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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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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궁기병[1]

1. 개요2. 특징
2.1. 장점2.2. 단점2.3. 전술적 운용2.4. 기마궁술의 어려움
3. 역사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언어별 명칭
한국어 궁기병()
기마궁수(騎)
영어 Horse Archer
Mounted Archer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병. 역사적으로 기마궁수는 군 편제상 기병으로 편성되었고, 다른 기병들과 마찬가지로 마상에서 싸웠다.

역사적으로 말을 타면서 을 쏜다는 개념 즉 기사(騎射)는 인간을 길들이는 동시에 시작되었기에 상당히 오래되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애용된 방법이지만, 서양보다는 동양[2]에서 애용한 방법이다. 전통적으로 활을 선호해 온 한민족의 선조들도 마찬가지로, 고구려 시대 고분벽화에도 말을 탄 채로 몸을 돌려 활을 쏘는 기병의 모습이 보인다.

중동, 중앙아시아, 몽골, 중국, 한국까지 사실상 아시아 전 지역에서 폭넓게 활용된 병종이다.

2. 특징

2.1. 장점

궁기병은 육성이 매우 어려운 대신에 기병의 기동성과 궁병의 사거리를 동시에 보유했기에, 야전에서 상대하기가 극히 힘든 병종이었다. 이들은 적을 직접 타격하는 중기병에 비하면 충격력이 약한 면은 있으나, 적에게 아예 접촉하지 않고 공격을 가하며 동시에 기동력을 활용하여 적진을 교란시키는 데에는 탁월한 면모를 보여줬다.

현대에 와서 그냥 생각하기에는 "말타고 활 쏘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전근대 전쟁터에서의 기병의 위력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얼핏 보기에 기병은 덩치 큰 말과 말 위에 올라탄 사람이라는 구성 탓에 덩치가 커서 타격하기 쉬워 보이지만, 그 대신 사람이 두 발로 뛰는 것보다 훨씬 빠르므로 활, 돌팔매 등 정확성이 떨어지는 전근대의 원거리 무기로는 제대로 맞추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무엇보다도 냉병기와 초기 화기를 막론하고 원거리 투사무기류의 화력이 충분히 강력해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고, 불충분한 화력 덕에 기병들은 속도와 갑옷에 기대어 보병들의 사격을 견디며 공격할 수 있었다.[3] 그런데 궁기병의 경우 거기에 더해서 자신이 원거리에서 공격을 하므로 적의 근접병기에는 아예 노출되지도 않았다. 그 기병이 창칼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하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게다가 보병이 기병을 상대할 때에는 밀집방진이 효과적이기에 한데 뭉쳐 있을 때가 많은데, 이렇게 되면 궁기병 입장에서는 맞춰야 하는 타깃이 옹기종기 모여서 맞추기가 쉬운 상황이 되는 면도 있었다.[4] 이때 궁기병을 어떤 식으로든 무력화하지 못하면, 보병 측은 압도적으로 밀리는 교환비를 계속 보여주며 서서히 갉아먹히다 사기가 떨어지기 일쑤였다.

또한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음과 동시에 강력한 기동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전투의 주도권을 기마궁수를 보유한 쪽이 쥐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빠른 발을 이용해 유리하면 싸우고 불리하면 가버리니, 보병 중심 군대라면 언제나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가는 신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흔히 전근대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험한 지형에 틀어박혀 방어전을 치르는 것이 교환비에서 유리하니까 방어군이 공격군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디까지나 전사자 교환비에서만 그런 것이지 결국 전쟁의 주도권은 예나 지금이나 가만히 앉아서 버티는 방어군이 아니라 공격군에 있는 법이다. 하물며 기마궁수는 적이 공격 가능한 범위 밖에서 일방적으로 화살을 쏘고 도망치기를 반복하는 전술 특성상 교환비에서도 유리했기 때문에 그나마 있는 공격 측의 단점마저도 꽤 상쇄시킬 수 있었다.

이런 궁기병을 대단위로 편성하는 군사 세력은 당시 사람들에게 악몽 그 자체였으며, 역사에 이런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한 지역의 판도가 뿌리채 뒤흔들릴 정도로 영향력이 어마무시했다. 이는 많은 경우 유목민족이었고, 그 영향력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다름아닌 훈족몽골 제국의 발흥이라고 볼 수 있다.

궁기병의 공격을 버텨내려면 보병 측이 갑옷과 방패를 충실히 갖춰서 화살 공격을 받더라도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라도 부대가 와해되지 않고 아군 기병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사기가 높고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갑옷은 몹시 비싼 물건이었기에 보병 전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을 충실히 갖추고 방패까지 들고 다니기는 쉽지 않았고, 하물며 일방적으로 화살을 얻어맞는 상황에서도 군기를 유지할 정도로 정예병을 육성하는 것은 그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대~중세에는 궁기병의 위력이 막강했던 것이다.

2.2. 단점

기마궁수는 적에게 서서히 피해를 누적시켜 전력을 갉아먹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기에 전투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에는 최고였으나, 적진을 직접 타격하여 전열을 와해시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즉 전근대의 야전에서 전투를 확실히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아무리 적진을 흩어 놨더라도, 완전히 모랄빵이 나서 패주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중기병이건 보병이건 직접 창칼을 가지고 적 진형을 들이받는 병종이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훌륭한 궁기병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잘 써먹었던 유목제국들 역시 중기병을 양성했으며, 결정타는 중기병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상대방이 방어 시설을 충실하게 갖춘 상태에서는 궁기병의 위력이 많이 저하되었다. 결국 화살 공격이 먹혀야 궁기병이 뭐라도 해볼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가장 극대화되는 상황이 바로 공성전이었다.[5] 그나마 유목민족들이 단순히 발흥하는 것을 넘어서 제국을 세운 경우에는 정주민족을 납치하거나 하는 식으로 공성 병기나 다른 병과를 육성할 여건이 되어 공성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조직적이지 못한 침략은 이러한 방어시설에 격퇴당하고는 하였다.[6]

기동할 공간이 부족하거나 지형이 험하여 기동할 수 없게 되면 궁기병을 사실상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이는 비단 궁기병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병이라는 병종 자체의 문제이기는 하나, 궁기병은 기동력에 몰빵했다는 병종 특성상 다른 기병에 비해 더더욱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몽골군 역시 헝가리에서 위기를 겪은 적이 있고, 궁기병 위주였던 조선군은 탄금대 전투에서 기동에 불리한 지형에 들어갔다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전술적 운용 부분에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사거리가 궁병에 비해 짧았다. 게다가 말 위에서 활을 쏘면 아무래도 명중률이 떨어지는데 반대로 말을 탄 기마궁수는 표적이 커져서 자신이 활에 맞을 확률이 높아진다.

2.3. 전술적 운용

일단 궁기병과 궁보병의 순수한 사격전은 보병의 승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기마궁사들의 실제 전투거리는 1m~20m 내외로서 보병궁사에 비해서 사정거리가 매우 짧았다. 일부 전술서에서는 25m에서 일제사격을 시키라는 등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달리는 마상에서 활을 정확히 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마상사격의 사거리는 보병궁사보다는 확실히 짧았다.[7] 이는 이라는 동물이 아무리 잘 훈련시키더라도 궁술 같은 섬세한 행동을 하기에는 동물의 호흡 같은 들숨날숨 등으로도 조준이 흔들리고, 말 위에서 활을 당긴다는 것 자체가 지상에서보다 2배는 많은 힘과 허릿심이 필요한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게다가 말 위에서는 일반적으로 크고 강력한 활을 사용하는 것이 어려웠고, 보병은 여차하면 활보다 더 멀리 쏠 수 있는 쇠뇌까지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강성한 유목민족이라도 전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케도니아 왕국과 싸운 스키타이인들처럼 정주민족한테 참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기마궁수는 단순히 활을 쏘는 기병이라는 전술적인 기능만 따졌을 때는 무적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평지에서 방패와 쇠뇌로 무장한 보병들에게 패주하는 일도 의외로 많았으며, 이로부터 전투 마차가 고안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거리가 짧은만큼 활의 장력을 매우 강력하게 조절했고, 경무장 보병은 화살 한방만으로 죽일만큼 강력한 근접궁술을 사용했다. 기마궁술은 원거리 싸움법이지만, 기마창술에 가까운 근접 운용을 애용했다는 것이 다수의 기록에 남아있다.[8] 어차피 보병들은 기마궁사들의 기동력 탓에 일방적인 선제공격만으로도 즉사당할 위험을 안고 싸워야했으므로, 기마궁사의 전투거리도 전혀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가까이서 쏠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활 특성상 이런 짧은 교전거리는 활이 낼 수 있는 최대 위력을 내기 위한 목적도 크다. 일반적인 보병 궁수라면 성벽 같은 장애물을 끼지 않는 이상 저렇게 최대 위력을 낼 수 있는 기회는 극히 한정되어 있지만 기동성이 빠른 기마궁수는 치고 빠지면서, 심지어 그냥 거리를 유지하면서 최대 위력의 화살을 지속적으로 날릴 수 있었다. 전근대의 보병들은 단독으로는 거의 쓸모가 없고 대열을 맞춰서 단체로 정면공격을 해야 했는데, 기마궁수들은 보병의 대열이 회전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측면을 칠 수 있고, 보병들의 공격이 닿을락말락한 10m 내외에서 강력한 화살을 날리고 도망쳤으므로 보병들의 대열이 반격을 하려고 방향을 바꾸면 이미 저 멀리에 있었다. 게다가 잡으려고 달려가면 더 빠른 속도로 멀리 도망가고 그렇게 도망가면서 활을 쏴대니 골치가 아프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의 뮤짤을 당하는 바이오닉 같은 처지인 셈이다. 이 경우 중요한 건 사거리가 아니라 기동력이었다. 이렇게 몰려와서 퍼붓고 가는 전술을 스웜 전술이라 부른다.

결국 궁기병을 상대할 때는 똑같이 기마궁수를 쓰는 것이 매우 좋았다.[9] 전 세계적으로 기병을 상대하는 법으로 가장 효율적인 건 결국 동수의 기병을 육성해 맞대결을 펼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십자군은 무슬림 궁기병을 상대하고자 현지 튀르크 궁기병인 투르코폴레스를 용병으로 고용하였으며, 유목민과 싸우던 조선 북방군은 기병-보병 비율이 8:2가 되기도 하는 등 기병을 육성하였다. 유명한 장수들이 기마궁술에 능한 사례도 많았는데, 어유소는 단기필마로 기마궁술로써 급습해오는 여진족 수십 명 발라버렸고, 신립도 기마궁술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중국 후한말 장군인 공손찬 역시 기마궁수들로 백마의종을 편성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그밖에 삼국시대 때부터 고구려나 신라도 기마궁수를 육성했다. 조선전기 조선군은 토지문제로 세병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국제정세가 안정적으로 변하자 군비 부담을 줄이고자 군축을 하면서 궁기병 비율이 높아지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유목민족을 상대할 때 가장 효과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10]

다만, 이 모든 것은 유연한 기동성을 보장받는다는 전제 하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궁기병들이 제대로 날뛸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같은 궁기병으로 맞상대하지 않더라도 이들을 이길 수 있었다. 10세기 레히펠트 전투나 11세기 귀주 대첩, 13세기 아인 잘루트 전투, 14세기 크레시 전투 등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기동력을 상실한 기병들을 궁기병은커녕 설령 중기병이라도 순식간에 궤멸당하고는 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름을 날린 기병대와 그 지휘관들은 탁 트였으며 충분히 넓고 평탄한 전장에서 싸우려고 했다. 게다가 궁기병으로서는 생존성과 기동성의 대가로 파괴력이 부족했던 까닭에, 기마문화를 지닌 정주민족은 물론 유목민족조차 여건이 된다면 대규모 중기병을 육성하고 기마충격전술을 구사하였다. 중기병 충격대와 경기병 기마궁수들은 상호보완적 존재로서, 카르헤 전투처럼 돌격시 제병협동전술을 구사하고는 했다.

십자군 전쟁 도중 사자심왕 리처드는 '진형을 흐뜨러뜨리지 말라' 명령하여 살라딘의 기마궁병들이 며칠 내내 화살비를 퍼붓는걸 맞아주며 행군했다. 몸통에 화살을 주렁주렁 매달고도 행군하는 유럽군의 방어력은 이슬람 측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살라딘은 패퇴했다.
그 이전에도 동로마군은 보병으로 이슬람 기마궁병의 화살을 소진시킨 다음 중기병을 내보내는 전술을 사용했다.

2.4. 기마궁술의 어려움

궁술과 기마술은 둘 중 하나만 매진해도 숙련되기 매우 어려운 기술인데, 기마궁술은 그 두 가지 기술을 통달해야 나올 수 있는 기예였다. 그래서 두 기술이 생활화되어 있는 유목민들을 제외하면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익힌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활을 쏘려면 두 손을 모두 써야 하는데, 고삐로 말을 통제하는 데에도 손이 필요한 상황에서 다루기에는 다른 무기들보다도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11] 따라서 기마궁술을 쉽게 쓰려면 팔이 최소 세네 개 달려있든지 해야 하는데 이는 키메라나 인공 기계팔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기사가 가능하려면 손으로 고삐를 쥐지 않고도 다리만 사용하여 말 위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잡고 행동할 뿐 아니라 말을 자기 뜻대로 통제(조종)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격 측면에서도, 마상에서의 사격은 지상에서의 사격처럼 단단하게 발디딤을 할 수도 없고 몸과 시야가 계속 움직이고 흔들리는 상태이므로 이에 대해서도 별도의 숙련이 필요하다.

결국 능숙한 기마궁수는 어릴 때부터 장기간의 훈련을 거쳐야 육성할 수 있으며, 이런 고급인력을 대규모로 육성하기 위한 조건은 어릴 때부터 말 타고 사냥하는 게 생활의 일부인 유목민이 아니면 충족하기 어려운 것이다. 덤으로 말 역시 궁기병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훈련(왼 앞뒷발과 오른 앞뒷발이 동시에 움직이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군마 공급이 비교적 용이하던 훈족이나 몽골 같은 유목민족 사회에서는 궁기병의 대량 편제가 가능했으며, 이는 이들이 세계를 제패하는 데에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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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3.1. 중국

원래 궁술은 공자의 육예 중 하나로 중시되던 것이었지만 삼국시대 많은 유목민 전사들이 북중국에 들어오면서 궁술의 중요성은 더 높아져갔다. 훈련소에서는 보병궁술과 마상궁술 모두가 정규적으로 실시되었고, 아예 궁술을 평범한 삶의 일부로 여기던 유목민들이 중국에 들어옴에 따라, 정기적 궁술 연마는 점차 필수과목이 되어갔다. 하여 전국시대에는 조나라 무령왕이 호복기사 개혁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마상궁술은 3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중요한 덕목으로 숭상받았고, 해당 세기들에 걸쳐 점진적으로 유목기병대의 전투양상에 관한 지배적 전투교리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발전양상은 유럽 기병대의 그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중국 및 유라시아 동부 초원일대에서, 등자카타프락토이(중장기병)의 도래와 함께 등장했다. 비록 중무장한 기병의 돌격 자체는 타지역에서 등자 이전에 먼저 모습을 선보였지만, 등자는 돌격의 실전성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마상궁술도 등자가 나오기 이전에 이미 실존하고 있었다. 등자는 비슷하게 마상궁술의 효율성 또한 강화했다.

허나 중장기병의 돌격보단, 기동력을 자랑하던 마상궁술이 전장에서 훨씬 선호받는 무예로 떠올랐다. 여전히 중장기병은 보병대열 혹은 적 기병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지만, 중량보다는 기동성에 더 높은 가치가 매겨졌다.

서구 군사사 학술서에서 꾸준히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중국 제국의 주적은 거진 초원 유목민이었기에 그 기동성에 대항하기 위해 둔중한 중장기병보다는 재빠른 궁기병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목민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장기병의 발전이 가속화되었지만, 그렇다고 궁기병의 가치가 쇠퇴한 것은 아니었고 당 시대에 들어서면 다시금 궁기병이 지배적 기마수단으로 거듭난다. 허나 또 송나라, 거란, 금나라&동하, 서하, 몽골이 난립하는 중세 동아시아 세계는 카타프락토이의 최전성기를 일구게 된다. 그러나 궁기병은 여전히 이 과정에서도 중시되었다.

삼국지로 유명한 후한 시대의 경우, 삼국지가 끝나갈 때쯤(사마진 건국기) 슬슬 북방 유목민들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발전하며 통상적인 궁기병에 중기병을 섞어쓰기 시작했다. 궁기병 대열과 중기병 대열을 교대로 배치해, 정주민의 보병대에게 번갈아가며 공격하는 것. 정주민 보병대가 창병을 앞세워 기병돌격을 막으려 하면 궁기병이 쏴버리고, 궁기병에게 사격전으로 대응하기 위해 궁병을 앞세우면 그냥 중기병으로 돌격해버리는 식이었다.

3.2. 유럽

고대 로마에서는 에퀴테스 사깃타리이라는 이름의 기마궁수를 운용했었다.

중세 서유럽에는 기마노병이 존재했었다. 주로 동유럽중동의 재빠른 경기병들과 맞써기 위해 창설되었고, 비교적 작은 쇠뇌를 사용했지만, 장전 속도는 그대로였기에 재빠른 기동성을 살려 치고 빠지는 전술을 썼으며, 장전시 을 안장과 왼쪽 다리에 낀 체 장전했었다.

유럽의 기마 석궁병은 (아시아의) 기마궁병과는 달리 사격전보다는 돌격전에 적합한 병종이었다. 이들은 중기병과 함께 편제되었고 그들 자신도 갑주를 착용해, 아군 기병이 적의 보병대에게 돌입하기 직전 석궁 직사를 가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훗날 권총기병으로 이어진다.

이 외에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와 대결할 때 기마궁병을 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순수한 궁기병도 존재했다. 이는 해당 지역들이 유목민족의 영향을 받거나[12] 헝가리처럼 아예 그 후신인 경우가 많아 기마술과 궁술 모두 익숙했고, 쇠뇌가 마상에서 다루기에는 활보다 신경 쓸 게 많다보니, 숙련자라고 가정할 시 활이 쇠뇌보다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다.

궁기병이나 기마석궁병과 유사하게, 머스킷이나 아퀘버스 등 화기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자 기병들도 총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마상사격을 하면 기병, 마상사격을 할 수 있어도 하마 사격이 일반적이면 승마보병으로 분류되었다. 각 기병 병종은 독일어 "Reiter"(기수)처럼 명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사용하는 총의 이름에 따라서 붙었다. 예컨대 "Pistol"(권총)을 쓰면 "Pistoleer"(권총기병), "Carbine"(마상총)을 쓰면 "Carabinier"(총기병)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흔히 용기병으로 번역되는 "Dragoon"도 사용하는 총이 "Dragon"라고 불리는 단축형 나팔총(Blunderbuss)이었기에 그렇게 명명되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 동안은 기병의 총기 사용이 많았는데, 어차피 기병용이고 보병용이고 간에 화기 수준이 많이 발전하지 않았으며 총검 같은 자체 대기병 근접무기도 없다보니 보병이라고 기병보다 화력을 더 강하고 많이 안정적으로 퍼붓기가 어려웠다. 그 결과 오히려 기병들이 보병을 상대로 화력우세를 점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로부터 카라콜이라는 전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듯 한동안 대기병전에서나 대보병전에서나 기병의 총기 사용은 각광을 받았으나, 총기의 발달과 함께 보병 구성도 최적화된 전열보병시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기병이 보병 상대로 화력열세에 처하였고, 정면 공격 대신 측면 공격이 강조되면서 기병들이 총을 사용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13]

3.3. 한국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시대, 조선 시대까지 궁기병을 상당히 중요시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서도 말 위에서 효시로 보이는 화살을 그것도 어려운 배사(파르티안 궁법)로 날리는 궁수들이 등장하며, 고려시대 몽골과의 전투 이후로 이러한 궁기병은 더욱 더 중요시되었다. 조선에서는 그냥 궁술도 아니고 기마궁술이 무과시험 중 하나였고 무인으로써 마땅이 익혀야 할 기예로 인식하였다. 조선통신사에서도 일본인들 사이 유난히 인기있던 건 일본에서 좀처럼 보지 못하는 조선인들의 마상재와 기마궁술이었다.

조선 전기 창기병이 건재할 때에도 주력 병종은 궁기병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양반 의병장 정문부도 주력 부대가 궁기병이었기에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유격전과 기습 매복으로 굴복시켰다. 실제로 왜군은 조선에서 겪은 의병쇼크와 화포쇼크 덕분에 개전 1년만에 히데요시에게 벌써 병력의 1/3을 잃었다고 장계를 올렸는데, 현대전에서 이 정도 손실은 전멸로 취급된다.[14] 그래서인지 한국의 기사 스포츠 역시 평가가 좋은데, 현대에는 유사한 스포츠인 활쏘기나 승마에 비하면 비교적 규모가 작긴 하지만 아주 없진 않다.

그런가 하면 조선 시대의 유명한 도적임꺽정은 사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궁술에 능숙한 기마궁수로 활동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옆에 건 링크를 참조하기 바람링크.

3.4. 일본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무라이일본도를 들고 싸우는 보병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초기 사무라이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궁수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헤이안 시대부터 길이 2.2m가 넘는 일본장궁을 사용했고 그들의 기예는 야부사메로 그 전통이 남아 있다. 현재는 신사에서 매년 예대제를 지낼 때마다 치르는 필수요소가 되어 일본 각지에서 시연되고 있다. 이외에 명맥이 끊기긴 했지만 카사가케(笠懸), 이누오모노(犬追物) 등 자체적인 기마궁술도 존재했다.

사무라이가 기마궁수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에도 막부 부터 고착화된 보병 이미지 때문도 있지만, 본래 사무라이는 귀족을 보좌하는 무사계급이었지 일반 병과가 아니었다. 또한 일본에서 말을 탈 수 있는 자는 영주를 보좌할 수 있는 사무라이 뿐이었고, 이들은 영주의 가신으로써 휘하 병졸들을 지휘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물론 특임대처럼 억지로 사무라이들을 모아 마상작전에 투입 할 수는 있었겠지만, 만약 작전 중 사무라이가 사망하면 그 휘하 병졸들의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사회 통념상 기병부대란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이 신분의 고하를 엄격히 구분하는 철저한 봉건제 사회였기 때문이다.[15]

이와 더불어 일본이 갖고있는 지리적 문제도 한 몫을 했는데, 일본은 열도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군마의 품종 개량에서 항상 어려움을 겪었고 많은 수의 군마도 육성할 수 없었다. 이후 전국시대가 되면서 총포의 등장, 전술의 변화 등을 겪으며 사무라이들이 마상작전을 수행할 의미가 없어졌고,[16] 에도 막부가 되자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관료화 및 보병화되었다. 이후 1862년 분큐의 군제개혁(文久の軍制改革)으로 서양식 군대 제도(삼병편제)가 도입되고 나서야 일본 역사에 처음으로 전문적인 기병부대가 창설되었다.

3.5. 중동

2021년 전통 기마궁수를 재현하는 팔레스타인 전통장인(아랍어).[17]

아랍을 비롯한 서아시아나 북아프리카하면 도검을 잘다루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사실 도검 못지않게 활이 많이 쓰인 곳이기도 하며, 말타면서 활을 쏘는 기술 역시 있었다. 물론 튀르크계 이주민들이 이주해 건국한 맘루크 왕조가 더 발달되었지만 아랍 역시 튀르크만큼 기마궁수가 발달되었다. 다만 아랍 지역은 원래 경기병들이 유명하긴 했지만 마상 궁술을 쓰진 않았으며 오히려 기동성을 기반으로 빠르게 측면 침투를 해서 근접전을 즐겼다고 한다. 이들이 마상 궁술을 도입한 건 튀르크계 이주민들의 영향을 받고 나서였다.[18]

아시리아 역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제국 중에서 궁기병이 발달된 곳이기도 했었다. 그 외 궁기병이 발달된 곳은 고대 이집트수단누비아 일대가 있었으며, 이란의 경우 유목민인 파르니족이 세운 국가인 파르티아가 궁기병으로 명성이 드높았고 사산 왕조도 궁기병을 많이 이용했다.[19]

3.6. 북미

북미대륙에는 본래 이 서식하지 않았고 말 같은 용도로 쓸 수 있는 비슷한 가축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유럽인들이 북미대륙에 말을 가지고 들어오기 전까지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기마궁수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인들로부터 말이라는 가축을 얻은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 아파치 부족과 코만치 부족은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기마궁술을 독자적으로 체득했다. 심지어는 영국 등을 통해 서양의 총까지 입수하여 탁월한 기마사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3.7. 쇠퇴

기마궁사의 쇠퇴는 몇 단계에 걸쳐서 일어났다. 1차는 성벽과 같은 방어구조물의 발달이었으며, 2차는 쇠뇌와 같은 보병화력의 증강이었고, 최종적으로는 화승총을 시작으로 총기의 시대가 열리면서였다. 그 이전에는 기마궁사라는 존재가 단 수십 기만 있어도 상대방은 보병연대, 중기병 수십기, 성곽 방어물 같은 엄청난 경제적인 지출과 사회적인 보안망을 강요받아야 했다. 아니면, 똑같이 기마궁사를 육성하거나.

기마궁술은 궁극적으로 총포의 발달에 밀려 점점 쇠퇴하였다. 보병은 물론 기병조차 총을 중심으로 무장이 통일되어갔고, 전술도 테르시오를 거쳐 전열보병으로 발전하였다. 이제 궁기병은 조밀하게 구성된 보병들의 가공할 화력 앞에서 녹아내리기 십상이었다. 특히 서유럽의 경우, 기마궁술 자체가 유목민족과 밀접한 반면 지리적으로 그들과 멀리 떨어져있었기에, 고대 시절부터 기마궁술의 전통이 없다시피 했고, 중세 때 이미 보병조차 활 자체를 잘 안 쓰기 시작하여 거의 사장되었다. 그나마 웨일스 산악지대의 장궁 문화를 접한 영국이나 바다 건너 합성궁을 써대는 동로마 제국, 레반트, 투르크 등과 교류하던 이탈리아 등에서는 소수 기마궁수 부대를 편제한 적은 있지만 대규모는 아니었다. 그나마도 이들은 주로 드라군처럼 이동할 때만 말을 이용했지, 활을 쏠 때는 말에서 내렸다(그렇다고 마상사격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장궁의 크기+기량 문제 때문에 유목민족처럼 조직적으로 파르티안 샷을 날리는 수준 역시 아니었다). 보병이든 기병이든 주로 쇠뇌와 창을 썼기에 화기 도입 후에는 쇠뇌의 지분을 총이 빠르게 차지하였고, 총검 발명 후에는 창조차 도태되었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조차 총을 접한 후로는 활보다 총을 선호하며 기마총병으로 활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기마궁수는 19세기까지 실존했다. 청나라는 망하기 직전까지도 기강이 해이해진 팔기군을 어떻게든 유지하면서 이들에게 기마궁술을 훈련하도록 했으며,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도 총의 보조로 활을 사용했다. 심지어 서유럽에서도 19세기 초에 기마궁수들이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제국바시키르인 경기병들이 대표적이다. 유럽인 화가들은 바시키르인 궁기병들을 매우 이국적인 존재로 보고 이들 관련한 그림을 적잖이 남겼다. 다만 궁기병이 본격적으로 활약할 시기는 한참 지난 까닭에 바시키르 경기병들의 역할은 정찰, 패잔병 추격에 국한되었다.[20]

활이라는 무기가 총이라는 더 우월한 무기로 대체되면서 궁병과 동시에 기마궁수도 몰락했지만, 말 위에 탄 채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병종이라는 개념은 총기병(Carabineer)과 용기병(Dragoon)으로 계승되어 한동안 남았다. 이후 총기병과 용기병도 전통적인 기병 자체가 도태되자 이들도 기갑이나 항공 수색대, 기계화보병 등으로 전환되어 오늘날에는 헬기전차, 장갑차를 타고 다닌다.

4. 대중매체

유목민족 및 그 계통 정주민족을 다루는 매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특히 몽골제국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에서 기마궁수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중국 사극에서는 꽤 기마궁수들이 많이 나왔다.

한국 사극에서는 KBS의 삼국기, 불멸의 이순신, 천추태후,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대왕의 꿈, 징비록, 한국사기, 화랑, 태종 이방원, 고려 거란 전쟁에서 기마궁수가 나왔다. MBC에서는 주몽, 무신에서 기마궁수가 나왔다. SBS는 연개소문에서 볼 수 있다.

이현세의 만화한국사에서도 궁기병이 많이 나온다.

RTS류 게임에서도 전근대를 다룬다면 곧잘 볼 수 있다. 주로 경쾌한 기동성과 원거리 공격이라는 특성이 맞물려 전술적 유연성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장갑 및 체력이나 사거리, 유지비 등에서 무언가 하나 이상은 반드시 손해를 보는 병종이기도 하다.

반면 FPS류 게임에서는 활을 쏘는 캐릭터는 있어도 궁기병은 거의 없다. 이는 마상전투라는 메카니즘 자체가 제작도 어렵고, 플레이어의 숙련도 모두 극악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운트 앤 블레이드 시리즈나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처럼 구현하거나 최소한 쓸 수는 있는 수준으로 만든 경우도 있으며, 진짜 말은 아니지만, 오버워치D.Va라고 하여 그나마 기마궁수 비슷한 컨셉으로 구현한 캐릭터가 있긴 하다.

4.1. 개별 문서가 존재하는 기마궁수

4.2.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파일:external/vignette3.wikia.nocookie.net/Horse_Archer.jpg

무빙샷이 가능한 견제 유닛. 무빙샷이라고 해서 도망치다 멈춰서 쏘고 다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사거리 내에 적이 들어오면 아무런 페널티 없이 이동하는 채로 활이나 총을 연사한다! 공격력이나 공격 속도, 정확도 등이 정지해서 사격하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심지어 오른쪽에 있는 적도 공격이 가능하다.[21] 정규군이 없는 빈틈을 타 약탈하는 데 특화되었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일꾼이나 보급 차량 등 민간인 유닛에게 추가 피해 보너스가 있어서 이들을 엄청나게 잘 녹인다. 다만 일반 궁병보다 사거리가 약간 짧고, 기병에게 별 피해를 주지 못하는 궁병의 특성은 여전하며, 적의 보병과 맞서는 정규전 효율은 한 번 생산하면 셋씩 분대를 이루어 나오는 궁병에 비해 떨어진다.

화약 시대부터 무기가 화약 무기로 바뀌어 용기병이 되며, 다음 시대에는 카빈을 사용하다가 최종적으로 산업 시대가 오면 경기병 계열과 통합돼 장갑차가 된다. 장갑차도 이동 사격이 가능한 것은 마찬가지.

4.3. 문명 시리즈

문명 4부터 최신작 문명 6까지 등장한다.

4.4. 삼국지 조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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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기병이란 병과로 등장한다. 똑같이 활을 사용하는 궁병보다 사거리는 짧지만 공격력이 A인 궁병에 비해 궁기병은 공격력이 S로 매우 강하며 기병이라는 설정답게 평지에서 기동력이 좋다. 하지만 후반에 갈수록 궁기병에게 불리한 지형이 많이 나와서 후반엔 버려지게 되는 비운의 병과. 주요 아군 무장으로는 하후연장합이 있다.

4.5. 임진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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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라는 이름으로 조선 진영의 기병으로 등장한다. 일본과 명에서 기병 유닛 역할을 하는 사무라이나 코끼리와는 달리 간접 공격이 가능하여 기병의 기동력을 잘 살릴 수 있다. 특히 조선은 보병이 약하여 갑사가 실질적인 조선의 주력을 맡는다.

4.6. 토탈 워 시리즈

토탈 워: 나폴레옹, 토탈 워 사가: 브리타니아의 왕좌를 제외한 전 시리즈에서 등장하며,[22] 주로 유목민 문명의 전매 유닛이나 다름없다. 성능은 공통적으로 원거리에선 막강하지만 근접전에 돌입하면 몹시 무력하다. 다만 기병 중에서도 기동성이 몹시 뛰어난 유닛이기에 원거리 유닛이 없다면 근접전으로 돌입하는 것 자체가 몹시 어려우며, 이를 이용해 궁기병 부대를 가지고 사격능력이 빈약한 적 군단을 유린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대부분 갑옷이 빈약해서 사거리나 화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궁병이나 총병이 천적이다. 또한 궁병에 비해 화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중무장한 보병이나 기병 역시 잡기 까다로운 상대. 근접전 능력이나 돌격 효과가 떨어지므로, 이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충격 효과가 뛰어난 중기병이나 군단을 보조해줄 중보병대가 필수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나게 적을 유린해 놓고서도 결정타를 먹일 수단이 없어 도망가거나 역관광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23] 반면 갑옷이 빈약한 경보병이나 원거리 기병이지만 사거리가 짧은 투창기병 상대로는 최고의 상성을 보인다.

다만 위의 사항들은 근접전이 빈약한 초기 궁기병에 한정. 로마: 토탈 워토탈 워: 로마 2, 미디블2: 토탈 워 등에는 근접전도 뛰어난 중무장 궁기병들도 간혹 등장하는데, 이 경우 높은 사격능력에 여차하면 돌격할 수도 있고, 적 궁병의 사격에도 잘 죽지 않는 최강의 먼치킨 유닛이 된다.[24] 가장 악명높은 경우가 롬토의 카타프락트 아처로, 이 유닛만으로 어지간한 적 군단을 쓸어버릴 수 있는 미친 위력으로 유명하다. 미디블2의 바르다리오타이나 드보르 궁기병 역시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

[1] 위 삽화에는 오류가 있는데, 훈족은 등자의 보급 이전에 멸망했다. 훈족이 등자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낮다. 유럽에서는 훈족 멸망 후로도 100년이 넘도록 등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로마가 이민족의 무기나 군사기술을 도입하는데 적극적이었음을 고려하면 훈족도 등자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로마는 훈족과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용병으로 고용하기도 하는 등 다방면으로 교류했는데, 등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훈족 멸망 100여 년 후 로마와 충돌한 아바르족이 등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남아있다.[2] 특히 중동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3] 흔히 총기가 등장한 이후로 기병이 도태되었다고들 단순하게 설명하지만, 실제 기병이 퇴출될 때까지는 그 이후로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화승총이나 플린트락 머스킷 등 강선이 없는 총기는 어디까지나 활보다 명중률이 올라갔을 뿐 여전히 명중률이 좋다고 보기는 힘든 데다가 연발 사격이 불가능하여 화력을 안정적으로 지속 투사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순전히 총격만으로 기병을 완전히 틀어막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며, 심지어 카라콜 전술에서 보듯 기병한테 보병이 화력으로 압도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따라서 그 대응으로 초기에는 전투 수레파이크와의 조합으로 상대하다가 전열보병으로 이행하였다. 기병의 보병에 대한 우위는 기병의 전면 공세가 불가능해지고 측면공격이 강조된 전열보병 시대에야 뒤집히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이후 볼트액션 방식이 개발되면서 화력 격차가 더 심해지자 기병은 시간이 갈수록 승마보병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병종으로서 기병에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인데, 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기관총을 비롯한 제식 화기들의 자동화였다. 기병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화력이 압도하게 된 점은 영화 워 호스에서 기관총 난사에 맥없이 쓰러지는 기병대의 모습으로써 잘 묘사되고 있다. 그래도 1차 대전 초기에는 기관총이 여전히 고급 지원화기로서 포병 취급이었기에 제한적으로나마 기병이 여전히 활약할 여지가 있었지만, 후기로 가면서 경기관총이 도입되고 반자동소총이나 기관단총, 자동소총 등 온갖 무기가 자동화되자 정말로 더 큰 표적에 불과해졌다.[4] 그렇다고 보병들끼리 간격을 넓게 섰다가는 기병의 돌격으로 아예 대오가 와해되고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진은 약탈 기병들을 상대로 한 소규모 전투에서는 서로 사격전을 하다가 끝나기 마련이어서 나름 효과적이었으나 대규모 회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예컨대 명나라군의 남병은 왜구 대응용으로 기효신서에 의거하여 서구권에 비해 방진이 널럴한 모습을 하였는데, 사르후 전투(혼하 전투) 등에서 명군은 청군에 처참하게 박살났다. 그래서 동양권에서 강력한 대규모 기병을 보유한 유목제국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던 시대에는 사격기병과 근접기병에 모두 대응할 수 있도록 기병을 확보하거나 전투 수레나 대기병 장애물, 대기병 무장을 지닌 중보병쇠뇌 혹은 활로 무장한 궁병의 두텁되 유연한 방진으로써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5] 사실 공성전은 궁기병을 많이 쓰던 유목민족이나, 보병 위주로 싸웠던 정주민족이나 가릴 것 없이 힘든 전투이다. 하지만 공성전은 공격 측의 병력이 10배 넘게 차이날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는 이상 거의 필연적으로 장기전으로 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오히려 농경을 통해 안정적인 부를 축적한 정주민족이 전쟁을 수행하기가 유리해진다. 유목민족들이 야전을 선호했던 데에는 자신들의 강점인 기동력을 살릴 수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전쟁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 못하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분명히 작용했다. 실제로 장기간 공성전을 치르곤 했던 몽골군 역시 정주민족들을 복속하여 그들의 부와 행정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었기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지, 오롯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6] 전자의 대표적 사례는 한창 잘 나가던 시기의 몽골 제국이 있으며, 후자의 예시로는 가톨릭 개종 이전의 마자르족이 있다. 마자르인들은 중부유럽의 거주지들이 요새화되자 차츰 재미를 보기 힘들어졌고, 레히펠트 전투에서는 지형 탓에 기동력이 상실되자 그대로 도륙당하고 말았다.[7] 더불어 상대가 갑옷이라도 차려입었다면 화살로 뚫는 게 어려워서 도보 궁병들조차 일부러 가까이서 쏘기도 했다.[8] 반대로 창은 사거리가 제한되는 비소모성 원거리무기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병창을 쓰는 서유럽 기병문화 상 중기병이 궁기병의 영역을 일정 부분 선점한 셈이다. 이에 관해서는 창(무기) 문서를 참고할 것.[9] 마치 현대전에서 저격수를 상대하는데는 저격수가 좋은 것과 비슷하다.[10] 정확히 말한다면 궁기병만 늘렸다기보단 궁기병과 창기병을 섞은 일종의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기병을 운용한 것이다.[11] 예컨대 도검류는 무기를 안 쓰는 손에 고삐를 쥘 수 있었고, 방패를 들더라도 역시 고삐를 함께 잡을 수 있었다. 창의 경우 최초에는 등자도 없이 양손으로 휘두르거나 찔러야 해서 매우 위험하고 고난도의 기술로 취급되었으나, 한 손만으로 창을 잡고 역수로 들어 위에서 아래로 찌르는 오버핸드(overhand) 방식이나, 겨드랑이에 끼우고 찌르는 카우치드(couched) 방식이 고안된 후에는 마찬가지로 안정적으로 고삐를 잡을 수 있었다.[12] 이 지역 자체가 훈, 아바르, 마자르, 하자르, 쿠만, 페체네그 등 유목민족들의 안마당이었고 13세기에는 아예 이분야 끝판왕인 몽골이 들어왔다.[13] 기병들도 총 자체는 계속 사용하였는데, 대기병용이나 부무장으로 권총을 장만해서 쓰거나 하마전투용으로 카빈을 지급받는 정도가 보통으로, 오히려 일반적인 기마전투에서는 다시금 창과 검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회귀하였다.[14] 의병장들이 더욱 활약할 수 있던 배경으로는 조선사회와 일본사회 간 차이도 있었다. 수백년 간 이어져온 사무라이의 압제와 60~90% 세율을 자랑하는 가렴주구 속에 무기력한 일본 백성들에 익숙했던 왜군들은 조선의 백성도 반항하기를 두려워할 줄 알고 본국에서 하던 대로 안이하게 약탈을 즐기려고 종종 흩어졌다가, 의병대에게 각개격파당하기 일쑤였다.[15] 또한 유사 이래 어떤 국가의 군대도 장교들만 따로 모아서 병사처럼 활용한 적이 없는 것과 맥락이 같다.[16] 선조 실록 93권 (1597년) 10월 20일,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에게 잡혀 군의 시종노릇을 하던 '김응려'란 사람이 탈출해 말하기를, "칼을 쓰는 것은 그들의 장기이지만 말을 타지 못하므로 말에서 내린 후에야 싸움을 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전국시대 이후에는 마상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가진 사무라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7] 관련 이미지 뉴스.[18] 많이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아랍인들의 주력은 중장보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랍인들은 유목부족이 주력이 아닌 무역을 기반으로 한 도시 지역의 상인들이나 카나트로 대표되는 관개 농업을 사용하는 농경민들이 주력이었기 때문. 이와 비슷한 사례가 호플리테스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이다.[19] 다만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와 달리 본국에서 궁기병을 키우기보단 외세 유목 부족들을 많이 징집했다.[20] 러시아 제국의 경우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민족들이 살다보니 전쟁에 신민을 동원하다보면 이렇게 구시대적 병력이 소집되기도 했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십자군의 후예로 알려진 조지아 산골 부족에서 쇄자갑을 차려입고 칼과 방패, 머스킷을 쥔 전사들이 참전하기도 했다. #조지아 산악부족들: KHEVSURS[21] 무언가에 앉아서 활 쏘는 시늉을 한 번만 해 보면 알겠지만, 말을 타고 사격을 할 때에는 몸 오른쪽이 사각지대가 되므로 이쪽을 공격하려면 말을 부려 방향을 돌려야 한다. 쇠뇌나, 쇠뇌와 기본적으로 자세가 거의 같은 소총도 마찬가지다.[22] 단 나토에서도 총기병이 등장하고 브리타니아 사가에서는 투창 기병이 나오기에 이들 시리즈에서 원거리 기병 자체가 없는 건 아니다. 파라오에서는 기병이라는 병과가 없지만 궁전차가 비슷한 포지션을 맡는 편이었으나 왕조 캠페인으로 기병이 추가되면서 기병 없는 토탈워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다.(다만 전차다 보니 이쪽은 근접전을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궁기병과 달리 돌격도 자주 하며 돌격이 핵심이다.)[23] 단, 이를 역이용해 지속적인 짤짤이로 적을 깎아먹고 화살이 떨어지면 바로 퇴각하는 전술도 쓸만하다.[24] 한 마디로 모든 유닛이 중기병과 궁기병의 역할을 겸하게 되는 셈이다. 중기병과 궁기병으로 나뉘는 일반적인 스웜잔술을 쓸 때보다 효율이 훨씬 좋아지는 셈.[25] 모든 시리즈에서 궁기병의 카운터인 궁병은 어쩔까하는 의문은 올기병이라는 점을 이용해 야부사메 기병이 창병의 발목을 잡는 사이 카타나 기병이나 야리 기병, 하다못해 경기병이나 장군 근위대로 끊어버리면 된다.[26] 훈과 백훈, 알란은 유목민 세력이니 당연히 모든 궁기병이 파르티안샷이 가능하고 사산조는 자예단을 제외한 나머지 궁기병은 파르티안 샷이 안된다. 동로마, 악숨, 힘야르도 파르티안샷이 없어서 궁기병이 버려진다.[27] 마등과 사마영이 겹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