 년의 세월을 이겨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관적인 사고 역시 비관적인 사고만큼 불안정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무언가에 대해 완벽하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때때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보다도 맹목적인 광기이자 그저 믿음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초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기술의 도움으로 인류는 "완성" 될 수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이미 인류 자체가 완성에 가까워져 있다는 마인드에 가깝다. 물론 어떤 이들은 정말로 방법만 주어진다면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고 사랑하고 베풀면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돌아보면 세상에 많이 있다. 하지만 초인본주의자들은 이들의 존재를 경시하거나, 이들로 인한 문제가 적절한 공적 교육 등을 통하여 "계몽" 시킴으로써 쉽사리 관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게 말은 쉬운데...

5. 현대 사회과학에서의 인간관

5.1. 현대 사회학에서의 인간관

주로 사회학자들은 사회실재론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회실재론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들의 총합 이상의 것이다. 개인들은 사회를 이룸으로써 개별적인 개인의 차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들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사회학인 것이다. 특히나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을 필두로 하여, 많은 사회학자들은 '사회화된' 인간관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후술할 경제학자들은 주로 개별적인 개인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들의 경제적 행위는 모여서 거시적인 차원에서 경제 현상을 만들어 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회'라는 실체가 만들어 낸다는 사회학적 견해와는 많이 다르다. 단순히 독립된 개인들이 모여서 만들어 냈을 뿐인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주로 개인의 이기적인 동기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으며, 타인을 굳이 고려하지 않으며, 공동체적 사회를 굳이 고려하지 않는 개인들의 이익추구가 결론적으로 경제 현상을 자연스럽게 균형 잡힌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본다.

요약하자면 사회학은 '과잉 사회화된' 인간관을, 경제학은 '과소 사회화된' 인간관을 기초로 학문을 전개한다고 볼 수 있겠다.

5.2. 현대 경제학경영학에서의 인간관

경제학에선 국가의 효용과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고 경영학에선 기업의 이익과 노동자의 생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학문을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점차 이것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1903년 테일러(F.W.Taylor)가 처음으로 제안한 "시간동작연구"(time & motion study)에서 간접적으로 제안되었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인간관은, 이후 1924년의 저 논란 많았던 호손 실험을 통해 반박되고, 이것이 다시 경영기법 내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극복되었다. 이후 이 두 가지의 대립되는 인간관은, 1960년 맥그리거(D.McGregor)의 저서 『기업의 인간적 측면』을 통해 X-Y 이론으로 명명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맥그리거의 관점을 따라 상반되는 인간관을 제시하기로 한다.

5.2.1. X-Y 이론

5.2.1.1. 고전적 인간관: X인간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암묵적으로 줄곧 취해져 왔던 인간관이라 고전적 인간관, 전통적 인간관이라 불린다. 그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일하기를 싫어하고, 가능하면 회피하려고 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하며, 지시되어야 하고, 처벌로서 위협받아야 한다.
  •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타인에게 지시를 받고 싶어하고, 책임지는 것을 피하려 하며, 야망이 없고, 무엇보다도 안전함을 추구한다.

출처는 Frederickson, 2011, p.103.

테일러 이전에도 이런 인간관은 있었지만 이것이 매우 대놓고(…) 반영된 것이 테일러가 주창한 "과학적 관리론"(scientific management)이며, 경영이나 행정 분야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개념이다.[9] 딱 보면 알겠지만 인간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이다.(…) 이에 따르면 이런 인간들을 데리고 일하기 위해서는 정말 특단의 통제와 강제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개인 대 개인의 관계의 관점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남이 뭘 하든, 뭐라 하든 철저히 개인적으로 움직이고 결정하고 활동하는 존재들이다. 결국 여기서는 집단 내 사회의 동적인 측면을 파악하기가 힘들어지게 된다. 또한 인간을 마치 기계처럼 인식하기에, 직원들의 사기복지와 같은 부분 역시 고려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또 중요한 것이,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 인데, 실제로 짐작하듯이 경제학이 바로 기본적으로 고전적 인간관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이를 통해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니 경제적 합리성[10]이니 하는 개념들이 등장한 것. 주류 경제학의 대부분의 이론들은 위와 같은 가정들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아주 완벽하진 못하더라도 충분한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받았다.

한편 스키너도구적 조건형성 역시 X인간관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보상이 있다면 뛰어들고 처벌이 있다면 피한다" 는 개념은 위의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개념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X인간관에 충실한 제도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의외로 적지 않다. 넓은 범위의 신상필벌 제도가 포함되는데, 포상에 관련된 것으로는 봉급, 보너스인센티브와 같은 것들이 있고, 처벌에 관한 것으로는 임금 삭감이나 강등, 이직, 해고, 기타 등등이 있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은 항상 감시되어야 하고 통제되어야 한다" 가 기본 전제이므로, 직원 컴퓨터 모니터링이나 기타 이런저런 감시비용 및 결박비용 역시 X인간관에 입각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5.2.1.2. 자기실현적 인간관: Y인간관
종래의 인간관에 반하여 새롭게 제시되고 조명받게 된 인간관으로, 마찬가지로 관련 내용을 옮겨 보기로 한다. 원문은 다소간 윤문하였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외적, 내적인 직업적 노력은 놀이나 휴식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 사람들은 그들이 정말로 헌신할 때 목표달성을 위해 자기통제력을 보인다. 외부의 통제나 처벌의 위협은 근면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 아니다.
  • 목표에 대한 헌신은 자기존중과 자기실현을 위한 보상으로 작동한다.
  • 여건이 따라 준다면,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은 책임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찾아나서기도 한다.
  • 많은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창의성이나 혁신까지도 보일 수 있다.
  • 대부분의 경우 개인들의 지적 능력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실제 지적 능력은 오히려 그 이상이다.)

상동 출처.

이런 관점이 사실상 처음으로 대두된 것이 저 호손 실험이다. 물론 해당 항목에도 있듯이 이 실험 자체는 방법론적으로 제대로 망했다.(…) 이를 통해 등장한 인간관계론은 테일러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11]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냐에 대해 제대로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초 스코틀랜드오언(R.Owen)이 이와 비슷한 노동개혁을 하긴 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쪽은 인간관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도주의적 측면에 가깝다.

딱 보면 알겠지만 어째 굉장히 마음에 쏙 드는(…) 좋은 표현들로 가득하다. 실제로 Y인간관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가능성을 표방하며, X인간관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질구질한(…) 모습들이 인간의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업무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은 더 많은 성과급으로 유인하고 유혹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의 직무 만족도와 자긍심을 높이고, 그들이 직무를 통해 자기계발을 하고 경력관리를 하는 기회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외적인 통제의 필요성을 격하시키며, 그 대신에 개인의 내적인 통제의 힘을 신뢰한다. 또한 "사람은 일하고 싶어한다" 는 메시지는 개인의 포부와 장래희망, 사회에 공헌하고 싶다는 욕구와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궁극적 완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욕구까지 모두 포괄한다. 이처럼 동기부여된 개인들에게, 과연 당근과 채찍이라는 외부의 압력을 굳이 행사할 이유가 있겠냐는 것.
5.2.1.3. 조직이론에서의 적용
흔히 오해하는 것이 "X인간관은 과거의 잘못된 인간관, Y인간관이 보다 정확한 인간관" 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인데, 양쪽 모두 나름대로의 현실 설명력을 지니고 있고 둘 다 인간의 양면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Y인간관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명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X인간관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대가를 정당하게 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일 같은 경우. 화장실 청소나 대한민국의 병역의무를 떠올리면 쉽다. Y인간관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한 실제적 제안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X인간관은 인간에 대한 디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쓴소리에 가깝다. 씁쓸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누구나 빈둥빈둥 놀고 싶다는 생각은 학창시절 동안 간절히 바라며, 하기 싫은 일을 만나면 피하려 하고, 그럴 수 없다면 보상이라도 받으려 하고,[12] 골치 아픈 일에 대해서는 가급적 책임소재에 엮이기 싫어하며 타인이 자신을 통제해 주길 바란다. 항상 자율적일 수도, 항상 타율적일 수도 없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일단 목적의식이 탑재된, 자기 삶을 위해, 그리고 조직을 위해 몸바칠 준비가 된 인재들이 일하기 시작하면 이때의 생산성은 X인간관에서 말하는 그런 마지못해 끌려와 일하는 사람들의 생산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보통은, Y인간관에 부합하는 인간들이 많은 조직이나 집단이 좀 더 바람직한 것은 사실. 결국 X-Y 이론은 근로자가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을 되돌아봄과 함께 경영자가 자기 조직의 현주소와 노동문화를 점검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외에도 한국적 인간관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W이론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인간을 "신바람" 이라는 개념에 따라 설명하려 한 이론.

한편 심리학에서도 내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와 외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라는 유사해 보이는 이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적 동기가 외적 동기에 비해 훨씬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3]
5.2.1.4. 심리학의 매슬로와의 비교
다시 인간관이라는 넓은 범주로 돌아와서, 위의 X-Y이론은 매슬로의 욕구위계설과도 연관성이 있다. X인간관은 일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욕구에 속할 수 있으며, Y인간관은 자기실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단계의 욕구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5.2.2. Z 이론

종래의 X-Y이론이 너무 흑백논리라 하여 Z이론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일본계 미국인 학자 윌리엄 오우치의 Z 이론은 '미국 속의 일본식 경영 방식'을 가리킨다. 오우치의 Z 이론에 기반한 조직은 영미적 개인주의가 아닌 일본적 집단문화로 운영되며, 조직 구성원의 종신 고용을 보장하고 직원을 '가족'과 같이 대우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또한 조직 구성원에 대해 장기적 평가를 하고자 하며, 상벌을 엄격히 하기 보다는 느슨한 통제를 시도한다. 조직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도 집단적 결정을 내리고자 하며, 이렇게 내려진 결정으로 얻는 결과에 대해서도 집단적 책임을 진다.

[1] 참고영어 위키백과[2] 서구권에 널리 퍼져 있는 이 관점은 사실 천동설에 대한 흔한 오해를 반영하고 있다. 천동설의 세계에서 우주의 중심은 가장 존엄하고 고귀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범속하고 하찮은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관련 위키 문서들을 참고. 라고 되어 있지만 정작 천동설 위키 문서를 참고하면 기독교의 지구 중심적 세계관과 천동설이 부합하며 강력히 옹호되었고 코페르니 쿠스가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끌어내렸다는 비유적 표현이 틀린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3]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클라인(M.Clein)의 슈퍼비전을 받았다.[4] 당장 정보처리 흐름과 사뭇 다른 피아제 역시 인지분야의 발달학자였다.[5] 현대 심리학에서도 심리학의 정의를 내릴 때 "외현적인 행동과 심적인 과정" 에 대해 과학적으로 탐구한다고 말하면서 양쪽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6] 이 이후로 무의식에 관련된 연구들은 프로이트와 별개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재개되었다. 재미있게도 연구자들은 무의식(unconscious)이 아니라 비의식(nonconscious)이라는 단어를 새로 만들어서 쓰는데, 그 조어법 자체가 비유하자면 북한이 싫다고 인민(people)을 "국민" 으로, 동무를 "친구" 로 바꿔 쓰는 거랑 비슷한 계기라는 것.[7] 물론 이 당시의 컴퓨터라는 물건이 튜링 머신 수준이라는 걸 고려할 필요는 있다.[8] 참고: "나는 미래 세대가 유전적으로 보수적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들은 장애를 야기하는 결함을 치료하는 것 외의 유전적 변화를 거부할 것이다. 정신 발달의 후성 규칙과 감정을 보존하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요소들이 종의 물리적 영혼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감정과 후성 규칙을 충분히 변화시켜라.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나아질 수 있어도 더 이상 인간은 아닐 것이다. 순수한 합리성을 선호하도록 인간 본성의 요소들을 중화시켜라. 그러면 남는 것은 조악하게 구성된 단백질 컴퓨터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수백만 년의 생물학적 시행착오를 통해 형성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핵심을 포기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p.476 <통섭>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 장대익 옮김, 사이언스 북스[9] 다만 테일러가 인간 자체를 게으르게 보았다는 것은 맞는 설명은 아니다.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론을 주창하던 시기에는 비합리적이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 경영이 보편적이었다. 당시의 비합리적인 경영 행태 때문에 노동자들은 일을 할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이 되었고, 때문에 일부러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테일러는 그러한 비합리적 경영 실태가 생산성에 악영향을 준다고 보고 이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 대책으로 노동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안한 것이다. 테일러는 그 외에도 노사협력,공정한 이익 분배 등을 주장했다. 애초에 테일러 본인부터가 노동자이기도 했고... 자세한 것은 프레더릭 테일러 항목과 과학적 관리론 항목을 참조.[10] 이것도 나중에 사이먼의 "제한적 합리성" 개념에 의해 반박당하게 된다.[11]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관리의 영역에서 "인간 활동 역시 조작될 수 있다고" 접근했기 때문.[12] "이건 좋아서 하는 게 아니야.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와 같은 상투적인 표현이 인간의 이와 같은 X이론적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13] 물론 외적 동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개념과 동일시하거나 일체화함으로써 유용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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