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寺山修司. 일본의 영화감독, 시인, 연극 연출가, 저술가, 소설가, 각본가, 작사가, 평론가, 방송진행자 등 다양한 예술활동을 하였다. 뭘 시켜도 잘 했기 때문에 만능 예술인이라 불리웠다. 1935년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 출생. 1983년 사망하였다. 그의 책 중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는 국내에 출간되기도 하였다. 단 지금은 절판.
2. 생애
아버지가 경찰이었고 유년 시절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어서 이사가 잦았다고 한다. 글에서 '열차 안에서 태어나 고향은 없다' 이런식으로 자주 말했으나 그런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하게 태어났다. 본인은 이렇게 말하긴 해도 내심 아오모리를 고향으로 생각했는지 전원에서 죽다에서는 한 챕터를 할애해 아오모리를 배경으로 삼기도 했다. 이렇게 테라야마는 평소 인터뷰하던 것과 실제의 삶의 행적이 매우 달랐다. 이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나중엔 자신도 실제 기억과 거짓말이 섞여서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게 되었다고 하기도 했다. 그의 진짜 행적은 대부분 어머니나 지인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호적에는 1936년 1월 10일 생이라 되어있는데 그것때문에 실제로는 언제 태어났느냐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대부분 호적을 늦게 신고해서 그렇게 되었다는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생활했으며, 어머니랑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결혼하기 전에 같이 살았던 적도 있을 정도. 어머니를 꼬셔서 사진 모델로 썼다가 다투고 화해했던 일화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다루며 어머니가 죽는 내용의 작품이 굉장히 많다. 과거에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2] 돌아온데 따른 서운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테라야마가 말하는 자신의 과거의 대부분이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선 어머니와 매우 친하고 떨어져 살지를 못할 정도로 마마보이였다. 테라야마는 늘 작품에서 정신적 자립을 강조했으나 정작 현실에선 어머니를 떼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한심하게 보았고 작품에서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으로 투영된 것이란 해석이 많다. 그럼에도 정작 테라야마의 어머니는 어머니를 자꾸 죽이고 온갖 나체와 동성애로 가득찬 아들의 작품을 문제시하지 않았으며 항상 옆에서 지켜보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와 아키히로는 이러한 뒷배경을 알기 전에는 뭐 저런 어머니와 아들이 있냐며 황당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참고로 테라야마의 어머니는 테라야마보다 오래 살았으며 지인들 말로는 상당히 제멋대로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들 사후에 회상록을 발매하기도 했는데 여기에서 테라야마에게 한 짓을 보면 아들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심해 의도는 좋았다곤 해도 아동 학대나 마찬가지인 짓을 하기도 했고 며느리와 고부갈등이 심했음이 보여진다. 테라야마 팬들도 테라야마의 어머니를 매우 싫어한다.
1954년 와세다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학생때부터 시를 썼다. 18세때 단가 연구 신인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망주였는데 재학 중 신장염으로 장기 입원을 하게되자 대학을 자퇴하였다.
1957년 첫 작품집을 내고 문학계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1967년 극단 텐조사지키를 설립해 연극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라는 평론집을 냈고 이 작품으로 1971년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아방가르드 독립영화 제작사로 유명한 아트 시어터 길드(ATG)에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와 '전원에 죽다'가 모두 ATG 제작이다. 유작인 '안녕 방주'도 여기서 제작했다. 또한 스즈키 세이준, 마츠모토 토시오, 요시다 요시시게(吉田紀重), 테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宏) 등과 함께 일본 아방가르드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온갖 기이하기 짝이없는 연극들과 실험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1981년작 상하이 이인창관이 유명하다. 1983년 47세의 나이로 간경변과 복막염으로 급서했다. 여러모로 비범한 사람답게 자신이 곧 죽는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다가 이 말이 실현되었는데, 사실 테라야마는 어린 시절부터 간이 안 좋았는데 성인이 된 후에도 술과 담배를 즐겼기에 이것이 간경변과 복막염에 걸리고 악화된 이유이다. 이후 텐조지사키는 해체.
3. 영향
일단 연극과 영화 및 문학쪽에서 종사하기는 했지만 본인이 직접 '직업은 데라야마 슈지'라고 언급할 정도로 다채로운 이력을 자랑한다. 밑에도 적혀있지만 영화계에선 외국 쪽에서도 호평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3] 196-70년대 잠시 만개했던 아트 시어터 길드라는 일본 인디 영화 조류의 기수로도 남아있다.유럽의 전위주의와 초현실주의, 부조리극을 위시한 실험극들의 영향을 받아 그것들을 극단적인 형식주의와 일본 전통 예술에 결합한 독특한 미적 세계를 추구했으며 유럽에도 소개되어 대단한 파란을 일으켰다. 초기엔 다소 유아적이면서도 지루한 현실에 대한 혁명에 대한 열망으로[4] 가득차 있었다면, 후기로 갈수록 작품 세계는 점점 완숙해지고 사실과 거짓, 성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의 진정한 진가는 말년에 시도한 전위예술 연극단 '텐죠 사지키' (천장관람석) 연극에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의 연극을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신의 뜻이 전염'되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일본도 일본이지만 주로 해외에서 더 인정받아서 해외에 돌아다녔는데 워낙 연극 내용이 기괴하고 누드로 연기하는 장면도 있어서 일본 언론에선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그래도 팬이 있었으며 부잣집 아가씨들이 특히 열성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팬클럽을 결성해 몇 번씩 봤다고 한다. 이 연극단은 테라야마가 죽고나서 해체되었다. 연극이 좀처럼 기록 남기기가 어려운 예술이다보니 현재로선 그가 연출한 작품들을 접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미와 아키히로가 그의 작품을 이어받아서 이후로도 계속 공연하고 있고 몇몇 작품은 다른 극단이 이어받아 연기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테라야마 슈지 작품 연구는 주로 영화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굉장한 기린아로 추앙받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 비범하고 과격한 성향 때문에 논란이 되며 학부모나 교사들에겐 기피 대상이였던 인물이였다. 어떤 일본 평론가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자신들을 가르치면서 '너희들은 테라야마 슈지 같은 책 읽는 사람은 되지 말라고'라고 깠다며 회고했을 정도. 대표적인 예가 그의 저서 중 하나인 '가출의 권유'로 가정의 모습을 외부에서 관찰하기 위해선 밖으로 나돌아야한다는 내용인데 이것 때문에 일본 청소년 가출이 급격히 증가했고 본인의 집에도 상당수의 가출 청소년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워낙 일본 예술계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인지라 의외로 오덕계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내일의 죠의 작사가이자 리키이시 토오루 장례식의 기획자이기도 하다. 그를 직접 계승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는 이쿠하라 쿠니히코가 있는데 테라야마 슈지 광팬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이쿠하라 특유의 극단적인 형식주의와 연극에 대한 집착, 난해하고 상징으로 가득찬 스토리텔링은 테라야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다. 이쿠하라는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은 테라야마 슈지의 작품을 알게된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평했다. 소녀혁명 우테나 같은 경우 아예 테라야마 슈지 밑에서 일했던 작곡가 J.A.시저를 기용했을 정도. 2010년대 이후로는 PSYCHO-PASS에 등장하는 마키시마 쇼고가 이 사람을 언급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요시나가 씨 댁의 가고일이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 만화 바텐더에서도 이 사람의 어록이 에피소드 말미에 간간히 나온다. 샤프트의 신보 아키유키 감독도 이 사람의 팬이라고한다. 흔히 샤프트식 연출이라고 하는 샤프트 애니메이션 특유의 연출이 다 그의 영화나 연극에서 나왔던 것이다. 심지어 그것보다 40년은 먼저.
스테레오랩의 Emperor Tomato Ketchup 앨범은 이 사람의 동명 영화에서 따왔다.
경마 덕후였다고 한다. 병원 입원했을때 옆 침대에 있던 재일 조선인이 가르쳐줘서 빠져들었다고. 온갖 방법으로 베팅을 한 것은 물론이고 신문에 경마 칼럼도 내었으며, 사망하기 2주 전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신이 특히 좋아하던 요시나가 마사토 기수와 미스터 시비의 1983년 사츠키상 우승을 직관했다. 아쉽게도 요절한 탓에 시비의 일본 더비 우승과 역사적인 1983년 킷카상 우승은 직관하지 못했다.
작품에 주로 쓰는 상징으로는 깨진 유리, 찢어진 사진, 머리카락, 빗, 교복, 하얀 분칠을 한 얼굴, 누드 등이 있다.
작품에 욱일기가 매우 많이 나오나 이는 우익이라 쓰는 것이 아니고 테라야마는 집이 폭격에 맞은 적이 있고 전쟁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적이 있어 평생 전쟁을 싫어했다. 그의 트라우마가 표현된 것이며 전쟁 비판을 위한 상징으로 쓰는 것이다.
4. 사상
남 눈치를 보고 전통을 신경쓰면서 모든 사람의 인생을 획일화 시키는 당시의 일본의 사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정신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과 주장을 알고 그의 작품을 보면 난해해 보이는 아방가르드 연출이 대부분 이런 걸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방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곳에 계속 있으면 그곳에서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이 무의식에 쌓이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때문이라고. 일단 여행을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이사를 자주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청소년에게는 가출을 하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 그래서 부동산, 집을 사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주장했다. 한 곳에 자산이 묶여 탈출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한다. 또한 일본은 집값이 터무니 없이 비싸서 집을 사면 수많은 기회 비용이 매몰되면서 욕구가 거세되고 인생의 즐거움을 손해본다고 하였다. 이 말을 지키기 위해 본인도 의류, 도박, 자동차에 거액을 소비했지만 집은 평생 사지 않았고 일부러 작은 집에 머물었다고 한다.
- 과거는 지나가서 의미가 없는 일이니 되도록이면 잊으라고 권하였다. 역사 공부도 온고지신 같은 건 헛소리이며, 역사는 수시로 왜곡되고, 세상이 계속 바뀌어 도움이 안 되니 하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 금기를 싫어했으며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남 눈치를 보느라 욕구를 참지 말고 바로바로 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음주, 흡연, 도박, 섹스는 물론이고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던 동성애조차 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타인에게 민폐가 되는 행위나 범죄가 아니라면 다 해도 되는 것이라 하였다. 다만 마약은 권장하지 않았다. 이 말을 지키고자 본인도 술, 담배를 많이 해 단명하였지만 즐거운 삶이었으며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 돈은 남 눈치 보지 말고 쓰고 싶은 곳에 자유롭게 쓰라고 하였다. 무의미한 경험과 소비는 없으며 명품 소비, 미식, 도박 같은 곳에 돈을 쓰는 것도 다 정신적인 안정을 주며 인생의 경험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삶의 가치를 집중시키는 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며 이를 '일점호화주의' 라 명명하였다. 다만 매일 낭비하거나 스스로가 파멸에 이를 정도로 거액의 빚을 지는 소비는 하지 말라 하였고 만약을 위한 최소한의 저축금은 남겨두는 것이 좋다고 했다. 테라야마는 자신의 예로 일주일에 사흘 정도는 대충 싼 음식만 챙겨먹고 절약하다 하루만 초고급 레스토랑에 가는 식으로 소비를 하면 좋다고 하였다.
- 테라야마 슈지는 이성애자였지만 젠더를 믿었으며[5] 당시 트랜스젠더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남자답다, 여자답다 그런 건 헛소리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라." 라며 자유롭게 성별을 선택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드러내지 못하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훗날 사실로 드러났다.
- 심지어 행복하지 않은 삶에는 의미가 없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저서에다 자살하는 법을 잔뜩 써놓기도 했다. 하지만 자살하기 전에 해보라는 것들이 효과가 있어서인지 그의 책을 보고 자살했다는 사람은 없다.
5. 영화 작품 목록
- 1962 죄수
- 1970 토마토 케첩 황제
- 1971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 1974 전원에 죽다[6]
- 1974 접복기
- 1975 포창담
- 1975 미궁담
- 1977 지우개
- 1977 말도로르의 노래
- 1977 난쟁이를 기술하려는 시도
- 1977 복서
- 1978 써드
- 1978 라비린스 인 더 필드
- 1981 상하이 이인창관[7]
- 1981 이두녀ㅡ그림자 영화
- 1981 서견기
- 1984 안녕 하코부네[8]
[1] 실제로 한국만 하더라도 이런 사례들이 70년대 까지만 해도 꽤 있었다. 당시 의료 시설의 미비로 아이가 언제 죽을지 몰라 한 몇개월 지켜본 후 호적 신고하러 가는 케이스도 있었으며 부모 한쪽이 없거나 한 경우 호적에 제때 못올라서 늦어지는 경우도 많았다.[2] 테라야마는 그동안 삼촌 집에서 살았다.[3] 칸 영화제 단골이기도 했다.[4] 초기에 만든 토마토 케첩 황제라던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같은 영화에서 잘 드러난다.[5] 테라야마는 트랜스젠더인 가수 겸 배우 미와 아키히로를 천재라고 하며 그를 위한 작품 '모피의 마리(毛皮のマリー)'를 헌정하기도 했다.[6] 어른이 된 주인공 시점에서 회상하는 과거 어린 시절의 경험 + 이것저것 이야기다. 안노 히데아키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가 가출을 하고, 극장판에서 신지가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장면이 이 영화의 오마주라고 한다. 감독인 안노가 이 영화를 직접 언급했다.[7] 프랑스 합작 영화로, 베르너 헤어조크의 페르소나로 유명한 클라우스 킨스키가 주연으로 출연.[8] 테라야마 사망 후 나온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