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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3:24:55

양주십일

1. 개요2. 배경3. 내용4. 후대의 재발견5. 위작 논란6. 병자호란과 연관된 언급7. 기타

1. 개요

揚州十日.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고도 한다.

명청교체기인 1645년 청군에 의해 명나라 제3의 대도시인 양주성에서 10일에 걸쳐 일어났던 대학살극을 담은 양주성 생존자 왕수초(王秀楚)의 일기이다.

2. 배경

명나라 멸망 후 만력제의 손자 홍광제가 남경으로 옮겨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산해관을 넘어 오삼계군을 편입시킨 청군은 별다른 교전 없이 승승장구하며 남하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양주성만이 사가법의 지휘 아래 결사항전했다. 성이 함락된 후 다른 성들에 본보기를 보일 필요성이 있어진 장군들의 묵인과 악에 받친 병사들에 의해 조직적 학살이 일어났다.

3. 내용

열흘에 걸쳐 학살된 사람은 무려 80만 명에 육박한다. 당시 황도 북경성에 이은 제2~제3의 대도시였던 양주성의 인구를 약 80~100만 정도로 추측하고 있는데, 도시 인구의 80%가 깡그리 몰살당한 대학살극이었다. 근현대에 일본군이 일으킨 난징 대학살도 15~30만의 희생자로 추론되는 판국인데, 전근대에 일어난 학살이 후대에 일어난 학살의 규모를 3배나 초월하고 있다.

양주십일기는 이 학살의 현장을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청군이 대로를 휩쓸고 다니면서 아이를 가진 여자들을 납치하는 과정에 대로변 흙탕물에 버려진 수백구의 갓난아이들의 시체들, 성 안과 밖에 성높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쌓인 산처럼 많은 시체들과 시체들에서 흘러나와 세개의 하천줄기를 형성해 온 도시를 휘감은 핏물… 저자의 가족들 역시 참화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학살 도중 큰 형·작은 형과 형수·조카를 잃어버렸고, 저자와 아내·자식까지 3명만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너무 많은 주민이 죽어서 그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마치 호수와 같았고, 그 위에 성의 현판이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는 중국의 소설가인 얼웨허가 발표한 소설 <강희대제> 5권의 끝부분에서도 언급되면서 "어떻게 짐승 같은 만주족과 함께 할 수 있느냐?"라는 문구로 표현된다.

4. 후대의 재발견

그러나 청조 말 일본에 유학간 중국인 유학생들이 일본에 출판되어 있던 이 책을 결국 발견하게 되었고, 당시 유학생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으며, 청조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게 되었다.

1924년 핍궁사건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소조정의 노신들이 대청은 입관 후 도량 있는 정치로 백성들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으나 펑위샹의 부하 녹종린은 "당신이 말하는 것은 청실의 입장이오. 그러나 대청이 입관한 후의 양주십일과 가정삼도는 백성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청실의 항의를 일축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녹종린과 선통제 모두 중국 공산화 이후 대륙에 남아서 마오쩌둥으로부터 구시대의 화해 증거라고 같이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5. 위작 논란

양주에서 학살이 자행된 것은 청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아이신기오로 도도가 내린 도륙령과 마찬가지로 도도가 자신의 전과를 자랑하는 상소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도도의 도륙령으로 80만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왕수초의 일기가 정말 당대인이 그 사건을 겪고 썼다고 믿기에는 의심쩍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양주 토박이라는 왕수초가 썼다고 보기에는 구체적으로 고증이 가능한 지명이 3곳에 불과하며, 신여록 등 명말청초를 다루는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전세과정이 불투명하고, 당시 만주족들이 한족을 남만 오랑캐라고 지칭한 것과 달리 이 책에서는 중국이라고 지칭하는 등 명나라 당대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버젓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기사가 있는 청실록을 포함해 조정이 양주십일기를 금서로 지정했다는 사료가 없다.

문자의 옥을 거치며 대의각미록 등 수많은 금서들이 회수되었지만 아무리 억지로 틀어막는대도 대륙 어딘가에서 이름 없는 농부와 상인들의 집구석이나 무덤에 처박힌 채 한두 권은 살아남아 발굴되거나 구전으로 변용을 많이 거쳐서나마 전해지게 마련인데(대표적으로 설공찬전) 양주십일기는 그 한두 권조차 없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전근대 중국의 서적들이 대거 소실되는 와중에도 홍위병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은 이후에 발견되어 박물관에 전시되는 경우를 생각하면 양주십일기의 실존은 더더욱 의심스러워진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멸만흥한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던 청말민초 시기에 한족 유학생이 이 책을 이상하게도 사건이 일어난 양주가 아닌 일본에서 '재발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위조한 책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사가 장더팡은 양주십일기에 나오는 사망자 수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당시 양주 근처 인구여러 마을의 보고에 의하면 양주지역 전체인구는 79000가구 , 즉 50만 명 정도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청군이 공격해오자 양주성으로 몰려들었는 최대 인원은 20~30만 명이라고 지적했다.

장더팡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호주의 동아시아사 박사인 안토니오 핀네인 역시 양주십일기에 기록된 80만명의 수치는 상당히 과장된 수치로 명청교체기 당시 사상자 수치는 대개 신뢰할수 없는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지적하며 이는 학살의 공포에 대한 진술로 실제보다 상당수 부풀러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양주대학살 당시 양주성 주민은 20~30만명이었고, 기껏해야 양주 주민의 80%인 16~24만명이 죽었을 것이다. 이것도 충분히 많은데..

양주십일 위작을 주장하는 중국인의 글#

6. 병자호란과 연관된 언급

학살에 가담한 청나라 병사들 중에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것으로 보이는 자들이 있어, 한국사와도 연결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나라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아이신기오로 도도도 병자호란에 종군한 인물이었으니 병사들 가운데서도 그런 자들이 있다고 해서 딱히 놀라울 건 없다.
세 병사는 우리들을 어느 저택으로 몰아넣었는데 그 안에는 미모의 여자 몇 명과 다른 만주 병사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끌려온 우리를 보고 크게 웃었다. 부녀자들과 남자를 분리해 각각 다른 방에 몰아넣었다. 우리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보고 미모의 여인들이 아양을 떨면서 달라고 조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칼을 빼앗아 그들을 베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한스러운 지경이었다. 병사가 이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고려(조선)를 정복할 때 고려 부녀자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몸을 내맡기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어찌하여 중국이 수치심을 모르는 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이게 바로 너희들이 이런 난리를 겪는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의 후대의 재발견 문단에 나온 것처럼 만주족 스스로가 중국 병합과 병자호란의 업보를 치르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사적 디테일이 있는지라, 만일 양주십일이 위작이라면 지금은 실전된 어떤 원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7. 기타

이밖에도 가정삼도(嘉定三屠)라고 하여 절강성 지역의 도시인 가정을 청나라 군대가 무려 3번에 걸쳐 잔혹하게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을 벌인 자는 이성동(李成棟)으로, 이름에서 보이듯 한족 출신으로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 장군이었다. 원래 이자성의 부하였던 이성동은 명나라에 항복했다가 남명 정권에서 배척을 받자 청나라로 항복하였고 그 이후 가정삼도를 벌였다. 헌데 이런 일들을 벌일 정도로 청나라에 충성을 다했으나 별로 대우가 좋지 않자 다시 남명으로 항복하였고, 이후 1649년에 감주(贑州) 등지를 공격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남명 조정에서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