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사이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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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사이먼 Paul Simon | |||
<colbgcolor=#77746D><colcolor=#fff> 본명 | 폴 프레더릭 사이먼 Paul Frederic Simon | ||
출생 | 1941년 10월 13일 ([age(1941-10-13)]세) | ||
미국 뉴저지 뉴어크 | |||
성장지 | 미국 뉴욕주 뉴욕시 퀸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배우[1] | ||
소속 | 톰 앤 제리 (1956~1958) 사이먼 앤 가펑클 (1963~1970)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 <colbgcolor=#77746D><colcolor=#fff> 부모님 | 부 루이스 사이먼 모 벨 사이먼 | |
배우자 | 페기 하퍼 (1969 – 1975) 캐리 피셔 (1983 – 1984) 에디 브리켈 (1992 – 현재) | ||
자녀 | 슬하 3남 1녀 아들 하퍼 사이먼, 가브리엘 사이먼, 아드리안 사이먼 딸 룰루 사이먼 | ||
학력 | 포레스트 힐스 고등학교 (졸업) 퀸스 칼리지 (영문학 / 학사) 브루클린 로스쿨 (법학 / 중퇴) | ||
신체 | 160cm, 80kg | ||
혈통 | 유대계 미국인 | ||
종교 | 유대교 | ||
소속 정당 | |||
활동 기간 | 1956년 – 현재 | ||
사용 악기 | 보컬, 기타 | ||
장르 | 포크 음악, 팝 음악, 록 음악, 포크 록, 소프트 록, 싱어송라이터, 월드 뮤직 | ||
레이블 | 컬럼비아, 워너 브라더스, 콩코드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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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포크 음악 역사상 최고의 듀오라고 불리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사이먼으로 유명하다. 1970년 사이먼 앤 가펑클이 해체된 이후 활발한 솔로 활동을 벌였는데, 솔로 활동으로도 사이먼 앤 가펑클에 못지 않은 상업적, 음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현재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과 더불어 미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사상 최고의 송라이터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한국에서 유명한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는 대부분 그가 작곡, 작사한 곡이다. 그 유명한 Bridge Over Troubled Water 뿐만 아니라 America, Mrs. Robinson, The Sound of Silence 등의 곡들도 그가 작곡했다. 솔로 시절의 활동 중에서는 1980년대 45세에 접어들 시점인 1986년에 내놓은 앨범인 Graceland가 매우 유명하며, 이 앨범은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완성도가 높은 앨범으로도 꼽힌다.
그래미 상을 무려 16번이나 수상했고, 올해의 앨범상을 3번 수상하였다.[2] 이는 스티비 원더, 프랭크 시나트라, 테일러 스위프트와 함께 가장 많은 기록이다.
3. 생애
3.1. 유년기~사이먼 앤 가펑클
폴 사이먼은 1941년 어느 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리더였던 아버지와 음악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남이며 밑으로는 남동생 에디 사이먼이 있다.[3] 어릴 적에는 야구와 흑인 음악에 빠져 살았고, 11살 때 아트 가펑클을 만나면서 음악에 더욱 심취했다. 두 명은 청소년 시절 때부터 블루스, 포크 음악, 재즈 음악을 같이 부르면서 친해졌다. 특히 우디 거스리와 그들의 우상인 에벌리 브라더스의 음악을 많이 불렀다고 한다. 폴 사이먼은 12살때 "The Girl for Me"를 작곡하였으며 이 곡이 그의 첫 저작권 등록된 노래다.그는 10살 즈음 학교 학예회 비슷한 무대에서 노래하는 아티를 보고 그의 목소리에 반하며 친해지기 위해 하기 싫다 했던 연극에도 참여하기까지 했다. 친해진 그들은 같이 놀며 아티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테이프에 함께 부른 노래를 녹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종종 둘이 함께 학교 무대에 오르며 노래하다가 곧 동네에서 유명해지면서 1957년도에 아트 가펑클과 함께 "Hey, School Girl"이라는 곡을 녹음할 기회를 얻었다. 이 곡은 빌보드 팝 차트에서 49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후 성적은 저조했고 그들은 각자 학업에 열중했다. 그리고 폴은 그가 좋아하는 음악에 몰두하기 위해 어머니의 뜻을 따라 한창 다니고 있던 로스쿨을 중퇴했다.[4]
사이먼 앤 가펑클은 1964년도에 첫 데뷔 앨범을 냈다. 이때는 단순한 포크 성향이었지만 비틀즈가 미국에 상륙하고, 밥 딜런도 포크 록을 시도하면서 그들도 1966년 "Sound of Silence"[5] 앨범에서는 포크 록 방향으로 선회했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졸업의 감독 마이크 니콜스가 영화 출연을 제안해 아트 가펑클이 음악보다는 영화에 조금 더 큰 관심을 보이자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의 사이는 조금씩,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6] 그 결과 1970년 불후의 명반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발매하며 투어 공연을 돈 이후 사이먼 앤 가펑클은 해체되게 된다. 이후 폴 사이먼은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3.2. 솔로 활동
1960년대 후반 몰아닥친 사이키델릭 록의 열풍으로 당시 록 음악 씬에서는 각국의 다양한 음악들을 록 음악에 접목하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러한 것의 영향으로 폴 사이먼도 솔로 활동을 하며 발매한 첫 음반인 "Mother and Child Reunion"에서 자메이카 음악에 영향을 받은 월드 뮤직을 시도했다. 이 앨범의 독특한 사운드와 자기 고백적인 가사는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고 미국에서 4위에 오를 정도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이후 폴 사이먼은 남아메리카, 자메이카, 남아프리카 등 다양한 국가들의 음악을 자신의 음악에 받아들이며 상업적으로든 비평적으로든 연달아 성공를 거두었다. 그가 1975년 발매한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는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980년대에 들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며 대중들에게서 주목을 받았다. 1985년에는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주도한 자선 기금 프로젝트 We Are the World에 참여했다. 그의 최대 역작인 Graceland는 1986년 발매된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직접 가서 그곳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한 곡의 비중이 높은 앨범으로, 아프리카 토속음악과 팝의 결합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월드뮤직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 때문에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국제적 보이콧을 어겼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롤링 스톤의 "올해의 앨범"을 수상하고 뒤이어 그래미 어워드의 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면서 비평적으로 대박을 쳤다. 이 앨범은 세계적으로 1,600만장 가량 팔렸다고 한다.
이후로도 폴 사이먼은 꾸준한 음악 활동으로 비평적,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1980년대에는 아트 가펑클과 함께 사이먼 앤 가펑클의 재결합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지, 재결합 공연을 많이 가졌다. 가장 최근의 재결합 공연은 2010년에 있었다.
고령의 나이[7]임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Graceland를 제작할 즈음부터 30여 년을 함께한 기타리스트 빈센트 엔귀니가 2017년 말에 작고했다.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그의 죽음에서 자신의 나이가 죽음과 가까움을 새삼 체감했다고 했으며 2018년 폴 사이먼은 콘서트에서 은퇴를 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히면서 그의 노래 중 'Homeward Bound'라는 곡을 타이틀로 한 Farewell 투어를 진행했다. 본 공연의 마지막 무대는 그의 고향 뉴욕에서 열렸다. 다만 2019년 다시 무대 복귀를 선언한 상태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자선 공연같은 경우에만 오른다. 투어를 그만둔 것은 아직까지 확실한 듯 하다.
가장 최근에 오른 무대는 글로벌 시티즌 2021 뉴욕 라이브다. 본래 We love NYC 콘서트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당시 폭풍으로 인해 취소되어 오르지 못했었다. 그래서인지 이후 열린 글로벌 시티즌 라이브에 콜드플레이 공연이 끝난 다음 크리스 마틴의 소개 이후 깜짝 게스트로 무대에 올랐으며 The Boxer와 Sound of Silence를 불렀다. 여전히 정정하시다.
22년에 들어서는 영 소식이 없던 중,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깜짝 게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그의 노래들을 커버하던 후배 가수들 옆에서 직접 기타로 American tune의 반주를 쳐주고 자신의 히트곡인 Graceland, Sound of Silence, The Boxer 등을 불렀다. 80에 이른 나이임에도 호흡이 조금 부족한 것이나 이전보다는 힘이 없는 듯한 점을 제외하면 목소리도 노래도 모두 그대로다.
8월 15일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 중계 화면에서 깜짝 등장했다.[8] 중계되는 화면 한쪽 구석에서 기타를 치며 Mrs.Robinson을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중간중간, 경기를 보면서 아쉬운 부분이나 한두 마디를 보태며 재치있게(?) 부르는 모습을 팬이 직접 TV 화면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팬이 올린 트윗[9]
현재는 선배 가수인 디온(가수)[10]과 함께 앨범 제작을 하고 있다.
4. 디스코그래피
- The Paul Simon Songbook (1965)
- Paul Simon (1972)
- There Goes Rhymin' Simon (1973)
-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 (1975)
- One-Trick Pony (1980)
- Hearts and Bones (1983)
- Graceland (1986)
- The Rhythm of the Saints (1990)
- Songs from The Capeman (1997)
- You're the One (2000)
- Surprise (2006)
- So Beautiful or So What (2011)
- Stranger to Stranger (2016)
- In the Blue Light (2018)
- Seven Psalms (2023)
4.1. 싱글
4.1.1. 빌보드 1위 곡
- 50 Ways to Leave Your Lover (1975)
4.1.2. 빌보드 2위 곡
- Kodachrome (1973)
- Loves Me Like a Rock (1973)
4.1.3. 빌보드 3~10위 곡
- Mother and Child Reunion (1972, 4위)
- Slip Slidin' Away (1977, 5위)
- Late in the Evening (1980, 6위)
5. 여담
* 폴 사이먼과 조지 해리슨은 둘 다 세계 음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조지 해리슨이 인도 음악에 심취했다면, 폴 사이먼은 남미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 유대교 신자이지만 독실한 유대교 신자는 아니며, 거의 불가지론에 가까운 유대교 신자라고 한다. 오히려 그는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말을 남긴적도 있다.
- 존 본 조비나 브루스 스프링스틴[12]과 마찬가지로 골수 민주당원이다. 뉴욕 출신에 포크 음악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실제로도 마이클 두카키스와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운동도 지원한 적이 있다.
둘다 졌지만
- 폴 사이먼의 솔로 곡 중 하나인 You Can Call Me Al의 뮤직비디오가 참으로 재미있다.[13] 뮤직비디오 안의 가수들이 영상 안에서는 립싱크를 해도 상관없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폴 사이먼 대신 그 옆에 있는 코미디언 체비 체이스가 자기가 노래부르는 양 립싱크를 하지를 않나, 엄청난 키 차이[14]로 폴에게 굴욕을 준다.
- 소싯적 여자에게 인기가 좋았던지라, 케시 이외에도 페기 하퍼와 결혼해 첫 아이인 뮤지션 하퍼 사이먼을 얻었으며[15] 셜리 듀발과 잠깐 사귀고 1982년 스타워즈의 레아 오르가나 역의 배우 캐리 피셔랑 두번째 결혼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캐리하고도 캐리의 마약문제로 1년만에 이혼.[16] 이후 10여 년간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사이로 지내오다 1992년, 자신에게 대쉬해온 에디 브리켈이라는 가수와 결혼해 슬하에 자녀 셋을 두고 30년째 해로하고 있다.[17]
- 간혹 가정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상은 좀 다르다. 우선 2014년, 평소보다 격해진 부부싸움을 듣게 된 이웃의 신고로 폴 사이먼과 에디 브리켈은 경찰에게 체포된 건 사실이다.[18] 경찰의 말로는 무질서한 행위를 한 혐의로 강제 체포를 하게 되었으며, 경미한 부상이 있었지만(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다고) 두 사람 모두 침착한 모습으로 협조했다고 한다.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사소한 말다툼이 평소보다 격해지면서 일어난 일이었고 여타 부부들 사이에서 간간히 생기는 부부싸움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결혼생활 중 싸운 횟수가 2번이었다고 할 뿐만 아니라 조용하며 서로에게 친절한 부부로 이웃들이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심각한 부상도 입지 않았고 서로에게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코네티컷 주에는 가정 폭력에 관해 강제 체포법이 있어 걱정을 한 주변 사람의 신고로 그들 모두 평범한 부부싸움임에도 어쩔 수 없이 체포된 것이며 법정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법정에 서게 된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자신들은 서로에게 안전함을 느끼며, 이후 집으로 돌아가 아들의 야구 시합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즉, 평범한 부부싸움임에도 그들이 폴 사이먼이었고, 에디 브리켈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사가 나면서 단순했던 일이 생각보다 커져버렸다는 얘기다. 현재는 아이들과 함께 알콩달콩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 SNL과 인연이 깊으며, 총 13회 출연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 깨끗한 사생활로 유명하다. 최근 들어서는 미국 민주당과 함께 의료 보험 개선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 2년 반 정도 전부터 왼쪽 귀의 청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이전과 비교하여 8% 정도밖에 안 들리는 상태이다.#
[1] 우디 앨런 감독의 애니 홀에서 토니 레이시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2] 사이먼 앤 가펑클로 한 장, 솔로 시절로 두 장.[3] 그 또한 뮤지션이며 1968년 kraft music hall 라이브에서 함께 Anji를 연주했다.[4] 참고로 아트 가펑클은 컬럼비아 대학교 수학과 출신으로 철저한 문과생이었던 폴 사이먼과는 반대로 이과생이다. 또한, 맨처음 건축을 전공했다고 하며 미술사 학사 학위,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한창 전성기였던 1967년 컬럼비아 대학교 교사 대학에서 수학 교육 박사 학위 과정을 마쳤다고 한다. 수학 교사를 한 적도 있다.[5] 성적이 저조해 떨어져있던 중 데뷔 앨범 수록곡인 Sound of silence를 65년도에 프로듀서 톰 윌슨이 그들 몰래 록 버전으로 편곡해 라디오로 내보내며 빌보드 핫100에 오르면서 그들이 다시 모이게 된다.[6] 폴은 아티의 목소리를 정말 좋아했다.(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세상이 멈춘 줄 알았다고 했으니) 그런데 아티가 노래보다 연기를 하니 얼마나 슬펐겠는가.[7] 대중음악의 원로중 원로인 폴 매카트니가 그의 1살 동생이다.[8] 여느 미국인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는 어릴 적부터 뉴욕 양키스의 열렬한 팬이다.[9] 아무 얘기 없던 공계가 이틀이 지나고서야 해당 트윗을 인용했다.[10] 나이도 폴 사이먼보다 2살 위인데다가 1957년에 데뷔해 64년에 데뷔한 폴 사이먼보다 7년 선배이다.[11] 실제로는 그보다 작은 157.5cm라는 얘기도 있다.[12] 앞의 둘은 뉴저지 주를 대표하는 두 음악가로, 뉴저지는 대표적인 민주당 텃밭이며 이 둘도 연예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민주당원으로, 정치활동도 로저 워터스 수준으로 활발히 하는 편이다. 폴 사이먼 역시 성장은 뉴욕에서 했지만,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과거 강성 민주당원이었던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뉴저지 출신인걸 보면 뉴저지는 가히 민주당을 지지하는 음악가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을정도.[13] 인터뷰에 따르면 노래 내용은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14] 체비 체이스의 키는 192cm로, 무려 32cm 차이가 난다.[15] 하퍼 사이먼이 바로 그의 유명한 명반 타이틀인 'Graceland'에서 나오는 첫번째 부인의 아이이다.[16] 하지만 캐리와 나눈 기억들이 강렬했는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이 앨범 'Hearts and Bones'나 노래 'Graceland'에 담겨있다.[17] 위에 서술된 아들인 하퍼 사이먼과 딸인 룰루 사이먼 또한 뮤지션이다.[18] 정말 이웃이 신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에디 브리켈의 어머니가 신고했다는 얘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