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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0:13:50

벌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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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제9대 국왕
벌휴 이사금 | 伐休 尼師今
출생
(음력)
연대 미상
사로국 서라벌
사망
(음력)
196년 4월
사로국 서라벌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9대 국왕
184년 3월 ~ 196년 4월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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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석씨
벌휴(伐休)
부모 부친 석구추
모친 지진내례부인
왕후 석골정의 모후
자녀 태자 석골정(昔骨正)
왕자 석이매(昔伊買)
태손 석조분[1]
왕호 벌휴 이사금(伐休 尼師今)
발휘 이사금(發暉 尼師今)
별호 성인(聖人) }}}}}}}}}

1. 개요2. 생애3. 연대 문제
3.1. 박씨-석씨-김씨 실제 즉위기간의 중복 문제
4.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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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9대이자 석씨 왕조의 초대 군주. 칭호는 이사금.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탈해 이사금손자다. 아버지는 탈해 이사금(제4대)의 아들 각간 구추(仇鄒)고 어머니는 김씨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박씨 마지막 임금인 아달라 이사금(제8대)에게 아들이 없어 그가 군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신덕왕(제53대)을 보고 교차검증하면 아달라 이사금은 신덕왕 박경휘의 조상이 되는 후손이 있던 걸로 보이기 때문에 적자가 없었다는 뜻이고 서자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벌휴 이사금은 모친이 김씨 족단 소속인 걸로 보아 즉위 과정에서 김씨 족단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이 벌휴 이사금의 왕비가 누구였는지 또한 신라사 초기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지만,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던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장남 골정의 아들들이 조분 이사금(제11대)과 첨해 이사금(제12대)이며, 차남 이매의 아들이 내해 이사금(제10대)이었다.

2. 생애

삼국사기》에 따르면 벌휴 이사금이 바람구름을 점쳐 홍수, 가뭄, 풍흉을 예지했으며, 사람의 정직함과 바르지 못함을 꿰뚫어 봐 성인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한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이 벌휴 이사금의 차남 석이매와 정분이 난 걸로 추정되는 기록[2]이 있는 등 왕위 계승에 있어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대중역사가 박영규의 해석에 따르면 석씨계가 석탈해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정치보다는 주로 제사를 지내는 신관 가문으로 바뀌었다가 신진 세력인 김알지 계열 김씨계가 석씨계와 연계해 지마 이사금(제6대)의 딸인 내례부인과 같은 박씨계 일부의 지지를 받아 당시 왕을 몰아내고, 새로이 벌휴 이사금을 왕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벌휴 이사금이 탈해 이사금의 신성성을 빌어 왕위에 오른 것으로 해석한다. 보통 한 왕조의 건국자들이 미화되는 것을 추정해 보면 '성인'이라는 서술도 그런 맥락으로 추측된다. 어쨌거나 당시 신라는 아직 제정분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아달라 이사금의 재위기 마지막 10년 부분이 비어있다는 점을 봐도 정치적 혼란이 있었던 것이 명백해 보인다.

재위 기간이 신라 초기 국왕치고는 다소 짧은 12년인데 그가 적지 않는 나이에 즉위했음을 암시한다. 재위 기간이 짧은 만큼 역사 기록도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 중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것은 백제와의 전쟁이다. 참고로 석씨 세력이 박씨 세력을 밀어낼 만큼 당시에 힘이 있었기 때문인지 석씨 시대가 시작되면서 신라는 이전 박씨 시대보다 군사 활동의 범위가 경주 근처에서 경상도 이곳저곳으로 훨씬 넓어지고, 여러 소국을 정복해 급격하게 세력을 확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185년에 파진찬 김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추정되는 소문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정벌하기도 했다.

일단 앞서에서도 확인되지만, 백제와의 전쟁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초기 신라사의 기년 문제가 두드러짐과 동시에, 백제사와 견주어 실제 일어났을 사건의 연대 추정 또한 가능하다.

188년에 백제군이 먼저 서쪽 변경을 공격했는데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인 파진찬 김구도가 막았고, 189년에는 김구도가 반격해 구양에서 백제군을 격파해 500여 명을 죽였으며, 190년에 백제가 서쪽 국경의 원산향(경상북도 예천군 추정)을 공격하고, 부곡성(경상북도 군위군 추정)을 공격할 때는 김구도가 기병 500명을 이끌고 백제군과 싸웠으나 백제군의 도망가는 척 하다 기습하는 전술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그 결과 왕은 김구도에게 책임을 물어 벼슬을 깎아 부곡성주로 삼고, 설지를 좌군주로 임명했는데 김구도가 부곡성주가 되었다는 기록을 보아 부곡성을 뺏기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님 뺏겼어도 후에 되찾았든가.

일단 백제가 충북 내륙부를 넘어 경북까지 찔러보는 게 가능해진 건, 충남북 내륙부에 그 영향력을 유지하던 목지국을 3세기 후반에 타도한 시기 이후로 해석된다. 과거엔 아래로 거느리던 거수국인 백제의 밑에 강제로 들어간 목지국은 그 후에도 4세기 중반까진 저항을 멈추진 않았으나, 어쨌든 백제군이 충북 일대를 넘어 경북 일대까지 드나들 수 있었던 시기는 목지국의 권위가 없어져버린 3세기 후반 이후로 제한된다. 그러니 위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초반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벌휴 이사금의 할아버지 석탈해가 실제로는 고고학적 증거로 3세기 초중반 인물로 해석되는 신라사의 최근 동향과 다시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김구도는 이때부터 조용히 있었는지 기록이 없다가 나중에 아들이 왕이 된 뒤 갈문왕으로 추증된다.

192년에 인 1,000여 명이 기아로 신라에 피난을 와 식량을 구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도 실제로 있었다면, 문헌상 기년인 192년보다는 대단히 나중에 벌어진 일로 해석됨이 마땅하다.

3. 연대 문제

사서에 따르면 벌휴 이사금탈해 이사금의 손자인데 《삼국사기》 기록을 적힌 대로 믿는다면 탈해 이사금이 서기 80년에 사망했고, 벌휴 이사금은 184년에 즉위했으니 104년 차이가 나는데 당연히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일단 이 부분은 신라사같은 경우, 고고학적 연대와 《삼국사기》 연대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건 김씨 왕실이 확립되는 내물 마립간(제17대)때부터로 여겨지며, 이 부분을 근거로 《삼국사기》 서술 전체를 불신했던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적 분석은 현재 와선 적어도 가계도와 기사 자체는 교차검증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논파된 지 오래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신라는 2세기 후반 건국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의 손자인 유리 이사금이 3세기 초반에 즉위한 것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벌휴 이사금은 적어도 기년은 의문시되지만 실제로 탈해 이사금의 손자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탈해가 신화적 인물이라는 성격이 있으니 석씨 집단의 실질적 시조가 벌휴 아니냐는 설은 지금 와선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져 있다. 탈해 이사금유리 이사금(제3대)과의 일화 및 3세기 중후반부터 융성해져서 아예 사로국과의 문화적, 경제적 차이가 두드러지는 수로왕 금관국과의 대립은 고고학적 증거로도 강력하게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상 신라의 초기 기년이 신뢰할 수 없음을 국내 학계에서 고고학적 성과로 다시 확인하기 전에는, 한때 벌휴의 왕위 계승성을 높이기 위해 실제로는 누군가의 몇 대 손인 자가 누구의 아들이네 손자네 하는 식으로 계보 자체를 몇 단계 올렸다는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그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불가하다.[3] 게다가 신라는 그 말기까지도 혈통에 대한 신성성이 컸는데 함부로 《족보》를 조작하거나 사칭한다면, 아예 재위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 왕건과 견훤마저도 함부로 대놓고 고구려 고씨 왕실 및 백제 부여씨 왕실과의 연관성을 주장하진 못했다.[4]

벌휴 이사금이 즉위한 해가 혁거세 거서간과 똑같이 갑자(甲子)년인 것도 이 부분에서 놓칠 수 없는 단서다. 하필 육십갑자 중 첫 번째로 연대를 끼워 맞추었다는 의혹을 받기 딱 좋은데 이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라 측의 기년 수정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신라는 기년 인상하는 와중에도 계보는 삼국 중에서 제일 정확하게 기록해놓은 덕분에 기록에 공백이 많은 백제보다 세대를 통해 실제 기년을 추적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5][6]

일본서기이주갑인상이 악명 높지만 백제와 신라도 기년 조작을 했기 때문에 때때로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연대가 백제, 신라보다 더 정확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석우로는 일본서기의 우류조부리지간과 동일인물로 추정되는데, 이주갑인상을 사용하면 4세기 초반(200 → 320년)에 사망했고 우로의 아들 흘해 이사금은 310~356년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신라의 기년 조작이 정상화되기 시작하는 건 흘해 바로 다음 대인 내물 마립간대부터고[7] 흘해가 우로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사실로 보기 때문에 우로는 실제로 4세기 전반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3.1. 박씨-석씨-김씨 실제 즉위기간의 중복 문제

사실 박씨, 석씨, 김씨는 번갈아 즉위했다기에는 즉위기간이 지나치게 겹친다. 기년이 정상화되는 내물 마립간 이전까지의 세 왕조를 각자 구별해서 늘어놓으면[8]

이 된다.

일성은 아버지가 불명이나 대체로 파사보다 지마와 동세대일 가능성을 더 높게 보며, 일성은 그렇다 쳐도 아달라의 나이는 지마의 아들뻘로 본다. 따라서 아달라는 유리의 증손자뻘(3대손)로 비정되고, 유리는 3세기 전반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된다. 고고학적으로 2세기 후반에 사로국이 건국되었기에 혁거세 거서간남해 차차웅은 2세기 후반~3세기 전반에 걸쳐 재위하였을 것이며, 고고학적으로 3세기 전반 건국되는 금관국수로왕이 탈해, 파사, 지마와 동시대 사람임을 고려하면 유리는 3세기 전반 재위했음이 확실시된다. 따라서 유리의 증손자뻘인 아달라의 즉위기간은 4세기 초반이 된다.

탈해는 유리의 누이 아효부인의 남편이며 아효부인의 후손이 석씨 왕조이기 때문에 유리와 아효부인은 동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석씨 왕조의 마지막 왕인 흘해는 아효부인의 6대손인데, 10대 후반에 결혼한 고대 특성상 1세대를 20년 정도 가정할 경우 흘해의 즉위 당시는 4세기 초중반이 된다. 상술했듯 탈해의 5대손인 우로는 4세기 전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로는 내해의 아들이자 당숙인 조분의 맏사위로 우로와 명원부인이 6촌혼을 해서 흘해가 태어났고 흘해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고 명시된다. 우로는 당숙인 첨해 시절 흘해를 두고 "가문의 앞날이 이 아이에게 있다"고 운운한 것 때문에 첨해에게 찍혀 왜에게 죽었는데, 우로가 흘해가 태어난 뒤에 죽었음에도 흘해가 어릴 때 즉위했다는 건 15~16세가 되기 전에 당숙 첨해, 불명 유례,[9] 외사촌 기림의 즉위기간이 모두 몰려 있었다는 뜻이다. 첨해가 얼마 뒤 죽었다 가정해도 유례와 기림을 합쳐봤자 15년 가까이밖에 안 된다는 소리.[10] 우로가 일본서기 이주갑인상대로 320년 전후에 죽었다 가정하면 흘해의 즉위년도는 320~330년대가 된다.

미추는 조분의 둘째 사위이므로 4세기 전반 사망한 우로와 세대가 비슷함을 유추 가능하다. 다만 내물 마립간의 즉위년인 356년도 또한 믿을 수 없다는 게 중론이고 4세기 초반까지는 김씨 족단으로 추정되는 성한왕의 금릉동 소국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미추의 즉위기간은 4세기 중반일 가능성이 높다.

2세기 후반~4세기 초반 추정인 박씨 왕조와 4세기 중반부터 등장하는 김씨 왕조는 4세기 초중반에 세력이 강력했던 석씨 왕조의 막간을 이어 맞물려 돌아간다. 박씨는 김씨에게 왕위가 넘어간 이후에도 세력을 잃지 않고 지증왕 대부터 왕비족으로 다시 등장해 꾸준히 김씨와 연을 이어간 끝에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의 후기 박씨 왕조가 나타난다. 신덕왕은 정강왕 김황(金晃)의 사위로서 즉위했고, 견훤서라벌 기습으로 인해 경명왕, 경애왕의 이종사촌 김부(金傅)가 경순왕이 되면서 신라의 최후는 김씨로 마무리되지만, 김씨와 박씨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박씨와 김씨는 겹치지 않지만 박씨와 석씨, 석씨와 김씨는 각각 세대가 겹친다. 혁거세와 아달라의 대수, 혁거세와 흘해의 대수, 혁거세와 내물의 대수를 확인해보자.

혁거세-남해-유리-??-일성-아달라(5대손)
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이매-내해-우로-흘해(8대손)
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골정-조분-광명부인-보반부인(8대손)

탈해의 손자인 벌휴는 유리의 손자 지마, 일성(추정)과 겹친다. 아달라는 골정, 이매와 동세대이기 때문에 내해, 조분, 첨해와 1대의 차이가 있지만, 대신 미추가 우로, 명원부인, 광명부인, 유례, 걸숙(기림 아버지)과 동세대다. 사서에 따르면 미추는 조분의 동생 첨해 사후 조분의 둘째 사위로 즉위해 이후 처남 유례, 처조카 기림, 흘해가 즉위하고 다음이 미추의 사위 내물이다. 명원부인, 광명부인, 걸숙은 아이혜부인 석씨(내해 딸, 5촌혼)의 자식이고 유례는 후처 박씨의 아들로 이복형제지만 유례가 기림의 형인데, 유례 사후 유례의 이복'동생'인 걸숙의 아들 기림이 즉위하고 걸숙 이후 명원부인의 아들 흘해가 '어린 나이'에 즉위한다.

지마의 딸 내례부인 박씨(內禮夫人 朴氏)는 아달라의 아내이자 내해의 어머니다. 내해의 아버지는 이매인데 무슨 소리냐 싶지만, 내해의 어머니 내례부인에 별도의 설명이 없고 아무리 내해가 골정의 사위라지만 벌휴의 장손인 조분, 첨해를 제치고 내해가 먼저 즉위했기 때문에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더 높다. 내례부인은 아달라와 6촌일 가능성이 높지만, 유리의 증손녀이기 때문에 아효부인의 증손자인 골정, 이매와도 8촌지간으로 동세대다.

내례부인은 지마의 딸로 파사계이기 때문에 일성계가 단절되면 박씨 왕조의 다음 계승권은 내례부인의 자손에게 이어진다. 아달라 생전이든 사후든 내례부인이 8촌인 이매와의 사이에서 내해를 가졌다고 가정할 경우 내해는 박씨의 계승자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 내해의 사촌인 조분은 '박씨'를 후처로 들였으며 박씨의 아들이 유례다. 미추의 처 광명부인의 어머니는 내해의 딸 아이혜부인 석씨(5촌혼)지만 후처는 왕후 박씨라는 인연이 있으며 조분 또한 아달라, 내례부인의 9촌 조카다. 즉 미추는 조분을 통해 간접적으로 박씨와 인연이 있으며, 미추 본인도 박씨인 이칠 갈문왕(伊柒葛文王)의 외손자다.

문제는 미추의 아버지 구도갈문왕의 딸 옥모부인(玉帽夫人)이 골정과의 사이에서 조분과 첨해를 낳은 것. 그러니까 미추는 누이의 손녀와 결혼한 것이다. 연대 오류 아니냐 싶지만, 초기 신라의 복잡하고도 상당히 정확한 계보 속에서 일관적으로 미추는 구도의 아들임이 명시되어 있으며 남성은 노년이라도 상대 여성이 젊으면 자식을 가질 수 있으므로 옥모부인의 어머니가 전처고 미추의 어머니 술례부인(述禮夫人) 박씨[11]가 구도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처라면 가능하다. 고대에는 1세대의 나이 차이가 20살 정도이기 때문에 구도가 60살 이상에 미추를 낳았다면 3대 정도의 나이 차이가 실제로 난다.[12]

첨해 시절 사망한 우로 생전 흘해가 이미 태어났지만 흘해가 '어릴 때' 즉위하기 전 유례, 기림의 치세를 거쳤다. 15년도 안 된 사이에 3~4명이 들어가기는 너무 타이트하며, 웅진백제처럼 허구한 날 왕이 살해당하면 모를까 이때는 정상적인 계승이었다. 아무리 근친혼의 누적으로 요절 징크스가 생긴다고 해도 너무 부자연스러우며, 미추와 내물 모두 사위 즉위임을 고려하면 당사자들은 근친혼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따라서 조분-미추-내물 사이의 즉위는 조분-첨해-유례-기림-흘해와 동시대에 완전히 별개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실성 마립간의 처 아류부인도 미추의 딸이기 때문에 흘해는 내물뿐만 아니라 실성과도 동세대가 된다. 실성 마립간의 어머니가 이리부인(伊利夫人) 석씨[13]이며 석씨 왕조가 완전히 몰락한 것이 내물 사후 동서 실성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내물의 아들들을 배제하다 내물의 장남 눌지 마립간에게 살해당하면서 같이 몰락한 것으로 보는데, 흘해의 세대가 보반부인(내물의 처), 아류부인(실성의 처)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흘해 이후 몇 대 안 가 실성과 함께 몰락했을 가능성이 높다.[14] 다만 6부에서 완전히 세가 꺾여 다시는 '신라 왕'이 못 된 거지, 6세기 초반까지도 석씨로 추정되는 부(본피부, 사피부)가 나타나는 등 가문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속일본기에 한나마(대나마) 석양절(昔楊節)이 나타나는 등 석씨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박제상도 꼬인다. 기록에 따르면 제상은 파사의 5세손(4대손)이자 아도 갈문왕의 손자, 실성의 사위(치술부인)다. 눌지의 처 차로부인도 실성의 딸이므로 동서(이종사촌혼)가 된다. 파사-지마[15]-아도-물품-제상이라 가정할 경우, 제상의 항렬은 광명부인(눌지, 미사흔 할머니)과 같다. 미사흔이 '아버지처럼 여겼다'는 것과 제상과 치술부인의 차녀(5촌 조카)와 결혼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제상은 미사흔의 아버지뻘로 보인다. 그런데 제상이 미사흔의 형 눌지와 동서임을 고려하면 난감하다. 미사흔이 3남이라 눌지와 나이 차이가 났을 수도 있고, 치술부인이 차로부인보다 연상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제상의 항렬이 눌지의 할머니와 같다는 것은, 지마-아도-물품-제상 중에서 늦둥이가 한두 명 있어서 제상이 실성, 내물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내물과 눌지의 중간쯤 되었던 것 같다.

혁거세-남해-유리-???-일성-아달라
혁거세-남해-유리-파사-지마-아도-물품-제상
혁거세-남해-아효-구추-벌휴-골정-조분, 첨해-걸숙-기림
혁거세-남해-아효-구추-벌휴-이매-내해-날음, 우로-흘해
혁거세-남해-아효-구추-벌휴-골정-조분-광명-보반

계산하면 유리(3대)-탈해(4대) 동세대, 파사(5대)-구추 동세대, 일성(7대)-지마(6대)-벌휴(9대) 동세대, 아달라(8대)-골정-이매 동세대, 조분(11대)-첨해(12대)-내해(10대) 동세대, 걸숙-날음-우로-미추(13대) 동세대,(유례(14대)는 아버지가 정확히는 불명이므로 배제) 기림(15대)-흘해(16대)-내물(17대) 동세대가 된다. 초기 신라의 기년이 얼마나 안 맞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박씨-김씨 계승은 몰라도, 석씨 왕조는 실제로는 박씨, 김씨 왕조와 동시대에 병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의 근원적인 원인은 신라는 6세기 초까지 6부 체제였고, 신라 왕은 6세기 초까지 6부의 각 수장인 간(干)=왕(王)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세대에도 여러 '신라 왕'이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한 세대라도 상황에 따라서 왕의 대표만 바뀌면 되기 때문. 따라서 초기 신라의 왕계 문제는 신라의 6부 체제가 불러온 혼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으며, 신라가 2세기 후반을 기원전 1세기 중반까지 기년을 인상하기 위해 가족관계는 그대로 놔두면서 박씨, 석씨, 김씨 왕조 시대가 별개로 존재한 것마냥 조작했다고 볼 수 있다.[16]

'6부'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박씨, 석씨, 김씨 왕조 내에서도 분파가 나뉘어 동시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 초기 신라 왕 자리를 두고 박씨는 파사계와 일성계가 나뉘어 대립했고, 석씨는 골정계와 이매계로 나뉘어 대립했으며, 극초기 김씨와 구도-미추-내물로 이어지는 가계 또한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17] 신라 초기 신라 왕과 별개로 갈문왕이 여럿 등장하는 것, 4세기 후반부터 '신라 왕'을 독점하던 탁부의 소지 마립간 사후 6촌 형인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지증왕)이 '신라 왕'이 되고, 입종갈문왕법흥왕 시절 부왕(副王)급 위치를 가진 것이 당대 금석문에서 확인되는 만큼 신라 초기 갈문왕은 '신라 왕'이 아닌 각 부의 간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18]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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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혁거세 · 남해 · 유리 · 석탈해 · 파사 · 지마 · 일성 아달라 · 벌휴 ·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 유례 · 기림 · 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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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민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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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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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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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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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年春三月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사면하다
二年春二月 소문국을 정벌하다
三年春一月 주·군을 순행하다
三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年秋七月 상서로운 벼 이삭을 바치다
四年春三月 토목 공사로 하여 농사의 시기를 뺏는 일이 없도록 하다
四年冬十月 북쪽 지방에 큰 눈이 오다
五年春二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오자 구도에게 막도록 하다
六年秋七月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이기다
七年秋八月 구도를 부곡성주로 좌천시키다
八年秋九月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나다
九年春一月 국량을 아찬으로 삼고 술명을 일길찬으로 삼다
九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九年夏五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十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年春三月 한기부의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다
十年夏六月 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다
十一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十三年春三月 가물다
十三年夏四月 왕이 죽다

특이하게 일식 기록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온다. 아마 박씨 왕실에서 석씨 왕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혼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천문 관련 학문이나 부서 혹은 사관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기 이전 신라의 일식 기록에서, 낙랑군이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에게 접수되는 시점인 4세기 초반 이전 기록들은 주로 낙랑군의 기록을 복붙한 것으로 해석되는 추세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기년의 정확도가 대단히 의심되는 초기사 부분과는 달리, 하필이면 고구려가 낙랑군을 접수하는 4세기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교차검증되는 편이다. 가장 개연성있는 추측은 낙랑군 유민이 해당 기록을 갖고 신라로 들어왔거나 신라가 낙랑군과의 활발한 교류 과정에서 접수했다는 것인데, 현재로선 어디까지나 추측이 될 수밖엔 없다. 자세한 내용은 김용운 교수의 《한국수학사》 참조. 아마 일식 자체의 기록은 실제 있었던 기년과 일치할 가능성이 높지만 박-석 교체가 그렇게 무난하지만은 않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원사료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연대를 배치할 때 해당 연대에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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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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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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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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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분 이사금을 태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2] 내해 이사금의 부모는 아버지가 석이매, 어머니가 내례부인으로 적혀 있다. 이 내례부인이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과 같은 사람인지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3] 강종훈 교수의 《신라 상고사 연구》,《삼국사기 사료비판론》, 《한국고대사 사료비판론》 등 저서 참조.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총서 16권《삼국사기 초기기록, 이디까지 믿을 수 있나》등 참조[4] 한편 왕건의 선대로도 추정되는 고구려계 귀족 왕씨 가문의 정확한 출자는 현재로서는 불명이다. 고구려 편입 이전 낙랑군의 왕씨 가문은 두 종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가문, 왕조처럼 토착 낙랑인 출신임이 확실시되는 가문 이렇게 있었는데, 출자가 어쨌든 두 가문 모두 고구려에서 무려 삼백 여 년 이상 있었기에 고구려인이 맞지만 동북공정론자들은 왕건의 출신 가문이 전자라고 믿고 싶을 개연성이 강한 건 사실이다. 견훤의 이씨 가문은 사벌국 지배층 후예이자 5세기부터 400년에 걸쳐 대대로 신라 왕실 친위대로 복무한 가문으로 도중에 진흥왕소비 부여씨의 후손과 한 번 통혼한 걸로 추정된다. 왕건 가문은 6두품으로 대우받을 정도의 고구려 고위 귀족 출신이고 견훤 가문은 5두품이라도 400년간 신라 왕실 친위대를 대대로 해온 가문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왕건과 견훤의 가문이 후삼국시대 다른 호족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할 정도 가문이었으면 사실을 그대로 밝히면 되지 각종 거짓부렁을 칠 필요가 없었다. 후삼국시대 다른 호족 가문들과 비교하면 격이 떨어지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딱히 높은 것도 아니었다.[5] 기년 인상은 2세기 후반 건국을 기원전 1세기로 인상한 백제도 했는데 백제는 기록의 부실함과 잦은 수도 이전 탓에 신라보다 기년 추적이 어렵다. 심지어 가계라도 양심적인 신라와 달리 백제는 근초고왕 이전 초고왕계와 고이왕계 가계를 심하게 왜곡했고, 기년이 정상화된 이후에도 가계 왜곡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구이신왕-비유왕, 개로왕-문주왕, 동성왕-무령왕, 위덕왕-혜왕) 무왕은 말기 임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계가 오리무중이다.[6] 반대로 고구려는 고고학적으로도 사서 건국 연대와 거의 같은 게 확인되지만 대신 53~165년까지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즉위기간, 나이, 가족관계, 세대가 엉망진창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광개토대왕추모왕의 17세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유리명왕-고재사-신대왕 사이에 무려 4세대나 삭제되었다.(삼국사기에는 13세손이라 나온다) 그나마 고구려는 이들만 왜곡된 거지만.[7] 다만 이후에도 한동안 몇 년 정도 기년 인상이 일어났다는 가설도 있다. 그래도 이때부터 거의 정상화된 건 확실하다.[8] 사실 내물 마립간 이후에도 많이 잡으면 진흥왕 초기까지 몇 년 정도 기년 인상이 일어났다는 가설도 있으나, 내물 이전과 비교하면 정상화된 것을 확인 가능하다. 이때부터는 김씨만이 나타나기 때문.[9] 유례는 정확한 친부가 불명이다.[10] 삼국시대는 15~16세부터 성년으로 간주했다. 즉위 당시 어리다는 건 당시 15~16세가 안 되었다는 뜻이다.[11] 이칠 갈문왕(伊柒葛文王)의 딸.[12] 실성의 아버지 대서지(大西知)는 구도의 손자인데, 어머니가 불명이며 실성이 내물과 동서지간임을 고려하면 미추의 아들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대서지와 실성의 나이 차이가 조손뻘이 아니라 부자뻘이 맞다면 대서지는 옥모부인의 아들뻘이자 미추의 아버지뻘이 된다. 이렇게 되면 옥모부인의 어머니, 대서지의 어머니, 술례부인이 모두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13] 아찬 석등보(昔登保)의 딸.[14] 실성은 417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많이 잡아도 2~3대였을 것이다.[15] 기록에 나오는 파사의 아들은 지마뿐이다. 지마 사후 백부 또는 사촌으로 추정되는 일성이 이사금이 되면서(정황상 파사에게 밀린 파사의 형이 왜에 갔다 돌아온 걸로 본다) 아도는 이사금이 되지 못하고 대신 갈문왕이 되었다.[16] 고구려 5부도 초기에는 각 부마다 수장이 있었고 추모왕 이전에는 소노부(비류국)가 대표였지만 추모왕 대 계루부로 대표가 넘어간 뒤 계루부 내 추모의 후손이 5부 수장 자리를 독점하면서 고구려 왕위를 일관적으로 이었고, 초기에 초고왕계와 고이왕계의 왕권 다툼이 있던 백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17] 박씨, 석씨, 김씨가 각각 두 분파로 나뉘어 있었다면 딱 6부가 된다.[18] 이 경우 사요 갈문왕(유리 장인), 허루 갈문왕(파사 장인), 마제 갈문왕(지마 장인), 지소례왕(일성 장인), 일지 갈문왕(일성의 아버지 또는 외조부), 아도 갈문왕(파사 손자이자 제상 조부), 골정 갈문왕, 구도 갈문왕(미추 아버지), 이칠 갈문왕(미추 외조부), 날음 갈문왕, 복호 갈문왕, 습보 갈문왕(지증왕 아버지), 지도로 갈문왕(지증왕), 입종 갈문왕, 복승 갈문왕(마야부인 아버지), 백반 갈문왕, 국반 갈문왕, 만천 갈문왕(월명부인 아버지)이 '신라 왕'이 못 된 간이라 추측할 수 있다.[19] 지마가 아들이 없는 게 맞다면 파사의 손자인 아도가 뒤를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20] 제상은 아들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제상의 사위가 내물의 3남 미사흔이고 거칠부로 이어지는 미사흔계의 지위를 고려하면 미사흔계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21] 아달라는 후사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신덕왕 박경휘가 아달라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맞다면 서계(庶系)는 있던 걸로 보인다. 지증왕 대부터 박씨 진골로 등장하며 후기 박씨 왕조로 이어지는 '박씨'가 잠탁부 출신이기 때문에 잠탁부로 추정된다.[22] 그런데 박씨는 수가 아주 많아 통일신라시대 상당수가 5두품으로 내려갈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잠탁부의 손씨는 6성 중 5번째로 수가 적다. 점탁부가 왕비족으로 오래 권세를 누린 끝에 후기 박씨 왕조까지 등장한 걸 고려하면 상식적으로 손씨가 이씨, 최씨 못지않게 수가 많아야 함에도 손씨가 많이 적은 걸 고려하면 잠탁부의 5~6두품 상당수가 손씨를 안 쓰고 박씨를 써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손씨는 동시대 고구려에서도 쓰던 성이기 때문에 무작정 현대의 모든 손씨를 신라 손씨로 볼 수는 없다.[23] 기림은 처자식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초기 석씨 족단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본피부가 681년 건립되어 김유신계 또는 김인문계가 본피부로 옮긴 것을 감안하면 골정계는 도중에 단절된 걸로 보인다.[24] 본피부의 정씨가 6성 중 4번째로 수가 많으며 점량부 손씨는 어째서인지 숫자가 5번째지만 왕비족으로 권세를 누린 끝에 후기 박씨 왕조까지 등장한 걸 보면 실제 서열은 높았을 것으로 보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뒤에서 2번째다. 다만 정씨가 경주 정씨뿐만 아니라 지백호의 후예를 자처한 다른 정씨가 동계라면 숫자가 3번째로 많아지며, 후일 사탁부에서 김유신(김해 김씨)계 또는 김인문계(강릉 김씨)가 이주한 걸 고려하면 본피부가 마냥 지위가 낮았던 것도 아닌 듯하다.[25] 조분과 박씨의 장남이라 하지만 어머니가 박씨인 것만 확실하며 실제 아버지는 불명이다. 첨해 이후 골정계가 '신라 왕'이 된 게 확실한 건 기림이고 걸숙은 갈문왕이라는 기록도 없지만 아이혜부인(5촌 조카, 내해 딸)의 아들인 걸숙이 첨해와 기림의 사이임이 자연스럽다. 거기다 우로는 조분의 장녀 명원부인과의 사이에서 흘해를 가진 뒤 말실수로 첨해의 눈밖에 나 왜에 죽고 유례와 기림의 뒤를 이어 흘해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는데, 우로와 동서인 내물의 세대 문제도 있기에 골정계와 이매계를 분리한다 가정하면 유례가 자연스럽다.[26] 삼국유사에서는 이차돈이 박씨, 김씨, 석씨로 기록이 갈리는데 흘해-공한-길승-이차돈이라는 전승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씨가 속일본기에 기록된 것과 현대에도 소수지만 석씨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매계는 이어진 걸로 보인다. 초기 석씨 족단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사피부의 설씨가 다른 6부 6성에 비해 유독 숫자가 적은 것을 고려하면 사피부는 다른 6부보다 세가 미약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석씨는 권세를 잃은 뒤에도 사피부에서 최소한의 신분은 존중받았을 가능성이 있다.[27] 일성의 아버지 또는 외조부로 박씨인 것 외에는 가계가 불명이다. 기록이 오락가락하지만 대체로 남해 또는 유리-탈해 항렬일 가능성이 높다. 박씨를 쓴 것으로 보아 혁거세와 관련된 인물임은 확실하며, 혁거세의 직계일 경우 남해의 형제/유리의 형제/유리의 사촌형제 중 하나가 된다. 일지가 유리를 기점으로 하는 파사계와 일성계 사이에 들어갈 틈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구도 이전 박씨 갈문왕인 이칠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28] 이칠이 갈문왕인 데다 구도가 술례부인 박씨의 아들인 미추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을 감안하면 구도는 이칠의 뒤를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도의 딸 옥모부인의 손녀인 광명부인과 아들 미추가 결혼한 것을 감안하면 구도는 노년에 술례부인과 결혼한 걸로 보이는데, 이칠이 미추의 조부 수준의 나이가 맞다면 아달라-골정-이매뻘로 오히려 이칠이 구도의 아들뻘일 수도 있다. 이칠이 일지의 후손이 맞을 경우 증손자뻘이 된다.[29] 이칠이 구도에게 탁부를 물려준 게 맞다면 예사롭지 않은 가계일 가능성이 높다. 정황상 박씨의 최초 거점은 탁부고 탁부에서 사탁부와 잠탁부가 갈라진 걸로 보이는데, 잠탁부 박씨가 아달라의 후손이 맞다면 잠탁부는 일성계다. 그리고 제상이 파사계임이 강조되는 걸 고려하면 이칠의 가계는 파사계와도 별개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박씨 최초의 거점인 탁부를 물려받았고, 이칠과 관련된 걸로 보이는 일지가 남해 또는 유리-탈해와 세대가 같을 가능성이 높음을 고려하면 일지는 탈해의 개입으로 남해에게 '신라 왕'을 빼앗긴 가계일 수도 있다. 남해 차차웅의 즉위 과정이 여러모로 석연치 않기 때문.[30] 구도의 딸 옥모부인이 골정과 혼인해 옥모부인의 손녀인 광명부인과 미추가 결혼한 것으로 보아 미추는 노년에 술례부인과 결혼해 낳은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성-지마-벌휴와 동세대로 추정된다.[31]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를 시전하긴 했지만 엄연히 실성의 사위고, 왕위를 두고 죽고 죽이는 갈등을 빚은 것과 실성과 눌지의 손자 소지가 탁부 출신임을 고려하면 단순히 6부 대표를 두고 싸운 게 아니라 탁부 간을 두고 싸운 걸로 보인다.[32] 소지는 유복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탁부에게 '신라 왕'이 넘어간 이후에도 후손은 이어진 걸로 보인다. 다만 탁부의 수장을 지증왕의 장남 법흥왕이 한 것과 법흥왕의 처가 잠탁부의 연제부인 박씨임을 고려하면 소지의 가계가 단절되었을 가능성은 배제 못하지만, 법흥왕이 아들이 없어 외손자인 사탁부의 진흥왕을 통해 사탁부가 계속 신라 왕위를 이어나가기 때문에 법흥왕 이후에는 탁부 간을 다른 가계가 차지했을 것이다. 탁부 이씨가 유독 세가 강했던 것을 보면 신라 왕위와 상관없이 탁부의 세는 여전히 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33] 6부 중 하나인 한기부의 극초기 김씨로, 허루, 마제, 보제는 구도로 이어지는 김씨와는 이질적인 가계로 추정된다. 다만 지증왕의 장인이 박씨가 아니라 한기부의 등흔 각간(이벌찬)이라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한기부의 김씨 간은 계속 이어진 걸로 보인다. 한기부는 사서에서도 6세기 초 금석문에서도 기록이 너무 적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한기부의 배씨가 통일신라시대에도 상당히 높은 지위로 여럿 나타나는 데다 6성 중 배씨가 이씨, 최씨 다음으로 많은 걸 고려하면 기록의 부실함과 별개로 김씨 최초의 거점인 만큼 지위가 낮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34] 6세기 초부터 신라 멸망까지 이어지는 사탁부의 신라 왕조로 내물의 차남 복호를 기점으로 나타났다. 사탁부의 최씨가 김씨, 이씨, 박씨 다음으로 숫자가 많다는 점에서도 강고한 권력을 알 수 있다.[35] 제상-미사흔계, 아달라계, 골정계, 이매계, 눌지계, 한기부 김씨가 각각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복호계가 사탁부 간이 된 건지 모호하다. 일단 본피부가 자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기림 이후 골정계가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기림이 복호의 아버지 내물과 동세대인 데다 복호만 아내에 대한 기록이 일체 없음을 고려하면 기림 이후 골정계의 빈자리를 복호계가 대신했을 수는 있지만 이 경우 복호계가 본피부가 아닌 사탁부라서 또 꼬인다. 다만 6부는 처음에는 탁부(박씨), 본피부(석씨), 한기부(김씨)로 시작해 탁부에서 사탁부가, 본피부에서 사피부가 분리되었고 박씨 족단의 거점인 잠탁부가 탁부의 명칭을 공유하는 데다 왕경에서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 놓인 걸 고려하면 박씨는 원래 탁부-사탁부-잠탁부였는데 미추가 박씨인 이칠에게서 탁부를, 미사흔계가 파사계인 제상에게 사탁부를 물려받았다 미사흔의 형인 복호계가 사탁부로, 동생인 미사흔계가 본피부로 서로 맞바꿨을 수도 있다. 미사흔계인 거칠부는 처자식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피부를 미사흔계가 이어가다 도중에 단절되어 681년 김유신계 또는 김인문계가 본피부를 대신한 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