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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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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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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문선명
(1954~2012)
2대
한학자
(2013~ )
주요 분파: 가정평화협회 / 세계평화통일성전 }}}}}}}}}}}}
<colbgcolor=#00566A><colcolor=#fff>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초대 총재
통일그룹 초대 회장
선문대학교 설립자
문선명
文鮮明 | Sun-myung Moon
<nopad> 파일:文鮮明.jpg
출생 1920년 2월 25일[1]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 덕성동 2221[2]
(現 평안북도 정주시 원봉리)[3]
사망 2012년 9월 3일[4] (향년 92세)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로 267-177
청심국제병원 8층 특별병실
묘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미사리로 324-275,
천정궁박물관 외부 본향원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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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66A><colcolor=#fff> 본관 남평 문씨(南平 文氏)[5][6][7][8]
부모 아버지 문경유, 어머니 김경계
형제자매 7남 6녀 중 차남(다섯째)
배우자 최선길 (이혼)
한학자 (재혼)
자녀 10남 7녀[9]
종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제호|{{{#fff 제호}}}]] 천일국진성덕황제억조창생만승군황태평성대만사형통
(天一國眞聖德皇帝億兆蒼生萬勝君皇太平聖代萬事亨通)[10]
신장 177cm(추정)[11]
학력 정주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 / 졸업)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학교#[12] (전기과 / 졸업)
}}}}}}}}}

1. 개요2. 생애3. 주요 활동4. 가족 관계
4.1. 비공식 자녀4.2. 공식 자녀
5. 학위 및 수상6. 여담7.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종교인, 사이비 교주, 기업인, 통일운동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창시자이자, 통일그룹과 평화자동차의 창업주이자 학교법인 선학학원·청심학원의 설립자, 리틀엔젤스예술단유니버설발레단의 창설자이자 워싱턴 타임즈세계일보의 창간자이다. 대외적 호칭은 총재이다.

박정희 정부코리아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에서 특히 더 유명세를 치렀다. 해외에서는《자칭 메시아이자 창교자인 종교 운동가》(뉴욕타임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방대한 종교 및 기업제국을 창건하다》(워싱턴포스트)#, 《1970년대 미국을 휩쓴, 가장 논란이 되는 종교지도자》(LA 타임즈), 《수천 쌍 합동결혼식의 주재자》(가디언), 《거대 기업제국의 창시자》(TIME) 등으로 표현되는 기사들이 나온다. 심지어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 한니발 극초반에 "이 인간에게 FBI가 건물을 싸게 임대했네 어쩌네"하는 구절이 나온다.

해외에서 문 목사(Rev. Moon)라고 하면 지금도 대부분 문선명을 가리킨다. 한국의 위상이 높지 않던 냉전 시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중 한 명이었고[13] 특히 1970년대 미국에선 워싱턴 모뉴먼트에 30만 명의 미국인들을 결집시키는 등 컬트적인 열풍이 불었다. Moon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14]

원래 이름은 문용명(文龍明)이었으나 문선명으로 개명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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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주요 활동

파일:문선명만수대2.jpg
파일:문선명만수대4.jpg
파일:문선명만수대3.jpg

마지막 사진은 윤기복 조평통 부위원장의 대답이다. 무단 방북 당시 만수대의사당에서 북한 최고위 간부들에게 설교하는 장면.
파일:/image/022/2012/09/03/20120903020037_0_1_20120903044802.jpg
김일성과의 만남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난 바 있었고, 1991년 11월 30일 문선명이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해 여동생을 상봉한 뒤 흥남 마전 주석공관에서 김일성과 금강산 개발투자 등을 협의하려고 회담을 열었다고 한다. 이때 문선명이 북한의 국회격인 만수대의사당에서 노동당 간부를 비롯한 여러 북한 요인들을 앞에 두고서 "남쪽에 심어놓은 고정 간첩 2만 명을 전부 자수하도록 지령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 주의로 그들의 사상을 바로잡아 민족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겠다.",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닌 남침[15]이다. 전 세계 앞에 남침을 사과하라.", "주체사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주의를 해야 한다."[16], "IAEA 핵협정에 조인하라.", "이산 가족 상봉시켜라."라는 발언을 그것도 탁자를 내리치며 거의 호통조로 연설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문선명을 친절히 안내해주던 김달현 부총리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고 다른 북한 간부들이 야유를 보내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았다고.

이에 대해 같이 갔던 박보희 세계일보 사장이 김일성과 만나는 건 물건너갔다고 체념하자 문선명은 도리어 "내가 이런 말 했다고 김일성이 안 만나겠다면 쩨쩨한 거지. 그래서 안 만나겠다면 만날 필요 없어."라고 대꾸했는데, 김일성은 김달현 부총리로부터 이 발언을 보고받자마자 껄껄 웃으며 "저런 배포를 가진 사람이라면 만나야지."라면서 문선명과 단독 회동을 했고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해졌다. 특히 이때 오찬도 겸했는데 김일성이 내놓은 건 언감자국수. 두 사람 다 고향이 평안도였는데[17] 언감자국수가 평안도 음식이라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잘 먹었다고.

그러나... 이러한 김일성과 북한의 관용적인 태도는 문선명이 1991년 당시 약 5조 원가량의 현금을 북한에 건네준 것 때문으로 미국 국방부 정보국 보고서에 의해 밝혀졌다. 출처 즉 문선명은 북한에 돈을 주면서 이런 저러한 사업을 제안한 것. 5조 가량의 현금이면 당시 북한의 1년 GDP의 30프로 가까운 엄청난 돈이다. 그런 상당한 자금을 주는 조건인데 약간의 기행은 그냥 웃어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간에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국가보안법을 무시하고 남측에서 유일하게 조문을 보낸 단체 역시 통일교였다. 당시 세계일보 회장 박보희를 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보내려 했는데 주중 북한 대사관이 조문을 안 받는다며 난색을 표하고 이를 문선명에게 보고하자 문선명은 "뭐라고? 조문을 안 받아? 내가 보내는 사람은 달라. 끝끝내 조문을 안 받는다고 하면 압록강헤엄쳐서라도 들어가 조문해!"라며 호통을 쳤다고 주장한다. 결국 주중 북한 대사가 김정일에게 이를 보고했고 김정일은 통일교 관계자들을 잘 모셔오라고 얘기해서 조문이 성사되었는데, 이 때문에 박보희는 나중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위기에 놓이면서 5년간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고. 아무튼 이래저래 북한과의 사이는 꽤 좋은 편이다. 젊었을 땐 철저히 반공, 승공을 주장했고 일본에서도 반공활동을 하면서 교세를 폈지만 말년에는 또 북한과 친하게 지낸 기묘한 이력인 것이다.

한편 시사IN에서는 1994년 북핵위기 때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것이나, 2000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것이나 노무현 대통령2007 남북정상회담을 열었을 때도 통일교가 훨씬 전부터 갖고 있던 대북 핫라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사를 내었다. 링크

하지만 김일성이 죽고나서부터 수모를 겪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생전에 금강산 관광사업을 문선명에게 주겠다고 호언장담했고 통일교는 북한에선 김일성의 교시가 곧 법이니 자신들이 금강산 사업을 하는 건 따놓은 당상이라고 자신만만해하며 금강산 관광을 유치하려고 하던 현대아산을 비웃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명박에게 현대에게 헛꿈 꾸라고 전달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이명박은 사회주의자들도 생각보다 실리에 밝은데 현대가 북에 사업을 잘 제시하면 사업권을 뺏길 수 있다고 경고했으나 통일교는 이명박보고 북알못 주제에 헛소리한다고 비웃었다. 그리고 금강산이 현대에게 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11년 김정일 사망 당시 북한에 조화를 보냈고, 2015년 8월 30일 김정은이 문선명의 3주기를 앞두고 유족들에게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참고로 김정은은 문선명의 사망 당시에도 조전을 보낸 바 있다. 2019년 지금까지도 북한 고위 관료나 통일교 고위 관료가 죽으면 서로서로 죽은 당일 바로 조문을 주고 받는다. 참고로 조문에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시아태평양평화통일위원회'라고 칭하며, 통일교는 '세계평화합'이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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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4일 펠레와 찍은 사진. 웃기게도 1994년 김일성이 곧 죽을 거라고 정확하게 예언했다며 월간조선이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던 무속인 심진송이 1995년 문선명이 오래 안 가 곧 죽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했는데 17년이나 걸렸다. 2003년 이라크 전쟁 후 '종교 화합'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평화대행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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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14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주청평수련원(현 HJ천주천보수련원)에서 열린 '평화의 왕' 추대식. 이날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으로 진정한 만왕의 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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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5일 '2005 피스컵코리아' 개막전에서 박근혜와. 이 사진이 후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진 이후 세계일보최순실 단독 인터뷰건과 엮여 통일교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었다.
파일:문선인삼.jpg
문선명의 90살 생일 때는 김정일이 생일선물로 90년근 산삼 등 선물을 보내주었다. 관련기사.
파일:문선김대.jpg
김대중 대통령이 통일교 행사에 축하 영상을 보냈다.[18]
파일:문선전두.jpg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문선명 장례식장에 축하화환을 보냈다. 사진 오른쪽. 통일교에서 죽음은 천국에 가는 축하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통일교인이 죽으면 장례식장에 반드시 축하화환을 걸어야 한다. '제12대 대통령 전두환'이라고 써 있다. 2012년 당시 국회의장이던 강창희도 껴있는 걸 볼 수 있다.
파일:문선이명.jpg
문선명 사망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장례식장에 축하화환이 아닌 근조화환을 보냈다. 옆의 알록달록한 축하화환과 대비된다.

4. 가족 관계

슬하에 10남 7녀를 두었다. 이 정도면 거의 전근대 군주나 가질 법한 자녀 수다. 그리고 가족관계를 보면 알겠지만 문선명 본인뿐만 아니라 문선명의 부친인 문경유도 자녀를 엄청나게 많이 낳아서 슬하 7남 6녀를 두었다. 형제자매들도 자녀를 꽤 많이들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문선명이 문경유의 자녀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문선명의 자녀들도 자식을 많이 낳았다. 5명 이상 자녀를 낳은 자식이 5명이다.

그래서 자녀 수는 17명, 손자녀 수는 모두 45명이다.[19]

전처 최선길과의 사이에서 아들이 1명 있고, 사생아 아들 2명이 있고 본처인 한학자와의 사이에서는 슬하 7남 7녀를 낳았다. 사실 전근대의 군주들도 본처와의 사이에서 그렇게 많이 낳는 경우는 드물다. 기껏해야 조지 3세(9남 6녀, 15명)나 마리아 테레지아(5남 11녀, 16명),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7남 7녀, 14명) 정도가 문선명과 비슷하거나 더 많이 낳았다. 한국사의 군주들 중에서도 문선명처럼 본처인 왕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10명 이상 낳은 군주는 드물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하다 못해 놀라울 지경이다. 참고로 역대 조선 군주 27명 중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수가 10명 이상인 군주는 단 3명뿐이다.[20]

그러나 정작 문선명은 자식 농사만큼은 기가 막히게 못 지었다. 후계자 감이 없던 건 아니고 후계자로 세웠던 자식들이 모두 중도이탈했다(...). 그리고 문선명 사후 몇갈래로 찢어졌다.

문선명은 40세인 1960년에 23세나 연하인 17세[21]였던 한학자와 결혼했다. 이는 완전히 키잡[22] 수준에 이 결혼은 재혼이었다. 전처 최선길과의 사이에는 아들 문성진 1명이 있다. 허나 문선명의 선교활동 몰입과 북한에 있을 때 탄압으로 인한 문선명의 로동수용소 수감이 원인이 되는 장기간의 별거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1953년에 전처의 가족들에게서 강제로 이혼을 당했다. 이는 사실 전처의 (기독교 목사인) 오빠의 강한 압력 때문. 근데 나중에 전처 및 전처 소생의 아들도 통일교 신자가 된다. 더구나 결혼 이후 한학자를 몇 년 동안 가혹한 환경에서 고생시키는 것을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파일:문선명대가족사진.jpg
문선명의 가족사진.
문선명과 한학자 뒤 윗줄에는 7남 문형진, 3남 문현진, 장남 문효진, 4남 문국진이 있다.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는 슬하에 총 7남 7녀가 있었다. 문선명의 아들 중 장남인 문효진은 마약과 폭행 등 사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보이면서 첫 부인 홍난숙과 이혼했는데, 홍난숙이 미국에서 문선명 가족과 통일교의 내부 문제를 고발하는 수기를 출간해 통일교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자연스레 후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문효진은 2008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문효진은 문제가 많은 쓰레기 인간이었으나 후처 문연아와 재혼한 후에는 갱생하고 많이 얌전해졌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집안 꼴은 그가 살아있을 때 그나마 평화로웠고 오히려 문효진 사후 가족 내 분란이 일어나면서 완전히 막장으로 치닫고 개판오분전이 되었다.


전처 홍난숙이 미국 방송과 인터뷰한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뺨치는 충공깽이다. 해당 인터뷰 방송은 미국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CBS의 '60 Minutes'이다. 우리나라의 추적 60분이 이 방송을 벤치마킹해서 제작되었다.[23]

차남 문흥진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24] 자식 중 가장 정신상태가 올곧았던지라 문선명은 부모님으로부터 효자 소리 들을 정도로 자녀들 중에서 사이가 가장 좋았던 장남 문효진 다음으로 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껴했었다.

이후 이미 세계재단 리더로 사업경영 수완이 좋고 처가가 통일교 재단 내에서 위치가 높았던 3남인 문현진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문현진은 문선명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며, 통일교라는 종교 자체를 부정하여 사실상 파문당했다. 이제 사이즈 불릴 만큼 불렸으니 종교적 아이덴티티로 헛짓거리 하지 말고 재벌로 정체성을 굳히고 나가자고 하다가 불경죄를 쳐맞은 셈이다.[25] 문현진은 파문당한 뒤 통일교 재산을 최대한 많이 싸들고 통일교를 박차고 나갔다.[26] 당연히 우주황제 맥콜킹 참아버지 문선명은 대노했고 한다. 이 일은 "가족의 가치"를 교리상에서 강조하는 통일교에 꽤나 상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 뒤로 통일교는 문현진에게 파크원을 포함한 UCI재단의 반환 소송을 걸었는데, 3심까지 간 소송에서 통일교 측이 패소하여 결국 문현진 쪽 소유가 되었다.

결국 통일교는 7남인 문형진을 종교 담당 후계자로, 4남 문국진을 기업 담당 후계자로 각각 삼았다.# 그리고 문국진은 문현진의 UCI재단과 여의도의 2조짜리 땅뙈기를 놓고 법정공방을 벌이다 패소하여 자리에서 짤렸다.#

파일:external/www.newscj.com/146990_110373_268.jpg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세계회장을 역임한 7남 문형진.

파일:external/e7986ab936e671e11e5acc455a0a1a24d9bf1e2a931695f92b2b734edf8c1b29.jpg
2015년도 남동생 문형진 축출 후 2019년까지 세계회장을 역임한 5녀 문선진.

2008년 문선명의 7남인 문형진(1979. 09. 26. ~ )이 세계회장에 취임하였다. 하버드 대학교 비교종교학 석사 출신이다. 명목상 세계회장이었지만 실권은 어머니 한학자가 쥐고 있었으며 문형진 본인은 얼굴마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문형진이 불교를 좋아해서 기독교 계열의 신학대학을 다닐 시절에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기독교 교리였음에도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돌아다녔다 한다. 장로교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스님처럼 하고 다녔다는 얘기다. 위의 만왕의왕 즉위식 사진에서 삭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헌데 2015년 한학자에 의해 세계회장 직책에서 쫓겨났다. 문형진이 한학자의 기존 통일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파문하겠다고 선포했는데 당연하게도 기존 통일교의 교세가 훨씬 막강했던지라 되려 문형진이 통일교 세계회장에서 짤리게 된 것이다. 후임으로는 문형진의 누나이자 문선명의 5녀인 문선진이 취임했다.

그리고 그 문형진은 통일교 세계회장에서 보직해임 당하자 자신과 인연이 있는 통일교 원로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생츄어리 교회를 차렸는데 이 종교도 골때리는데 교리부터가 "마귀 사탄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총기로 중무장해야 한다" 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전원 총기를 소지하고 있으며 문제는 실제로도 군사훈련을 한다는 점이다. 아예 자기 신도들로 사설부대를 만들어 놓았다.# 이에 대해 문형진의 어머니인 한학자는 "저 후레자식이 아버지가 남긴 명예를 먹칠하고 있다"면서 아들인 문형진을 맹비난하고 있다. 그러자 이에 발끈한 문형진은 이미 사망한 아버지와 자신과 적대관계인 어머니를 이혼시키고 뜬금없이 '강현실'이라는 다른 여성과 강제 영혼결혼을 시키는가 하면 문선명 동상을 만들어서 퍼레이드를 시키는 기행을 보이며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

요약하자면, 아이러니하게도 문선명의 아들들은 모두 죽거나 퇴출당했기에 통일교 입장에서는 문선명의 장남 문효진과 차남 문흥진의 죽음이 뼈아팠다. 문흥진이 살아있었다면 문흥진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했을 것이기 때문이었고 문효진이 살아있었다면 왕자의 난은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상당히 늦게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4.1. 비공식 자녀

파일:성진희진경진님.png
왼쪽 위부터
최선길, 김명희, 최순화
문성진, 문희진[27], 박사무엘(문경진)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슬하 자녀
문성진 1946년 ~ 최선길(1925년 ~ 2008년) 김동숙 1남 2녀
문희진 1955년 ~ 1969년 김명희(1930년 ~ 2020년) 이혜신(사후 영혼결혼) 요절해서 자녀 없음
박사무엘 1966년 ~ 최순화(1936년 ~) 불명 불명

최선길(崔先吉, 1925년 음력 3월 21일 ~ 2008년 양력 11월 16일 / 1944년 결혼, 1957년 이혼)과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최선길은 해주 최씨로,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觀舟面) 관삽동(觀揷洞)의 3대째 개신교를 독실하게 믿는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그녀의 아버지, 오빠도 개신교 목사였다. 문선명 자서전에 따르면 문선명은 1942년 초, 기도 중 결혼할 때가 되었음을 계시받고, 중매를 잘 서는 이모에게 중매를 요청하였다.
계속 기도에 정진하던 중, 결혼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한 이상 내 인생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에 의한 것들입니다. 기도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되면 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중매를 잘 서는 이모에게 다리를 놓아달라 하여 정주의 이름 난 기독교 집안의 딸인 최선길崔先吉과 선을 보았습니다.
ー 문선명 자서전『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제2장 - 8, 2009년, 김영사

그리하여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43년 10월에 귀국하여 12월에 맞선을 보고 약혼을 했다. 그리고 1944년 5월 4일 결혼을 했다. 결혼 당시 문선명은 24세, 최선길은 19세였다. 신혼집은 문선명이 전에 하숙을 하던 서울 흑석동의 이기봉의 하숙집이었다.

이후 문선명은 아내와 생후 2개월 된 아들을 두고 1946년 6월 월북을 한다. 이후 6.25전쟁이 터지고 피란 내려온 문선명은 최선길과 아들을 부산에서 재회한다. 최선길은 문선명에게 "그놈의 교회 관두고 지금부터라도 같이 단란하게 살자. 교회야, 가정이야?" 같은 주장을 했다. 그러나 문선명한테는 교회가 우선이었고, 부산에서도 매일같이 전도생활을 했다. 최선길은 이에 우리 이혼하자고 했고, 문선명은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최선길은 문선명의 교회에 찾아가서 자주 이혼 도장을 찍어달라고 깽판을 피웠다고 한다. 최선길이 이렇게까지 한 건 기독교인인 오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설상가상 문선명이 김명희라는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고 일본에 보냈다는 게 알려졌고, 문선명은 할 수 없이 1957년 1월 8일 협의이혼을 했다.

최선길은 이후 통일교와 연을 끊었으나, 이후 최선길, 최선길 오빠를 비롯한 최씨 일가 전체가 통일교로 개종하였다. 참고로 최선길은 1999년 '3억 6,000만쌍 제 1차 합동결혼식'에서 구약시대의 예언자 사무엘과 영혼결혼했다. 문선명 왈 최선길이 문선명을 반대하고 이혼만 안 했다면 최선길이 참어머니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선집 484-129) 최선길이 문선명을 반대한 건 결혼하고 몇 년 후부터이므로, 1944년의 결혼식은 참어머니가 되는 '성혼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최선길이 참어머니가 되는 성혼식은 이전부터 1960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김명희(金明熙, 1930년 음력 10월 23일 ~ 2020년 양력 4월 1일 / 결혼 안 함)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김명희는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1930년 음력 10월 23일에 태어났으며, 언더우드계 장로교 선교사의 양딸이었다. 1947년 남하 후 1952년 연세대학교에 입학, 재학 중 숙모 양윤신(梁允信)의 권유로 1953년 9월 서울에서 문선명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부산 영도에서 개최됐던 통일교 수련회에 참가하고, 1954년 1월 7일 통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954년 연세대학교 3학년이던 김명희와 문선명이 관계를 가져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한다. 현 부인 한학자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 임신했다는 걸 생각하면... 김명희는 이후 연세대를 휴학하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31]의 세대문교회 등지에서 전도생활을 했다.

문선명 왈 김명희는 신약시대 마리아의 입장으로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듯이, 김명희도 아들 문희진과 일본으로 가서 일본을 개척하고 승리해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문선명과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선집 037권-055쪽) 문선명은 김명희에게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오면 결혼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당시 임신 8개월이던 김명희는 문선명의 명으로 1955년 6월 24일 연세대 동창생이기도 한 오승택(吳昇澤)[32]이라는 보조인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출발 전 김명희는 문선명과 함께 샐비어 꽃이 피어있는 공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명희는 밀항에 성공하여 나가사키현 와카마쓰(若松)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도쿄로 향했다. 그녀는 도쿄도 메구로구 오오카야마(大岡山)의 사쿠라소(さくら荘)에서 8월 17일 문희진을[33] 낳았다. 김명희는[34] 아직 수교도 되지 않은 나라의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의사도 부르지 못하고 혼자 거처에서 문희진을 낳았다. 몇 개월 후 김명희는 문선명에게 선교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문선명은 최봉춘이라는[35] 사람을 일본에 선교사로 밀항시켰다. 이 최봉춘이 바로 통일교 최초의 정식 해외 선교사이다. 그러나 최초로 통일교 선교를 위해 해외로 간 사람은 바로 김명희이다. 그러나 최봉춘이 김명희의 요청으로 파견되었다는 것을 아는 신도는 드물다. 최봉춘은 1958년 7월부터 지속적으로 밀항을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김명희와 그의 아들은 1958년 7~8월경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을 들켜 나가사키의 오무라(大村) 입국자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시모노세키항을 거쳐 부산 다대포항을 통해 1959년 4월 1일 한국에 강제로 돌려보내졌다. 또한 그러던 중 최봉춘은 밀항에 성공하여 1959년 4월 하순 일본에 도착한다. 결국 그렇게 둘은 만나지 못했다. 문선명이 준 사명에 실패한 김명희는 문선명과 결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최봉춘은 어찌 됐던 선교를 하러 왔으니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1959년 10월 2일 최봉춘은 도쿄 신주쿠에서 일본 통일교를 발족했다. 김명희는 이후로 독신생활을 했으며, 1999년 '3억6천만쌍 제 1차 합동결혼식' 때에 소크라테스영혼결혼식을 하였다. 참고로 문선명의 결혼, 즉 성혼식은 전부터 문선명이 40세가 되는 1960년으로 예정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명희와 결혼할 수 없게 되자 문선명은 1년 남짓한 시간 안에 신붓감을 새로 찾아야 했다. 그것이 한학자이다.

최순화(崔淳華,[37] Annie Choi, 1936년 ~ / 결혼 안 함)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 최순화는 양주 최씨로, 최성모(崔聖模)·이득삼(李得三) 슬하의 2남 2녀 중 차녀다. 최성모는 문선명의 전처 '최선길'의 삼촌이자[38] 신동아그룹의 창업주이다. 그녀의 언니는 장녀 최순실(崔淳實)이며[39], 두 명의 남동생으로 장남 최순영(崔淳永)[40]과 차남 최순광(崔淳光)이 있다.[41] 1955년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1학년이던 최순화는 통일교인이란 이유로 이화여대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다른 대학교로 편입 및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42] 박사무엘 왈 문선명은 1964년에 서울 청파동 교회에서 최순화와 비공개 결혼식을 했으며, 본래 1967년 즈음 최순화와 성혼식을 하여 최순화를 참어머니로 세울 계획이었다고 한다. 1965년 당시 미국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 중이던 최순화는 워싱턴 D.C에서 문선명과 성관계를 가져 박사무엘을 임신했다. 최순화는 비록 임신까지 했으나 한학자에 대한 동정심이 들어 "이미 자식을 넷이나 낳은 한학자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냐. 한학자의 가능성을 믿어달라."며 스스로 '참어머니' 자리에 오르길 거부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박사무엘이 문선명의 혼외자식이란 것은 사실로 보인다.###

4.2. 공식 자녀

1960년 결혼한 한학자(韓鶴子, 1943년 2월 10일 ~)와의 사이에서 낳은 7남 7녀
- 청주 한씨로, 한승운(韓承運)과 홍순애(洪順愛)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3곳의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으며[43] 선정중학교를 다니고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있던 '성요셉간호학교'[44]에 재학 중 문선명과 결혼했다.

1959년 4월 1일 신부 후보였던 김명희가 일본에서의 사명 실패로 한국에 돌아오자, 문선명은 새로운 신부 후보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최 모씨와 윤정혜(尹貞惠)[45]를 신부 후보로 세웠다. 이 사실은 김영휘, 유정옥 등 원로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한 바이다.

윤정혜는 1961년 2월 22일 언니 윤정은과 같이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졸업식에 문선명이 와 줬다. 문선명은 그녀의 왼팔에 수술 흉터가 있는 점이 신부가 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같은 해 7월 20일부터 8월 31일까지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의 야목교회에서, 문선명은 윤정혜를 위해《제2회 전국 전도사수련회》를 열었다. 이후 윤정혜가 유력한 신부 후보자 한 명으로 좁혀졌다.(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2권 1-6-1, p.116)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문선명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못했다. 이는 즉 윤정혜가 문선명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책임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하여 윤정혜를 대체할 신부 후보자를 찾았으니, 그게 현 부인 한학자이다. 1960년 2월 26일 문선명은 한학자와 만나 9시간 동안 신부의 자질과 소양이 있는지 여러 질문으로 테스트했다. 이후 한학자에게 "그대에게 훌륭한 선생을 한 분 소개해 주겠다."라며 최원복(崔元福)에게 신부수업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한학자는 2월 26일부터 3월 27일까지 신부수업을 받았다. 이후 문선명은 한학자를 신부로 최종 확정했다. 그리고 3월 27일(음력 3월 1일) 가약식(약혼식)과 4월 11일(음력 3월 16일) 성혼식(결혼식)을 치러 드디어 문선명의 아내가 된 것이다.

파일:한학자문선명최원복.jpg
왼쪽부터 한학자, 문선명, 최원복이다. 문선명 왈 한학자는 아벨적인 어머니, 최원복은 가인적인 어머니라고 한다. 문선명은 최원복에게 '신애충모(信愛忠母)님'이라는 경칭을 하사했다. 최원복은 계속 독신으로 살다가 1999년 석가모니와 영혼 결혼을 했다. 문선명은 최원복이 죽었을 때도 "어머니가 승화했다."라고 했다.
이름 생몰년 배우자 슬하 자녀 기타
1녀 문예진 1961년 ~ 홍진휘(이혼) 3남 1녀 손주 있음
1남 문효진 1962년 ~ 2008년 홍난숙(이혼)
문연아(재혼)
5남 6녀 심장마비 사망
손주 있음
2녀 문혜진 1964년 ~ 1964년 생후 8일째 사망
라영신(사후 영혼결혼)
없음
3녀 문인진 1965년 ~ 박진성(이혼)
벤 로렌첸(재혼)
5남 1녀
2남 문흥진 1966년 ~ 1984년 요절해서 미혼
문훈숙(사후 영혼결혼)
없음[46] 사고사
4녀 문은진 1967년 ~ 박진헌(이혼)[47]
로드니 젠킨스(재혼)
2녀
3남 문현진 1969년 ~ 곽전숙 4남 5녀 손주 있음
4남 문국진 1970년 ~ 유순주(이혼)
박지예(재혼)
5남 3녀 손주 있음
5남 문권진 1975년 ~ 전화연 없음
5녀 문선진 1976년 ~ 박인섭 없음
6남 문영진 1978년 ~ 1999년 유화정(이혼)
진지예(사후 영혼결혼)
1녀 추락사
7남 문형진 1979년 ~ 이연아 4남 1녀 손자 4명, 손녀 5명
6녀 문연진 1981년 ~ 얀 도브 자녀여부 불명
7녀 문정진 1982년 ~[48] 조셉 몰리카 1녀

자녀 중 6명이 이혼, 1명이 간통, 1명이 마약 중독, 1명이 자살(추정), 4명이 어머니 한학자와 완전히 연을 끊었고 누구는 아예 증오하는 수준이다. 또한 3명이 통일교인이 아닌 상대와 연애 결혼했으며, 후계자는 0명으로 없다.

이와 같이 참된 가정을 이루라는 교리를 교주 가정부터가 실천하지 못한 점은 통일교의 주요 비판점이자 많은 신도들이 떠난 이유다. 사실 종교인부터가 교리를 안 지키고 타락하는 문제는 다른 종교들도 갖고 있는 문제이긴 하다.

장녀 문예진과 한학자는 나이 차이가 17년인데 문예진과 6남인 문영진은 18년 차이, 그리고 막내인 문정진과는 22년 차이가 난다.[74]

1990년대 중반 기준으로 문선명 부부가 나중에 낳은 자녀일수록 미국에서 쭉 생활한 경우가 많다보니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고, 문선명은 영어를 잘 못해[75] 아버지와 자식간에 의사소통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76]

6녀 문연진(영어 이름 Kat Moon)은 2006년 미국 서바이벌 프로그램 Survival of the Richest에 출연하여 스스로 문 총재의 딸이라며 재산이 수십 억 달러라고 밝혔다.[77] 다소 냉소적인 표정의 그는 첫 회에서 탈락했다. 이 프로그램은 너무 돈이 많아 한 번도 일해 본 적이 없는 일곱 명의 재벌 2세들과 가난한 청년 노동자들 일곱 명이 한 지붕 아래서 합숙하며 한 팀을 이뤄 힘든 일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우승 상금은 20만 달러이다. 그런데도 나오는 건 이유가 있다. 재벌 2세는 자기 명성을 높이러, 청년 노동자들은 상금을 받으러 나오는 것이다. 명성이란 돈 주고 사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81년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뉴욕대에서 신문방송학과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려는 포부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리드 온'이라는 영화에서 다이앤 역으로 출연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IMDB에서도 그런 영화는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 기사, 가정연합 홈페이지

5. 학위 및 수상

파일:문선명브라질상.jpg

6. 여담

7. 관련 문서


[1] 음력 1월 6일[2] 흔히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행정구역이 바뀐 1949년 ~ 1952년 시기의 주소이다. 태어난 기준으로는 덕달면 덕성동이다.[3]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德達面) 이리(二里)가 덕달면 덕성동(德星洞)으로 개편 → 1939년 달면, 이면(伊彦面), 아이포면(阿耳浦面)이 덕언면(德彦面)으로 합병 → 1945년 광복 직후 신설된 덕흥리(德興里)에 덕성동 지역이 포함 → 1949년 덕흥리가 덕산리(德山里)와 상사리(上思里)로 분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으로 원봉리(圓峰里)가 덕산리, 상사리, 강서리(江西里)를 흡수, 이 폐지되어 정주군 원봉리로 개편 → 1994년 정주시로 승격[4] 음력 7월 17일. 통일교 교리 상 문선명의 기일은 음력으로 챙긴다.[5] 기세조(起世祖) 문익(文翼)으로부터 49세손.[6] 문익점의 3남 의안공(毅安公) 문중실(文中實)로부터 24세손.[7] 의안공파, 이곡-참의공파 33세.[8] 증조부 대는 정(禎)○, 조부 대는 ○국(國), 아버지 대는 경(慶)○, 문선명 대는 용(龍)○, 문선명 자녀 대는 ○진(進), 손주 대는 신(信)○ 자 돌림이다. 희한한 건 친손주뿐만 아니라 외손주까지도 신(信)자 돌림을 쓴다. 문선명의 원래 이름은 돌림자를 따라 문용명이었으나 이후 개명을 했다.[9] 최선길과의 1남, 김명희와의 1남, 최순화와의 1남, 한학자와의 7남 7녀.[10] 문선명이 2006년 6월 16일에 스스로 정한 제호(帝號)이다.# 문선명 에는 만승군황까지만 적혔다.# (자칭) 천주평화통일왕국 황제로서의 칭호이다.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아서 그렇지 교리 상 문선명은 전 우주와 사후세계까지 다스리는 황제다.[11] 문선명의 신장은 밝혀진 바 없으나, 유명인들과 찍은 사진들을 볼 때 키가 175cm인 고르바초프보다 크고, 179cm인 아이젠하워보다 작으므로 177cm 정도로 추정된다. 김일성과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보면 문선명이 더 크다.[12] 공업고등학교가 아니라 지금의 전문대학과 비슷한 준학사 과정이다.[13]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문선명 관련 내용의 댓글에는 "옛날에 미국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문선명 아냐고 물어봤었다."라는 썰이 꽤 있다.[14] 문선명 때문에 Moonie, Moonies, Moonism 같은 단어들이 옥스포드 등 영영사전에 정식 등재되었다. 이 세 단어는 통일교 내에서 만든 게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 통일교를 조롱하는 멸칭으로 만든 단어가 굳어진 것이다. 여담 항목에 나오지만, 이 때문에 반기, 재인(구글 번역이 문재인 관련 기사를 번역할 때도 Mr. Moon을 자주 문선명으로 번역한다는 2017년 기사도 나왔다. 실제로도 반기문을 문반기로 잘못 알아듣기도 한다고.) 등 이름에 문 자가 들어가는 한국인들은 문선명 친척이냐는 오해를 꽤 받았다. 이 때문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반기문은 통일교 관련 단체의 위원장급 직책을 맡은 적도 있고 자주 연설도 하며 관계를 지속해 나가고 있다.[15] 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함[16]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란의 호메이니도 고르바초프에게 공산주의 무신론을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라고 훈계했다.[17]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문선명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출신이다.[18] 아마도 햇볕정책 추진을 위한 대북접촉 과정에서 통일교의 도움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된 걸로 보인다.[19] 사생아 아들이 낳은 손자녀들까지 포함하면 48명. 6녀 문연진과 사생아 박사무엘의 자녀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기에 이들이 자녀가 있다면 손자녀가 더 늘어난다.[20] 태종(원경왕후 소생 8남 4녀), 세종(소헌왕후 소생 8남 2녀), 효종(인선왕후 소생 3남 7녀).[21] 국내법상 혼인은 만 18세 이상만 가능하다. 하지만 꽤 최근까지(2006년) 여자는 16세부터 결혼이 가능했다. 남녀차별이라 하여 개정된 것.[22] 실제 자서전을 보면 완벽한 키잡이다.[23] 위 영상 도입부에 나오는 문효진의 욕설 영상이 사용된 소리매드존재한다.[24] 뒤에 타고 있던 절친 2명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했다.[25] 통일교가 위세를 불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종교적 아이덴티티였던 만큼 이를 부정하자는 것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기 때문에 그가 축출당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26] 파크원 시행사 Y22프로젝트금융투자가 본인이 이사장인 UCI재단 소유인지라 파크원 사업권과 UCI재단을 들고 통일교를 나와 따로 살림을 차렸다.[27] 아버지 문선명(좌), 문희진(우)[28] 36가정 김원필(金元弼)-정달옥(鄭達玉) 가정의 딸.[29] 1,800가정 구니토키 아키히코(国時昭彦) 가정의 딸.[30] 오오츠카 가츠미(大塚克己) 가정의 아들.[31] 현 중구 신당동[32] 일본에 가기 전 성화청년회(통일교 청년조직) 사업부장을 맡고 있었던 통일교 신자이다. 안창성(安昌成)(36가정) 당시 성화청년회 회장의 처남이기도 하다. 1970년에 박상래(朴商來)의 권유로 통일교를 떠나, 김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의 서울 성북구 정릉3동의 '청수교회'(淸水敎會)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승택은 1975년 청수교회를 떠났다. 박상래 또한 1982년 8월 17일 탈퇴했다. 박상래도 본래 1954년 통일교에 입교했었다가 1957년 이스라엘수도원으로 개종했던 것이다.[33] 일본이름은 나카무라 다케노부(中村竹信)[34] 일본이름은 나카무라 요시에(中村好江)[35] 일본 이름은 니시카와 마사루(西川勝)[36] 72가정 이제희(李濟熙)-김인애(金仁愛) 가정의 딸[37] 崔淳花, 崔順華 등으로 표기한 블로그 글도 있으나, 집안 돌림자가 淳 자이기에 崔淳華가 옳은 것으로 보인다.[38] 즉 최순화는 최선길의 사촌동생이다. 출처: 『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1』p.410. 통일교 책에는 이렇게 나오지만, 최선길은 해주 최씨이고, 최성모는 양주 최씨이므로 사실관계는 불명이다.[39] 연세대학교 졸업. 최순실게이트의 최순실이 아닌 동명이인.[40]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은 신동아그룹대한생명의 前 총수이자 63빌딩을 건설한 기업가이다.[41] 前 신동아화재 부회장[42] 이화여대에서 퇴학당한 여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최순화가 있다.[43] 서울 용산구 효창동 서울효창초등학교 → 제주 서귀포시 효돈동 효돈초등학교 → 강원도 춘천시 약사동 봉의초등학교(鳳儀)[44] 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의 전신[45] 지금은 탈퇴한 전 통일교 원로 36가정 곽정환(郭錠煥)의 부인 윤정은(尹貞恩)의 여동생이다.[46] 문흥진 사망 후 문훈숙이 2명의 자녀를 입양함.[47] 문은진은 아래의 홍난숙과 비슷하게 남편으로부터의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했으며, 이로 인해 부모인 문선명과 한학자로부터 의절당했다가 나중에 화해했다.[48] 당장 친남매 중 맏이인 큰언니 문예진과도 21살이나 차이가 나고, 이복 남매들까지 더하면 이복남매들 중 맏이 문성진과 36살이나 차이가 난다. 문성진의 자식들(문정진의 조카들)보다도 나이가 어리다.[49] 36가정 홍성표(洪性杓)-유길자(柳吉子) 가정의 아들[50] 1,800가정인 한국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독일에서 가정연합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51] 36가정 홍성표(洪性杓)-유길자(柳吉子) 가정의 딸.[52] 777가정 최윤기-김순희 가정의 딸. 본래 최연아였으나 성을 바꿈.[53] 이 기획사가 MCS엔터테인먼트로 원래는 문효진 1인 기획사로 시작했다가 점차 규모를 키워 영화 올드보이, 울학교 이티 등 제작에 투자를 하고 가수 차진영, 혼성그룹 거북이 등의 프로듀싱(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할 때에는 스티브 문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다.)을 맡으면서 중견 기획사로 성장하였다.[54] 그 당시 경복초등학교는 타 재단 소속이었다가 1978년에 가정연합 계열인 학교법인 선화학원이 인수하여 지금까지 학교법인 선학학원 소속으로 운영 중이다.[본파후계자] 사실상 통일교 본파의 후계자이다.[56] 3남, 4남, 7남은 원조 가정연합에 반기를 들어 따로 분파를 만들었으며, 그 외 자녀들은 일찍 죽었거나 후계에 관심이 없다. 5녀 문선진이 가정연합 세계회장을 맡은 적이 있으나, 현재 물러난 상태이며 자녀도 없어 후계를 잇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 외 자녀들도 후계에 관심 없이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장남 문효진이 음악인의 길을 걷고 마약 중독에 가정폭력으로 이혼까지 하며 가정연합에 말썽을 부린 사람이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원조 가정연합에 반기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문효진의 자녀들이 한학자 사후에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내용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역사 참고.[57] 문지우라는 이름으로 활동.[본파후계자] 사실상 통일교 본파의 후계자이다.[59] 문유메라는 이름으로 활동. 이리야마 세이키(入山聖基) 가정의 딸. 이리야마 세이키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일본본부 전도교육부장임.[60] 나씨가 아닌 라씨다. 72가정 라임열(羅林烈)-김정탄 가정의 아들.[61] 36가정 박보희(朴普熙)-윤기숙(尹基淑) 가정의 아들.[62] 36가정 박보희(朴普熙)-윤기숙(尹基淑) 가정의 딸. 박훈숙이었으나 성을 바꿈.[63] 보통 영혼결혼이라 하면 양쪽 다 사망한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문훈숙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죽은 문흥진과 결혼했고 현재도 살아있다.[64] 놀랍게도 문신월의 큰아버지 문효진도 메탈 가수로 활동하였고 지금까지도 한국 메탈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다![65] 36가정 박종구(朴鐘九)-최금순(崔金順) 가정의 아들[66] 36가정 곽정환(郭錠煥)-윤정은(尹貞恩) 가정의 딸[67] 430가정 유정옥(劉正玉)-조명원(趙明元) 가정의 딸[68] 430가정 박정현(朴正鉉)-양반임 가정의 딸. 2003년 미스코리아 선(善)에 당선되었던 인물이다.[69] 1,800가정 전인승(全寅昇)-김옥기(金玉基) 가정의 딸.[70] 430가정 박중현(朴重眩)-최현숙(崔賢淑)가정의 아들[71]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간혹 보이는 유화연(柳和延)이라는 자료는 틀린 정보이다. 1800가정 유종소-이상난 가정의 딸[72] 1,800가정 진성배(秦聖培)-김성임 가정의 딸. 진성배는 현 효정학술원장 겸 통일사상연구원장.[73] 777가정 이승대-주은정 가정의 딸[74] 특히 문정진은 문선명의 나이 61세에 얻었다. 사실 남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임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비슷한 나이에 얻은 유퉁, 이창하만 봐도 그렇다.[75] 실제로 영어로 연설하는 영상으로 보아 아예 못하지는 않은 듯하며 일본어 억양의 영어를 구사해서 그런지 영어를 못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76] 이와 정반대로 장남 문효진의 후처 문연아 소생 자녀들은 나중에 태어난 자녀일수록 한국에서 쭉 생활한 경우가 많다보니 오히려 한국어가 영어보다 더 잘해서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77] 하지만 실제 수십 억 달러의 재력가라면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이기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2018년 현재 10억 달러(1조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인이 30명이다. 또한 실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라면 경제지에서도 이름이 올랐을 것이며 포브스나 블룸버그 같은 출판사에서 뽑는 빌리어네어 순위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자기 아버지인 문선명의 재산을 자기 재산이라고 말했다면 일단 말은 된다. 문선명의 재산은 실제로 수십 억 달러 수준은 된다. 그래서 오 인천 같은 짓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78] '국립라플라타대학'과는 다른 대학이다.[79] 실제로 존재했던 대학원인지는 모르겠으나, 통일교 측은 문선명이 이 대학원으로부터 명예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존재했다 하더라도 전혀 유명하지 않은 대학원이다. 문선명은 이 밖에도 존재 유무가 불분명한 대학에서 받은 학위가 몇몇 있다.[80] 문선명이 설립한 대학교이다. 이 문서에 나열된 학위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국내에서 문선명에게 학위를 준 대학교는 문선명이 세운 선문대학교 말고는 없다.[81] 실제로 선문대는 통일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대학교이다. 그리고 문선명이 설립했다.[82] 실제 반기문은 통일교 산하 단체 씽크탱크2020의 회장을 맡고, 통일교 주최 선학평화상 특별상도 받고, 자주 통일교 행사에 참석해 왔다. 문선명도 생전에 반기문에 대하여 문씨 드립을 쳤다.[83] 문재인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이다. 그리고 문씨라도 Mun으로 쓰면 전혀 문제없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은 Mun으로 쓰지 않는다.[84] 다만 거꾸로 국내에서도 이런 케이스는 있다. '이토'성을 가진 일본인이 이토 히로부미 후손 아니냐고 놀림을 받는다든지.[85] 스마일게이트 창업자. 재산이[86] 대한민국 3대 발레단 중 하나. 나머지 둘은 대한민국국립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87] 대한민국 3대 예고 중 하나. 나머지 둘은 서울예술고등학교, 계원예술고등학교.[88]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괴작을 넘어 할리우드 진출한 한국 영화의 수치다. 로런스 올리비에를 구해줬다는 이 항목의 서술 역시 오! 인천!의 맥락을 안다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내용[89] 덕분에 구단주로의 문선명을 까는 축구팬은 거의 없다. 아쉬운 게 있다면 최고의 팀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마케팅 면에서는 소홀해 팬층을 확장하지 못했다는 정도를 들 수 있다.[90] 1995년, 솅겐 협정 가입국이라면 모두 문선명을 입국금지하기로 결의함.## 그래서 이후 솅겐 협정에 가입하는 나라들은 모두 문선명을 입국금지했었다. 그 중 네덜란드는 2005년에 문선명의 입국을 허용. 2007년 솅겐 협정 가입국들이 문선명의 입국금지를 해제한 것은 문선명을 좋게 봐서가 아니라, 통일교가 입국금지 조치에 대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걸어 승소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제한 것이다. 위에 서술한 네덜란드를 제외하고 위의 14개국이 문선명의 입국을 금지했었음.[91] 여담이지만 아베 신조 총리가 출생지인 도쿄가 아닌 본적지인 야마구치현에 표시되어 있다. 경복궁에서 태어난 사람은 세조(조선)만 나온다.[92] 통일교 용어로 죽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