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0F4C3><colcolor=#222> 헤센 대공국의 대공세자비 그리스와 덴마크의 케킬리아 공주 Πριγκίπισσα Καικιλί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 |
이름 | 그리스와 덴마크의 케킬리아 (Καικιλία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
출생 | 1911년 6월 22일 |
그리스 왕국 타토이 타토이 궁전 | |
사망 | 1937년 11월 16일 (향년 26세) |
벨기에 오스텐데 | |
배우자 | 헤센 대공국의 대공세자 게오르크 도나투스 (1931년 결혼) |
자녀 | 루트비히, 알렉산더, 요하나, 3남[1] |
아버지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
어머니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
형제 |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소피아, 필립 |
종교 | 그리스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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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의 공주.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와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의 3녀로 필립 마운트배튼의 누나이다. 헤센 대공국의 대공세자 게오르크와 결혼하였지만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남편, 아이들과 함께 2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2. 작위
- 그리스와 덴마크의 케킬리아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Cecilie of Greece and Denmark (1911년 6월 22일 ~ 1931년 2월 2일)
- 헤센의 대공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Hereditary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1931년 2월 2일 ~ 1937년 11월 16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1914년 필립 드 라즐로 작[2] |
1911년 6월 22일, 그리스 타토이 궁전에서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왕자비 사이의 3녀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인 마르가리타와 테오도라가 있었는데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케킬리아를 유독 사랑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국과 독일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한 덕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스어 등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후 여동생 소피아와 남동생 필리포스가 태어났다.
케킬리아 | 테오도라, 케킬리아, 마르가리타, 소피아 |
하지만 그녀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그리스가 발칸 전쟁에 참전하자 달라지게 된다. 발칸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콘스탄티노스 왕세자 밑에서 육군으로 복무하였고,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다친 군인들을 돕기 위해 간호사로 일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아테네 궁전의 지하에 숨어 지내며 폭격을 견뎌냈다.
1917년 6월 큰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1세가 그리스 왕위에서 물러나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15일 후에 케킬리아의 가족은 스위스로 망명 길에 올라야만 했다. 1918년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척인 러시아 황족들이 혁명으로 모두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3]
1920년 10월 2일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다시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위하면서 케킬리아의 가족은 잠시나마 다시 그리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은 코르푸 섬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이 때 케킬리아의 막내 동생인 필리포스가 태어났다. 이 시기에 케킬리아와 그녀의 자매들은 친사촌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와 카롤 2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였고, 외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과 에드위나 애슐리의 결혼식[4], 이모 루이즈 마운트배튼과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결혼식에 화동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1922년 콘스탄티노스 1세는 다시 퇴위하게 된다. 체포되었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안드레아스 왕자는 황급히 그리스를 떠나 또 다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케킬리아의 가족들은 둘째 큰어머니인 마리 보나파르트[5]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 근교 생클루드에 정착해 그녀가 소유한 별장에서 생활했다.
1928년 17살 때 케킬리아는 어머니 앨리스를 따라 런던에서 지냈다. 이 시기에 케킬리아는 영국 사교계에 데뷔해 본격적으로 혼처를 찾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와 함께 스코틀랜드에 있는 밸모럴 성에서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앨리스는 케킬리아가 조지 5세 부부가 너무 잘해줘 응석받이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난한 망명 왕족인 케킬리아는 좋은 혼처를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먼저 사교계에 데뷔한 언니들인 마르가리타와 테오도라와 마찬가지로 런던 데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3.2. 결혼, 그리고 어머니의 정신병
가난하고 힘든 망명생활이었지만 안드레아스와 앨리스는 네 딸 중 가장 예뻤던 케킬리아를 좋은 곳에 시집보내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6]케킬리아는 스위스에 망명을 할 때 5촌 외당숙들인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루트비히와 어울려 놀곤 했다.[7] 이 중 케킬리아는 1929년에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장남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8]두 사람은 1930년 비공식적으로 약혼했는데 당시 케킬리아는 18살, 게오르크 도나투스는 23살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어머니 앨리스가 조현병에 걸렸고, 결국 안드레아스 왕자는 그녀를 스위스의 요양원으로 보냈다.
케킬리아와 게오르크 도나투스는 1931년 2월 2일 다름슈타트의 신궁전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열광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여러 유럽 왕족이 참석하였지만 케킬리아의 어머니 앨리스는 조현병으로 요양원에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다.
케킬리아의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는 다음과 같이 결혼식을 설명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름슈타트의 거리에 줄지어 있었고, 안드레아와 세실을 구궁전으로 데려가는 차는 군중에게 너무 둘러싸여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어... 결국 사람들에게 계속 손을 흔들며 구궁전의 안뜰로 걸어 들어갔고, 사람들은 안드레아에게 'Hoch der Herr Papa’라고 외쳤어. "공화국"에서는 웃긴 일이지만 에르니 삼촌과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어.[9]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첫째 아들 조지 마운트배튼에게 보낸 편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첫째 아들 조지 마운트배튼에게 보낸 편지.
케킬리아와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결혼식 |
3.3. 결혼 생활
헤센 대공국으로 시집간 케킬리아는 독일식 이름인 체칠리아로 불리게 되었다. 체칠리아는 결혼 생활을 하며 1931년에 루트비히 공자, 1933년에 알렉산더 공자, 1936년에 요하나 공녀를 낳는다. 친정과 매우 가까운 사이었던 체칠리아는 정신병원에 있던 어머니와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고 한번 요양원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나, 앨리스는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두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체칠리아가 첫 아이 루트비히의 사진을 보냈을 때 그것을 찢어버렸다고 한다.[10]정신병원에서 나온 이후 앨리스는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지내려 했다. 그러나 체칠리아는 어머니와 관계 회복을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편지를 쓰고 사진을 보냈다. 1936년 12월이 되자 앨리스는 다시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했고, 1937년이 되어서야 체칠리아와 재회할 수 있었다.
1936년 말에 앨리스와 체칠리아의 관계는 매우 발전했다. 체칠리아는 새로 태어난 딸 요하나 공녀의 사진을 어머니에게 보냈고, 앨리스도 외손녀의 사진을 보고 체칠리아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남편, 자녀들과 함께 |
1937년 체칠리아는 네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이 시기에 시아버지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폐암에 걸려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의 결혼식을 빨리 진행시키고 싶어했다. 루트비히와 마거릿 양의 결혼식은 1937년 10월 23일에 예정되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며칠 앞둔 10월 9일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사망했고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루트비히의 결혼식은 11월 20일로 연기되었다.
3.4. 사망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 참조.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체칠리아의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는 남편 게오르크 도나투스에게 요즘은 날씨가 좋지 않으니,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15] 하지만 게오르크 도나투스는 비행기를 탈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1937년 11월 16일, 루트비히 공자의 결혼식을 위해[16] 케킬리아는 가족들과 함께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 벨기에 오스텐더를 경유하여 런던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에는 임신 8개월 째인 체칠리아와 남편 게오르크, 시어머니 엘레오노르, 그리고 각각 6살, 4살인 두 아들들이 타고 있었다.[17]
순조롭게 출발했던 비행기는 북해에 접어들면서 짙은 안개가 끼었지만[18], 조종사는 오스텐드 공항을 경유하기 위해 착륙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착륙하던 도중 비행기는 공장의 굴뚝에 걸려 날개가 부셔졌고 지붕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사고로 인해 어려서 비행기를 타지 않은 셋째 요하나를 제외한 체칠리아와 그녀의 가족 모두가 즉사하였다.[19]
3.5. 사망 이후
이러한 헤센 대공가 일가의 참사에도 불구하고 루트비히 공자는 결혼식을 미루지 않고 그대로 진행하였다. 결혼식이 끝난 이후 루트비히 공자는 체칠리아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벨기에에 갔다. 그리고 다름슈타트로 돌아온 후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체칠리아의 하나 남은 딸 요하나를 입양하였다. 하지만 2년 뒤인 1939년 6월 14일 요하나마저 수막염으로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20]체칠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은 장례식을 치른 후 로젠호헤의 대공가 무덤에 묻혔다. 시아버지 에른스트 루트비히와 그가 사랑했던 첫째 딸 엘리자베트 공녀가 묻힌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헤센 대공가 가족 무덤으로 케킬리아도 묻혀있다. |
케킬리아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언니인 마르가리타는 이모 루이즈 마운트배튼에게 “케킬리아의 죽음이 우리 가족을 드디어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고 한탄했다.[21]
케킬리아의 죽음은 부모에게도 크나큰 슬픔이었는데, 특히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충격이 가장 컸다. 안드레아스는 사고 이전까지 아들 필립과 휴가를 같이 보내고 손녀 손자들을 찾아가는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갔지만, 가장 사랑하던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고통과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가족들과의 생활을 단절했다. 장모인 빅토리아와만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어느 정도 정신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간이 아픔을 치유해준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케킬리아의 죽음은) 매우 매우 힘든 타격이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견디기 힘들어집니다.[22]
안드레아스 왕자가 장모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에게 보낸 편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장모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에게 보낸 편지
반면 케킬리아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에게는 7년간의 방랑 생활을 마치고[23] 가족에게 다시 돌아가는 전환점이 됐다. 딸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앨리스는 장례식 후 정신 상태가 완전히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메리 왕대비[24]는 케킬리아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 받을 앨리스를 걱정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앨리스는 케킬리아의 죽음을 잘 이겨냈다고 한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그리스와 덴마크의 케킬리아 공주 (Princess Cecilie of Greece and Denmark) | <colbgcolor=#fff3e4,#331c00>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 <colbgcolor=#ffffe4,#323300> 요르요스 1세 (George I) | |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 |||
헤센카셀의 루이제 (Louise of Hesse-Kassel) | |||
러시아의 여대공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 | |||
러시아 제국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26] (Grand Duke Konstantin Nikolayevich of Russia) | |||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Princess Alice of Battenberg) | |||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 (Prince Louis of Battenberg) | |||
헤센 대공국의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 |||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 (Countess Julia Theresa von Hauke) | |||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 |||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 |||
영국의 앨리스 공주[27]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1남 | 루트비히 공자 (Prince Ludwig) | 1931년 10월 25일 | 1937년 11월 16일 |
2남 | 알렉산더 공자 (Prince Alexander) | 1933년 4월 14일 | 1937년 11월 16일 |
1녀 | 요하나 공녀 (Princess Johanna) | 1936년 9월 20일 | 1939년 6월 14일 |
3남 | 1937년 11월 16일 | 1937년 11월 16일 |
5. 기타
- 케킬리아의 대부모는 헤센의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29], 러시아의 베라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30],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31], 조지 5세이다.
- 이름은 그리스어로 케킬리아라고 발음하고, 영어와 독일어로는 세실리아(Cecilia) 혹은 체칠리아로 발음한다. 가족들 사이에선 세실(Cécile)이라고 불렸다.
- 이모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는 케킬리아의 배우자로 덴마크의 왕세자 프레데리크를[32] 추천했다.
- 생긴 걸 보면 알겠지만 미녀다.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는 케킬리아의 외모에 대해 극찬하는 편지를 많이 남겼다.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의 편지에서
- 외사촌인 파멜라 힉스[37]는 케킬리아가 무척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 파멜라의 언니 패트리샤 내치불[38]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포스터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 포스터의 비행기가 케킬리아가 타고 있던 비행기인지는 몰라서, 집에 가서 곧 케킬리아와 가족들을 만날거라고 생각했다 한다.
- 정치인이자 다이어리스트인 헨리 ‘칩스’ 새넌은 조지 6세의 대관식 때 케킬리아와의 만남을 일기에 적었다. 일기에는 케킬리아가 사촌인 마리나 공주와 비슷하게 생겼고, 매우 아름다우며 자매들 중 가장 왕족답다고 평했다. 또한 남편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굉장한 사랑에 빠져있다고 적었다.
- 일찍 사망해 자매들 중 유일하게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7년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인 조지 6세의 대관식에는 참석했다. 사망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참석한 공식행사였다. 대관식에서 영국 왕족들이 앉아있던 로얄 박스 바로 위인 2층에 자리를 배정 받았다. 조지 6세의 대관식 그림에서 케킬리아도 2층 좌석에 그려져 있다.
1937년 조지 6세의 대관식에서 왼쪽에 앉아있는 남편 게오르크 도나투스과 케킬리아 |
4초부터 대화하고 있는 첫째 줄 오른쪽에서 2번째 여자가 케킬리아다. 헤센가의 딸기 티아라를 착용하고 있다. |
[1] 비행기 잔해에서 발견되었다. 비행기가 추락하기 직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 1914년의 케킬리아. 케킬리아 외에도 수많은 왕족들의 초상화를 그려 준 것으로 유명한 화가 필립 드 라즐로의 작품. 다만 이 그림은 라즐로가 선물로 2~3시간 만에 그려준 것으로 공식적인 요청에 의한 초상화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3] 니콜라이 2세 일가. 니콜라이 2세는 케킬리아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사촌이고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이모부이자 6촌이다.[4] 케킬리아는 에드위나에 대해 “우리에게 지금까지 이렇게 예쁜 숙모는 없었어요.”[39]라고 말했다.[5]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 나폴레옹의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6] 이모인 스웨덴의 루이즈 왕비는 케킬리아의 남편으로, 당시 덴마크의 왕세자였던 프레데리크 9세를 추천했다.[7] 케킬리아의 가족들은 어머니의 외가인 헤센 대공국에 자주 방문했다. 덕분에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외삼촌 헤세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아들들인 게오르크 도나투스, 루트비히와 친해지고 니콜라이 2세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8] 케킬리아가 외종조부 에른스트 루트비히 대공을 만나러 갔을 때 도나투스에게 반했다. 이를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에게 알렸는지, 빅토리아는 동생 부부에게 케킬리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며 편지로 물었다. 외할머니 빅토리아와 어머니 앨리스는 일찍 결혼한 반면 에른스트 루트비히는 재혼 후에야 뒤늦게 게오르크 도나투스를 가졌기에 둘 사이의 촌수가 이만큼 꼬였다.[9] “Men and women lined the streets of Darmstadt, and the car taking Andrea and Cécile to the Alte Schlosskirche was so surrounded that it could not move. They made their way into the courtyard of the Alte Schloss on foot, with much hand- shaking, while Andrea was greeted with cries of ‘Hoch der Herr Papa. It seemed very funny in a “republic” but was a nice sign of the affection of the people for Uncle Ernie & his family.”[10] 체칠리아는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있을 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앨리스에게 남동생 필립의 이야기도 계속 전해줬다. 체칠리아가 필립의 생일에 대해 알려주자 앨리스 왕자비는 ‘다른 사람은 누구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는데, 매우 사려깊구나.’라는 편지를 보냈다.[11] Your little daughter is so sweet and chubby,’ she wrote to Cécile. ‘Philip I barely recognized, he is so changed. Give him my love please.’[12] 여동생 소피아의 남편. 체칠리아의 남편인 게오르크 도나투스와 시동생 루트비히, 바덴의 베르톨트와 친했다.[13] 헤센-카셀 가문은 일가 전체가 나치 당원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헤센-카셀의 필리프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다.[14] 가입 후 6개월 만에 사망했다.[15] This time I really think you had not better fly across, as it is such a stormy time of the year.[16] 전날 15일에 적힌 게오르크 도나투스의 친구 파비앙의 일기에 따르면, 체칠리아의 두 아들들은 비행기로 여행할 생각에 매우 들떠있었고 각자 새로운 빨간, 파란 여행가방에 대해서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17] 평소 비행기를 타기 싫어했던 체칠리아는 비행기를 탈 때 항상 검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18] 애초부터 그 시기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기 전날, 체칠리아는 자매에게 흐린 날씨가 도착시간을 지연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편지했다.[19] 당시 잔해에는 체칠리아가 비행기 안에서 낳은 것으로 보이는 아들도 함께 발견되었다.[20] 앨리스 왕자비는 외손녀 요하나가 죽어 눈을 감은 모습을 보며 케킬리아의 어릴 때와 너무 닮아, 내 아이를 두 번 잃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는 비통한 내용의 편지를 외아들 필립에게 보냈다.[21] Louise commented: ‘As poor Margarita said it is hard that Cécile had to die to bring them together.’[22] I’m keeping fit up to a point, but I cannot say that time has had any healing effect — it was a very, very hard blow and the weight of it becomes heavier as time passes[23] 3년간의 정신병원 생활을 마친 후 가족들과 단절된 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때 연락한 가족은 어머니 빅토리아밖에 없었다.[24] 루이즈 마운트배튼에 따르면 자신의 어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메리 왕대비는 젊을 적부터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메리 왕대비는 빅토리아의 사촌 조지 5세의 왕비이다.[25] I wonder how your poor Alice bears the loss of that lovely Cécile, or whether the shock has been too much for her.[26] 니콜라이 1세의 차남이다.[27]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다.[28] 안드레아스 왕자의 사촌 형이다. 조지 5세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비가 안드레아스 왕자의 아버지 요르요스 1세의 누나다.[29] 외할머니 빅토리아의 남동생이자 훗날 케킬리아의 시아버지이기도 하다.[30] 친할머니 올가 왕비의 여동생으로 니콜라이 1세의 손녀이다. 니콜라이 1세의 차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의 차녀.[31]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형으로 케킬리아의 큰아버지. 러시아의 옐레나 여대공과 결혼했고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아버지이다.[32] 케킬리아의 육촌(케킬리아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와 프레데리크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10세가 사촌)이기도 했다. 프레데리크는 훗날 루이즈의 의붓딸 스웨덴의 잉리드 공주와 결혼했다.[33]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지참금을 덜 줘도 될만큼 케킬리아가 아름답다는 뜻.[34] a pretty, healthy & most cheerful little soul, smiling & cooing when awake, in fact as Mr Patterson once said “‘good enough to be a poor man’s child”[35] 케킬리아의 여동생 소피아로 타이니(Tiny)라고 불렸다[36] Cécile will certainly be the prettiest of the lot, Tiny is great fun & the precious Philipp the image of Andrea.[37] 루이 마운트배튼의 차녀이다.[38] 루이 마운트배튼의 장녀. 제 2대 버마의 마운트배튼 여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