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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2331><colcolor=#fff> 호주 제13대 총독 윌리엄 슬림 William Slim, 1st viscount slim KG GCB GCMG GCVO GBE DSO MC PC | |||
본명 | 윌리엄 조세프 슬림[1] William Joseph Slim | ||
출생 | 1891년 8월 6일 | ||
잉글랜드 브리스톨 비숍스톤 | |||
사망 | 1970년 12월 14일 (향년 79세) | ||
잉글랜드 런던 | |||
묘소 | 세인트 조지 예배당 | ||
재임기간 | 제13대 총독 | ||
1953년 5월 8일 ~ 1960년 2월 2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32331><colcolor=#fff> 직업 | 군인, 정치인, 작가[2] | |
작위 | 초대 슬림 자작 | ||
복무 | 영국 육군 | ||
1914년 ~ 1952년 | |||
최종 계급 | 원수 (영국 육군) | ||
약력 | 제7구르카소총연대장 벨가움 고급장교사관학교장 제10인도보병여단장 제10인도보병사단장 버마군단장 제15군단장 제14군 사령관 동남아시아 연합지상군 사령관 왕립국방연구대학총장 총참모장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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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귀족, 군인. 양차대전에 모두 참전했으며, 작전 중 세차례 부상을 입었다. 동아프리카나 버마와 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전선만 돌아다녀서 큰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다.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891년에 영국 브리스톨 주의 비숍스톤에서 태어난 슬림은 그곳의 성 보나벤투라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슬림은 브리스톨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10대에는 버밍엄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어 그의 형만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1912년, 슬림은 대학에 연줄이 없었음에도 버밍엄 대학 장교훈련단에 들어갔고, 1914년 8월 22일, 왕립 워릭셔 연대의 임시 소위로 임관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갈리폴리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서인도연대(WIR)의 소위로 정식 임관했다.
그리고 1916년 10월에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왕립 워릭셔 연대에 복귀했고, 이듬해인 1917년 3월 4일, 중위로 승진한다. 그리고 그해 또 부상을 당한다. 1918년 2월 7일, 그는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임시 대위직을 얻고 무공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8년 11월 2일, 그는 인도로 떠나서 제6구르카소총연대의 임시 소령직을 부여받았고, 1919년 3월 22일, 대위로 공식 승진하고 인도군으로 영전하게 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1년, 슬림은 제6구르카소총연대의 부관이 되었다. 1926년 1월 1일, 슬림은 존 앤더슨 로버슨 신부의 딸인 아일린 로버슨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는다. 그리고 그 해 말, 그는 퀘타의 참모 대학에 들어갔고, 1929년 6월 5일에 2급 참모장교로 임명된다.
1930년 1월 1일, 그는 명예 소령으로 진급했고, 1933년 3월 19일에 정식으로 소령으로 승진한다. 그는 인도 델리의 육군 사령부에 임명됐다가 2급 참모장교로서 영국 케임버리 참모 대학에서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그 즈음에 앤서니 밀즈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1937년에는 제국국방대학에 참석했고, 이듬해 중령으로 승진하여 제7구르카소총연대 2대대의 지휘를 맡았다. 1939년에는 임시 준장직을 수여받기도 했다. 1939년 6월 8일, 그는 대령으로 승진하고 인도 벨가움 고급장교학교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2.2.1. 동아프리카 전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슬림은 제5인도보병사단 산하 제10인도보병여단의 지휘를 맡게 된다. 수단으로 파견된 그는 당시 이탈리아가 점령한 상태이던 에티오피아 해방을 위한 동아프리카 전역을 담당했다. 이때, 1941년 1월 21일, 슬림은 에리트레아 아고르닷(Agordat)으로 진격하는 도중 CR.42의 공습으로 또다시 부상을 입게 됐다.2.3. 중동
부상을 회복하는 중에, 슬림은 임시적으로 인도의 델리에 있는 최고사령부의 참모장교로 임명됐었다. 그곳에서, 그는 이라크와 문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작전을 수립하는데 관여했었다.1941년 5월 초, 그는 이라크 작전의 사령관인 에드워드 퀴난의 준장 참모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10인도보병사단을 지휘하던 프레이저 소장이 병에 걸리자, 1941년 5월 15일, 슬림은 그를 대신하여 소장 대행을 맡았다. 그는 제10인도보병사단을 지휘하며 영국-이라크 전쟁, 시리아-레바논 전역, 그리고 페르시아 침공에 참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2번이나 수훈보고서에 이름이 올랐다.
2.4. 태평양 전쟁
1942년 3월, 슬림은 버마군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 그해 5월 8일, 중장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당해 인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슬림은 제15군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 버마와 인도, 동치타공의 해안가를 담당했다.그러던 와중, 1942년 후반, 동군 사령관인 노엘 어윈(Noel Irwin)이 슬림의 동의 없이 제15군단을 독단으로 지휘하여 아라칸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문제는 그 공격이 참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결국 그 책임을 두고 어윈과 슬림이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어윈은 청문회에서 인도군의 장비와 훈련 수준을 비난하기도 했다.[3] 결국 어윈은 직위해제되고, 슬림이 제4군단(임팔), 15군단(아라칸), 그리고 33군단(예비)으로 구성된 14군의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14군 사령관이 된 그는 그의 군대의 전투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신속히 훈련을 시작했는데, 그는 자신의 군대가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었을 상황을 대비하여 방어진을 구축했다. 특히, 슬림은 험지 기동성에 주목했는데, 버마의 지형환경에 걸맞은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중장비들을 항공수송장비 등으로 대거 교체했다.[4] 슬림은 또 적극적 순찰과 야간 훈련을 늘려서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5]을 극복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다른 주요 전역에 밀려 사실상 비주류 취급을 받는 버마에 있었던 슬림에게 여러가지 억울한 일들이 벌어진다.
당시 슬림의 위치에서 버마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산맥이 천연 방백처럼 있어서 초기에 슬림은 상륙작전을 통해 버마로 진입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물자가 유럽에 집중된 탓에 슬림이 사용할 수 있는 수송선은 없었고, 결국 그는 산맥을 넘어 육로로 버마로 진입하는 루트를 생각해야만 했다. 게다가 오드 윈게이트 준장이 자신이 기껏 훈련시킨 구르카 부대를 친디트 예하로 뺏어가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것 때문에 슬림과 윈게이트가 충돌하기도 했다.[6]
윈게이트한테 자신의 병력을 뺏기기도 했지만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있었다. 버마의 산악 부족들을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버마의 산악부족들은 카친족 카렌족 등 다양한 부족들이었는데, 그들은 일본군을 해방자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영국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림은 SOE와 OSS가 버마의 산악부족들의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는 작전을 승인했다.
1944년 1월 실시된 2차 아라칸 공세에서 일본군의 강렬한 역공을 받아 인도 제7보병사단이 포위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인도 제7보병사단이 신속한 방어태세에 돌입하는데 성공했고, 적절한 항공지원도 이루어져서 비록 아라칸 공격은 실패했지만 일본군에 의해 병력이 섬멸당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1944년 3월 12일, 무타구치 렌야가 이끄는 일본군은 인도 침공을 목적으로 임팔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슬림은 기갑과 항공 우세를 바탕으로 일본군을 조기에 섬멸할 계획을 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예상보다 일찍 전선에 도착했고, 슬림은 공중보급을 받아가며 철저한 방어전을 개시했다. 슬림은 자신의 병사들에게 어차피 포위당해도 항공보급이 가능하니 절대로 후퇴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하기도 했다.[7] 격렬한 전투 속에서 앨란 브룩 원수는 "재앙이 우리 앞에 있다"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어두기도 했지만, 슬림은 자신의 군대가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실제로 디암푸르 보급로와 연결된 지역인 코히마를 지키고 있던 제5인도사단이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었고, 제14군도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지만, 두 번 모두 섬멸되거나 돌파당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상황이 예상했던대로[8] 흘러가지 않자, 일본군은 보급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1944년 7월, 수많은 전사자와 아사자를 남겨둔 채 일본군은 부랴부랴 퇴각했다.
1944년 8월 8일, 많은 공을 세운 슬림은 중장으로 진급했고, 1944년 12월 임팔 기념식에서, 그와 그의 세 군단장[9]은 인도 총독 아치볼드 웨이벌(Archibald Wavell)에게 각각 KCB와 KBE를 수여받았다.
1945년, 슬림은 수백 마일의 정글 보급로를 가지고 버마 공세를 개시했다. 진격 과정에서, 그는 빌리 윌리엄즈(Billy Williams)와 코끼리 군단을 데리고 다리를 건설하고 난민을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버마 공세작전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슬림은 1944년 일본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보급을 전략 수립의 핵심으로 두었다.
또, 그는 일본군 사령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버마 북방에 있는 중국군으로 하여금 교란작전을 펼치도록 명령하고 만달레이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에야와디강 동쪽에서 방어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들은 슬림은 1개 군단을 보내 만달레이 남쪽의 메이틸라를 거쳐 에야와디강을 도하케 하였고, 다른 군단들은 만달레이 북쪽에서 양동작전을 하도록 했다.
일본군은 폭이 넓은 에야와디강이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천연방어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강 주변은 오히려 공세에 유리한 평지 지형이었다. 거기에 슬림이 포병과 기갑부대을 적극 사용한 제병 협동 전술을 구사하여 일본군을 화력으로 압도했고, 결국 1945년 3월, 에야와디강을 성공적으로 건넌 영국군은 메이틸라 마을과 만달레이를 차례로 점령했다. 만달레이의 일본군은 최후의 항전을 다짐하고 영국군이 세워뒀던 요새와 파고다 미로로 들어갔고 영국군은 1945년 3월 20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을 완벽히 격파할 수 있었다.
슬림의 이러한 작전은 작전술의 절정이었고, 메이틸라를 확보하면서 버마의 일본군은 보급부족에 빠진 반면 영국군은 평지를 통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슬림의 이런 공세에 발맞추어, 영국군 첩보기관 136부대는 버마인들의 봉기를 지원했고, 일본군들은 전방의 영국군 뿐만 아니라 후방의 게릴라에게도 공격받게 되었다.
몬순이 시작되면 공중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슬림은 몬순이 시작되기 이전에 랑군을 점령하기 위해 남쪽으로의 공세를 서둘렀다. 랑군은 지상군과 공수부대, 상륙강습, 그리고 버마 봉기군인 반파시스트인민자유동맹(AFPFL)[10]의 연합 작전으로 함락되었다.
버마 전역이 끝나가자, 동남아시아 연합지상군 사령관 올리버 리스(Oliver Leese)는 슬림에게 12군으로 전출갈 것을 명령했다.[11] 하지만 슬림은 차라리 전역하겠다며 그 전출명령을 거절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14군은 혼란에 빠졌고, 앨런 브룩 원수는 이런 사실에 분노하기도 했다. 결국, 동남아시아 전역 연합군 최고사령관 루이 마운트배튼은 리스에게 이 상황을 수습할 것을 강요했고, 1945년 7월 1일, 슬림은 대장으로 진급해서 리스를 이어 동남아시아 연합지상군 사령관에 임명된다.[12]
2.5. 전후 생애
전쟁이 끝난 1945년 말, 슬림은 영국으로 귀국했다. 1946년 1월 1일, 그는 GBE를 수여받았고, 왕립국방연구대학 사령관직을 맡았다. 1948년 5월 11일 전역했다.그러나 1948년 11월,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참모총장직을 달라는 몽고메리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슬림을 원수로 진급시켜 다시 불러오게 된다. 그래서 슬림은 인도군 사령관 출신으로는 최초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1952년 11월 1일에 총참모장직을 내려놓은 슬림은, 1953년 5월 8일,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으로 임명된다. 갈리폴리와 중동에서 호주군과 함께 싸운 전쟁 영웅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호주인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1959년, 슬림은 퇴직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회고록을 썼다. 이후 1960년 7월 15일,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의 야라룸라와 브리스톨시와 주의 브숍스톤의 슬림 자작으로 임명되었다. 영국에서의 여러 직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1964년 6월 18일, 그는 원저 성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1970년 12월 14일, 슬림은 79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윈저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군장(軍葬)으로 이루어졌다.
3. 평가
상당히 가식 없고 겸손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런 매너 때문에 종종 고위 장교로 승진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미국의 역사가 알란 밀레트(Alan Millet)와 윌리엄슨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슬림의 군대 지휘 및 훈련 기술을 개인적, 도덕적 용기 및 매력과 경합시켜 훌륭한 지휘를 이루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3]
임팔 전투에서 후퇴는 없다는 명령을 한 것이 악깡버처럼 들릴 수도 있어서 굉장히 혹독한 지휘관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책임감을 가지고 휘하 장병들을 생각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부상병들을 위해 질 좋은 의약품들을 구비하려고 노력했고, 부상병들을 항공후송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부대와의 관계도 훌륭했었다. 애초에 누구와는 다르게 슬림의 후퇴 금지 명령은 충분한 항공 지원을 전제하고 있는 거였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혹독하다고 하는건 조금 과하다. 혹독했다기보다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더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워낙 중요시되지 않는 전장에서만 싸웠던 탓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14]
4. 기타
세계 정복자3, 세계 정복자4나 장군의 영광 3과 같은 게임에서 고급 보병 지휘관으로 등장하기도 한다.[1] 빌 슬림(Bill Slim)이라고 불리기도 했다.[2] 앤서니 밀즈(Anthony Mills)라는 필명으로 소설 등을 썼다.[3] Christoper Bayly and Tim Harper, Forgotten Armies, Penguin Books (2005), ISBN 0-14-029331-0, pp.274–275[4] 산과 강이 많고 열대기후이기까지 한 버마 지역의 지리를 생각해보았을 때, 이런 판단은 훌륭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 지금의 우리야 일본군의 뻘짓을 많이 알고 있어서 일본군이 오히려 우스워보일 수 있지만, 저당시의 일본군은 독일의 기갑사단 못지않게 승승장구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6] 일본군은 철도를 깔아서 병력을 충원받고 있는데 자신은 오히려 병력을 뺐기고 있으니 슬림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7] Weinberg, Gerhard (2005). A World in Arms A Global History of World War I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61826-7. p.641.[8] 이게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인도 침공 작전(U-Go 작전) 당시 일본군은 실제로 영국군의 식량을 탈취해서 보급할 계획이었다고 한다.(Weinberg, Gerhard (2005). A World in Arms A Global History of World War I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61826-7. p.641.)[9] 제15군단장 필립 크리스티슨(Philip Christison), 제33인도군단장 몬태규 스톱포드(Montagu Stopford), 제4군단장 조프리 스쿤즈(Geoffry Scoones)[10] 이때, 버마 저항군의 지도자 중에는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인 아웅 산도 있었다.[11] 리스는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한 기존의 참모부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중동과 이탈리아에서 같이 일했던 이들로 교체해서 슬림에게 별로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슬림이 휴가를 요청하자,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오래 복무했던 슬림의 건강이 안좋다고 지레짐작하고 독단적으로 12군으로 전출시키려 했다.[12] 리스는 전쟁 당시 집단군 사령관급인 동남아시아 연합지상군 사령관이었지만, 전후에는 야전군 사령관급인 동부 사령관으로 지내야했고 대장 진급에도 실패했다. 후일 리스는 회고록에서 마운트배튼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13] Murray, Williamson; Millet, Alan (2000). A War To Be Won. Cambridge (US): Harvard. ISBN 978-0674006805. pp. 227–228.[14] 제14군 스스로도 자신들을 "잊혀진 군"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