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3abcf><colcolor=#ffffff>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스펜서 Diana, Princess of Wales | |
이름 |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Diana Frances Spencer) |
출생 | 1961년 7월 1일 |
잉글랜드 노퍽주 샌드링엄 파크하우스 | |
사망 | 1997년 8월 31일 (향년 36세) |
프랑스 파리 13구 피티에 살페트리에르 대학병원 | |
신체 | 178cm |
학력 | 리들스워스 홀 (졸업) 웨스트 히스 여자고등학교 (유급)[1] |
배우자 | 찰스 3세 (1981년 결혼 / 1996년 이혼) |
자녀 | 장남 윌리엄, 차남 해리 |
아버지 | 제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 |
어머니 | 프랜시스 로슈[2] |
형제 | 큰언니 사라[3], 작은언니 제인[4], 오빠 존[5], 남동생 찰스 |
종교 |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
서명 |
[clearfix]
1. 개요
영국의 전 왕세자비이자 현재 영국 국왕인 찰스 3세의 전 배우자이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윌리엄 왕세자와 5위 해리 왕자의 어머니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다이애나 비(妃)라고 부른다. 1910년 테크의 메리 이후 약 71년 만의 웨일스 공비이다. 월리스 심프슨은 남편 에드워드 8세가 왕위에서 퇴위한 이후 결혼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남편 조지 6세는 형 에드워드 8세가 아들 없이 퇴위했기에,엘리자베스 2세는 여성 왕위 후계자였기 때문이다.여담이지만 '왕세자비'라는 호칭이 엄밀히 말하면 틀린 호칭이라는 주장이 있다. 원래 동양에서 왕세자는 왕국 중에서도 제후국의 왕위 후계자가 받는 칭호이고 자주국의 후계자가 받는 칭호는 왕태자인데 영국은 제후국이 아닌 이상 crown princess를 왕세자비로 번역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주장이다. 즉, 황태자비나 왕세자빈이 동양/한자문화권 법도에 적합하기 때문. 하지만 동아시아와 유럽의 왕실 작위 체계는 개념과 인식부터 권한의 크기까지 완전히 달라 이를 1:1 대응시키는 것은 어려운 관계로 본 문서에서는 주한영국대사관의 공식 번역을 따라 왕세자비로 호칭하게 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 3세와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찰스의 불륜으로 인한 순탄치 못한 왕실 생활과 불화 끝에 1992년부터 별거에 돌입한 후 1996년에 이혼했다. 왕세자비 시절은 물론이고 이혼 후에도 자신이 가진 대중적 영향력을 활용하여 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중의 왕세자비(People's Princess)라고 불리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인품, 활발한 자원봉사 활동으로 많은 국민들이 사랑했던 왕세자비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혼 다음 해인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다가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전 세계적인 애도를 받았다.
2. 작위
결혼한 후 쓰던 문장 | 이혼 이후의 문장[6] | 모노그램 |
- 아너러블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The Honourable Diana Frances Spencer (1961년 7월 1일 ~ 1975년 6월 9일)
- 레이디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Lady Diana Frances Spencer (1975년 6월 9일 ~ 1981년 7월 29일)[7]
- 웨일스 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체스터 백작부인 Countess of Chester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콘월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Cornwall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스코틀랜드에서는 로스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Rothesay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캐릭 백작부인 Countess of Carrick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렌프루 남작부인 Baroness of Renfrew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아일스의 레이디 Lady of the Isles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스코틀랜드 공비 Princess of Scotland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Diana, Princess of Wales (1996년 8월 28일 ~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와 결혼했을 때 정해진 공식적인 호칭은 다음과 같았다.
'웨일스 공비, 체스터 백작 부인, 콘월 공작 부인, 로스시 공작 부인, 캐릭 백작 부인, 렌프루 남작 부인, 아일스의 레이디, 스코틀랜드 왕자비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and Countess of Chester, Duchess of Cornwall, Duchess of Rothesay, Countess of Carrick, Baroness of Renfrew, Lady of the Isles, Princess of Scotland)'
1996년 이혼 후로는 전하(HRH His/Her Royal Highness) 경칭이 빠지고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로 호칭이 변경되었다. 이혼 이후로는 왕족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왕실 특성상 두 왕자들의 어머니로서 왕세자비 칭호만큼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3. 본가
스펜서 가문의 문장[8] |
스펜서 가문의 영지 올소프 |
• 31개의 침실을 포함한 90여개의 방 보유
• 10만 제곱피트의 규모. 심지어 주변 영토 제외
• 박물관 수준의 진귀한 국보급 예술 작품과 골동품들의 집합체
• 1892년부터 수집된 1만여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 보유
• 넬슨 만델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윈스턴 처칠 등 수많은 유명인사와 정재계 및 상류층들이 머무른 장소
외가는 '퍼모이 남작 가문'으로 어머니 프랜시스 로슈 4대 퍼모이 남작 모리스 로슈의 차녀였다. 프랜시스의 할아버지가 미국의 백만장자 상속녀와 결혼해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연이은 사업 실패와 사치로 가문 영지를 잃었기 때문에 아들 내외인 퍼모이 남작 부부는 엘리자베스 2세의 배려로 왕실 별장 샌드링엄 하우스에 딸린 저택에서 지냈고 이곳이 프랜시스의 친정집이 되었다. 현재 퍼모이 남작가의 당주는 다이애나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모습을 비췄던 외사촌인 6대 퍼모이 남작 모리스 로슈인데, 슬하에 딸만 둘이라 가문을 물려 줄 아들이 없기 때문에 현재 남동생 에드먼드가 그의 상속인이다.• 10만 제곱피트의 규모. 심지어 주변 영토 제외
• 박물관 수준의 진귀한 국보급 예술 작품과 골동품들의 집합체
• 1892년부터 수집된 1만여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 보유
• 넬슨 만델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윈스턴 처칠 등 수많은 유명인사와 정재계 및 상류층들이 머무른 장소
1954년 다이애나 부모의 결혼식 |
뿐만 아니라 친가와 외가 모두 왕실과 돈독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다이애나의 외할머니인 퍼모이 남작부인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의 절친이고, 아버지 8대 스펜서 백작은 엘리자베스 2세의 시종무관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필름 카메라로 직접 가족과 친지들의 모습을 찍었는데 여왕의 개인 비디오에 왕족들과 함께 뒷마당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스펜서 백작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런 인연으로 다이애나의 작은언니 제인 스펜서는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식 때 그의 대녀 자격으로 앤 공주와 함께 화동을 섰고, 남동생 찰스 스펜서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자였다. 다이애나는 어린시절부터 여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과 가깝게 지냈으며,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켄싱턴 궁 정원에서 뛰어놀았다.
다만 현재는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찰스 스펜서가 거듭해서 사업 실패를 한 탓에 재산이 거의 바닥이라고 한다. 때문에 그의 맏이로 장녀이자 윌리엄 왕세자와 해리 왕자의 외사촌인 키티 스펜서는 아버지보다도 5살 많은 남아공 출신 섬유 사업가와 정략결혼해 이미 성인인 의붓아들 3명을 두게 되었으며 2023년 딸 아테나를 출산했다. 더군다나 장남 위주로 상속이 이루어지는 영국 귀족 가문 특성상, 딸인 다이애나에게 돌아갈 몫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4. 생애
자세한 내용은 다이애나 스펜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Diana, Princess of Wales) | <colbgcolor=#fff3e4,#331c00> 제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 (John Spencer, 8th Earl Spencer) | <colbgcolor=#ffffe4,#323300> 제7대 스펜서 백작 앨버트 스펜서 (Albert Spencer, 7th Earl Spencer) | |
제6대 스펜서 백작 찰스 스펜서 (Charles Spencer, 6th Earl Spencer) | |||
마거릿 배어링 (Margaret Baring) | |||
신시아 해밀턴 (Cynthia Hamilton) | |||
제3대 애버콘 공작 제임스 해밀턴 (James Hamilton, 3rd Duke of Abercorn) | |||
로잘린드 빙엄 (Rosalind Bingham) | |||
프랜시스 로슈 (Frances Roche) | |||
제4대 퍼모이 남작 모리스 로슈 (Maurice Roche, 4th Baron Fermoy) | |||
제3대 퍼모이 남작 제임스 로슈 (James Roche, 3rd Baron Fermoy) | |||
프랜시스 워크 (Frances Work) | |||
루스 길 (Ruth Gill) | |||
윌리엄 길 (William Gill) | |||
루스 리틀존 (Ruth Littlejohn) |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찰스 3세 (Charles III) | |||
1남 | 웨일스 공 윌리엄 (William, Prince of Wales) | 1982년 6월 21일 ([age(1982-06-21)]세) | 캐서린 미들턴 슬하 2남 1녀[9] |
2남 |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 (Prince Harry, Duke of Sussex) | 1984년 9월 15일 ([age(1984-09-15)]세) | 메건 마클 슬하 1남 1녀[10] |
5.2.1. 두 아들을 향한 사랑
장남 윌리엄 왕자와 함께 |
차남 해리 왕자와 함께 |
찰스 왕세자와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바람에 1992년부터는 별거하게 됐고 이로 인해 왕실에서 입지가 좁아지면서 아들들의 유모에 대한 다이애나의 경계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찰스 왕세자와 별거에 합의한 후부터는 주요 왕족 지위에서 배제되면서 다이애나에게 유일하게 보장된 지위는 장래 왕의 모후뿐이었기 때문에 아들들에 대한 애착이 과도해졌기 때문. 이는 별거하고 있는 찰스 왕세자가 아들들이 자신에게 올 때면 아들들을 대신 봐줄 유모인 알렉산드라 '티기' 레게버크[11]를 따로 고용했을 때 두드러졌다.
한때 유치원을 운영했을 정도로 육아 전문가인 티기는 윌리엄과 해리 두 왕자를 아주 잘 돌봐 주었고 유모를 넘어서 또 다른 어머니, 누나 같은 존재가 됐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자리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티기가 들어오자 왕실이 자신에게서 아들들만 뺏고 자신을 내쫓을 거라고 오해하며 두려워한 나머지 티기를 몹시 경계하고 심지어 폭언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티기가 찰스와 불륜을 저질러 임신하자 낙태한 거라고 했던 것. 티기 측에서 오해라고 해명하며 사과를 요구했으나 다이애나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경계한 게 무색하게도 티기는 다이애나 사후에도 몇 년 동안 다이애나의 아들들의 유모로 있었으며, 다이애나가 사고사한 직후에 아들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후 티기는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가 티기의 아들들의 대부가 되어 주었으며 티기의 아들들은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 화동을 서고 티기는 해리 왕자의 아들인 아치의 대모가 되는 등 여전히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 다이애나는 유모들을 경계할 정도로 아들들을 직접 헌신적으로 돌보는 데에 열성적이라 아들들의 학교 행사에서도 평범하게 참여했으며1991년 차남 해리의 가을 운동회 때 어머니들의 달리기 대회에서 치마를 입은 채로 열심히 맨발로 뛰어 2등으로 완주한 일화가 유명하다.
장남 윌리엄 왕자, 차남 해리 왕자와 함께 |
또한 아들들을 평소에는 매우 사랑해도 아이들이 버릇없게 굴면 이를 따끔하게 훈육하며 제지하는 여느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적으로 1990년 윌리엄 왕자가 학교 운동회 도중 버릇없이 행동하고 운동회가 끝날 때 즈음 집에 가려할 때 윌리엄이 도망가자 결국 화가 폭발한 다이애나가 멀리서 달려와 윌리엄의 엉덩이를 때리며 차로 끌고가서 크게 혼냈으며, 이때 윌리엄은 끌려가면서 친구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 또한 작은아들 해리 왕자가 어린 시절 자신의 인터뷰 도중 계속 소리를 내며 방해하자 다이애나가 진지한 모습으로 해리에게 "조용히 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제지하기도 했다.# 해리가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계속 자신을 치며 장난치는 사촌동생 베아트리스 공주를 때렸을 때도 이를 바로 제지했다.#
6. 대중매체에서
노래- 영국의 락 밴드 오아시스의 곡 'Falling Down'의 뮤직비디오에서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삶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으나, 영국 왕실에서 결혼으로 맺어진 왕가의 일원, 불륜, 그리고 결정타로 뮤직비디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찰스 3세까지 다이애나 이야기라는 것.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여동생으로, 스캔들이 엄청났던 마거릿 공주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이애나가 오아시스 멤버들에게 경멸받을 만큼 먼저 문란한 생활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으며, 배우의 생김새도 마거릿 공주와 닮았다. 결정적으로 뮤직 비디오를 감독한 위즈가 "윌리엄과 해리의 일종의 가상 남매로 마거릿 공주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결국 영국 왕실의 이면을 혼합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 Candle in the Wind 1997. 엘튼 존이 발표한 다이아나의 추모곡.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영화
- 《백 투 더 퓨처 2》 (1989)
작중 미래인 2015년 10월 21일 USA 투데이 신문 1면을 보면 '워싱턴이 다이애나 왕비의 미국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는 문구가 있다. 다이애나는 영화 개봉 8년 후인 1997년에 사망했고 찰스 3세는 그로부터 25년 후 왕위에 오른다.
- 《다이애나》 (2013): 나오미 왓츠
다이애나의 전체적인 일생을 다룬 전기영화가 아니라 파키스탄 외과의사인 하스낫 칸의 연애를 다룬 작품으로 지독한 혹평을 받았다. 나오미 왓츠는 연기력이 좋은 배우이지만 "다이애나의 이미지에는 정말 안 어울린다"는 평을 받았으며 첫 주 흥행도 겨우 62만 파운드에 그쳐 흥행에 실패했다. 다이애나의 마지막 연인이자 같이 사고를 당했던 도디 알파예드는 영화 막판에 5분 정도밖에 안 나오며 윌리엄과 해리는 한 컷, 찰스 3세 등 왕실의 주요 일원들은 아예 등장 하지 않는다.
또한 하스낫 칸이 실제로 다이애나가 만난 남자들 중 가장 가까웠다고는 하나 완전무결하고 마치 진정한 다이애나의 사랑으로 묘사하는 등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평가도 있다.
- 《스펜서》 (2021): 크리스틴 스튜어트
위의 다이애나와 달리 평단의 호평을 받았으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2022년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다만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훌륭한 연기력과 별개로 외모 싱크로율은 나오미 왓츠와 마찬가지로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드라마
- 영국 드라마 《스푹스》 시즌 4
다이애나의 죽음이 계획되었다는 설정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4~6: 엠마 코린(시즌 4)[12], 엘리자베스 데비키[13](시즌 5~6)
현재까지 다이애나의 전체적인 생애를 가장 자세하고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시즌 4~6에서 주역으로 등장.
시즌 4에서는 밝고 발랄한 모습의 소녀로 첫 등장한다. 카밀라와의 결혼에 실패한 찰스 3세가 '과거사가 깨끗하고 정숙한 여성'을 왕세자비 감으로 찾던 중, 자신의 기준에 딱 맞고 명문가 귀족 출신이기까지 한 다이애나를 신부감으로 낙점한다. 친가와 외가까지 나서서 왕세자와의 교제를 부추기고, 왕실 일원들도 둘의 만남을 흡족해하자 계속 찰스와 만남을 이어가다가 결혼하게 된다. 처음에는 왕세자비가 되는 것과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응원에 기뻐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폐쇄적이고 숨막히는 왕실에서의 생활, 여왕을 포함한 왕실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대를 받는다. 그나마 찰스 왕세자의 이모인 마거릿 공주만이 자신의 다사다난했던 결혼생활 때문에 다이애나의 결혼이 비극으로 전개될 것임을 눈치채고 경고하지만, 왕대비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누이인 앤 공주는 다이애나의 인기를 시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왕인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다이애나의 탓을 하며 역정을 내는 것은 덤. 웃긴 점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는 남편 조지 6세가 어마어마한 애처가여서 두 사람 다 서로 죽고 못 살았을 정도였기 때문에 결혼 생활이 딱히 불행하지 않았고, 엘리자베스는 필립 공의 염문설 때문에 마음고생은 했어도 아들처럼 결혼생활 내내 그런것도 아닌데다, 필립 공 쪽에서 대놓고 외도를 저지를 수 있는 위치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두 모녀가 다이애나를 질책할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찰스의 불륜과 열폭이 이어진다.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건 물론이고 두 사람의 커플 팔찌를 결혼 3일 전에 주문해서 다이애나의 속을 박박 긁고 결혼 후에도 수시로 카밀라가 사는 곳을 방문한다. 거기에 자기 자신이 6주간 해외 순방을 할 때는 단 한번도 연락을 안 하면서, 정작 호주 순방 중에는 다이애나에 대한 시시콜콜한 불만을 불륜녀인 카밀라에게 열심히 알린다. 그래도 이 순방 중에 다이애나와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사이가 잠시 좋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호주 국민들에게 열렬한 환영과 인기를 누리고, 호주인들이 찰스에 대해서는 "그분도 좋아요. 다이애나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럴 이유가 있겠죠."라고 말하여 주인공이어야 할 자신이 부속으로 취급받는 것에 열폭해 다시 냉랭해진다. 결국 그로 인해 폭식과 거식증 증세가 반복되고 스트레스를 받아 피폐해져 가는 과정이 묘사된다. 동시에 외부인들에게는 엄청난 인기와 추앙을 받아왔다는 당시의 분위기도 함께 묘사된다. 여기까지가 시즌 4까지의 내용.
이후 시즌 5에서는 본격적으로 찰스와 불화 및 윌리엄과 해리의 어머니로서 분투하는 내용과 맞바람, 시즌 6에서는 이혼 이후 연애사들과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까지 묘사되며 사후 영혼으로나마 등장해 찰스와 화해를 하는 장면으로 퇴장한다.
다큐멘터리
- 《다이애나 - 그녀 자신의 목소리>(Diana: In Her Own Words)》 (2017)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생전의 비공개 인터뷰와 영상들을 모아서 제작.
비디오 게임
- <파파라치> (1997)
G.O.D.D.이라는 집단이 제작한 게임인데 다이애나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1인칭 시점에서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피해야 하는 게임이다. 제작년도로 미루어봤을때 다이애나 사망 사건 이슈에 편승하기 위해서 만든 게임으로 고인능욕, 불근신 게임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아무튼 다이애나 사망 사건이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다보니 한국에서도 PC통신 자료실 게임이나 PC/PC게임잡지부록 CD 등을 통해 드문드문 알려진것으로 보인다. 플레이 영상
뮤지컬
7. 여담
테레사 수녀와 다이애나 | 앙골라를 방문해 대인지뢰 제거 현장을 찾은 다이애나 |
- 왕세자비 시절부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다이애나는 이혼한 뒤 1년밖에 더 살지 못했음에도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이며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이애나가 관여했던 다양한 봉사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대인지뢰 제거 운동이었다. 그녀가 사망한 1997년 하순에는 대인지뢰 금지 국제운동본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다시금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아들 해리 왕자도 어머니인 다이애나 사후에 참여하기도 했다.
-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랐던 어린 시절 때문에 아들들에 대한 애정이 강했는데 왕자들이 자신보다 유모들과 더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특히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왕실로 성인이 되자마자 시집을 와서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첫 아이이자 후계자 윌리엄을 낳았을 때에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왕실에서 외로운 생활을 했던 다이애나 본인은 윌리엄만이 가장 소중했을 시기였다. 왕세자비가 되기 전에도 유치원 보모를 자처했을 정도로 아이들을 좋아했는데, 자신의 아이를 낳았으니 윌리엄이 얼마나 예뻤을지는… 더군다나 결혼 1년 만에 대를 이을 왕세손을 출산함으로써 다이애나의 입지가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후계자로서도 소중한 아이였을 것이다. 이 때 아기였던 윌리엄이 자신보다 유모를 더욱 좋아해서 일어나자마자 엉금엉금 기어가 유모의 침대로 파고들었을 정도라서 첫 번째 유모였던 바버라 반스를 해고했다. 바버라 반스는 어린 나이에 임신한 다이애나를 안쓰럽게 여긴 시이모이자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가 직접 골라 추천해준 인물이었다. 여담이지만 반스는 윌리엄이 성인이 된 후로도 서로 다시 만남을 가진 적은 없다. 훗날 왕의 자리에 오를 왕자의 유모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무례한 처사였다.
- 마이클 잭슨과 만났던 적이 있었다. 두 명 모두 20세기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많은 공감대가 있었고 각자의 아픔을 이해했다고 한다. 1988년 잭슨은 Bad World Tour를 위해 영국을 방문했고 콘서트 직전 다이애나와 찰스를 만나 45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때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다이애나는 잭슨에게 그의 히트곡 'Dirty Diana'에 대해 물었다. 이 곡에서 Diana는 다이애나비가 아닌 그루피를 가리키는데 우연히도 이름이 같은 다이애나인 왕세자비에게 결례를 끼칠 가능성을 고려하여 당시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된 곡이었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의 질문에 잭슨은 그녀를 위해 당시 콘서트의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고 답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에요."라고 말했고 그 노래는 콘서트에서 공연되었다. 이후 잭슨은 HIStory World Tour를 돌던 중 다이애나의 사망을 접하자 콘서트를 하다가 잠시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두 사람 모두 세계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남녀이자 파파라치들로 고통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 루치아노 파바로티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파바로티의 영국 공연 당시 쏟아지는 비 때문에 모두가 우산을 쓰고 공연을 보느라 앞줄의 관객을 제외하고는 관객들이 파바로티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자 파바로티가 대단히 강한 비가 아니니 가급적 우산을 치우고 공연을 볼 것을 요청했고 다이애나가 솔선수범해서 우산을 접으면서 관객들이 모두 우산을 치워 성공적으로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공연 후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었고 훗날 다이애나가 사망한 후에 파바로티는 그녀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 1992년 11월,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회동 및 만찬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남편 찰스 왕세자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공개 석상에서조차 불편한 티를 냈다. 공식적으로 별거를 선언한 시점이 바로 방한 1달 후. 청와대 영빈관 만찬 영상을 보면 찰스가 환영 만찬의 답사를 읽을 때 다이애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며 그나마 최대한 신경써서 편집한 대한뉴스 영상에서조차도 영 좋지 않은 표정으로 일관한다. 다만 서울공항에 착륙하는 16초 지점에서 꽃다발을 주는 남자아이에게 밝은 미소로 화답했으며 주한영국대사관에서의 일정을 다룬 53초 지점 역시 환영 나온 여자아이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나서 밝은 미소로 손을 꼭 잡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고 6.25 전쟁 영국군 참전기념비 방문 일정을 다룬 1분 21초부터 봤을 때 역시 환영 나온 아이들을 보며 모처럼 미소를 짓는다. 이 장면들이 해당 영상에서 유일하게 다이애나가 웃는 모습이 포착된 장면들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아이들을 각별히 좋아하는지라, 찰스 왕세자와의 불편한 일정 속에서 잠시나마 마음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당시의 대한민국 방문은 찰스, 다이애나 두 사람이 부부로서 함께 수행한 마지막 공무였던 셈이고 때문에 지금까지도 둘의 비극적인 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종종 회자되기도 한다.
- 키가 찰스 왕세자와 같으며(178cm) 현대에도 여성 모델 수준의 큰 키인데다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답게 패션 센스도 평균 이상으로 갖췄는데 항상 다리 뒤쪽으로 봉제선이 있는 팬티스타킹 중에서도 발 뒷꿈치에 장식이 달린 원 포인트 스타킹을 즐겨 신었다. 비록 이혼했으나 한때 영국 왕실의 구성원이었고, 유행을 만드는 패션센스로 인해 언제나 파파라치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다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몸매와 키를 지나치게 크다며 조금만 작았으면 좋았겠다며 자신의 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의 각선미는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 멋있는 패션 센스로 인해 주목받은 핸드백도 있다. 크리스찬 디올의 레이디 디올 백. # 레이디 디올 백의 원래 이름은 슈슈백이었는데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의 영부인 베르나데트 시라크가 다이애나에게 슈슈백을 선물하자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다이애나가 색상과 재질별로 여러가지 슈슈백을 크리스찬 디올에 주문을 해서 자주 들고 다녀서 주목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슈슈백이 레이디 다이애나 백으로 불리면서 상당한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디올 측에서 다이애나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레이디 디올 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외에도 페라가모의 다이애나 클러치, 토즈의 디(Di) 백 역시 다이애나의 이름을 따서 판매중인 가방이며, 2021년 재출시된 구찌의 다이애나 백도 다이애나가 들고 다닌 적이 있었던 가방을 다시 출시한거라 다이애나 스펜서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가방이다.
- 다이애나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힘쓴 적은 딱히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게이인 엘튼 존의 친분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LGBT 커뮤니티에서도 인정받는 인사 중 하나다. 특히 에이즈 발견 초기의 환자와 의료진들과 장갑도 끼지 않고 악수한 일화와 사진이 유명하다. 당시에는 의사들도 에이즈 환자는 진찰하지 않겠다는 일부 여론이 있었을 정도로 에이즈는 꺼려지는 병이었으나 다이애나, 엘튼 존, 마이클 잭슨, 라이언 화이트의 활동 등으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때문에 다이애나의 죽음이 알려지자 수많은 게이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 모던 패밀리에서도 작중에서 게이인 캐머런 터커의 "그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을 접했을 때라고."라는 대사가 있었다.
- 2017년에 서거 20주기를 맞아 런던 켄싱턴 궁전에 다이애나 비의 모습을 새긴 영구적인 동상이 세워졌다.# 2020년에는 생전에 즐겨 입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검은 양' 문양의 스웨터가 26년 만에 재출시됐다.#
- 생전 팬 서비스가 무척 좋았다. 싸인과 팬 레터들 요청에 거절하는 법이 거의 없었고 답장을 잘 해주었으며 스스럼없이 먼저 악수를 건네거나 아이들에게는 포옹을 해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다이애나의 진심 어린 팬서비스들은 다이애나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로 실제로 영국 왕실 일원들의 팬 서비스가 다이애나를 기점으로 더욱 친근해지고 좋아졌다는 증언도 많이 나오고 있다.
사진에 대해서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다소 경계하기는 했고 말년에는 거부하는 일도 있었으나 셀카 요청이나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팬들의 요청도 잘 들어주었다.
- 한편으로는 다이애나는 상술했듯 훌륭한 사회 활동들과 비극적인 생애로 현재까지도 많은 동정과 그리움을 사고 있지만 마치 성녀처럼 지나치게 완전무결+신격화되고 있다는 주장도 상당히 제기되고 있다. 물론 서양권에서는 사생활은 별개로 보는 시각이 강하고 다이애나가 모범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습을 보인 것은 존경받아야 할 사실이며 애초에 찰스의 불륜만 아니었다면 없었을 일이었겠지만 찰스와 결혼 상태였을 때는 상술한 아들들인 윌리엄과 해리가 자신의 유일한 기댈 곳이라서인지 아무리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워 예민해졌다고는 해도 아들들이 상술한 티기나 반스를 비롯해 유모들이나 시종들과 가까워졌다 싶으면 독단적으로 해고했던 행동들이나 자신의 시종들이나 보좌관들, 주변인들에게 갑작스럽게 이유없이 화를 내며 화풀이를 했다는 기록들도 상당히 남아있는데 이는 명백한 갑질이다.
무엇보다도 바람을 핀 상대가 그나마 카밀라 뿐이었던 찰스와 달리 다이애나는 수많은 남자들과 맞바람을 피우고 찰스와 이혼 이후에도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며 구애를 하거나 열애설이 퍼지며 실제로도 수많은 남자들을 자주 갈아치운 화려한 연애사 역시 지적을 받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이애나의 맞바람과 연애사들의 경우 맞바람은 찰스의 불륜 때문에 참다 못해 저지른 행동으로서 다이애나만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는 의견 및 연애사에 대해서 개인의 사생활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으나 다이애나의 문제는 다름아닌 이미 연인, 약혼녀, 아내가 있었던 남자들을 만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
물론 이 부분은 다이애나만 비판을 받아야 할 문제는 아니다. 상대 남자들도 자신의 연인, 약혼녀, 아내를 두고 다이애나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
다만 다이애나가 명확하게 비판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라면 이러한 불륜의 고통에 대하여 찰스와 카밀라를 통해 직접 겪은 당사자로서 누구보다도 잘 알텐데도 불구하고 내로남불의 마인드로 자신이 만난 남자들의 연인, 약혼녀, 아내에게 있어서 카밀라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서 그들의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며 자신이 찰스와 카밀라에게 당한 것과 같은 피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것으로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다이애나 본인의 잘못이자 실책이다.[14]
한마디로 다이애나의 맞바람과 연애사들은 어찌보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행동이었고 결국 본인의 이미지와 일생에 있어서 사실상 몇 안되는 오점이자 자충수로 평가받을 여지도 있다는 것.
아무튼 아무래도 비극적인 생애와 요절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다이애나의 갑질들, 맞바람과 연애사들은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 않았거나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기에 만약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다이애나는 처신에 있어서 비판 여론도 상당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하며 결론적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다이애나는 가해자인 찰스[15]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이어진 애정결핍으로 인해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비판 의견들을 찰스와 카밀라의 옹호론자 및 다이애나의 안티들의 지적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의외로 다이애나의 팬들 사이에서도 다이애나가 평생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던만큼 보상 심리로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던 불쌍한 사람이라는 안타까움에서 거론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이는 편이다.
[1]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중퇴이다. 후술할 내용과 같이 공부엔 소질이 없어 중학교 졸업 자격을 따지 못해 최종학력은 초졸.[2] 1936년 1월 20일 ~ 2004년 6월 3일, 향년 68세. 사인은 뇌종양. 여담으로 시외증조할아버지인 조지 5세의 기일에 태어났고, 조지 5세의 생일에 죽었다. 전 남편 존 스펜서는 다이애나 비가 사망하기 5년 전인 1992년 이미 사망했으나, 프랜시스는 다이애나 비가 죽고도 7년을 더 살았다.[3] 1955년 3월 19일 ~[4] 펠로우스 남작부인. 1957년 2월 11일 ~[5] 1960년 1월 12일생. 생후 10시간 만에 요절했다.[6] 왕가를 상징하는 왼편의 상징들이 빠지고, 가운데의 기존 스펜서 가의 문장을 미혼을 상징하는 마름모꼴로 바꾸었다.[7]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스펜서 백작위를 승계하면서 백작의 딸이 되자 레이디의 경칭을 받았다.[8] 다이애나의 개인 문장에 들어가 있는 조개 3개가 스펜서 가문의 문장이다.[9] 웨일스의 조지 공자, 웨일스의 샬럿 공녀, 웨일스의 루이 공자[10] 서식스의 아치 공자, 서식스의 릴리벳 공녀[11] 앤 공주의 시녀의 딸이자 귀족 가문 태생 여성으로 왕실 유모로 취업했을 때 다이애나와 비슷한 외모를 지녀 화제가 됐다.[12] 이 배역으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골든 글로브 드라마 시리즈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13] 이 배역으로 골든 글로브 드라마 시리즈 여우조연상, 에미상 여우조연상 수상을 수상하게 되었다.[14] 단적으로 럭비 선수인 윌 칼링은 다이애나와 불륜으로 첫 아내인 줄리아와 이혼했으며 다이애나 자신의 최후까지 함께 있었던 마지막 연인으로 알려진 도디 알파예드도 다이애나처럼 이혼 경력이 있고 아이들이 있었던 것은 그렇다고 쳐도 약혼녀가 있었다.[15] 실제로 찰스는 아기 시절 외조부인 조지 6세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즉위하게 되어 국왕으로서 업무를 배우기 바빴고 자신과 바로 밑의 여동생 앤 공주와 달리 왕위에 오른 이후 태어난 늦둥이 두 남동생들인 앤드루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를 편애한 어머니의 사랑은 물론이고 아버지 필립 마운트배튼은 최악으로 불행한 어린 시절로 인해 평생동안 수많은 망언 논란과 본인은 극구 부인했으며 사실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엘리자베스와 결혼 초기에 몇 번의 불륜 루머들이 있었긴해도 아내 엘리자베스와 죽을 때까지 해로하며 열심히 내조한 좋은 남편이자 유일한 딸인 앤 공주를 매우 아꼈고 찰스의 아들들이자 필립 공 자신에게는 손주들인 윌리엄과 해리에게도 좋은 할아버지였으며 심지어 다이애나에게 시댁에서 몇 안되는 자신의 편이었다는 점 등 다른 가족들에게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정작 찰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여 필립 공이 죽기 직전에 가서야 부자간의 진정한 화해를 하는 등 아버지의 사랑도 많이 받지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왕세자임에도 어린 학창시절 친구가 딱히 없었고 되려 다른 학생들에게 다른 왕따를 당하는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찰스의 몇 안되는 편이었던 작은할아버지 루이 마운트배튼은 IRA의 폭탄 테러로 한창 찰스가 사춘기로 예민했던 시절 어처구니없이 암살당했던 것은 덤. 찰스는 카밀라와 불륜으로 다이애나에게 상처를 준 행동은 용납하지 못할 잘못으로 다이애나의 인생을 망친 가해자이지만 이러한 찰스의 태도에는 부모에게 사랑을 잘 받지 못하여 역시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알지 몰랐던 다이애나와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애정결핍이 깔려 있었다는 분석도 적지않게 많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이러한 애정결핍에 대한 공통점으로 어쩌면 다이애나와 찰스가 서로를 통하여 이러한 아픔을 치유 및 극복할 수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의견도 나올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