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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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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하게 부자관계가 아님이 증명됨
백제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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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13대 국왕
근초고왕 | 近肖古王
파일:석촌동고분군3호분전경.jpg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3호분 전경.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300년대 추정[1]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375년 11월 (향년 60~70대 추정)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능묘 석촌동 3호분 (추정)
재위기간
(음력)
백제 제13대 국왕
346년 9월 ~ 375년 11월 (29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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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성씨 부여(扶餘)
초고(肖古)[2]/ 구(句)[3] / 속고(速古)·배고(背古)[4] / 조고(照古)[5]
부모 부왕 비류왕[6]
모후 차비
형제자매 형 한 명[7]
왕후 왕후 진씨
자녀 태자 부여구수
왕호 근초고왕(近肖古王)
별호 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연호 태화?[8] }}}}}}}}}
파일:칠지도_.png
칠지도

1. 개요2. 명칭3. 생애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삼국사기》 기록8. 《일본서기》 기록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9]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 첫 문장.
백제의 제13대 군주이자 어라하. 태어난 해는 미상[10]이고 346년에 즉위해 375년에 사망했다.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왕으로 평가받는다.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그동안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왜곡된 기록을 이주갑인상과 주체 교체론[11] 등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그의 업적이 드러난다. 현존하는 백제의 기록이 얼마나 부실한지 알 수 있는 사례.[12] 백제전성기를 이끈 명군임에도 재위 기간의 2/3에 가까운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백제 멸망 이후 수백 년 이후인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의 한계를 볼 수 있다.

2. 명칭

명칭 한자 출처 국가 시기 비고
근초고왕 近肖古王 삼국사기 고려 1145년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
여구 餘句 진서 644년 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백제왕(372년)
조고왕 照古王 고사기 일본 712년 일본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백제왕(396년?)
초고왕 肖古王 일본서기 일본 720년
속고왕 速古王 《신찬성씨록》 일본 815년

동성왕 이전까지 백제의 왕 대다수가 이름을 왕호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이름은 초고 / 조고 / 속고로 추정된다. 셋은 의미상 동일한 단어의 다른 표기인데, 고대 한국어에서 같은 파찰음인 ㅊ, ㅈ, ㅅ 음가의 상호 호환성은 옆나라 신라의 김흠순(純)과 김흠춘(春), 용수(樹)와 용춘(春), 관창(昌)과 관장(壯)과 같은 이표기 사례들을 참고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백제 왕실의 국성이 부여씨(扶餘氏)라는 점에 미루어 《진서》에 기록된 '여구'라는 이름은 성을 '여', 이름을 '구'로 축약 표기한 것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축약 표기의 사례는 다른 기록들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고가 구가 된 것은 고대인의 인명 표기시 방언이나 필사자의 모어, 습관 등의 이유로 모음의 전이가 일어난 것으로 역시 비슷한 사례가 자주 관찰된다. 근초고왕의 경우는 이표기가 많이 남아서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대수왕호한자대수왕호한자
4대개루왕蓋婁王21대근개루왕近蓋婁王
5대초고왕肖古王13대근초고왕近肖古王
6대구수왕仇首王14대근구수왕近仇首王

백제 왕계를 살펴보면 위와 같은 대응이 이루어지므로, '근초고왕'의 가까울 근(近)이 초고왕과 구분짓기 위해 부기된, 서양의 '2세'와 비슷한 의미인 글자로 추정되기도 하고 한국어 '큰'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도 (宮)과 이를 따온 위궁(位宮)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다른 일설에는 고이왕계계왕을 물리치고 초고왕계 왕통을 복구해서 왕명이 근초고왕이 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개루왕의 용례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았을 때, 단순한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함부로 결론짓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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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백제사 최고의 명군이자 삼국시대정복군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사실 오늘날 근초고왕이 대한민국에서 평가받는 모습은 한국 고대사가 평가받는 것처럼 때로는 과장, 때로는 축소로 얼룩져 있다. 근초고왕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인 면부터 오류가 많다는 것인데, 가장 큰 문제는 사료 부족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색안경을 끼고 본 탓도 크다. 흔히 알려진 업적은 고구려와 싸워서 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갔고 싸우던 와중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사망한 정도인데 그의 치적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바로 그 직전까지 무수한 정복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되며[13]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삼국지 기준 삼공(태부, 태위, 사도)보다는 낮지만 구경(광록훈, 위위 등)보다는 높은 정2품 진동장군직을 제수받았는데, 이는 그전까진 서진 정권의 자사나 유수[14] 따위와 동급 취급 받았던 마한왕 시절보다 훨씬 격상된 대우였다.

정확한 1:1 대응은 어렵지만, 조위 말기 삼공들이 본인들은 등급이 제후왕인 사마소와 대등하다고 생각했고 사마소도 이를 인정했던 걸 돌이켜보면 적어도 근초고왕은 '공'에 해당하는 대우는 받았다고 보면 되겠다.[15] 일본과도 외교 관계를 최초로 여는 등 외교적으로도 백제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백제를 고구려와 맞서는 한 축으로 당당히 성장시켰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 진흥왕과 비견될 만하지만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즉위하자마자 백제 10성을 점령하는 등 치세를 전쟁과 정복으로 보낸 진정한 정복 군주이며 진흥왕도 10대 후반~20대의 나이 때 영토를 즉위 시점의 2배~3배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위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복에 나섰다는 점이 다르다.

광개토대왕과 진흥왕이 젊은 패기와 뛰어난 군사적 식견으로 전장을 휩쓰는 패왕 유형 군주였다면 근초고왕은 약 20년이나 힘을 비축하며 가만히 기다리다가 치밀한 국제 정세 분석과 조정을 통해 최소한의 전력 소모로 단번에 패권을 휘어잡는 것을 보면 대단히 치밀하고 경제적인 성격인 군주가 아니었을까 한다.[16]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근초고왕은 신라, 가야, 일본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를 맺으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독자적인 패권을 구축했다. 이것은 이후 광개토대왕의 간접적인 복속 정책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며 지역적 연맹 국가에서 국제적 패권 국가로 다시 통일적 영토 국가로 발전하는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말년에 백제 중심의 한반도 남부 질서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죽었다는 점은 불행이다. 373년에 독산성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 대응하지 못했고 375년에는 수곡성을 고구려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빼앗겼음에도 보복하지 못했다.

근초고왕 사후 아들인 근구수왕이 어떻게든 백제의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약화되던 백제 중심의 국제 질서는 382년 왜국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팀킬과 396년 광개토대왕, 이후 장수왕의 추가 남정으로 거의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딱히 근초고왕의 실책이라거나 백제 자체의 국력 쇠퇴에서 기인한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다. 백제 자체가 옛 마한 거수국들을 차례차례 공납-간접 지배-직접 지배로 전환하는 큰 흐름은 이 시기에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 백제는 근초고왕 이후에도 무령왕 시기까지 마한 지역을 직접 지배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지속했기에 백제의 절대적인 국력 자체는 이후에도 차근차근 성장해나가고 있었다고 봄이 옳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애초에 고구려 자체의 국력이 이미 고국원왕의 선왕들인 미천왕 시절부터 백제를 압도하고 있었던데다 정치 체계 발전도 앞서 있었고 하필 근초고왕이 재위하던 시기에 신라 또한 진한 일대에서 패권을 움켜쥐며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강해진데 있다. 백제가 약해졌다기보다는 고구려가 전연에게 당한 패배로 일시 상실한 원래의 잠재력을 회복한데다 신라 역시 비약적으로 강해져 백제를 따라잡기 시작했다는 말.

백제가 경기도 일대를 어떻게든 지켜내면서도 충청도전라도 일대를 모두 직접 지배지로 편성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475년 개로왕 사망과 위례성 함락 사건 이래로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게 된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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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도학 교수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석촌동 고분군 중 가장 규모가 큰 기단식 적석총이 3~4세기 만주 지역에서 역시 발달하던 기단식 적석총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야 할텐데, 현재까지는 매우 부정적이다. 백제의 기단식 적석총 축조 방식은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확장하는 구조인데 이는 3~4세기 만주 지역 기단식 적석총 축조 방식과 정반대로서, 그 당시 고구려 지역에서는 유행이 지나가버린 기원후 1~2세기 축조 방식을 고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한성백제 지배층이 어디까지나 고구려 출신임과, 그럼에도 최소한 기원후 3세기 이전에는 남하한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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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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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
一年 근초고왕이 즉위하다.
二年一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17]
二十一年春三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三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三年 신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四年秋九月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二十四年冬十一月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다.
二十六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무찌르다.
二十六年冬十月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다.
二十六年 수도를 한산으로 옮기다.
二十八年春二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八年秋七月 청목령에 성을 쌓다.
二十八年 독산성의 성주가 신라로 도망치다.
三十年秋七月 고구려가 침입해 수곡성을 빼앗다.
三十年冬十一月 근초고왕이 죽다.

고구려와 관련된 것을 빼면 반도 안 남는다.

8.일본서기》 기록

일본 중심으로 쓰인 사서이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봐서 해석하면 몹시 곤란하다.
진구 황후 46년
(246년, 366년)[18]
3월에 시마(시마노 스쿠네, 斯摩宿禰/志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내니, 탁순국 왕이 지난 갑자년(364) 7월에 백제 사람 구저, 미주류, 막고[19] 세 사람이 우리 나라에 와서 백제 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으니, 길을 안내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고 말하다. 이에 시마가 종자 이하이와 탁순 사람 과고를 백제에 보내니, 초고왕이 후하게 대접하고 각종 보물을 과시하며 오색 비단과 각궁 화살과 철정을 이하이에게 주다.
진구 황후 47년
(247년, 367년)
4월에 백제 왕이 보낸 구저, 미주류, 막고와 함께 신라의 사신이 와서 조공하다. 태후와 태자가 기뻐하면서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왔는데 선왕이 보지 못하는 것이 슬프다고 말하자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다. 구저 등이 중간에 신라에서 공물을 빼앗아 강제로 바꾸었다고 말하다. 이에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치쿠마(치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20]를 신라와 백제에 보내어 조사하다.
진구 황후 49년
(249년, 369년)
3월에 아라타(아라타노 와케, 荒田別)와 카가(카가노 와케, 鹿兒別)를 장군으로 삼아 구저와 함께 탁순국으로 보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다. 원군을 청하자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백, 개로가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화,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을 평정하다.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심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다.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의류촌으로 와서 아라타와 목라근자 등을 만나자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항복하다. 백제 왕과 치쿠마가 벽지산과 고사산에 올라 번국의 맹세를 하고, 치쿠마를 도읍으로 데려가 후대한 뒤 구저와 함께 보내다.[21]
진구 황후 50년
(250년, 370년)
2월에 아라타 등이 돌아오다.
5월에 치쿠마가 구저와 함께 돌아오다. 다사성을 백제에게 주어 오가는 역으로 삼게 하다.
진구 황후 51년
(251년, 371년)
3월에 구저가 다시 조공하러 오다. 태후가 태자에게 백제와 친할 것을 당부하다.
구저를 치쿠마와 함께 보내다. 백제 왕 부자와 번국의 맹세를 하다.
진구 황후 52년
(252년, 372년)
9월에 치쿠마가 구저와 함께 돌아오다. 구저가 칠지도와 칠자경 등 여러 보물을 바치다. 백제 왕이 손자 침류왕에게 일본과 친할 것을 당부하다.
진구 황후 55년
(255년, 375년)
백제 초고왕이 죽다.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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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생애 | 평양성 전투(371년)
관련 장소 석촌동 3호분
관련 문서 칠지도 | 담로
매체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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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좌왕
장남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14대
근구수왕
섭정
훈해왕
찬탈
설례왕
부여신제
19대
구이신왕
부여주
순타태자
26대
성왕
(?)
부여법사
28대
혜왕
(?)
아좌태자
29대
법왕
30대
무왕
부여교기
32대
풍왕
부여선광
부여문사 부여문선 부여덕장
부여사
부여창성
[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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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류왕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큰 이상, 아들 근구수왕의 추측된 탄생년으로 역산한 것이다. 즉, 추측의 추측을 한 것.[2] 초고왕과 휘가 같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근초고왕의 이름을 뒤집어서 근고초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근"초고"왕이다. 일반인은 물론 심지어 기자들도 틀리는데 주의하자.[3]진서》. 여구(餘句)로 등장하는데 이는 축약 표기로 성이 여(餘)이고 이름이 구(句)이다.[4]일본서기》. 배고는 초고(肖古)의 오기로 보인다.[5]고사기》.[6]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모두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고, 《신찬성씨록》 등 일본측 기록은 이 둘이 부자관계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7] 근초고왕이 기록상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이 사실이면 적어도 근초고왕은 최소 형 1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銘文), 사실 여부에 논란이 있다. 칠지도 문서 참조.[9] '몸 생김새가 기이하고 컸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10] 아들인 근구수왕과 증손자인 아신왕의 연혁을 이용하여 계산해보면 300년대쯤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11] 간단히 말하면 《일본서기》 해당 기록에서 '일본이 했다'는 부분을 '백제가 했다'로 주체를 교체하면 아귀가 맞는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12] 꼭 백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삼국 모두 상당수 왕들의 기록이 많이 비어 있다.[13] 그러나 상당 부분에서 신뢰도 문제가 있다.[14] 군을 다스리는 태수의 직속상급자로서 오늘날 기준 장관급이기에 물론 나름 높지만 제대로 된 나라의 군주 취급은 분명 아니었다.[15] 단, 근초고왕이 받아내고자 했던 '백제왕' 책봉은 끝내 무산되었다. 북방 오호들이 너도나도 왕칭하는 데다 아예 황제, 천왕을 칭하는 데 트라우마가 걸린 이 당시 동진 조정이 자국 황제 체제 내 왕과 동급인 이민족 '왕'을 만드는 데 상당히 신경질적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현실을 인정하고 중원 정권에서도 '왕'으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백제 왕, 신라 왕 등이 등장하지만 그건 약간 나중 일이었다. 애초에 한반도 남부의 마한왕은 서진 전에는 유수는 고사하고 태수하고 겨우 동급인 정도에 불과했는데 그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를 훨씬 위상이 강한 '왕'으로 인정하는 건 한위-서진 시절 영광을 기억하는 동진 조정 입장에서는 꽤 거부감 드는 일이었다.[16]삼국사기》에서도 근초고왕의 성격을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17]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18] 뒤에 붙인 연도는 이주갑인상으로 왜곡된 연도를 다시 고친 것이다.[19] 당시 백제의 장수 막고해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20] 백제기에는 직마나나가비궤(職麻那那加比跪)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21] 이 대목에 주의가 필요한데, 대부분 학자들은 연대를 120년 뒤로 늦추고 정벌의 주체를 진구 황후가 아닌 근초고왕으로 바꾸어서 근초고왕의 정복으로 해석한다. 백제계 도래인들이 가져간 백제의 사료들을 《일본서기》 편찬에서 여러 변조를 거쳐 이용했다고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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