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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9 05:06:17

오!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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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e7177><colcolor=#ffffff> 오! 인천 (1981)
Inchon
파일:inchon film.jpg
장르 전쟁, 드라마
감독 테렌스 영[1]
제작 문선명
사카구치 마츠사부로
시드니 베커맨
이시이 미츠하리
각본 레이드 커니그
로빈 무어
폴 세비지
음악 제리 골드스미스
출연 로렌스 올리비에, 재클린 비셋
촬영 브루스 서티스
편집 존 W.홈스
달라스 푸엣
마이클 J.셰리던
피터 테일러
제작사 원 웨이 프로덕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배급사 MGM
상영 시간 140분 (2시간 20분)
촬영 기간 1979년 5월 21일 - 9월 13일
개봉일 파일:미국 국기.svg 1982년 9월 17일
월드 박스오피스 $5,200,986

1. 개요2. 줄거리3. 제작 과정4. 평가
4.1.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
5. 기타
5.1. 긍정적 효과(?)

[clearfix]

1. 개요

1981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로, 인천 상륙 작전을 다룬 반공 영화다.

2. 줄거리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장교의 부인 재클린 비셋은 이영후를 운전기사로 삼아 당시에는 엄청 귀한 물건인 승용차를 타고 피난을 간다. 그러다 폭격 맞아서 이영후가 전사하고 이제는 재클린 비셋이 직접 운전해서 피난을 간다. 도중 한강 철교를 건너는데, 거기서 만난 웬 노인의 부탁에 의해 어린이들을 승용차에 태우고 간다. 그리고 전쟁은 점점 악화되고 맥아더(로런스 올리비에)는 전전긍긍하다가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신은 인천을 공략하라는 해법을 제시했고, 맥아더는 그러한 신의 계시에 따라 인천을 공략한다. 인천 공략에 성공하자 맥아더는 이승만과 껴안고 환호한다.

3. 제작 과정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영화를 찍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서 기획하여 일본 기업가 사카구치 마츠사부로를 설득하여 공동 제작으로 제작을 시작, 처음에는 1978년부터 1982년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포함해서 성경을 바탕으로 10억 달러(!)짜리[2][3] 초대작 종교 영화 10~15부작 연작 시리즈[4]로 시작되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이 계획은 뒤집어지고[5],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신의 계시를 받아 인천 상륙 작전을 계획했다는 내용의 전쟁 영화로 완전히 변질되었다. 아마도 가장 명장면(?)은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이 서로 부둥켜 안고 자기네들끼리 감동을 때리는 장면일 것이다.

5년의 제작 기간과 제작비 4,410만 달러[6]를 들여서 총 흥행 수익 190만 달러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얼마나 돈을 처발랐는지의 일화 중 하나로 문선명서울시"한강 인도교 폭파 장면을 찍어야겠으니 다리 한 개만 폭파시키자. 영화 다 찍고 나서 새로 하나 놔 줄게"란 제안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통일교 재단은 직접 영화사를 차렸고, 일본 '세계일보' 발행인이 제작자로 들어앉았다. 감독 테렌스 영(007 시리즈), 각본 로빈 무어(프렌치 커넥션), 음악 제리 골드스미스(혹성탈출, 빠삐용), 촬영 브루스 서티스(더티 해리)에 로런스 올리비에, 재클린 비셋, 데이비드 젠슨, 오마 샤리프, 벤 가자라, 미후네 토시로 등의 초호화 캐스팅.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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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산업폐기물이자, 애니깽,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맨데이트, 7광구, 클레멘타인, 리얼, 자전차왕 엄복동, 걸캅스다른 한국 영화의 흑역사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심연 그 자체이라고 할 수 있다.

말아먹은 스케일도 위의 영화들은 애교로 보일 수준이며, 심지어 이라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에 내보내 제대로 나라 망신을 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세계적으로 보면 《오! 인천》보다 더 망한 영화는 얼마든지 더 있긴 하다. 할리우드 최악의 실수들, 흥행 대재앙 영화 30을 보면 《오! 인천》은 9위에 불과하다.[7]

골든 라즈베리 4관왕[8]으로 2011년까지 골든 라즈베리 최다 수상작이었으나 2012년 잭 앤 질이, 2015년 닌자터틀이 5개 전 부문을 싹쓸이하면서 기록이 깨졌다.

애초에 영화에 문외한인 종교 지도자가 제작자랍시고 앉아 사사건건 끼어들며 간섭하는 이상, 아무리 우수한 스태프와 출연진이 모인다고 해도 대재앙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4.1.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

먼저 제작 시기부터가 최악이었는데, 이 당시는 베트남 전쟁 패전 직후라 미국 내에서 반전 풍조가 강했고, 이로 인해 전쟁 영화는 빙하기였다.[9] 엎친데 덮친격으로 김대중 납치 사건코리아게이트 때문에 한미관계는 사상 최악으로 냉각된 시기였고, 특히 통일교는 코리아게이트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던지라 미국 내에서의 여론도 좋지 않았다.

당장 맥아더 역을 맡은 로렌스 올리비에부터가 문선명이 지나치게 통일교 교리를 강조해대는 바람에 "통일교 안 믿는다"라고 드러눕는 바람에 영화 제작팀에서 올리비에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으며, 건강 문제까지 겹쳤던 그는 영화를 엄청나게 대충대충 찍었다. 그나마 개런티는 주급으로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재촬영을 진행해 많이 줘서 촬영 자체를 거부하진 않았다.[10]

배우와 스태프들이 이러한 전후 상황 때문에 개런티를 받지 못할까 염려하여 보이콧 움직임을 보이자[11] 헬기로 매주 개런티가 들어있는 돈가방을 공수해 와 건네주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제작 협력을 약속한 미 국방부도 영화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협조를 철회했고, 원래 맥아더로 예정되었던 그레고리 펙은 출연을 취소한다.[12] 심지어 미국 정부 뿐 아니라 박정희 유신정권은 물론 전두환 신군부조차 한국전쟁과 반공을 주제로 하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급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통일교 영화라고 하자 협조에 미온적이었다.[13]

게다가 문선명이 자꾸 제작에 관여하는 바람[14][15]에 각본은 제작 기간 내내 수정을 거듭했으며, 이로 인해 영화 촬영 내내 수많은 트러블이 이어졌다. 가만히 냅둬도 제작진이 알아서 잘 찍는데도 불구하고, 콘티를 스스로 뭉개며 영화를 산으로 보냈다.

심지어 촬영을 위해 만든 등대가 서해안을 타고 올라온 태풍으로 날아가는가 하면, 미국 스태프와 한국 스태프를 연결할 통역이 부족하여 한 컷을 찍기 위해 통역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헤메는 동안 시간만 하염없이 흘렀고, 영화 제작자들이 쓰는 전문 용어는 한국과 미국이 전혀 달라 감독 지시가 이곳저곳 거치는 동안 전혀 다른 말이 되어버렸다. 이를테면 현장 조감독이 배를 다른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바람에 인천 상륙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찍으며 200만 달러를 썼고, 맥아더가 서울 시내에서 군중의 환호를 받는 장면은, 한 번은 엑스트라가 너무 적어서 멋지지 않다는 이유로 다시 찍고, 많은 엑스트라가 동원된 두 번째 촬영은 첫 번째로 찍은 리무진 장면과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또 다시 찍어서 도합 세 번을 찍었다. 여기에 든 돈은 촬영당 100만 달러씩 해서 300만 달러.

결국 5년 만에 겨우 완성을 보았으나, 그 결과는 덧칠과 가위질로 얼룩진 것은 물론, 배우들의 연기도 들쭉날쭉인 말 그대로 산업 폐기물의 탄생이었다. 오죽하면 출연한 배우들도 이 영화를 실컷 비웃기까지 했다.[16]

고증 역시 군이나 사학계에서 들고 일어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로 막장이다. 일단 6월 25일 새벽에 조선인민군이 38선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실제 역사와는 달리, 조선인민군 육군 전차들이 백주대낮에 대한민국 육군의 최전방 초소에 당당하게 쳐들어와 탁자에서 소총을 장전하던 한국 육군 보병들을 쓸어버리는 아스트랄한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여기에 인공기를 자랑스럽게 게양한 북한 전차는 바로 옆에 있는 멀쩡한 길을 놔두고 궤도로 민가를 밟아 뭉개며 지나가고, 한복을 입은 선량한 주민들이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전차를 향하여 짱돌만 던지다가 인티파타? 북한군의 포질에 산화하는 등 현실성 없는 모습도 등장. 여기에 국군이나 조선인민군이나 둘 다 일본군 비슷한 복장에, 영국군이 쓰던 스텐 기관단총을 쓴다. 작품성은 개한테나 줘버렸다 쳐도 엄청난 블록버스터급 제작비를 들인 만큼 전쟁씬은 제법 웅장해야 함에도 그 퀄리티는 헐리우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세한 당시의 한국산 전쟁영화에서나 볼 법한, 헐리우드산 전쟁영화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로 조악하여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오리지널인 140분판은 첫 공개였던 칸 영화제에서 무수한 야유를 받으며 떡실신되었고, 나중에 재편집판이 미국 한정으로 공개되었으나 상영 기간 중 극장 티켓을 추첨하여 100만 달러 상금을 주는 캠페인을 벌였음에도 영화는 대참패, 90만 달러라는 기념비적인 흥행 수입을 기록하며 영원한 흑역사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더니 결국 미국 배급사였던 MGM/UA는 이후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다 1989년 1차 부도를 내고 2010년 11월 파산했다.[17] 거기에 1981년 7월 22일에 윤보살이 피살당하면서[18][19] 윤씨가 해당 영화에 투자를 했다는 얘기가 나왔으나, 제작사 측은 사실무근이라 주장했다.

5. 기타

현재는 미국의 통일교 계열 케이블 채널에서 이따금 방영해주는 것이 전부일 뿐으로, 비디오건 DVD건 영상 매체로는 전혀 발매되지 않고 있다. 2012년에 드디어 영화 전체가 유튜브에 올라왔다! '1982 Inchon!'이라는 제목으로 10분짜리 영상 14개로 나뉘어 올려져 있다. 미국 케이블 채널 방영분을 녹화한 것으로 보인다.[20]

할리우드에서 베트남 전쟁 관련 영화는 많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는 거의 나오지 않은 건 이 영화 때문이라는 괴소문이 있다. 게다가 1970년대 전까지 나름대로 왕성하게 만들어지던 한국 전쟁 배경의 영화들이 이 영화를 기점으로 완전히 끊겨있어서 이런 소문을 더욱 부채질한다. 실제론 한국 전쟁 자체가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 내 인지도가 군사기밀 수준으로 낮아서지만. 미국에선 비슷한 시기, 비슷한 내용과 설정을 가진 전쟁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다면 인지도가 수백수천배 높은 베트남 전쟁[21] 혹은 제2차 세계 대전[22]을 채용하는 게 더 관객들의 눈길이 가게 되어있다. 물론 할리우드판 한국 전쟁 영화는 한국에서도 흥미가 없으니 더더욱 만들 이유가 없다.[23]

게다가 걸작들이 즐비한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 배경의 영화들에 비해, 한국 전쟁 배경의 영화들 중에는 몇몇 작품을 빼면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품은 없다. 그나마 개중에서도 대중에 걸작으로 인정받는 영화는 존 프랭컨하이머 연출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와 1970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로버트 알트만 연출의 《M.A.S.H.》가 있다. 하지만 전자는 영화가 한국전 자체를 다룬다기 보다는 정치 스릴러를 위한 소재로 사용하는 느낌이 강하고, 후자 역시 영화 속 한국인들의 복식을 베트남 식으로 가깝게 묘사하는 등, 베트남 전쟁에 대한 야유와 조롱를 위해 한국 전쟁이라는 소재를 사용했다.[24][25]

파워 블로거 페니웨이의 괴작열전에 정밀 리뷰가 올라와있는데, 영화 제작 당시 여러 이야기와 줄거리 같은 이야기가 3 걸쳐 꽤 자세히 올라왔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영화 음악의 거장인 제리 골드스미스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그나마 건질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영화의 공식적인 비디오나 DVD 같은 건 일절 나오지 않은 거와 달리 OST는 당당하게 나온 걸 봐도 말 다했다.

한국을 무대로 해도 중국이나 베트남 배우들이 나오는 일반적인 할리우드산 한국 전쟁[26] 영화화는 달리 이 영화는 한국의 중견 배우들[27]이 총출동하는 작품이다. 물론 영화가 망작 중에 망작이라서 배우들도 언급을 자제하는 편이다. 다만 상술한 보이콧 문제 때문에 현찰 박치기까지 했던 영화라서인지, 고질적인 문제인 출연료 늦게 지급이나 불공정 계약으로 인한 출연료 미지급이 없던 영화라서 이 영화 찍고 서울에서 집 한 채 마련한 배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문선명자서전에선 이 영화 제작을 했다는 것 밝히고 있다.

1970~1980년대 쇼 비즈니스 업계를 배경으로 한 MBC 월화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주인공의 라이벌 조명국이 운영하는 영화사가 홍콩 영화사와 투자 계약을 추진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계약의 조건 중 하나가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인천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한다든가, 할리우드와의 합작 영화라든가, 로런스 올리비에가 출연할 예정이라든가, 테런스 영을 감독으로 섭외 중이라든가... 아무래도 《오! 인천》을 비꼬려는 패러디로 보이는데, 결국에는 계약 상대가 홍콩 영화사를 사칭한 사기꾼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투자금을 고스란히 떼이고 말았다.

2016년 개봉 예정인 리암 니슨이 맥아더 역으로 출연하는 영화 인천상륙작전 제작 소식에 이 영화의 전철을 밟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흥행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아니나다를까 평가는 좋지 못했으며, 얼마 뒤에는 정치적 논란과 연관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더욱 저평가를 받았다.
<colbgcolor=#5e7177><colcolor=#ffffff> 파일:oh_incheon_extra.jpg
이미지 출처: Paul Courtright 씨 페이스북

당시 서울에 체류하던 외국인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하였다. 아마 돈을 무더기로 쥐어주니까 출연한 모양이다.

오드리 헵번이 전남편 멜 퍼레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션 헵번 퍼레어가 이 영화의 제작부에 참여했다.

문선명의 장남 문효진[28]도 훗날 영화 올드보이, 울학교 이티의 제작을 지원했고 올드보이는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울학교 이티는 평가는 좋은데 흥행은 실패했다.

5.1. 긍정적 효과(?)

문선명이 이 영화를 찍게 됨으로 인해 꼭 부정적인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주연인 더글러스 맥아더 역의 로런스 올리비에는 이 영화를 찍기 직전에 생명이 위독해지는 바람에 대수술을 감행했고, 수술비로 재산을 탕진했는데, 그런 로런스 올리비에의 경제적인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줬다. 재클린 비셋 역시 상당히 많은 돈을 이 영화로 벌었다. 이영후이 영화 하나 출연료로 집 한 채를 샀다. 심지어는 보조출연자들에게도 아주 돈을 흥청망청 뿌려댄 덕분에 보조출연자들도 제법 큰 돈을 벌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현금을 공수하여 일당 받는 보조출연진들에게 약속된 날에 제대로 급여를 지급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문선명은 이 영화 촬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준 그야말로 진정한 자선사업가이자 영화계의 뉴딜 정책을 편 꼴이다. 창조경제

정작 위에 상술하듯이 돈을 이렇게 벌고 재기에 성공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한 배우들은 이 영화에 대하여 치를 떨며 비난하거나 비웃었다.

실제로도 이 영화에서 제작자인 문선명이 주연 배우인 로런스 올리비에에게 준 개런티가 이 영화 제작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23년 후 클레멘타인에서 스티븐 시걸에게 반복했다.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문선명은 워낙 돈이 썩어 넘치는지라 배우 개런티 말고도 이 영화에 쓴 돈이 엄청난 거액이었지만, 이쪽은 상대적으로 50억원 밖에 없어서 스티븐 시걸을 캐스팅한 것 때문에 영화의 퀄리티를 크게 줄여야만 했다.

[1] 007 시리즈 1탄, 2탄, 4탄 감독을 맡았다.[2] 제작비 최대의 《아바타》가 2억 달러다!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3] 그리고 저거로 손익분기점을 맞추려면 무려 20억 달러를 벌어야 하는데 당시 E.T가 6억 달러를 벌고 역대급 흥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 물가로 저게 약 24억이므로, 저 계획대로의 인천은 지금기준으로 무려 80억 달러나 벌어야 겨우 본전치기할 정도인 것이다.[4] 이 신약성경 영화 기획 당시 예수의 캐스팅을 엘비스 프레슬리로 고려했었다는 얘기도 있다.[5] 예수를 맡아야 할 엘비스 프레슬리가 1977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한 게 컸다.[6] 저게 공식 제작비이고 거기에 추가로 현찰 박치기에 쓰인 돈까지 합치면 당시로도 1억 달러를 썼다는 얘기가 있다. 참고로 공식 제작비는 2000년대 물가로 따지면 치자면 2억~2억 5천만 달러급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 전편 제작비와 맞먹는다.[7] 다만 이 중 몇 편은 흥행은 망했어도 평은 좋았던 경우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1980년에 개봉되어 영화사를 파산시키고 기네스북에도 오른 《천국의 문》. 하지만 이 영화는 '반미 빨갱이가 만든 쓰레기'라는 당시의 '평론'과는 반대로 좋은 작품성으로 당시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는 훌륭한데 미국의 아픈 곳을 건드려서 망했다'는 평까지 받는다.[8] 최악의 작품상, 최악의 감독상, 최악의 남우주연상, 최악의 각본상. 최악의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가 되기도 했다.[9] 당시 히트한 전쟁물이 없는 것은 아니나 람보, 《머나먼 다리》, 《디어 헌터》 등 거의가 반전영화였다. 특히 람보는 반전영화 중에서도 특히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군인을 강조하는 영화다.[10] 매주 현찰을 헬리콥터로 공수해 와서 지불했다고도 한다. 사실 올리비에는 이 영화를 찍기 직전 사경을 헤매는 대수술을 받았는데, 이 수술 때문에 재산을 엄청나게 탕진한 상태였다. 즉, 이 영화를 찍을 수 밖에 없었다. 개런티가 많았어도 올리비에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보이콧을 했을 것이다.[11] 원래 내정되었던 제임스 메이슨은 출연을 철회하였고, 인도군 장교로 나올 예정이던 오마 샤리프와 데이비드 젠슨은 도중에 촬영을 보이콧하고 돌아갔다. 샤리프는 영화 제작진에게 자신이 나온 부분은 일절 수록하지 말고 캐스트 명단에도 올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나중에 이집트 텔레비전에 나와서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영화 출연이었다고 화를 냈다. 그리고 데이비드 젠슨은 이게 유작이 되어버렸다. 1980년 2월에 만 48세의 나이로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기 때문.[12] 이 배우는 맥아더 전기 영화에서 레퍼런스급의 명연기를 펼친 바 있다.[13] 제작에 협조할 경우 일차적으로 개신교, 가톨릭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문선명의 엽색 행각 등으로 통일교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통일교가 국내보다 일본, 미국 등 해외 포교에 주력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14] 가장 가관은 영화 시작 제작진 자막에 자기 이름이 안 나온다고 기어코 돈을 더 들여가면서까지 특별 자문이라는 자막으로 문선명 영어 이름을 자막으로 넣은 점. 이 덕에 30만 달러가 또 들어갔다. 자막 하나로 이렇게 돈이 들어가다니 가히 돈지랄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렇다 보니 해외 언론들도 문선명 이름 자막만 보고 통일교 영화라고 무진장 깠다. 그 자막을 안 봤어도 틀림없이 그 괴악한 퀄리티를 소재로 마구 깠겠지만.[15] 참고로 문선명은 1981년 미국에서 탈세 혐의로 각종 소송에 휘말렸고, 결국 1984년부터 몇년간 코네티컷 주의 댄버리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16] 재클린 비셋은 이 영화로 165만 달러나 벌었음에도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나와 "난 이 영화를 볼 마음도 없어요. 얼마나 개판이던지 말도 못하던 걸요. 하긴 돈 때문에 나온 것 뿐이니까요"라며 실컷 비웃고 까버렸다.[17] 참고로 이 부도, 파산으로 007 시리즈는 신작 계획이 두 번이나 날아갔다. 007 영화 시리즈 팬이라면 이를 갈 만한 영화. 게다가 그 중 한 번은 시나리오가 나온 상황이었다.[18] 해당 사건은 현재도 미제로 남아 있다.[19] 윤보살의 본명은 윤경화. 사망 당시 71살의 영화제작자 겸 무속인이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사망 당시 6살짜리 수양딸 윤수경을 기르고 있었고 당시 19살 가정부인 강경연과 셋이 1981년 7월 22일, 자택에서 셋 모두 피살 당했다. 이에 형사인 하영웅이 어떻게든 끼워맞추기 위해서 윤경화의 조카며느리인 고숙종을 이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체포한 후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냈다. 하지만 알리바이가 전혀 맞지 않았고 고숙종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평생 척추 장애를 떠안고 살아갔다. 이에 경찰은 하영웅 형사를 '과잉수사' 혐의로 파면 조치한 후 구속 시키고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교도소에 수감시켰다.[20] 일본에서는 이 케이블판 불법 복제 비디오가 매니아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된다고 한다.[21] 흑인 인권 운동, 반전 운동 등 사회적 영향이 커서 많이 연구되는 전쟁이다. 또 무엇보다 미국이 이길 것 같았는데 이기지 못한 전쟁이다.[22] 종전을 기준으로 하면 시기적으로도 5년 가량의 차이밖에 없으며, 한국군미군의 모든 장비류와 소련제 중장비들은 2차 대전 종전 시기의 장비로부터 크게 바뀌지 않았다. 로저 코먼에게 이러한 소품과 의상들이 무상으로 지급한 뒤, 한국 전쟁 영화를 찍게 하면 소품이 아깝다며 2차 대전 영화로 재탕할 정도.[23] 한국 전쟁은 이미 1960년대부터 한국 영화계는 물론 방송에서도 주구장창 우려먹었던 소재였기에 한국 전쟁 영화에 관한한 한국산이 할리우드산보다 더 나으면 낫지 모자랄 것이 없다.[24] 물론 원작인 소설은 한국전을 다루고 있다. 게다가 1970년도면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절이라 직접 비판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25] 다만 드라마판은 한국에 대한 묘사가 조금이나마 제대로 되었다.[26] 하지만 굳이 한국 전쟁 말고도 베트남 전쟁이나 2차 대전 영화에서도 동아시아 배우로 대충 땜질하는 경우도 많다. 안필립이나 안필선 형제가 중국인, 일본인, 일본군으로 2차 대전 관련 영화에서부터 베트남전 영화로 자주 나온 것이나 재미교포 배우 오순택이 일본군, 베트남군으로 나온 경우. 일본계 미국 배우들도 척 노리스 영화에 베트남군으로 여럿 나온 경우처럼 많다. 참고로 《콰이강의 다리》에서 악랄한 일본 장교로 나온 일본계 배우 셋슈 하야카와는 베트남인, 한국인으로도 나온 적이 있으며, 심지어는 검댕칠하고 오세아니아 섬 주민으로 연기하던 적도 있다. 뭐 안필립도 이런 원주민 배역도 맡은 적이 있긴 하지만.[27] 남궁원, 이낙훈, 이영후, 이일웅, 손전(孫傳) 등. 참고로 이낙훈은 여기서 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서울대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사학과를 졸업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낙훈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에 인기리에 방영되던 《6백만불의 사나이》라든지 《형사 콜롬보》를 번역하던 일도 맡았다.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한 일본 관객들 중에 남궁원이 알고 보니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였다는 걸 알고 충격 먹었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28] 영화 제작 당시 문효진은 컬럼비아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