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다른 사람의 평범한, 혹은 안 좋은 의미로 나쁜 퀄리티를 목격한 후, 직접 자신이 그보다 더 좋은 품질을 뽑을 수 있음을 자신할 때 종종 내뱉곤 하는 말.대개 그 분야에 약간이라도 능통했던 사람 A가 그보다 못한 사람 B의 퀄리티를 보면서 "왜 저것을 저 정도로밖에 하지 못하는가?"라고
물론 A가 호기롭게 나섰는데 B와 동등하거나 그보다 못하는 수준인 경우에는 아주 좋은 팝콘의 소재가 되므로, 정말 그 전문분야에 기여했다 말할 수 있는 레벨이라거나 B를 기분나쁘게 하면서도 B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개입하지 말자. 심하면 조리돌림까지도 갈 수 있다.
통상적으로 현실에서는 웬만큼 자신감이 가득한 전문가 VS 이제 겨우 첫 발을 떼어 경험이 많지 않은 일반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퀄리티를 대신 뽑아낼 A가 허세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B보다는 그래도 나은 퀄리티를 뽑아내는 경우가 많다.
아주 드물게 해당분야와 무관하거나 무명급들 인물들이 이런 마음가짐으로 도전해서 정상에 서기도 한다.
창작물 내에서는 양판소의 클리셰 수준. 아무래도 독자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게 주 내용인 만큼, 어떤 현대판타지 소설에도 꼭 한 번씩은 주인공이 A의 입장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을 따라온 여자사람친구가 여자친구가 된다거나 주인공의 색다른 면모에 열광하는 다른 조연이 등장하기 마련이며, 이 때 B의 입장이었던 사람은 앙심을 품고 주인공을 해할 다른 음모를 꾸민다는 것이 거의 정석 수준.
맨 밑 항목에서 보다시피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도 주인공이나 조연의 뛰어남을 돋보이게 하는 데 종종 사용한다. 독자/시청자로 하여금 위 서술된 문단처럼 대리만족을 불러오거나, 해당 캐릭터의 특징을 각인시킬 때 사용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호언장담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와 동급이거나 그 미만의 취급을 받는다.
소설가 장강명은 한겨레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신간 소설들이 쓰레기 같고 어떻게 이런 책을 내겠다고 나무를 벤 것인지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에는 자기 자신이 책을 쓰는 게 차라리 낫다고 조언했다. 잘 되면 자신도 좋은 글을 쓰는 작가로 데뷔할 수 있고, 안 되더라도 이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독서가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꼭 천재적인 사업가만 사업을 하는 게 아니듯이, 글쓰기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야만 책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
파생형으로 종종 상대가 하는 모습이 자신이나 다른 일반인의 수준보다 한참 아래로 더 심각하다면 "우리 할머니가 해도 이것보단 더 잘 하겠다" 같은 표현도 쓰인다. 게임이나 스포츠 경기 등을 볼 때 누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면 노인 여성들은 대부분 그런 것을 전혀 즐기지 않으니 그 분야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해도 더 나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 이 외에도 더욱 더 강한 표현으로 (내가) 발로 해도 이거보단 잘하겠다란 말이 쓰이기도 한다.
비슷한 말로 답답해서 내가 친다가 있다. 진짜 본인이 해서 더 잘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2. 실제 사례
자꾸 징징대는 사람에게 "그렇게 잘 알면 네가 한 번 만들어봐라"라고 했더니, 또는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단 잘할 수 있겠으니 제가 직접 한 번 해 보겠다고 판단하고 실행에 옮긴 예를 나열하였다.2.1. 군사/무기
-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 정치가 클레온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니키아스 장군이 이끄는 아테네군이 라케다이몬군(스파르타군)을 스팍테리아 섬에 가둬놓고도 섬멸하지 못하고 시간만 지체되자 민회에서 '내가 장군이 되면 20일 안에 승전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 드립에 가까운 도발에 니키아스는 장군직을 넘겨줄 테니 직접 해보라고 응수했고, 시민들도 이에 동조하면서 클레온은 갑자기 장군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군사경험이 없던 클레온은 데모스테네스 장군의 조력을 받아 경무장 보병 중심의 부대를 섬에 상륙시켰고, 스파르타 시민군 292명을 포함한 420명의 라케다이몬 병사를 포로로 잡는 대승리를 실제로 거두게 되었다.
- 미국의 전설적인 총포기술자 존 브라우닝은 그가 23살이였을때 개떡같은(...) 총을 보고 웃으며 "내가 만들어도 이거보단 잘 만들겠음!"이라고 말했고, 그의 아버지 조나단 브라우닝[1]은 "그럼 네가 한번 만들어봐라"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존 브라우닝은 완벽하고 작동도 잘되는 총을 하나 만들어냈다.[2] 그리고 존 브라우닝은 그때 얻은 교훈으로 새로운 싱글샷 라이플을 탄생시킨다. 이 싱글샷 라이플은 윈체스터에서 설계를 구매하여 윈체스터 Model 1885라는 이름으로 팔려 대 히트를 쳤고, 아직도 옛날 설계 그대로 팔리고 있다.[3]
2.2. 영화/연극/미디어
-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인 장뤽 고다르는 처음에 독설로 유명한 영화 평론가였다. 그의 독설을 듣다가 화가 난 다른 프랑스의 영화감독들이 "그럼 당신이 만들어 보세요"라고 해서 정부의 문화 보조금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는데 데뷔작부터 네 멋대로 해라(1961)라는 영화 역사를 대표하는 걸작을 뽑아냈다(...) 그 뒤로 1960년대 누벨바그 영화의 기수로 꼽히며 점프컷이라는 지금은 너무나도 널리 쓰이는 촬영, 편집기법을 고안하는 한편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었다. 이 중 대부분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러나 영화감독 및 평론가들에게는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영화 공부를 하는 사람이나 마니아들에게는 클래식 그 자체이다.
- 임성한의 경우는 기존의 드라마에 대해 반기를 가지고 직접 드라마 각본을 썼다고 한다. 그 결과 그의 드라마는 지금에 와서야 뻔하다고 욕먹을지라도 안 좋은 의미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아키모토 야스시는 수험생활 중 코미디언 센다 미츠오가 나오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다가 '저 정도 각본이면 나도 쓸 수 있겠다'라고 생각해 수험 공부용으로 준비했던 노트 스무 페이지 정도에 걸쳐 센다를 주인공으로 한 헤이케모노가타리의 패러디를 작성하여 이를 라디오 방송국에 보내 고교생의 나이에 방송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게 전설의 시작이었다.
- 록맨 X4 북미판의 제로 담당 성우인 '웨인 도스터(Wayne Doster)'가 그야말로 WTF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What am I fighting for~" 연기를 선보이자, 훗날 록맨 X 커맨드 미션부터 제로의 담당 성우인 루커스 길버트슨이 직접 더빙을 했고,[4] 그 결과 대중들의 반응은 "웨인 도스터보단 낫다."는 평을 받았다.
- 영화 제작자 김조광수는 디 워 돌풍 때 심형래 영화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가 디빠와 당시 광풍에 휩쓸린 일반인들로부터 영화 만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영화 깐다고 비난당했다. 하지만 이후 2011년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흥행시켜 자신이 제작자로서는 심형래보다 훨씬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이후 심형래는 라스트 갓파더를 대차게 말아먹었다(...).
- 배우 윤진서는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서 연출을 맡았는데, 1년 후배가 연기를 하도 못 해서 "내가 해도 그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해서 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 배우 유인영은 고등학생 때 패션잡지를 보다가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에 모델 학원에 접수했다고 하며, 이후 모델로 데뷔해서 지금도 배우를 하고 있다.
- 중견배우 양재성의 장녀 양소민 또한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레 미제라블을 보러 갔다가 '내가 에포닌 역할을 하면 더 잘할 것 같다' 고 생각하며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데뷔 초 인터뷰에서도 에포닌 역을 맡고 싶다고 꾸준히 언급했었다고 한다.
- 컬투의 정찬우는 수색대 근무시절 일병 때 문선대가 와서 공연을 했는데 너무 재미가 없어서 '내가 해도 저것보단 더 재미있겠네?' 라고 생각해 문선대 대신 공연을 했더니 진짜로 정찬우가 한 공연이 더 재미있었다. 그래서 문선대에 스카웃되어 6개월간 근무했다고 한다. 정찬우는 그 사건 이후로 "내가 개그맨 끼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고 개그맨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게임 해설자 안준영의 경우, '내가 하면 더 잘할 것 같아서' 게임해설가를 지망했는데 CJ미디어의 슈퍼파이트에서 자리가 비는 것을 알고 CJ미디어 고객 센터로 전화를 걸어 상담원에게 따졌다고 한다. 근데 멘트가 가관인데, "해설 두 명이서 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결국 슈퍼파이트 담당 PD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고 연락 이후 찾아가서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서 해설을 시작했다.
- 미즈시마 세이지는 촬영 출신의 연출가로 본래는 촬영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었으나 연출이 자꾸 잘못된 지시를 내려서 작업물을 망치자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제작진행이 되어 애니메이터들과 인맥을 트고 연출을 배웠다. 그 결과는 현재 일본에서 잘 나가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 할리우드 B급 영화계의 전설인 로버트 로드리게스는 어느날 싸구려 비디오용 영화를 보고 자신이 만드는 게 저것보단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7000불짜리 초저예산 장편영화 데뷔작을 만들었는데, 이게 제작비 300배 이상의 수익을 긁어모으는 대성공을 거두어 당당히 할리우드에 입성했다고 한다.
- (주)장수산업의 회장인 최창환은 외주를 통해 제작비 1억 5천만원과 제작 시간 48시간을 들여 광고를 만들었는데, 누가봐도 매우 평범한 광고였던지라 그 광고를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결국 최창환 회장이 직접 광고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고, 제작비 300만원에 제작 시간 30분으로 가성비 좋게 광고를 뽑아냈는데 그 광고는 이후 전국구급으로 유명해져 한번이라도 들어본 유명한 CF중 하나가 되었고, 이후 돌침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 유튜버 팍플레이는 군 시절 유튜브를 보며 “내가 영상 만들어도 이것보단 재밌겠다” 라는 생각을 해 전역 후 유튜브를 시작했다고 한다.
2.3. 음악/예술
- 현재 메이저와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을 통틀어 국내 힙합에서 실력 방면이나 모든 것에서 원탑으로 추앙받는 래퍼 E SENS가 처음으로 랩을 시작한 것이 동네 대회였는데, 당시 난다 긴다는 래퍼들이 다 모였으나 자신이 그것보단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힙합을 시작하여 어린 나이에 대회 2위를 하고 현재는 한국힙합 탑을 찍었다.
- 드러머 키스 문은 그룹 더 후가 디투어스라는 무명 밴드였던 시절 공연장에서 "무슨 드럼을 그따위로 치냐"며 객석에서 무대로 난입하여 소란을 피웠다. 이에 열받은 멤버들이 "그럼 니가 쳐봐라"라고 했더니 천상의 드럼 연주 실력을 보여주며 다른 멤버들을 데꿀멍시킴과 동시에 그날 바로 정규 멤버로 계약을 하게 되었다. 미리 연습을 했을 드러머보다 그 자리에서 난입한 사람이 드럼을 더 잘 쳤으니 상당한 실력자였던 셈.
드럼의 신 중 하나니까
- 대한민국의 뮤지션 배철수는 학생시절에 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를 듣고 나서 "뭐야? 저 정도면 대상을 받는다고? 내가 지금 나가도 저거보단 더 잘하겠는데?" 라고 생각해서 다음 2회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2회 참가자들 대부분이 "대학가요제가 이 정도 수준이야? 그럼 나도 대상 받겠네?" 라고 생각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것이라고 배철수가 언급했다.
본의아니게 드림팀 결성
-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로 고통받던 말년, TV에서 무슨 그림이 비싸게 팔렸단 뉴스를 보고 '내가 그려도 저것보단 잘 그리겠네!'라고 하며 많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5] 프레디는 자조섞인 목소리로 애인인 짐 허튼에게 '이 그림은 내가 죽고 나면 무지 비싸게 팔릴 거야.' 라고 농담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프레디의 이름값을 보면 나중에 결국 비싸게 팔리긴 했을듯 하다.
- 샤키라는 음반사가 주도해 만든 앨범 2장이 모두 실패하자[6] 본인이 직접 주도해서 앨범을 만들기로 했고 음반사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첫 앨범이 Pies Descalzos.\
- 작곡가 TAK은 기존에 나와있던 BMS 곡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 작곡 및 BMS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인디·게임 시장, BMS 부문은 물론 메이저 시장까지 모두 성공한 몇 안되는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다.[7]
- 알바만 하며 생활하던 어느 청년이 TV에서 우연히 싸이의 음악방송을 보고 나서 "저 사람도 연예인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겠네?" 싶어 바로 SM에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서 데뷔했는데,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슈퍼주니어의 멤버 김희철.
2.4. 문학/소설
- 눈물을 마시는 새의 출판은 이와 비슷한 논쟁이 관여되어 있었다. 김경진이 <하늘길잡이>라는 한국형 판타지를 출판한 이후 김경진과 안병도가 드래곤 라자는 한국형 판타지가 아니라고 깠고 이영도와 잠시 논쟁이 붙었다. 그리고 논쟁이 끝나고 나서 이영도는 눈물을 마시는 새를 들고 와서 내밀었다.
만들어 왔으니 다시 붙자[8]
- 엔젤하이로의 함장은 양판소 작가들의 "님은 글이라도 써봤음? 책이라도 내봄?" 이라는 비꼼에 당당하게 반박하기 위해 메이드 드래곤 전기를 집필했고 매너리즘에 빠진 판타지물 사이에서 의외로 괜찮은 평을 듣기 시작해서 출판 제의까지 되어 계약금을 받고 원고를 넘겼으나 출판사의 경영 축소로 출판을 못했다. 때문에 아직까지 결말부를 공개 못하고 있다.
- 고시생툰 작가 seri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재학 시절 사교육 시장(아마도 과외로 추정)에 몸담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수 학생들이 고전시가에서 좌절하고 낙오되자 "아 이거 만화로 쉽게 이해시켜주는 만화 안 그리나"라는 생각을 했고, 졸업 때까지 결국 그런 교재가 나오지 않자 아예 직접 본인이 수능 빈출 고전시가를 해설한 만화책을 출간하였다.
- 산경[9]은 원래 회사원이었으나 2011년 당시 문피아에서 연재되는 기업물을 보고 회사 생활 안한 것 같아[10][11] 내가 해도 저거보다는 잘 쓰겠다고 첫 작품인 비따비를 썼다. 이후 현재의 필명으로 바꾼 후, 두 번째 작품인 신의 노래를 쓰고 자신의 연봉보다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게 되자 전업 웹소설 작가가 되었다.
- 무협 소설가 좌백 또한 마찬가지 케이스였는데, 흔히 말하는 구무협과 신무협의 구분을 좌백의 등장으로 나누는 사람이 많다. 과거 무협 소설은 그야말로 펄프픽션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저질 수준의 책이 많았다. 이는 홍콩이나 대만의 유명 작가들의 소설을 무단으로 번역하거나 표절 했으며, 색협지 또는 떡협지로 불리는 와룡강 스타일의 공장 소설이 범람했던 것이 주 이유다. 좌백은 그런 무협소설들을 보며 말 그대로 '내가 써도 이것보단 잘쓰겠네...' 하며 쓴 것이 바로 소설 '대도오' 이다. 이는 기존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무협계에 큰 충격을 줬으며, 고루한 아저씨들만 읽는 이미지가 있었던 무협의 이미지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2.5. 소프트웨어/게임
- 리누스 토르발스는 기존의 소스 관리툴인 BitKeeper에 엄청나게 빡쳐서 단 2주만에 Git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현재 Git는 다른 소스 관리툴을 압살해버리고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 사람은 원래 자기가 답답해서 리눅스 자체를 만들어버린 사람이기도 하니...
- 록맨 시리즈의 아버지 이나후네 케이지가 캡콤을 퇴사하고 만든 록맨 시리즈의 정신적 후속작 마이티 No.9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쪽박을 차자 캡콤이 록맨을 계기로 캡콤에 입사한 사람들로 팀을 구성해 정식 후속작을 만들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자세한 건 록맨 11 문서로. 퇴사한 사람들의 정신적 후속작을 계기로 원래 작품이 만들어진 회사에서 원래 작품을 통해 이런 사례를 만족시킨 특이 사례.
- 뼈대 애니메이션 작성 툴인 Spine은 기존 툴인 Spriter를 이용하며 피드백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기능의 한계를 느낀 제작자들이, 킥스타터를 통해 개발자금을 모아 새로 만든 툴이다. 현재는 라이선스 비용이 다소 비싼 것이 흠일 뿐인 강력한 툴으로 평가받고 있다.
- X68000판 이스 1(전파신문사 이식)은 이식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인게임의 일러스트로 인하여 괴작으로 손꼽힌다. 이를 본 모 동인 팀이 이질적인 모습에 반발감을 느끼고, PC88 원판을 완벽하게 X68000으로 이식하였다. 이후 해당 팀은 이스 2도 X68000으로 이식한다.
- 슈퍼패미컴판 죠죠의 기묘한 모험 RPG는 3부 스타더스트 크루세이더즈를 기반으로 만든 최초의 죠죠 게임 미디어 믹스이지만, 게임 자체의 완성도도 낮고 원작파괴가 너무 심한 것으로 악명높다. 이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하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죠죠러 '클레이맨' 넨도 타이리쿠는 '원작을 충실히 이행한 죠죠 RPG를 만들면 어떨지 궁금해서' 남편인 골렘 등과 합작하여 RPG 만들기 2000으로 2차 창작 RPG 게임 7번째의 스탠드유저를 제작했다. 비록 밸런스 상에서는 문제가 있지만 3부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것은 물론이고 8부까지의 서비스까지 충실하게 곁들여져 있어서 죠죠러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있으며 아예 서양에서 이것을 바탕으로 한 3차 창작인 '7번째의 스탠드유저 2'가 공식으로 허가를 받고 제작되고 있다.
- 1977년에 작성된 일본 논평도 있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문서에도 나온다. 원문 출처: #, 번역문 출처: 전파만세(원문)「最近の若者はダメだ」は昔から言われているが、特に今の若者はひどい。まず、当事者意識が完全に欠如している。さらに、独り立ちをしようとせず、常に何かに依存し、消費し、批判するだけの「お客さま」でいつづけようとしている。これはゆゆしき事態であり、日本社会のありかたにかかわる重大な問題である。(번역문)
- 마상소프트는 한 때 전성기가 있었으나 몰락하여 제작회사에서 운영을 포기한 게임들을 운영하고 있다. 심지어 제작회사가 넘겨준 회사가 다시 넘겨받은 케이스도 부지기수다.
- 소닉 더 헤지혹(2006)은 이게 정식 출시 게임이 맞나 싶을정도의 버그나 조작감들의 문제로 인해, 결국 팬들이 유니티 엔진으로 훨씬 좋은 퀄리티의 소닉 06을 만들고 있다.
- 호리이 유지는 잡지에서 게임 리뷰 코너를 연재하고 있었다. 돈을 받고 리뷰하면 깔 수가 없다면서 사비로 게임을 사서 리뷰할 정도의 독설가였다. 그리고 출시되는 게임이 마음에 안 든다며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라고 말하고 직접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를 만들어 히트했다.
-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인 코어장전은 원딜 시절 2015시즌 북미 리그에서 키위키드와 함께 바텀 라인에 섰었는데 갱맘 선수에게 내가 해도 저 새끼보다 잘하겠다라고 욕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2016 시즌 삼성 갤럭시로 이적 후 서머 시즌에 서포터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2016 롤드컵 준우승, 2017 롤드컵 우승 대업을 달성하였으며 후에 LCS로 이적하여 꾸준히 좋은 폼을 보여주면서 LCS 역사상 최고의 서포터로 인정 받고 있다.
- 2006년 당시 모질라 재단에서 일하던 프로그래머인 그레이든 호어는 아파트로 귀가하는 도중 소프트웨어 충돌로 인해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21층까지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수모를 겪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충돌 없이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도 만들지 못하는 게 어처구니없다!"라는 생각이 들어 Stack Overflow에서 진행한 개발자 설문조사에서 2016년부터 무려 7년 동안이나 가장 사랑받은 언어인 Rust를 만들었다. (출처)
- 유튜브나 모바일 게임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산형 게임 광고들은 이러한 심리를 자극시켜 다운로드를 유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누가봐도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를 일부러 틀리거나 교묘하게 회피하는 방식으로 예시 플레이를 보여주며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유도하는 방식. 물론 실제 게임 내용은 광고와 전혀 다르거나 미니 콘텐츠 수준에 불과하다.
2.6. 기계/전자
-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원래 트랙터를 만드는 업자였다. 그는 트랙터 산업의 대성공으로 페라리를 구매했는데, 계속해서 고장이 나자[14] 페라리의 창업자였던 엔초 페라리에게 자신이 구입한 페라리 차량의 문제점을 따지러 갔는데 오히려 엔초에게 "트랙터나 만드는 주제에 뭘 아느냐"며 무시당하자, 이에 극대노한 그는 직접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해 람보르기니를 세웠다. 이에 따라 이 회사의 슬로건은 무조건 페라리보다 빠른 차를 만들자. 그리고 현재는 두 회사 모두 슈퍼카 제조의 최고봉으로 인정받으며 경쟁을 하고 있다. 후술할 포드와의 일화를 보면 엔초 페라리는 운전 실력과 개발 능력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을 열받게 만드는 능력 또한 출중했던 듯 하다.
- 1960년대 미국의 포드사는 레이싱 산업 진출을 위해 페라리를 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합병 계약서에 포드가 페라리의 레이싱 분야에 간섭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있는 것을 본 페라리의 창업자이자 회장 엔초 페라리는 포드 사는 대중적이고 재미없는 차나 계속 만들라며
또도발함과 동시에 포드를 통수치고 피아트에 인수되었다. 그에 빡칠대로 빡친 포드는 타도 페라리를 외치며 포드 GT40을 만들어 기어코 르망 24시에서 1등부터 3등까지 차례대로 들어오는 원투쓰리 피니쉬를 해가며 페라리를 물먹였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바로 제임스 맨골드감독의 2019년작 포드 대 페라리.
- 람보르기니의 재료공학 부서에서 일하던 어느 아르헨티나 출신 공학자는 람보르기니 쿤타치를 설계하면서 탄소섬유의 대량생산을 위해 오토클레이브의 도입과 탄소섬유 전문 부서의 설립 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나, 람보르기니로부터 페라리가 쓰지 않으니, 우리도 굳이 쓸 필요가 없다며 거절당하자 람보르기니를 퇴사해 자신의 이름을 딴 슈퍼카 회사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파가니의 시작이다.[15]
- 체코 출신의 어느 기술자는 벤츠에서 일을 하다 내가 꿈꾸던 자동차를 찾을 수 없었다고 생각해 벤츠에서 나와 직접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현재 세계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는 회사들 중 두 곳인,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시작이었다.[16]
- 미국 굴지의 항공기 제작사이자 방위산업체인 보잉의 창립주 윌리엄 E. 보잉(William Edward Boeing, 1881~1956)은 당시 비행기의 발명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1910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American Air Meet'이라는 곳에서 비행기를 타보려 했으나 자리가 하나 뿐인 비행기라 타지 못했고, 5년 뒤인 1915년에 유니언 강에 조종사 테라 마로니에게 "날개에 붙어서라도 탈테니 비행기에 태워달라"고 사정을 하여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 본 뒤에 한 말이 "자리도 부족한데 태워주시느라 수고 많았소. 그냥 제가 뚝딱뚝딱 조립해서 타는 게 낫겠소이다."그 뒤에 시애틀로 돌아와 보잉을 차렸다고 한다. 그리고 보잉은 요즘도 에어버스와 함께 비행기 제작사 양강구도를 유지하고 있다.[17][18]
- 일론 머스크는 학창 시절부터 로켓과 화성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2001년에는 수분보급용 젤에 미니 온실을 만드는 '화성 오아시스'를 화성에 보낼 계획까지 세웠지만 ULA 등 우주산업계의 각종 고인물들의 로켓이 모두 비싸서 실패했다. 러시아에서 핵탄두를 제거한 깡통 ICBM을 중고로 구매해 그걸로 화성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했다가 퇴짜를 맞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계산기를 두들기다 "로켓을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비벼볼만 한데?"라는 생각으로 스페이스X를 창업했다. 물론 처음 만들어보았던 소형 발사체 팰컨 1을 3번이나 말아먹어서 거지가 될 뻔했지만[19], 투자금을 바닥까지 끌어모아 겨우 시도한 4차 발사를 성공하면서 살아남았다. 결국 팰컨 1을 통해 능력을 증명한 스페이스 X는 본격적으로 나사에게서 어마어마한 투자금을 받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2022년 현재는 세계 최초로 로켓을 재사용하고, 화성으로 자동차를 쏘아올리고, NASA 우주비행사들의 우주비행을 책임지는 엄청난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2024년을 목표로 새턴 V와 SLS를 모두 쌈싸먹는 우주여객선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미친듯한 진척도를 보이고 있다.
- 오클리(!)의 사장이기도 한 카메라 애호가 짐 쟈나드는 기존의 카메라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개선점을 발견하고 끝끝내 카메라를 개발하고 회사를 차리는데 이 회사가 레드 社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처음 개발한 카메라는 현대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는 레드 원.
- 허큘리스 그래픽 카드의 제작자인 반 수완누쿨은 당시 쓰였던 그래픽 카드인 MDA, CGA가 태국 문자를 표현하기에 성능이 너무 나빠 직접 그래픽 카드를 설계했다.
2.7. 정치/경영/서비스
- 조선의 정조는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느냐?", "더 이상 경들에게는 내가 배울 것이 없으니 직접 교육을 해야겠다."라면서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한다. 그리고, 임금 자신이 직접 교육을 시켜서 중하급 관리들을 발굴하는 초계 문신제를 실시한다. 보통 경연을 폐지하면 신하들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날 텐데 정조의 말에 틀린 게 없어서 신하들도 데꿀멍한 경우. 똑같이 호학의 군주면서도 경연에는 나이 들어서도 꼬박꼬박 나온 할아버지, 영조와는 다른 부분으로 꼽히기도 한다.
노력충 vs 재능충
- 금양잡록은 조선 초기의 관리 강희맹이 만든 것으로, 정량화가 제대로 된 농사서가 없다는 이유로 자기가 직접 시흥(현재의 금천구)지역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농사서를 썼다.
- 파파존스는 창업주인 존 슈내처가 동네 피자를 먹고선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단 낫겠다 라고 생각해서 창업한 것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파파존스는 한때 미국 피자업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바나나맨이라고 불린 전설의 경영가 샘 제머리(Sam Zemurray)는 본래 자신이 운영하던 Cuyamel이라는 회사를 유나이티드 프루트에 팔고 주식을 들고 은퇴할 예정이었는데, 대공황과, 그 이후로도 경영 악화로 인해 계속 삐걱거리자[20]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주주들을 선동하여 결국에는 유아니티드 브루트 컴퍼니의 회장이 되었다. 이 때 이사회에 참석하여 한 말이 이랬다. "니들은 오랫동안 이 사업을 조져놨다. 이제 내가 바로잡겠다"("You've been fucking up this business long enough. I'm going to straighten it out.")
- 영국 이코노미스트 특파원인 대니얼 튜더가 한국 맥주는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못하다고 디스를 하자 국산 맥주 업체들이
우린 싱거운 게 아니라 한국 사람이 목넘김과 청량감을 중요시한다고 핑계를 대며반발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이 기자는 진짜로 특파원을 그만두고 직접 서울에 맥주집을 차렸다. 정확히는 기사의 반박 때문만은 아니고 자신이 한국 맥주를 디스한 기사가 한국인들로부터 호응을 얻자, 질 좋은 맥주의 수요가 충분하고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맥줏집을 차린 것이다. 처음엔 더부스란 이름의 맥주 가게로 시작했다가 의외로 장사가 잘 되어서 아예 맥주 양조까지 직접 해내는 맥주 회사로 크게 성장했다. 창립 동기에 걸맞게(?) 대동강 페일에일이란 맥주도 제조하고 있다. 물론, 북한의 대동강 맥주와는 별개의 맥주이지만 튜더가 고의로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영국의 기업인 리처드 브랜슨 경은 영국항공의 저질 서비스를 보다못해 자신이 직접 항공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역시 저질 서비스 위주의 미국 항공업계에도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여기에도 자신이 직접 항공사를 만들었다.
- 국회의원 전병헌의 경우, 바다이야기 사태 이후 설립된 게임물등급위원회가 제대로 일을 못하고 오히려 '특정업체의 로비를 받고 심의한다'는 등의 국정감사 결과를 가지고 와서 '게등위 해체'를 주장하는 등의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후 중계권 사태나 GSL 보이콧 등의 행태로 '개스파'라고 불리었던 KeSPA의 회장으로 취임했는데...이후 KeSPA의 행보가 180도 달라졌다. 2014년 국회의원 겸직 금지 조례가 내려지자 인터넷에서 '살다살다 높으신 분이 감투 내려놓는 게 싫어질 줄은 몰랐다.'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 대한민국의 정치평론가 유재일은 이전까지는 평범한 학원 강사이었지만, 정의당 메갈리아 사태가 터지고 진보계 내부분열을 정의당에서 수습하지 못하고 보수들에게 매일같이 씹히기나 하자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 하겠다"라면서 직접 유튜브 채널을 열고 정치평론을 시작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19년 지금에는 진보, 친민주당계 유튜브계에서는 가장 높은 10만 구독자를 보유한 재야의 가장 센 스피커 중의 하나로 거대한 입지를 다졌다.
- 이미지 공유 사이트 imgur의 설립자 앨런 샤프는 레딧에 자체 이미지 호스팅 기능이 없어[21] 당시 존재하던 이미지 호스팅 사이트들을 이용하던 중, 이런 사이트들의 회원가입 유도나 화질 열화 등에 짜증을 느껴 직접 이미지 호스팅 사이트를 만들었다.
2.8. 스포츠
- 1994년 프리시즌에 열린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vs 옥스퍼드 유나이티드 FC 친선경기에서 웨스트 햄의 리 채프먼과 수석코치 해리 레드냅에게 스티브 데이비스라는 팬이 뒤에서 죽어라 욕을 했다. 이에 화가 난 해리 레드냅 수석코치가 그를 스탠드에서 끌어내려 "니가 더 잘할 수 있으면 해봐"라면서 경기에 투입했는데, 거기서 그는 골을 넣었다(...).
답답해서 내가 뛰었다.저 선수가 누구냐고 묻는 기자들에게는 불가리아 국가대표 출신 선수라고 구라를 쳤다(...). 물론 그 당시 코치가 그냥 빡쳐서 그 관객을 투입한 건 절대 아니고, 레드 카드와 부상 인력이 다발한 상황이라 벤치에서 투입할 수 있는 여유 인원이 바닥나 있었다. 그 와중에 선수 교체를 할 타이밍이 되자 아까 고래고래 소리지른 관객한테 가서 정말 우리 선수보다 잘 뛸 수 있냐고 묻고는 투입시켰다고.... 2013년 가디언지 인터뷰에 따르면 현재는 택배업을 한다고 하며, 물론 아직도 웨스트 햄 팬이라고. 당시 프리시즌에는 선수 등록이 따로 없어서 이렇게 팬을 출전시켜도 문제는 없었고, 지금은 프리시즌에도 등록된 선수만 나올 수 있도록 규정이 개정되어 저런 식으로 팬이 경기에 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설마 규정을 만들 때까지는 진짜로 저럴 줄은 몰랐겠지
- 프로야구에서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일본 센트럴리그 등지에서는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데 보통 쉬어가는 타선으로 인식되곤 한다. 물론 가끔씩 안타나 홈런(!)을 치는 투수도 있으며 심지어 타선이 삽질할 때 투수가
보다못해직접 점수를 내서 경기를 가져오는 일도 있다. 답답해서 내가 친다 문서로.
- 메이저리그 최소승 명예의 전당 헌액 투수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디지 딘은 혹사로 인해 30세의 나이에 선수 은퇴 후 해설자로 나서서, 그 당시 중계하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즈 투수들을 신나게 까내리기 시작했다. 본래 성질이 굉장히 괴팍한 선수였지만 까는 것이 너무 심해지자 참다못한 브라운즈 선수들이 "그럼 당신이 내려와서 던져라."라고 디지 딘에게 항의했고, 그 후 정말로(!) 디지 딘은 은퇴한 지 7년만에 37살의 나이로 4이닝 무실점에 안타까지 기록했다! 당연히 그 후 브라운즈 투수들은 아닥.
- 라쿠텐 이글스 GM 타치바나 요조는 2015 시즌 개막 전 전지훈련에 직접 참석했는데, 선수들과 20m 셔틀런 횟수 대결을 해서 1등을 했다.
- 1991~92년 롯데 자이언츠 단장이었던 송정규는 원래 야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선장의 삶을 살아왔지만 롯데 자이언츠의 문제점들을 보고 답답한 나머지 자비로 책을 써 냈다. 이후 이 책을 읽은 신준호 당시 롯데 구단주가 저자를 직접 스카웃해서 단장 자리에 앉혔다. 이후 팀 우승의 주역 중 하나였음에도 팀의 분위기를 해치는 부적절한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자진 사퇴하였다. 그리고 송정규 단장의 사퇴 이후로 롯데는 30년 넘도록 우승이 없다. #
- 신세계그룹 부회장 정용진은 같은 유통업을 하는 롯데그룹의 야구단 운영을 보고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할 자신이 있다” 하고 SK 와이번스를 인수하여 SSG 랜더스로 탈바꿈시켰다. 결과는 인수 2년만에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달성했다.[22] 다만 정용진 회장의 랜더스 창단 이유가 단지 이것에만 국한되지 않음은 감안해야 한다.
2.9. 기타
- 주요 논지는 아니었지만 힛갤 아이언맨 사건 당시 까이던 유저의 반응 중에 섞여있는 것이 '나처럼 못 만들면 조용히 해라' 식이었는데, 이후 그 유저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묻힌 뒤 진짜 만들어온 다른 사람 때문에 한 번 더 까였다.
-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이패션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는 자기 패션 광고 캠페인을 찍는 촬영진들이 워낙 자기 맘에 안 들게 찍어대자, 분통이 터져서 자기가 다 직접 찍어서 프로가 되었다고 한다. 고령일 때에도 샤넬 광고는 전부 자기가 찍었고, LVMH 회장 딸의 결혼식에서 사진사를 하기도.
- 배우 정동남의 경우는 매우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1969년 정동남의 동생이 한강에 빠졌는데 아무도 구조해주지 않고, 배를 가진 사람이 돈을 먼저 가져와야지만 구해준다는 이야기를 하기만 하는 바람에
너무했다동생이 익사하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로 인해 그는 구조사가 되어서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재난현장에 달려가서 헌신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 예수 - 예수가 남에게 자랑하려고 회당이나 큰 거리에서 하는 기도와 시간을 늘리기 위한 말을 반복하는 기도 등, 설교 중에 좋지 않은 기도의 예를 들고 나서 기도의 모범으로 직접 가르친 기도가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이다.
- 2012년 일본 효고현에 주부 야스마사 마유미(50세)씨는 재수생 아들 레이지로(19세)의 대학 입시를 위해
격려 차원에서 (아들의 수험서적으로) 같이 공부를 했는데 ...........
아들은 낙방하고 지방 사립대로 지원 , 본인은 당당히 동경대!!! 문과에 합격 했다
3. 가상 사례
- 웹툰 츄리닝 中: 국가대표 축구선수에게 악플을 다는 악플러에게, 팬들이 그렇게 잘하면 니가 해보라며 공격을 가한다. 그리고 다음컷에서 그 악플러는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제가 축구를 한 계기는……." 발롱도르를 수상한 것이다...
- 만화 바쿠만 中: 히라마루 카즈야라는 평범한 직장인이, 어느날 지하철에 버려진 점프를 읽어보곤 "이 정도는 나도 하겠네." 하고 그날로 사표를 내고 한달 뒤에 정기연재를 따내는데 성공, 대히트를 치게 된다.
- 아이돌 마스터: 아키즈키 리츠코. 학창시절, 아이돌들의 공연을 보고 한눈에 문제점을 파악하며 "내가 쟤네들 관리한다면 더 잘하게 만들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고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고 765 프로덕션에 입사하게 된다. 그런데 프로덕션의 인재부족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아이돌 후보생-프로듀서 양다리를 걸치게 된다. 그리곤 실제로 13명 중에 3명을 먼저 데뷔시켜버리는 능력을 뽐냈다.
특정게임에서는 내용상 흑역사가 되어서 문제
- 게임 Chroma Squad: 특촬물을 촬영하던 특덕후 스턴트맨 5명이 제멋대로인 감독의 등쌀을 견디다 못해 "이럴 바에야 우리가 스튜디오 하나 새로 차려서 찍자!"고 뛰쳐나와, 빈 창고에 스튜디오를 차려 인디 특촬물을 촬영한다는 것이 스토리의 발단이다.
- 영화 데이브에서 낸스 미국 부통령은 젊은 시절 구두수선공이었는데 맨날 정치에 대해서 투덜거리니, 어느날 부인이 '그렇게 투덜거리지 말고 네가 해봐라'하길래 점심시간에 가서 자치단체 의회 의원으로 입후보 등록하고는 당선되었다. 그것도 아주 적은 돈을 쓰고.
- 만화 하야테처럼! - 하루카제 치하루. 메이드 카페의 메이드를 보고서 자신이 한다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돈을 벌 겸 시작했다가 진짜로 잘하는 모습을 아이자와 사쿠야에게 보여져서 사쿠야의 메이드가 된다.
- 사이버펑크 2077 - 주디 알바레스는 어렸을 때 브레인댄스를 접하고서 자기가 직접 만들어도 이것보단 더 잘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브레인댄스 편집 기술을 공부해 편집자가 되었고, 나이트 시티 최고의 편집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 스물다섯 스물하나 - 사례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관련 대사 - 극중 펜싱선수 나희도는 식당에서 TV 속 야구선수들에게 '내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라는 말을 하는 훌리건들을 상대로 '경기 지고 가장 속상한 건 선수 본인들 아니겠어요?'라며 일침을 날린다. [23]
- SUPER JUNIOR-Happy의 노래 요리왕 - "차라리 내가 눈을 감고 만든 게 더 나을 것만 같아요"라는 가사가 있다. 1절에서 요리치인 여자친구의 형편없는 요리 실력에 질려 하는 말.
4. 실패 사례
- 폴리페서들 중 상당수는 이런 동기를 갖고 당차게 정계에 입문했다가 피를 보기도 한다.
- AS 로마의 팬인 마르코 니콜라이는 젠기즈 윈데르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고 그 골이라면 자신도 넣겠다며 비웃었는데 로마가 실제로 그를 초청해 3번의 기회를 주고 골을 넣어보라고 했다. 결과는 3번 모두 실패했으며, 로마는 그에게 또 그럴 것이냐고 물어봤고 니콜라이는 당연히 아니라고 말했다. #
- 정유재란 초기에 선조의 명대로 출격한 이순신이 날씨 등 여러 이유로 가토를 못 잡고 부산포 원정만 이기고 돌아오자, 원균이 자신이라면 잡았다고 장계를 올렸고, 이에 안 그래도 이순신 숙청할 기회를 엿보던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히고 싸우라 시켰다. 물론 그 결과는...
5. 반대 사례
[1] 여담으로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이분도 총기 개발자이다.[2] 5분 경부터 관련 내용이 나온다.[3] 비단 그가 만든 총기 자체 뿐만 아니라, 현대 총기류에 사용되는 기술적 기반 대부분이 브라우닝이 만든 기술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전세계의 모든 총기들은 브라우닝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장 총기 구동 방식 중 하나인 가스압 구동 방식 부터 브라우닝이 처음 만든 것이다. 권총에 슬라이드를 넣는 것도 브라우닝이 처음 고안했다. 브라우닝 이전 권총은 단발총, 리볼버 뿐이였고 브라우닝이 등장한 후에야 지금의 자동권총, 기관총들이 만들어진 것이다.[4] 단, 정식 더빙은 아니고 팬더빙이다. 처음은 일본판, 1분 8초부터 웨인 도스터의 공식 북미판, 2분 14초부터 길버트슨이 한 것.[5] 프레디 머큐리는 미대 나온 그래픽 디자인 전공자이다. 퀸의 앨범 디자인도 직접 한 게 많다. 잘 하는 게 당연하다.[6] 음반의 구성도가 너무 떨어져 재발매를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정규 앨범으로 취급하지도 않을 정도다.[7] 이와 비견되는 작곡가는 국내에선 ESTi와 ND Lee, Sweetune, 한태수 밖에 없다.[8] 정확히는 한국형 판타지가 아니라는 말 때문에 싸운 것은 아니다. 저것 때문에 발끈해서 쓴 거라면 이건...[9] 당시 필명은 씨디어스[10] 당시에는 도서대여점 시대가 끝나면서 판타지물이 위축되었고 거기에 당시의 현대 갑질물의 영향을 받아 배경만 현대인 양판소 수준의 기업물 작품이 많았다.[11] 참고로 산경은 회사에서 25년 동안 셀러리맨으로 근무했다.[12] 비슷한 사례로 시판작 중에 마음에 드는 게임이 하나도 없어서 게임을 만든 사람도 있다. 그리고 2차 창작으로 대박을 쳤다. 사실 동프는 게임성이 훌륭하다기보다는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대박을 친 경우에 가깝다.[13] 물론 유머로 한 말이고, 실제 상황은 친구가 해당 게임을 너무 못하자, 이 게임은 아주 쉽다며 플레이 시범을 보여준다. 그걸 본 친구도 너무 쉽게 하니까 '좀더 어려운 건 없나?' 하고 묻자 시드 마이어는 '나라면 좀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라고 답하고, 이에 그 친구가 '그럼 내가 자본 대줄 테니 만들어보자.' 해서 탄생한 게 마이크로프로즈.[14] 하도 자주 망가져서 참지 못한 그는 결국 직접 차를 뜯어봐서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페라리 차량의 클러치가 자신의 트랙터와 동일 제품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보고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해당 클러치에 대한 문제점을 알려주고자 엔초 페라리를 찾아갔다가 능욕을 당하고 분노해 스포츠카 산업에 뛰어들었다는 설도 있고, 본인 스스로 여기기에 은근 내부 구조가 단순해 이 정도면 나도 만들 수 있겠다라고 생각해 시작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전자가 정설이라고 여겨진다.[15] 오직 타도 페라리만을 고수했던 람보르기니의 정책이 오히려 (괜히 들여왔다가 돈만 날리게 되는) 생소한 신기술의 도입을 꺼리는 보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고, 결국 자신들도 페라리와 비슷한 결과를 낳게 된 셈이다.[16] 다만 폭스바겐의 설립은 포르셰 박사의 자발적인 의향이 아닌 나치당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해당 문서 참조.[17] 사실 1950년대 중반까지 민항기 분야에서는 더글라스에 밀렸으나, 1958년에 보잉이 최초의 제트 여객기로 보잉 707을 발매하며 더글라스를 역전하다 못해 1997년에 아예 더글라스를 합병하기에 이르렀다.[18] 다만 최근 보잉 737 MAX의 기체 결함 사태로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 군용기, 우주 분야의 경우 역시 KC-46이나 T-X 프로그램, CST-100, 그리고 SLS 로켓을 제외하면 실적이 그다지 좋지 않다.[19] 농담이 아니라 말 그대로 파산할 뻔했다. 이 당시 너무 쪼들렸던 나머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전용기조차도 타기 아까워서 사우스웨스트 항공을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20] 주식의 90%가 날아갔다.[21]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서야 뒤늦게 생겼다.[22] 사실 야구단 실력도 실력이지만 본업인 유통업에서 연결시키지 못하는 걸 보고 아쉬웠다고 한다. 그래서 랜더스는 시작과 동시에 노브랜드, 스타벅스 등을 랜더스 필드에 입점시키며 연계를 강화시켰다.[23] 이후 백이진에게 '그럼 왜 안 했어? 하셨어야지, 어??? 아이 그렇게 잘할 거 같으면 지금이라도 시작해야지!! 늦지 않았다고! 시작이 반이다!! 제발 좀 하고 말해라 좀!!'하면서 투덜대는 건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