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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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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EBD7><colcolor=#222> 헤센 카셀의 크리스토프 공자비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비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Πριγκίπισσα Σοφί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파일:tumblr_pcx3w5WR4B1qiu1coo1_1280.jpg
이름 그리스어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Σοφί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독일어 그리스와 덴마크의 조피
(Sophie von Griechenland und Dänemark)
출생 1914년 6월 26일
그리스 왕국 코르푸 섬 몬 레포스 궁전
사망 2001년 11월 24일 (향년 87세)
독일 바이에른
배우자 헤센의 크리스토프 공자[1] (1931년 결혼 / 1943년 사망)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2] (1946년 결혼)
자녀 크리스티나, 도로테아, 카를, 라이너, 클라리사[3], 벨프, 게오르크, 프레드리케
아버지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형제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케킬리아, 필립
종교 그리스 정교회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첫 번째 결혼3.3. 전후3.4. 두 번째 결혼3.5. 영국 왕실과의 관계
3.5.1. 필립의 결혼3.5.2. 관계 회복
3.6.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

[clearfix]

1. 개요

그리스덴마크안드레아스 왕자바텐베르크의 앨리스의 4녀로 필립 마운트배튼의 누나이자 찰스 3세의 막내고모다. 남편을 따라 한동안 나치 정권과 연결되어 있었다.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1914년 6월 26일, 그리스 왕국코르푸 섬의 몬 레포스 궁전에서 안드레아스 왕자와 바텐베르크 공녀 앨리스 왕자비 사이의 4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3명의 언니들인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케킬리아가 있었다. 소피아와 자매들은 어머니 앨리스영어로 소통했지만, 친척과 가정교사 앞에서는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스어도 사용했다.

소피아의 예정일은 6월 초였다. 6월 초가 다가오자, 앨리스 왕자비의 어머니 빅토리아[4]는 영국에서 몬 레포스 궁전으로 왔다. 하지만 아이는 예정일이 돼서도 태어나지 않아 안드레아스 왕자는 계속 군대로 복귀할 날짜를 늦춰야 했다. 앨리스 왕자비는 처음으로 예정일을 착각해 많은 사람들이 소피아가 태어나길 한 달 동안 기다렸다.

소피아는 6월 26일에 태어났다. 가족들은 이번에도 아들이 아니라 연달아 딸이 태어나자 실망했다고 한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어! 이 여자아이는 6시에 태어났어. 물론 아기가 또 여자라는 것은 실망이야. 아기는 크고 건강해.[5]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의 편지
어머니, 앨리스 누나한테 축하한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근데 아직까지도 남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은 게 이상하네요.[6]
루이 마운트배튼이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에게 보낸 편지.

아이는 소피아의 이름을 받았지만, 소피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소피아의 애칭은 타이니(Tiny)였는데 가족의 막내[7]였기 때문이다.

소피아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나라가 불안정해졌다. 1917년 6월 큰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1세가 그리스 왕위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15일 후에 소피아의 가족은 스위스로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8] 1918년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척인 러시아 황족[9]들이 모두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의 정치 상황은 급변했고, 1920년 11월에 소피아와 가족들은 3년 간의 망명을 끝내고 그리스로 귀국했고, 코르푸의 몬 레포스 궁전에서 지냈다. 1921년 6월에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들 필리포스가 태어났다. 기쁨도 잠시 그리스 왕국군은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1922년 콘스탄티노스 1세는 다시 퇴위했다. 체포되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안드레아스 왕자는 황급히 그리스를 떠나 또 다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소피아의 가족들은 둘째 큰어머니인 마리 보나파르트[10]의 도움을 받아 1923년 프랑스의 생클루드에 정착했다. 망명 생활동안 부유한 친척들[11]에게 의지했다. 소피아는 이 시기에 대해서 '여러 국적의 고용인들이 있었으며, 우리는 돈을 지불하는데 항상 어려움을 겪었다[12][13]고 회고했다.

소피아의 가족은 생클루드에서 비교적 단순한 삶을 살았다. 소피아와 그녀의 형제들은 사립 기관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여가 시간 동안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정기적으로 그들을 파리나 보이스 드 불로뉴로 데려갔다. 안드레아스 왕자는 딸들과 테니스를 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매주 일요일, 가족은 마리 보나파르트 왕자비와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 왕자와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소피아와 그녀의 가족은 또한 정기적으로 셋째 큰아버지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 부부와 딸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부르봉파르마[14]의 르네 공자[15]와 결혼한 후 파리 지역에 정착한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공주[16]를 자주 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소피아와 그녀의 자매들은 친사촌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카롤 왕세자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였고, 외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과 에드위나 애슐리의 결혼식, 이모 루이즈 마운트배튼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결혼식에 화동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파일:외삼촌결혼.jpg
1922년 루이 마운트배튼의 결혼식. 가장 어린 금발 아이가 소피아다. 언니 마르가리타는 둘째 줄 가장 왼편, 테오도라는 둘째 줄 가장 오른편, 케킬리아는 첫째 줄 가장 오른편에 있다.

3.2. 첫 번째 결혼

1928년부터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조현병 증세를 보였고, 결국 안드레아스 왕자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는 그녀를 스위스의 요양원으로 보냈다. 앨리스는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스위스의 정신병원에 있었고, 퇴원한 후에도 1937년까지[17]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앨리스가 요양원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딸들은 부모의 부재와 정신병 환자인 어머니 때문에, 혼삿길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황급히 결혼하기 시작했는데[18] 자매들 중 소피아가 가장 먼저 결혼했다.

소피아는 13살 때인 1927년에 헤센-카셀의 공자 크리스토프의 형 필리프 공자를[19] 처음 만났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월프리드 스터드 농장의 폴로 들판에서 알게 되었고 소피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토프를 만났다. 크리스토프와 그의 쌍둥이 리처드 모두 소피아를 좋게 보고 자신들의 결혼 상대로 생각했지만 소피아는 빠르게 크리스토프에게 빠졌다. 결국 소피아와 크리스토프는 약혼했고 1930년 12월 15일에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20] 결혼 당시 소피아는 16살이고 크리스토프는 29살이었다.[21] 두 사람의 결혼은 사랑에 기반한 결합이었다.[22] 결혼식은 프랑크푸르트 북쪽에 있는 슐로스 프리드리히스호프[23]에서 열렸다.[24]
파일:헤센카셀결혼.jpg 파일:프리드리히성.jpg
1930년 크리스토프 공자와 소피아, 그리고 하객들[25] 프리드리히스호프 성

1930년 12월에 결혼한 소피아는 남편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소피아와 크리스토프는 언제나 서로에게 헌신했다.[26] 그들은 수 년 동안 엄청난 애정을 담은 편지를 자주 보냈다.
소피, 나는 너가 너무 보고 싶어. 널 못 보는 것은 끔찍해. 너가 없는 나는 너무 우울하고 비참해서 우리가 함께 사랑스럽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우리의 작은 Poonsies[27]과 있는 걸 즐겼던 이곳이라도 당장 떠나고 싶어! 오 자기야, 네가 여기 있었다면!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 문이 마법처럼 얼마나 자주 열렸는지 생각해. 그리고 나서 천사 같은 너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를 즐겁게 해주던 걸 생각하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내 천사, 그리고 넌 내 전부야. . . . 사랑하는 너의 Peech[28]가.[29]
크리스토프가 1939년 볼프스가르텐에 있던 소피아에게 그들의 베를린-달렘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쓴 편지.[30]

3.2.1. 나치즘과 헤르만 괴링

크리스토프의 헤센-카셀 가문을 포함한 헤센 가문은 모두 열렬히 나치당을 지지했다.[31] 보험 회사에서 브로커 일을 하던 남편 크리스토프가 나치당에 가입하게 된 주요 이유는 헤르만 괴링의 영향이 컸다. 1930년 10월 13일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괴링은 언제나 그들의 후원자였고 관계에서 우위를 유지했다. 마침내 1931년 10월 크리스토프는 조심스럽게 나치당에 입당했고, 당의 도움을 받으며 가입 사실을 공론화하지 않고 은밀하게 유지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년도 지속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의 나치당 입당 사실은 너무 비밀리에 은폐돼, 그의 당 등록 자료가 사라졌을 때 큰 혼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크리스토프는 1933년 봄에 다시 당에 입당하게 됐다. 아돌프 히틀러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맞서 대통령에 출마할 당시[32] 크리스토프는 1932년에 SS에 가입했으며, 1934년에는 Reichsführer-SS(SS 국가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직접 크리스토프를 자신의 개인 참모로 임명했다. 1939년에 그의 최종 계급이었던 Oberführer(상급지도자)로 진급했다.[33]

소피아는 헤르만 괴링과의 첫 만남을 회고록에 작성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소피아와 함께 시어머니 마르가레테와 남편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은 두 형들과 같은 사관학교에 다녔다는 사람이 베를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람에게 자신들의 집에서 차를 마시기를 청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헤르만 괴링이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죽은 두 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행복해했고 괴링으로부터 그가 남편의 두 형들과 사관학교에 같이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 괴링은 새로운 정당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는데, 아돌프 히틀러라는 새로운 정당의 대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당시 독일은 불황을 겪고 있어 매우 가난하고 상황이 안 좋았기에 소피아와 가족들은 정당이 독일을 발전시키기 위해 세운 계획들을 흥미있게 들었다.

괴링은 계속해서 소피아와 가족들에게 사적으로 히틀러를 만나보라고 요청했기에 가족들은 소피아의 집에 히틀러를 초대하기로 했다. 소피아는 히틀러가 채식주의자라고 충고 받았기 때문에 어떤 요리들을 준비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다고 한다. 요리사와 가정부들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18살이던 소피아는 전혀 집안일과 요리에 대해서 몰랐다고. 결국 많은 채소들을 늘어 놓았다고 하며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남편 크리스토프와 소피아는 몇년후에 정치적 입장을 완전히 바꾸었지만 당시에는 이 매력적, 겉보기에 겸손하며, 독일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히틀러에게 감동받았다고 말한다. 소피아는 앞에서 말한 것들이 왜 남편 크리스토프가 1932년에 SS에 가입하게 (크리스토프의 새 친구들이 그를 부추겼다고 한다.)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1937년에 남편들을 따라 나치당에 가입한 언니들 케킬리아와 마르가리타와 동서 바덴의 마리 알렉산드라[34]와는 다르게, 동서인 사보이아의 마팔다와 마찬가지로 소피아는 나치당 당원은 아니었고 1938년에 국가사회주의 여성동맹(National Socialist Women's League)에 가입했다.

초기에 크리스토프와 소피아는 나치당과 SS의 최고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었고, 이것은 소피아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소피아는 베를린 중부의 러스텐에서 열린 집회를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것을 보는 것은 멋졌다.(중략). 경찰은 스와스티카 밴드를 팔에 달고 행진할 때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35]를 불렀다! 오 이 영광스러운 느낌 (O glorious feeling. . . )” 이 당시 소피아의 편지는 밤새도록 남편의 "행진"이나 다른 형태의 의무에 대한 보고로 가득 차 있다. 1934년 1월 22일 소피아가 시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토요일에 저는 크리를 많이 보지 못했고, 괴링이 점검을 맡아 크리가 점심을 먹으러 돌아올 수 없었어요! 크리는 오후 8시 30분에 떠나 밤새도록 행진하고 새벽 2시에서야 돌아왔어요. 불쌍한 크리, 하지만 건강해요!!"

크리스토프와 소피아는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그 결과로 꽤 많은 이득을 얻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자 그들의 경제적 상황은 발전했고 크리스토프는 보험회사를 그만두었다. 베를린 중심부에 살던 가족은 1936년에는 더 크고 좋은 집이 있던 베를린 달렘으로 이사한다. 1939년에 프리드리히스호프 성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살았으며, 전후에 이 집은 베를린에 있던 영국의 고등판무관들이 거주했다.

괴링은 1933년 5월 크리스토프를 프로이센의 1등 서기관으로 임명했다.[36] 괴링은 자신만의 경찰과 정보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크리스토프는 이 비밀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2년동안 프로이센의 국무장관 파울 쾨르너(Paul Körner)[37]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1935년 Forschungsamt(FA)[38]의 국장을 맡으면서 더 중요한 일을 하게 되었다.[39]
파일:HitlerSophie.jpg
1935년 4월에 열린 헤르만 괴링의 결혼식.
먼쪽은 순서대로 히틀러, 에미 괴링, 헤르만 괴링.
가까운 쪽은 순서대로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소피아,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남편이 괴링과 가까워짐에 따라, 소피아 역시 괴링과 친분이 생겼다. 소피아는 1935년 4월에 있던 괴링의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히틀러와 신랑, 신부의 맞은편에 앉는 영광을 얻었다. 소피아는 괴링의 2번째 부인인 에미 괴링과 친구가 되었으며, 괴링 부부는 헤센 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올림픽, 오페라 등에 초대하는 등 헤센 가 사람들과의 시간을 즐겼다. 에미 괴링은 전후 회고록에서 '필리프와 크리스토프 공자, 그리고 소피아 공주는 헤르만(괴링)이 특히 소중히 여기는 세 사람이었다.'라고 언급했다. 괴링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대가로 크리스토프가 받은 표면상의 혜택은 주로 물질적인 형태가 아니라 공식 입장과 권력에 대한 접근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크리스토프가 괴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친분은 끝까지 지속되지 못했다.

소피아는 1930년대 중반에 여러 차례 영국의 메리 왕비를 포함한 가족들을 보러 영국에 혼자 갔다. 크리스토프 또한 1937년에 영국으로 여행 허가를 받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지 않았다.

1937년 큰 아들 카를의 탄생은 부부가 나치당에 대한 지지를 강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아이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카를 ‘아돌프’ 안드레아스의 이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3.2.2. 제2차 세계 대전

결국 2차 세계 대전에서 시가인 헤센-카셀 가문을 포함한 독일은 추축국으로 참전하고, 친정인 그리스 왕국과 가까운 친척인 영국은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소피아는 친척들과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남편 크리스토프가 1943년 이탈리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40] 이때 소피아는 29살이었고 다섯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41] 막내딸이 전란 와중에 임신한 채로 과부까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그리스에서 급히 소피아가 있는 독일로 찾아왔다.[42]

헤센 가 사람들은 점점 나치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알아갔다. 소피아는 1945년 5월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에게 ‘근 2년 동안 나치의 끔찍한 범죄에 대해 깨달았다.’라고 밝혔다. [43]

3.3. 전후

미군이 독일 본토에까지 들이닥치자 크론베르크(프리드리히스호프) 성에 살고있던 소피아는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44] 소피아는 2남 3녀의 친자녀들은 물론 4명의 시조카들까지[45] 포함한 9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친척인[46] 헤센 대공가가 머무는 다름슈타트로 피난을 떠났다. 헤센 대공가의 수장인 루트비히 공자와 그의 아내 마가렛은 친영국파였기 때문에, 전쟁 초기엔 독일을 떠나 있다가 미군이 들어서면서 다시 다름슈타트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루트비히는 이런 배경과 지위를 이용해 어려움에 처한 친척과 친구들을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소피아도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그들에게 의탁하려던 것이었다.[47]
파일:7996987F-78EC-48AC-B09A-29098E6F3D54.jpg
1946년 볼프스가르텐에서
성인은 헤센의 루트비히, 소피아, 마가렛 게데스
갈색머리 아이들은 소피아의 시조카들[48], 금발 아이들은 소피아의 아이들인 카를, 클리리사, 라이너다.

다행히도 루트비히[49]와 마가렛 부부[50]는 소피아 일행을 환대해주었고, 그들은 헤센 대공가의 저택 중 하나인 볼프스가르텐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때 루트비히와 마가렛은 헤센-카셀 가문의 아이들과 친해졌고 특히 소피아와 마가렛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루트비히 부부는 부모 모두와 떨어진 필리프의 자녀들도 성심성의껏 돌봐주었다.

하지만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의 패배로 종전한 뒤 필리프마저 전범으로 체포되어 2년간 수감되어야 했다. 1947년 석방 된 필리프는 헤센-다름슈타트가의 남계가 단절된 1968년 이후 헤센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 198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슬하 3남 1녀를 두었다. (이중 차남, 3남은 자녀 없이 사망) 2022년 현재 가문의 수장인 도나투스는 필리프의 장남 모리츠(1926~2013)의 장남으로 2남 1녀가 있다.

3.4. 두 번째 결혼

파일:소피하노버.jpg
1946년 볼프스가르텐에서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와 소피아
1943년 10월 소피아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자, 그리스의 프리데리케 왕세자비(당시 기준)의 동생인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51]와 가까워졌다. 헤센의 마르가르테의 격려를 받은 두 사람은 계속 로맨스를 이어나가다가 마침내 1946년 1월 결혼하게 되었다.

하노버 왕조는 촌수가 멀긴 하지만 영국 왕실과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52],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는 약혼을 진행하기 위해 조지 6세의 허가를 구했다. 그러나 영국과 독일이 여전히 전쟁 중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조지 6세의 대응을 금지했다.[53] 대신 조지 6세는 개인적으로 결혼을 승인해주었고 소피아와 게오르크 빌헬름을 축복했다.

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도 이 결혼에 대해서 기쁘다고 밝혔다. 메리 왕비는 소피아의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에게 “어린 과부 타이니는 5명의 아이들이 있으니 큰 집이 필요하겠어! 소피아랑 게오르크는 행복해보여.”라고 편지했다.

결혼식이 4월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피아는 프리드리히스호프 성에 남긴 보석을 사용할 수 있도록 미국 당국을 설득했다. 필요한 허가를 받은 소피아와 시어머니 마르가레테는[54] 성으로 갔고, 그곳에서 볼프강 공자가 1943년에 지하실에 숨긴 보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보석들이 도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곧 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헤센 보석 도난 사건 참조.
파일:소피웨딩.jpg
소피아와 게오르크의 결혼식.
왼쪽부터 필립, 마르가리타, 소피아 본인, 테오도라
덕분에 소피아와 게오르크의 결혼식은 형부 바덴의 베르톨트(둘째언니 테오도라의 남편, 또한 게오르크의 고종사촌이기도 하다)의 잘렘 성에서 예상보다 조촐하게[55] 치러졌다. 소피아는 1937년 이후로 보지 못했던 남동생 필립과 재회했는데, 이때 필립이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와 너무 비슷해졌다며 놀라워했다.

소피아는 게오르크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차례대로 장남 벨프 에른스트(1947-1981), 차남 게오르크(1949), 장녀 프리드리케(1954년생)였다. 참고로 장남 벨프는 사촌인 찰스 3세와 같이 고든스턴 스쿨에 다녔고, 인도에서 지내면서 오쇼 라즈니쉬에 심취해 있다가 1981년 초 뇌출혈로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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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 1955.8.16
클라리사, 소피아, 프리드리케, 게오르크, 게오르크 빌헬름, 웰프

게오르크가 1948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마쳤을 때, 그의 처남인 바덴의 베르톨트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운영을 멈췄던 자신의 잘렘 학교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게오르크와 소피아는 언니 테오도라가 제공한 잘렘의 큰 집에 정착했다. 소피아와 그녀의 가족은 게오르크가 학교 이사직을 포기한 1959년까지 잘렘에서 머물렀다.

소피아와 게오르크의 재정 상황은 오랫동안 불안정했다. 그래도 소피아가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은 1950년부터는 상황이 점차 나아졌고, 1951년에는 헤센 보석 도난 사건도 결론이 나면서 독일 정부에서 피해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56]1953년 나치 정권에서 소피아의 첫 남편 크리스토프가 맡은 역할에 대한 조사의 끝으로 소피아의 재정 상황이 정상화됐다.

1946년 친정인 그리스 왕국에서 군주제가 복고되었고, 소피아의 사촌오빠 파블로스1947년 4월 1일 즉위하였다. 이후 소피아는 1948년에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로부터 아테네에 초대되었다. 그후 소피아와 남편 게오르크는 그리스의 파블로스 일가와 가까워졌다. 시누이(남편 게오르크의 여동생)이자 사촌올케(사촌오빠 파블로스의 부인)인 하노버의 프리데리케는 소피아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중첩된 인척 관계 덕분에 소피아 부부는 정기적으로 그리스 궁정에서 환영받았다. 1962년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후안 카를로스의 결혼식에 초대되었고, 1964년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2세 왕과 덴마크아네마리 공주 [57]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3.5. 영국 왕실과의 관계

3.5.1. 필립의 결혼

1947년 7월 9일 동생 필립 마운트배튼[58] 조지 6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가 약혼했다. 이후 같은 해 11월 20일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영국 왕실과 정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독일과 가까웠던 필립 일가가 대중에게 윈저 가문의 게르만 기원을 상기시킬까봐 꺼렸다. 특히 소피아의 첫번째 남편 크리스토프를 비롯한 필립의 매형들은 모두 독일의 왕공족이었고, 나치당에 입당했거나 독일군으로 복무했기에 당시 건재했던 반독 감정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결국 필립은 독일에 시집간 세 명의 누나들을 결혼식에 초대할 수 없었다. 소피아와 자매들은 상처받았지만 필립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생각해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매들은 루마니아이탈리아가 히틀러의 주요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촌들인 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엘레니의 여동생인 이탈리아의 아오스타 공작부인 이리니(1904~1974)[59]는 결혼식에 초대받자 두 배로 상처받았다.

소피아와 그녀의 자매들은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의 괴롭힘이 계속되자[60] 결국 1947년 11월 20일 소피아의 시부모님의 초대를 받아, 마리엔부르크 성에서 사촌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리사벳 공주[61], 헤센의 루트비히와 마가렛과 함께 필립의 결혼을 축하했다. 며칠 후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촌올케 프레데리키 왕비[62] 사촌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에게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가 결혼식을 자세히 묘사한 장문의 편지[63]를 전달받았다.

3.5.2. 관계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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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찰스 3세와 소피아
남동생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소피아와 자매들이었지만, 1953년에 있었던 올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는 초대받고 갈 수 있게 되었다.

1964년에는 갓 태어난 막내 조카 에드워드 왕자[64]의 세례성사에 대모로서 참석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로열 애스콧, 조카 찰스 3세(당시엔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식 등, 여러 행사에 참석하며 영국을 자주 방문했다.

3.6.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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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야드 바셈에 화환을 놓은 소피아와 필립공
1988년, 소피아는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유언에 따라 앨리스 왕자비의 유해를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 교회로 옮겼다. 몇 년 후 1993년, 야드 바셈 기념관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대인 가족을 구한 앨리스를 "열방의 의인"으로 기렸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녀인 소피아와 필립은 1994년 어머니를 기리는 의식을 위해 이스라엘에 초대되었다.

소피아는 인생의 마지막을 실러제(Schliersee)의 요양원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2001년 11월 24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볼프스가르텐 성에서 열렸다. 그녀의 유해는 실러제에 있는 장크트 마르틴 교회 묘지에 묻혔고, 5년 후에 두 번째 남편과 함께 안장됐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그리스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Princess Sophie of Greece and Denmark)
<colbgcolor=#fff3e4,#331c00>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colbgcolor=#ffffe4,#323300> 요르요스 1세
(George I)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Louise of Hesse-Kassel)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65]
(Grand Duke Konstantin Nikolayevich
of Russia)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Princess Alice of Battenberg)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Prince Louis of Battenberg)
헤센 대공국의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von Hauke)
헤센 대공국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영국의 앨리스 공주[66]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헤센의 크리스토프 공자
(Prince Christoph of Hesse)
1녀 헤센카셀의 크리스티나 공녀
(Princess Christina of Hesse-Kassel)
1933년 1월 10일 2011년 11월 22일 유고슬라비아의 안드레이 왕자[67]
슬하 1남 1녀
로버트 반 에이크
슬하 1남 1녀
2녀 빈디슈그라츠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자비 도로테아
(Dorothea, Princess Friedrich Karl of Windisch-Grätz)
1934년 7월 24일 - 빈디슈그라츠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자
슬하 2녀
1남 헤센카셀의 카를 공자
(Prince Karl of Hesse-Kassel)
1937년 3월 26일 2022년 3월 23일 이본 폰 무라좀바트 여백작
슬하 1남 1녀
2남 헤센카셀의 라이너 공자
(Prince Rainer of Hesse-Kassel)
1939년 11월 18일 - -
3녀 헤센카셀의 클라리사 공녀
(Princess Clarissa of Hesse-Kassel)
1944년 2월 6일 - 장-클로드 데리앙[68]
1녀[69]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Prince George William of Hanover)
3남 하노버의 벨프 에른스트 공자
(Prince Welf Ernest of Hanover)
1947년 1월 25일 1981년 1월 10일 위브케 판 군스터렌
슬하 1녀
4남 하노버의 게오르크 공자
(Prince Georg of Hanover)
1949년 12월 9일 - 빅토리아 앤 비
슬하 2녀
4녀 하노버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ederike of Hanover)
1954년 10월 15일 - 제리 윌리엄 시르
슬하 1남 1녀

5. 여담


[1] 1902~1943, 헤센 대공국(헤센-다름슈타트)과는 부계로 16세기 헤센 방백 필리프 1세부터 갈라진 헤센-카셀 가문 출신이다.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카를마르가레테 공주의 5남으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1943년에 전사.[2] 1915~2006, 하노버 왕조 출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의 차남으로, 소피아의 사촌오빠 파블로스의 왕비 프리데리케의 작은 오빠다. 소피아의 전남편 크리스토프의 오촌 조카이기도 하다.[3]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크리스토프 공자가 사망한 유복자다.[4] 빅토리아는 "앨리스는 아기가 계속 태어나지 않아서 힘들어하고 있어. 그들은 이제 예정일은 6월 29일 쯤이라고 생각해."[70]라는 편지를 시녀 노나 커에게 보냈다.[5] Well, the baby is there at last,''She (alas!) made her appearance at 6 a.m. Of course it is a disappointment her being another girl; she is a fine, healthy, large child.'[6] Please congratulate Alice from me, but it was silly not to have a boy for once in a way.[7] 가족의 'tiny baby(작은 아기). 마지막 아이인 필리포스는 7년 후에나 태어났기 때문에 그 이전까진 소피아가 막내였다.[8] 스위스의 도시 루체른에 있는 그랜드 호텔에서 지냈다.[9] 니콜라이 2세 일가.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 안드레아스의 고종사촌이었고, 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어머니 앨리스의 이모였다.[10]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인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이자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11] 작은 어머니들인 마리 보나파르트와 낸시 리즈(요르요스 1세의 막내 아들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첫 부인. 암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작은외숙모 에드위나 애슐리[12] There were staff of different nationalities. One of the maids came in and said that a footman had attacked her with a knife. There were always problems paying the bills[13] 하지만 소피아의 친사촌 페트로스(요르요스 왕자와 마리 보나파르트의 아들, 1908~1980. 훗날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함)는 '우리 엄마는 소피아 일가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했고 오랫동안 그들의 생활비를 감당했다. 그들의 삶은 절대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삶이 아니었다.'라고 회고했다.[14]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이탈리아계 방계로 이탈리아 통일 이전 파르마 공국의 통치 가문이었다.[15] 1894~1962. 마지막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의 7남으로 부르봉파르마의 치타,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자의 남동생.[16] 1895~1992 : 그리스와 덴마크의 발데마르의 4남 1녀 중 막내이자 외동딸.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셋째)인 안(1923~2016)이 루마니아 왕국 미하이 1세의 부인이 되었다.[17]케킬리아가 비행기 사고로 죽자 다시 가족에게 돌아온다.[18] 앨리스의 네 딸들 모두 1930년에 결혼했다.[19] 둘 다 빌헬름 2세의 외조카들(막내여동생 마르가레테 공주의 아들)이다.[20] 두 사람은 빅토리아 여왕 기준으로 7촌이었다.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와 소피아의 외할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가 이종사촌이기 때문. 또한 크리스토프는 소피아의 첫째 큰어머니 조피의 조카이기도 하다.[21] 이로부터 몇 달 뒤인 1931년 2월 2일에 소피아의 언니 케킬리아가 헤센의 대공세자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결혼했다.[22] 물론 어머니의 건강 때문에 빨리 결혼해야 하는 사정도 있었겠지만, 소피아가 당시 기준으로도 어린 16살에 결혼한 이유에는 사랑이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23] 프리드리히스호프 성. Schloss Friedrichshof. 빅토리아 황후가 먼저 사망한 남편 프리드리히 3세를 위해 지은 성. 크론베르크 성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후 빅토리아 황후는 자신의 막내딸이자 소피아의 시어머니인 마르가레테 공주에게 이 성을 물려줬고, 이에 마르가레테의 큰오빠 빌헬름 2세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한다. 현재는 슐로스호텔 크론베르크라는 5성급 호텔이다.[24] 결혼식에는 많은 가족들이 참석했다. 신랑 측에서는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사보이아의 마팔다 공주(이탈리아 왕국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둘째딸이며 헤센-카셀의 필리프와 결혼), 바덴의 베르톨트 등이 참석했다. 신부 측에서는 헤센 대공가 가족, 이모 루이즈 마운트배튼, 외할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 등 어머니 앨리스를 제외한 가족 전체가 참석했다.[25] 필립은 신부와 신랑 앞에 앉아 있다.[26] 부부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증거나 그에 대한 소문의 힌트도 없다.[27] 아이들의 애칭[28] 크리스토프 본인을 의미하는 애칭[29] How I miss you here and long for you. It is simply terrible. I am so depressed and so miserable that I shall be pleased to get away from this house in which we have spent those lovely happy years together and enjoyed having our little Poonsies (their pet name for the children). Oh darling if only you were here! When I enter the house I think how often the door used to open like with magic and then you angel were there waiting for me smiling or laughing and giving me a thrill of happiness I feel a lump in my throat to think of it. I love you, love you, love you, my angel, and you mean everything to me. . . . Lovingly as your old adoring Peech.[30] 크리스토프는 영어로 부인과 어머니에게 편지를 자주 썼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때문에 당 분위기가 나빠지자 영어로 쓰는 것을 멈추고 독일어로 편지를 썼다.[31] 헤센-다름슈타트, 헤센-필립스탈-바흐펠트 등.[32] 결국 선거에서 패배했다. 크리스토프는 어머니에게 선거가 너무 기대된다고 편지했다.[33] 1934년부터 FA의 수장이 되면서 사실상 SS 활동은 하지 않았다. 힘러는 종종 명예 SS 회원 자격을 받아들였다. 활동은 하지 않았어도, 꾸준히 SS 회비를 지불했으며 해외 여행을 위해 SS 상사들의 허가를 구했다.[34] 독일 제국의 마지막 수상인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딸. 그녀의 오빠 베르톨트는 소피아의 언니 테오도라와 결혼했다.[35] 1930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당(NSDAP)의 당가.[36] SS 장교이기도 했기 때문에 괴링 밑에서 일하기 위해 하인리히 힘러의 허락을 맡았다.[37] 위계질서가 엄격했는데, 크리스토프는 쾨르너를 위해 일했고, 쾨르너는 괴링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와 쾨르너는 모두 괴링 행정부의 헌신적인 구성원이었다. 쾨르너는 뉘른베르크 검사 로버트 캠프너에게 "나는 괴링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퍼와 쾨르너는 가까운 사이였다. 쾨르너는 크리스토퍼를 지지했고, 그의 형 필리프와도 친했다.[38] 제국항공부 연구실. 괴링 연구국이라고도 불렸다. 1933년에 창설되어 1945년까지 나치당의 독자적 신호 정보 및 암호 해독 기관이었다. 사실상 항공부와는 상관없지만,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 이름만 항공부를 포함한 것. 고위 정부 관리, 나치당원, 주 정부 관리들의 전화 통화를 가로채는 등 국내/해외(외교관, 언론인, 사업가의 것.) 전화와 전보를 도청했다. FA 직원들은 매일 평균 34,000개의 국내 전보와 해외에서 9,000개의 전보를 가로챘다. 그러나 그들은 우편물을 가로채지 않았다.[39] 괴링이 왜 대학도 끝까지 다니지 않아 학위도 없는 공자에게 이런 중요 직책을 준 이유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아마 크리스토프가 FA의 운영방식을 알아 훈련받지 않아도 되었고, 크리스토프의 충성심을 믿었으며, 크리스토프에게 큰 야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40] 형 필리프 부부가 행방불명 되어(행방은 아래 문단 참고) 그들의 위치를 알아보려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돌아가려는 길에 생긴 사고였다. 크리스토프와 그의 조종사 빌헬름 그슈는 비행기 운전 당시 날씨도 좋았고 워낙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소피아의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은 '크리스토프의 충성심을 불신한 히틀러가 항공기에 심어진 폭탄으로 크리스토프를 죽였다'라고 주장했다. 크리스토프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 가설이 가족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정한 신뢰를 유지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크리스토프의 빌헬름 그슈의 시신은 사고 2일 후에 발견됐다. 원래대로라면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조카가 죽은 사실이 엄청난 이슈가 되었을테지만, 당국은 크리스토프의 사망 소식을 공표하지 않았고 당시의 반왕족 캠페인 때문인지 언론도 잠잠했다. 대신 소피아가 직접 크리스토프의 사망 사실을 신문에 실었다.[41] 이때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는 3녀인 헤센-카셀의 공녀 클라리사. 하인리히 힘러에게 크리스토프의 가족을 신중하게 감시하라고 의뢰받은 지그프리트 타베르가 소피아와 크리스토프의 어머니 마르가르테 공주를 방문했다. 그는 소피아가 마르가르테 공주와 필리프와 마팔다의 아이들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과 함께 머물고 있다고 언급했다. 지그프리트는 6년 동안 29세의 소피아를 보지 못하다가 다시 재회했을 때 "소피아의 끔찍한 모습에 놀랐다. 그녀는 많이 말라졌고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다섯 번째 아이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10살, 8살, 6살, 4살이었다)"라고 힘러에게 보고했다. 가족들은 힘러의 요원들을 의심스럽게 보았다.[42] 앨리스는 소피아가 남편을 잃었음에도 명랑하게 구는 듯 보이지만 밤에는 울며 슬퍼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43] Since 2 years my eyes have been opened & you can imagine what feelings one has now about those criminals.[44] 이때 소피아는 가문의 보석이 도난당할 것을 염려해 지하실 바닥에 묻어 숨겨놨는데, 이를 기어코 찾아낸 미군 병사가 미국으로 빼돌렸고 훗날 이 보석의 소유권에 대한 소송이 일어났다. 헤센 보석 도난 사건 참조.[45] 남편 크리스토프의 형 헤센-카셀의 필리프와 사보이아의 마팔다가 낳은 3남 1녀. 필리프는 나치에 의해 체포되었고(전후 석방되었으나 전범 혐의로 2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이탈리아 왕국사보이아 왕가 출신인 마팔다마저, 이탈리아가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전향한 보복으로 체포되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결국 마팔다는 수감 중이던 1944년 8월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참고로 이때 사보이아 왕가의 방계 일족과 결혼했던 소피아의 친사촌 이리니도 독일군에 의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들, 동서와 두 시조카들과 함께 오스트리아에 억류되는 고초를 겪었다.[46]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외가이자 언니 케킬리아의 시가이기도 했다. 다만 케킬리아와 그녀의 남편 게오르크 도나투스는 이미 1937년 비행기 사고로 가족들과 함께 사망한지 오래였고, 당시 헤센 대공가의 수장은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동생인 루트비히 공자였다.[47] 소피아는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되어 위험해 질까봐, 어린 아이들을 짚단에 숨긴 채로 다름슈타트까지 갔다고 한다.[48] 헤센-카셀의 필리프와 사보이아의 마팔다의 아이들[49] 각주에 설명한 가족 관계 덕분에 소피아에겐 오촌이자 사돈댁 도련님이 된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영국-독일 관계를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또한 나치였는데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아래에서 일했으며, 1936년부터 38년까지 런던의 독일 대사관에서 일하면서 활동했다. 1936년 리벤트로프가 루트비히를 명예 문화주재관으로 임명하자 더욱 활발히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루트비히의 탈 나치화가 진행될 때 고모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조지 6세의 지지를 받으며, '루트비히가 한 것은 오직 영국과 독일과의 평화를 바라서 한 일일 뿐이다'라고 증언했다.[50] 루트비히와 마르가레타는 그 이전에 소피아의 언니 케킬리아와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딸로,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가족을 잃은 조카 헤센의 요한나 공녀를 입양해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나는 수막염에 걸려 3살도 안 된 나이에 요절했다.[51] 빌헬름 2세의 외손자(고명딸 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의 차남)로 전 남편 크리스토프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친할머니인 덴마크의 티라가 소피아의 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의 여동생이니 소피아와는 6촌간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기준으로도 친척으로,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고손이므로 8촌이 된다. 또한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의 공작 요제프 기준으로도 8촌으로, 게오르크의 할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소피아의 할머니 올가 왕비의 이종사촌이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왕자 칭호도 있었으나 적국(독일) 편에서 싸운 영국 귀족들의 작위 박탈을 규정한 1917년 영국의 작위박탈법(1919년 3월 28일 발효)으로 박탈되었다.[52] 하노버 왕조는 조지 3세의 5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후손들이고, 당시 영국의 윈저 왕조는 조지 3세의 4남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외동딸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이었다.[53] 1772년 제정된 영국의 왕실 결혼법(Royal Marriages Act 1772, 2015년 폐지) ( #)에 따라 조지 6세에게 허가를 신청했지만, 공식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혼 허가가 보류된 유일한 결혼이 되었다.[54] 첫 번째 남편 크리스토프의 어머니[55] 게오르크는 초혼이었지만 소피아는 재혼이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치러졌다고 한다.[56] 보석을 절반 정도는 회복했으나 도난 과정에서 보석들이 많이 손상돼, 원래 가치의 30%도 회복하지 못했다 한다.[57] 프레데리크 9세잉리드 왕비의 막내(3녀)로 마르그레테 2세의 여동생이다.[58] 본명은 그리스 왕국의 왕족으로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필리포스'였으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이름을 영어식인 필립으로 바꾸고 성 역시 외가인 바텐베르크 가문을 영어로 번역한 마운트배튼으로 바꿔 최종적으로 '필립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했다.[59] 아마데오 1세의 손자며느리이자 토미슬라브 2세의 부인.[60] 소피아는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에게 언론의 인터뷰 요청 때문에 괴롭다고 편지로 설명했다. 편지 원문은: “It is not very easy, I assure you, to make the press (who interview us continually) understand & they keep insisting that we must be estranged, which only makes a difficult & humiliating position even more unpleasant.”[61] 1904~1955, 니콜라오스 왕자의 차녀로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작은 언니.[62] 당시 그리스의 국왕이자 소피아의 사촌오빠인 파블로스의 왕비.[63] 스무 장이 넘을 정도로 자세히 적었다.[64] 남동생 필립의 막내아들.[65] 니콜라이 1세의 차남이다.[66]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다.[67]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2대 국왕 알렉산다르 1세의 3남. 참고로 안드레이의 작은형 토미슬라브 왕자는 크리스티나의 이종사촌 바덴의 마르가리타(이모 바덴 변경백비 테오도라의 딸)와 결혼했다.[68] 1976년 이혼[69] 헤센카셀의 요한나 공녀. 아이의 아버지는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