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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1]), 번역해서 세계화(世界化), 전지구화란 국가간 상호 의존성이 증가함에 따라 인류 문명이 단일한 체계로 수렴하는 현상으로, 정치, 경제, 기술, 사회 및 문화 부문을 가리지 않고 민족 국가의 경계가 약화되고 세계 사회가 통합해 가는 것을 이른다.2. 양상
세계화의 다섯 가지 의미는 다음과 같다.- 국제화로서의 세계화(as internationalization; internationalisation)
다국가 간 자원의 이동 및 교환이 활발해지고 상호 의존성이 심화된다. - 자유화로서의 세계화(as liberalization; liberalisation)
시장경제가 형성되고 다국의 시장 간의 교류를 중재하는 국제적 무역기구가 설립, 자유무역이 확산된다. - 보편화로서의 세계화(as universalization; universalisation)
세계 시민들 간에 공통적이고 공유된 지식이 발생하고 문화적, 경제적, 법적, 정치적 양식들이 닮게 되며, 국제 기준과 표준이 형성 및 적용된다. - 서구화로서의 세계화(as westernization; westernisation)
각국의 문화가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 문화에 흡수 및 동화되고, 지역 문화는 쇠퇴한다. - 탈국경화로서의 세계화(as deterritorialization; deterritorialisation)
기존의 물리적, 지정학적, 공간적 의미의 장벽과 국경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국경의 의미는 새롭게 다시 정의된다.
3. 역사
세계화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끝없는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주류 정치학계에서는 근대 국가의 성격을 확립한 베스트팔렌 조약이 시초이며,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통해 강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나폴레옹 몰락 이후 열강들 사이의 세력 균형 체제로서 구상된 빈 체제는 당대 유럽 세계의 대표적인 상호 의존성 심화 사례로 손꼽힌다.두 차례 세계 대전 이후부터는 제트기[2]와 컴퓨터, 인터넷[3] 등이 발명되어 그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미국의 금본위제도 폐지 선언으로 인해 달러가 신용화폐로 특성이 변모하고 국제거래 통화로서 보편화된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4] 이것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캐나다의 문화비평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자신의 기고문에서 제창하고부터인데, 그는 전 지구가 하나의 마을과 같아진다는 의미에서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용어를 보급하였고, 이 용어는 이미 막을 수 없는 세계화의 물결을 효과적으로 비유하여 유명해졌다.
전자공학의 발달로 상호의존성이 높아지면서 세계가 지구촌의 이미지로 재편되고 있다.
마셜 매클루언, The Gutenberg Galaxy (1962) 31p
마셜 매클루언, The Gutenberg Galaxy (1962) 31p
세계화는 인류사 전체에 비추었을 때 문명의 극히 최근에 들어서야 진행되었으며, 이를 위한 중요한 조건은 충분히 발달한 교통과 열린 정보 통신이다. 예를 들어 북한의 경우 대중 교통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되어 있으므로 세계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북한도 신의주나 라선을 거쳐 중국 및 러시아와 통하므로 외부 문물이 유입되는 형국이며, 열악하게나마 열차를 타고 국경지대 장마당으로 나가거나 USB로 남한 방송을 몰래 돌려 보는 등의 현상이 나타난다.
3.1. 시기에 따른 구분
한편 세계화를 시기별로 구분하려는 시도도 있다. 보통 다음과 같은 구분법을 따른다.- 1차 세계화: 15세기 이후 유럽에서의 신항로 발견과 식민지 개척 시기
- 2차 세계화: 산업 혁명에 따른 교통수단 발달과 이로 인한 국제교류 증가 시기
- 3차 세계화: WTO의 출범에 따른 자유무역 확대 시기
이렇게 3차례로 구분하는 입장이 주류이다. 이에 따르면 현재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세계화는 3차 세계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구분도 가능하다.
대중적으로는 보통 냉전 말기인 1970년대 데탕트~2010년대 이후 신냉전의 개막 시기인 약 30-40년간이 가장 세계화가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는 신자유주의 등 자유시장경제를 극도로 중시하는 사상을 위주로 서방 국가들이 세계화에 따른 경제 성장을 하였으나, 초거대화한 다국적 기업의 문제점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말 이후로는 중국, 러시아가 신냉전을 발생시킬 기미를 보이며 서서히 반세계화가 시작되었고 2010년대 후반부터는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시진핑의 집권 본격화, 코로나19의 확산,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 등 정치적으로는 1960년대 이전인 냉전 초창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반세계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4. 영향
- 정치 분야
정치 분야에서의 세계화는 유엔의 등장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유럽 연합, G7, WTO 등 다양한 초 국가적 기관들의 등장으로 국가의 기능을 대체하고 확대 시키고 있다. 이중 특히 UN은 난민, 기후변화, 문화제 보존 등등 한 나라의 노력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또한 세계 각국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정착되고 다자화된 외교로 전 국가간의 상호 견제를 통해 전쟁의 위험이 줄어들고[5] 지구 온난화 같은 글로벌 위기에 대해 공동으로 협력하여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반론도 있다. 냉전의 끝과 소련의 해체는 사회주의의 몰락을 보여준 큰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사회주의나 모든 좌익 사상이 이념에서 아예 퇴출당한 것도 아니고, 이는 곧 신냉전으로 이어져 결국 플레이어만 바뀐거지, 민주주의를 내세운 제1세계 진영의 완승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봐야 한다.[6] 가장 강력한 국제기구인 유엔도 상임이사국의 반대만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을 여러번 보여줘 이름값 못한다는 날쌘 비판이 있다.
- 경제 분야
경제 분야에서의 세계화는 무역 자유화와 금융부문에서의 자본이동의 확대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자의 경우 FTA나 WTO등으로 대표되고 후자의 경우 각국의 금융시장·외환시장 개방[7]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경제 분야의 세계화를 위해 매년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세계경제포럼(WEF)이 개최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타이베이 시민이 미국에서 디자인되어 중국에서 생산된 iPhone을 들고, 독일산 이어폰으로 케이팝을 들으며, 남미 커피콩으로 만든 카페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영국 여행에 가서 사온 핸드백에는 일본에서 만든 물건과 프랑스에서 만든 물건을 담고 있으며,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만든 신발을 신고, 퇴근 후 인도에서 온 요가 강사의 학원으로 가는" 라이프스타일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새로 나타난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한편 이러한 경제 분야에서의 세계화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킨다는 인상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이론이 1841년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제창한 보호무역주의나 1950년대 라울 프레비시의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이었다. 따라서 경제 분야는 반세계화 시위가 가장 자주 일어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위의 세계경제포럼에 반대하여 열리는 세계사회포럼(WSF)이 있다.
- 문화 분야
문화 분야의 세계화는 다른 나라의 문화매체를 접하거나, 다른 나라로 문화매체가 퍼져나가는것을 말한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문화 분야의 세계화가 가속화 되며 각국의 소프트 파워가 중요시되고 있다.
- 사회 분야
사회적으로 시민 사회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각국에서 다양한 자유주의 가치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세계화 찬성과는 별개로 기존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피로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5. 반의적 개념
5.1. 반세계화
자세한 내용은 반세계화 문서 참고하십시오.5.2. 국지화
國地化 | Localization[8]세계화의 반대 개념으로 특정 지역에 국한하는 것을 말한다.
6. 문민정부와 '세계화'
1994년 말 문민정부가 내놓은 사실상의 정부 정책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세계화(Segyehwa)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방문 중 발표했다고 해서 '시드니 선언'으로도 불린다. 다들 Globalization(Globalisation)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라고 발표하며, Segyehwa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당시 정부에서도 저 표현을 썼다.
그 해 11월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수행기자들에게 '세계화 구상'을 발표했는데,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종합적인 국가개혁의 방향으로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겠다"는 의도였다고 한다. 당시 김영삼은 밖에 나와서 두루 살피다 보니 우리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서 세계화를 해야 하며 곧 다음 세대를 위한 세계화 정책을 구체화해서 장기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기자들은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고 대통령 자신도 모르는 듯 보였다고 한다. 아까 언급한 세계화는 기존의 국제화와 어떻게 다른 것이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당시 김영삼을 수행한 한이헌[9] 경제수석비서관은 '국제화는 다소 수동적인 의미라면, 세계화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앞서 나아가자는 것이 다르다'고 언급했다고 한다.[10] 해당 출처에서 보기
정작 그 세계화 정책이 세계화에 맞게 쓰인 것도 아니다. 정치적 목적에만 쓰고 싶은 대로 갖다 붙였는데 그 예로 김종필을 비롯한 구세대 정치인들은 민자당의 세계화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로 당에서 내쫓는 데 써 먹었고[11], 한 번은 박정희 시절부터 내려온 경제기획원을 재정경제원으로 개편하는 데 썼고, 한 번은 부산에 지을 삼성자동차에 세계화라는 이유로 설립을 허가해 주면서 이 세계화 논리를 써먹었다.[12]
7. 같이 보기
[1] 영국식으로는 'Globalisation'이다. 학술적으로는 영어 발음을 그대로 따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빈번하다.[2] 상류층만 누릴 수 있던 해외 여행이 여객기의 발전으로 인해 중산층으로까지 범위가 확장되었다.[3]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사용자가 수십억 명에 달하는 서비스가 최초로 등장했고 전자기기만 갖고 있으면 별다른 이동 없이 양방향 통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4] 흔히 미국과 자본주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인 맥도날드, 코카콜라, 미키 마우스 등이 본격적으로 세계로 진출한 게 금본위제 폐지 이후이다.[5] 실제로 UN 출범후 표면상이 아닌 실제로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는 국가끼리 벌인 전쟁이 없다.[6] 이와 관련해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역사의 종말(End of history) 이론, 즉 미국과 민주주의가 세계 무대에서 승리했고 더 이상 국가끼리의 큰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후 중국의 부상과 러시아와 미국의 갈등으로 인해 자신의 이론이 틀렸음을 여러번 말해야 했다.[7] 특히 개발도상국·신흥시장국 등에서 활발하다.[8] 미국식. 영국식으로는 'Localisation'이다.[9] 1996년 신한국당 간판을 걸고 부산 강서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가 국민신당을 거쳐 새천년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했다.[10] 출처: <민주주의 수호자> 김영삼 평전/(23장) 국정수행 성취와 좌절, (125회) 급조된 '세계화 구상' 발표. 김삼웅 저.[11]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최형우가 김종필을 향해 구세대라고 일갈하며 사실상 탈당하라고 할 때 김종필은 '62살 먹은 사람이 69살 먹은 사람에게 나가라고 한다'라며 여유롭게 받아치기도 했다. 그 김종필과 민정계, 공화계 정치인들이 만든 정당이 자민련으로, 창당 3개월 만에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크게 선전하여 민자당을 물먹이는 데 성공한다...[12] 물론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이 세계화에 어느정도 기여를 하는 의미가 있었으나, 당시 삼성 측이 계획했던 대구 대신, 정권의 기반이었던 부산에 공장을 짓기 위해 삼성그룹과 정부가 정경유착해 가며 공을 들였음을 감안하면 세계화와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사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