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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 앨버트 | 필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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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국서 & 에든버러 공작 필립 마운트배튼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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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그리스어 |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Φίλιππος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 |||
영어 | 필립 마운트배튼 (Philip Mountbatten)[1] | ||||
출생 | 1921년 6월 10일 | ||||
그리스 왕국 코르푸 섬 몬 레포스 궁전 (現 그리스 공화국 이오니아 코르푸 섬 몬 레포스 궁전) | |||||
사망 | 2021년 4월 9일 (향년 99세)[2] | ||||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윈저 성 | |||||
장례식 | 2021년 4월 17일 | ||||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 |||||
신체 | 183cm | ||||
학력 |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 침 스쿨 고든스턴 스쿨 (졸업) 영국해군사관학교 (졸업) | ||||
배우자 | 엘리자베스 2세 (1947년 결혼) | ||||
자녀 | 장남 찰스 3세, 장녀 앤, 차남 앤드루, 삼남 에드워드 | ||||
아버지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 ||||
어머니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 ||||
형제 |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케킬리아, 소피아 | ||||
종교 | 정교회 (그리스 교회) →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군사 경력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353B4><colcolor=#fff> 임관 | 영국해군사관학교 (1940년) | |||
복무 | 영국 해군 | ||||
1939년 ~ 1952년 | |||||
최종 계급 | 중령 | ||||
명예 계급 | 원수 (영국 육군) 원수 (영국 해군) 원수 (영국 해병대) 원수 (영국 공군) | ||||
상훈 | 전승 공로 훈장[3] 전쟁의 십자가 훈장[4] 그리스 전쟁의 십자가 훈장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5] | }}}}}}}}} |
공식 초상화[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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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이자 국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외아들이며 찰스 3세,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2. 작위
문장[7][8] |
-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Philip of Greece and Denmark (1921년 6월 10일 ~ 1947년 3월 18일)
-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 Lieutenant Philip Mountbatten (1947년 3월 18일 ~ 1947년 11월 19일)[10]
- 필립 마운트배튼 경 전하 His Royal Highness Sir Philip Mountbatten (1947년 11월 19일 ~ 1947년 11월 20일)[11]
- 에든버러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 (1947년 11월 20일 ~ 1957년 2월 22일)
- 메리오너스 백작 Earl of Merioneth (1947년 11월 20일 ~ 2021년 4월 9일)
- 그리니치 남작 Baron Greenwich (1947년 11월 20일 ~ 2021년 4월 9일)
-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1957년 2월 22일 ~ 2021년 4월 9일)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필립 마운트배튼/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가족 관계
<rowcolor=#fff> 2007년 가족 사진[12] |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 <colbgcolor=#fff3e4,#331c00>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 <colbgcolor=#ffffe4,#323300> 요르요스 1세 (George I) | |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 |||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a of Russia) | |||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Konstantin Nikolayevich of Russia)[13] | |||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Princess Alice of Battenberg) | |||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Prince Louis of Battenberg) | |||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 |||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von Hauke) | |||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 |||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 |||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14]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1남 | 찰스 3세 (Charles III) | 1948년 11월 14일 | 슬하 2남[15] |
카밀라 파커 보울스 | |||
1녀 | 프린세스 로열 앤 (Anne, Princess Royal) | 1950년 8월 15일 | 슬하 1남 1녀[16] |
티머시 로런스 | |||
2남 |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Prince Andrew, Duke of York) | 1960년 2월 19일 | 슬하 2녀[17] |
3남 |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Edinburgh) | 1964년 3월 10일 | 소피 리스존스 슬하 1남 1녀[18] |
5. 평가
워낙 복잡한 시대를 살아왔는지라 보는 시각과 기준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 복합적인 인물이다.5.1. 부정적 평가
5.1.1. 실언으로 인한 구설수
연이은 실언과 기행들에서 보듯 인격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영국 국민들이 필립에게 붙인 별명이 '웃기는 사람(funny man)'이다. 이런 면에서 필립은 인종주의나 신분의식 등 1920년대에 태어난 상류층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5.1.1.1. 실언 목록
여러 차례 짓궂은 농담과 실언으로 구설수에 올라 아내인 엘리자베스 2세를 당혹케 만들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릴 적부터 블랙 유머를 즐겼고, 나름 자신이 유머 감각이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19] 하지만 여기에 20세기 초 여전히 대영제국의 영광이 남아 있고 계급 간 신분차별과 인종차별, 성차별이 만연하던 시기에 형성된 의식이 고스란히 깔려 있던 게 문제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국가, 지역, 신분, 인종, 성별간 차별이 점점 금기시되는 시대가 되면서 이런 농담은 블랙 유머가 아니라 실언과 망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사석에서는 이런 발언이 아슬아슬하지만 웃기는 드립 정도로 여겨졌겠지만, 왕가의 일거수일투족이 TV로 노출되고 대중의 가십거리가 되면서부터 더욱 물의로 번지는 일이 많아졌다. 그로 인해 20세기 후반부터 국내외에서 거의 실언 제조기, 공포의 주둥아리 취급을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2세도 필립 공이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불안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이기도 했다.잘 알려진 실언 사례들은 아래 목록 및 인디펜던트가 모은 90가지 발언들에 정리되어 있다. 단, 아래 목록의 실언 중에는 아예 가짜뉴스로 추정되는 내용들도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 1965년에는 수단을 방문해서 베풀어진 리셉션 자리에서 박사학위 소유자들을 소개받고 "이 나라의 유일한 박사들이 틀림없군요."라고 발언했다.
- 1966년에는 자선기금 모금 차 미국을 방문했다가 마이애미의 한 사업가가 "내 풀장에 뛰어들면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자 진짜로 옷을 벗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으나, 그의 사회적인 위치가 영국의 국서라는 것이 문제였다.
필립의 외할머니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가 러시아 제국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첫째 언니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립 공은 니콜라이 2세 차르 부부에게는 조카손자, 그들의 자녀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에게는 5촌 조카이다.[21]
필립의 과격한 발언은 논란이 되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인지라 물어본 기자도 눈치가 없다고 비판받았다.
사실 한국인 기준에서 보자면 조선노동당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몰살당하고 탈출한 북한이탈주민이나 폭정으로 인해 고향과 가족을 잃은 실향민, 이산가족,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고향에 가고 싶나요'라는 질문과 같다.[22]
그 후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소련 해체 후인 1994년에 비로소 러시아를 공식 방문했다. 단, 필립 공은 1973년 국제승마연맹 회장 자격으로 소련을 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다.
필립의 과격한 발언은 논란이 되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인지라 물어본 기자도 눈치가 없다고 비판받았다.
사실 한국인 기준에서 보자면 조선노동당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몰살당하고 탈출한 북한이탈주민이나 폭정으로 인해 고향과 가족을 잃은 실향민, 이산가족,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고향에 가고 싶나요'라는 질문과 같다.[22]
그 후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소련 해체 후인 1994년에 비로소 러시아를 공식 방문했다. 단, 필립 공은 1973년 국제승마연맹 회장 자격으로 소련을 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다.
- 1980년에는 "국민들은 항상 정부에 불평만 한다."라고 말했는데, 당시 영국 경기는 보통 불황이 아니여서 불평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 영국의 경제난은 보통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서 1976년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였다.[23]
- 1984년에는 케냐를 방문해선 현지 여성을 보고 "당신 여자 맞소?"라고 물어 구설수에 올랐다.
- 1986년에는 [25] 학생들이 1년 동안 중국에 머문다는 것을 알아내자, "1년은 사람이 현지화되고, 찢어진 눈이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다.(long enough to go native and come home slit-eyed.)"라고 말했다.[26]
한 학생이 필립 공이 사석에서 한 이 말을 더 선, 데일리 미러의 기자에게 말해주자, 그들은 필립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보도했다. 필립은 "내가 왜 악의를 가지고 찢어진 눈이라는 말을 사용했겠어?(If I did use the phrase 'slit-eye', I certainly didn't use it offensively. Why would I?)"라고 사석에서 해명했다.[27] 거기다 보도에 의하면 많은 중국 유학생들도 이 농담을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서양인들을 "동그란 눈(Round eye)"라고 불렀다고 한다.
- 1987년에는 자서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바이러스가 되어 인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 같은 해 3월에는 하원 의원과의 사적 모임에서 콘돔 관련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 1994년에는 케이맨 제도를 방문해서 현지 주민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해적의 후손이야."라고 말했다. 과거 케이맨 제도가 해적질이 만연했던 것은 사실이다.[28] 그러나 호주인은 범죄자의 후손이라는 편견 같이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일반화해서 문제다.
- 1995년에는 스코틀랜드인 운전학원 강사에게 "자네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음주단속에서 안 걸리게 하려면[29] 얼만큼 술을 마시라 알려주나?" 라고 질문했다. 스코틀랜드는 스카치 위스키와 맥주 생산량이 높아, 영국에서도 유달리 1인당 주류 섭취량과 알코올 중독 환자 발생률이 높다.[30] 스코틀랜드 왕국 작위인 에든버러 공작임에도 이런 발언을 남겨서 더 문제였다.
- 1997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주차요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필립 공은 1976년부터 2011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으로 재임중이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에서 대학총장이란 저명한 왕족이나 귀족, 정치인이 부임하는 명예직에 불과하다.
- 1997년 10월 인도를 방문했을 당시 암리차르 학살에 대한 위령비에 2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을 보고, "2000 명은 틀렸어. 나는 다이어[31]의 아들과 해군에 있었어. 좀 과장된 표현이야... 부상자도 포함되었을 거야."란 말을 해 심각한 외교분쟁을 일으켰다.
- 1997년, 하노버 박람회 방문에서 당시 독일 총리 헬무트 콜과 만났을 때 유창한 독일어[32]로 "Guten Tag, Herr Reichskanzler! (안녕하시오, 제국 총리!)"[33]라고 인사했다. 'Reichskanzler'는 독일 제국과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의 직위명인데, 아돌프 히틀러도 이 자리[34]에 있었기 때문에 민감한 명칭이다.
오늘날 독일의 총리는 '연방총리(Bundeskanzler)'이다. 물론 Reichskanzler가 통용되던 시절에 독일어를 배운 사람이고 이때 이미 70대라 별 생각 없이 내뱉은 것이었겠으나, 독일인들 입장에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법한 발언이었다. 약간 다르지만 한국 국무총리를 총리 대신 내각수상이나 내각총리대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35]
- 1998년에는 파푸아뉴기니에 다녀왔다는 영국 학생에게 "용케도 안 잡아먹혔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푸아뉴기니의 일부 부족들은 아직도 식인 풍습이 있고,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타 부족원에게 극단적인 복수를 행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 1999년에 와이어 연결이 끊어진 퓨즈 박스를 보고 "이건 인도인이 만든 거야."라고 단정지었다. 사석에서 이 말을 한 이유에 대해 묻자 필립은 "자네가 정말 인도에 방문해 퓨즈 박스를 한 번 봤어야 해!"라고 말했다.
- 1999년 5월 웨일스에서 열린 락 콘서트에 참석해서 같이 공연을 보던 청각장애 어린이에게 "(이런 걸 듣고 있으니) 귀가 안 들릴 만도 하지."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필립은 가일스 브랜드레스에게 개인적으로 "어머니가 청각장애인이었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국립 기관의 후원자였던 내가 그런 말을 하겠냐.", "나는 그 공연에서 청각장애 아이들을 만난 적 조차도 없다", "스피커 소리가 너무 커서 가까이 앉으면 귀를 먹을 것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라는 등 언론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해명했다. [36]
- 2001년, 영국 왕실의 연례 문화행사인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가 그해 11월 26일 런던 도미니언 극장에서 열렸을 때, 공연을 한 엘튼 존을 보고 "마이크 좀 껐으면 좋겠다"라고 조롱했다.[37] 두 사람은 이전에 한 차례 악연이 있었다. 엘튼 존이 1975년부터 윈저 성과 가까이 위치한 윈저 우드사이드에 거주하기 시작했을 때, 1976년에 왓포드 FC 회장 역임 당시 보유하고 있던 애스턴 마틴을 왓포드 유니폼(노란, 빨간, 검정) 색깔로 도색하며 몰고 다닌 것으로 필립한테 악담을 들었다고 2019년 자서전 〈Me〉에서 밝혔다.[38]
- 2002년에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12세 소년에게 "넌 살부터 빼야 한다."라고 조롱했다.
그 당시의 모습으로, 엘리자베스 2세 호주 국왕이 크게 당황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와 같은 부군의 발언에 크게 곤욕을 치르곤 했다. 더불어 호주 정부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호주 정부가 한때 원주민에 대한 탄압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 질문을 받은 원주민 대표는 "아니요, 요즘은 그러진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같은 해 <인디펜던트>[39] 편집장이 엘리자베스 2세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며 왕실의 초청을 받고 방문하자 "당신 부른 적 없어, 왜 온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맞이해 또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 같은 해 방글라데시에 방문하여 유소년 클럽 회원들을 보고 "대체 무슨 마약을 했길래 몰골이 그러니?"라는 질문을 던졌다.
- 2003년 전통 옷을 입은 올루세군 오바산조 나이지리아 대통령을 만났을 당시 천을 둘둘 만 듯한 나이지리아 전통옷을 보고 “당신은 이제 바로 잠자리에 들 준비가 되었네요”라는 말을 했다.
- 2009년 IRA의 공격으로 눈을 크게 다친 상이군인이 왕실을 방문한 자리에서 여왕이 "지금은 시력이 좀 나아졌나요?"라고 묻자, 옆에서 "매일 입는 옷 색깔이 비슷한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라고 거들었다가 대차게 까였다. 당사자가 대신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며,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고 해명해야 했다.
- 2013년 영국에 체류 중인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버킹엄 궁전을 방문하자 "영국에서는 부모가 애들이 집에만 있는 꼴이 보기 싫어 학교에 보낸단다."라는 농담을 해 구설수에 올랐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학교를 못 가게 하는(여성의 교육을 억압하는) 탈레반 때문에 영국에 온 것이다.
- 같은 해에는 병원을 방문해 간호사들과 자리를 함께 하면서 필리핀계 이민자 출신 간호사들에게 "당신들이 우리 의료보험을 지탱해 주는 건 좋은데, 당신네 나라는 텅 비어버릴거요"라고 이야기해 물의를 빚었다.
- 2015년 7월 10일, 장손 윌리엄 왕세손과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참석한 참전용사 모임에서 기념사진 촬영이 지연되자 심기가 불편한 모습을 보이다가Just take the fucking picture!(그냥 그 X같은 사진 좀 찍어!)
라고 화를 냈다.
순간 에드워드 왕자는 아무 표정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윌리엄 왕세손은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다만 이건 고령의 노인이 피곤하고 기다리는게 지쳐져서 화를 냈다는 분석도 있고, 단체사진이라는게 제대로 찍으려면 생각보다 노력을 해야한다는 점때문에 공감간다는 반응도 꽤 있다.
이런 일들이 너무 잦아서 영국의 역사가이자 언론인 데이비드 스타키(David Starkey)는 필립의 기행을 "드라마의 빅터 멜드루(Victor Meldrew)같다"고 꼬집었다. 빅터 멜드루는 영국 BBC 시트콤 'One Foot in the Grave'에 등장하는 괴팍한 노인 캐릭터인데, 우리나라의 드라마 등장인물로 치면 "무슨 노인네가 인성이 노구나 야동순재급이시네요."라고 깐 셈이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이런 모습을 반영하여 필립 공이 종종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 묘사된다. 예를 들면 시즌 1 2화에서는 케냐의 다양한 부족장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부족장들의 개오지 목걸이를 툭툭 쳐내며 가슴에 달린 훈장을 가리키며 "이건 나도 못 받은건데 어디서 훔쳐온 것이냐"고 묻거나, 전통 왕관을 가리키며 "모자 멋지다"고 말하는 등의 언동을 보여 엘리자베스 2세가 주의를 주는 모습이 나온다. 다만 흑인을 진심으로 멸시한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별 생각 없이 옛 사고방식에 젖은 실언을 던지는 것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일례로 2화에서는 나이로비 현지 어린이들과 다정하게 놀아주는 필립의 모습 역시 묘사되어 있다.
거기다 항상 이렇게 실언만 하는 건 아니었고, 나름 재치있는 모습도 보여준 적이 있다. 한 리포터가 필립 공에 대한 뉴스를 보도하고 있을때 우연히 그 리포터 뒤를 지나가게 됐는데, 기자가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눈치채고는 보도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서서 카메라의 뒷배경 역할을 했다고... 리포터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뒤를 돌곤 필립 공을 보고 놀랐는데, 이에 필립 공은 웃으며 "다 했소?(Finished?)"라고 묻고는 갔다.https://www.youtube.com/watch?v=UnaW1Rc-Jxw&t=75s&ab_channel=Sunrise
5.1.1.2. 고려해야 할 점
필립은 유럽 왕실들 중에서도 제일 으뜸[41]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왕실의 공주(The Princess),[42] 그것도 차기 여왕인 왕세녀에 준하는 공주였던 아내 엘리자베스와의 혼인으로 과소평가된 감이 있으나, 원래 최상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왕족으로 엄연한 상류층 출신이다.[43] 누나들이 전부 다 독일 왕공족들에게 시집가서 그렇지 신분으로만 따지면 여왕의 남편이 되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오히려 일등 신랑감 수준으로, 이런 위치에서 평생을 살아온지라 동년배 기준으로도 더 경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궁에서 귀한 공주로 자라면서 온실 속 화초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영국 특유의 레이디 퍼스트 성정을 지닌 영식들만 봐왔던 엘리자베스에게 필립은 신선한 충격과 설렘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5.1.2. 찰스 3세의 아버지로서
다른 자녀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자상한 아버지였지만, 누구보다 사랑하고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 왕위 계승자인 장남 찰스 3세에게는 불필요할 정도로 엄했다. 그래서 당시 찰스 왕자는 엄격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든스턴(Gordonstoun)이란 스코틀랜드 시골 한가운데 있는 기숙학교[44]에 들어간 자신을 필립이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며 딱 잘라 무시했다는 일화도 있다. 찰스 3세는 왕자로서 귀하게 자라 세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든스턴 스쿨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급우들에게 따돌림도 심하게 당했다. 나중에 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지옥이자 수용소 생활"이라 회고했을 정도로 싫어한 찰스 3세는 자신의 아들들을 전부 이튼 칼리지로 진학시켰다. 필립과 찰스 모두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사이가 좋아졌다. 찰스는 자신이 애정을 덜 받았다고 회고했고, 필립 공이 아버지로서는 별로, 할아버지로서는 최고라고 은근하지만 직접적으로 깠다.5.2. 긍정적 평가
5.2.1. 가족으로서의 필립 공
찰스 3세의 경우를 제외하면 가정적으로는 매우 자상한 아버지이긴 했다. 가장 사랑했던 자식은 자녀들 중 하나뿐인 딸 프린세스 로열 앤 공주로, 성격도 외모도 자신을 닮아서 유독 아꼈다고 한다.막내아들인 에드워드 왕자가 장래 군 복무를 조건으로 영국 해병대로부터 대학 시절 등록금을 지원받았지만, 입대 후 계약 기간인 12개월 중 의무복무기간 3분의 1만 하고는 전역을 신청했을 때 집안에서 에드워드의 편을 들어준 것도 아버지 필립이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와 누나 앤 공주는 "네가 선택한 길인데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엄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필립 역시 해군 장교 출신인 데다 장남 찰스 왕세자도 대학 졸업 후 영국 해군에 입대해 복무를 마쳤고, 차남 앤드루 왕자도 포클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한 군인이었다.
맏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에게도 다정한 시아버지였다고 한다. 다이애나가 찰스의 불륜으로 고통을 호소해도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는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는 원론적인 대답만 반복하고 방관하였던 반면, 시아버지 필립은 자신과 다이애나의 입장이 같다고 느껴서[45] 당시 왕실 인사 중에선 거의 유일한 다이애나의 우군으로 하소연을 들어주고 슬픔을 달래주었다. 다이애나와는 특히 편지도 자주 주고 받았고 "너를 버리고 카밀라 파커 보울스에게 가려 하다니 찰스 저 자식이 도대체가 제정신이 아니다"고 다이애나의 편을 들기도 했다. 찰스에게도 "멍청한 놈, 바람은 바람이고 가정은 가정이지!"[46]라고 혼내기도 했다. 다이애나 역시 왕실에서 고립된 자신을 신경써주는 필립 공에게 매우 고마워하여 편지에서도 그를 Dearest Pa[47]라고 부르는 등, 사이가 좋았다.[48]
다이애나의 아들들인 손자 윌리엄과 해리와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다이애나 비의 장례식 당시에도 손자들이 가엾다며 뒤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장례식 행렬에서도 내내 손자들을 신경썼으며 이후에도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애썼다고 한다.[49] 또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준비할 때 다들 어린 왕자들보다는 국장 순서와 진행 사항에만 더 신경쓰자 "이 애들은 방금 어머니를 잃었다"며 일갈했으며[50],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장례식에 빠지려는 윌리엄에게 "지금 (장례식 행렬을 따라)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게 될 거다. 할아버지랑 같이 가 보자꾸나(If you don't walk, I think you'll regret it later. If I walk, will you walk with me?)"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BBC가 사상 최초로 TV 생중계를 하도록 한 점이나, 당시 왕실 어른들 중 드물게 처제 마거릿 공주가 이혼 경력이 있는 피터 타운샌드 영국 공군 대령과 결혼하는 것에도 찬성[51], 손자 해리 왕자가 이혼 경력이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 메건 마클과 교제하는 것을 허용하고 둘을 지지하는 등 왕실과 관련된 파격적 변화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면도 있다.
드라마 더 크라운 등 필립 공에 대해 다룬 매체들에 따르면, 어린 시절 그리스에서 쫓겨난 경험을 통해 "왕실이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국민들이 왕실을 지지해주지 않을 것이고, 국민의 지지가 없는 왕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때문에 왕실의 풍습과 법도에 대해 이런 개혁적인 면모를 가지게 됐다고. 이러한 시선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필립 공은 조국에서 쫓겨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국 왕실을 개혁시킨 인물로 평가받게 된 셈이다. 어찌보면 정말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면 외부 접촉도 거의 하지 않고 살았을 텐데, 사고의 대부분이 구시대적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라 물의를 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을 듯.
이런 면과 아래의 왕실 현대화 부분 등을 보면, 개인적인 인품은 좋았으나 옛날 상류층 특유의 사상을 완전히 버리진 못한 것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필립 공에 대해 조승연의 탐구 생활에 나왔던 영국인은 필립 공을 그냥 "옛날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5.2.2. 왕실 현대화
영국 왕실의 현대화에 앞장섰다는 점 만큼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때 필립 공이 영국 왕실에 도입한 것들은 다른 왕실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현대 왕실의 표준처럼 자리잡기도 했다.필립 공은 '주식회사 왕실의 총무부장(general manager of The Firm)’으로 불릴 정도로 여왕을 대신해 왕실 내의 대소사를 직접 다 챙겼다. 우선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던 왕실 재산 관리와 지출을 틀어 잡았다. 왕실의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챙겼는데, 왕궁 내의 정원에 무엇을 심는지까지 필립 공의 결재를 받아야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장악하고 관리했다고 한다.
자녀들의 교육 방식도 완전히 바꿨는데, 전통적으로 영국 왕의 직계 가족은 외부 학교를 가지 않고 궁내에서 교육을 받았다. 왕족이 어떻게 일반인들과 같이 어울려서 교육을 받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왕실이 현대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왕과 왕족이 일반 국민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던 필립 공은 자녀들을 일반 학교에 보냈고[52][53] 그 결과 영국 왕실의 자녀들도 일반인들과 동일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불필요한 관습을 없앴는데, 필립 공이 영국 왕실에 입성한 1950년대에는 아직까지도 궁전 안에서 직원들이 분가루를 묻힌 가발을 착용하고 다녔다. 필립이 이를 폐지해 드레스 코드가 대폭 완화되었다고 한다. 또 당시 왕족들은 아직까지도 전화가 아닌 쪽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전화가 보급된 지 70년이 넘었는데도[54] 아직까지 쪽지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기겁한 필립은 궁내 전화 설치를 직접 주도했다고 한다. 테크의 메리 왕비와 왕실 중신들은 이에 반대했으며, 필립 공의 왕실 개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버킹엄 궁전 내에는 왕족들이 사용하는 부엌과 왕실 직원들이 사용하는 부엌이 따로 존재했는데, 필립 공이 이를 하나로 합쳤다고 한다. 두 개의 부엌이 존재하면서 생기는 낭비와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였다. 여왕이 매년 궁전 직원들을 위해 열어주던 성탄절 파티도 필립 공이 제안해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필립 공은 미디어 노출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대표적으로 1953년 대관식 생중계도 필립 공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55] 그러나 필립공은 왕실의 존재는 왕족이 국민들의 가시권에 있어야지 괴리되어 존재하면 안 된다고 했다. 또 왕실이 왕실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타성에 젖어있는 왕실 측근들을 설득했다. 1961년에는 직접 텔레비전 인터뷰에 출연하면서 처음으로 방송에 단독 출연한 왕족이 되었다.
1969년에 방영된 왕실 다큐멘터리 'Royal Family' 역시 필립 공의 주도로 제작된 것이었다. 카메라가 왕궁 안까지 들어와 왕실 가족의 내밀한 실내까지 보여주고 여왕과 필립공은 어떤 식탁에서 식사하고 왕족들이 같이 TV를 보는 거실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어 공전의 인기를 끌었다. 당시 필립 공은 다큐멘터리의 모든 장면에 세세히 개입했는데, 자신이 바비큐에서 소시지를 굽는 장면도 넣고 왕실 가족이 거실에 모여 앉아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담소하고 심지어는 논쟁하는 자연스러운 장면까지 넣게 했다. 이렇게 해서 필립공은 어느 별의 이야기 같았던 왕실이라는 실체를 국민들 근처로 불러들이고 왕실이 왕실만을 위한 박물관의 박제로 남는 것이 아닌 영국을 위한 박제로 남는 선택을 했다. #
6. 매체에서
- 영화 《더 퀸》: 제임스 크롬웰
전통을 중시하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여론의 질타에 꼬장꼬장하게 분통을 터트리곤 한다.
- 영화 《스펜서》: 리차드 새뮤얼
-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 맷 스미스(시즌 1~2), 토비아스 멘지스(시즌 3~4), 조너선 프라이스(시즌 5~), 핀 엘리엇(아역)
상술한 복합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인물로 나온다. 결혼 이후 해군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몰타에서 행복한 결혼 초기를 보내고 있었으나, 엘리자베스가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자 개인적인 커리어를 포기하고 한 가정의 남편이 아닌 여왕의 국서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로 인한 부부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는 모습이 1~2시즌에 그려진다. 엘리자베스가 젊은 나이에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여왕의 자리에 올라 여러가지 부침을 겪는 것 처럼 필립 역시 아내 뒤로 한 발 물러나야 하는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 [56] 그런 와중에도 대중에게 대관식을 TV로 생중계 하거나 다큐멘터리로 왕실의 생활 모습을 공개하는 등 변하는 시대에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의혹 제기일 뿐이긴 하지만 해외 순방 중의 불륜인지 아닌지 의심되는 애매한 연출이나 장남 찰스에게 가혹할 정도로 매정하게 구는 모습 등이 묘사된다. 앞서 말한 막말 일화도 등장했다.[57][58]
초반 시즌 많은 갈등을 겪고 나서 부부 사이가 상대적으로 안정기로 들어선 3시즌 이후부터는아직 다소 철은 없지만여러모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7. 여담
- 2살도 안 되어 그리스를 떠났기 때문에 그리스어는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1992년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독일의 슐레 슐로스 잘렘에서 수학하기도 하여 독일어 능력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 #
- 엘리자베스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에드워드 7세의 증손녀이고 필립은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의 증손자로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자 모계[59] 기준으로는 8촌이다. 또 필립의 조부 요르요스 1세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이고 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모인 알렉산드라는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로 부계[60]로는 7촌 관계이다.
- 1985년 전두환 前 대통령은 필립 공이 당시 국제승마협회 회장 자격으로 방한했을 때, 필립 공에게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했다. # 이후 필립은 2004년 여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前 대통령 환영만찬이 열리자 훈장을 이브닝 드레스에 패용한 채 참석했다.
- 러시아 혁명 와중에 처형당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1991년 공식 발굴되었을 때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검사 샘플로 필립의 DNA가 제출되어 화제를 모았다. 필립의 외조모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가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자매였기 때문에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성상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 및 자녀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의 외손자인 필립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가운데서 미토콘드리아가 모계로 유전된 사람으로서 DNA 검사 당시 생존한 알렉산드라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바로 필립이었다.
- 젊은 시절부터 운전하는 걸 상당히 좋아해서 90살이 넘은 나이까지 자신의 자가용인 랜드로버를 운전기사 없이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다. 하지만 2019년 랜드로버를 몰다가 교통사고를 냈는데 며칠도 안 되어 다시 운전대를 잡은 모습이 포착됐다. 심지어 안전벨트까지 매지 않은 상태였다 보니 비판 여론이 들끓자 거의 반강제적으로 운전면허증을 반납했다. 이때가 무려 97세로 상당한 고령이다. 이후 여생 동안은 운전을 하지 않았다.
-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와 많이 닮았다. 젊었을 때 잘생겼다는 평가를 들었던 필립처럼 앨리스도 젊은 시절에 미인으로 유명했다.
- 영국의 정치인이자 다이어리스트인 헨리 '칩스' 새넌은 필립의 결혼 이전부터 필립이 영국의 국서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스에 잠깐 방문 중이던 필립을 만난 후 “ 여기 칵테일 파티에 그리스의 필리포스도 있었다. 그는 놀랄정도로 잘생겼는데, 필리포스가 우리 해군에서 복무하는 것은 영국의 국서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옐레나 왕자비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매력적이지만, 이 결혼은 반대다. 그들은 너무 근친이라고!“라고 일기를 적었다. 버킹엄 궁에 방문 했을 때도 같은 내용의 일기를 적었으며,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집에 방문한 새넌은 방문록에 필립의 이름이 자주 써진 것을 보고 "틀림없이 여기서 엘리자베스 공주와 만나는구나. 정말 공주가 필립과 결혼할 것 같아"[61]라고 적었다.
- 자신과 영국 왕실을 다루는 드라마 《더 크라운》을 아내인 엘리자베스 2세와는 달리 즐겨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즌 초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다룬 편[62]을 보고서는 격노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법무팀을 동원해 고소미를 시전하려다 다른 왕족들의 설득으로 무위에 그쳤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필립 공을 연기한 맷 스미스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한 한 영화계 유명 인사에게 그가 필립 공과 나눈 다음의 대화 내용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필립 공 : 자네 요즘 무슨 일 하나? 혹시 그 크라운인가 뭔가 하는 거에 관여하고 있나?영화계 인사 : 아닙니다, 그쪽 일엔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다.(시간이 흐른 뒤)영화계 인사 : 필립 전하, 헌데 궁금해서 말입니다. 더 크라운을 제작하고 있는 제 친구들이 있어서 그럽니다만, 혹시 그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필립 공 : (노려보면서) 말 같잖은 소리 좀 하지 말게나 (Don't Be Ridiculous).
한편 엘리자베스 2세도 시즌 초에 엄하게 그려진 남편 필립 공과 아들 찰스 3세 사이에서 빚어지는 불편한 관계와 갈등이 묘사되어 있는 부분들을 불편하게 여겼다고 제작진에게 지적한 적이 있다고 한다.
- 바누아투의 탄나 섬에 살고있는 부족들이 필립 공을 신의 아들로 여기며 자신들과 같은 부족으로 여기고 있어 화제가 됐다. 부족의 전승에 의하면 오래전 산신의 아들이 강력한 힘을 가진 아내감을 찾기 위해 섬을 떠났는데, 이 산신의 아들이 바로 필립이며 백인들의 어리석음, 질투, 탐욕, 그리고 끊임없는 싸움으로 인해 섬에 돌아오지 못하고 숨졌다고 여기고 있다. 심지어 필립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집도 있다고. 이들은 2007년 필립을 만나 전통 술과 선물을 바치고 섬에 돌아올 것을 청하기도 했으며,[63] 필립 역시 탄나 섬 주민들에게 답례품과 함께 이런저런 지원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학자들은 바누아투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 시내 관공서에 걸린 필립의 초상화[64]에서 신앙이 비롯되었고 1974년 필립 공이 여왕과 함께 뉴헤브리디스 제도를 방문한 이후 이런 믿음이 더 강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립 공이 사망한 후에 해당 부족은 매우 애통해하며, 마을 족장은 필립 공의 영혼은 살아있으며 영원히 자신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인터뷰했다.#
- 1960년대에 직접 조종사로 북아프리카 투어를 간 적이 있는데, 이때 같이 비행기를 몰았던 부조종사가 피터 미들턴이었으며 이 부조종사의 손녀가 바로 훗날 손자 윌리엄의 아내가 되는 캐서린 미들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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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엘리자베스 2세와의 혼인을 위해 영국으로 귀화하면서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쓰게 되었다.[2] 100세 생일을 2개월 1일 앞두고 사망했다.[3] MiD[4] Croix de Guerre[5] 크레타 섬 전투, 마타판 곶 해전,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드라군 작전, 롭슨 작전, 렌즈콩 작전, 오키나와 전투 등의 전투에 참전했다.[6] 말년인 2017년에 공개된 초상화로, 필립 공의 생전 마지막으로 공개된 초상화이다. 특이하게도 영국의 훈장이 아닌, 덴마크 코끼리 기사단 훈장의 대수를 둘렀는데 글뤽스부르크 왕조 출신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 필립이 서있는 복도의 끝에는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와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태어난 방이 있으며, 오른쪽 벽에 부착된 영국 왕실 가족 초상화에는 어머니 앨리스 공녀의 어린시절 모습이 그려져 있다.[7] 남편의 문장과 합쳐지는 왕자비들의 문장과 달리, 필립 공의 문장은 아내의 문장과 합쳐지지 않았다. 좌측 하단의 흑백 문양이 외가 문장이며, 상단 문장은 친가와 그리스의 문장에서 따왔다. 우측 하단의 문장은 에든버러 시의 문장에서 따왔다.[8] 이 문장 이전에는 그리스 왕자로서의 문장에 영국 왕통에 가장 근접한 조상인 영국의 앨리스 공주의 문장을 덧붙인 문장을 사용했다.[9]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Earl of Merioneth, Baron Greenwich, Royal Knight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Extra Knight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Grand Master and First and Principal 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Member of the Order of Merit, 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 Additional Member of the Order of New Zealand, Extra Companion of the Queen's Service Order, Royal Chief of the Order of Logohu, Extraordinary Companion of the Order of Canada, Extraordinary Commander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Canadian Forces Decoration, Lord of Her Majesty's Most Honourable Privy Council, Privy Councillor of the Queen's Privy Council for Canada, Personal Aide-de-Camp to Her Majesty, Lord High Admiral of the United Kingdom[10] 엘리자베스 2세와의 결혼을 위해 이후 그리스 왕위 계승권과 왕족 신분을 포기했다.[11] 엘리자베스 2세와의 결혼을 위해 그리스 왕족 신분을 포기하면서 HRH 칭호를 잃었다가 다시 받게 되었다. 왕자비와 달리 공주의 부마들은 HRH 호칭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왕족 신분을 받지 못하므로 원칙대로라면 필립도 HRH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으나 차기 여왕의 부군이 될 사람이었기에 전하 칭호를 수여한 것이다.[12] 뒷줄 왼쪽부터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프린세스 로열 앤,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 찰스 3세, 엘리자베스 2세, 필립이다.[13] 니콜라이 1세의 차남이다.[14]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다.[15] 웨일스 공 윌리엄,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16] 피터 필립스, 자라 틴달[17] 요크의 베아트리스 공녀, 요크의 유지니 공녀[18] 레이디 루이즈 마운트배튼윈저, 웨식스 백작 제임스 마운트배튼윈저[19] 그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도 농담을 좋아했다고 한다.[20] 일련의 영국 관련 발언 때문에 필립 공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개념없는 영감이라는 농담아닌 농담도 있다. 다만, 필립 공은 스스로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입맛이 엘리자베스 2세와는 너무나도 달랐어서 이런 말을 내뱉게 된 측면도 있다.[21] 필립 공의 할아버지인 요르요스 1세가 니콜라이 2세의 외삼촌이니 필립 공은 니콜라이 2세에게는 5촌 조카, 그 자녀들과는 6촌 사이가 된다. 또한 필립 공의 외할아버지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는 니콜라스 2세의 5촌 당숙으로 필립 공은 니콜라스 2세에게 7촌 조카이다. 그와 동시에 필립 공의 친할머니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이 니콜라이 2세의 5촌 당고모라서, 니콜라이 2세에게 7촌 조카이자 그 자녀들과는 8촌 관계로 겹겹이 친척 관계였다.[22] 물론 고향이라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듯이, 풍비박산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잊기 위해 평생 가기도 싫다는 사람도 있으며, 필립 공은 상대적으로 후자에 해당하는 당사자였다고 보면 된다.[23] 이 불황을 해결하겠다고 나서서 강력한 구조개혁을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당시 마거릿 대처의 정책은 경기를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서민층과 노동자 계급에서는 많은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24] 솔로몬 제도는 현재도 인구가 74만 명으로 영국에 비해서 한참 적다. 현재 기준으로 인구 성장률이 5%라면 올해에 3만 7천명만 늘어도 달성되는 수준. 그러나 영국은 388만 명이 늘어야 달성된다.[25] 중국에 머무는 유학생들 중 에든버러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들에게 에든버러 대학교 총장인 필립 공은 그 학생들에게 매우 관심을 가졌다.[26] 이 발언은 인종차별이 맞지만 본인에게는 악의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가 영국에 거주하는 중국 유학생들에게 "이곳에 너무 오래 있다가는 당신들 눈도 크고 동그래진다"고 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27] 사적인 점심 모임에서 어떤 사람들이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로 농담을 하자 필립이 그 사람들의 말을 저지했다는 등 필립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증명해주는 일화는 많다. 필립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1920년대 사람이다 보니 그 시대의 잘못된 편견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28] 의도적으로 주변을 지나가던 선박을 암초에 걸리게 한 다음 노략질을 해서 먹고사는 전형적인 약탈 경제였다.[29] 정확히는 음주단속 적발로 인한 무효처리.[30] 비슷하면서도 다른 맥락으로, 음주량이 높은 국가에서는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널널한 편이다. 그중에서도 땅이 넓거나 개발도상국 같은 경우는 맥주 한두캔이나 칵테일 한잔 정도는 그렇게 문제삼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적발해도 몇가지 테스트 후 크게 문제 없어보이면 차를 한번 검사한 뒤에 구두경고 혹은 가벼운 과태료 정도로 끝난다. 물론 이것도 크게 문제가 없어보이거나 참작이 됐을 때 가능하지 만취한 상태거나 아예 사고를 내면 가차없이 처벌수위가 올라간다.[31] 레지날드 다이어. 인도 암리차르 학살의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32] 필립 공은 어린 시절 독일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어서 독일어에 매우 능통했다.[33] 한글로 표기하면 '구텐 탁, 헤어 라이히스칸츨러'[34] 히틀러의 대표적 직책 퓌러의 정식 명칭부터가 Führer und Reichskanzler(최고영도자 겸 제국 총리)이다.[35] 내각수상은 북한에서, 내각총리대신은 일본에서 쓰는 직책명이다. '제국총리'라는 표현이 히틀러의 존재로 민감해진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36] 6월 4일, 원문은 You may have noticed that the tabloids were quick to suggest that I had made another 'gaffe' 'insulted' some deaf children at Cardiff recently. Needless to say, the story is largely invention. It so happens that my mother was quite seriously deaf and I have been Patron of the Royal National Institute of Deaf for ages, so it's hardly likely that I would do any such thing. Quite apart form that, I have no recollection of meeting a group of deaf children at the event for the Prince's Trust in the grounds of Cardiff Castle. There were young people milling all over the place and there may well have been a group of deaf children amongst them. What I do remember is that the noise from various stages and bands was quite deafening and I may well have said at some point something to the effect that if anyone were to sit too close to the loud speakers they would certainly be in danger of going deaf.[37] Prince Phillip outburst: Sir Elton John reveals shock moment he was confronted by Duke[38] The day Prince Phillip savagely told off neighbour Elton John[39] <인디펜던트>는 시론으로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언론이다. 구독자들도 공화주의자가 많은 편.[40] 정확히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 킬트에 그려진, 타탄이라는 다른 여러 선이 교차되는 스타일의 무늬이다.[41] 칭제만 안했지 영국 왕실은 그 명성으로 따지자면 19세기 후반 독일 황실, 러시아 황실, 오스트리아 황실과 동급인 격이 높은 왕조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대부분의 유럽 왕실들이 아예 퇴위하거나 권력을 잃고 몰락한데다 상술한 저 세 가문 역시 폐위되어 망명을 떠나거나 아예 왕가의 일원들이 학살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영국만이 유일하게 군주제를 유지했다. 두번의 세계 대전이라는 난리통 속에서도 영국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서 모두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하며, 대영제국 시절보다 위상은 낮아졌을지언정 현존하는 왕실 중에서는 큰어른 위치로 군림하고 있다.[42] Princess란 작위 앞에 The가 붙는다는 건 왕자의 딸(왕의 친손녀/종친)이 아닌 왕의 적녀라는 뜻이다. 왕자의 딸도 Princess 작위와 HRH(전하) 칭호는 가지고 있으나, 앞에 The를 붙이지 않고 부친의 영지 이름을 따서 'Princess of~ (~의 공녀)'라는 작위로 불린다. 이는 왕세자(Prince of Wales)의 딸도 마찬가지다. 사실 Princess니 뜻만 놓고 번안하자면 왕녀나 공주라고 봐야 맞겠지만, 한국에선 왕의 딸과 왕자의 딸이라는 서열 구분을 하기 위해 공식적인 작위는 공녀라고 번안한다. 이는 대공의 딸도 같다.(ex.헤센의 알릭스 공녀)[43] 망명생활을 하던 어린시절은 어디까지나 왕족, 그것도 고위 왕족이라는 기준에서 가난하게 살았을 뿐이지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44] 이 학교는 필립의 모교인데, 매우 억압적인 교칙으로 유명한 학교다. 필립은 아들들을 모두 이곳에 보냈다.[45] 필립 공 자신도 혼인 초기에 몰락한 집안과 부모의 사정 등으로 멸시를 받았기에 사실상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며느리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을 것이다.[46] 현대의 일반인들 눈에는 둘을 따로 놓고 볼 수가 없지만 유럽 왕족 및 귀족들은 예로부터 정략결혼이 많아 배우자에게는 정치적인 의무를 다하고 연애는 내연녀와 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과거에는 그 부인에게 가짜 남편을 결혼시킨 뒤, 만약 왕이 자식을 낳을 경우 그 남편의 아들로 세례를 받게 하는 식으로. 로얄 미스트리스 부분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에 익숙한 필립 공도 찰스에게 가정에 대한 의무는 지키라고 꾸짖은 것.[47] 번역하면 '가장 소중한 아빠' 정도의 표현이다.[48] 다만 2002년 쯤에 다이애나의 심령 치료사라는 사람이 다이애나가 맞바람을 피운 이후로는 필립 공이 "찰스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런 행실이 용납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그녀를 비판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고 주장해 크게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필립 공은 자신이 그 해당 편지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데, 심령치료사가 공개한 편지 양식과 서명이 모두 자신의 것과 다르다며 조작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또한 자신은 단 한 번도 며느리에게 나쁜 말을 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 부분은 넘어갈 수 있는게 의혹을 제기한 사람이 다이애나의 최측근이나 가족도 아니고 심령 치료사라는 이상한 직업을 가진 사람인데다 생전 다이애나와 인연도 없었다. 반면 필립은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시아버지이고 국서 신분이다. 신분적으로나, 가정 내의 위치에서나 필립의 말이 더 설득력 있다.[49] 이 때문인지 해리 왕자가 훗날 왕실이 인종차별적 태도를 보여 아내 메건을 압박했다고 폭로했을 때도 조부모인 필립 공과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범인이 아니라고 별도의 증언을 했다.[50] 생애 항목에서도 나왔지만 필립 역시 생후 1년 만에 고국인 그리스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나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아버지에게도 사실상 버림받은 데다 부모 대신 외삼촌과 외숙모들 손에서 자라면서 신분과는 별개로 빈말로도 가정사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본인도 고작 16살 때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누나, 매형, 조카들을 한꺼번에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손자들이 더욱 안타까웠을 듯 하다.[51] 결국 성공회 교회의 반대와 내각의 반대, 그리고 법률상의 문제로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52] 필립 공은 네 자녀 중 앤을 제외한 아들 모두를 자신의 영국 모교이기도 한 고든스타운 보딩 스쿨에 입학시켰다. 나치 정권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해주었던 쿠르트 한이 영국으로 이주해 세운 학교.[53] 찰스는 고든스타운 스쿨의 엄한 학풍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두 아들은 이튼 스쿨을 보냈다.[54] 하다 못해 근대화가 느린 축이었던 조선에도 궁궐에 전화가 설치된 때가 1896년이다.[55] 당시 왕실 중신들은 왕실 행사를 그런 식으로 일일이 세상에 알리면 신비감이 떨어져 왕실 권위에 금이 간다는 주장을 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도 엄숙해야 할 대관식이 극장 공연 같이 된다고 반대했다.[56] 즉위 시점 필립은 한창인 30세, 엘리자베스는 25세였다. 젊은 부부가 너무 큰 변화에 적응하고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에는 녹록치 않은 시기일 수 밖에 없다.[57] 당시엔 아직 공주였던 여왕이 공항에 도착하자 맞이하기 위해 나온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복장이나 훈장 등을 가지고 조롱을 하고, 이에 엘리자베스 2세가 당황하며 제지하는 모습이 나오며, 시즌4에서는 가이아나 대통령이 선물로 준 항아리에 이상한 새와 구불구불한 선들이 그려져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58] 다만 여태 있던 의혹들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설정해 극이 진행되다 보니 필립 공 본인은 이 드라마를 정말 싫어했고, 다이애나 스펜서가 등장하기 전까진 여왕 본인은 물론 왕족들도 더 크라운을 즐겨보던 것과 달리 대놓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 더 크라운의 제작자들을 고소하길 원했으며, 특히 누나 체칠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것에 대해 분개했다고 한다.#[59] 영국 왕실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및 윈저 왕조.[60] 그리스 및 덴마크 왕실인 글뤽스부르크 왕조.[61] 정말로 사촌 마리나의 집에서 엘리자베스와 필리포스는 만났다고 한다.[62] 시즌 2 에피소드 9로 본래 편명은 "Paterfamilias", 국내 방송시 편명은 "왕자의 아버지"[63] 필립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생각해 보리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64]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 뉴헤브리디스 제도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식민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관공서에는 프랑스 대통령의 초상화 역시 같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통령은 임기직이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 사진으로 바뀌었을 테지만 영국 여왕 부군은 이혼하거나 군주제가 철폐되지 않는 한 종신직이니 사진이 계속 걸려 있어서 필립 공을 섬기게 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