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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명 | タモリ|타모리[2] |
본명 | 森田一義|모리타 카즈요시 |
출생 | 1945년 8월 22일 ([age(1945-08-22)]세) |
일본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미나미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1cm, 52kg, O형 |
가족 | 아내 (1943년생)[3] |
직업 | 게닌, 사회자, 배우 |
소속사 | 타나베 에이전시 |
데뷔년도 | 1976년 |
학력 | 와세다대학(철학과 / 제적[4]) |
현재 진행 중인 프로 | 뮤직 스테이션 (테레비 아사히), 기묘한 이야기 (후지 TV)[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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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MC, 개그맨.일본의 국민MC이자[6], 아카시야 산마, 비트 다케시와 함께 일본 게닌 BIG 3로 일컬어지는 거물 연예인이다.
2. 일생
2.1. 학창 시절
1945년 8월 22일 후쿠오카에서 태어났다. 타모리가 어릴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기 때문에 그는 조부모님의 보살핌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때 타모리의 할머니는 "부인이 요리를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남자도 요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에게 일찍이 요리를 가르쳤으며 이후 요리하는 것이 취미가 된 덕분에[7] 타모리는 요리 실력이 무척 뛰어나서 웬만한 음식은 다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연예인으로 데뷔한 후에는 동료 연예인들을 초대해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모임을 자주 연다고.타모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하교 중 철조망에 눈을 부딪히는 사고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한 쪽 눈을 잃고부터 아마추어 무선에 관심을 가지게 된 타모리는 후쿠오카 현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기통신대학을 노렸지만 물리학 점수가 안돼서 낙방, 1년간 재수를 하였다. 수험생 시절,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한국과 중국의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8] 이것은 훗날 타모리의 트레이드마크인 '6개 외국어 흉내'의 기초가 되었다.
1965년 타모리는 와세다대학 제 2문학부[9] 서양 철학 전공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취미로 트럼펫을 연주했던 타모리는 대학 입학 직후 '모던 재즈 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가 트럼펫을 맡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은 울고 있는데 네가 연주하는 트럼펫은 웃고 있다."며 동아리 선배가 그의 연주를 비판하기도 했고 타모리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악기를 연주한 사람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입한지 3일만에 악기 연주에서 손을 때고 동아리 매니저와 공연 사회자를 겸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회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TBS의 라디오 프로그램 '대학생들의 밴드 대결'이라는 프로에서 학생 측 사회자로 나와 프로그램 사회자였던 오오하시 쿄센(1934~2016)[10]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타모리'라는 예명도 이 때 동아리 동료들이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타모리는 2학년 1학기까지 마친 후, 등록금을 미납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2학년 5월 골든위크 때 친구 2명과 여행을 계획했는데, 돈이 부족하자 부모님이 다음 학기 등록금으로 쓰라고 송금한 돈을 여행용으로 유용했다고 한다.[11] 하지만 제적당한 후에도 한동안 동아리 매니저로 계속 일하면서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
2.2. 후쿠오카 시절
1968년 대학 동아리 매니저를 그만둔 타모리는 아사히 생명에서 보험설계사로 근무했으며, 1970년 직장 동료였던 2살 연상의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다. 1971년, 타모리는 부인과 함께 아사히 생명에서 퇴사하고 고향 하카타로 돌아와서 볼링장, 우동 가게[12] 등을 열었으나 모두 망했다. 이후 타모리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자신이 재즈와 커피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장점을 살려서 카페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그러던 1972년, 타모리의 인지도를 연예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날, 타모리는 대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고 지금은 재즈 연주자 와타나베 사다오의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회사의 직원인 친구와 그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만취한 타모리는 막차 시간대가 가까워가자 친구와 헤어지고 호텔 복도를 거닐다가 열려있는 방 안에서 와타나베의 콘서트에 동행한 재즈 연주자 그룹인 야마시타 요스케 트리오(야마시타 요스케, 나카무라 세이치, 모리야마 타케오)가 가부키 춤을 흉내내거나 콩트 등을 하며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을 목격, 그곳에 난입하여 나카무라 세이치 주변에 있던 휴지통을 가면 삼아 가부키를 추기 시작했다. 곧 나카무라가 재치있게 타모리의 무례를 어설픈 한국어로 지적했고 타모리는 더 잘하는 어설픈 한국어로 이를 받아쳤다. 이윽고 타모리와 나카무라의 엉터리 외국어 대결이 시작되었다. 타모리가 표정까지 흉내내며 엉터리 아프리카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야마시타는 호흡 곤란이 될 정도로 웃었다고 한다. 첫차가 나오는 시간까지 신나게 논 타모리는 자신의 성씨인 '모리타'만 말해주고 돌아갔다.
이후 자신의 얼굴을 알아봤으니 타모리가 재즈 팬이 틀림 없다고 확신한 야마시타는 하카타의 재즈 바에서 '모리타'라는 이름의 남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어떤 재즈 바에서 '주인이 4차원인 것으로 유명한 카페가 있는데 그 카페 주인 이름에도 모리타가 들어간다.'라는 정보를 듣고 둘은 재회한다.[13] 재회 후 야마시타 트리오는 큐슈에 갈 때마다 타모리의 카페를 방문하여 같이 놀게 되고, 트리오의 소개로 타모리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해져서 급기야 1975년부터는 타모리가 한 달에 한번 도쿄로 상경하여 개그를 펼치는 '전설의 큐슈 남자 모리타를 만나는 모임'이 열리게 된다.
타모리와 아카츠카 후지오
1975년, 야마시타 트리오의 추천으로 개그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가 모임에 참여하였고 소문으로만 듣던 타모리의 즉흥 개그[14]를 직접 보고 감탄한 아카츠카는 그해 8월 말 생방송이 있었던 자신의 프로그램에 그를 출연시키기로 결정, 타모리는 <만화 대행진 아카츠카 후지오 쇼>(1975년 8월 30일 방송)에서 일반인 신분으로 난생 처음 TV에 출연하게 된다. 이 방송에서 타모리가 선보인 개그는 일명 '타모리 신부'. 타모리가 기독교의 신부를 흉내내며 엉뚱한 내용의 설교를 하는 개그였다.[15] 운좋게도 이때의 그를 아카츠카 후지오의 절친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16]가 보고 "저렇게 웃긴 사람이 왜 여태 개그맨으로 데뷔하지 않았지?" 하고 생각하여 타모리를 자신의 토크쇼에 게스트로 섭외, 2번째로 TV에 출연하게 된다. 해당 방송에서 타모리는 엉터리 외국어 흉내를 TV에 최초로 선보였고 일약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타모리의 개그 스타일이 너무 이질적이라고 판단한 예능 전문 기획사들은 타모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17] 타모리 본인도 카페가 그럭저럭 잘 되고 있었기에 별 미련없이 하카타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개그 만화의 1인자로 불리는 만화가인 아카츠카는 "카페를 처분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연예인 데뷔를 준비하자. 그 동안은 내 집에 있어라. 네가 성공할 때까지 내가 한달에 2~30만엔씩 생활비도 주겠다."라며 타모리를 설득하였고 결국 타모리는 심사숙고 끝에 아카츠카의 제안에 응하여 자신의 부인과 함께 도쿄로 이주하게 된다. 아카츠카 후지오는 왜 타모리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봤냐는 질문에 타모리가 웃기기도 했지만 자신의 어머니처럼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와야한다는 사명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아카츠카는 타모리의 매니저를 자처해서 약 9개월 동안 소속사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타모리는 타나베 에이전시와 계약에 성공한다. 타나베 에이전시는 1973년 호리프로 매니저 출신의 타나베 쇼지가 호리프로 소속 연예인들 일부를 데리고 독립하여 설립한 회사로 본래 The Alfee 등 가수가 중점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회사였지만 타모리를 시작으로 예능 분야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참고로 타모리는 연예계 데뷔가 확정되고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진출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4개의 계명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한다.
1.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18][19]
2. 특정한 파벌에 속하지 않는다.
3. 방송 출연시에는 항상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
4. 사인을 해줄때는 사인 옆에 자신의 좌우명을 적지 않는다.[20]
2.3. 연예계 진출
70년대에 발매된 타모리의 개그 음반.
타모리는 1976년 4월 도쿄 12 채널(現 TV 도쿄)의 심야 프로그램이자 영국 BBC에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 <Monty Python's Flying Circus>의 일본어 번역판인 <하늘을 나는 몬티 파이선> 중간에 삽입된 "타모리 코너"에서 정식으로 연예계에 데뷔한다. 데뷔 당시 나이는 30세로 시무라 켄, 쇼후쿠테 츠루베, 비트 다케시 보다 나이는 연상이지만 후배였다.
이후 타모리는 니혼 TV의 예능 프로그램 <금요일 10시! 소문의 채널!!(金曜10時!うわさのチャンネル!!)>에서 레귤러로 출연[21] 하는 동시에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타모리의 올 나이트 닛폰(タモリ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을 진행하기 시작, 특유의 개성적인 컨셉으로 점점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특히,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타모리의 올 나이트 닛폰>은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이전 타모리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이었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22]
<타모리의 올 나이트 닛폰>에서 타모리는 나고야 사람들을 "허풍이 많고 구두쇠면서 말끝마다 먀먀거려서 듣기 싫다. 심지어 그 동네 사람들은 에비후라이(새우튀김)를 에비후랴라고 하더라" 라며 장난스럽게 깠는데 해당 방송의 인기가 높아서 나고야의 이미지가 진짜로 안좋아지고 새우 튀김이 나고야의 명물로 자리잡게 되었다.[23] 또한 빙그레 싸만코 라디오 광고 혹은 TV 광고[24]와 모나미 153 볼펜, 모나미 사인펜 광고를 녹음한 테이프가 <타모리의 올 나이트 닛폰>에 소개되었다가 반응이 엄청나서 1970년대 일본에서 매우 유명해졌다. 지금도 가끔씩 과거를 회상하는 어르신들의 글이 일본 인터넷 상에 올라올 정도. 유명해진 이유는 '싸만코'라는 단어가 대부분 일본인들의 귀에는 'クサマンコ(쿠사만코 = 냄새나는 보X)'로 들리고 '모나미'라는 회사명은 일본인들의 귀에는 オナニ(오나니 = 자위행위)와 비슷하게 들렸기 때문이다.당시 라디오 녹음본.
<금요일 10시! 소문의 채널!!>애서는 1976년 10월 무렵부터 1979년에 프로그램이 종영될 때 까지 "전후 최대의 아마추어 연예인"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해적이 쓰는 안대를 착용한채 프로그램 중간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타모리의 뭐든지 강좌> 코너에서 혼자 개그를 하는 형태로 출연하였다.[25] 당시 타모리가 TV에서 구사했던 개그로는 그럴듯한 외국어 흉내, 엉터리 지식을 가르치는 싸이코 교수 캐릭터, 동물 모사 몸개그 등이 있었고 개그를 펼치는 중간에 뜬금없이 섹드립을 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70년대 당시 타모리는 일본 대중들에게 심야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음담패설을 자주 구사하는 괴짜 개그맨으로 취급받았으며, 타모리 본인도 이 시기 자신의 모습을 "방송가에서는 내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나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에가시라 2:50 같은 느낌이었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내 이구아나 흉내를 보고 기겁하기도 했다."라고 회고했다.
1978년부터 타모리는 안대 대신에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TV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타모리의 지적인 면모가 시청자들에게 발견되면서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이때까지는 아직 음담패설로 유명한 심야 방송 전용 개그맨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2.4. 사회자로
1982년 10월 4일, 타모리는 후지 TV의 프로듀서였던 요코자와 다케시의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森田一義アワー 笑っていいとも!)(통칭 와랏테이이토모/이이토모)의 사회자로 발탁된다. 요코자와 다케시가 라디오 프로그램 <단연코 타모리의 재미있는 대방송>이 주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낮의 타모리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여 타모리를 케스팅했다고 한다.[26]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는 주 5일 동안 낮 12시부터 1시까지 생방송으로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으로 매 요일마다 다른 코너와 다른 레귤러 멤버들이 출연했고 타모리는 프로그램의 전체 진행을 맡았다. 비록 방영 초기,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시청률은 부진했지만, 텔레폰 쇼킹[27]이 인기를 얻자 '친구처럼 편하고 아무 부담없이 볼 수 있는 방송'이라는 모토로 시청자들과 함께 소통하는 코너들을 지속적으로 신설하고 그간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사회의 각종 유명 인사들이 코너의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인기 연예인들이 코너의 레귤러 멤버로 활약한 결과 마침내 1989년부터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점령했고, 2014년 3월 31일 종영 될때까지 무려 26년동안 동시간대 시청률 수위방송기록을 지키며 일본을 대표하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성장하였다.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가 방영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82년 10월 9일, 타모리는 TV 아사히에서 방영을 시작한 <타모리 클럽>이라는 심야 버라이어티의 사회자로 발탁된다. <타모리 클럽>은 '마니아들을 위한 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마니아들이 있기만 한다면 어떤 주제도 가리지 않고 방송으로 내보낸 프로그램으로, 이러한 전략이 먹혀 들어가서 해당 방송은 서서히 일본 전역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타모리 클럽>은 2023년 3월 31일에 종영되기까지 41년 동안 방영된, 일본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다.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와 <타모리 클럽>으로 사회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타모리는 1983년 제34회 NHK 홍백가합전에서 종합 사회를 맡게 되는데 NHK 아나운서 이외의 사람이 홍백의 종합 사회를 맡은 것은 타모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28] 1985년 5월 31일에는 아카시야 산마와 함께 제1회 도쿄 국제 영화제 개막식에서 사회를 보았다.
이후에도 타모리는 1987년 4월 3일 부터 TV 아사히의 신설 음악 프로그램 <생방송 뮤직 스테이션(통칭 엠스테)>의 2대째 사회자가 되었고 동시에 1987년 7월 18일 ~ 7월 19일까지 생방송된 제 1회 FNS의 날 'FNS 슈퍼 스페셜 1억명 텔레비전 꿈의 열기'와 1989년, 「FNS 슈퍼 스페셜 1억명 텔레비전 꿈 열도 '89」의 종합 사회를 아카시야 산마와 함께 진행하며 국민 MC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는 아카시야 산마와 함께 <타모리&산마의 폭소 태그매치> 에도 출연했었다. 1990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기묘한 이야기>에서는 중후한 이미지의 스토리텔러로 발탁되었다.[29]
1990년, 타모리는 자신이 소유한 요트[30]에서 휴가를 즐기다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잠시 활동을 중지했으나 이내 복귀했다. 복귀한 타모리는 그간 MC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개그맨으로서의 정체성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한 반동으로 <어휘 천국>, <정글 TV ~ 타모리의 법칙> 등에서 기존보다 거칠고 웃음에 초점에 맞춘 진행을 선보였다. 이 밖에도 스펀지의 원조격인 <트리비아의 샘>에 평가단 위원장으로 출연하였다.
2008년 세상을 떠난 개그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의 장례식에서 직접 조제문을 읽어 그를 추모한 바 있다. 이는 아카츠카 후지오가 그를 연예계에 데뷔시켜주고 일본의 국민 오와라이로 만드는데도 기여해주는 등 많은 인연을 쌓았던 것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아카츠카 후지오의 장례식에서 "역시 타모리 답다"라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조제문을 부탁받긴 했는데 장례식 전날 술을 진탕 마시는 바람에 귀찮아져서 제문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아카츠카 선생이시라면 이럴 때 차라리 개그를 치시겠지"라는 생각에 칸진쵸[31]를 흉내내 백지를 들고 나섰다고 한다. 즉 거의 8분에 달하는 조제문은 전부 타모리가 즉석에서 한 말. 결국 개그는 날려버리고 진심을 담아 고인에 대한 추모를 했는데, 즉석에서 말을 만들어 내면서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게 8분간이나 이야기를 해서 그의 말발을 대표하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마무리 지을 때의 말은 저도 당신의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여담으로, "칸진쵸가 개그라면 오치(이야기의 결말)는 뭔가요?"라는 질문에 "내 매니저 성이 토가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참고로 토가시는 칸진쵸 이야기에서 요시츠네 일행을 풀어준 수비대장의 성이라고 한다.
2014년 3월 31일자로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가 장장 32년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종영되었다. 타모리가 건강이 안 좋아진 아내의 병간호를 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마지막회가 방송된 날 저녁의 종영 특집 특별프로그램에 등장한 게스트들이 후덜덜한데, 오프닝부터 타모리가 평상시 팬이라고 언급했던 일본의 국민 여배우 요시나가 사유리가 영상 중계를 통해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축하해주었고[32] 이후 아카시야 산마가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의 거물급 연예인들이 차례로 등장[33][34][35]하다가 무려 아베 신조까지 텔레폰쇼킹의 게스트로 등장. 방송 마지막에는 게스트로 비트 다케시가 등장하여 방송불가용어로 점철된 축사를 생방송으로 읽는 위엄을 뽐내면서 종영되었다, 이 외에도 야후 재팬에서는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종영을 맞아 첫 페이지의 디자인을 바꾸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방송답게 전국적인 스케일의 반응들이 이어졌다.
2023년 3월 31일자 방송을 마지막으로 타모리의 대표 프로그램 중 하나인 <타모리 클럽>이 장장 41년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종영되었다.
<타모리 클럽> 종영 이후 일본의 방송가에서는 "타모리가 연예계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다. 이전부터 타모리는 가까운 관계자에게 "70세가 되면 연예계를 은퇴하겠다"고 말해왔으며 2016년 8월, 가까운 지인들만 모인 71번째 생일파티에서도 타모리가 은퇴를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고 전해진다. TV 아사히의 전 프로듀서로 '보도 스테이션' '슈퍼 J 채널' '슈퍼 모닝' 'ABEMA Prime' 등의 프로그램에 종사하고 있던 시즈미 히로미치도 "예능 프로그램 녹화는 체력이나 정신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노년인 타모리씨가 조금씩 TV로부터 페이드 아웃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주간문춘이나 슈칸겐다이 등 일본의 황색 언론에서도 타모리의 방송 은퇴에 대한 기사들을 연이어 내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2024년 2월 14일, NHK는 3월 방송을 마지막으로 <부라타모리>를 종영한다고 발표했다.#
2024년 3월 9일자 방송을 마지막으로 <부라타모리>가 종영되었다. 이로써 타모리가 출연하는 레귤러 프로그램은 뮤직 스테이션'(TV 아사히)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타모리가 연예계에서 은퇴를 선언할 가능성도 점점 현실성을 띄게 되었다.#
3. 주요 개그
엉터리 외국어 흉내타모리의 전담 개인기는 역시 외국어 흉내. <테츠코의 방>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외국어 흉내 개그를 하는 영상.[36] 일본인들은 이를 좋은 한국어 '흉내'로 쳐준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수근이 엉터리 중국어로 유명한 것과도 같다. 한국어만 흉내내는 영상 여기서 북한말은 마치 비방선전 방송을 연상케한다.
나카스 산업대학의 싸이코 교수
타모리가 구깃구깃한 양복과 촌스러운 넥타이, 더벅 머리 가발, 오른쪽에만 렌즈가 있는 선글라스로 분장하고, 나카스 산업대 "타모리 교수" 또는 "모리타 카즈요시 조교수"라는 가공의 싸이코 대학 교수 컨셉으로 나와서 특유의 바보같은 어투로 난해하고 엉뚱한 것을 그럴듯하게 해설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강의를 하는 개그. 타모리가 대학생 시절부터 하고 있던 대학 교수 모노마네를 확장시킨 것이라고 한다.
뉴스 앵커 모노마네
모노마네 : 각종 모노마네로 유명하다. 특히 테라야마 슈지(寺山修司) 모노마네의 경우에는 테라야마의 말투나 사투리를 완벽히 재현한 것뿐만 아니라, 생각 방식까지 따라해서 생전 테라야마의 친구였던 사람이 타모리에게 "테라야마가 살아 있어도 그렇게 대답했을거야" 라고 말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물을 모사하는 몸개그
70년대부터 이구아나, 독수리의 착지, 갓 태어난 망아지 등 동물을 모사하는 몸개그로 유명했다. 결국 1984년에 찍은 이구아나를 흉내낸 사진이 일본 네티즌들에게 화제가 되면서 이구아나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2017년 도우부츠 비스켓과의 인터뷰에서 이구아나 프렌즈라고 언급이 되었다. 타츠키가 그린 뮤직 스테이션 출연 기념 짤에서도 이구아나가 뒤에 있다.
3.1. 예능 프로그램의 MC로서
1980년대부터 사회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후, 특히 ,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를 진행할 때는 자신의 개그를 자제하고 상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되받아치는 토크 솜씨를 특징으로 한다. 90년대부터는 자신의 다양한 취미로 얻은 '넓고 얕은 지식'을 토크의 주무기로 사용하고 있다.또한 생방송 중 방송 진행에 어긋나는 무리수 애드립을 날리는 출연진, 게스트에게 무례한 리액션을 한 일반 관객을 스튜디오의 분위기를 깨지 않고 익살스러운 애드립으로 꾸짖거나 주의시키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PD 요코자와 다케시가 「타모리만큼 능숙하게 꾸짖는 사회자는 없다.」라고 평가할 정도. 그래서 타모리는 게닌들 중 유독 생방송 MC를 자주 맡았다.
4. 대표 방송
- 타모리의 올 나이트 닛폰 (1976 ~ 1983)[37] (닛폰 방송)
- 단연코 타모리의 재미있는 대방송 (1980 ~ 1988)[38] (닛폰 방송)
-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1982 ~ 2014) (후지 TV)
- 타모리 클럽 (1982 ~ 2023) (TV 아사히)
- 뮤직 스테이션 (1987 ~ ) (TV 아사히)
- 타모리의 주간 다이나믹 마이크 (1990 ~ 2005)[39] (닛폰 방송)
- 기묘한 이야기 (1990 ~ 1992[40], 1993 ~[41]) (후지 TV)
- 어휘 천국 (1992 ~ 1999) (후지TV)
- 정글 TV ~ 타모리의 법칙 (1994 ~ 2002) (TBS테레비)
- 트리비아의 샘 (2002 ~ 2006) (후지 TV)
- 부라타모리 (2009 ~ 2012, 2015 ~ 2024) (NHK)
5. 어록[42]
난 명언은 좋아하지만 명언을 말하려는 사람은 싫어해.
일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낮은 톤으로,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의 주의력이 높아지니 말이다. 남들에게 큰 소리로 말해야만 자신의 말을 알아 듣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낯가림이 없는 사람은 재미없는 사람이야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를 깨닫게 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아.
한 두번 좌절한 후에 '어차피 나 같은 건 별 볼일 없는 놈이잖아' 라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강한 사람이다.
인생에 승패란 없고, 어떤 인생이 좋고 나쁜지 판단하는 것 따위도 쓸모없어. 그런 판단 같은 건 인생을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지.' '반드시 1등이 되어야 해.' '최소한 몇 살 전에는 이런 일을 달성해 놓아야한다.' 라고 생각하지 마. 그런 생각은 오히려 인생을 더 힘들게 만들기만 하니까.
목표를 가지고 행동하지 마라. 자신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가 미워진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고 싶은 것을 참는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절제하지 마세요. 뭔가를 절제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니까요
스트레스는 발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쌓이기만 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잊는 수밖에 없다.
6. 여담
- 일본을 대표하는 개그맨, MC다 보니 이곳 저곳에서 패러디가 많이 된다. 오덕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패러디 캐릭터라면 은혼의 타모. 또한 페르소나 스토커 클럽의 타이틀은 <타모리 클럽>의 노골적인 패러디다. 인기 코너 페르소라 미미극장 또한 타모리 클럽의 코너 소라미미 아워를 베ㄲ...벤치마크한 것이다.
- 곤베에의 아임 쏘리라는 아케이드 게임에 잡졸로 등장한다. 잡히면 발가벗겨 채찍질을 당한다. 채찍질할 때 타모리 자신도 검은색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는다.
- 타모리의 이름을 달고 슈퍼패미컴 게임 타이틀이 나온 적이 있다. 제목은 '웃어도 좋다고! 타모림픽(笑っていいとも!タモリンピック)'
- 미국 TBS 코난쇼에서 일본 특집을 진행했을 때 돗토리 공항에서 코난쇼 스태프가 한 일본인을 인터뷰했는데, 그 일본팬이 코난쇼 진행자인 코난 오브라이언을 미국의 아카시야 산마나 타모리 같은 재밌는 MC라며 말했다.
- "개그맨은 어디까지나 대중을 웃기는 직업이기 때문에 대중을 감동시키는 데 목적을 두면 안 된다."고 발언하면서 시마다 신스케의 선행 특집이나 감동 특집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바 있다.[43]
- 좌우명은 "모든 일은 적당히,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말고 현 상태를 유지해라"라고 한다. 또한 "자신의 과거를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산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일이 반성을 하면 스스로가 한심해 보이기만 할 뿐이다. 앞으로 잘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자신의 신념에 대해 밝힌적도 있다.
- 본인 스스로는 "평소 '망상하는 것'을 좋아하며 사교성이 없어서 부끄럼을 많이 타고 낮가림이 심한 성격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 부끄러워서 자신이 출연하는 방송도 모니터링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장수 비결에 대해 묻는 아사히 신문의 기자에게 "지난 녹화에 대한 반성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
타모리와 요시나가 사유리
타모리는 일본의 국민 여배우인 요시나가 사유리(타모리와 동갑이다.)의 열성팬으로 유명하다.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후 그녀가 자신과 같은 와세다 제 2문학부에 입학하게 된 것을 알고는 무척 황홀해했다고 한다. 타모리는 교내 식당에서 라멘을 먹다가 사유리와 딱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사유리가 먹다 남긴 토스트 조각을 가져가서 먹을까 고민했다고. 현재는 타모리와 요시나가 사유리 두 사람 모두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은 연예인이라는 것, 주당에 철덕이라는 것 등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사적으로 꽤 친한 사이라고 한다.타모리와 요시나가 사유리가 함께 방송에 나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페이지
- 그 외에 타모리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으로는 사쿠라다 준코, 이토 츠카사 등이 있다. 사쿠라다 준코는 무려 텔레폰 쇼킹의 첫번째 게스트로서 타모리가 직접 지명했다. 실제로도 타모리는 준코와 친하다고 한다. 후배 여자 연예인들 중에는 호소카와 나오미, 키타가와 케이코가 자신의 취향이라고 밝혔다. 호소카와는 1999년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목요일 코너에 2주일에 한번꼴로 게스트로서 출연하기도 했으며 이후 호소카와는 자신의 지인들로부터 "너 타모리랑 사귀는구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방송에서 밝혔다. 타모리도 <정글 TV - 타모리의 법칙>에 호소카와가 게스트로 출연하자 다른 출연진에게 "우리들은 사귀는 사이"라며 농담을 했다. 훗날 호소카와 나오미와 결혼한 배우 카츠라야마 신고가 텔레폰 쇼킹에 출연했을 때 타모리는 신고에게 "호소카와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 사리분별이 빠르고 야한 농담도 잘 넘기고 웃어주니 말이야" 라고 말하기도 했다.
- 여성 취향은 마른 여성에게는 매력을 못 느끼고 글래머한 몸매를 지닌 여성, 특히 거유를 지닌 여성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아예 자신을 "여성의 풍만한 가슴이 얼마나 훌륭한지 전도하러 가슴별에서 온 가슴 외계인"으로 칭할 정도다.
- 타모리보다 2살 연상의 일반인인 타모리의 부인은 젊은 시절 배우를 지망했을 정도로 미인이지만 타모리가 연예인으로 데뷔한 후 부터는 대중 매체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고 있다. 타모리도 "대중 매체에서는 부부생활을 언급하지 않고 집에서는 업계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타모리와 그의 아내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어려운 시기를 함께 버텨냈기에 부부간의 정이 깊어서 인터뷰에서 타모리는 "아내가 새벽 5시 30분부터 일어나서 자신의 방송국 출근 준비를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를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또한 타모리의 아내는 타모리의 출연료 관리 등 금전적인 부분을 전담하는 1인 기획사의 사장이다.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가 종영한 것도 타모리가 건강이 안 좋아진 아내의 병간호를 하기 위해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종방연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타모리는 아내와 단둘이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소망도 밝힌바있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20년 넘게 해외여행을 하지 못했다고.
-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는 점심 시간에 생방송으로 방송되었기 때문에 타모리는 방송이 끝난 후인 2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점심은 매일 외식을 했고 점심을 먹을 때 되도록이면 풍족하게 먹는 습관이 있어서 저녁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방송 스케줄이 없는 휴일에는 3끼를 규칙적으로 챙겨 먹었다고 한다.
- 비스트로 스맙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양식보다는 일식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또한 톤네루즈의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내의 코너 쿠와즈기라이[44]에서 피단과 코코넛 그린 커리#를 싫어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아마 강한 냄새를 지닌 음식을 잘 못 먹는 듯.
- 주당으로 유명하며 "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맥주를 마시는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술 만큼은 끊을 수 없다" 등의 발언들을 방송에서 자주 했다. 맥주, 쇼츄, 사케, 와인, 위스키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술을 좋아하며 자택에는 와인 셀러를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 철도를 좋아하는지라 <타모리 클럽>에서 철도 관련 아이템이 매우 많이 나왔다. 타모리 자신이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올때 침대열차 타고 왔다갔다 했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침대열차에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 한참 후배인 록 밴드 블랭키 젯 시티의 팬이라 한다. 멤버들과 같이 술마시러 가는 꿈도 꿨고 재결성해줬으면 하는 밴드에 블랭키를 올렸다.
- 고소공포증이 있다.
- 뮤지컬을 싫어한다. "맥락도 없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죽기 전에 잘도 노래를 부르는 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한다.
- 해외 작품을 번안한 공연에 대해서 부정적인지 "극중에서 아무리 봐도 동양인인 사람을 '스티브'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닭살이 돋는다."는 취지의 말을 방송에서 여러번 했다.
- 건강을 위해 매일 하루 일만보를 목표로 산책을 한다고 한다. 산책시에 타인이 살고 있는 집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 일본 연예계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팔씨름을 잘한다고 한다.
- 골프를 싫어한다. 그러나 1988년부터 1999년까지 매년 설날에 방영된 "타모리 - 타케시 - 산마 세기의 골프매치" 촬영 때문에 잠시 골프채를 잡은 적이 있다. 1988년에 방영된 첫 프로그램에서 타모리는 10번의 경기 중 8번의 경기에서 1등을 하였는데 (나머지 경기에서는 비트 다케시가 1등) 이는 타모리를 이기게 하기 위한 접대 골프였다고 한다.
- 1980년대 후반기 즈음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코너 중 하나인 "텔레폰 쇼킹"에 뮤지션인 오다 테츠로가 출연했을 때 오다가 학창 시절에 탁구를 하던 것을 밝히자 타모리가 "탁구는 어둡다"라고 발언. 당시 탁구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이긴 했지만, 타모리의 발언 영향이 적지 않아 이듬해의 중 고등 학교 탁구부원이 급격히 감소하는 등 본격적으로 탁구의 인기가 시들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 탁구 협회는 컬러 볼의 개발이나, 형형색색의 유니폼의 사용 허가, 탁구대를 녹색에서 푸른색으로 바꾸는 등 이미지 제고에 나섰다. 나중에, 타모리가 일본 탁구 협회에 사죄의 뜻을 담아 1,000만엔을 기부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1] 초등학교 3학년 때 철조망에 얼굴을 부딪혀서 오른쪽 눈을 실명했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쓰고 방송에 출연한다. 본인 왈 실명도 실명이지만 눈이 실눈이어서 컴플렉스라고.(요미우리 석간 1986년 11월 7일자에서)[2] 자신의 성씨 '森田(모리타)'를 '田森(타모리)'로 뒤집은 것[3] 1970년에 2살 연상의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으며 자녀는 없다. 자녀를 갖지 않은 것에 대해서 타모리는 "나는 아이같은 사람이기에 좋은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 하지 못할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4] 주간 대학에 합격한 것은 아니고 야간 대학이었다. 2학년 1학기까지 마친 후, 등록금을 미납하여 제적당했다.[5] 정규 방송은 90년대에 종영되었고 매년 특별편이 방영 중[6] 타모리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회자나 일본에서 유명한 연예인 조사에서 항상 최상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인기와 인지도가 매우 높다. 예능 프로그램 '수요일의 다운타운'의 2020년 7월 22일 회차에서 일본 유명인 인지도 랭킹(좋아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알고 있느냐는 질문. 즉, 인기도가 아니라 유명도 조사.)을 조사해봤는데 무려 97.4%의 득표율로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쿠로야나기 테츠코, 3위는 아베 신조. 4위는 아카시야 산마, 5위는 기타노 다케시#. 그만큼 버는 돈도 많은데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출연료만으로도 1회 200만엔이었고 일본 게닌들 중 최초로 회당 출연료를 500만엔 넘게받은 게닌이었다고 한다. 1년에 통산 7억엔의 개런티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의 추정 재산은 약 330억엔이고 2003년 이후부터 2013년까지 약 135억엔을 벌었다고 한다.[7] 타모리는 요리를 할 때 아무 말 없이 요리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혔다.[8] 타모리 본인이 HAM에 조예가 있기도 하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이 후쿠오카라서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수신이 쉽다. 특히 후쿠오카와 부산 사이는 바다로 뻥 뚫려있어서 심지어 TV조차 전파가 섞이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반대로 일본 방송도 부산이나 경남 해안가에서 수신이 잘 된다.[9] 주간 대학이 아니라 야간 대학이다.[10] 70~80년대에 명MC로 활약했으며 민주당 출신 전 참의원이기도 하다. 비례대표로 2001년에 당선되었다.[11] 출처는 요미우리 석간 1986년 11월 7일자.[12] 타모리는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면요리는 돈코츠 라멘이 아니라 하카타의 고보텐 우동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타모리의 말에 의하면 "강한 탄력을 지닌 면의 쫄깃한 식감이 특징인 사누키 우동과는 정반대로 하카타의 고보텐 우동은 면을 최대한 부드럽게 삶아 입안에서 면이 사르르 녹는 맛을 즐기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13] 상술하다시피 타모리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커피에 비엔나 소시지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 메뉴를 메뉴판에 비엔나커피라고 적는 등 괴짜 주인으로 유명했다고 한다.[14] 이때 타모리가 아카츠카 후지오에게 보여준 개그는 일명 '4개 국어 마작'으로 타모리가 다양한 언어를 흉내내어 1인 4역을 하면서 4명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마작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개그였다고 한다.[15] 실제로 타모리는 학창시절에 교회를 잠깐 다닌 적이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 교회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의 말투가 재미있어서 다녔던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타모리 신부는 이때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타모리는 훗날 이를 바탕으로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신년 특집에서 '타모리 신부의 설교'란 꽁트를 연기하기도 했다.[16] 1933년생으로 1953년에 데뷔한 일본 최초의 TV 탤런트 중 하나. 유명한 책으로 <창가의 토토>가 있다.[17] 당시 유명 배우로 시작하여, 버라이어티의 진행자나 개그 방송의 레귤러로 활약했던 사카이 마사아키도 타모리의 개그 스타일이 과연 방송에서 먹힐까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타모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게 나을것이다"라고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후에 타모리가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자, 그 이후로 타모리를 만날때마다 존칭으로 부른다고.[18] "나의 웃기는 능력은 다른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얻은 것이 아니기에 나도 남에게 가르칠 것이 없어서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고 밝혔다. 타모리의 이러한 태도가 파격적인 게, 동서 불문하고 당시 오와라이 업계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가 널리 퍼져 있었던 시절이었고 아직 요시모토 흥업의 요시모토 종합 예능학원도 개교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19] 다만 1982년 타모리는 아키츠키 후지오와 함께 <스타 탄생!>의 자매 프로그램인 <개그맨 스타 탄생>의 심사위원으로 출연, 자신들은 재밌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심사위원들은 톤네루즈의 개그에 악평을 하자 톤네루즈를 그랑프리 수상자로 적극 추천하며 이들을 본격적으로 방송가에 데뷔시켰다. 이 때문에 톤네루즈는 "<개그맨 스타 탄생>에 출연하기 전부터 타모리 씨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프로 개그맨으로 데뷔한 후 부터는 타모리 선배를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발언하는 등 타모리를 일본 연예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은인으로 밝히고 있다. 톤네루즈는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인기 코너 텔레폰 쇼킹의 최다 출연자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20] 즉,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 현안에 대한 본인의 의견 등을 대중들에게 절대로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다. 다만, 타모리도 사람이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다룬 보도 스테이션 특집에서는 침묵을 유지하면서도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한다는 취지의 1분 가량의 발언만으로 프로그램을 끝맺었다.[21] 1973년부터 1979년까지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으로 당대 일본 연예계를 좌지우지하던 '와타나베 프로덕션'(도리후, 쟈니스 등이 당시 와타나베 소속이었다.)과 사이가 안좋았던 닛테레가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취지하에 런칭하였다. 전성기에는 무려 3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여가수 와다 아키코를 갓언니(ゴッド姉ちゃん)라는 호칭의 인기 예능인으로 키운 방송이다.[22] 해당 라디오 방송은 1976년 10월 7일부터 1983년 9월 28일까지 매주 목요일 새벽 1시 ~ 3시 타임에 송출되었다. 타모리가 라디오 방송을 그만 둔 이유도 라디오의 인기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평일 낮 12시에 생방송으로 방영되는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메인 MC로 발탁이 돼서라고 한다. 주말을 제외하고 타모리는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를 진행하러 매일 오전 10시에 신주쿠의 스튜디오 알타에 가야했기 때문에 매주 목요일 새벽 시간대에 라디오 생방송을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라디오 종영 이후 원래 금요일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었던 <비트 다케시의 올 나이트 닛폰>이 목요일 시간대로 옮겨오게 된다.[23] 2017년 5월 부라타모리에서 나고야 편의 방송이 결정되고 타모리가 나고야에 와서 정식으로 화해를 하였다.[24] "주고 싶은 싸만코~ 먹고 싶은 싸만코~"라는 가사의 CM송이었다.[25] <금요일 10시! 소문의 채널!!>의 작가였던 미나모토노 타카시는 "당시 타모리는 의외로 수줍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개그를 하게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라고 회고했다.[26] <단연코 타모리의 재미있는 대방송>은 1980년 10월 6일에서 1988년 4월 2일까지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에 저녁 6시부터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타모리와 여자 연예인들이 토크를 하는 코너인 <미녀 대담>, 그전까지 방송에서는 금기에 가까웠던 부부간의 성생활 비화 등을 투고하는 <전화 투고 코너>가 화제가 되었다.[27] 코너에 초대받은 연예인과 타모리가 토크를 하는 코너. 게스트는 코너 막바지에 다른 연예인에게 전화를 걸고, 타모리는 전화를 받은 연예인에게 프로그램 섭외 요청을 한다. 만약 요청이 승낙될 경우 해당 연예인은 바로 다음 회 게스트가 된다.[28] 대한민국에서나 일본에서나 MC는 원래 희극인들이 맡는 역할이 아니었다. 70년대, 콩트 55호(コント55号)가 각종 버라이어티의 사회자를 맡으면서 개그맨이 MC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처음 알렸다면, 타모리와 시마다 신스케는 개그맨으로 이름을 알린 뒤 MC 쪽에서도 크게 성공하면서 대중들에게 MC 역할을 맡는 개그맨을 각인시켰다.[29] 한국에서는 일본 개그프로그램이나 버라이어티가 잘 소개되지 않지만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꽤 인기를 끌어 선글라스를 쓰고 해설하는 강렬한 인상의 타모리의 인지도도 크게 높아졌다.[30] 요트 몰기는 타모리의 대표적인 취미 활동으로 실제로 타모리는 1급 소형 선박 조종 면허를 갖고 있다고 한다. 3,000만엔으로 구입한 자신의 요트를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에 정박해 두고 있으며 휴일에는 요트를 몰며 시간을 보낸다고.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자신의 이름을 딴 <타모리 컵>이라는 요트 레이스를 개최하기도 했다.[31]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도망, 그리고 죽음' 항목 참조.[32] 요시나가 사유리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14년만의 일이라서 출연진이나 TV를 보고 있던 일본 대중들 모두가 놀랐다. 다만 당시 사유리는 영화 촬영 중이었기에 스튜디오 알타로 가는 것이 불가능해서 촬영장에서 영상 중계 형식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사유리가 타모리에게 선물한 명품 가방이 스튜디오에 도착하고 두 부부끼리 같이 저녁을 먹자는 약속도 정하면서 훈훈하게 대화를 끝냈다.[33] 특히 화재가 된 부분이 아카시야 산마의 토크중에 다운타운과 웃쨩난쨩이 난입하고, 다음으로 톤네루즈와 폭소문제, 나인티나인 등이 차례로 난입하는 장면. 이 중 나인티나인을 제외하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톱뉴스급인 사람들 뿐이고 그 중에서도 다운타운과 톤네루즈는 불화설과 함께 "절대 함께 방송하지 않는 라이벌" 취급이기에 이후로도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34] 여러 방송에서 나온 뒷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원래는 저 사람들이 각자 15분씩 맡아서 따로따로 촬영하고 서로 만나지는 않을 예정(특히 다운타운과 톤네루즈)이었는데 타모리와 산마 세대에서 자주 하던 난입 개그를 해 보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다운타운과 웃쨩난쨩이 난입(원래는 제작진 쪽에서 추진했는데 산마가 "타모리씨 방송인데 내맘대로 할 수는 없지"라며 거절했었다고 하는데 다운타운과 운난이 눈치채고 쳐들어간 거라고)하고, 이 때 마츠모토 히토시가 "이 방송 보면 SNS가 난리난다"라는 말을 하자 톤네루즈가 "그래? 기왕에 그렇게 될 거면 우리도 가자"라고 해서 폭소문제에게 말하고 바로 난입(원래 다운타운, 웃쨩난쨩 차례인 30분을 채운후에 나올 예정)을 했다고 한다. 산마는 이걸 보고 "(약간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우리세대의 개그를 잊지않고 해 준 후배들에게 고맙다"라고 언급.[35] 무엇보다,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절대 함께 공연하지 않을 사이라고 하던 톤네루즈와 다운타운은 사실 별로 소원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렌드 피날레는 축제다"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방송국에서 말리는 걸 뿌리치고 뛰쳐나갔지만, 다운타운(특히 마츠모토 히토시)과 폭소문제(중에서도 오오타 히카리)는 진짜로 사이가 험악했던 관계였던지라(실제로 다운타운과 톤네루즈는 간간히나마 함께 나온적이 있지만 다운타운과 폭소문제는 함께 나온적이 없다) 후배들도 모두 놀랐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톤네루즈가 "어이 폭소문제 너희들도 함께 나가자"라고 권하자 오오타가 엄청 당황했었다고. 결국 톤네루즈가 먼저 나가서 분위기를 잡아주자 폭소문제는 나중에야 나왔고, 방송이 끝난 후에 마츠모토가 "(우리에게 맞춰줘서)고맙다"라고 오오타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오오타도 선배와 화해하게 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36] 타모리는 연말이면 항상 테츠코의 방에 게스트로 출연했다.[37] 라디오 방송[38] 라디오 방송[39] 라디오 방송[40] 정규 편성[41] 특별판[42] #, # 참조.[43] 시마다 신스케, 타모리 두 사람 모두와 절친한 친구인 아카시야 산마 또한 "나는 행복한 사람을 감동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울고 있는 사람을 웃겨서 행복하게 하고 싶어. 이것이 내 웃음의 철학이야." "예능에서 감동의 눈물은 필요없다. 개그맨이라면 웃겨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등의 발언을 한 적이 있으며, 시마다는 야쿠자와의 관계가 드러나자 언행불일치로 인하여 은퇴하였다.[44] 4개의 음식 중 게스트가 싫어하는 한 가지 음식을 맞추는 코너. 두 사람이 출연해서 대결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지는 쪽은 가벼운 벌칙을 받는다.[45] 타모리는 1급 해상특수무선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46] 홋카이도 히가시카와조의 건축가 쿠마 켄고 등이 참여해서 2026년 오픈을 목표로 2023년 1월부터 공사를 시작한 'KAGU 디자인 뮤지엄'에 타모리가 자신이 소유한 재즈 레코드 약 1만장을 기증한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