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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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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초대 황제
광무제 | 光武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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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기원전 5년 1월 15일
전한 진류군 제양현
(現 허난성 카이펑시 란카오현)
즉위 25년 8월 5일
현한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57년 6월 10일 (향년 62세)
후한 하남군 낙양 남궁 전전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원릉(原陵)
재위기간 후한의 황제
25년 8월 5일 ~ 57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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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 유(劉)
수(秀)
부모 부황 남돈군
모후 남돈군부인 번한도
형제자매 3남 3녀 중 3남
배우자 광무황후, 광열황후
자녀 11남 5녀
신장 173cm
문숙(文淑)
묘호 세조(世祖)
시호 광무황제(光武皇帝)
연호 건무(建武, 25년 ~ 56년)
건무중원(建武中元, 56년 ~ 57년)
}}}}}}}}} ||
1. 개요2. 생애3. 후비와 자녀4. 후세의 평가5. 비판
5.1. 호족5.2. 직언5.3. 국방5.4. 도참사상
6. 낙랑군과 한국 고대사 관련7. 관련 일화들8. 대중매체에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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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Screenshot_20220620-220044_Chrome.jpg

중국 고대 국가인 한나라의 제16대 황제이자, 후한의 초대 황제로, 왕망역성혁명으로 몰락한 한 왕조의 복벽을 이뤄낸 군주이다.

는 수()며 자는 문숙(文叔)이었다. 기원전 6년에 태어나 서기 57년에 붕어했다. 재위기간은 서기 25년부터 57년이었고, 묘호는 세조(世祖)였다.

비록 전한과 후한 황족의 계통 사이에 거리가 있고, 전한의 황족이 특권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전한과 후한은 나라 이름도 같고 국성(國姓)도 같았다. 단지 왕망 때문에 잠시 끊어져서 전/후로 나누어 부르는 것뿐이다. 그래서 광무제 또한 왕조를 새로 세웠다기보다는 다시 일으킨 황제로 여겨져 묘호가 '세조'였고, 대수도 전한 시절까지 포함하면 '16대'가 된다. 《후한서》에 따르면 시호인 광무는 한 왕조를 부흥시켰다는 뜻에서 (), 환난을 평정했다는 뜻에서 ()의 문자를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항렬로는 전한 제11대 원제의 아들 항렬이었기에 일단 원제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취했고, 때문에 원제까지는 태묘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형제 항렬인 제12대 성제, 조카 항렬인 제13대 애제, 종손자 항렬인 제14대 평제는 서도 장안에 별도로 마련한 시설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후대처럼 일세 일원제를 시행한 황제는 아니지만 한 개의 연호를 오랜 기간 사용한 군주이기도 하다. 건무(建武)라는 연호를 31년간 사용했고, 나머지 1년 동안에는 '건무중원'(建武中元)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사실상 한 연호를 쭉 썼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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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비와 자녀

젊은 시절 황제의 행렬 앞에 선 화려한 집금오[1]를 보고,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
라고 했다. 후에 황제가 되고 나서 이름난 미녀였던 음려화를 아내로 얻었다.

비록 음려화가 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황후는 곽성통이 되었으나[2], 광무제는 음려화를 전쟁터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총애를 했고, 후에 음려화가 아들을 낳은 뒤[3] 곽황후가 이를 질투하자 이를 구실로 황후를 음려화로 교체했다. 이때 태자도 장남 유강에서 음려화의 아들이었던 명제로 바꾸었다.[4] 하지만 곽씨 가문 및 곽 폐황후 소생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인다거나 하진 않았고, 나름대로 적절하게 대접해 주었다. 황후에서 폐위하긴 했어도 대우 자체는 황후 수준을 유지했다고 한다. 음려화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서 황태후가 되었고 죽어서는 광렬황후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광무제의 능에 합장되었다.

자식은 모두 11남 5녀였다. 이 중 폐황후 곽성통은 5남 3녀를 낳았고, 광렬황후 음려화는 5남 1녀를 낳았다. 광무제의 후손들 중 영제, 소제, 헌제 등의 황제들을 제외하고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이 2명이 있는데 바로 광무제의 6대손인 유우와 또다른 후손인 유엽이다.

유우의 5대조가 곽 폐황후의 소생이자, 광무제의 장남이었던 동해공왕 유강(劉彊)이었는데 원래 황태자였으나 어머니가 폐후가 되고, 광무제의 4남이자 이복동생으로 음려화의 소생이었던 명제에게 밀려 황태자 자리를 내주었다. 유엽은 광무제의 7남이자, 유강의 동복형제였던 부풍질왕 유연(劉延)의 후손이었다.

4. 후세의 평가

훗날 제갈량조식과 논쟁하면서 쓴 글에서,
"한나라 고조의 개국 공신들은 흔히 광무제의 공신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무제가 너무나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에[5] 공신들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지만 능력이 부각될 만한 위기 상황이 적었던 것뿐이다."
라고 했다.

한 예로 유림이라는 사람이 광무제에게
"적미군이 황하 동쪽에 진을 치고 있으니 재빨리 수공을 쓰면 이들을 전부 물고기 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그런 잔인한 방법은 쓰지 않겠다면서 거절했다.

공신들의 일화보다는 본인 스스로 해결한 일화가 더 많이 소개되는 경향이 있는 군주인데, 한고조 유방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영웅상보다는 전형적인 서양식 영웅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광무제는 뛰어난 능력(무력, 용인술, 전술, 전략, 통솔 능력 등)을 바탕으로 큰 위기없이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가 낳은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었다.

사실 차지한 영토나, 돌아가는 형세로 봤을 때 광무제와 비견될만한 자는 한고조나 유비가 아닌, 삼국시대에 가장 큰 판도를 확보한 조조다. 판도가 어느 정도 안정된 상황에서도 적어도 10년 동안은 천하가 분립된 형세였는데, 훗날의 유비 포지션인 익주의 공손술, 마등 포지션인 외효, 공손연 포지션인 팽총, 관중 일대에 할거한 독립 군벌들, 그리고 그 외 나머지 지역[6]을 모두 일단 확보한 광무제 유수의 구도였다. 동시대 다른 군벌들이 유수더러 천하의 8할을 차지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유수의 휘하 장군들은 압도적인 판세와 자원에 비해선 고전한 편이었고, 유수 본인도 기발한 전술이나 창의력은 후대의 조조보다는 좀 못해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광무제의 공신들 중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면 베트남을 원정한 마원이 있다. 이 사람은 '노익장' 고사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또한 운대 28장이라 하여 훗날 당태종의 능연각 24공신처럼 광무제를 도와 한나라를 중흥시킨 공신 28명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았는데, 대표적으로 광무제의 명참모인 등우와 동료들과 공적 다툼을 할 때마다 큰 나무 뒤로 숨어버려서 '큰 나무 장군(대수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던 풍이가 있었다. 하지만 마원은 운대 28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광무제의 며느리인 "마황후"가, 공신들이 득세할 것을 염려해 황제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7]

훗날 삼국시대에 한나라를 멸망시킨 조조의 앞길을 가로막은 상징적인 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는 사실상 중국 최초의 통일 대제국이었으며, 중화의 중심이었다.[8] 그 이점으로 당시에는 유가 사상과 함께 중화제국의 황제는 유씨만이 할 수 있다는 사상이 강력하게 지배했다. 조조조차도 자신의 세력 내부에 남아있는 한나라의 황제, 즉 국성 유씨에 대한 존경심을 경계하며 끝내 본인 생전에 위왕에서 그쳤는데 그러한 분위기의 시작은 한(후한)니라를 중흥시킨 광무제 유수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9]

전한 말기에 왕망이 제위를 강탈할 때만 하더라도 유씨가 국성이라는 느낌보다는 황제이니 존경한다라는 분위기였으며, 전한이 무너지자 다들 왕망에 반항을 하기는 했지만 군벌들이 왕이나 황제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또다시 제위에 오른 것은 광무제 유수라는 희대의 영웅이었고, 다시 황성이 유씨가 되자 하늘이 유씨에게 (한나라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은) 한족 전체의 황제위를 주었다는 분위기가 성립되었다.

실제로 후한(동한) 말기의 난세가 기본적으로 전한•후한 교체기의 난세와는 달랐던 것이, 전한•후한 교체기의 반란들은 전한이 이미 왕망에게 망하고 나서 각 군벌들이 진한교체기처럼 왕이나 황제를 칭하며 일어났지만, 후한 말의 군웅할거때는 유씨를 황제로 내세우거나[10] 유씨가 황제를 자처하며[11] 세력을 키웠다. 물론 본인이 마음대로 자처한 원술 같은 케이스도 있었지만 원술의 최후와 악명을 생각하면(...). 결국 이런 기조는 촉한이라는 유씨의 한나라를 계승한 국가가 삼국시대의 한 축으로 정립되어, 한나라 최후의 여명을 이어나간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비판

중국의 혼란을 수습하였다는 점에서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대개의 군주들이 그렇듯 비판 역시 교차하고 있다.

지방 호족들의 경우는 난세에 일어난 터라 배제할 수가 없었다. 고려를 건국한 창업군주 왕건과 비슷한 경우인데 정말 순전히 개인 세력만으로 천하통일을 이루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참작의 여지가 있다. 특히나 광무제가 봉기했던 남양 일대의 경우는 호족의 영향력이 더욱 컸기에 불가항력적인 부분이었다.

직언과 국방 문제는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일단 그 사례가 매우 적을 뿐더러 광무제가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많은 신하들과의 미담도 있긴 하지만, 일단 본인이 워낙 뛰어나니 본인의 의사를 더 중히 여긴 듯하다.

도참 사상[12]은 광무제 전후의 몇몇 명군들에게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본인이 거기에 좀 심취하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후한은 확고한 유교 사회로 이루어졌다. 철저히 개인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에 후에 일어난 수많은 도참 사상을 배경에 둔 세력들에 책임을 묻기는 좀 힘들긴 하지만, 황제로서 그 시발점이 된 것은 비판점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5.1. 호족

광무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보통 후대에 큰 우환이 되는 실책을 하나 남겼다는 것을 꼽는다. 바로 호족 견제의 실패가 그것이다.

광무제는 본래 남양 출신의 호족으로 그가 세력을 일으킨 남양 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인해 많은 호족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광무제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을 준 이들은 대부분 전한시대에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키운 대토지 소유의 호족들로 등우, 경감, 두무 등의 공신들 역시 이런 남양 호족 출신이었다. 즉 후한 정권은 시작부터 어느 정도 호족 연합 정권의 색채를 띄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광무제는 호족에게 강경한 정책을 쓰지 못했다. 실제로 건무 15년 광무제는 경지와 호적의 조사를 실시했으나, 이 과정에서 부정 조사가 일어나 광무제가 관련자들을 처벌했지만 하북 지역에서 이에 반발한 호족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이 사건은 구양흡과 장급 등의 일부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 그쳤으며 이후 다시는 재조사를 하지 않았다.[13]

이리하여 후한의 호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으며, 후한 말기에는 사실상 이러한 호족들이 중앙 관리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게 되어 환제 대에는 호족들이 우리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그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후한 정권의 지방 통제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4]

다만 후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호족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후한 멸망의 원인에는 외척환관의 전횡도 있었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보면 광무제의 손자인 장제의 무능함과 그의 황후였던 장덕황후(章德皇后) 두씨의 전횡 탓이 컸다. 본래 장제에게는 유경(劉慶)이라는 태자가 있었는데, 장덕황후는 이 유경의 어머니인 송귀인을 모함해 죽여버리고 유경마저 폐태자시켜버렸다. 이후 장제가 붕어하자 조정의 실권은 장덕황후와 그녀의 오빠인 두헌(竇憲)에게 넘어갔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화제는 환관을 중용하여 두헌을 제거했다. 그러나 화제가 26세의 나이로 급사하자 다시 권력은 화희황후 등수의 친정인 등씨(鄧氏)에게 넘어갔으며, 이후 후한의 역사는 외척과 환관의 다툼으로 점철되어 버렸다.[15]

게다가 호족 문제는 당대에는 그리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전한 때만 하더라도 호족 견제책은 여러 대에 걸쳐서 차례대로 행해져 왔으며, 호족의 힘이 강성할 때는 황제조차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전한 때 실시한 향거리선제의 영향으로 지방의 호족들은 인재를 선발하는 인사권마저 틀어쥐고 있었고, 이것 역시 전한 후기 호족의 세력이 강력해지는 데 한 몫을 했다. 애초에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건국하였으며, 광무제와 싸웠던 그 왕망만 하더라도 지나치게 호족을 견제하다가 역풍을 맞고 각지의 반란으로 살해당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16]이었고, 광무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왕망과 반대로 호족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17]

즉 광무제 때의 대호족 정책은 단순히 광무제 본인의 관대함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그보다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큰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오로지 광무제의 실책으로 돌리는 건 그에게 까다롭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치세는 신나라의 실정과 오랜기간 동안의 전란을 수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이것에 매진하여 광무성세(건무중흥)의 번영을 가져온 것만으로도 광무제는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후한의 역대 황제를 넘어서 중국사에서도 명군 중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황제로서 호족 문제를 처리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후대의 황제들이 전한 시절의 문제, 경제와 같은 명군으로 활약했다면 호족 문제는 언급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지방 호족들을 중앙 정권이 처리하기 시작하는 3세대 시절부터 후한의 황실이 엉망이 되어 버리면서 나라가 결판이 나버렸다.[18][19]

5.2. 직언

말년에 광무제 유수는 직언하는 신하의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있었다. 한 예로, 대사도 한흠(韓歆)은 유수에게 곧 기근이 들게 될 것임을 설명하면서 매우 강한 어조로 직언했다. 그러자 광무제는 직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파면하여 농사를 짓도록 했다. 그 다음에 또 조서를 내려 책망하자, 한흠과 그의 아들 한영(韓嬰)은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은 몇몇 일부분의 사례로, 실제로는 직언하는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에 속했다.

예로, 광무제가 하루는 사냥을 하다가 밤 늦게 성문에 도착했는데 성문을 지키는 질운이라는 신하가 밤이 늦어 황제인지 확인할 수 없으니 성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광무제는 할 수 없이 한참 돌아서 다른 성문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날이 밝자 질운이 광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과거 문왕은 사냥을 즐기지 않으셨는데, 폐하께서는 하루종일 사냥을 하시니 이 종묘사직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라며 강력하게 질타를 했는데, 광무제는 오히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질운에게 베 100필을 하사했다. 덤으로 어젯밤 다른 쪽 성문을 열어 준 신하는 대신 벼슬이 깎였다.

또, 광무제의 누이인 호양공주의 충복인 노비가 사람을 죽여 동선이라는 신하가 그 노비를 체포하러 왔는데, 호양공주가 노비를 숨기고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동선이 큰 소리로 질책하고 노비를 끌어내어 법에 따라 사형을 집행했는데, 그로 인해 체면이 깎이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호양공주가 동생인 광무제에게 동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광무제도 화가 나서 동선을 불려들였는데 동선이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며 오히려 황제를 질타하는 말을 하자, 전후 사정을 알게 된 광무제는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오히려 동선에게 300,000전이라는 큰 상금을 내렸다.

이처럼 광무제는 직언을 하는 신하의 말이 옳을 경우,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5.3. 국방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광무제는 전쟁을 싫어하고 국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변방을 어지럽히던 흉노가 분열하고 남흉노가 칭신을 했을 때, 성문교위 장궁이 이참에 군사를 다시 일으켜 멸절시켜 버리지 않으면 분명 훗날 큰 우환이 될 것이라 주장하다가 광무제에게 꾸짖음을 받은 이후로 장수들은 황제 앞에서 감히 군사일을 의논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황태자가 군사 전략의 문제를 물으니, 광무제는 "이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광무제는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부터, 군국병제(郡國兵制)를 폐지하고, 군국의 도위를 파직시키는 등 국방력의 약화를 야기했다.

후한 제국 시절에 이르면, 사실상 전 국민의 군역 의무가 폐지되고, 직업군인(상비군) 위주로 국방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군사력은 강해졌지만 지역별로 장기 근속한 지휘관들에게 군인들이 충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장군 및 군벌들의 군사력이 국가 행정력을 압도하자, 지방 행정이 무너지는 후한 말~삼국시대에 이르면 장군과 군벌들이 할거하게 되었다.[20] 덧붙여 직업군인(상비군) 제도로 바뀌면서 군대 내 유목민족 등 이민족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는데(주로 기병), 이는 장기적으로 5호 16국시대라는 대전란이 도래하는 원인들 중 하나로 작용했다.

5.4. 도참사상

광무제의 문제점 중 하나는 도참사상을 과도하게 추종했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환담은 도참사상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다가 죽었고, 정흥은 도참사상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했으며, 가규는 도참에 나온 글에 주석을 단 덕분에 후대를 받았다.

문제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로마 제국, 인도처럼 종교가 권력과 잘 융합한 서쪽의 사례와 달리 후한 사회에선 이로 인해 참위설이 널리 퍼지면서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과 맞물려 태평도, 오두미도 같은 도교 계열 종교의 사회적 세력 확장에 일조하고, 민심을 동요시켰다는 것이다. 당장 후한 왕조가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가 태평도가 주된 세력인 황건의 난이 아니었던가. 듣보잡 시절에 도참사상에서 용기를 얻어 결국 천하를 통일했으니 이를 좋아했던 것 자체는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있겠지만, 군주로서는 냉철함이 부족해 범한 실책이라 비판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21]

6. 낙랑군과 한국 고대사 관련

다른 황제들이 소득도 없는데 쫀심 때문에 무식하게 유지했던 요동군 등 옛 조선 지역의 주둔 병력들을 계속 골을 썩이느니 포기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그렇지만 낙랑군만큼은 다시금 장악한 군주기도 했다. 정확히는 당시 왕조(王調)라는 인물이 당시 한나라에서 보낸 태수를 살해하고 혼란하던 한나라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고 독립하려 들자, 현지인들이 간을 보다가 진압군에게 순응한 것이다.

이 왕조라는 인물은 후한서의 왕경전(王景傳)에서 등장한다. 여기에 따르면 이 왕조라는 사람은 낙랑의 토착인이라고 하며, 한나라에서 파견한 태수인 유흔(劉憲)을 살해하고 자립해서 '대장군(...) 낙랑 태수'를 자칭한 인물이다. 이 '토착인'이라는 용어며 왕조의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개 고조선의 주민 혈통이나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한화(漢化)된 인물로 본다. 토착인이라는 용어는 대개 그 지역의 이민족 토착 세력을 지칭하지만 성씨가 중국식이라는 게 그 증거. 아마 이러한 배경을 믿고 처음에는 중국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를 제거하고 자립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토착 세력들은 이놈이 영 아니라고 보았는지 아니면 바짝 진격해 오는 후한군에게는 안 될 걸로 보았는지 뒤치기 당하고 5년만에 진압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이 시점에 대입해서 이때 낙랑군을 점령하고 있었던 고구려까지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오늘날 학계의 연구에 다르면 대개 부정된다. 이 부분은 보충 설명이 필요한데, 흔히 낙랑공주호동왕자 설화로 알려진, 대무신왕이 점령한 '낙랑국'은 대체로 함흥-원산만 일대인 동옥저에 위치했던 소국으로 보지만, 후한군이 낙랑군을 수복했을 때 이 지역은 이미 낙랑군으로부터는 분리되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낙랑군을 완전히 점령한 적은 없다는 것. 이러한 얘기가 나온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기원후 44년경 고구려가 점령한 '낙랑'을 후한에게 빼앗겼다는 기사가 등장하기 때문이었다(대무신왕 27년조). 그러나 이 기사는 일종의 착종이다. 이것은 고구려 본기에서 그 이전 기사(기원후 32년)에 '낙랑'이라는 어떤 정치 체제를 고구려가 점령하였다고 나와있으며, 이것을 삼국사기 찬자가 중국의 낙랑군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점령해서 멸망시킨 낙랑군이 후한 때 멀쩡하게 등장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가 일단 점령-후한의 광무제에게 빼앗김이라는 구도를 세웠던 것이다.

본래 이 기사에서 '진짜 사건'은 이어지는 '후한과 고구려가 살수(청천강)로 경계를 삼았다'였으나, 이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서 '(한나라에게 점령했던 청천강 이남의 낙랑군 지역을 빼앗겼기 때문에) 살수로 국경을 삼았다'라는 기사가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하고 후한은 적어도 낙랑군을 놓고 다툰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영역이 확장돼 살수 이북까지 진출했다거나, 후한이 기원후 44년까지 살수 이남의 낙랑군의 체제 재정비를 완료했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 근래 학계의 설명. 현재 국내 주류 학계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대무신왕대에 낙랑군 본토인 평양은 가본 적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고학 자료는 물론이고, 사료상의 교차 검증으로도 고구려가 대무신왕대에 낙랑군을 완전 점령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5년 후인 기원후 37년(대무신왕 20년)에 또 다시 낙랑을 멸망시켰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를 들어 이때 낙랑군과 낙랑국이 서로 구별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낙랑국과 낙랑군을 동일하다고 보았다면 이런 기사가 존재할 수 없어 모순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건 사료나 관련 연구를 자세하게 읽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원문인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낙랑'이라고 하였지 낙랑군이나 낙랑국이라고 한 적은 없고, 32년의 기록에서도 '낙랑국'이라고 나오는 건 아니다. '낙랑국'이라는 것은 해당 기록에서 '그 나라'라고 하거나 왕인 최리가 나타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나 학계에서나 '낙랑국'이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 뿐이다.

그럼에도 5년 후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었던 것도 이미 관련 연구들에서 설명이 제시되었는데, 37년의 '낙랑 멸망'의 기록은 신라본기의 기록을 고구려본기에도 재수록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라본기에서는 같은 해인 유리이사금 14년에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멸망시켜서, 그로부터 유민 5천명이 내려와 신라 6부에 안치시켰다고 한다.(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즉 유리이사금 14년조의 기록의 주체는 신라였고, 신라 입장에서 5년 후에 유민을 받은 일을 설명하면서 고구려가 낙랑국을 멸망시켰다는 내용을 배경으로 배치한 것이었지만, 이를 삼국사기 편찬자가 고구려본기에도 같은 일로 수록했다는 것이다.

신라본기의 내용을 고구려본기에 수록하는 것은 얼핏 보면 이상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같은 기년에서 어느 한 쪽의 국가에 대한 기록에서 타국이 언급되면, 다른 국가의 본기에 수록하는 사례는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전에 비해 간략해지는 사례는 흔하다. [22] 만약 5년 후의 기록을 '낙랑군'에 대한 정벌로 보았다면 오히려 신라본기에서 낙랑을 '국(國)'이라고 칭한 데에서 모순만 다시 발생하게 된다.

다만 37년의 낙랑 정벌 기사와 무관하게 삼국사기 찬자가 정말 낙랑군과 동일시하였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는 있다. 이는 삼국사기 의 저본이 된 자료나, 혹은 고구려에서 이미 이 시기 낙랑군 정벌이 이루어졌다는 사료가 나타났으며, 삼국사기 에서는 별다른 편집 없이 그대로 수록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후한서 광무제기를 보면 건무 8년(서기 32년) 12월 "고구려왕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연도로 계산하면 이 때 광무제한테 공물을 바친 고구려왕은 고구려의 3번째 임금 대무신왕 무휼이다. 또한 광무제기의 건무 25년(서기 49년) 10월자 기사에는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23]

7. 관련 일화들

나중에 황제가 되었을 때 과거 글공부 같이 하던 친구인 엄광을 초청해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엄광은 요임금허유의 고사를 들어 거절했다. 이에 광무제는 후하게 친구를 대접하고 옛날 얘기를 같이 했는데, 그가 옛날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막대하고 자면서 다리를 올리고 레슬링 기술을 걸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근데 나중에 웬 떠돌이 별(객성)이 황제의 별을 범하는 것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온 점성관에게 "친구인 엄광이 내 배 위에 다리를 올리고 자서 그렇다." 하고 허허 웃고 돌려보냈다. 함석헌은 이것을 보고 엄광에게 권력에 주눅들지 않는 들사람[野人]의 기개가 있다고 평가했지만, 이보다 황제라는 존귀한 지위에 올랐어도 그 지위나 권위에 연연하지 않고 옛 인연을 한결같이 벗으로서 대해준 광무제의 관대함 또한 눈여겨볼 일이다. [24]

광무제의 누이인 호양공주의 일화도 유명하여, 조강지처라는 말이 그녀에게서 유래했다. 호양공주는 젊어서 과부가 되었는데 홀몸인 누나가 딱해보였는지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냐고 물어보았고 호양공주는 송홍을 지목했다. 그런데 송홍은 이미 아내가 있었고 이 때문에 광무제는 송홍이 자신의 누나를 아내로 맞는 대신 지금의 아내와는 헤어지게 하기 위해 그를 불러 "사람이 출세하면 친구를 바꾸고 부유하게 되면 아내를 바꾼다는데 자네는 어떠한가?"라고 묻자 송홍은 "신은 가난할 때 친했던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되고,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는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臣聞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광무제의 누나 새신랑 만들어주기 계획은 실패했다(...)

그녀에 대한 다른 일화로는 강직한 현령인 동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호양공주의 하인 중 한 명이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공주의 위세 때문에 다른 관원들은 감히 그를 체포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동선은 이런 위세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하인이 공주가 탄 수레를 몰고 나오자 그 자리에서 하인을 체포하고 공주에게 호통을 쳤다. 당연히 화가 난 공주는 광무제에게 고자질했고, 광무제는 당장 동선을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그런데 끌려온 동선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폐하께서 천하를 일으키셨다지만 겨우 가노 따위가 살인하는 걸 놔두면 어떻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신은 자결을 하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나서며 궁궐의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서 자살을 시도했다. 깜짝 놀란 광무제는 이를 말리고 동선에게 '그만하고 공주에게 머리 숙여 사죄라도 해라'라고 명했지만 이 조차 따르지 않았다. 광무제가 신하들을 시켜서 억지로 동선의 머리를 숙이게 하려 했지만 끝까지 저항했다. 이 모습을 본 호양공주는 어찌 천자가 명령 하나 제대로 못 내리냐며 기막혀했고, 광무제는 웃으면서 '고개 뻣뻣한 현령(强縣令)은 이만 나가도록 해라'라며 35만 전의 상금을 수여하고 내보냈다.[25]

위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조조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식제갈량과 서신을 통해 현대로 치면 키보드 배틀을 펼친 적이 있다. 조식은 광무제를 추켜세우며 자기 아버지를 광무제에 비견하는 의도를 드러냈다. 반면 제갈량은 자신의 주군 유비한고제에 비견하는 의도를 드러내어 한고제를 칭송했다.

일본 역사에서 광무제를 본받았던 인물이 있으니 제96대 천황 고다이고 덴노였다. 중세 일본은 천황 대신 천황의 신하 쇼군이 실제로 지배하는 막부 체제가 백수십년[26] 자리잡혀 있었는데, 고다이고는 고대 일본처럼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로 되돌리기 위해 막부, 싯켄, 관백 등을 죄다 폐지하는 겐무 신정을 시도했다. 왕망을 물리치고 한나라를 재건한 광무제와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는 입장이었던 셈. 하지만 광무제와 달리 그는 결과적으로 실패해 남북조시대를 열었고, 고다이고에서 이어진 남조가 패배해[27] 결국 쇼군이 다스리는 막부 체제가 이후 500여년을 더 이어갔다. 겐무 신정의 '겐무'가 광무제의 연호 '건무'를 본뜬 것이다.

8. 대중매체에서

아무래도 초한지삼국지에 비하면 위기가 없다고 해도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성군인 만큼 사극의 소재로 쓰기엔 적당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2016년에 중국 강소위성 TV에서 52부작으로 방영된 '수려강산지장가행(秀麗江山之長歌行)'이라는 임심여가 주연인 드라마가 나왔다. 광무제 유수 역은 보보경심에서 13황자 역을 맡았던 원홍이고 임심여는 광무제의 연인인 음려화 역. 실제 방송 기간은 2016년 7월 21일부터 2016년 8월 19일까지이다. 한국에선 2017년 1월 CHING을 통해 방영되었다.[28]

물론 실제 역사대로 가면 시나리오가 '덕이 있고 유능하신 광무제 폐하께서 일어나 적들을 다 쳐부수고 후한을 세웠다' 정도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으로 만든 듯하다. 이 덕분에 음려화도 본디 역사와는 달리 광무제의 공신 운대 28장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력 본좌가 되어 활약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사실 임심여 쪽에서 드라마 제작에 참여해서 이렇게 음려화 비중이 늘어난 거 같지만.

자세한 줄거리나 캐스팅은 해당 포스팅 참고.

그래도 명나라 시절 역사소설 붐이 일면서 견위의 《서한연의》나 나관중의 《삼국연의》 등이 크게 유행할 때, 이 시기도 나름 주목을 받아 사조도 《동한연의》를 편찬하여 나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전술한 두 작품은 물론이고 《수당연의》에도 못 미치는 인기를 보여줬으며, 오늘날에 들어서는 거의 잊혀진 수준으로 매우 얕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즉위할 때에 겨우 나이가 30세였고 사실상 유수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그 이전에 다 일어났으므로, 칭제건원 이후의 스토리 진행이 무척이나 어렵다. 특히 낙양을 차지한 이후로는 자신이 정말로 친정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아닌 이상 수도에 눌러앉아 정무만 보면서 장수들만 지방으로 파견해 군벌, 도적을 토벌하게 했다. 그리고 적들은 유수의 장수들을 상대로 승리해도 세력을 흔들만한 타격을 준 적은 한번도 없는데다, 이길만 하다 싶으면 광무제가 튀어나와 주력을 꺾어버리고 다시 수도로 돌아가니 긴박감도 형성되질 않는다.

트렌디한 스타일로 만들면 이야기가 될 것도 같은지만 광무제라는 캐릭터의 인간적인 매력이 부족하고, 유방과 항우, 조조와 유비 같은 라이벌 구도를 엮어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이어갈만한 적도 없기 때문에 의외로 위의 작품들 외에는 거의 각색되지 않았다. 심심하면 나오는 초한지, 삼국지 관련 작품들에 비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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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흉노 오환 ·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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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기(後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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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나라 때 대궐문을 지키던 벼슬[2] 사실 음려화보다도 곽성통을 늦게 들였다.[3] 훗날의 명제. 광무제에게는 4번째 아들이 된다.[4] 다만 이건 어머니가 폐위되었음에도 계속 태자 자리에 있던 걸 부담스러워한 유강의 태자 퇴위 요청을 들어준 것이었다.[5] 이 글에서 제갈량이 조식의 글을 반박한 이유는 유비를 고조 유방으로 치환해두어 "부하 덕을 보아 한중왕이 된 유비"라는 주장에 맞서 "한고조를 변호함으로써 한 황실의 존립 취지를 되살림"과 동시에 "본인도 뛰어났고 주변도 뛰어난 준걸들이 있었던 광무제에 비할 수 있는 유비"라는 주장을 위해서라는 해석이 있다.[6] 삼국시대 위나라의 판도에서 관중, 옹량, 요동, 요서 일대가 빠진 대신, 형주 남부 절반 일대를 제외한 오나라 영역을 더한 판도였다고 보면 된다.[7] 마원 사후에, 그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자들의 모함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작위가 잠깐 추탈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 또한 있다.[8] 이전 통일 왕조인 는 너무 옛날이었으며, 단일한 제국이라기보다는 연맹체의 맹주격이었고, 진나라는 통일제국으로서의 존속기간이 짧았고, 치세가 가혹했다.[9] 순욱과 같은 한나라에서 관리직을 시작한 호족들이나, 청류파 귀족들 대부분이 한나라의 편을 들었다.[10] 대표적으로 유우를 황족으로 내세우려 했던 원소, 헌제를 황제로 모셨던 '협천자영제후'의 조조.[11] 대표적으로 유표, 유언, 유비 등이 있다[12] 앞날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13] 출처: 《자치통감》, 《진한사》,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14] 출처: 《정론》, 《사민월령》[15] 출처: 《후한서》, 《자치통감》[16] 왕망의 패망이 호족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광무제와 경시제의 집안인 남양 유씨부터가 남양의 유력 호족이었으며, 광무제의 외가인 번씨 역시 남양의 대지주였다.[17] 왕망은 왕전제(王田制)라 하여 호족의 토지 소유를 규제했으며, 6관(六莞)이라 하여 소금과 철에 세금을 매기는 등 급진적인 정책으로 호족들의 큰 반발을 샀다. 이는 전국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출처 : 《진한사》,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18] 냉정하게 말해서, 보통 개국 군주가 공신들을 쳐내지만 그게 불가능한 정치적 상황을 맞이할 경우, 3~4대 군주가 숙청을 단행한다. 초대 군주가 불가능했던 것을 2대만에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그 기간 동안 군주의 권력을 키우는 형태이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고려광종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이다. 전한 역시 태조 유방이 공신들을 토사구팽했지만 공신과 이성왕들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동성왕들을 제후왕으로 삼아야했고, 시대가 지나 국성으로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면서 경제가 다시 숙청을 해야 했다. 이 시기에 활약한 명장이 그 유명한 주아부였다.[19]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단일 세력으로는 부족해서 연합정권을 세웠을 경우, 창건한 군주라도 토사구팽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없이 단일 세력으로 힘을 키워 황제로 올라선 후, 공신들을 때려잡은 명태조 주원장이 특이 케이스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고려의 경우, 태조 왕건 본인부터 이전 태봉의 대호족이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경우 건국자 오스만이 건국 주도 세력인 가지와 일미예(이슬람의 전사들과 성직자, 학자)를 칭했다. 후한의 광무제 역시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건국한 이후부터 등장한 지방 호족에 가깝다.[20] 특히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군사령관이였던 동탁은 이것을 이유로 군대 해산 명령을 불복했을 정도였다. 그가 이 군대를 기반으로 권력을 잡은 후에 제국을 쇠락으로 이끌고 간 것은 《삼국지》를 조금만이라도 아는 역사가라면 익히 아는 사실이다.[21] 그나마 납득할만한 동기를 찾아보자면 광무제는 유씨이긴 하나 굉장히 먼 계통이었다. 한나라의 가계는 크게 고제-문제-경제-무제-선제-원제 라인으로 이어졌는데 광무제 본인은 경제의 가계가 맞았지만 무제의 가계는 아니었다. 즉 이미 140~150년 전쯤에 갈라선 지간으로, 그렇기에 난세가 아니었다면 한나라의 황제가 되지도 못했을 사람이었다. 그렇다는건 본인 말고도 유씨이지만 가계가 먼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정통성없이 그냥 실력만으로 한나라를 재건한 것이었다. 이런 판국이니 다른 유씨들과의 사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선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22]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18r_0050_0020 해당 페이지 주석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고구려본기의 광개토왕 즉위년(392)에 전하는 백제 공격에 대해서는 오히려 백제본기(진사왕 8년 7월조)에는 상세한 반면, 고구려본기에서는 매우 간단하게 나타난다. 곧 백제 측 사료가 원전이고, 고구려본기에서는 이를 간략하게 재수록한 사례로 보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다.[23] 출처: 후한서 1권/ 범엽 지음/ 진기환 번역/ 명문당[24] 이후 광무제는 엄광에게 종종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엄광은 모두 거절하고 낚시와 농사로 생을 마쳤다.[25] 후한서 77권.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동선은 이 상금을 싸그리 부하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26] 이전에 수백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145년간 유지되었고 고다이고 덴노가 무너뜨린 것은 가마쿠라 막부였다.[27] 수백 년 뒤 메이지 유신 후 남조가 정통으로 재평가되었다.[28] 이흠의 소설 〈수려강산(秀丽江山)〉이 원작이라고 한다. 원래는 타임슬립물인데 그 요소를 빼고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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