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2:39:38

헨리 파제트

파일:BritishArmedForces.svg
영국군
원수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원수
Field Marshal / Admiral of the Fleet
Marshal of the Royal Air Force
육군
Army
<colcolor=#000,#fff> 헨리 시모어 콘웨이 | 윌리엄 헨리 | 조지 하워드 | 프레더릭 어거스터스 | 존 켐벨 | 제프리 에머스트 | 존 그리핀 | 스터드홈 호지슨 | 조지 타운센드 | 프레데릭 캐번디시 | 찰스 레녹스 | 에드워드 어거스터스 | 아서 웰즐리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 아돌푸스 프레더릭 | 윌리엄 프레더릭 | *레오폴드 1세 | 찰스 무어 | 윌리엄 하코트 | 앨러리드 클라크 | 사무엘 헐스 | *앨버트 공 | *빌럼 2세 | 조지 누겐트 | 토머스 그로스베너 | 헨리 파제트 | 피츠로이 서머싯 | 스테이플튼 코튼 | 존 빙 | 헨리 하딩 | 존 콜보른 | 에드워드 블레이크니 | 휴 고프 | 조지 윌리엄 프레데릭 찰스 | 콜린 켐벨 | 알렉산더 우드포드 | 윌리엄 곰 | 휴 로스 | 존 폭스 버고인 | 조지 폴록 | 존 포스터 피츠제럴드 | 조지 헤이 | *에드워드 7세 | 윌리엄 로완 | 찰스 요르크 | 휴 로스 | 로버트 네이피어 | 패트릭 그랜트 | 존 미첼 | 리처드 제임스 데이커스 | 윌리엄 파울렛 | 조지 빙햄 | 린톤 사이먼스 | 프레더릭 헤인스 | 도널드 마틴 스튜어트 | 가넷 울즐리 | 프레더릭 로버츠 | 작센바이마르제나흐의 빌헬름아우구스트 | 네빌 보울즈 체임벌린 | *빌헬름 2세 | 헨리 노르만 |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 헨리 에블린 우드 | 조지 화이트 | *프란츠 요제프 1세 | 프랜시스 그렌펠 | 찰스 헨리 브라운로우 | 허버트 키치너 | *조지 5세M | 폴 샌포드 메수엔 | 윌리엄 니콜슨 | 존 프렌치 | *니콜라이 2세 | 더글러스 헤이그 | 찰스 에저턴 | *다이쇼 덴노 | 페르디낭 포슈 | 허버트 플러머 | 에드먼드 앨런비 | 헨리 휴스 윌슨 | 윌리엄 로버트슨 | 아서 바렛 | *알베르 1세 | 윌리엄 버드후드 | 클라우드 제이콥 | 조지 밀른 | *알폰소 13세 | *히로히토 | 줄리안 빙 | 루돌프 램바르트 | 필립 체트우드 | 아치볼드 몽고메리매싱버드 | *에드워드 8세M | 시릴 데버렐 | *조지 6세M | 윌리엄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 얀 스뮈츠 | 존 딜 | 존 베레커 | 아치볼드 웨이벌 | 앨런 브룩 | 해럴드 알렉산더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헨리 매이틀랜드 윌슨 | 클로드 오킨렉 | 윌리엄 슬림 | *필립 마운트배튼M | 존 하딩 |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 제럴드 템플러 | 프랜시스 페스팅 | *마헨드라 | *하일레 셀라시에 | 리처드 헐 | 제임스 카셀스 | 제프리 베이커 | 마이클 카버 | 로널드 깁스 | *비렌드라 | 에드윈 브래멀 | 존 스테니어 | 나이젤 바그날 | 리처드 빈센트 | 존 채플 | *켄트 공작 에드워드 공자 | 피터 잉게 | *찰스 3세M | 찰스 거스리H | 마이클 워커H
해군
Navy
조지 레게 | 에드워드 러셀 | 조지 루크 | 클라우데슬리 쇼벨 | 존 리크 | 스태포드 페어본 | 매튜 에일머 | 조지 빙 | 존 노리스 | 샬로너 오글 | 제임스 스튜어트 | 조지 클린턴 | 조지 앤슨 | 윌리엄 롤리 | 에드워드 호크 | 존 포브스 | 리처드 하우 | 피터 파커 | 윌리엄 4세 | 존 저비스 | 윌리엄 윌리엄스-프리먼 | 제임스 갬비어 | 찰스 폴 | 찰스 에드먼드 뉴전트 | 제임스 호킨스-휘셰드 | 조지 마틴 | 토마스 비암 마틴 | 조지 콕번 | 찰스 오글 | 존 웨스트 | 윌리엄 게이지 | 그레이엄 하몬드 | 프랜시스 오스틴 | 윌리엄 파커 | 루시우스 커티스 | 토마스 코크란 | 조지 시모어 | 제임스 고든 | 윌리엄 보울스 | 조지 사토리우스 | 페어팩스 모르즈비 | 휴스턴 스튜어트 | 프로보 월리스 | 헨리 코드링턴 | 헨리 케펠 | 토마스 메이틀랜드 | 로드니 먼디 | 제임스 호프 | 토마스 시몬즈 | 알렉산더 밀른 | 찰스 엘리엇 | 알프레드 라이더 | *에드워드 7세 | 제프리 혼비 | 존 헤이 | *윌리엄 2세 | 존 코머렐 | 알프레드 어니스트 알버트 | 리처드 제임스 미드 | 앨저넌 라이언스 | 프레드릭 리처드 | 노웰 살몬 | 제임스 어스킨 | 찰스 호담 | 월터 커 | 에드워드 시모어 | 존 피셔 | 아서 윌슨 | *니콜라이 2세 | 제라드 노엘 |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 아서 팬쇼 | 조지 5세 | 윌리엄 메이 | 헤드워스 뮤 | 조지 캘러헌 | 존 젤리코 | 데이비드 비티 | 헨리 잭슨 | 로슬린 웨미스 | 세실 버니 | 도브턴 스터디 | 루트비히 마운트배튼 | 찰스 매든 | 서머셋 고프-칼소프 | 존 드 로벡 | 헨리 올리버 | 오스몬드 브록 | 로저 키이스 | 프레더릭 필드 | 레지날드 티릿 | 어른 챗필드 | 에드워드 8세 | 존 켈리 | 조지 6세 | 윌리엄 보일 | 로저 백하우스 | 더들리 파운드 | 찰스 포브스 | 앤드류 커닝햄 | 존 토비 | 제임스 서머빌 | 존 커닝햄 | 브루스 프레이저 | 앨저넌 윌리스 | 아서 파워 | 필립 비안 | 필립 마운트배튼 | 로드릭 맥그리거 | 조지 크레이지 | 루이 마운트배튼 | 찰스 램브 | 캐스퍼 존 | 바릴 베그 | 마이클 르 파누 | 피터 힐-노턴 | 마이클 폴록 | 에드워드 애쉬모어 | 테렌스 르윈 | 헨리 리치 | 존 필드하우스 | *올라프 5세 | 윌리엄 스태블리 | 줄리안 오스왈드 | 벤자민 배서스트 | *찰스 3세 | 마이클 보이스
공군
Air Force
휴 트렌차드 | 존 살몬드 | *에드워드 8세 | *조지 6세 | 에드워드 엘링턴 | 시릴 뉴월 | 찰스 포탈 | 아서 테더 | 숄토 더글러스 | 아서 해리스 | 존 슬레소르 | *필립 마운트배튼 | 윌리엄 딕슨 | 더모트 보일 |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 토머스 파이크 | 찰스 엘워디 | 존 그랜디 | 데니스 스포츠우드 | 앤드류 험프리 | 네일 카메론 | 마이클 비덤 | 키스 윌리엄슨 | 데이비드 크레이그 | 피터 하딩 | *찰스 3세 | 조크 스터럽H
비고 M : 해병대, H : 명예진급(비왕실)
※ 진급시기 기준 세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일된 1707년 이후 기준으로 서술
}}}}}}}}}
<colbgcolor=#4A2235>
영국 육군 원수
헨리 파제트
Henry Paget
파일:헨리 파제트.jpg
<colcolor=#ffffff> 본명 헨리 윌리엄 베일리
Henry William Bayly
작위 제1대 앵글시 후작 헨리 윌리엄 파제트
Henry William Paget, 1st Marquess of Anglesey
출생 1769년 5월 17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잉글랜드 런던
(現 영국 잉글랜드 런던)
사망 1854년 4월 29일 (향년 85세)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런던 7 벌링턴 가든
(現 영국 잉글랜드 런던 7 벌링턴 가든)
묘소 영국 스태퍼드셔 주 리치필드 대성당
재임기간 제47대 아일랜드 주지사
1828년 2월 27일 ~ 1829년 1월 22일
제49대 아일랜드 주지사
1830년 12월 4일 ~ 1833년 9월 12일
제22대 스태퍼드셔 주지사
1849년 2월 3일 ~ 1854년 4월 29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4A2235><colcolor=#ffffff,#ffffff> 부모 아버지 제1대 옥스브리지 백작 헨리 베일리-파제트
어머니 제인 샹파네
형제자매 11명
배우자 캐롤라인 엘리자베스 빌리어스 부인 (1795년 7월 5일 결혼 1810년 이혼)[1]
샬럿 슬론 카도건 (1810년 재혼)
빙부모 장인어른 제4대 저지 백작 조지 빌리어스
장모 저지 백작부인 프랜시스 빌리어스
(1795~1810)
자녀 슬하 3남 5녀
학력 웨스트민스터 스쿨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컬리지 (학사)
직업 군인, 정치인
종교 성공회
지역구 카나번 (16)→밀본 포트 (17, 1)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6, 17[2], 1[3][4]
경력 제16·17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서민원 의원
초대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서민원 의원
제47·49대 아일랜드 주지사
제22대 스태퍼드셔 주지사
서훈 가터 기사단
바스 훈장
왕실 구엘프 훈장
군사경력
복무 영국 육군
1793년 ~ 1854년
최종계급 원수
최종보직
보직경력 육군 임시중령 (1793년 12월)
제80보병연대장
제23보병연대 대위 (1795년 4월 14일)
제65보병연대 소령 (1795년 5월 19일)
제80보병연대 중령 (1795년 5월 30일)
제16기병대 중령 (1795년 6월 15일)
제16기병대 대령 (1796년 5월 3일)
제7기병대장 (1797년 4월 6일)
기병여단장 (1799년 10월 6일)
육군 소장 (1802년 4월 29일)
육군 중장 (1808년 4월 25일)
보병사단장 (1809년)
기병대 사령관
대장 (1819년 8월 12일)
군수사령관 (1827년 4월)
육군 원수 (1846년 11월 9일)
참전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
1. 개요2. 생애3. 프랑스 혁명 전쟁4. 나폴레옹 전쟁5. 그 이후

[clearfix]

1. 개요

초대 앵글시 후작이자 19세기 영국 육군의 별들중 한명이며 워털루 전투의 주역중 하나.

1790년에 영국 의회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는 정치인이었으며, 1793년부터 군에 종군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하였고 제7후사르기병대의 총책임을 맡아서 활약하였다.[5] 프랑스를 상대로 1804년1808년에 연달아서 피해를 입혔고 반도 전쟁에서 종군하다가 1809년에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1815년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우며 영국 국왕의 배우자인 왕비 정도가 수훈받는 바스 훈장과 앵글시 후작 작위를 임명 받는다.

2. 생애

1769년 5월 17일에 헨리 베일리[6]와 제인 샹파뉴의 아들로런던에서 태어났다. 파제트 자신은 웨스트민스터 스쿨[7]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8]

3. 프랑스 혁명 전쟁

1796년 파제트는 군에 입대하게 된다.[9] 파제트는 군에 입대 하자마자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하원에서 일을 하면서 1793년에 일시적으로 중령으로 업무를 보게 된다. 사실상 정치를 포기한것 역시 이일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한것이 아니라 군인 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인인 특수한 사례에 해당된다. 플랑드르 전역에 참전하였고 1795년 부터 본격적으로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일시적인 중령이 아닌 그해 5월 30일에 푸트 제80연대의 중령이 되었으며 6월 15일에 제16 여왕의 랜서부대로 옮겼다.[10] 16부대에서 그는 대령으로 진급하게 됐으며, 1799년홀란트 침공 당시 카스트리쿰 전투에서 기병여단을 이끌고 참전한다. 하지만 만 팔천명이 숨진 이 전투는 끝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4. 나폴레옹 전쟁

1802년 소장으로 진급한 파제트는 존 무어경과 함께 스페인 전역에 참전한다. 사하그 전투에서 13명의 프랑스 장교를 체포하고 300여명의 포로를 잡은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장드디외 술트가 이끄는 프랑스 주력군이 근방에 다가오고 있기에,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1808년 12월에 베나벤테에서 프랑스의 엘리트 부대를 격파한뒤 기병부대 마저도 제압하였다. 하지만, 코루나 전투에서 무어 경이 술트에 의해 사망하면서 사실상 후퇴할수 밖에 없게된다. 결국 1809년에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궁내부 대신직 역임을 완료하고 사퇴했다.[11] 1809년 마지막으로 그가 군을 이끈것은 발체렌 전역에서 보병사단을 이끈것이다. 이를 마지막으로 본토에서 활동하였다. 1810년에 본토 생활도중 아내와 이혼하고 샬럿 부인과 결혼하였다. 2년후인 1812년 부친인 헨리 파제트 시니어가 사망하면서 옥스브리지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이것은 완전한 정치적 은퇴였다. 그의 군인 생활과 함께 정치 인생도 이제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정치은퇴와 달리 군인으로써의 은퇴는 찬란하고 후회없는 일이었다.

1815년나폴레옹이 돌아온 시기에 다시금 군에 복귀해 영국벨기에 점령지역에 해당하는 기병사령관을 맡았으며 그해 6월 16일 콰트레브라 전투에서 영국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전투의 결과는 패배로 끝나며 아서 웰즐리는 군을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론 동맹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프랑스는 미셸 네 원수가 동맹군을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그의 전략이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교차로 조차 통제하지 못한것을 웰즐리가 눈 여겨봤다. 이틀후 장 바티스트 드루에가 이끄는 프랑스 군을 상대하고 있었으며 중기병의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지속했다. 전투 도중 나라온 포탄에 의해 파제트는 부상을 입었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여담으로 그는 포탄을 맞을당시 웰즐리와 같이 있었는데 그는 웰즐리에게 "웰즐리 경, 나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라며 오히려 군의 사기를 위해서 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고, 웰즐리는 "경이 정말로 다리를 잃게 되었네." 라고 주고 받으며 주변 상황을 수습하였다. 당시 수행관인 토마스 와일드만이 회상하길 "파제트 경은 수술 동안에도 웃으면서 난 꽤 오랫동안 이자리에서 있었네, 나는 47년 동안 미남으로 살아왔으니,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여심을 잡을 기회는 줘야 되지 않겠나?" 라고 말하였다.

결국 워털루 전투가 동맹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면서 그역시 영웅이 되었다. 파제트는 초대 앵글시 후작에 임명되었고 1818년 그간의 공로를 높이사 가터 훈장을 서훈받았다.

5. 그 이후

1819년 8월 12일 대장 진급을 마지막으로 군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1812년에 자작 지위를 물려받았으나, 1821년 조지 3세 사후부터 최고궁내경 [12]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전의 의원시절 보다 더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1826년 3월 25일 왕립 요트 편대의 명예대령 [13]에 임명되고, 웰즐리 내각에서 아일랜드 주지사 [14][15]를 무려 두번에 걸쳐 임명되었다. 아일랜드에서 그들에게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13년간 내각에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했다.[16] 총리가 웰즐리에서 찰스 그레이로 바뀐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846년 1차 러셀 내각[17]에도 참여하였다. 1846년 11월 9일 그는 드디어 영국육군원수로 추대되었으며, 3년 후에는 아일랜드에서 임기를 마치고 스태포드셔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52년 드디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파제트 경은 죽을때까지 제7 후사르 기병대 대장직을 맡았는데, 빅토리아 여왕 재위 내내 왕립 기병대 등 왕실 소속부대를 맡으면서 그에대한 신뢰를 보냈다. 그러나 1854년 4월 29일 뇌졸중으로 8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사후 리치필드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앵글시 후작 작위는 장자인 헨리 주니어에게 넘어간다.


[1] 이혼 후 제6대 아가일 공작 조지 캠벨과 결혼하면서 ‘아가일 공작부인 캐롤라인 캠벨’로 바뀌었다.[2]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말대 총선[3]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초대 총선[4] 1804년 의원직 사임[5] 여왕의 제7후사르기병대는 영국 왕립군 소속으로 당시는 조지 3세 치세로 국왕의 직속부대였다. 이는 그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위치라고 할수있다.[6] 헨리 경을 낳은건 1769년의 일이므로 그는 아직 성씨를 바꾸지 않았다.[7] 12세기에 웨스트민스터 성당과 함께 건립된 학교로 7살에 입학하여 교육과정을 밟는 초등학교와 같은 기관이다.[8] 정확히는 옥스퍼드 대학교 안에 가장큰 건물중 하나인 그리스도 교회라는 종교적인 교육에 진학했다.[9] 어찌보면 1806년에 다시 복직했지만 궁내부 대신을 1810년까지 역임하고 이에대해 이전인 1804년에도 맡았기에 불만을 표하며 다시 군에 복귀한다.[10] 조지 3세 이전에 창립되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에서 군을 지휘한 존 부르고인과 격변의 19세기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육군 원수 윌리엄 하코트가 지휘한 부대이다.[11] 사실상 이베리아 반도에 줄곧 있었기에 1806년의 잠시적인 복귀는 의미가 없었다. 궁내부 대신직도 임기 4년 중에서 3년은 거의 허성세월로 명예직에 불과했다.[12] Lord High Steward, 파제트의 경칭이 Sir, 경이긴 하나 직위상으로는 공에 더 가깝다.[13] 말년에 그는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달렸으나, 군에서 은퇴에 가깝긴 하지만 평생을 봉사하였으니, 군에서 그에게 직위를 주면 군인으로 활동은 가능하긴 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그는 나폴레옹 전쟁 후에는 군인으로써 생활은 거의 끝난것 이나 다름없다.[14] Lord Lieutenant of Ireland,아일랜드는 17세기 부터 영국에선 주로 봤으며 실체적으로도 1171년에 이직책이 형성되었고, 1922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아일랜드의 통치자격을 가진 직책이었다.[15] 이직책은 주지사가 아니라 총독의 개념으로 봐야한다.[16] 파제트의 인생 직책이라고 봐야한다. 그의 전성기는 워털루의 영웅이 된 이후지만 1827년이 진정한 전성기라 할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구가했다.[17] 존 러셀글래드스턴 이전에 휘그당과 자유당이 배출해낸 총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