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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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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 Han Dynasty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am_Gwok_262_CE.png
지도의 초록색 부분 (262년 기준)
221년 ~ 263년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한조위
별칭 한(漢), 촉(蜀), 촉한(蜀漢), 계한(季漢)
위치 중국 시난(현 쓰촨성 일대)
수도 성도(成都)[1]
면적 1,070,000km² (262년 기준)
인구 900,000명 (221년 기준)
→ 1,082,000명 (263년 기준)
민족 한족, 파촉인[2], 강족, 남중 이족
언어 상고 중국어[3], 파촉어, 한문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도교, 불교[4], 중국 토속 종교
화폐 오수전[5], 직백오수전[6], 직백전, 태평백전
정치체계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유(劉)
역대 황제 소열제 (221년 ~ 223년)
회제 (223년 ~ 263년)
주요 재상 제갈량 (221년 ~ 234년)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베트남|]][[틀:국기|]][[틀:국기|]] (일부)
1. 개요2. 국호3. 역사
3.1. 연표
4. 군사
4.1. 성격
4.1.1. 정책
4.2. 병제4.3. 지휘관
5. 정치
5.1. 막부 성립과 막부 중심 정치5.2. 이민족 지배 정책
6. 외교7. 국력
7.1. 인구7.2. 경제
7.2.1. 농업7.2.2. 특산물7.2.3. 화폐
8. 평가9. 역대 황제
9.1. 계보
10. 여담
10.1. 촉한의 작위를 봉한 대신들10.2. 창작물10.3. 쓰촨성의 관광 유산

[clearfix]

1. 개요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한 국가. 스스로 후한의 계승국을 표방하였다. 소설 삼국지연의주인공이 세운 국가로서 많은 민담의 소재가 되었고 후대에 낭만화되었다.

수도성도(成都)[7]였으며 익주 일대를 다스렸다.[8] 기존 통치 세력이었던 익주목 유장유비가 내부 세력과 손을 잡고 배신하여 형성되었으며, 형주계 호족이 통치의 근간이었다. 건국 이후 오나라에 형주를 상실하고 복수전을 일으켰으나 패퇴한 뒤 동맹을 맺고 위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263년 위나라의 남정으로 멸망했다.

2. 국호

후한을 계승하였다고 스스로 표방하였으므로 정식 국호는 단지 (漢)이었다. 다만 중국사에서 한(漢)이라는 국호를 쓴 나라가 많았으므로, 구분하고자 나라가 위치했었던 지방과 이름을 붙여 촉(蜀), 또는 촉한(蜀漢)이라고 부른다. 성한(成漢) 또한 촉 지방에 위치하였고 한나라를 내세웠으므로, 후대에는 일부가 마지막 한나라라는 뜻에서 계한(季漢)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한(漢)이란 국호는 잘 쓰이지 않았다. 금석문에서 보이듯 위나라에서는 촉로[9]나 촉적[10]이라고 불렀다. 오나라에서는 위나라 영토 분할의 맹약에선 한(漢)이라고 일컬었으나, 손권이 칭제한 뒤에는 공문서에도 일괄적으로 촉(蜀)으로 칭하였고, 손호 때는 '서쪽 속국'이라고 하기까지 했다.[11]

물론 위, 오에서 바라는 대로 불러줄지는 만무했겠지만, 놀라운 것은 장완, 비의, 등지처럼 오나라에 간 사신들도 공식 외교 석상에서 스스로 촉(蜀)이라는 명칭을 썼다는 것이다. 촉은 나라 이름 이전에 익주의 지명이지만, 장완, 비의, 등지는 모두 형주 출신이라 지명으로 말할 거리가 적었고, 이때는 사서에도 나오듯 나라를 뜻하게 사용되었다.[12] 촉한 내부에서는 계한보신찬처럼 한으로 불렀다.[13]

사실 정식국호와 통칭이 다른 경우는 현대사회에도 있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경우는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이고 영어로는 Republic of Korea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흔히 South Korea(남한)으로 통칭되며 공식 외교석상에서도 종종 South Korea란 표현이 쓰인다. 즉 이 나라의 공식국호는 한이며, 통칭은 당대엔 촉, 후대엔 촉한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제3조에 따르면 통칭인 'South Korea'는 잘못된 명칭이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한국을 흔히 South Korea라고 많이 부르고 해외에서도 그렇게 널리 알려져있기 때문에 대화를 편하게 하기 위해 외교관들간의 대화나 비지니스 미팅에서 자국을 South Korea라고 부른다. 당연히 한국의 외교관이나 대사들이 외국에서 영어로 South Korea란 명칭을 썼다고 우리나라의 국호를 남한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듯, 촉나라 사람이 촉이란 명칭을 썼다고 해서 '촉한의 국호 중 하나가 촉'이었다고 보는 것도 잘못된 이해이다.

위나 오와 달리 촉한만 유독 정식 국호를 쓰지 않은 것은 명분 때문이다. 촉한이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가. '한나라가 역적 조비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한나라를 계승한다'란 명분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호를 한으로 한 것이며, 명목상 '한(촉한)'은 중국 영토의 지배자이며 적법한 황제이다. 이 점에서 애초에 외교적으로 오나라에 간 사신이 스스로를 한이라고 부른다면 싸우자는 거나 마찬가지다. 왜냐면 오나라의 손권은 촉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아 칭제를 했기 때문에 '명분'상으론 칭제한 손권은 한나라의 역적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촉한 입장에서 명분상이고, 실질적으로 한나라(후한)은 버얼써 멸망했고 촉한은 후한과 별개의 나라이고 오나라도 별개의 독립국이다. 즉 당시 촉한은 명분 대신 실리를 택해 오나라와 서로 독립국으로서 교류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한'이란 명칭은 위에 언급했듯이 오나라 입장에선 상당히 실례가 되는 국호며 촉한을 한의 후계자로 인정해버리면 자기가 역적이란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 마찬가지로 위나라에서도 촉한=한을 인정해버리면 자신의 정통성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오는 절대로 한이란 명칭을 쓰지 않았고, 오와 교류하는 사신들은 미묘한 지위로 인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촉이라는 통칭을 사용했다.

정사 삼국지』에는 촉으로 나오나 촉서에서는 한으로 부른다. 그 밖에 『자치통감』은 촉한으로 기록했고, 각주에서 촉, 유촉의 표현을 병용하였다. 촉한정통론이 대두되고 저술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에선 한이라고 불렀으며, 『삼국지평화』는 촉한을 썼다. 『삼국지연의』는 촉으로 기술했으며 『삼국지집해』는 주석을 단 사람들에 따라 촉, 한, 촉한을 병용하였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판소리 등지에서 '한말 위한오 시대'라는 표현이 보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촉, 촉한이 병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중종 때 백성들에게 유교적 덕목을 전파하고자 만든 『이륜행실도』에서 '촉'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기에, 대중 또한 촉을 일반적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 계한(季漢)은 실록에서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으며 별반 불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위, 손오에 대응하는 유촉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자치통감』 호삼성주에서 이미 확인되고, 국내에 들어올 때의 『통감강목』 판본에서도 사용된 유서 깊은 표현이다. # 현대 저서에서는 이중톈의 삼국지강의에서 사용되었고, 이외에 중국 내 삼국지 간행물의 이름으로 사용된 예도 있다. 이렇게 국명에 왕실의 성씨를 가져다 붙이는 것은 국호는 같으나 국성이 다른 나라들을 구분하기 위함이다.[14] 다만 위에 언급됐다시피 이 나라의 국호는 '촉'이 아니라 '한'이기 때문에 정식 국호를 아예 뺀 유촉은 적절한 칭호는 아니다. 조위, 손오는 둘 다 국호가 들어갔는데, 유촉은 국호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칭호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 나라의 정식 국호는 한이나, 나라 밖에서 이들을 일컫을 때나 외교석상에서 외국에게 스스로를 지칭할 때 통칭으로서 촉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후대에는 손쉽게 구별코자 촉한, 유촉 등을 썼다.

3. 역사

3.1. 연표

208년 적벽대전
214년 파촉 평정
218 ~ 219년 한중 공방전
219년 유비 한중왕 즉위, 형주 공방전
221년 유비 황제 즉위 / 촉한 건국
222년 이릉대전
223년 유비 사망, 유선 즉위
225년 제갈량의 남정
227 ~ 234년 제갈량의 북벌
244년 흥세 전투
247 ~ 262년 강유의 북벌
263년 위나라의 남정으로 멸망

4.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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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성격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가서 광릉(廣陵)을 차지하고 원술과 싸웠으나 또 패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선주전(先主傳)[15]
장차 패(沛)로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려 하자,
진수, 『정사 삼국지』, 선주전(先主傳)[16]
한 달 남짓 지나자 흩어져 달아났던 사졸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진수, 『정사 삼국지』, 선주전(先主傳)[17]

당대의 군은 부곡이라고 하여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뭉친 세습 군사 집단을 기반으로 이루었는데, 유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유비가 이끈 군대는 다른 세력에서 얻었거나 어떤 세력의 잔존병들을 규합해 모은 경우가 많았다. 처음 군사적으로 발흥한 때에도 유주태수 공손찬 휘하에서 병사 천여 명과 유주의 오환족 기병을 이끌고 있었고, 서주 목 도겸에게서 단양병 4천을 받았던 것도 확인된다.

그러나 유비는 일생의 대부분을 각지를 떠돌아다녔으므로 정확한 병력이나 휘하 군사 집단의 특성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촉군이라 일컬어지는 대상은 바로 형주 9군과 서천(익주)군의 군세가 결합된 시기부터이다.

위서 문제기를 보면, 이릉대전 때 병력이 4만인데 마필(馬匹)은 고작 2, 3천 필에 불과했다고 나온다. 말은 수송이나 운송에도 이용되었으므로, 기병(騎兵)은 본질적으로 훨씬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이 복속시킨 운남 지방에서 소수나마 군마로 쓰기 좋은 말이 나왔기에 기병을 키울 기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량주나 병주, 유주 같은 북방 지역의 군마 생산력을 따라갈 수준은 아니었다. 따라서 촉은 위의 대규모 기병대에 맞서고자 팔진도 같은 수레방진을 채택하였다.
파일:D79QPK_VsAA2dbG.jpg
제갈량의 북벌 때 촉병의 모습

촉한은 방호구와 병장기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는데, 촉한의 대장장이 포원은 야금술을 발전시켜 튼튼한 갑옷투구, 또 신도(神刀)라는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또 제갈량은 원융노라고 불리는 십시연노를 개발하여, 『화양국지』에 따르면 힘 좋은 병사 3천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 화살은 쇠로 만들고, 그 길이가 8촌이었는데 한 번에 10발씩 쏠 수 있었다고 한다. 군량 수송용으로 외발 수레인 목우유마 개발이 유명하나, 사서에는 "목우로 운송했는데, 군량이 다해 군이 퇴각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어 한계는 명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이 이끄는 군세는 정돈되어 가지런하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했다고 전한다.

4.1.1. 정책

생산력이 풍부하고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 덕분에 난세 때마다 파촉을 근거지로 독립 세력이 들어섰으나, 중국의 중심은 늘 중원이었고, 따라서 중원이 안정된다면 변방 지역에 불과한 파촉은 절대적인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방어에 유리하다는 것은 그만큼 고립되었다는 뜻으로, 영향을 확장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한실 부흥을 국가적 명분으로 삼았던 촉한은 끊임없이 대외 팽창을 꾀했다. 한중 공방전을 필두로, 제갈량의 북벌 다섯 번이 있었는데 위연은 더욱 더 빠르고 공세적으로 나아가고자 자오곡 계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강유는 일곱 번이나 출정하였는데, 단곡 전투에서 패배한 뒤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군사 활동이 방어를 기준으로 재편성되었다.

4.2. 병제

중국의 현대사학자 백수이(白寿彝)가 쓴 『중국통사』[18]에서, 사민부[19]에 나오는 대갑장사(帶甲將士)를 세병제를 전제로 한 수치가 아니라 상비병의 숫자로 간주하고, 한나라 때 징병제가 그대로 실시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듯 촉한의 병제는 한나라의 병제를 모방하였고, 그 때문에 위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큰 틀에서 다르지 않을 뿐, 촉한 특색의 편제도 있었으므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촉한 소열제는 처음에 다섯 군을 두었다. 장교의 편제는 대략 서한과 비슷했으나, 사병 편제는 산기[20]와 무기[21]의 구분이 있었다. 제갈무후가 촉을 다스릴 때는 팔진법으로 전사들을 조련했다."
왕응린(王應麟), 『옥해(玉海)』
"촉은 다섯 군을 뒀는데, 좌군과 우군에는 장군, 독, 호 등을 한 명씩 두었고, 중군에는 사, 감, 호, 전, 참군 등을 한 명씩 두었으며, 전군에는 사, 장군, 감, 호, 독군 등 한 명씩 두었고, 후군에는 독과 장군을 겸하는 한 명을 두었다. 그 장교의 편제는 대략 한과 같았으나 사병의 편제는 돌장, 무전, 빈수, 청강, 산기, 무기 등의 구분이 있었는데 모두가 촉나라 사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역대병제(歷代兵制)』

촉의 중앙군은 전(前), 후(後), 좌(左), 우(右)의 사군[22]중군(中軍)으로 나뉘었다. 이때 사군은 조위의 외군[23]과 비슷했으며, 중군은 중도호(中都護), 중감군(中監軍), 중령군(中領軍), 중호군(中護軍), 중참군(中參軍) 등의 관직을 설치한 중앙 기동 부대와 좌우우림부(左右羽林部), 호분(虎賁), 호보영좌중우삼부(虎步營左中右三部), 호기영(虎騎營) 등으로 구성된 수도 방위군으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도 한나라를 모방하여 중앙에 둔기(屯騎), 보병(步兵), 사성(射聲), 월기(越騎), 장수(長水) 등 다섯 교위(校尉)를 두었다.

지방군은 크게 전방 도독(都督)의 직할 부대와 각 군현(郡縣)의 방위군으로 구성되었다. 문산군(汶山郡) 서오부(西五部)의 험준한 요충지에는 문산(汶山), 용학(龍鶴), 염방(冉駹), 백마(白馬), 광용(匡用) 등 다섯 곳에 방어시설을 설치하고 아문(牙門)을 배치하여 아군(牙軍)을 주둔시켰고, 공도현(邛都縣)에는 칠부영군(七部營軍)과 사부사유(四部斯臾) 등을 설치했다. 242년에는 적갑(赤甲)과 북군이아문(北軍二牙門)을 창설했고, 부릉군(涪陵郡)에 조군군(助郡軍)을 설치했다.

제갈량 시대에 남중(南中)의 청강(青羌)을 촉으로 이주시켰고, 파종(巴賨), 청강 등 이민족을 군에 편제시켰다. 《후한서》의 주석을 보면 "수병도 촉병이다(叟兵亦爲蜀兵)"라고 했는데, 수(叟)란 촉에 거주하는 저족, 강족과 같은 계통의 소수민족 별칭으로서 큰 부족은 일곤(曰昆)이라 하였고 작은 부족은 일수(曰叟)라 하였다. 종수(賨叟)나 판순만(板楯蠻)이라고 불리던 빈수(賓叟)는 고대 파인(巴人)의 한 갈래로 낭중(閬中)과 가릉강(嘉陵江) 중류지역에 분포하였다. 주로 나(羅), 박(朴), 독(督), 악(鄂),도(度), 석(夕), 공(龔)의 7대 씨족으로 구성된 이 소수민족은 노(弩)를 아주 잘 다뤘다. 파인의 영수인 범목(范目)은 일찍이 저 일곱 씨족을 이끌고 한 고제 유방을 도와 관중 지역을 평정하기도 했다. 청강(青羌)은 청수(青叟)라고도 한다.《화양국지》《남중지(南中志)》에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하고 "남중의 경졸[24]인 강청 만여 가구를 촉으로 이주시키고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무전[25]으로 삼고 비군이라고 불렀다. 그 (비군을 제외한) 약한 무리는 큰 씨족인 초, 옹, 누, 찬, 맹, 양, 모, 이 와 묶어 부곡으로 삼고, (비군으로는) 오부도위를 편성하여 오자라고 불렀다"라고 청강에 대해 기술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민족들이 기존 병제에 일부분으로 편입되기보다는 종병(賨兵), 수병(叟兵), 청강병(青羌兵) 등 별도로 편제되었다.

엄밀히 말하여 이민족 부대라는 명확한 사료적 근거는 없으며 그 규모나 발생 시기, 무장이나 지휘관의 연원이 모두 불확실하다. 그러나 최대한 확실한 부분에 대해서 적었으며, 바이두 백과에서는 도겸에게서 받았던 단양병 기원설, 마초 부곡 기원설, 서남 소수민족 부대설을 차례로 언급하였다. 田余庆 교수는 이들을 제갈량의 북벌에 종사한 이민족 부대로 보았다.

이처럼 촉의 군대는 중앙과 지방의 중외양군 체제로 되어 있으며 한족 뿐 아니라 소수 민족도 모병하여 특기에 맞게 군대로 편성했다. 촉의 중앙군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 후, 좌, 우군은 정벌을 담당하고, 중군은 정벌 및 경기지방과 도성의 숙위를 담당하였다.

4.3. 지휘관

촉한의 지휘관들은 대개 입촉까지 함께한 1세대, 이릉대전에서 중진을 맡은 2세대, 제갈량의 북벌에 참가한 3세대, 제갈량 사후부터 멸망까지의 4세대로 나뉜다.

1세대 장수로는 오호대장군이 있는데 장비, 황충, 마초는 특히 야전에서 직접적으로 큰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 다만 오호대장군이란 이름은 후대의 창작으로,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이후 임명한 사방장군(관우/마초/장비/황충)에 익군장군 조운이 여기 해당된다. 관우/장비/조운은 유비의 오랜 부하들로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고, 황충과 마초는 입촉 당시 귀순해 공을 세운 부하들이다.

2세대는 황권, 풍습, 정기, 장남, 부융 등이 있었으나 상당수가 이릉대전 때 사망, 또는 투항했다.

3세대 장수들은 촉한의 지휘관 가운데 가장 위나라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난 장수들이 상당했다. 공성전, 야전 같은 큰 전투에서 위군을 격파한 일이 있는 위연, 오의[29], 왕평, 강유, 장억, 마충, 등지 등이 있고 그 외 사료에 기록이 소실된 원침, 고상, 구부, 진도 등의 군부고관들도 있었다.

4세대는 강유의 북벌을 보조한 하후패, 요화, 장익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기록이 소실된 호제, 왕사, 유은 등이 있었다. 멸망 이후 곽익, 나헌 등은 서진시대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항장의 임용이 두드러지기도 했는데, 아래는 촉한에 투항하였던 무장들의 행보이다.

5. 정치

5.1. 막부 성립과 막부 중심 정치

촉한사영
,蜀漢四英,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


유비가 죽은 뒤로 제갈량승상[31]으로서 한중에 막부를 설치하고, 한중에서 나라 안팎의 모든 일들을 모두 다루었다. 제갈량은 승상으로서 외정, 녹상서사로서 내정을 틀어쥐었는데 중앙의 행정, 인사, 군사, 외교를 모두 총괄하였다. 또 익주목을 맡았는데, 나라 전체가 익주 하나였던 촉한에서 익주목이라 함은 곧 지방 행정과 군사 전체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유염이막을 내지로 돌려보냈고, 요립이엄이 제갈량이 죽자 한탄했던 것은 제갈량이 등용과 탄핵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유사[32]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평명[33]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제갈량, 『출사표[34]

제갈량은 전출사표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태도로 이렇게 말하였지만, 이때 관리를 감찰하는 직책인 사례교위는 바로 제갈량 자신이었다. 다시 말해서, 관원에 대한 상벌을 관련 감찰기관의 판단에 맡겨두라는 제갈량의 요구는, 곧 제갈량 자신의 판단에 맡겨두라는 뜻이며, 유선이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지 말라는 요구였던 것이다.[35]

또 전출사표에서 제갈량은 환제영제의 예를 들어 말하는데, 이로 보아 황제의 친위 세력이 되는 환관들을 정치 전면에 나오지 못하도록 억제했던 듯하다.
丞相亮將北征,住漢中,慮後主富於春秋,朱紫難別, 以允秉心公亮,欲任以宮省之事。
승상 제갈량이 북벌에 앞서 한중에 주둔했을 때, 후주가 어려서 뭐가 좋고 나쁜지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동윤이 마음이 공명하였으므로 그에게 궁궐의 일을 맡기려고 했다.
진수, 『정사 삼국지』, 동윤전(董允傳)[36]

이를 두고 상해대학 교수인 주자언은 『성단에서 걸어 내려온 제갈량: 삼국사신론』에서 "이는 완전히 기군(欺君) 행위이다." 라고 말한다. 나아가 이렇게 탄식한다. "세상 사람들은 조조가 주군을 괴롭히고, 한 헌제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 말하지만, 왜 제갈량의 기군 행위는 보고도 못 본 척하는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유선은 따라서 황실 의례를 맡을 뿐이었다. 제갈량이 죽은 다음인 장완 시대에 막부의 후계자가 된 장완은 정치적 후광의 부족으로 인해 승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유비의 친위 전사집단인 위연을 제거하고 정부를 틀어쥔 이후 수도에는 형주계파를 상서령으로 앉히고 군사는 대사마대장군이 이끌도록 안배했는데, 그 자신이 대사마와 대장군으로 올라 개부, 즉 막부를 열었고, 한중에 주둔하며 국정을 전담함으로서 제갈량의 막부 정치를 답습했다. 차이점이라면 비서령을 두어 상서령과 균형을 유지토록 했다는 점과[37] 또한 본인은 군사를 다룬 경험이 없다보니 군권은 오의, 왕평, 강유 등의 장군들과 분담했다는 점이다.

촉한에서 이런 방식의 패부 정치가 가능했던 까닭은 유비의 사망 이후 형주계파를 견제할 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황후 감부인은 일찍이 죽었으며, 종실유봉은 자결당했고, 장비범강장달에게 살해당했다. 무엇보다 유비가 권력 승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다.
유선이 집권한 뒤, 정책은 제갈량에 의해 주로 진행되었다. 그는 조정 내에서 규범을 제정하고 대신을 훈계하며, 조정의 풍토는 청렴하고 인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촉한의 경제는 해마다 위나라와 싸워도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제갈량은 세상을 떠난 뒤에 촉한의 백성들이 그리워했으며, 그 치국 능력과 효과는 당세와 후세에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도 장완, 비의, 동윤, 강유 등이 제갈량의 정책을 이어갔고, 이후 유선은 환관 황호를 총애해 조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지방의 정치 풍토는 청렴했다.
조곤생(趙昆生), 『삼국 정치와 사회(三國政治與社會)』 제4장 《촉한의 정치와 사회》 제1절 《촉한 정권 출현의 특정과 방식》

5.2. 이민족 지배 정책

촉이 이민족들에게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는 오해가 그간 근거없이 널리 유포되었으나, 실제로는 이민족들과 많은 마찰을 겪었다. 수도인 성도 인근 백여 km 거리의 문산군 이민족조차 오래토록 저항한 사례는 그 단면 중 하나이다. 북부로는 강족 부족들을, 남부로는 남만의 이족들과 접한 촉은 이들을 회유하려 노력하였으나, 정권이 수명을 다하던 순간까지 완벽한 복속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고 죽은 뒤 벌어진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서도 이러한 현실은 잘 드러난다. 일부 사료에서 나오는 윤색된 묘사와 달리, 남만 정벌에서 제갈량이 돌아오자마자 제갈량이 임명한 현지 관료들이 사망하는 대규모 반란이 발생했다. 초기 반란의 근원지이자 성도 인근으로 군사적인 공격을 벌이기까지 했던 성도 인근의 월수군은 이 원정 이후에도 살아남아 독립 세력으로 남아 십수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정복되었다.

남부 원정 자체의 성격도 한계가 명확했다. 손오가 남방 지역을 적극적으로 식민화하여 이민족을 국력에 편입시킨 것과 달리, 촉의 남부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제갈량은 일부 이민족들을 성도와 한중 등지로 강제이주시키고 자원을 착취하는 선에서 원정을 마무리지었지만, 이들은 끝내 촉의 중앙 행정체계에 편입되지 않았다. 이렇게 이민족들을 행정망에 포함시켜 국력화하지 못한 점은 손오와 구별되는 촉 정부 고유의 한계였다.

6. 외교

황제국을 표방했지만 서역, 동이가 조공한 위, 동남아에서 조공한 오와 달리 조공국이 없었다.

6.1. 오나라

이릉대전에서 대패하고 화약을 맺었으며, 장비를 암살하고 도망간 범강과 장달을 돌려받지도 못하였다. 손권이 칭제했음에도 유씨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저버리고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동맹을 유지하였다. 도리어 오나라에 예물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사신들은 가서 한(漢) 대신 촉(蜀)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당시 삼국 중 국력이 최하위였던 촉한이 실리주의 외교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국호 항목에 설명된 것과 같이 '한'이란 국호는 정통이 촉한에 있다는 의미이며 손권의 칭제는 이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한은 오와 위 양쪽으로 적을 둘 여력은 없기 때문에 동맹을 택하였다. 실제로 위에 비해 국력이 한참 열세였던 오 역시도 촉한과 전략적으로 동맹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며,[38] 유비 사후에 맺어진 둘의 동맹은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7. 국력

7.1. 인구

고민 선생의 『위진남북조경제사』에서 촉한의 조세 제도는 아직도 구전산부제[39]일 가능성을 고증한 바 있다. 양문리는 촉한에서 세금을 인구별로 걷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인구를 숨기려 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촉한 정부의 경제 부담은 인구를 숨기지 않는 양민에게 전가되어, 점점 더 많은 인민이 인구를 숨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오기림(吴奇霖), 촉한의 흥망성쇠 50년 #
또 제갈량이 죽은 뒤에 군대의 병사들이 도망가서 서로의 이름을 사칭하여 간사하게 법을 어긴 자가 적지 않았다.
진수, 『정사 삼국지』, 여예전(呂乂傳)[40]

후한 때 익주 서남부인 영창군의 인구만 무려 189만 명에 달했고, 조조장로를 격파하고 파동군과 파서군의 인구 8만 명을 이주시킬 정도로 파촉은 일개 주 하나로 퉁치기에는 본래부터 그 인구가 많았다. 삼국시대의 인구를 추론할 때에는 보통 익주를 인구 순유입지역으로 보는데, 이는 중원의 전란을 피해 촉 땅으로 관동 지역의 인구 수십만 호가 흘러들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촉의 인구는 전란기를 감안해도 다른 지역의 인구보다 그 손실률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두우의 주석에 따르면 촉은 221년 기준 호 20만에 구 90만이었다고 하며,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멸망 직전에 호는 28만에 구는 94만, 군사가 10만 2천에 관리가 4만[41]으로 명시되어, 기록에 나타나는 인구 손실율이 3국 중 가장 높은 기현상이 나타난다.

학자들은 상술한 기록상의 인구를 실제 전체 인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통상적으로는 각 호의 성인 남성 인구만 기록되었다고 간주되며, 따라서 호구에 기록되지 않은 가구의 수를 고려해 보정하는 식으로 실제 인구를 추론한다. 여기에 둔호[42]와, 호족 장원 휘하의 예속민(부곡), 행정망 하에 있지 않은 이민족이 호구조사에서 누락되므로 이들의 인구를 추론해 더함으로써 최종 인구 추론치가 나오게 되는데, 현대 학계에서는 촉의 성립기 인구를 약 434만 4천명, 263년 멸망 당시 인구를 529만 정도로 추산한다.[43]

행정망에 잡히지 않는 인구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점은 삼국시대 국가들에서 일반적이나, 촉의 경우에 행정망에 잡혀 실효지배 가능한 파악인구 대비 병호(병사 인구)와 이호(관리 인구)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이는 촉의 인구 대다수가 지역 호족의 장원에 예속되어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강한 근거 중 하나이며, 실제로 촉에서는 다른 국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국가가 호족에게 사병/예속민인 부곡을 '선물하는' 사례가 나타난다.[44] 촉의 인구는 그만큼 호족에게 강하게 예속되었으며, 중앙의 대민통제력은 낮았다고 볼 수 있다.

7.2. 경제

촉한의 영토는 성도 평원 중심의 파촉, 익주 북쪽의 한중 분지, 익주 서남부의 남중(오늘날의 운남)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파촉 땅은 산이 많지만 관개 농업을 통해 계단식으로 개간했고, 그 안의 넓은 분지는 농사를 짓기에 알맞고 기름졌다. 그리고 날씨는 온후하여 온난습윤한 지역으로 식생의 종류와 양이 풍부하고 각종 작물이 잘 자라며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사천분지의 남쪽에는 장강이 흐르며 서부의 성도 평원은 생산성이 높은 농업지대이다. 동부의 대부분은 해발 500m 이하의 분지로서 비옥한 평원과 구릉 지대로 이루어져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많이 살았다. 한중은 관중 지방과 촉을 안정적으로 분리해 파촉의 생산력을 보호했고 그 자체로도 기름진 땅이었기에, 제갈량은 "민은국부[45]하다."라고 말했다. 남중은 비록 독자 세력에 가까웠지만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산물이 풍부했다.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에서 익주의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원을 도모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으며, 등애는 촉한을 정벌한 직후 촉한의 융성한 소금 산업, 철업을 이용하여 오를 칠 전초 기지로 사용하면 내년 가을, 겨울 안에 오나라까지 거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도 했다. 오나라의 멸망은 익주에서 양성된 수군의 공격이 큰 소임을 담당했다.

문제는 촉의 인구 장악력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익주 외부인의 정복정권이었던 촉은 이릉대전으로 인해 그 지배집단의 세력이 크게 쇠하였고, 이로 인해 호족 휘하의 예속민들을 국가의 관리 하로 이전할 동력이 부재하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위의 인구 항목에서 보듯이,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는 호족 예속민의 비율이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이는 즉 촉이라는 체제가 한중과 사천분지의 인적 물적 자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고대 세입의 핵심인 민民을 호족에게 내어준 결과, 유촉 정권은 한중과 성도 일대에서 나는 귀금속 광산과, 악화인 직백오수 발행에 재정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최초에 임시행정으로 발행되었던 직백전은 기존 화폐의 100배나 되는 명목상 가치를 가진 악화였는데, 이러한 악화가 촉의 멸망 때까지 멈추지 않고 꾸준히 주조되면서 구리 함량과 품질이 뚜렷하게 악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점에서 촉의 중앙재정이 점차 붕괴해가는 양태를 파악할 수 있다.

7.2.1. 농업

도강언은 서촉 농업의 명맥이었다. 제갈량은 이곳의 수리 시설을 계속 유지, 보수, 신축하였다. 또한 익주의 경제는 중원과 같은 심각한 파괴를 당하지 않았고 유비와 제갈량 통치하에서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둔전의 규모도 위, 오만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군량미 환적의 번거로움을 줄이고 소농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익주에는 도강언(都江堰)을 위시하여 양전언(楊塡堰), 오문언(五門堰) 등의 수리 시설이 홍수방지 및 농업용수 공급에 큰 소임을 해내고 있었다.

7.2.2. 특산물

파촉 땅에는 전한기부터 제철 사업으로 갑부들이 많았다. 공명은 이 좋은 쇠와 무릉의 석유, 천연 가스로 무기와 갑옷 따위를 비롯한 쇠붙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고 하며 사금중랑장(司金中郎將)을 두어 농구기와 무기를 제조하게 했다. 염철(鹽鐵)을 정부에서 관리하여 국가적 수요를 만족시켰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 수입도 늘렸다.

그리고 소금 수입을 막기 위해 암염을 개발했다. 촉은 원래부터 정염(井鹽)과 철광자원이 풍부했는데, 정염은 정확히 말하면 지하수에 녹아 있는 소금을 끓여서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당시에 ‘집에 염천이 나는 우물이 있고, 임공(臨邛)의 염정에서는 ‘물 1곡에 소금 다섯 말을 얻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유비는 익주를 점령하자마자 소금과 철을 전매케 했고 당시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행해지던 정염 생산을 화정(火井, 천연 가스)를 이용하여 본격화시켰다. 고대에는 소금이 전략 물자였으므로,[46] 유비는 염부교위(鹽府校尉) 혹은 사염교위(司鹽校尉)를 두고 그 아래 염부전조도위(鹽府典曹都尉)를 두어 염업을 국가가 관리하게 하였다. 이는 후한에서 이미 이뤄지던 염철 관리의 일환으로서 특이할 일은 아니었고, 오와 위에도 마찬가지로 소금을 관리한 기록이 남아 있다.

더불어 공명은 촉금을 국가의 중요 물자라고 인식하고 본래 유명하던 촉한의 비단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규모를 넓혀서 금관이란 기관을 만들어 민영/관영 할 것 없이 직간접적인 관리를 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나라의 특산물로 삼았다. 당시 촉금과 관련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위진 이래 촉금이 생겨나서 양읍의 자리를 빼앗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양읍은 견직물을 생산하는 쪽으로 변하여 결국 얇은 채색 비단은 촉 지방에만 있게 되었다.
주개검의 〈사수필기 絲繡筆記〉
삼국 시대 때 제갈량이 촉나라를 다스리자, 잠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촉나라 비단이 일시에 유명해졌다. 위나라 문제 조비는 '촉나라 비단' 무늬의 참신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뭇 신하에게 "전후로 매번 촉나라 비단을 얻었으나, 서로 비슷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예문류취 藝文類聚〉 권85
장호가 일찍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오나라 비단, 절강의 비단을 가지고 관청으로 와서 사천의 비단과 같이 붉게 물들였다. 뒤에 경사(京師)로 돌아와 장마철이 지나자 오와 절강의 비단은 모두 색이 변했으나, 오직 촉나라 비단만이 예전과 같았다.
〈능개재만록 能改齋漫綠〉 권15

이처럼 촉의 비단은 삼국의 귀족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오나라와 위나라가 촉한으로부터 수입하는 중요한 수입품 중 하나였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천땅은 서쪽으로는 차마 고원을 통하여 티벳과 인도, 그리고 중동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당대에 남만이라고 불렸던 운남성과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남중 정벌 이후 금, 은, 단, 칠, 밭갈이 소 등이 공품으로 들어와 촉한의 군비에도 다소 공급되었다.

7.2.3. 화폐

일찍이 유장을 공격할 때 유비가 여러 장수와 군사들에게 약속했었다. "만약에 성도(成都)가 평정되면 부고(府庫)에 있는 모든 물건은 나는 관계치 않겠다."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수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이는 쉬운 일입니다. 다만 마땅히 직백전을 주조케 해, 여러 물가를 평정하고, 관리들에게 영을 내려 관시를 하게 하십시오."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47]

남제서에 따르면 오수직백전은 커튼 고리를 징발하여 만들었다.[48] 사서에서 촉한이 동전을 따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기도 하고, 또 한가군 엄도와 월수군 공도에서 구리가 나기는 했으나, 유송 때도 구리가 나긴 났으나 없어서 철전을 찍었던 것을 보면 이는 사실로 추정된다.

직백오수전은 소전[49]이나 오수전보다 큰 실물 가치를 지녀서 겉보기에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삼성이 얘기했듯 직백(直百)이라는 것은 액면 가치가 오수전의 무려 100배인 것이다. 오수전이 2.6 g이었고, 직백오수전은 7.9 ~ 9.5 g이었으니,[50] 고작 3배의 주조 비용이 증가했다 한들, 주조 차익이 100배나 늘어나면 그 화폐는 사실상 헐값을 넘어 똥값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계산하면 직백오수전은 크기도 작았으며 불순물도 섞였던 동탁의 동전보다 그 가치가 1/10 이하였다. 촉한은 이런 식으로 민간 경제를 약탈하였으며, 한중 공방전형주 공방전 등에 사용하였다.[51] 관아의 창고가 가득찼다고 서술된 것은, 촉한의 화폐와 화폐 경제가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흥선대원군당백전을 발행해 주조 차익을 거둔 일과 흡사하다.

정사에 발행 기록은 남지 않았으나,[52] 직백오수전은 직백전으로 계속해서 주조되었는데, 후기에 만들은 태평백전은 제조 품질도 좋지 못하고 무게가 3.3 ~ 6 g으로 줄어들었으며, 서진 때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으나 파촉에서 발견된 정평일백은 무려 0.5 g에 불과했다.
촉한이 망했을 때 금은 얼마였는가? 금, 은 각각 이천 근이다. 유비가 입촉했을 때 금자 2천 근과 은자 4천 근의 하사에도 문제가 없었다. 망국 때 촉한의 경제는 참혹했고, 함부로 돈을 날린 것이 밑거름이 되었다. 금과 은이 귀한 가운데 비단, 견사가 각각 20만 필이나 있을 만큼, 촉한은 화폐 경제보다 물물 교환하는 원시 자연 경제로 돌아갔다. 왜 촉한 사람들은 돈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촉한의 화폐는 적폐와 주수[53]된 지 오래였다. 매년 막대한 군비 지출로 인해서 새로 주조되는 직백오수(直百五銖), 태평백전(太平百錢), 정평백전(定平一百) 등은 화폐의 무게가 많이 줄었고, 심지어 태평백전은 화폐가 너무 작아서 부득이하게 금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새로 주조된 돈은 많아져 군사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일시적인 계책이었다. 돈의 가치가 떨어져 촉한은 경제 체제가 붕괴된 데다, 후기 통치자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아서 촉한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오기림(吴奇霖), 『촉한의 흥망성쇠 50년』 #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한은 망하기 좀 전에, 창고의 식량이 40여만 곡, 금은이 각기 2천 근, 비단인 금, 기, 채, 견이 각기 20만 필이었다고 한다. 걸핏 보기엔 많아 보이나, 유비가 입촉하고 나서 하사한 양과 대조하면 금은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촉한은 인두세 납입과 오에 바치는 조공이 갈수록 특산물비단으로 이루어졌으며,[54] 납입 수단이 화폐에서 , , 직물로 바뀌는 것은 위와 오에서도 나타난 일이다.

고옹의 후손 고훤(顧烜)은 촉한의 돈이 삼오[55]의 여러 현에서 유통되었다고 하였으며, 오나라도 236년 500닢, 238년 1천 닢, 240년대에는 2천 닢과 5천 닢의 액면가를 가진 동전을 발행한 적이 있다.[56] 서진도 똑같으며, 수서 식화지에 따르면 나라까지 촉한의 화폐를 사용하였다.

유비의 직백전 채용은 삼국, 위진남북조 때, 그리고 나아가 중국 수천 년 위폐 주조와 유통의 첫 시작이었다. # 화폐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 것은 당나라 때인 621년에 만들어진 개원통보부터이다.[57]

8. 평가

후한 말 난세에 일어났던 수많은 군벌 중 하나이자 위, 오와 함께 가장 성공한 군벌. 현대 역사가들은 유교적 명분론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기를 중시하므로 유비, 조조, 손권은 모두 호족들로 바라본다. 일각에서는 종친이라는 특성, 연의로 알려진 낭만적인 일생, 그리고 도원결의에서 도원종언으로 이루어지는 비극적인 삶 때문에 촉한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나,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정권을 계승했으므로 현대에서는 조위의 손을 들어준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위진남북조시대라는 시대구분 용어이다.

8.1. 촉한정통론

후한을 계승한 촉한에 정통성이 있다는 평가다. 정통성은 전 왕조에 기준을 두는 만큼 비록 세력은 작았으나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이 충분했던 촉한에 정통을 두는 논리다. 마찬가지로 동진과 바로 이어지는 남조 또한 북조에 비해 세력이 작고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조에서 나온 수에게 멸망당했음에도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논리가 있는 것처럼 정통성에 대해 세력보다는 전 왕조와의 연결성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촉한 정통론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유송 때 유유가 많이 밀었다. 한나라의 계승자는 오직 자신들의 형제인 촉한뿐이고 서진이나 위는 역적이라는 것.

사실관계야 어찌 됐건 위나라에 오랫동안 황제가 생존해 있었던 데다가 위나라 내에서 후계자에 대해 별 언급도 없었고, 유비는 한왕조의 후계는 맞으나 정통성을 논할 정도로 연결점은 없었으므로 촉한정통론을 주장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촉한정통론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헌제의 확보가 우선으로 이뤄져야 했으나 실패했다.[58]

이러한 촉한정통론의 약점은 위나라가 체계를 갖추고 대세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결국 점점 형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촉한정통론에 의하면 위나라와의 타협 따위는 불가했고, 오와의 협력에 있어서도 결국 촉한은 한나라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국가이념으로 하기 때문에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이런저런 논의가 이뤄졌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오와 촉은 늘상 서로를 경계하였다.

끊임 없는 전쟁으로 인해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사망하고, 적통인 헌제가 위에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기에 촉한정통론은 인재 영입의 측면에서도 딱히 영향을 주기 어려웠다. 결국 위나라가 장악한 중앙의 영향력을 통해 위나라의 인재풀이 촉한과 오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촉은 위나라를 상대로 몇 번이나 전쟁을 걸었으나 결과는 촉한의 멸망이었다.

9. 역대 황제

<rowcolor=#ece5b6> 대수 묘호 시호 연호 재위 능호
1 열조(烈祖)[59]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劉備) 장무(章武) 221 ~ 223 혜릉(惠陵)
2 - 안락사공(安樂思公)[서진]
효회황제(孝懷皇帝)[전조]
유선(劉禪) 건흥(建興)
연희(延熙)
경요(景耀)
염흥(炎興)
223 ~ 263 -

9.1. 계보

한나라 문서의 계보를 참조.

10. 여담

여러모로 국공내전대만으로 이주해 정통성을 주장한 중화민국의 처지와 비슷하다. 실제로 제갈량의 출사표에 등장하는 말인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한나라(촉한 포함)와 도적(역적)[62]은 양립할 수 없다)이라는 용어는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말로 인용해 왔고 지금도 강경한 사람들, 주로 범람연맹 성향의 중화주의자들은 이 말을 쓴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나라 이름(한나라, 중화민국) 대신 지배하는 중심 지역의 지명(촉, 대만)으로 더 유명하고 그렇게 주로 불린다는 점도 비슷하다.

오늘날 사천에 해당되는지라 맵고 자극적인 사천 요리의 이미지로 인해 이 시기에도 맵고 자극적인 요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나, 위로 투항한 촉한 출신 맹달조비에게 촉은 가축의 맛이 밋밋하다고 하여 고기요리에도 꿀과 엿을 쓸 정도로 달게 먹는다고 말해 조비가 놀라 신하들에게 알릴 정도였다. 덕분에 1800년 전 촉한에서는 그저 매운 요리라는 인상만 뚜렷한 현재 사천 요리의 인식과 달리 주로 달콤한 재료를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고추라는 작물도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기르다 콜럼버스 이후 유라시아에 들여온 것이니 매운 고추 요리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10.1. 촉한의 작위를 봉한 대신들

이 항목에선 촉한의 왕(王) 10위(位)와 후(侯) 66위(位), 추봉시호적대신(追封諡號的大臣) 12위(位)를 소개한다.

10.2. 창작물

작은 세력으로 계속 노력했다는 이미지 덕분에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선 주역으로 많이 등장하며 연의가 주로 촉 위주로 흘러가 유비, 관우, 장비 3명을 위주로 촉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창작물도 엄청 많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해버린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비장함을 부여하기도 좋은 데다가 역사상의 본인들이야 죽을 맛이었지만 인재가 적다는 것은 문학 등으로 창작했을 때 여러 인물에 포커스가 흩어지는 게 아니라 한두 사람에 집중되어서 주인공으로 띄워주기 좋다. 특히나 파보면 강력한 모습은 보기 힘들어도 의외로 튼실한 면도 보여서 이런 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대부분의 창작물이 전쟁을 다루다보니 위에서 언급된 촉의 다른 장점인 정치 체계나 경제력은 거의 무시받는다. 대부분 제갈량이 정치를 잘했다 정도로만 끝난다.[64] 하지만 정작 촉한은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30여 년을 더 존속했고, 게다가 위가 전력을 다해 수십 년을 더 싸우고도 오와 달리 힘으로 정면 대결해서 멸망시킨 게 아니라 간첩을 엄청난 규모로 보내고, 강유를 철저하게 묶으며, 여기에 유선의 병크까지[65] 줄줄이 운이 따른 결과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코에이 사의 삼국지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 등의 게임에서는 상징색이 초록색으로 나오는데, 고증오류다. 촉한은 한나라 정통을 자처했고, 한나라는 오행설에서 화덕을 계승했기 때문에 상징색 역시 붉은색이어야 맞다.

SD건담 삼국전에서는 '상(翔)'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유비 건담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익주로 가서 건국을 선포한다.

10.3. 쓰촨성의 관광 유산

쓰촨성(사천성)은 난세가 오면 나라[66]가 하나씩 나왔었던, 할거에 특성화된 지역이다. 그런데 이 나라들이 대체로 혼란기에 지방 실력자가 한 몫 잡고 험준한 산악에 기대 버티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나태해지다가 대륙의 정세가 바뀌어 천하 대세가 갈리면 흐지부지 멸망하는 일을 자주 보여준다. 그래서 인지도가 낮고 관심도 덜 받는다. 당장 촉한이 멸망한 지 40년 뒤 촉 땅에 성한이라는 이민족 왕조가 나왔는데 이런 식으로 망했다. 물론 촉한에 비하면 안중에도 없다.

쓰촨성의 지정학적인 상황과 조위와의 정통성 경쟁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듯한데, 촉한은 망하기 직전까지 공세를 펼친 특이 사례다.[67] 유비의 한중 공방전, 이릉대전,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 등 끝없이 싸워왔다.

이 때문에 촉한은 쓰촨성 관광계의 희망이자 별이자 모든 것이다. 촉한 외 다른 나라들은 쓰촨성에서 아는 사람만 아는 듣보잡 수준인데[68] 촉한만은 삼국지의 영향으로 인기가 높아서다. 대충 이 동네 전통 관광 유산의 90%가 촉한 관련이라고 한다. 무후사는 물론이고, 낙봉파 같은 연의에 나온 가상의 지역까지의 도로도 만들었다.

그래도 수천년 쓰촨성(사천성) 역사에 단 43년 지속된 촉한만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니, 촉한을 제외하고 쓰촨성에서 유명한 걸 꼽아 보자면 고대 삼성퇴 유적, 전촉 황제 왕건 묘나 도강언[69], 당나라 시기 시성 두보가 살던 초당, 진(秦)나라에게 멸망하기 이전 고대 파촉 문명 등이 있다. 그래도 촉한 관련 유적보다는 인기가 없는 것이 사실.[70]


[1] 정확하게 얘기하면 성도는 임시수도 역할로 촉한 자체가 한나라의 계승을 천명한 나라인만큼 명목상 수도는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이었다. 그 예로 촉한은 수도 성도가 위치한 촉군을 수도를 관장하는 특별 행정구역인 윤(尹)으로 격상시키지 않았다.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이 정식 수도가 아니었던 이유는 위에 맞서 오와 동맹을 맺을 당시 함곡관을 경계로 천하를 분할하기로 하면서 함곡관 동쪽에 위치한 낙양은 오의 몫으로 하기로 했기 때문.[2] 중원과 관련 없이 고촉(古蜀)이나 파(巴) 같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고 활동하다가 흡수된 선주민이다.[3]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4] 촉한 당시에도 불교가 들어간 흔적이 있다. 쓰촨성 러산시 마호애묘(麻浩崖墓)에 바로 촉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부처와 승려의 도상이 있는 것. 촉한에서도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되는 형태로 수용되었던 증거라 본다. 단 지배층에까지 미친 흔적은 전혀 없다.[5] 중국어 위키백과의 촉한문서에서는 '當中五銖錢與直百錢並用'라고 해서 직백전과 오수전을 병행해서 사용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영어 위키백과의 Wu Zho(오수) 문서와 영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사이트인 동아시아 고대 화폐 관련 사이트 primaltrek.com에서는 지름 21.7밀리미터, 무게 약 2.3그램의 촉오수(蜀五銖)라고 불리는 화폐가 전통적으로 촉한에서 주조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나중의 고고학적인 발견으로 이 화폐가 정말 촉한에서 주조된지는 확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6] 직백오수전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주전지역이 표기된 화폐였으며 배면에 주전된 지역인 건위군을 표시하는 위(爲)자가 새겨져 있었다.[7] 현재도 지명이 같으며, 중국어 표기법을 사용한 청두시로 표기되고 있다.[8] 오늘날 윈난성구이저우성도 다스렸는데 관료를 보내지 않고 간접 통치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는 남만 지역이 이곳이다.[9] 蜀虜, 촉나라 오랑캐.[10] 蜀賊, 촉나라 도적이다.[11] 이렇게 태도가 바뀐 것은 한나라가 조씨에게 망했으니 천자가 공석이라는 손오정통론에 따른 것이다.[12]정사 삼국지』, "對曰, 四州之地..."[13] 또 의양군(義陽)에 부융(傅肜)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선주가 군대를 후퇴시킬 때, 적의 추격을 끊으며 오나라 군대에 저항하다가 병사들이 모두 죽었다. 오나라 장수가 부융에게 투항하라고 말했다. 부융은 욕을 하며 말하길: “오나라 개들아! 어찌 한나라 장수로서 항복하겠는가!” 그리곤 싸우다 죽었다.[14] 예를 들자면 유송조송이 있다. '유한'이라고 지칭할 경우 전한, 후한, 촉한 모두 국성은 유씨로 같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15] 출처: 파성넷[16] 출처: 파성넷[17] 출처: 파성넷[18] 상해인민출판사(上海人民出版社)에서 1989 ~ 1999년 출판하였다. 총 12권 22책이고 1,400만 자이다. 백수이가 주편집장을 맡았고 22명의 분권 편집장, 500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하였다.[19] 士民簿, 선비와 백성을 담은 문서.[20] 산기상시(散騎常侍)의 준말로, 황제의 직속 부대를 뜻한다.[21] 武騎, 야전군을 뜻한다.[22] 四軍, 네 군대.[23] 外軍, 정벌을 나가는 군대를 뜻한다.[24] 힘이 센 병졸[25] 부대 명칭[26] 화양국지 파지[27] 화양국지[28] 야크 털로 만든 모직물[29] 위연과 오의는 합류시점을 보면 1세대에 가까운 편이지만 행적을 보면 3세대 쪽과 자주 묶이는 편.[30] 조운은 공손찬을 섬기다가 형의 장례를 핑계로 공손찬 휘하를 떠나 낙형했으며,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할 당시 유비에게 임관한 것이기 때문에 유비에게 투항한 적이 없다. 또한 유비가 세력이 공중분해되어 관우조차 곁에 없을 때(즉 기반이 전무할 때)부터 섬긴 것이기 때문에 거의 초창기부터 그를 섬긴 경력 있는 신입이지 항장이라고 보긴 어렵다.[31] 후한서 백관지. 상국은 승상의 다른 이름이다.[32] 有司, 해당 관원.[33] 平明, 공명정대.[34] 출처: 파성넷[35] 홍윤기. (2017). <出師表>에 나타나는 諸葛亮의 독재정치. 중국어문논총, 84, 183-208.[36] 출처: 파성넷[37] 이때 극정이 비서령으로 있었으며, 황호와 같이 일했다.[38] 비슷한 사례로, 한국사의 후삼국시대에도 신라는 처음엔 궁예견훤을 통일신라의 역적으로 보고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후삼국시대 후반부에 가면 좀 더 호전적인 견훤에 맞서 실리적인 이유로 고려의 왕건을 왕으로 인정하고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39] 口錢算賦制, 인구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로, 이것은 촉한이 한나라 제도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조위호조제와는 달리 호별로 세금을 징수했다.[40] 출처: 파성넷 그러나 촉한과 비슷한 사례가 조위와 손오에서도 있기에 촉한만의 문제는 아니다.고유전[41] 비교하자면, 오나라의 인구가 230만이고 관리가 3만 2천이었다.[42] 둔전으로 각 지역에 묶여 있는 지역 군단과 그 가족 인구[43] 李虎蜀, , 2002-6, 21-23 . 蜀國人口蠡測, 四川文物 21-23쪽[44]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45] 民殷國富, 백성은 편안하고, 나라는 부강함.[46] 한 왕조 시절에 이미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전매케 하는 법이 있었으며, 연의에서나 정사 등애전에서나 촉한 정벌 이후 관련 계획에서 등애가 "익주에서 소금을 굽고 철을 벼리며 차근차근 준비해서 오를 쳐야 합니다"라는 진언을 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소금과 철은 중요한 물자였음을 알 수 있다.[47] 출처: 파성넷[48] "나라를 위해 쓰고자 장막을 거는 고리(帳鉤)를 취해 그 동으로 돈을 만들었다.(劉備取帳鉤銅鑄錢以充國用。) 출처: 파성넷[49] 小錢, 동탁이 오수전을 녹여서 새로 만들었던 동전인데, 크기도 작고 불순물도 많이 섞인 데다 너무 많이 만들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조숭환관에게 1억 닢을 바쳐서 태위를 산 것에서 가늠할 수 있다.[50] #[51] 카키누마 요헤이, 『촉한의 선군 정치와 경제 시스템(蜀漢的先軍經濟體系)』, 2011.[52] 사실 직백오수전도 정사에 남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료가 발견되었으므로 논할 수 있는 것이다.[53] 注水, 물먹다.[54]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 중세사』[55] 三吳, 오군(吳郡), 오흥(吳興), 회계(會稽)로 오나라를 3개 지역으로 나눈 지역들을 뜻한다.[56]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246년에 동전 제조를 중단하고 액면가 높은 화폐를 무효로 정하였다.[57] 발터 샤이델, 『The monetary systems of the Han and Roman empire』[58] 사실 촉한은 헌제가 조비한테 양위한 이후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는 큰 문제는 없었다. 헌제가 죽고 정통성이 강한 후손이 없다면 정통성이 약한 후손이라도 나서서 뒤를 이어야 했으니까. 후한도 그렇게 세워졌고. 실제로는 헌제가 234년까지 살아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촉한에 알려지면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서 촉한에 이것이 알려졌는지, 반응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59] 전조유연은 한왕에 오르면서, 한고조, 광무제, 소열제 셋을 삼조(三祖)로 보고 한문제, 한무제, 한선제, 한명제, 한장제 다섯 황제는 오종(五宗)으로 모셨다. 이 때 시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유비를 열조로 칭한 기록이 있다. #[서진] [전조] [62] 당장은 위나라를 가리켜서 賊이라 표현했겠지만 내심 오나라도 賊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목표는 삼국을 통일해서 옛 한나라의 정통을 승계하는 것이니까.[63] 관우가 유비의 제일 가는 부하였는데도 장비나 제갈량 등 유비의 다른 부하들보다 최종 관직과 작위가 낮은 이유는 유비가 칭제하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관우 생전에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에 오르고 관우를 사방장군의 으뜸인 전장군에 임명했으나, 219년에 죽고 221년에 유비가 칭제했기 때문. 만약 관우가 칭제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무관 중 가장 높은 직위인 대장군에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실제로 촉한의 대장군 직위는 제갈량 사후에 장완이 임명되기 전까지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장비의 경우 사방장군에서 우장군, 이후 거기장군 등 마초(좌장군->표기장군)처럼 정치적 입지가 높은 인물보다 살짝 낮은 직위에 임명되었었지만 관우는 그 마초보다 더 높은 직위였었기 때문.[64] 오히려 역대 최강급의 행정가였던 제갈량의 정치적 역량이 거의 축소되고, 전쟁터의 책사로 신출귀몰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묘사된다.[65] 유선을 안락공으로 봉하고 잘 대해준 것도 실상은 촉 내부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로 보인다.[66] 혹은 독립국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군벌 세력.[67] 전한도 여기에 들어갈 것이라 많이 생각하지만 한왕에 임명된 유방은 파촉까지 들어가지 않고 한중에서 반 년도 안 있다가 바로 관중을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으니 장기간 파촉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한 촉한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근거지였던 한중은 현재는 사천성이 아니라 관중 지역과 같은 섬서성 소속이다.[68] 성한, 전촉, 후촉 등을 보면 모두 촉한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한 탓이 크다. 조위, 동오도 해당 지역에서 쓰촨성의 촉한만큼 인기를 보유하고 있진 않다. 조위야 중심지였던 업성 일대에서나 주목받고 동오는 중심지인 남경이 워낙 역사성이 뛰어난 도시에 명나라처럼 통일왕조도 겪은 도시라 굳이 동오에 주목할 이유가 적다.[69] 사실 도강언도 제갈량이 몸소 나서서 수리한 곳임을 관광 홍보에 적극 써먹고 있어 넓은 의미의 촉한 관련 관광지이다.[70] 왕건의 경우 폭군인데다 비속어 왕팔의 유래가 되기까지 한 사람이니 인기가 없는 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