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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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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6대 국왕 성왕 | 聖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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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을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구세관음상.[1]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504년 추정[2] | ||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 |||
사망 (음력) | 554년 7월 (향년 50세 추정) | ||
신라 관산성 구천 (現 충청북도 옥천군 구진벼루) | |||
능묘 | 능산리 중하총 (추정) | ||
재위기간 | 백제 왕태자[3] | ||
513년 이후 ~ 523년 6월 7일[4] | |||
백제 제26대 국왕 | |||
523년 음력 5월 ~ 554년 음력 7월[5] (31년 2개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성씨 | 부여(扶餘) | |
휘 | 명농(明襛) / 명(明)[6] | ||
부모 | 부왕 무령왕 모후 왕대비(?)[7] | ||
형제자매 | 3남 중 3남?[8] | ||
왕후 | 부여창, 부여계의 모후 | ||
자녀 | 3남 2녀 태자 부여창[9] 왕자 부여계[10], 부여임성[11] 왕녀 매형공주, 소비 부여씨 | ||
종교 | 불교 | ||
신장 | 178.8cm[12] | ||
시호 | 성왕(聖王) | ||
별호 | 성명왕(聖明王) | ||
명왕(明王) | |||
마한황제제왕(馬韓皇帝齊王)[13] | }}}}}}}}} |
성왕 정부표준영정 (2004년 권오창 作)[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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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짐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성왕이 남긴 마지막 말.
백제의 제26대 건길지이다.《일본서기》에 기록된 성왕이 남긴 마지막 말.
《삼국사기》에는 왕자[15] 부여명농이 즉위하자 국인(國人)들이 '성왕'(聖王)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를 보아 존호가 그대로 시호로 굳어져서 사용된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명왕'(明王)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양서(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에 더 많은 기록이 나오는 왕이기도 하다. 특히 제29대 긴메이 덴노의 일생을 다룬 《일본서기》 <흠명기>는 <성왕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백제의 원서인 《백제본기》의 기록을 충실히 반영해 놓았다. 다만 해당 서적 자체가 천황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제작된 서적이기 때문에 성왕이 긴메이 덴노의 신하인 것처럼 기록을 해 놓은 점이 흠이다.
《일본서기》에는 과거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왕으로서 가야를 백제의 세력권에 넣고, 고구려에게 복수하려는 집념의 소유자로 나타나 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성왕(백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아버지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중흥을 이끈 명군이자 성군으로 평가받는다.[16][17] 《삼국사기》에는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고 성왕을 긍정적으로 평하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며 찬양하고 있어서 성왕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하였음을 알 수 있다.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한 것은 마침내 마한을 완전히 복속해 아래에 두었다는 자신감이 원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에게 패해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무왕이 등장할 때까지 다시 혼란기에 빠지고 남부여란 국호는 사라지고 만다.
《동국통감》의 평가는 결단을 잘해 성군이라 불렀지만 말년에 신라를 배신하다가 전쟁의 칼날에 죽어 자신을 망하게 한 왕으로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성왕(聖王)은 처음 왕위에 올라 능히 대사(大事)를 결단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성인이라 일컬었는데, 말년에 이르러 신라와 더불어 고구려를 치려고 꾀하다가 그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자 옛날의 우호를 배반하고 분병(忿兵)을 징발하였다가 드디어 전쟁의 칼날에 죽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하루아침의 분노로 그 자신을 망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4. 기타
[18]
- 호류사 몽전에 보관되어 있는 목제 구세관음상. 《성예초》에 따르면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이 성왕을 기리기 위해 그의 모습을 본떠 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20] 녹나무로 만들어서 그 위에 금박을 입힌 이 목제 관음상은 실제로 가보면[21] 성인 남성 키와 비슷할 정도로 큰데 높이 178.8cm에 달한다.# 인상이 무뚝뚝한 동네 아저씨 같이 생겼다.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의 소방서로터리에는 성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수도를 부여로 옮긴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노리사치계는 6세기 성왕 시기 일본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 일본 교토의 히라노 신사에서 모시는 신이 성왕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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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삼국사기》 <성왕 본기>
一年夏五月 성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좌장 지충이 고구려를 패수에서 격파하다
二年 양 고조가 왕을 책봉하다
三年春二月 신라와 서로 예방하다
四年冬十月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우다
七年冬十月 좌평 연모가 고구려와 전투하여 패배하다
十年秋七月 별이 비 오듯 떨어지다
十二年春三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十二年夏四月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다
十六年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칭하다
十八年秋九月 장군 연회가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다
十九年 양에서 모시박사 등을 보내주다
二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고구려가 예와 공모하여 독성산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春一月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지르다
二十七年冬十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다
二十八年春一月 장군 달기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다
二十八年春三月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포위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신라가 동북 변경을 획득하여 신주를 설치하다
三十一年冬十月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가다
三十二年秋七月 성왕이 죽다
6. 《일본서기》 기록
※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모두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애초에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이 "역사를 기록한다"보다는 "우리 나라가 세계 최고의 나라다!" 정도의 프로파간다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 524년 정월: 백제 태자 명이 즉위하다.
- 529년 3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항구를 내려달라 요청하다. 안라회의에 사람을 보내다.
- 530년 9월: 안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모야신을 사로잡다. 5성을 취하다[22]
- 531년 12월: 백제군이 안라에 진출해 걸탁성을 쌓았다.
- 531년 5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 541년 4월: 성명왕이 임라의 한기들에게 덴노의 뜻을 전하다.
- 541년 7월: 성명왕이 임라에 신하들을 보내다. 그리고 덴노에 부한과 일마의 정사를 아뢰다.
- 543년 9월: 덴노에게 공물을 바치다.[23]
- 543년 12월: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 544년 정월: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다.
- 544년 정월 이달: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렀으나 낮은 이들을 보내왔다.
- 544년 2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받아오다.
- 544년 3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 544년 11월: 임라와 일본부의 집사들을 불러 임라 재건을 도모하다.[24]
- 545년 5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다.
- 545년 9월: 덴노에게 장육불을 만들어 바치다.
- 546년 정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6년 6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를 바치다.
- 547년 4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다.
- 548년 정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4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6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윤7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48년 10월: 득이신에 성을 쌓았다.
- 549년 6월: 일본에 사신을 보냄.
- 550년 2월: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50년 4월: 일본 사신이 돌아가다. 고구려 노비 7명을 바치다.
- 551년 12월: 덴노가 보리 씨앗 1,000곡을 하사하다. 성명왕이 백제, 신라와 임라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려를 정벌해 평양을 토벌했다.
- 552년 5월: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다.
- 552년 10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이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
- 553년 정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3년 6월: 일본에서 사신이 오다.
- 553년 8월: 일본이 사신을 보내다.
- 553년 10월: 백제 왕자 여창이 고려군과 싸워 이기다.
- 554년 정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4년 2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다.
- 554년 3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 554년 5월: 일본 수군이 도착하다.
- 554년 12월: 일본에 사신을 보내다. 전투에서 패해 목이 베어지다.
7. 가족관계
8. 대중매체에서
- 2005년 SBS 드라마 <서동요>에서는 배우 안석환[26]이 연기했다. 프롤로그에서 관산성으로 향하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목이 잘리는 장면만 나왔으나 성왕이 죽는 장면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따라서 도도가 말 먹이는 종으로 등장하고 도도가 성왕에게 절을 올리는 모습이나 건네는 말 모두 <일본서기>에서 그대로 따 왔다. 성왕의 최후는 작중에서 떡밥을 남겼는데 드라마 내 주요 사건 2개와 연관이 되어 있다. 성왕의 목은 신라의 북청 계단 밑에 묻혔고 26년 후 부여선이 다시 신라에 잠입하여 찾아와 제를 올리기로 한다. 그러던 중 제의 전날 위덕왕은 무선공녀 연가모와 동숙을 하게 되고 이 때 연가모는 훗날 무왕이 되는 부여장을 임신하게 된다. 하지만만 이 사실이 귀족들에게 소문으로 퍼지면서 위덕왕은 귀족들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고 위덕왕은 연가모를 내칠 수 밖에 없었다.[27] 다시 20여 년 후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있고 백제는 신라의 성을 획득한다. 그러자 신라 측은 20여 년 전 부여선이 찾아간 수급은 가짜라고 주장하며 성과 바꾸자고 했고 서동은 수급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 정변으로 백제에서 쫓겨나 신라에 가 있던 태학사의 기술자들을 다시 백제로 돌아오게 한다. 이 때 선화공주와 아좌태자가 각 국의 대표로 나가 회담을 했는데 선화공주가 아좌태자에게 있던 왕자들의 표식을 보며 훗날 서동이 백제의 왕자임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 2013년 MBC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는 배우 조현재가 연기했다. 태자 시절의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캐릭터는 공적인 면에서 냉철하고 유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입이 짧고 깔끔을 떤다. 마음이 있는 여주인공을 자꾸 골탕먹이며 사지로 내모는 츤데레 속성도 보이고 있다. 성왕(제왕의 딸 수백향) 문서 참조.
-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는 배우 김호중이 연기했다.
- 2020년부터 웹소설 플랫폼 브릿G에서 연재 중인 명농전의 주인공이 이 분이다.
9. 관련 문서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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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 웅진회의 | 사비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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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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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 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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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이는 김상현 교수의 주장이다.#[2] 역사스페셜과 한성백제박물관이 아들 위덕왕의 생년으로 역산한 것이다.##[3] 《삼국사기》에는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일본서기》의 기록이다.[4] 음력 5월 7일, 율리우스력 6월 5일[5] 《삼국사기》 <백제 성왕 본기>, <신라 진흥왕 본기> 의거. 《일본서기》에 따르면 12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무리 《일본서기》가 《삼국사기》에 없는 백제 관련 사항들을 적잖이 수록하고 있다고는 해도, 《삼국사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굳이 일본측 기록을 우선시할 이유는 없다.[6] 《일본서기》.[7] 역사스페셜 추정.[8] 형 순타태자, 부여사아.[9] 맏아들, 위덕왕이 태자였는지는 《삼국사기》 기록과 《일본서기》 기록에도 없지만 학계에서는 태자였던 걸로 추정하고 있다.[10] 둘째 아들[11] 셋째 아들이라고는 하나 가문별로 출자가 다르고, 아좌태자(阿佐太子)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12] 성왕의 용모를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구세관음상의 키가 진짜 성왕의 키로 제작한 경우를 가정해서 역사스패셜에서는 성왕의 키를 178.8cm로 추정했다.#[13] 일본 오우치 가문의 족보에 기술됨. 위덕왕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음.[14] 이 표준 영정은 일본 호류지에 위치한 복제 구제 관음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15] 《일본서기》에는 태자.[16] 우리역사넷[17] 국제문화홍보정책실.[18] 실제 사람과 매우 흡사한 모습의 불상인데 녹슬어 있는 모습이 마치 부패한 시신을 연상시켜서 좀 무섭고 인상이 무뚝뚝하다. 볼때마다 다들 한번씩 놀라기 마련이지만 보다 보면 훌륭한 솜씨로 만든 높은 퀄리티의 불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19] 15세기 초에 호류사에 머물렀던 승려인 성예가 남긴 책.[20] 쇼토쿠 태자를 본땄다는 설도 있다.[21] 일본의 비불이기 때문에 특정 날에만 공개한다. 구세관음상의 경우 매년 봄(4월 11일~5월 18일)과 가을(10월 22일~11월 22일)에만 공개.[22] 등지리모라(騰利枳牟羅)‧포나모라(布那牟羅)‧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아부라(阿夫羅)‧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 위치는 불명이나 대구에서 창령에 걸치는 지역으로 보는 설과 창원 북부에서 영산 밀양 일대의 성이라는 설도 있다. 아부라는 현풍 방면, 구지파다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성산동으로 추정된다.[23] 부남의 재물과 노예 2명을 바쳤다고 한다. 신라의 혜초가 각멸(閣蔑) 일대를 거쳐 인도로 갔다고 하는데, 권오영 교수는 캄보디아가 인도로 가는 불교 순례길로의 거점으로써 백제와도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캄보디아의 백제 불상[24] 안라회의 이후와 사비회의 이전 사이에는 웅진성에서 웅진회의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5]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성왕에게 공주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명문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백제 창왕 13년인 정해년, 왕의 누이인 공주가 봉양한 사리라는 뜻)'에서, '口 아래 兀'를 兄의 이체자(異體字)로 보는 경우, '매형공주(妹兄公主)'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그 자체가 공주의 봉작명이라는 의견부터, 왕의 누이인 '형공주', '매형'과 '공주', 혹은 자매 중에서 장(長)공주, 즉 맏이 공주라는 해석 등.봉작명이면 위덕왕의 딸일 수도 있잖아[26] 2013년 MBC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는 동성왕대 반역자 백가 역.[27] 사실 평소라면 임금이 나인과 동숙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중요한 제의 전날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