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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백작 |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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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명 | 노다 헤이지로 (野田平治郞) 노다 헤이슌 (野田 秉畯) |
별명 | 노다 대감 |
출생 | 1857년 10월 7일 |
함경도 장진도호부 (現 함경남도 장진군 또는 자강도 랑림군 또는 량강도 부전군)[1] | |
사망 | 1925년 2월 1일 (항년 67세) |
경성부 | |
사망 원인 | 뇌일혈로 인한 급사 |
직업 | 관료, 정치가 |
종교 | 유교 (성리학) |
본관 | 은진 송씨 (恩津 宋氏) |
호 | 제암 (濟庵)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조선귀족 백작 |
배우자 | 조씨 |
자녀 | 슬하 1남 3녀[2] 아들 송종헌 |
주요 경력 |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 조선귀족 자작, 조선귀족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비고 | 정미칠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1907년 영친왕과 대한제국 내각의 모습[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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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정미칠적의 일원이기도 한 매국노이다.2. 생애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출생했다. 법을 가르치는 관리인 율학훈도 송문수와 기생 홍씨 사이의 얼자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성씨 도용이 워낙 흔한 일이었던데다가 친차검사 기술도 없던 당시에 어떻게 기생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확신했는지가 의문이기에, 성씨 도용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족보에는 송병준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나중에는 민태호의 양자로 들어가는 등 고아나 다름없었다. 한양에 와 기생집에서 일하다가 민씨 척족의 거물 민태호의 눈에 띄어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1871년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청에 배속되었다. 1873년에는 도총문 도사, 사헌부 감찰 등을 지내고 1876년 강화도 조약 때 수행원으로 일하며 일본측 인사와 만나며 친일매국의 싹을 피워왔다. 그러다가 1884년 갑신정변 후 밀명을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도리어 설득되어 김옥균의 동지가 되었다. 귀국하여 그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5]의 주선으로 출옥하였고 영월군수, 흥해군수, 은진군수,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6] 후 야마구치현의 하기(萩)에서 양잠업에 종사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이 때부터 친일파로 돌아서기 시작했는데 귀국 즉시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다시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기 위한 전초 작업을 시작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후에는 황제 양위 운동을 벌여 친일 활동에 앞장섰고[7] 순종 즉위 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해 일제의 사주를 받고 국권 피탈을 위한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 행위를 했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 피탈을 위한 매국 외교를 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자작에 이어서 1920년 다시 백작에 올랐다가 1925년 2월 1일 뇌일혈로 죽었다. 사망 전날인 1월 31일 다이쇼 덴노의 특별 교지에 따라 정3위로 승서되었고 사망 후에는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다이쇼 덴노는 포도주 12병을 내려 조의를 표했고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는 "세인이 공지하는 동양 평화의 공헌자"라고 조문했다. 송병준의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이어받았다.
송병준의 상세한 일생은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대중매체에서
- 1959년 개봉한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서는 배우 주선태가 연기했다.
4. 여담
사진 좌측의 인물 우측의 인물은 이용구. |
- 순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방 순시를 하던 도중 술을 먹고 궁녀가 탄 기차 칸에 침입하여 그들을 성희롱하다가 당시 시종 무관이었던 어담과 드잡이를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송병준이 취하여 칼까지 빼들었다가 그에 맞서 어담[10]도 칼을 빼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끝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대신 사과했지만 이 사건이 기사화되어 전국에서 '황제가 타고 있는 기차에서 어찌 감히 난동을 부리는가'의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결국 둘은 사이좋게 해고되었다.
-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자신의 작위를 습작받은 아들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파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2007년 11월 22일 제3차 재산 환수 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송병준이 매국의 대가로 얻은 급부, 부정축재로 얻은 재산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가 소유로 재산을 환수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제3자에게 처분한 송병준의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원래 송병준 묘가 있는 땅은 송병준의 증손자 송돈호의 땅인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판 뒤 떠나버린 것으로 송병준의 묘를 이장하라는 분묘 개장 공고를 봤을텐데 왜 조상의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화장당하게 방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손에게도 버림받은 셈이니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는 재산 국가 귀속 결정에 반발하여 2008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2011년 5월 패소했다.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는 송병준의 매국 행위에 대해 반성하거나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증조부는 애국자!"라는 등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송병준의 재산과 땅을 되찾겠다며 여러 차례 소송을 걸고 있다.[11]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가 송병준의 일본 땅도 되찾겠답시고 변호사 등을 통해서 알아보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송돈호가 해명하기를 "땅 소재지를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에게 이미 사기를 당했었다"며 언론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 송돈호의 이복형인 송준호는 아버지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실의에 빠진 채 방탕한 유랑 생활로 인생을 보냈는데, 일제 때부터 유복한 생활을 해온 그는 하루아침에 찾아든 엄청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폐인처럼 떠돌이 생활과 감옥 생활을 거듭하다가 1997년 기준으로 기독교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경기도 하남시의 한 돌봄시설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친일파 후손이 다 3대째 잘 살고 있다는 속설의 반증인 셈.[12] #
- 이완용보다도 더한 인간 말종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완용과는 달리 무덤은 파이지 않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1리에 잘 누워있다가 무연고자 묘로 분류되어 땅 주인에 의해 임의로 화장되었다. 이후 죽고 나서 선산에 묻혔는데, 후손이 선산을 매각할 때 묘를 이전하지 않아서 선산의 소재지인 경기도 용인시에서 무연고 분묘로 간주하고 행정처분해버렸다.[13]
- 2003년에 일제 때 미쓰비시제강 공장이 있었던 인천광역시 부평의 미군기지 'Camp Market'이 철수한 후 부평 공원이 들어서자 송병준의 후손들이 그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했는데 문제는 이 땅이 원래 민영환이 경영했던 '목양사'의 토지라서 민영환의 후손과도 충돌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의해 패소 선고를 받았고 2011년 5월 13일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 전술한대로 원래 민영환 땅이라서 양측이 다퉜으나 2005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양쪽의 의견 모두를 기각했다. 구체적으로 민영환의 후손들은 '독립 당사자 참가인' 자격으로 소송에 참여해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이를 이유없다고 본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국가 땅.
- 송병준이 민영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석방된 덕이 있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을사조약 때 이런 논평을 내면서 송병준을 욕했다. "병준아, 네가 민충정(閔忠正) 문하에 들어가 여러 해를 지내어 충정공이 턱 끝으로 가리키면 네가 그대로 하며 손 끝으로 부르면 네가 '예 예'하던 놈이 아닌가."
- 삼일운동을 조직하고 계획 했던 민족대표들이 송병준을 섭외 시도를 하기도 했다.[14] 물론 삼일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측에서, 미리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일제에 밀고 하지는 않은듯 하다. 참고로 손병희는 이완용도 섭외 시도를 했다.
- 알고 보면 이완용보다 더 악질인 인물이다. 최소한의 눈치는 보고 행동한 이완용과는 달리 단순 무식이라 여기 저기 다니면서 양아치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 덤으로 단순 기회주의자에 불과한 이완용과 달리 송병준은 강화도 조약 무렵부터 확고한 친일파였기에 더욱 교활한 면도 있다.
[1] 이북5도로 함경남도 장진군 또는 신흥군 동상면[2] 여기서 딸 중 1명은 을미사변의 가담자이자 아버지와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구연수와 결혼했다.[3] 중앙의 소년이 영친왕, 첫째 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인물이 송병준이다. 영친왕 바로 왼쪽 뒤에 왼손이 허리춤에 있는 인물은 이완용.[4] 사진 속 송병준의 모습을 확대한 사진 #[5] 을사조약 때 자결한 민영환이다.[6] '창씨개명 1호'라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실제 1호는 1879년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사노 도진'으로 개명한 이동인이다. 송병준은 일제강점기 때의 창씨개명 1호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들도 줄줄이 창씨개명을 했는데 송병준의 경우도 이 영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7] 당시 어전 회의에서 고종의 어전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 메이지 덴노에게 무릎꿇고 사죄해야 한다"면서 "자결을 하라!"고 개드립을 쳤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신하가 주군에게 대놓고 자결을 명한 것이다. 고종이 계속 묵묵부답으로 있자 제3차 어전 회의에서 이병무가 칼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고 결국 고종은 강제 폐위당한다. 흔히 이완용이 칼을 빼들고 협박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나름 교양과 학식은 있던 엘리트였던 이완용 성격상 그런 일은 없다 보는게 중론이다.[8] 우연히도 이 셋은 경술국적에도 들어간다.[9] 송병준이 구용서의 외할아버지라고 언급하는 기사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10] 기가 차는 건 나중에 이 어담도 친일파가 되어 '니시카와 단이치(西川潭一)'로 창씨개명을 하고 중추원 참의까지 하는 등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11] 물론 송병준의 묘가 파헤쳐지도록 놔둔 것을 봐서는 정말로 송병준을 애국자로 생각했다기보다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친 개드립일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자기 입으로 "증조부는 매국노"라고 말했다가는 패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12] 이와 비슷하게 이완용의 고손자(이완용 재산 찾기 소송을 벌인 이윤형의 아들)도 말년을 단칸방에서 보냈다고 한다. #[13] 무연고 분묘와 무연고 사망자, 신원미상 변사자의 경우 보통 관할 지방자치단체에서 토지의 소유주나 경찰, 검찰 등 관련자로부터 이전받아 일괄적으로 화장 또는 무연고 묘지에 매장 처리하며 일정 기간을 보존한 후 다시 일괄적으로 산골 처리한다. 경기도 내 무연고 사망자 유골 보존 기한은 보통 10년이니 지금쯤 산골 처리되었을 듯하다.[14] 당위성 차원에서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섭외 했던 것이다.[15] 무려 고종보다 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