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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4:02

유은(삼국지)

柳隱
190년? ~ 269년?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 창작물

1. 개요

삼국시대 촉한, 위나라, 서진의 무장이며 는 휴연(休然)으로 《화양국지》에 열전이 수록된 인물이다.

2. 생애

익주 촉군 성도현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같은 출신인 두정, 유신과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성실하고 정직하면서 정도를 따르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친구와의 교제에서는 상대를 정중히 대하는 것에 마음을 두었다.

강유북벌(강유의 북벌)을 할 때 정벌에 종군해 공적을 올렸으며, 용맹과 계략이 뛰어나 아문장, 파군태수, 기도위 등을 역임했다가 한중의 황금성의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263년종회공격할 때 많은 장수들이 성을 지키지 않고 철수할 때 위군의 공격에 대항해 황금성에서 방어했는데, 견고한 수비로 종회의 별장을 이겨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종회가 별도의 길로 성도를 공격했고 등애유선항복시켜 촉한이 멸망했다.

촉한이 멸망한 이후에도 저항하다가 유선의 서한을 받고 종회 앞에 출두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사마소는 그를 의사라 했다. 264년하동군으로 이주해 의랑이 되었다가 266년서하태수가 되었으며, 268년에 병환과 노령을 이유로 은거했다가 촉으로 돌아갔지만 이후 80세에 집에서 죽었다.

3. 평가

신의로운 인품에 용맹하고 계략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강유를 따라 수차례 북벌에 참여해 많은 기여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은은 삼국지연의에서 강유의 심복 및 강유군의 무력 담당으로 묘사되는 부첨에 상응하는 역할을 실제 역사상에서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1]

서진 건국 이후 260년대 말 ~ 270년대 초 무렵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은은 강유보다 10살 이상 연장자다. 이 정도면 장억, 장익 급이랑 친구 먹을 나이대이다. 젊어서부터 명성을 얻었다는 평가나 연령대를 보면 비슷한 연배인 장억과 장익이 그렇듯 제갈량 시절은 물론, 유비 시절에도 충분히 두각을 드러냈을 법도 한데 수십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늙어 말년인 강유의 북벌 시기부터 본격적인 행적이 기록된 게 의문인 인물. 정말로 촉한은 기록이 부족해 보인다.

강유의 북벌 시기는 아무리 일찍 잡아도 비의에 의해 1만명 리미트가 걸려있던 240년대 후반인데, 이 무렵에 유은은 이미 환갑을 바라볼 나이였을 것이다. 용맹하고 계략이 뛰어났다는 평가가 기록의 미비가 아닌 정말로 이 시기의 활약상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노익장 그 자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뛰어난 행정력과 군정 능력, 인망으로 서북방 이민족에게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던 왕사[2]와 함께 강유의 최측근으로서 북벌군이 내세울만한 뛰어난 장수.[3]

지금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제갈량 사후 스토리가 점점 블루오션으로 부각되는 추세에 있기에 앞으로 좀더 조명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다만 한정된 촉군의 규모상 장익이나 요화, 호제처럼 강유군 본대와 별개로 독자적인 군세[4]를 이끈 적은 없기에 군재 면에선 평가하기가 미묘하다. 유은은 유비 시절에 조운의 역할이 그렇듯 강유 직속 무관의 성격이 강하다고 봐야 할듯. 그래도 종회의 대군의 침공에 맞서 한중의 황금성을 끝까지 사수[5]하고 서진에서도 우대받은 걸 보면 일정 수준 이상 좋게 봐줄 수는 있을 것이다.

4. 기타 창작물

파일:유은.jpg
삼국지 1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4에서 첫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74/지력 68/정치력 43/매력 64이며 일러스트는 노장의 모습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있다. 개성은 산전, 견뢰, 주의는 패도, 정책은 성벽확장 Lv 3, 진형은 봉시, 방원, 장사, 전법은 철벽, 교란, 저지,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진삼국무쌍 6에서는 촉 토벌전에서 조상이 이끄는 위군이 왕평이 있는 서쪽의 군량고를 공격했다가 본진을 공격당하면서 조상이 위기를 맞는데, 위군에서 본진을 구한 이후에 조상의 탈출을 도우면서 남동쪽으로 도주할 때 북동쪽의 성에서 유민, 두기, 왕림 등과 함께 촉군의 원군으로 등장한다.

성도 공략전에서도 등장해 중편에서 위군의 본진과 가까운 북서쪽에서 등장해 위군과 싸우며, 후편에서는 위군이 북서쪽과 남쪽으로 나눠서 진군할 때 호제, 이간과 함께 북서쪽에서 기습 부대로 나타난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파촉 평정전에서 남쪽의 중앙에서 약간 떨어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1] 부첨이 강유의 북벌에 종군했다는 건 사서상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차이점이라면 연의에서 부첨은 비교적 젊은 장수의 이미지로 그려지는데 비해 유은은 강유보다 더 연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 참고로 왕사 역시 유은과 비슷하게 강유의 북벌에 참전했을 당시 꽤 노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사 같은 경우는 유은과 달리 생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왕사가 북벌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돼 사망하자 생전 그를 흠모했던 강족들이 왕사의 자식들과 손자들을 돌봤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점에 손자들이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왕사는 강유의 북벌 당시 최소 강유와 비슷한 연배인 50대 이상이거나 아니면 유은과 비슷하게 60대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연의의 영향으로 비의 사후 인재풀이 메말라버린 후기 촉한군을 강유 혼자 고군분투했다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 당시 총사로서 내세울 인물이 강유 정도긴 했으나[6] 그렇다고 해도 촉한 역시 최소 수만 명에서 최대 십만 이상의 북벌군을 동원할 수 있는 황제국이다. 강유가 홀로 촉한군을 이끌었다는 건 비장미를 가미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뿐 현실성은 없다. 사실 연의에서도 장억, 장익, 요화, 호제, 하후패 등의 활약이 있긴 하지만 연의는 제갈량 사후를 간략하게 다루는 바람에 촉한 후기 인물을 좀 누락한 감이 있다. 이 외에도 유은, 왕사, 조광(조운의 차남), 내충(내민의 아들), 상충(상총의 동생), 양희 등이 강유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여 북벌에 참여한 걸로 사서에서 확인되는 촉한의 소장파다. 나헌이나 곽익의 존재도 그렇고 이쯤 되면 정말로 후기 촉한에 인물이 없었는지에 대한 편견도 재고가 필요할지도. 물론 유비-제갈량 리즈시절의 퀄리티에 비할 바는 안 되겠지만[7] 후기 촉한의 인재풀은 기록의 부재 측면도 있으나 지나치게 저평가 받는 경향이 있다. 후기 촉한의 인물들이 다수 실린 계한보신찬이나 화양국지만 봐도 유은처럼 의외의 인물들이 나오는 걸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후기 촉한의 인물들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 뛰어난 인재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은 방굉(방통의 아들), 장표(장송의 아들) 등이 있다. 그만큼 촉한 말기에 인재가 없다는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진수의 기록이 영 부실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는 쪽이 맞을 것이다. 강유의 부장이었던 유은만 하더라도 화양국지에서 열전이 수록될 정도로 나름대로 행적이 전해지는데 정작 진수의 기록에서는 사실상 소멸. 그나마 254-56년까지는 강유의 북벌을 다루느라 그나마 자세히 다뤄지는 듯하지만 내정쪽으로 진지가 휘어잡았다는 심증만 남을 뿐 실질적으로 진지가 한 행동으로 (스승 초주와) 구국론 짓기와 매년 사면령내린 것 밖에 없다. 262년의 후화전투만 하더라도 패했다는 내용만 있고 그외에 아무런 디테일이 없다. 배송지 주석으로도 보충되는 내용도 없고. 문제는 진수 생전에 일어났던 사건인데도 이 모양.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자료가 영미비한 상황에서 무슨 인재풀을 재구성할 수 있기나 하겠나 말이다.[4] 장억은 강유군의 선봉으로 북벌에 참여해 전사했고 귀순한 하후패는 강유군 본대에 종군했다. 호제 같은 경우는 단곡 전투의 증원군으로서 단독으로 군세를 이끈 적이 있다.[5] 엄밀히 말해 종회의 정촉군은 한중을 점령했다기보다는 우회해 돌파한 것에 가깝다. 검각에서 발이 묶인 위군의 보급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지는 건 한중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 한중의 주요 거점 가운데 정말로 점령한 곳은 부첨장서가 지키는 양안관구 하나 뿐이다. 이마저도 순수 실력으로 무너뜨렸다기보다는 장서의 배신으로 거저먹은 것에 가깝다. 연의에서 종회의 대군을 보고 냅다 항복해 강유성의 마막 급 졸장으로 그려지는 낙성의 왕함과 한성의 장빈(장완의 아들)은 실제론 황금성의 유은과 마찬가지로 유선황호의 삽질로 인해 원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선이 항복할 때까지 끝까지 성을 사수한 인물들이다. 물론 위군을 한중 안쪽으로 끌어들여 이를 한중의 수비군이 지체시키고 있다는 전제하에 답중에 나가있던 강유군 본대가 쇄도해 위군을 요격하는 게 골자인 강유의 공세적 수비 전략에 맞서, 강유를 고립시켜놓고 최대한 신속하게 촉한의 중심지인 사천 평야로 침투해 갈수록 암군화되고 있던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종회의 대전략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위군이 한중에 크게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즉 이들을 나라가 망한, 진짜로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고작 2천의 군대로 보협을 아예 야전에서 바르고 동오 최후의 명장이라 평가받는 육항이 이끄는 3만+@[8]의 공세를 6개월 이상을 버텨낸 영안의 나헌 급 명장으로 보기엔 어렵겠지만 어쨌든 최소 자기 몫은 다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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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0년대~260년대 촉한군 고위직을 따져보면 제갈첨을 제외하면 강유가 상당히 어린 축에 든다. 당시 강유의 나이 50대 초반 ~ 60대 초반. 이런 노익장들을 다 제치고 빠른 승진 끝에 대장군직에 오른것만 봐도 말이다.[7] 그거야 그쪽이 워낙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란 이유기도 하다. 역대급의 인물들이었으니 말이다.[8] 원래 보협이 이끌고 있던 병력. 옛 촉한의 영토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게 목적이었으니 상당한 수의 병력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