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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0:48:20

근육조선/등장인물/조선/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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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
등장인물 / 조선 (1부 · 2부) 설정 (입신체비) 개변된 역사 / 조선 웹툰


1. 개요2. 왕실
2.1. 수양대군 이유(최영직)2.2. 세종 이도2.3. 문종 이향2.4. 소헌왕후 심씨2.5. 안평대군 이용2.6. 임영대군 이구2.7. 금성대군 이유2.8. 세조 이홍위2.9. 양녕대군 이제2.10. 서산군 이혜2.11. 구성군 이준2.12. 효령대군 이보2.13. 삼한국대부인 윤씨2.14. 도원군 이장2.15. 군부인 한씨2.16. 태종의 서자들
3. 신하4. 기타
4.1. 상원사의 스님 ★4.2. 흑우4.3. 홍길동4.4. 최 생원 ★4.5. 변 서방 ★4.6. 신미4.7. 윤씨 부인

1. 개요

근육조선조선 1부 등장인물을 정리한 문서다.

가상인물은 ★ 표시.

웹툰판 오리지널 등장인물은 ☆ 표시.

2. 왕실

수양대군으로 빙의한 최영직이 평하길, 헬스장 상위 1% 이내의 재능충 집안. 궁궐 생활이 망친 1%급 재능

그래서 수양대군의 몸과 최영직의 트레이닝 지식이 합쳐지자 고작 3년 만에 3대 천근(600kg)을 찍었고, 커팅을 하고도 근육과 근력 손실이 없는 수준이다. 아버지 세종은 당뇨 초기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식단 조절과 운동을 병행하다보니 빠르게 회복되었는데, 최영직이 약물도 없이 이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놀라워한다. 심지어 입신체비에는 관심도 없이 술만 퍼마시던 양녕조차도 체격 자체는 건장했다. 작가가 2부 도중에 댓글로 한 독자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보면 이 집안이 얼마나 재능충인지 알 수 있다.
근데 수양대군(영직)이 현대에서 트레이닝 했다면 3대 1000이 가능했나요?
그 재능이면 가능합니다. 전근대라서 현대보다 기구가 불리하고 부상 치유가 거의 불가능해서 20% 정도 감량하신다 보면 돼요.[1]
문피아 2부 21장 15화(달구벌 결전(1)) 연재분 댓글과 그 답변

최영직은 고려 말의 맹장이었던 태조대왕의 유전이 아닌가 추측한다. 작중에서 양녕대군이나 여진족을 비롯한 북방인들이 입신체비로 단련된 수양대군을 보며 이성계를 떠올리고 태조대왕이 쓰던 물건을 복제했다는 강궁을 최영직이 시위만 겨우겨우 당기는 것을 볼 때, 생전 이성계도 전장에서 구르면서 다져진 우락부락한 체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1. 수양대군 이유(최영직)

세종의 차남. 정확히는 수양대군에 빙의한 헬스 트레이너 최영직. 작중에서는 , 즉 손님이라고도 표현되고, 작가는 "수양이"라고 귀엽게(?) 불러준다. 외모는 180이 넘는 키에 당연히(?)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덩치로, 신체비율만 따지면 강범동에 가깝다고 자평한다.[2]

1부 주인공으로, 역사학과를 졸업했지만 최전방 양구에서 군에 복무할 당시[3] 보디빌딩에 빠진 것을 계기로 보디빌더로 진로를 틀고 식품영양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생활스포츠지도사 1급 자격증을 따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실력도 상당해 꽤나 유명한 기업의 회장의 개인 트레이너를 할 수 있을 정도. 밤에 혼자 TV를 보면서 술을 먹다 과거에 자기 같은 헬스 트레이너가 있었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소리를 했는데, 진짜로 수양대군이 되어버린다.

빙의 후 웹툰에선 근육이 전부 사라진 몸에 절규하고 현대문명과의 괴리에서 잠시 고생하나 싶지만, 진성 헬창답게 왕위는 포기하고 근육을 키우면서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을 보좌하기로 결심한다.[4] 세종의 고도비만과 당뇨 초기 증상을 알아보고 이를 치료하고 싶어하지만, 그냥 막무가내로 시키면 세종대왕이 따라올리가 없을 뿐더러 대군이 헛짓거리 한다고 탄핵까지 당할 수 있다보니[5] 성리학 사상을 첨가하여 헬스 트레이닝을 입신체비라는 학문으로 정립한다. 그리고 몸을 단련해 소헌왕후의 생일 때 중신과 부모의 눈 앞에서 삼대운동 1000근을 들어보여 자신의 이론과 효심을 모두 입증, 세종대왕의 체질 개선에 들어서게 된다.[6] 이후에도 운동을 계속하여 삼대운동 1200근,[7] 더 나아가 비공식이지만 인생 최고기록으로 삼대운동 1350근을 달성한다. 단순 근력으로는 세계의 그 누구도 범접치 못하는 신화적인 경지이며, 생전 이룩한 업적이 전해지면서 후대에는 위대한 가르침의 창시자, 수양자라 불린다.[8] 대한 공화국 시점에서는 조선의 방향성을 제시한 조선 초 핵심 인물이자 세종, 문종과 동급의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세종대왕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이는 한국사 최고의 위인 중 한 명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조선 초기부터 거대한 사상적 변화를 일으켰지만 정작 자기가 아는 건 헬스를 기반으로 한 생활체육 지식과 대학에서 배운 역사 지식, 대학원에서 배은 식품영양학 지식, 그리고 수양대군이 원래 알던 왕자로서의 지식뿐이다. 더구나 현대의 지식은 시간이 가면서 세종대왕에게 더 갈려나갈수록 많이 잊어버린다는 설정도 나온다.[9] 어디까지나 보디빌더지 운동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술도 궁술을 제외하면 보잘것없고, 대외정책과 내부통치에 대한 아이디어는 본인보다 세종과 문종, 기타 신하들이 훨씬 더 뛰어나다. 그래서 다른 대역물의 주인공들처럼 혼자서 모든 테크트리를 다 올려버리는 짓은 못 하고, 주변 인물들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활동하는 편이며 휘하 사람들을 갈고 자기도 갈리면서 발전을 이루어내는 편. 현대의 지식을 이용할 때도 가급적이면 조선에서 직접 실례를 찾거나, 조선 수준 지식으로 패러프레이징하거나 세종처럼 옛 자료를 상고해서 찾았다는 식으로 이용한다.

물론 그가 아는 몇 가지 전공 지식 분야에서는 전문가급이고, 수십~수백 년의 경험이 모인 지혜의 결정체이다보니 당대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능력으로 비춰진다. 수양대군을 만난 유럽의 사절단이 자국에 돌아가 그가 창안한 이론에 대해 설명하자, 유럽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도 나이 스물에 저런 철학을 개발하지는 못했다며 칭송한다.

작중에서 수양대군이 직접 도입하거나 바꾸어낸 것은 다음과 같다.
허나 젊은 시절 달자(몽골)과의 전쟁에서 얻은 PTSD로 악몽등을 꾸는 등의 심적으로 갖은 고생도 했고,이후 말년에 뇌종양으로 추정되는 원인불명의 두통 등을 앓다가[13] 1487년, 만 50세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 만 69세에 사망한다.
사망 후 자신이 바꾸어낸 세계의 현대로 돌아오는데, 여전히 역사학과 출신 입신체비사이다. 그런데 원래는 사학과 학사 - 식품영양학과 석사 - 헬스 트레이너라는 특이할지언정 충분히 가능한 경력이, 바뀐 세계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하이 커리어로 탈바꿈한다. 사학과는 수양대군의 적자인 도원군이 시작한 학문이어서 사학과 교수들은 젊고 건강하다면 3대 500kg을 찍는 것이 기본이고, 입신체비는 정부에 전담 부서가 있는 국기이자 국책사업급 스포츠다. 거기에 약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전통 입신체비사이니 그야말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14] 그래서인지 수양대군이 돌아오기 전 최영직은 어마어마한 헬창에 꼰대였고, 덕분에 수양대군에서 돌아온 최영직이 나름 유한 모습을 보여 줄 때마다 친지들이 놀라곤 한다.[15] 2부 에필로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최영직의 모습을 잠시 보여 주는데, 원래 영직의 성격에 더하여 사학과, 식품영양학과 출신이라는 두 커리어가 더해져서 근육은 가장 위대한 물질이라는 근부심을 부리는 꼰대 중의 꼰대가 되어 있었다.

친구 김성원의 평에 따르면, 근육에 미친 무식한 놈이라고 한다. 단순히 친구로서 내리는 악평이 아니라, 근육으로 가는 영양이 중요하다며 삼시세끼 단백질만 먹다가 쓰러지거나 소개팅 자리에서 케틀벨로 저글링을 하다가 여성에게 차단당하는 등 평소에 기행을 많이 벌였다고 한다.[16] 작중에서도 에센 타이시의 동생 마오나하이를 죽이고 그의 한혈마집어던져서 길들인 후 이름을 흑우[17]로 짓는다던가, 포로로 잡은 여진족들을 개처럼 부리며 나는 관대하다를 외치거나 뜬금없이 흑룡세를 취하는 등 이런 기행적인 면모를 종종 드러내고, 말년에 저술한 영직서에서는 아예 내용을 어렵게 꼰답시고 당시에는 통하지도 않을 아재개그를 잔뜩 써놓는다.[18] 게다가 근육 지상주의도 심했다고 한다. 바뀐 세계관 시점에서의 헬창 꼰대 입신체비사 최영직이 괜히 나온 성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던 인물이 말년에 사망하고 돌아왔을 때는 상당히 온화한 성품이 되었으니, 어찌 보면 그 또한 바뀐 세계의 수혜자인 셈이다.

2.2. 세종 이도

누구나 아는 그 세종대왕으로, 고기 좋아하고[19] 운동을 싫어해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다. 고도비만[20]과 아세트산 냄새가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의 중증 당뇨(혹은 이전 단계인 내당능 장애)와 그로 인한 시력 저하를 앓고 있어 일급 트레이너의 식견에 기반한 수양대군의 판단으로는 당장 입원부터 시작해야 할 수준이었다. 세종이 고기 좋아하고 운동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라 주변 사람들은 심지어 '전하께서 운동하시려면 부처님의 힘이라도 빌어야 할 듯'이라며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는데, 수양대군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근거를 수집하고 몸을 만들었다.[21] 다행히 증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수양대군이 입신체비를 성공적으로 완성하였고, 세종은 처음에는 투덜거리며 입신체비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했지만[22] 시력과 체력이 돌아오는 등 당뇨가 회복되는 증상을 느끼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입신체비에 빠져든다.[23] 아버지 태종이 생전에 했던 충고의 뜻을 깨달아 사냥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현대인의 지식을 가진 수양대군도 한글 창제에 협력하여[24] 보다 빠르게, 발달된 훈민정음을 반포하기도 한다.

세월이 지나 트레이닝으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노쇠해지자, 1450년 세자 이향에게 양위한 후[25] 자신은 상왕으로서 두 번째 숙원인 경국대전 집필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양녕대군의 서산군 첩 강간미수 사건 때 순전히 피해자인 첩 또한 (솜방망이 처벌이었으나) 처벌받는 것을 보고 제대로 된 법률 제정 및 반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으로, 본래 역사에서 세조 때 편찬작업이 시작된 경국대전 집필이 이 소설에서는 세종대왕의 업적이 된다. 아버지 태종이 그러했듯이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고 군권만큼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으며 경국대전 집필 와중에도 아직 경험이 미숙한 문종과 수양, 두 아들에게 이따금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는 등 그 방대한 식견과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태조 이성계, 공정왕 이방과,[26] 태종 이방원, 세종 본인은 물론 아들 문종까지도 모두 왕세자에게 양위를 하면서 이후 국왕이 나이가 들면 세자에게 양위하는 것이 조선 왕조의 전통이 된다. 1462년 경국대전을 마친 이후에도 각종 서적 및 라틴어 사전 집필, 갑골문 연구 등 다양한 연구를 이어가다가 1470년 세자(세조 이홍위의 아들)의 경서를 집필하던 중 향년 만 73세로 숨을 거둔다. 최영직은 프롤로그에서 "세종대왕도 운동만 했으면 60은 살았어"라고 말한 적 있는데, 60을 넘어 73세까지 21년을 더 살아 할아버지 태조대왕보다 오래 산 셈이고, 심지어 21세기에도 완치가 불가능한 당뇨라는 중병을 이겨내고 이뤄낸 일이다.[27]

윤씨 부인은 "부인", 문종대왕은 "형님" 등 조선에서 맺게 된 새로운 관계에 적응한 수양도 세종만은 그 포스에 압도되었는지 마음속으로 "세종대왕님"이라고 부른다.

2.3. 문종 이향

세종의 장남. 비누를 보자마자 몸을 닦는 것보다 화포의 탄매를 벗길 생각을 먼저[28] 하는 진성 밀덕으로, 그 경지는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실 종친은 물론, 문종 본인마저 사후 묘호가 무종이 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29] 수양대군이 쇠질을 위해 만들어낸 속이 빈 대역기봉을 보고 이를 기반으로 사람이 견착해서 쏠 수 있는 작중 세계관 최초의 총이자 초기 단계의 머스킷인 보총을 개발해서 조선군을 화력에 미친 강군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작 초기에는 빙의 후 수양대군이 보인 수상한 행동[30] 때문에 수양대군을 추궁하는 모습도 보였으나, 수양대군이 자신의 행적과 그 목적을 솔직하게 밝히고 미완성 헬스 트레이닝 저서까지 보여 주자 오해를 푼다.[31] 이향 본인도 아버지 세종의 고도비만과 초기 당뇨 증세의 심각함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세종의 건강회복을 위해 수양대군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류 트레이너의 지식을 지녔지만 유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수양대군이 작성한 미완성 입신체비서에 자신의 유학 및 음양오행 지식을 접목, 완벽한 유교 경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게 들켜[32] 졸지에 입신체비를 같이 하게 되었고 수양대군도 마침 문종의 건강문제를 신경 쓰고 있었기에 열과 성을 다해 문종 입장에선 숫제 고문에 가까운 트레이닝 지도를 해 준다.

그리하여 동생이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며 처절한 골육상쟁으로 끝맺었던 본래 역사와 달리, 작중에서는 동생은 형의 무병장수를 위해 헬스장식 기적의 연산법[33]으로 조지고, 형은 동생에게 일폭탄을 던져줘[34]고려사 편찬, 이스탄불 순방 등등...] 일로 조지는 눈물겨운 형제애를 과시하게 된다. 처음에는 수양대군이 열과 성을 다해 온 몸을 조져준 탓에 아버지 세종과 마찬가지로 입신체비를 꺼렸으나, 조선에 귀부한 여진족들이 입신체비로 단련된 수양대군과 본인의 몸을 보고 진심으로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힘을 숭상하는 여진족을 복속시키려면 왕인 자신이 입신체비로 힘을 길러야 원활해진다는 것을 깨닫고는 스스로 입신체비에 매진한다. 그래서 동생보다는 못해도 3대운동 900근을 넘는 경지에 도달하고, 혼자 당하기 억울했는지 동생 안평대군을 입신체비의 늪에 끌어들이면서 대한제국까지 이어진 왕가의 입신체비 단련 전통과 근육조선식 물귀신 문화의 첫걸음을 밟게 된다.

작중 수양은 애초에 왕 될 생각 따위는 없었기에 오히려 형을 확실히 보필하며 형에게 명분을 실어 주었고, 수양대군의 트레이닝과 위생 관리로 몸이 건강해졌으며, 세종이 문종의 건강을 크게 신경써 삼년상 동안 건강을 해치지도 않았다.[35] 애초에 세종대왕도 건강해져서 소헌왕후와 연달아 사망해 삼년상을 2번이나 치를 일도 없었다. 결국 오래 살아남아 강력한 권위를 자랑하며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어 간다.
그렇게 치적들을 쌓아가며 왕위를 지킨 끝에 세자 이홍위가 장성하자 1468년에 양위를 하고[36] 상왕이 된다. 일흔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대 오백 근이 가능할 정도로 정정해 수양대군이 뇌종양(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쓰러지자 직접 병문안을 올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문종은 화포 덕후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인물인데,[37] 이 때문에 문종 치세에는 조선이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벗어나 해상 진출 등 대외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원 역사에서는 기막힌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38] 세자빈을 두 번이나 폐출하고 세 번째 세자빈에게서 이홍위를 얻었는데,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도 처음에는 순빈 봉씨가 나왔다가 1부 12화에서 양원 권씨가 나온다. 세자빈 폐출은 그대로 재현된 듯. 원 역사에서는 이홍위 위로 2명의 이복형들이 있었는데, 연재판에서는 작중에서는 이들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냥 12화에서 첫 회임한 아기가 이홍위로 나왔다가 서적판에 첫째에 이어 둘째 아들이 태어난 직후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추가되고 공증위생에 더욱 신경을 쓴 덕분에 무사히 태어났다는 식으로 되었다.

2.4. 소헌왕후 심씨

세종의 부인이자 수양대군의 어머니. 생일잔치 때 삼대 운동 1천 근에 도전하는 수양대군을 보고 경악하는 것으로 첫 등장했다. 문종과 수양대군이 짜고 벌인 일이라는 걸 알고 문종에게 크게 분노했지만[39] 문종에게 수양대군이 세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화를 풀고, 더불어 너도 요즘 몸이 쇠약해지고 있으니 세종이 끝나면 너도 수양대군에게 배우라고 말해서 문종은 졸지에 입신체비를 같이 하게 된다(...)
원 역사에선 세종보다 4년 일찍 이질로 세상을 떠났지만, 근육조선 세계관에선 석감과 주정 때문에 위생이 압도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인지 73세로 죽은 세종보다 딱 현대의 남녀 평균수명의 차이만큼 오래 살아 80 가까이 장수했다.
설탕을 좋아해서[40]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소헌왕후에게 줄 선물로 제일 먼저 산 게 사탕이었고, 나이가 든 후에는 고구마 말린 것에 설탕 뿌려먹는 걸 좋아하는 듯. 조선이 대양도를 얻어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해졌고 신농도(폴리네시아)에서 고구마도 들여왔으니 원 역사보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살았을 듯하다.

2.5. 안평대군 이용

세종의 3남. 원역사대로 예술에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문종도 정정하고 계유정난이 없는 세계관이다 보니 수양대군에게 패해 사약으로 죽은 원 역사와는 달리 진작에 권력 따윈 포기하고 예술 쪽으로 진로를 잡아 대성하는데, 특히 그림의 경우 일본과 명나라는 물론 멀리 서양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할 경지에 이른 수준. 문종의 물귀신 작전에 넘어가 입신체비에 입문했는데, 진또배기 헬창인 수양대군의 우락부락한 근육괴물 바디와 달리 깔끔하게 마른 근육의 소유자가 되었다.

형 수양이 권력에 대한 욕심을 접고 입신체비로 유명세를 타자 본인도 완전히 예술에 전념한 인생을 보냈으나 역으로 그 예술적 재능이 조선의 국제외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일본에 통신사로 건너가 정이대장군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 예술적 스승이 되어 사실상 합법적인 첩자가 되어 당시 일본의 정세를 낱낱이 파악해 조선에 전달했다.[41]

또한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문화적 영향을 심심치 않게 주었다. 명에서 과거 수양의 일화가 알음알음 전해져[42] 만들어진 근육질 불상과 탱화를 보고 아름답지 못하다며[43] 분개해 절벽에 형을 모델로 한 육체미를 과시하는 벽화를 그리거나 로마에 방문했을 때 완벽한 육체미라고 숭상받으며 르네상스 로마의 예술품들과 형의 역사적 평가를 근육덩어리로 바꿔놓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44] 이 때 귀국하면서 로마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대거 등용해서 조선의 문화가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여러모로 대외적/기술적 방향으로 치우친 두 형이 이끄는 조선의 인문학적 균형추를 잡아주는 역할. 그가 남긴 대표적인 유물로는 '수양팔근도'[45]가 있다.

2부 시점에서는 안평대군의 후손 회령군이 등장하여 유성룡을 가르친다. 청계천을 치수하는 등 건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영회의 창안자로 알려지게 된 인물.[46]

2.6. 임영대군 이구

세종의 4남. 석전을 옹호하다가 수양한테 걸려 역기를 들게 되는 약간 철없는 성격으로 묘사된다. 그래도 수양대군이 살짝만 등을 밀어주자 화약을 코닝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등 기본적인 머리는 있는 듯. 이 밖에도 입신체비를 하기 전엔 이미 마상재에 능통했을 정도로 기마술과 활쏘기 실력도 대단했었다.

훗날 수양의 천축/유럽행 사절단 당시 효령대군을 보좌하는 역할로 함께 따라왔는데 40을 넘기고도 백호를 보고 놀라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다거나 눈표범 잡겠다고 히말라야 산맥을 철없이 뛰어다니다 두 번이나 쓰러지고도 형 수양에게 그렇게 잡은 눈표범 가죽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다 고생고생한 효령이나 수양에게 핀잔을 받는 등 여전히 철들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2.7. 금성대군 이유

세종의 6남. 원 역사에서 세종의 막내인 영응대군이 안 나오는 본작에서는 사실상 세종의 적자 막내. 문종이 보총을 개발하던 중 보총으로 쏠 연환을 개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기존의 철 재질 대신 납으로 이루어진 탄을 새로이 도입했으며 보총 정식 도입 당시에는 미니에 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며 보총의 사거리와 정확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한다. 명나라를 또 찾아가기가 눈치 보이던 수양을 대신해 사신을 맡기도 한다.

2.8. 세조 이홍위

세종의 손자이자 원 역사의 단종. 문종이 건강해진 영향으로 본래 역사보다 일찍 태어났으며, 앞서 문종의 두 아이가 일찍 죽자 수양대군이 개발한 소독제 덕분에 무사히 태어났다.[47] 삼촌인 수양대군이 왕위에 욕심을 내지 않아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수양대군과는 사이 좋은 조카 삼촌 관계를 유지한다. 수양대군이 개발한 배드민턴과 테니스에 심취해서, 어쩌다 공을 맞더라도 신료들이 그러려니 할 정도다. 대신 수양대군이 직접 입신체비를 케어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삼대운동은 종친 중에서 낮은 750근(=450kg) 정도.

활동적인 삶을 산 덕인지 83세까지 장수하는데, 이는 2부에서 평종이 85세로 사망하기 전까진 조선 왕조에서 가장 장수한 기록이다. 아내는 원 역사의 정순왕후 송씨가 아닌 정인지의 딸이다. 자녀는 딸 셋 밑에 25세에 본 세자가 있다. 그 외 가족관계로는 오리지널 인물인 동생 정산대군(鄭山-)과 서자 동생인 노산군이 있다.

1460년부터 북방 문제에 한해 대리청정을 맡다가, 1468년에 정상적으로 양위받아 왕이 된다. 개국 이후 오랫동안 이어진 확장 러쉬에서 한 타임 쉬어가는 수성형 군주 역할이다.[48] 원래부터 조선조 정통성 끝판왕이었던 데다[49] 원 역사와 다르게 종친들이 뒷받침해주고 있어 왕권이 굉장히 강력하다. 게다가 수양대군이 죽기 전에 과제로 남겨 준 종계변무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며 본래 수양대군의 것이었던 세조라는 묘호를 받는다.

끝판왕급 정통성과 할아버지부터 내려온 노하우 덕분에 능력 있는 신하의 약점을 잡고 평생 갈아넣는 스킬을 제대로 사용하며, 의도한건 아니겠다만 조선왕조부터 대한제국을 지나 현대까지 대대로 이어내려져 오는 잔혹한 고위공직자 혹사의 전통을 써내리게 된다. 이 전통은 왕가가 스스로 내려온 공화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공화국에서 3대 500kg이 안 되는 인간은 뽑지 말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가 된다.[50]

2부 주인공이 조선 생활을 하면서 들은 바에 따르면 아버지 문종에게서 실용주의적인 성격이 이어졌다.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조선시대에는 왕의 부덕함이 그 원인이 됐다고 보고 제사를 드리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를 사문화시킨 사람으로 언급된다. 사림의 시조격인 산림들이 어느날 태풍이 닥쳤을 때 이 논리를 들어 왕이 자중할 것을 요구하자 이홍위는 역으로 산림들에게 태풍은 필리핀에서 시작돼 조선으로 올라옴을 지적하며 그러면 이 태풍은 왕이 부덕해서 일어나는 건지 필리핀 호족들이 부덕해서 일어나는 건지를 물어 역관광시킨다.[51] 산림들이 전자로 답하면 왕의 부덕함이 다른 나라에까지 피해를 줬다는 과장이 되고 후자로 답하면 필리핀 호족들이 조선에 피해를 준게 된다. 산림들은 눈치를 보다 필리핀 호족이 부덕해서라고 말했고 이홍위는 산림들에게 도대체 어느 호족이 부덕해 이 사단이 난 건지 찾아보라는 명을 내려 산림들을 필리핀에 사실상 유배보낸다. 필리핀 개척 초기였던데다가 산림들의 실무 능력이 부족한 탓에 갖은 고생을 했고, 이후 산림은 실질적으로 고사된다.[52]

2.9. 양녕대군 이제

세종대왕이 고기라면 양녕은 술이라고 할 정도의 주당. 할아버지 태조대왕의 핏줄을 이어서 그런지 나이에 맞지 않게 상당히 건장한 중장년으로, 성격은 좋게 보면 호탕하고,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냥 생 망나니. 본래 역사에도 기록된 아들의 첩을 강간하려는 초유의 사태 때 호신술을 알음알음 익힌[53] 첩에게 역관광을 당해 윗턱의 앞니 두 개가 나가고 팔이 부러지는 참교육을 당해버린다.[54] 이후 조용히 은거하지만, 여자에게 피박살 났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는지 점점 주량이 늘어나다 극심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게 되었고 종극에는 이로 인한 치매증상까지 보이게 된다.

그간 언급은 되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다가 에센 타이시 사건 후 아들 서산군과 동생인 효령대군의 부탁으로 진찰을 위해 방문한 수양 일행 눈 앞에서 벽에 된장을 칠하고[55] 정신이 어린 시절로 퇴행해 효령대군을 어릴 때처럼 '호'라고 부르다 입신체비로 건장해진 수양을 보고 할아버지 태조대왕으로 착각해 엎드려 싹싹 빌다 혼절하는 장면은 참담할 정도. 결국 수양 일행 방문 후 3일 뒤 토혈로 저승길 떠나니 원 역사보다 일찍 사망했고 시호로 '강정'이 내려졌다. 죽은 과정이 워낙 처참해 왕실의 치부라 조정에서는 급격한 노환으로 앓다 죽은 것으로 소문을 퍼트렸고, 진상을 모르는 왕실 종친들에게 노환에 대한 우울함 내지는 체념이 퍼지자 입신체비로 건강을 찾은 효령대군의 주도로 종친들 사이에서 입신체비가 유행하게 된다.[56] 어느 의미로는 작중 유일하게 양녕대군이 일으킨 긍정적인 영향.

2.10. 서산군 이혜

양녕대군의 삼남. 비참하게 사망한 원역사와는[57] 달리 본작에서는 본래 인성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못난 아버지 밑에서 자라 비뚤어져 있던 것으로 나온다. 어차피 종친이라 입신양명은 불가능하고, 아버지가 개판인데 효를 배우고 실천해서 뭐하겠냐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자신을 교화시키겠다고 온 수양대군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함께 낚시를 즐기던 중 술을 마시고 바위 위에 서있다 발이 미끄러져 바다에 빠진 서산군을 수양대군이 몸소 구하는 것을 계기로 자신의 한량스러운 과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설득하는 수양대군의 어른스러움에 완전히 마음을 열고 갱생. 열성적으로 입신체비를 행하는 제자가 된다. 이후 일번제자 마일용 다음가는 기수의 제자로 활약, 왕손 출신이라는 특성을 살려 종친들을 위한 입신체비 강습을 담당하게 된다. 첩과 관련된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58] 양녕대군과 사실상 의절하면서 남남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었지만, 가족으로서 일말의 정이 남아있었는지 아버지 양녕대군이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실의에 빠져 술로 지새우기도 했다.[59] 이후 무사히 추스리고 무난하게 왕실 입신체비사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게 된다.

2.11. 구성군 이준

임영대군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들 이홍위의 사촌. 한명회와 함께 항해하다 아프리카에서 마사이 족을 만나고, 이들의 아름다운 육체적 소양과 연로자를 공경하는 문화에 호감을 느꼈고 마찬가지로 육체적 소양이 우월한 조선인들에게 호감을 느낀 마사이족들과 성공적으로 친해져 청년들 중 일부를 조선으로 데려온다. 입신체비와 성리학, 역사학을 비롯한 조선식 교육을 받고 돌아온 마사이 청년들은 솔로몬 왕국이라는 조선과 우호적인 사이의 강대한 국가를 세우게 되고, 이는 훗날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세력에 대한 견제책이 된다.

여담으로 항해 도중 들른 모리셔스에서 도도를 잡아먹어 보곤 지독하게 맛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100여 마리를 데리고 귀국 후에 이홍위에게 진상해서 엿을 먹이려 하였지만 좋은 건 고생한 너희들이 먹어야 한다면서 돌려받아 역으로 엿을 먹게 되었다.[60] 어찌 보면 다행인게 이홍위가 진상품을 먹었다면 임금을 속인 강상죄를 받거나, 좋게 넘어가도 외국 물 먹다가 혓바닥에 무슨 병이라도 난 놈(...) 정도로 단단히 찍힐 판이었다.

2.12. 효령대군 이보

원래도 90세까지 장수한 인물이었지만, 여기에서는 입신체비로 육체를 단련한 영향으로 108세까지 산다.[61] 형 양녕대군 사후 다른 종친들이 우울해지자 직접 웃옷을 벗어던져 환갑인지 믿기 힘든 근육을 드러내 입신체비를 하자고 다독여 자연스레 왕실 종친회의 대표가 되어 종친들 사이에서 입신체비를 널리 퍼트리기도 한다.

원 역사대로 불교에 심취한 인물인데, 조선이 해외로 뻗어나갈 능력이 되자 티베트에서 불법을 배우고 오겠다고 떼를 쓴다. 문종은 이를 핑계로 명의 눈치를 피해 티베트와 인도를 넘어 해외로 진출할 계획을 세운다. 효령도 단순히 노인네 주책을 부린 게 아니라, 반쯤은 이걸 의도하긴 했다. 이는 왕조와 신하들 사이의 물귀신 기질[62]로 사태가 점점 커지더니, 결국 조선의 해외진출 기관 '탐검사'의 시초가 된다. 티베트에 가기 전 수양대군이 하체를 죽어라 단련시켰는데, 처음에는 원망했지만 실제 티베트에 가 보고 나서는 덕분에 고산병과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을 면했다며 고마워한다. 이때 룩빠의 쫑카빠 겔와 겐뒨둡[63] 만나 속가 제자가 되었으며, 라마승들을 조선으로 데려온다. 이때 나이가 환갑이어서, 티베트의 요가 수행자들은 환갑의 노인이 히말라야 산맥을 통과한 것을 보고 경악한다.

또한 수양이 내수린을 처음 선보이는 자리에도 있었는데, '궁예 VS 왕건, 신숭겸'에 신미대사가 어쩌다 엮여버린 것을[64] 보고 애꿎은 불자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수양을 책망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다른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은데 괜히 불자들 끌어들이지 말고 다른 것도 만들어 봐라"라고 한 걸 보면, 불교 문제가 걸려서 그렇지 내수린 자체는 재밌었던 듯하다. 이 말을 했을 때 독자들의 평가는 '역시 세종대왕님 형 아니랄까 봐 일 시키는 데 일가견이 있다'.

수양대군과의 사이는 매우 양호하다. 입신체비라는 훌륭한 학문을 만들어내 왕실의 무병장수에 기여하는데다 본인과 같은 불교도인 수양대군을 매우 아끼지만,[65] 본인 딴에는 수양대군을 위해서 하는 일들이 의도치 않게 빅엿을 먹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자기 항렬의 종친들 사이에 입신체비를 퍼뜨린 장본인인데, 수양대군은 자기보다 항렬 높은 어르신인 종친들 상대로 제자들처럼 빡세게 갈구면서 가르칠 수 없어서 상당히 곤란해했다.(물론 항렬 낮은 종제들은 얄짤없이 굴렸지만) 티베트 불법 사건 때도 수양대군은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까지 다녀오게 된다.

2.13. 삼한국대부인 윤씨

원 역사에서 정희왕후가 되었던 인물로 수양대군의 아내.

건강을 핑계로 돈을 펑펑 써대며 헬창이 되어가는 남편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해하지만, 조금씩 입신체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66] 후에는 남편에게 요가를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배드민턴 같은 운동에 맛을 들이더니 가면 갈수록 물이 들어 나중에는 삼대 500근을 치며 복근에 王자를 새기는 근육녀가 되어버린다. 근녕군의 아내 태안군부인 허씨가 보고 경악하기도 한다. 입신체비의 육체적 소양은 당대 여인은 물론 현대에도 손꼽히는 경지에 달했으나 유교적 소양은 사서삼경을 겨우 떼는 것에 그쳐, 당시 여인치고는 학문에 뛰어난 며느리 한씨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결국 의녀 40인에게 입신체비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여인들을 위한 입신체비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2.14. 도원군 이장

수양대군의 아들로, 실제 역사에서는 의경세자로 추존되는 인물. 아명이 현동이라 주인공은 현동이라고 부른다. 역모 의혹을 해결하고 긴장이 풀리니 번식욕에 홀려버린 수양대군이 그만 입신체비장에서 윤씨를 덮쳐[67] 본래 역사보다 1년 빠르게 출생하였다.

역사를 알고 있던 수양대군이 출산 전부터 알코올 소독법을 개발하거나 어릴 적부터 유청을 먹이는 등 극진히 보살펴 병약한 몸으로 일찍 죽었던 실제 역사와 다르게 건강히 살아남았으며, 나이가 들며 아버지를 따라 행한 입신체비 덕분에 180cm의 건장한 사내로 성장한다.
수양대군의 가르침과 스스로의 열정으로 역사학의 시초인 금석학의 전문가가 되어 북한산 순수비, 광개토대왕릉비와 본래 역사에서 소실된 유적들을 비롯한 고구려의 역사를 발굴하고 삼한의 위치와 계통에 대해 파악하는 업적을 남긴다. 또한 그의 후손은 대대로 종친의 직위를 인정받으며 왕실의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68] 현대에도 입신체비의 종주 가문으로 남는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적장자인 도원군이 역사학의 시초를 끊었다는 이유로 역사학과 교수는 3대 1000kg, 아무리 못해도 3대 800kg 이상 드는 것이 기본 소양이 된다.[69](...)

실제 역사의 의숙공주인 둘째는 '이주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위가 정현조인 것은 같다. 입신체비에는 열성을 다하지 않는 것 같지만 건빵을 발명하는 등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며,[70] 고구마 등 새로운 작물을 활용할 방법을 적극 찾아낸다. 실제 역사의 예종인 셋째는 이름만 살짝 나오는데, 해양군은 2부에서 수양대군의 손자가 받았다고 한다.

2.15. 군부인 한씨

실 역사에서 훗날 소혜왕후가 되는 인물. 마찬가지로 도원군 이장과 혼인한다. 친명파였던 한확이 별로 잡을만한 동아줄이 아닌 세계지만 도원군 본인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듯.
집 안에서 자수를 놓거나 공부를 하고 있던 전형적인 아가씨라 체력은 딸리지만[71] 성품은 좋아서, 시어머니가 될 삼한국대부인이 며느리의 성격을 테스트한다고 생전 처음 하는 배드민턴을 함께하며 스매시로 수십 번을 꽂아대는 신체적, 정신적 굴욕을 줘도 크게 내색하지 않는다. 수양대군이 그녀를 며느리 삼은 이유는[72] 역사에서 엄격한 성품이 검증된 인물이기도 하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유학에 통달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아내 삼한국대부인과 힘을 합쳐 여성을 위한 입신체비를 완성하게 하기 위한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73] 이후 근육이 잘 붙지 않거나 몸에 맞는 식재를 찾는 등, 여러 고생 끝에 본인의 체질에 맞는 입신체비를 성공하며 잔근육이 아름다운 육체를 가지게 되었고 시어머니와 함께 의녀 40명을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 여인을 위한 입신체비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물론 도원군의 금석학을 돕는 등 빼어난 지식을 아낌없이 활용한다.

사후 세월이 흘러 2부에서 유성룡이 한씨의 일기를 읽게 되는데 영직서를 읽고 생긴 수양대군의 진실에 대한 의혹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아버렸다. 말년의 수양대군이 지나치게 발전한 사상과 기술도입으로 인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엉터리 저서를 남기고 생전의 일기를 불태웠지만 가족들이 따로 남긴 기록은 어쩔 도리가 없었고 결국 군부인 한씨의 일기가 증거가 되어 버렸다.[74]

자식 중에서 월산군은 잠깐 스쳐 지나가듯 언급된다. 잘산군은 언급이 없다.

2.16. 태종의 서자들

이방원의 서자들로 수양대군의 숙부들이다. 가장 몸이 좋은 큰형님이 공식적으로는 노환으로 죽게 되자 단체로 우울해 하던 중, 효령대군의 설득으로 수양대군을 찾아 입신체비를 시작하게 된다. 작가는 가장 건장했던 큰 형이 가족력으로 의심되는 성인병으로 죽자 건강 걱정에 조카가 운영하는 헬스클럽에 몰려 간 것이라고 비유하였다. 작중에는 모든 태종의 서자들이 수양대군에게 몰려갔다고 하지만 작중에 이름이 등장하는 서자들은 다음과 같은데, 세종대왕의 이복형제들인 만큼 하나같이 세종대왕과 비유된다. 작중 시점에서야 하릴없이 소일하는 뒷방 노인들이지만 전성기에는 태종 이방원의 지시로 일을 하나씩 맡아 하던 나름의 능력자들.

3. 신하

3.1. 이숙치 ☆

수양대군 빙의 시점에서 대사헌을 맡고 있던 인물. 원작 1부에서는 대사헌으로서 진양대군 탄핵건을 주도했다는 암시만 있고, 사헌부의 탄핵을 들은 세자가 진양대군의 집을 방문했기에 직접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퇴장 또한 진양대군이 3대 1천근을 달성한 이후 지방관으로 강등되었다는 서술로만 처리되었다. 웹툰에서는 사헌부의 수장으로 직접 등장해서 스토리 초반의 진양대군을 압박하는 위기 파트를 맡은 반동인물로 새롭게 각색하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로 마일용의 입신체비를 지도하던 진양대군의 자택을 사헌부의 인원을 이끌고 대문을 박차며 난입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진양대군의 입신체비장에 있는 수많은 철물을 지적하고 진양대군에게서 곡식과 계란을 받은 양민을 증인[75]으로 끌고와 혹여 변란을 생각하는 것이냐며 추궁한다. 물론 빙의 전이면 모를까 최영직이 빙의한 시점의 진양대군은 당연히 헛소리라며 일축하지만 이숙치는 아랑곳 않고 순순히 실토할 때까지 집안의 모든 인물을 심문하겠다며 싸늘한 태도로 진양대군을 압박한다. 이에 이숙치를 따라온 세자가 보다못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이숙치를 제지하지만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도리어 차라리 자신의 목을 치라고 말하며 역으로 세자에게 왕족으로서 귀감을 보이라고 말하는 등, 매우 강경한 의지를 보인다.

결국 진양대군이 본인이 창시한 입신체비라는 양생법을 밝히며 사헌부의 인원 중 하나[76]의압으로 힘을 겨루는 대결을 제시하여 본인의 결백을 걸었고, 이 대결에서 진양대군이 승리하며 본인의 행적의 결백과 양생법의 가능성을 입증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속으로는 사냥대회 당시의 진양대군을 떠올리면서 계속 지켜보겠다며 의심을 거두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그 과정에서 지나칠 정도로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 독자들의 의문을 샀다. 사헌부가 풍문거핵(소문만으로도 탄핵 가능)과 불문언근(주장에 근거 제시를 할 필요가 없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진양대군도 누가 봐도 의심할 만한 행동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종친도 아니고 대군씩이나 되는 왕족의 집에 칼 차고 쳐들어오거나, 문을 발로 박차고 들어와서 부부인(대군의 부인)을 밀치려 하는 건 아무리 사헌부라 하더라도 보통 각오로 할 수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후 과거 회상으로 이숙치가 사냥에서 진양대군의 잔혹한 본성을 목격하면서 진양대군을 경계하게 되었다며 무리수를 두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하였다.

이후 열린 강무에서 본인이 여차하면 수양대군을 직접 제거하려고까지 작정하지만, 세종이 건강해진 것과 진정 수양대군이 이전 사냥대회와는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진해서 지방관으로 내려가며 작중에서 하차한다.

3.2. 황희

조선 초의 클리셰대로 사직을 윤허받지 못하고 갈려나가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79세이며, 심한 척추측만증에 시달리는 상태라 수양대군도 치료할 수 없다고 판단해 간단한 스트레칭을 가르치고 끝났다. 세종은 10년은 더 써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심 아쉽다고 생각한 게 무서울 따름.[77] 헌데 스트레칭이 효과가 있었는지, 원래 역사의 1452년 대신 1455년까지 산다. 그리고 이때 수양이 세종이 퇴위할 당시에도 결국 살기 위해 문종 앞에서 지금까지 행한 죄를 읍소하며 퇴직을 노리지만 문종 역시 황희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얼금고법을 철폐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당한다. 은퇴 후 세종이 진행하는 경국대전 편찬에 부정부패의 산증인으로서 참여한다.[78] 그렇게 거의 죽지 못해 살아가다가 93세가 되어서야 사망하게 되는데, 죽기 전 원 역사의 김종서 대신 한명회를 자기 후계자이자 다음 번 갈려나갈 희생양으로 점찍어놓고 웃으며 죽는다.[79] 근육조선의 현대인 대한공화국에서는 청백리라는 잘못된 이미지 대신 '부패했지만 능력 있는 신하'라는 정확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황희 묫자리에서 일하듯 한다라는 속담도 생긴다. 잘못한 게 있는 사람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는 뜻. 비슷한 의미로 한명희 배타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3.3. 마일용 ★

수양대군의 하인격 역할을 하는 인물. 서자 출신으로 출세길이 막혀 있어 좌절하고 수양대군의 밑에서 일하던 것을 그의 근골을 눈여겨본 수양대군이 설득하여 제자로 삼는다. 입신체비 초기엔 수양대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몰래 술을 퍼마시다 걸려서 호되게 트레이닝을 당하기도 했으나 마음을 다잡고 수양대군을 열렬히 따라 빼어난 육체적 성과를 일군다. 수양대군의 제자들 중 입신체비를 행하는 실력이 가장 뛰어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한다. 다만 서얼 출신의 한계상 학문적으로는 뛰어나지 못했고 입신체비 보급 초기엔 양반 자제들이 도통 말을 듣지 않아서 고생이었다고. 보통 훈련도감의 신병을 대상으로 한 체력훈련을 담당했으나 필리핀의 열산도(루방 섬)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부 말기에는 사대문 밖의 사설 입신체비장에서 체장을 맡는다.

수양대군에 따르면 체구가 마철석과 닮았다고 한다.

3.4. 한명회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은 탓에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지 못한 대신, 개성에서 출세를 위해 입신체비를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잔머리 굴리는 버릇 때문에 성의 없이 단련에 임해 성과가 잘 나지 않았고, 같이 단련하는 유생들 사이에서도 겉돌고 있었다.

이후 역사대로 수양의 눈에 띄긴 하지만 사학도 출신 현대인이 빙의한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곱게 보지 않고 있었고, 수양대군이 파놓은 함정에 걸린 뒤 큰 약점을 잡혀[80] 본래 역사와 조금 다르지만 수양대군에게 거둬진다. 이후 약은 꾀를 부리다가 혼이 났다고 크게 반성한 이후 사람이 달라져 그동안 잔꾀만 부리던 입신체비를 앞장서서 열심히 단련하는 것은 물론[81] 업무에도 성실히 임하는 어엿한 입신사대부가 된다. 하지만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버리는 탐욕스러운 본성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고, 이는 좋든 나쁘든 한명회의 남은 일생 동안 번번히 발목을 잡게 된다.

과거시험 때 문종이 낸 엉뚱한 시제[82]를 보고 잠시 혼란스러워 하던 차, 지인이 말해줬던 벽란도 이야기에 착안해 일본을 넘어 대식국을 비롯한 해외로의 진출을 장려해야 한다는 답안을 제출해 합격하고 관료가 된다. 그런데 이 답안지가 문종의 인재 레이더에 걸려버렸고, 서역 국가들의 교역을 목적으로 한 대외 원정이 결정되었으며, 이 때문에 일이 무진장 늘어난 수양대군과 관료들이 한명회 저놈은 반드시 끌고 간다면서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결국 조와국의 교역을 담당할 4함대를 이끈다.

애시당초 엿먹일려는 목적으로 투입된 만큼 조와국과 마지파힛 제국 주변을 무료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실질적인 임무의 전부였는데, 우연히 혼란스러운 조와국 주변 정세를 읽고 탐욕 기질이 도져 주변 나라에 화약을 비싸게 팔아치우다 해적에게 찍히고[83], 태풍에 휘말리기까지 해서 교역품은 모두 잃고 배도 3척 중 1척만 살아남으며, 교역 허가 서류와 원주민에게 얻은 종자 몇 개만 남긴 비참한 실적을 올린다. 그런데 갖고 온 종자 중 구황작물의 대표주자인 고구마가 있었고, 이 종자를 얻는 과정에서 항해술이 뛰어난 폴리네시아인과 온건한 교류를 시작했기 때문에[84] 결과적으로는 다른 함대에 뒤지지 않는 큰 공을 세운 셈이 되었다. 결국 이 공로 때문에 탐검사의 수장이 되어 바다를 통해 전세계를 탐험하는 신세가 되었다.

귀화한 폴리네시아인과 함께 태평양을 항해하는 것은 물론, 아프리카를 지나 유럽으로 향하는 항로 개척, 아메리카와 호주 발견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겨 청해군, 혹은 청해공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위대한 항해가이자 탐험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가 항해한 거리는 30여만km로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 당시 기록된 54,000여km의 6배에 달하고[85], 2부에서 항로의 험난함을 설명할 때 '그 청해군 한명회조차 고생한 항로'라는 표현이 가장 자주 쓰이며, 대한제국 시기 건조된 황실 전용 기함의 이름이 청해호가 될 정도다.

하지만 본인은 끝도 없는 항해에 지쳐 있었고, 어떻게든 사직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개성에서 탐욕 때문에 남의 무덤을 파헤치다가 왕건의 동상에 흠집을 만들어낸 과오[86]이홍위에게까지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약간의 특권과 휴가로 만족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탐검사 여정 도중에 남긴 여행일지도 초반에는 그럭저럭 정상적인 내용이지만 뒤로 갈수록 사직, 퇴청의 파자가 난무하는 등 징징거림이 강해지고, 한명회가 처음 도달한 희망봉의 세 곶은 '사직, 윤허, 희망'을 비튼 '사허, 윤직, 희망'으로 정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호인 압구갈매기와 친하다는 뜻인데, 이름 때문인지 바다와 자꾸 엮이자 스트레스를 받아 짱돌로 갈매기를 맞춰 죽이는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호주에서는 캥거루와 싸우다 얼굴에 할퀸 흉터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일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웃으면서 지켜본 황희처럼 자신의 후대로 점찍은 유자광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서글픈 여생을 보낸다. 그래도 맨 마지막에는 마오리족이 해적으로 돌변할까 봐 미주를 개척하라는 어명을 거슬렀다는 핑계를 찾아내[87] 사직에 기어코 성공한다. 뭐 70이 넘을 때였으니 홍위가 속는 셈 쳐줘도 상관없었을 테고, 열산도에서 후계를 양성하라는 명을 받긴 했지만.

후대에는 조선 전기 제일의 위인 중 하나로 남으며, 코가 꿰어 억지로 일한다는 뜻의 '한명회 배타듯 한다'라는 속담으로도 알려진다. 아들 한보는 미주 관찰사로서 홍역 사태를 수습하다 과로로 생을 마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다.

원 역사의 한명회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를 실행하여 한국 역사의 행정 제도에 큰 획을 그었는데 여기서의 한명회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일을 맡았으니 오가작통법과 면리제는 시행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2부에서 임란편 때 산성에 피신시키는 과정을 오가작통에 의거하여 설계한 것을 보면 비슷한 제도 자체는 그 사이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3.5. 홍윤성

본 역사에서 수양대군의 편에서 수많은 반대파를 도륙한 인간백정. 여기서는 다른 의미의 인간백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수양대군이 현대 군사 훈련법을 본떠서 만든 훈련도감의 1기 인원으로 편제되었으며, 제법 출세욕이 있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우수한 도감군으로 남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추운 북방에서 전쟁을 겪으며 구르는 것에 지쳐 출세고 뭐고 다 내려놓고 전역해서 따뜻한 남쪽 지역에서 한직이나 맡아 편하게 살고 싶어서 전역하려고 온갖 잔머리를 굴리게 되는데, 그게 도리어 '위기상황을 기발한 발상으로 격파하는 유능한 장졸'로 평가받아 본의 아니게 온갖 전선을 떠도는 백전노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야인여진 세력을 상대할 때는 도감병의 단련된 근육을 과시해 야인들의 전의를 꺾는 근육겁박지계를 선보이고,[88] 대만 원정 중에는 토인의 잠복전술을 간파하기 위해 온 몸에 쑥물을 발라 열대우림에 녹아드는 위장을 선보여 위장복 개념을 최초로 발명하게 되면서 단순히 무력이 출중한 장수를 넘어 전쟁사의 흐름을 바꾼 위인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가 참여한 전선만 만주, 대만, 일본, 중미[89]에 인도와 중동에도 다녀왔으니, 유럽을 제외한 세계 전체를 돌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렇듯 본래의 역사와 달리 명장으로서 조선의 위명을 드높였지만, 정작 홍윤성 본인은 원하지 않은 과도한 업무로 인해 기분과 상관 없이 어명만 들으면 웃음이 나오는 병에 걸려버렸다. 1부 내내 어명을 받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뻐하면서 웃어재끼는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웃음을 안겨 줬지만 완결 직전에는 8년 동안 큐슈에서 피를 너무 많이 본 후유증[90] 으로 인해 단순히 웃어넘기기 힘들 정도로 정신적으로 크게 괴로워한다.[91] 이전보다 심해진 그의 광증을 보며 기겁한 수양대군, 한명회, 신숙주, 권절 모두가 암묵적으로 몇 년간은 쉬게 해주자고 합의할 정도.[92] 후대에는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93] 조선 전기 최고의 무장으로 손꼽히며, 현대의학이 발달한 후에는 PTSD의 증상을 보였다며 이런 맹장조차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94] 덕분에 겁쟁이나 정신병을 앓는다는 근성론적인 사상은 없었을 듯...

자식을 잃고 죽을 때까지 후사를 보지 못했던 원 역사와는 달리 함흥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해 자식을 두고[95] 2부 시점에서 미주에서 근무하던 손자 홍지상이 나오는데, 국민 역적(?) 윤원형의 악행을 지원 또는 적어도 차단 실패한 혐의로 버로우를 타게 되었고 조상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만다.

3.6. 김시습

젊은 시절 두각을 나타낸 천재인데, 수양대군이 입신체비와 함께 도입한 현대식 교육법을 배운 사람들에 밀려 소과에 합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조건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앉아 달달 외우는 조선식 교육법을 배운 천재가 충분한 영양 섭취,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인 구획학습과 반복학습, 충분한 휴식을 통한 기억, 입신체비와 접목된 상벌 제도 등 현대식 교육법을 배운 범재만 못한 것. 이후 스승을 따라 배재당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입신체비를 배우고 관직에 오르는데, 친구 한명회가 뛰어난 항해사가 되었다면 김시습은 배재당에서 야인 아이들과 어울린 경험을 바탕으로 대 북방 정책의 전문가가 된다. 말년에는 북방을 오가며 시베리아 원주민과 몽골 및 여진인들의 풍습을 기록하였고, 덕분에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덕분에 조선은 시베리아 원주민 사이에서 인망을 얻을 수 있었고 이후 러시아 혁명 때 로마노프 황가가 동부 시베리아나마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결과적으로는 그의 공이 크다.[96] 말년에는 일흔 살에 백두산에 오른다고 청하고 실종되었다고 한다. 근육조선 특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 관료 혹사에 지쳐 도망친 것으로 추정되었고, 작가의 언급으로 도망친 것이 맞다고 확정되었다.

2부 초반에 사설 역참제도가 등장하는데 스승으로 모시던 김시습이 실종된 것을 안타깝께 여긴 북인(여진족)들이 소식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역참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해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를 윤허하여 일반인도 돈만 내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사설 역참이 설립되었다. 2부 후반에 유성룡이 주도하여 집필된 소설 복수자전에서 예맥 대장에게 주몽이 쓰던 활을 건네준 신선의 모티브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한편 김시습의 손자 김종인이 애민 정신이 워낙 뛰어나 외방을 기꺼이 자처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야인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어려워 화를 모아 불경과 연관지어 강연한다고 한다.

3.7. 우공

본 역사에서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장수로 자는 현규.

수양대군의 소문을 듣고 힘자랑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해버린다. 이후 어떻게든 재활을 하려고 하면 극심한 염증에 고통받고 그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악순환 끝에 급격하게 살이 불어버려 온몸이 망가져버린다. 보다못한 상관에게 파면당한 것을 서산군이 수양대군에게 천거하고 수양대군의 현대식 재활 훈련을 거친 끝에 재활에 성공한다. 이후 수양대군의 세 번째 제자가 되지만 오랜 방황 동안 몸이 너무나 망가져 다른 두 제자와 같은 경지의 입신체비는 불가능했고, 대신 자기와 같이 근골격에 부상을 입은 사람을 돌보는 재활의로 나서게 된다. 말년에는 조선으로 이주한 천축의 요가 수행자들의 지식을 접목해 재활학을 완성한, 조선에서 으뜸가는 명의가 된다.

3.8. 장영실

세종에게 가장 심하게 갈려나가던 공돌이.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수앙대군이 찾아오는데도 온갖 그림과 글이 그려진 한지 뭉치에 뒤덮인 책상 위에서 기절하다시피 곯아떨어져 있었다.[97][98] 이후 수양대군이 세종을 빡시게 운동시킬 거라는 말을 듣고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너무나 좋아하며[99] 운동기구를 만드는 데 전력으로 협력한다. 그 공적으로 1년간 휴가를 받지만 고향인 동래[100]에서 친구와 술자리를 가지던 중 우연히 상한 청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여기에서 세종이 내준 과제를 떠올려내 청어를 낚아내는 즉시 배 위에서 가공이 가능한[101] 크레인을 이용한 낚시배를 만들어내는 참된 공돌이. 이 일종의 트롤 어선은 정화의 대원정에 사용한 대선을 만든 명나라의 방길주가 보고 조선으로 이주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고, 더 나아가 조선이 해양으로 진출하는 초석이 된다.

3.9. 이징옥

따로 입신체비를 하지 않았는데도 50대에 웬만한 장정보다 체력이 뛰어난 무장. 입신체비를 몸소 체험해 보고 훌륭한 가르침이라 평하면서도 군사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게 여긴다. 수양대군도 헬스 트레이너였던 만큼 '근돼들 힘만 세지 싸움은 못하는 거 아니냐?'라는 떡밥을 익히 알고 있었고 군대에서도 그런 조롱을 들은 바 있는데, 이징옥이 조선시대에서도 이 떡밥을 꺼내자 감탄하고 인정하면서도 내심 화가 치밀어 어그로가 끌려버린다. 결국 수양대군은 현대식 훈련법을 적용한 군대인 훈련도감을 창설해 이징옥에게 배치하는 식으로 결말짓게 된다.

본의 아니게 어그로를 끈 것과는 별개로 충성스럽고 청렴결백의 표본과도 같은 장수로, 이 때문에 적당히 부패한 장수인 형 이징석과 관계가 껄끄럽다. 이만주 토벌 때 이징석은 포로나 말 등을 팔아넘겨서 적당히 이익을 보려 했으나, 이징옥은 모조리 원칙대로 처리하는 데다 전공도 더 많이 세우는 바람에 형이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러한 성정 덕에 조정에서도 신뢰가 깊어 북방개척을 맡기는 것은 물론 국제정세에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군사관련으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다만 워낙 융통성이 없어서 기만전술에 능통한 야인여진과 상성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게 흠이라면 흠. 하지만 이런 무장도 결국 사람인지 왕이 자신들과 같은 노신들을 퇴직 없이 평생 부려먹을 것을 알자 울적한 표정을 짓거나 사직을 윤허하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직할 때 따뜻한 대양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는데, 수양대군은 혹시라도 황희처럼 사직했는데도 부려먹힐까 봐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거라고 추측했다.

3.10. 신숙주

25세에 벌써 비만으로, 수양대군이 만든 사대부 입신체비 열풍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다가 수양대군이 직접 명나라로 끌고 가 데리고 다니면서 운동을 시키는 바람에 수양과 진성 헬창이 돼버린 집현전 일행 사이에서 끝없이 고통받다 결국 본인도 삼대 오백 근을 들어올리는 어엿한 입신사대부가 된다. 원래는 배신의 아이콘과 같은 인물로 기록되다 보니 수양대군도 은근하면서도 대놓고 굴렸으나, 통역 겸 외교관으로 오랜 기간 같이 다니다 보니 정이 들어서 친구 관계가 된다. 원 역사에서 일본을 갔다와야 할 타이밍에 명나라로 사행을 가는 바람에 해동제국기는 남지 않고, 대신 서역제국기를 집필한다.

3.11. 김종서

원 역사에서 슬슬 북방에서 복귀해야 할 시점에, 하필 훈민정음이 더 일찍 만들어지느라 세종이 신경을 못 써서 몇 개월을 더 구른다.
훈련도감 제도의 정착을 냉정하게 평가해준다. 북방의 경험을 바탕으로 철령에서 북원/오이라트와의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전후 처리 과정에서 수양이 내수린을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좌의정까지만 해봤고 계유정난으로 1453년 죽어야 할 김종서가 여기서는 영의정까지 찍고 1461년까지 산다. 고령을 이유로 사직을 윤허받은 뒤 3개월 뒤에 사망했는데 황희와 마찬가지로 일지옥에서 탈출했기 때문인지 죽기 직전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원 역사에서 수양대군 일파에게 살해당한 것과 대조적. 생전에 인도산 천축계로 만들고 후추로 간한 거대한 닭백숙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3.12. 하위지

본래 사육신의 일원. 세자였던 문종이 사가독서 중인 집현전 관료들에게 입신체비서를 한 권 쥐어주자, 그 중 유일하게 턱걸이와 줄넘기를 시작으로 직접 역기를 만들어 쓰는 등 입신체비에 빠져 수양대군의 눈에 든다.[102] 결국 수양대군 밑에서 입신체비사가 되며, 제자들 중 가장 학식이 뛰어나 입신체비의 학문적 기반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조카 하포 내외는 진주에 입신체비장을 차렸는데, 멋모르고 쳐들어온 진스케 무리에 맞서 남편이 역기를 던져 코를 깨고 아내가 자신을 인질로 삼으려던 진스케를 관절기로 제압해 홍두깨로 두들겨패고 그것까지 버텨내고 도망가려던 걸 진스케를 쫒아온 남편이 마무리 질식투(초크슬램)로 근육하면서 충신/열녀로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된다.

3.13. 이개

공조 출신으로 첫 등장. 다른 사육신 일행들과 마찬가지로 입신체비에 심취한 사대부가 되었다. 수양대군에게 명 사행 일행에 선택되었고, 명에서 견문을 쌓고 돌아온다. 그 이후 공조판서 정창손에게 파견 임무를 받고 한지인 개성에 있었다.

개성에서 도량형을 통일시키는 업무를 맡았는데, 당시 개성 지방은 고려를 무너트린 조선 왕실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왕실에서 파견 나온 이개는 개성의 상인과 유력가들에게 영 곱지 못한 시선을 받고 있었고 조랭이 떡국이나 성계육을 대접하며 음습하게 물을 먹이거나 심지어 선죽교를 지나가다 철퇴를 휘두르는 괴한에게 습격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엄청난 독종에 일 중독자였던 이개는 이 모든 압박을 무시하고 습격한 괴한을 바위를 집어던져 제압하는 등, 대수롭지 않게 흘러보내고 끈질기게 개성 사람들을 설득한 결과,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눈 하나 깜박 않는 이개에게 질려버린 개성사람들이 도량형 중 무게 단위 하나만큼은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때 어느 상인이 이개를 보고 자기 살도 씹어먹을 놈이라고 질색하는 것을 무덤덤하게 근손실이라고 말해 한 층 더 어이를 날려버리기도 했다.대체 근손실이 뭔데! 이 근육 덩어리야!

파견 이전에도 도로 확장과 교량의 중요성, 불황상태에서 정부가 국민에게 실시하는 공공근로에 대한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지만 당시 상관이 머리가 꽉 막혀있던 정창손이라 이것이 제대로 윗선에 보고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장계에서 철의 생산량이 이상함을 느끼고 고민에 빠진 문종의 귀에 이 의견이 들어오자 문종의 인재 레이더에 바로 포착되어 동기치고 늦은 정5품에서 오히려 빠른 종3품으로 쾌속 승진한다.

3.14. 성삼문사육신/생육신

수양대군이 고려사를 편찬하던 도중 잠시 개성에 올라갈 때, 시강관을 맡던 성삼문이 잠시 대타로 편찬 작업에 합류한다. 청렴결백한 성격 덕분에 초대 형무소 부소장으로 취임(소장은 형조판서가 겸임), 양반 죄수들 때문에 넘어온 뇌물들을 모조리 거절해 버리며 문종의 인물안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2부 시점에서는 성삼문의 후손 성양진이 강주(샌디에고) 목사를 역임한다.

이 밖에 수양대군은 빙의 얼마 안 되어서 사육신/생육신부터 등용하겠다고 다짐하는데, 실제로 13명이 다 등장하지는 않는다. 정리해 보면
계유정난이 없으므로 물론 이들이 사육신, 생육신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대신 2부에서 유성룡의 일본인 제자들이 이 별칭을 얻게 된다. 계유정난이 없어서 이들의 충성과 절의를 증명할 사건이 없으니 이들은 역사에 위대한 충신으로 남지는 못하고 그냥 그 시대에 일 잘하던 관리 정도로 기록될 것이다.

3.15. 홍일동

홍길동전의 모델인 실존인물 홍길동의 이복 형으로 호는 마천. 수양대군이 퍼트린 입신체비에 심취하여 동생과 함께 단련하고 있었으며, 동생이 서얼로 태어나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좋은 형이다. 하지만 인성과는 별개로 추진력이 강하고 주변에 무심한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어 동생과 주변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주고 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삼 대 칠백오십 근(480kg)이 가능한 건장한 육체의 소유자이자, 열 사람 분의 식사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대식가인 동시에, 절육을 위해 볶은 콩을 잔뜩 넣어 걸쭉한 미숫가루만 계속 먹어도 멀쩡한, 기이하고도 입신체비에 특화된 식습관과 체질을 지니고 있다.[104]

조정의 명으로 북방 개척을 위해 거양현으로 부임하게 되자 가문의 부흥과 동생의 면천을 위해 의욕을 불태우지만, 성격 때문에 대책없이 일을 추진하여 동생인 홍길동과 먼저 부임해있던 부관 홍윤성에게 끝없는 고통을 안겨준다.[105] 하지만 몸소 밭을 일구거나 동생으로 영압(밀리터리 프레스)을 구사해 육체를 과시하며[106] 힘을 숭상하는 야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았고, 동시에 평소 즐겨 섭취하던 미숫가루가 북방 유목민들의 전통 음식인 미스가라와 유사하다는 점이 공감대를 형성해 결과적으로 야인들의 민심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더 나아가 북방개척에 큰 공을 세웠다.

3.16. 전순의

원 역사에서 식료찬요의 저자이자 문종의 병을 고치지 못해 청지기로 좌천당한 경력의 어의로, 여기서는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수양대군이 골머리를 앓는다. 신숙주의 아내인 윤씨가 사경을 헤매다 수양대군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자 그를 못마땅히 보지만 여러 번 도움을 받고 죄수들을 통해 세견물을 시험해보는 것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다. 그렇게 수양대군과 함께 많은 내용이 추가된 식료찬요를 저술한다.

3.17. 정범수 ★

원래 홍산이라는 이름의 노비였으나 훈련도감 과정을 수료하고 세종에게 직접 면천받으며 정범수라는 이름을 얻는다.
훈련도감 1기 고참 병사로서 다양한 전공을 쌓다가, 대양도에 도감군의 실무자로 배치된다. 여타 대양도에 배치된 도감군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출신의 여인을 처로 삼고 살림을 차리면서 사실상 눌러살게 된다. 형무소에서 근무하면서 한문을 익힐 필요성을 실감하고 부관 남이의 도움을 받으며 노력하고 있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하다. 그러다 원주민들이 입신체비용 공령과 역기봉을 훔쳐가다가 정작 그 무게를 못 이겨 다쳐서 잡혀오는 사고가 일어난다. 조선이 사람의 목을 따오는 악습을 엄격히 금지하자 대신 입신체비용 도구를 드는 것으로 성인식 문화가 바뀌어 일어난 일이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훈련도감의 단련법을 가르쳐 성인식으로 대신하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이는 대만 원주민으로 구성된 부대인 임해도감을 창설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임해도감을 양성하고 지휘하는 일에 전념하는데, 대양도 원주민들이 도감군을 성인식의 수단 정도로 생각하여 지나치게 신병이 많이 모집되고 군기도 해이해지자 문종의 배려로 임해도감군을 대월과 참파의 전쟁에서 대월 측의 용병으로 투입해 첫 실전투입을 겪게 한다. 결국 첫 실전에서 살아남은 임해도감군들은 실전 경험을 뼈에 새기거나 전쟁의 민낯을 보고 전역해 얌전히 조선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등, 큰 탈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

3.18. 남이

대양도에 배치된 도감군 실무자 정범수의 부관으로 첫 등장한다. 대부분 서얼이나 평민, 죄인의 후손 같은 하류계층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훈련도감 장병들과 달리 빵빵한 집안의 사람인 게 특징인데 시간이 흘러 바뀐 훈련도감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젊지만 탁월한 무재와 상황 판단력을 보여서 임해도감을 이끌고 왜구들을 토벌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경인년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조언을 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고 이에 감탄한 상관들에게 적극적인 호평을 받고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시간이 지나자 오스만 제국의 항구를 직접 타격하는 원정을 몸소 지휘할 정도로 승진하게 된다.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구절이 조금 바뀐 북정가를 멋들어지게 읆는 것이 일품. 본래 역사를 생각하면 얄궂게 느낄 수도 있는 장면이다.

훈구세력의 견제로 누명이 씌워져 고문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본래 역사와 달리 계유정난도 없어서 훈구세력도 없는 데다 적극적으로 대외확장을 꾀하는 근육조선의 역사에서는 그 군사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아버지 남빈은 수양대군의 첫 명나라행 때 무관 수행원으로 처음 등장한다.

은퇴 후 말년을 보낸 섬이 남이섬이라 불리고 있으며 2부 에필로그 시점에서는 호주에서 들여온 녹타조[107]를 시범삼아 기르는 장소가 되었다. 원 역사에서는 청평댐 때문에 섬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아예 녹타조를 위해 섬으로 만들었다고.

2부에서는 가상인물인 후손 남상정이 무관으로 꽤 비중 있게 나온다.

3.19. 유자광

한명회, 구성군과 함께 아프리카 항해에 나섰던 인물. 그 이전에 서출을 면하기 위해 솔빈(현 우수리스크)으로 발령받았는데, 추운 북방으로 쫓겨났다고 생각해 막나가다 발령지에서 어떤 처녀를 임신시키는 바람에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출세길이 막혀 있었다.[108] 구성군 빽 정도로 출세하는 건 턱도 없고, 수양대군은 유자광의 존재에 대해서도 몰랐고, 근육조선의 과거는 원래보다도 난이도가 폭증했으니 결국 출세길이 완전히 막혀 있는 상태다. 결국 한명회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압구정이라는 주점에서 바지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후 수양대군의 조언에 따라 한명회의 후임자가 되어 전 세계를 구를 운명에 처해진다.

간신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원 역사와 달리 1부 에필로그나 2부에서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임사홍의 악행은 자주 언급되는 반면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만든 김종직을 탄핵했다며 2부 초반 시점에 언급된 것이 끝이다.[109] 다만 무령군(武靈君)이라는 봉호로 칭해진 걸로 봐선 한명회의 후임으로 일하면서 공을 세운 모양.[110]

3.20. 임사홍

수양대군이 추천한 한명회의 후계자 중 하나. 다만 후대에 간신으로 평가받고 있어서, 수양대군은 '삿된 욕심을 가지지 마라'고 충고한다. 실제로 아즈텍에서 황금을 보고 눈이 돌아가 원주민들을 착취하며 빼돌리다가 현지인들의 조선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켜 스페인이 중미를 장악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는 대형 트롤링을 저지르고 남은 평생을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후대에는 나치 독일의 금괴나 야마시타 골드처럼 '임사홍이 빼돌린 황금 일만 근 이상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도시전설이 내려져 오지만 김구가 평하길 "일만 근의 황금이 있었다면 사십 년 넘게 형무소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임원준은 김시습과 한명회가 급제한 그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것으로 잠시 나온다. 대명 정책을 선택한 사람 중에는 1위였는데, 각 분야 장원에서 문장 솜씨가 제일 좋고 또 집현전에서 일하던 중 응시했는지라 가산점을 받았다. 시국을 정확히 본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쉽게도 비중은 없다.

3.21. 김종직

수양대군의 제자 출신. 한때 제자였는데다가 수양대군이 북방 출장 시 만난 적도 있지만, 조선에 빙의한 지 너무 오래돼서인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정도로만 반응하고 지나간다. 왕이 입신체비장에 들어오면 사관도 입신체비를 해야 곁에 있을 수 있는데[111] 그걸 진짜로 해낸 독종이며, 무려 3대 900근을 자랑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입신체비장에서 비밀스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서 문종이 아쉬워한다. 이후 2부에서 간략히 언급되는데, 자기 멋대로 입신체비 규정을 만들고는 이를 지키지 않는 자를 은근히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썼다가 유자광에 의해 탄핵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실각 정도지 원 역사처럼 멸문급 화는 받지 않은 듯.허나 후대에서 이것에 대해서 두고두고 뒷담화 까이는 건 피할 수 없었다고.

3.22. 한확

수양대군의 사돈이자, 누이 둘을 명 황제에게 첩으로 바쳐 권세를 얻은 친명파의 거두. 원 역사에서는 세종대왕이 "이 사람은 내가 벌 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거물이었지만, 본작에서는 명의 세력이 훨씬 약해진 관계로 몸을 사리는 신세가 되었다. 수양대군의 아들과 한확의 여섯째 딸의 혼담이 오가던 중 원 역사보다 크게 일어난 토목의 변 때 명의 영향력이 쪼그라들자, 감히 혼담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112]였다. 이후로도 눈총을 받아 품계만 높지 실무는 거의 맡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남들이 신밀레당하며 과로로 죽어나갈 때 혼자 일을 하지 않아서[113] 비교적 정정한 편이다.

1부 후반부에 들어서서 세조 이홍위가 왕위에 오르자 그제서야 신하 물갈이의 일환으로 영의정 직에 오르며,[114] 명 황제 영덕제(성화제)의 증조부뻘 되는 것을 이용해 명이 일본 원정을 돕도록 하는 큰 성과를 거둔다.

4. 기타

4.1. 상원사의 스님 ★

토목의 변때 처음으로 겪은 진짜 전쟁과 살인의 후유증을 불공으로 달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절을 방문하던 수양대군이 동행하고 있던 효령대군과 잠시 관상을 가지고 농담따먹기를 하던 중, 돌연 관상을 잘 보는 스님을 안다는 효령대군의 말에 따라 본래 일정이였던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진로를 바꾸며 만나게 된 스님. 갑작스럽게 변경된 일정이지만 본래 역사에서도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말년에 찾아와 불상을 만들어 공양을 올린 곳이기도 해서 수양대군 본인도 흥미가 동해 흔쾌히 따라가게 된다. 동자승의 안내를 따라 효령대군 다음으로 들어간 수양대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를 두고 일컬어 왕이 될 상, 독선적인 성격, 그리고 조카와 벗을 해칠 관상[115]이라고 본래 역사에서의 수양대군에게 내려질 평가를 말하는 동시에 이 있어 모든것이 변했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다. 빙의자였던 수양대군이 이에 잠시 경악하다가 허를 찔러본다고 궁예 코스프레를 하고 문짝을 부수고 들어가보니 "손님은 있을 곳이 사라지면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116]이라는 알 수 없는 쪽지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기이한 것은 다음날 함께 갔던 효령대군에게 이야기를 꺼내니 정작 효령대군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수양대군 본인도 직접 이야기도 나누었던 스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여러모로 신비롭기 그지 없는 인물. 후일 2부에 등장하는 이지함이 이 스님의 속성을 일부 이어받는다. 수양대군에게 원래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봐야 한다고 말한 것을 봐서는 모티브는 문수보살로 보인다.[117]

4.2. 흑우

등장 축생. 에센 타이시의 동생인 마오나하이가 타고 다니던 갈색 한혈마. 조선군의 작전에 휘말려 이성을 잃은 마오나하이가 무모하게 돌격하다 수양대군의 사격으로 전사하자, 주인의 죽음에 격노하여 달려들지만 수양대군이 그대로 번쩍 들어 메친 후 목조르기로 제압당한다. 이를 지켜본 조선군이나 야인들은 물론 메쳐진 말 당사자도 기겁하는 게 포인트.

제압당한 이후에도 주인의 시신을 보고 슬피 울자 수양대군이 마오나하이를 정중히 납관하는 것까지 보고 나서[118][119] 비로소 수양대군에게 복종하게 되었는데, 원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운 것을 보고 흑우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줬다. 워낙 덩치가 큰 말이라 100kg가 넘는 수양대군의 우람한 체구도 문제없이 태우고 다닐 수 있었고, 수양대군에게 길들여진 일화를 보면 머리도 좋은, 여러모로 명마. 하지만 수양대군 외의 사람에게는 고삐를 쥐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성깔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들자, 한혈마의 고향이자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해 교류를 시작한 티무르 제국에 보내져 편히 여생을 보낸다.

4.3. 홍길동

홍일동의 동생으로, 서출에 천출이라 딱히 하는 일 없이 전라도의 가문에서 마름이나 서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입신체비가 널리 퍼지자 이에 심취한 형 홍일동과 함께 입신체비를 단련하던 중, 조정에서는 격오지 근무를 맡으면 서자를 인정해 주는 정책을 세운다.[120] 그리고 홍일동이 북간도 지방의 거향현 현령으로 발령받자 매우 직선적인 성격의 홍일동이 서자 출신 동생을 면천시키고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동생을 데리고 오면서 졸지에 북방으로 오게 된다. 그렇게 도착한 거양현은, 여진족은 비협조적이고 혹한의 추위에 시달리는 곳이었으나, 형 홍일동이 입선체비로 단련된 힘, 그리고 입신체비를 응용해 개척을 '노동'이 아니라 강해지는 '훈련'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여진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홍길동이 평소 형의 무심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익혀온 나름의 상재와 잔머리[121] 덕분에 황무지나 다름없던 거양현은 나름 사람 사는 곳이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을 살려 율도라고 이름지은 사할린도 개척한다. 하지만 원래 그는 부나 입신양명을 목표로 하던 인물이 아니었고, 실제로는 가문에서 하던 대로 마름 노릇이나 하면서 편하게 노후를 보내는 것이 목표인 소시민이었다.[122] 어쨌든 시간이 흘러 북방에서 쌓은 나름의 인맥으로 율도상회라는 상단의 주인이 된다. 율도상회는 계속 발전해, 2부 시점에서는 조선 최대의 상단 중 하나로 언급된다. 호부호형을 허락받았는지, 공적 자리에선 홍일동을 '나리'라 부르지만 편한 곳에서는 마음껏 형이라 부른다. 반쪽짜리지만 '나리'도 남의 눈치 때문에 그런 거지 사실상 그냥 허락이다. 실제 그냥 형님이라 부르다가 관아니까 현령나리라고 부르라고 하는 부분도 있다.
여담으로 상회의 주인으로 번듯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원 역사와 달리 홍길동전은 쓰여지지 않았다.

4.4. 최 생원 ★

배제당에서 수학하던 유생 중 한 명. 한명회, 김시습 등과 같이 대과에 응시할 당시 복시까지는 잘 했는데 그만 전시 때 뇌정지가 와서 "왜인은 통제해야 한다, 통제는 근육이다, 나는 근육을 통제했다, 그러니 왜인도 근육하면 충분하다." 라는 전설적인 뻘글을 써 병과 최하위로 급제하고 말았다. 이후 배제당의 다른 동문인 윤사철 등이 이 말을 인용하기 시작하면서 후대에는 아예 '근육하다'라는 말을 참교육과 같은 뜻으로 널리 정착시킨 시조가 되어버렸다. 다만 후대에는 이게 누가 한 말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참교육의 의미로써 사용되고 있으며, 2부의 왜란 시점에서는 지력상소를 위해 한양에 올라온 유생들만이 아니라 율곡 이이까지 이 말을 인용하고, 근현대 시대에 대한제국과 중국대륙내 3개 연합군과 싸운 무진천명대전 당시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한 중화연합군에 너를 근육하겠다. 라고 답변했으며 2차 세계대전 때는 히틀러에게 보낸 최후 통첩에 Ich muskuliere dich(너를 근육하겠다)라고 쓰여졌을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알아주는 표현이 된 듯하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훗날 뛰어난 입신체비 실력으로 과거 때 실수를 커버하고 정3품 목사까지 올라갔지만, 역시나 당시 답안을 평생 부끄러워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누구 발언인지 안 알려진 까닭에는 이런 본인의 은폐가 한 몫했지 싶다.

4.5. 변 서방 ★

경상도 영덕에 살던 농민으로서, 수양대군의 제자 출신인 박 생원이 높게 평가할 만큼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었지만[123] 형편상 학문이랑 입신체비를 배울 엄두도 못 내던 가난한 농민. 하지만 그의 소유인 땅에서 구리 맥이 발견되고 이 땅을 조정이 매입하면서 형편이 급격히 피게 되자 자식들의 신분 상승을 꾀하게 된다.

이후 2부에서 그의 아들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되는데, 큰아들은 말단 한직을 전전하며 살았지만 작은아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아버지 변 서방을 구하고자 맨몸으로 맞서 싸웠고 두 팔을 잃는 대가로 호랑이를 물리쳐 효자라 칭송받으며 명예직도 받고 제법 괜찮게 살았다고 한다.

4.6. 신미

최초의 내수린 공연 당시 당황했는지 염불을 외우는 모습으로 첫 등장. 이 모습을 본 수양이 신미를 보고 석총이라고 애드립을 날리자 센스있게 받아준다. 하지만 흥이 올라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치며 궁예 연기에 몰입한 수양에게 울컥했고 이 일이 기억에 남아 이후로 수양을 보면 다소 싫은 눈치를 보인다. 그래도 일본에 건너가서 승려 행세를 하던 소젠을 골탕먹이는 활약을 했으며,[124] 이 공로로 원 역사처럼 한글서적을 출판할 수 있게 된다. 석보상절은 작중에서 신미의 업적이 된다.

4.7. 윤씨 부인

신숙주의 부인.[125] 신숙주와의 사이에서 도합 8명의 자녀를 낳았고 입신체비와 주정소독의 도입으로 산후조리가 한결 편해졌음을 감안해도 사흘만에 몸조리를 끝내는 지극히 건강한 여인이었으나 어느샌가 알 수 없는 질환을 앓기 시작한다.

약은 고사하고 밥도 넘기지 못할 만큼 극심한 토사곽란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애초에 넘기지를 못하니 백약이 무용지물이라서 용하다는 의원이나 왕실 어의도 고개를 젓는 상황에 신숙주도 이에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하다못해 운동과 식이요법 이외엔 의학지식이 전무한 수양대군에게 매달릴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고 수양대군도 명나라를 함께 누빈 동료 사이인 신숙주의 간절한 청을 이기지 못해 아내와 며느리와 함께 윤씨 부인을 보러간다. 허해진 기운을 보하기 위해선 뭐든 먹어야 하기에 무엇보다도 토사곽란을 막아야 했지만 가망이 없을 뿐더러 여전히 원인을 알지 못하던 때에 왕실에서 보약을 내려보냈는데…

그 보약은 우유였고 이것이 토사곽란의 원인이었다. 윤씨 부인은 극심한 유당불내증 환자였던 것이다. 환자의 기운을 보하기 위한 보양식으로 먹인 타락죽을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모르고 계속 타락죽을 먹이니 계속해서 구토를 하게 되면서 악순환이 돼버린 것이였다. 모든 사실을 깨달은 수양대군이 서둘러 두유를 만들어 타락죽 대신 처방하자 오랜 구토로 인해 조금 헛구역질을 했으나 큰 탈 없이 기운을 차리고 완쾌하게 된다.

이 일로 수양대군은 기존의 입신체비를 위한 식이요법뿐만 아니라 유당불내증이나 알레르기를 비롯해 개인의 체질에 따른 보다 발전된 식이요법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고, 이후 전순의와 함께 죄수를 통한 다수의 실험으로 입증한 이론을 근거로 본인이 기억하고 있던 현대의 영양학 지식에 음양오행설을 절묘히 포장해 저술한 '식료찬요'를 써내게 된다.


[1] 수양대군의 비공식 기록은 3대 1350근인데, 이는 현대 기준으로 810kg에 해당한다. 즉, 20% 감량했다는 소리는 원래 재능은 1000kg까지 가능하다는 소리. 전설적인 보디빌더 로니 콜먼의 3대 중량이 전성기 시절 1070kg였다.[2] 연재 당시에는 관상에서 등장한 이정재의 훤칠한 외모를 생각하다가 이 발언이 나오자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 그나마 1부 표지나 웹툰에서 묘사되는 모습은 이정재까지는 아니어도 주인공답게 그럭저럭 훤칠한 편.[3] 군복무에 나름 자부심이 있는 것인지 이징옥이 군대에 대해 모른다는 발언을 하자 극대노해버리기도 하고, 군장이나 유격 훈련 등 자신의 군생활 경험을 조선군 개편에 열심히 녹여낸다.[4] 다만 원 역사처럼 자기 후대가 왕위를 이어받는 전개까지는 부정하지 않아서 초중반부에 잠깐 수양대원군 드립을 종종 치긴 했었다. 홍위의 권위가 확고해지며 완벽히 불가능한 전개가 되자 아무 불만 없는 걸로 봐서는 당연히 전혀 진심이 아니었던 듯 하지만.[5] 실제로 개인 단련을 위해 바벨과 아령을 만든다고 대장간에 들락날락거리고, 식이요법을 연구하기 위해 몰이꾼들 집을 드나든 것이 세력을 키우고 무기를 모으는 것으로 비쳐져 왕세자였던 형에게 추궁받기도 했다.[6] 이때 문종 역시 입신체비의 길로 끌어들인다. 소설판에서는 소헌왕후에 의해 반억지로, 웹툰판에선 영직 본인이 직접 끌어들인다. 이때의 사악(?)한 표정이 압권.(...)[7] 1부 외전에 따르면 768kg. 조선 초기라 1근이 600g이 아니라 641g으로 어느 정도 오차가 있었다. 앞서 말한 삼대운동 1000근은 진양대군 때 성공했다 하여 '진양근', 1200근은 수양대군 때 성공했다 하여 '수양근'이라 칭하는 입신체비의 경지를 부르는 말이 되어 작중 현대 국가인 대한 공화국까지 통용된다.[8] 공자, 맹자할 때 쓰이던 그 자가 맞다. 좀 오버스러운 것 아닌가 싶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송시열이 송자라는 별명을 얻었었다.[9] 잊어버리기 전에 각종 헬스 수치를 적어놨다거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다면 아무래도 모를 수가 없는 김종직을 잊어버렸다는 등의 설정이 있다. 그래서 자신이 기억하는 내용을 최대한 현대 한글로 적어서 보관했다. 2부 주인공인 유성룡도 같은 방식을 쓰지만 유성룡은 기억력이 워낙 천재적이라 이걸 썼다는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10] 이 보행기들도 보행기마다 연결된 장비들이 달라서 보행기마다 굴려야 하는 힘이 천차만별이다. 가벼운건 후술할 죄인의 학문강의형벌을 받는 관료들이 주로 돌렸다. 그런데 보행기는 근육조선의 입신체비 기초가 되는 유산소운동 조깅에 쓰이는 운동기구이며, 특히 세종의 건강을 위해 도입된 장비인 만큼 죄인들이 굴리면 굴릴수록 건강이 좋아지는 효과도 있다.[11] 실제역사에서도 그랬지만 근육조선의 조선 과거시험 역시 매우 어려운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 대과를 통과해서 관료생활을 할정도면 남들보다 우월한 학문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12] 2부의 윤원형이 이 케이스인데 천연두 고름을 중미 원주민들에게 전파하는 생물학 테러를 일으켜 원주민들이 피난가면 그때 들어가서 금을 채굴하다가 암행어사에게 적발돼서 거열형으로 죽었고 가문은 풍비박산 났으며 당시 연관된 사람들 관리는 파면, 대부분이 징역살이를 할 정도이고, 윤원형은 아예 윤가놈이라고 불릴정도다.[13] 독자들은 말년에 무거운 것을 들어 무리가 간 것이라고 추측했다.[14] 최역직의 원래 자격인 생활스포츠지도사 1급은 생활체육지도사 특급으로 바뀌어 있고, 문화체육관광부 대신 체육부가 별도로 독립되어 있는데다, 통장에 찍힌 한 달 급여도 2,400원(현실 대한민국의 400만원 중반)으로 늘었으며, 수양대군 시절 만든 한자식 헬스 용어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15] 작중 설정상 의무적으로 1달간 근력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휴식월을 무시하고 억지로 운동하는 것은 물론 근손실 때문에 안 간다고 버텼던 적이 있는지 외할머니 생신 때 영직이가 휴식월에 운동을 안 하고 왔다는 사실만으로 놀란다. 외할머니에게 닭갈비를 해달라고 하고, 사촌여동생이 남편감을 소개해도 그 사람의 근육에 대해서 별 신경 쓰지 않자 또다시 놀라워하기까지 한다. 오타쿠 문화에 빠진 안여멸인 동생이 있는데, 이 동생이 형이 들어오자 주눅이 잔뜩 든 것을 볼 때 평소에 동생을 어마어마하게 갈궈댔던 듯. 이 정도면 근육에 미쳐 인륜을 저버리는 패륜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렇듯 갑자기 사람이 바뀐것에 대해서는 수양근을 달성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식으로 변명했다.[16] 2부에서 유성룡에 빙의한 김성원도 영직서를 보기 전까지는 수양대군=최영직 이라는 걸 상상조차 못했던 이유가 수양대군이 남긴 업적들 때문에 '이런 위인이 영직이처럼 단순무식한 놈일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17] 黑牛가 아닌 오를 흑에 근심할 우를 썼다.[18] 현대인이 아니면 못알아볼 소리 투성이라 설명을 덧붙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복부비만인 사람을 가리켜 배둘레햄 드립을 치는 대목이 있는데, 해외 무역이 활성화된 작중에서도 당시 사람들이 베들레헴이 뭐고 은 또 뭔지 알 방법이 없으니 설명문을 덧붙여놓았다. 빙의자인 걸 들키지 않고 싶어서 쓴 책에 친구 김성원의 이름을 써 놔서, 유성룡에 빙의한 김성원이 수양대군 = 최영직이라는 의심을 품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19] 입신체비술을 좋아하게 된 후에도 고기덕후 기질은 여전해 수양대군이 진상한 바비큐를 먹고 크게 기뻐하며 당수육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20] 코믹스 2화에서 언급된 바로는 체질량지수가 35이상이나 되는 D라인이라고 한다.[21] 일단 기본 시작은 과거에 친구랑 얘기할 때 세종대왕님이 몇 년만 더 사셨어도 역사가 확 바뀌었을 거라고 이야기 한 적 있는데 기회가 왔으니 그걸 실행하기 위해 자신이 잘 아는 헬스를 이용하기로 한 것. 그게 결국 다양한 이유로 커져서 대대적인 입신체비를 퍼뜨린 걸로 이어졌다.[22] 개정판에서는 아버지 태종의 능에 나아가서 운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고는 "근데 하루만 더 있다가 할게요"라면서 슬슬 미뤄버린다. 결국 수양대군이 상의탈의를 동원한 끝에 겨우 시작.[23] 그래도 무산소 운동은 싫은지 유산소만 하고 은근슬쩍 빠지려고 든다. 주로 쓰는 방법은 수양대군한테 공부시켜서 공부 안 하면 자기도 빠지려고 하기. 대놓고 '나 운동하기 싫으니까 너도 공부시켜서 안 하면 나도 운동 안 함'이라고 말하긴 좀 그래서 돌려말하다 보니,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걸 입신체비서 완성에 도움을 주기 위해 책을 추천한 것이라 생각해서 본인은 관여한 적도 없는 입신체비서의 공동 저자 중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24] 물론 수양대군이 현대인 치트로 날로 먹었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 정립된 내용을 조선시대의 이론으로 설명하기 위해 수백 년 전 현대와는 다른 발음의 중국 고대어들과 범어까지 배워가며 죽을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미리 알고 있던 현대 한글에 대한 지식과 세종대왕 특유의 인재 갈아넣기 스킬을 통해 배운 각종 음운학적 지식을 결합해 현대식 띄어쓰기, 맞춤법, 문장부호, 아라비아 숫자 도입에 협력한다.[25] 실제 역사에서 1450년 4월 8일에 훙했다.[26] 원 역사에서 200년 넘게 묘호도 못 받고 공정왕이라고만 불리다가 숙종 때에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는데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이방과가 묘호를 받기나 했는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27] 영릉 자리를 정할 때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다고 최양선이 말한 에피소드도 언급된다. 태상왕 당시 그 '흉지'를 찾은 작중 세종은 후손이 끊어진다는 게 지가 먼저 끊어진다는 말이었냐며 코웃음친다. 다만 최양선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1부의 상원암의 스님, 2부의 이지함 역시 미래를 예지할 수 있었으나, 이 미래가 1부, 2부 주인공들에 의해 바뀌지 않은 본래 역사여서 전부 빗나가버린 것도 있다. 즉 바뀌지 않은 미래였다면 최양선의 예지가 맞다.[28] 탄매는 기름기가 섞인 때가 아니라 불완전연소된 탄소가 층을 이루는 것이라, 단순 세안용 비누로는 벗겨지지 않는다. 괜히 총기 수입때 고형 윤활유인 그리스를 이용하는 게 아니다. 작중에서도 문종이 일단 탄매부터 벗겨보려다가 안 된다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있다. 보편적인 지식이 아닌데도그야 총기수입을 비누가지고 하진 않으니까 세부적인 고증이 된 놀라운 부분.[29] 무종은 정덕제처럼 치세가 무에 치우쳤을 때에나 붙는, 문무 가릴 것 없이 업적을 쌓았던 작중의 문종에게는 다소 억울한 묘호다. 흑색화약이 발화할 때 나는 지린내에 흠뻑 취할 정도로 무기에 전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인도 알기 때문에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는 것.[30] 헬스 트레이닝 도입을 위해 대장간을 들러 운동기구를 주문하거나 마을에 가서 곡식과 음식을 제공하며 시간에 따른 신체변화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무기와 사람을 모으는 움직임으로 여겨 누군가가 밀고를 했다. 이향과 세종의 대화로 보건데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 이숙치가 고해바친 것으로 보인다.[31] 후에 아버지인 세종대왕에게 수양대군이 보였던 수상한 행동에 대한 진상을 고하면서 '아무리 사헌부 간관이 풍문거핵 불문언근(소문으로 탄핵이 가능하고 주장의 근거도 없어도 된다)의 권한을 지녔다고는 하나 이번 일은 정도가 지나쳤으니 사헌부 관원들에게 엄히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종대왕은 대사헌(사헌부 수장)인 이숙치를 지방관으로 보내는 것으로 끝냈다.[32] 소헌왕후: 적어도 네 동생 하는 것의 7할은 하거라.
문종: (저놈이 1000근을 들었으니… 700근?!)
[33] 그러니까 헬스장에서 PT 받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당해봤을 "자 회원님 열 번 가겠습니다! 하나... 하나... 둘... 어, 회원님 자세 흐트러졌으니까 한 번 더 할게요! (중략) 아홉... 아홉... 열! 회원님, 지금 자세 좋으신데 다섯 번만 더 해 봅시다!" 하는 식의 바로 그것.[34] 이 일폭탄의 수준도 어마어마하다.[35] 원래 고기는 먹으면 즐거우니 3년상 동안 입에 대면 안되는 것을 닭가슴살은 먹어도 즐겁지 않다는 논리로 편법에 가깝게 허용하고,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서 자식이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묘소 앞에서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이는 후대에도 물려져 2부에서 국왕 이연이 자신의 아버지 묘소를 참배할때 아예 대역기가 준비되는것으로 발전되었다. 세종은 태종이 자신에게는 편법을 써서 고기를 먹게 해 줬지만, 수양대군이라면 편법이 아닌 정도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줄 거라고 믿고 수양대군에게 유언으로 부탁했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현대에서 일반적인 식습관에서 비건까지 다양한 분포의 식습관을 지닌 회원들을 다뤄본 경험으로 이를 성공시킨다. 시간이 흘러 입신체비가 더욱 퍼진 이후에는 상을 치른다고 몸을 망가트리는 게 더 큰 불효라는 시각도 자리잡게 된다.[36] 1450년에 세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았으니 19년간 왕 노릇을 한 셈이다.[37] 수양대군 본인도 "이 사람도 혹시 빙의자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덧글에서도 수양대군이야 미래인이 빙의했다지만, 이 당시 사람이었던 문종은 대체 어느 정도의 혜안이길래 저런 활약을 보이는가?라는 평까지 있을 정도로 중세인이라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의 안목을 보인다.[38] 첫 번째 세자빈은 야사에 박색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문종이 외면했고, 결국 부인이 민간 술법으로 문종의 마음을 돌리려다 들켜서 폐위되었다. 두 번째 세자빈은 외모를 보고 뽑았는데 인격적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았고, 여기에 더해 궁녀를 폭행하거나 억지로 침실로 끌어들이는 등 사고를 여러 번 쳐서 폐위되었다.[39] 왕비라는 신분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쳐나가서 못하게 막으려 했을 것이라 한다. 아직 입신체비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기에 소헌왕후의 입장에선 아끼는 아들이 힘자랑하다 사고라도 당할까 걱정했기 때문.[40] 와병 중에 설탕을 먹고 싶어했는데, 당시 조선에선 사탕수수 재배가 불가능해 설탕은 전량 수입해야 하는 사치품이었기에 왕족조차 쉽게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소헌왕후가 죽은 후에야 문종이 얻는 데 성공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영전에 바쳤다는 일화가 있다.[41] 하지만 안평대군 본인은 그렇게 사치를 즐기지 않아, 나랏일을 내팽겨치고 극심한 사치를 즐기는 정이대장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정이대장군의 측근들의 경계 때문에 언제 칼침 맞을지 몰라 불안에 떨었다.[42] 발단은 인삼 넣고 만들었다는 엉터리 약을 팔던 약장수 일당을 수양대군이 친히 참교육해준 사건이다.[43] "내 형님의 근육은 이렇지 않아!"[44]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역사 고증을 지킨 경우가 생기기도 했는데, 바로 예수의 성전 정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자기가 들은 대로라면 "서른 살까지 목수 일을 하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전파했으니 손에 울퉁불퉁하게 굳은살이 박힌 근육질 체형에 피부가 그을려 검어졌을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원 역사에서 21세기 들어 재고증된 '근육질 태닝 청년 예수'의 모습을 상상만으로 그려내는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 이로 인해 '중동계 백인 장발 수염남 예수' 이미지가 개변된 역사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45] 병풍에 보디빌딩의 7가지 기본 포즈에, 수양대군이 장난삼아 포함시킨 흑룡세, 즉 흑드라군 자세까지 넣은 것.[46] 현대인의 지식을 가진 유성룡이 후대에 의심받는 걸 피하기 위해 회령군이 창안했다는 식으로 콘크리트를 만들어 도입하였다.[47] 개정 전에는 처음부터 장남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이후 개정판에서 형이 있었다는 언급이 추가된다.[48] 세 왕들의 정책관을 얇게나마 한꺼번에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홍위 재위 초기 혁철족과 처음 조우했을 때 수양대군이 3대 왕들의 대응 전략을 상상하는데, 세종은 조선으로 귀부, 문종은 문화적 흡수를 선택할 것으로 예측한다. 홍위는 안정 및 숙고의 차원에서 외방 관원 파견 확대를 선택.[49] 단종의 정통성은 조선에서는 아예 비교 대상이 없고, 중국의 역사까지 따져봐도 단종급의 정통성을 가진 황제는 몇 명 없다. 일단 증조부 태종과 조부 세종이 장남은 아니지만 태조의 적통 직계였고, 아버지 문종과 본인은 둘 다 적장자였기에 단종은 건국군주의 적통 현손자라는 으리으리한 혈통이다. 거기다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가 세자라 세손, 그 후 문종이 즉위하여 세자, 문종이 붕어한 후 왕으로 즉위라는 정통 왕위계승 테크까지 탔다. 이에 그나마 비견될 대상이 조부 효종의 적통 장손인 숙종인데,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 현종 재위 시기라 세손 직위를 거치지는 못하고 곧바로 세자가 되었다.[50] 고위공직자 혹사의 역사 때문에 3대 500kg(근이 은근슬쩍 kg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무게가 많이 늘었다.) 칠 정도의 체력이 되지 않는 이상 과도한 업무를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최영직이 돌아온 이후에 본 뉴스에서도 혹사당하다 과로로 쓰러진 고위 공직자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참고로 1부 외전에서 밝혀진 바로는 황실 해산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은 이러한 혹사의 역사가 반복되다 보니 지친 황제와 종친들이 사람답게 살겠다는 이유로 황실 해산을 만장일치로 찬성했기 때문이라고.[51] 애초에 근육조선 세계관에선 이미 중동까지 다녀오는 길에 태풍의 경로를 목격한 수양대군의 증언으로 태풍의 발생 원인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고, 홍위는 세자 시절 태풍으로 치수를 실패해 곤욕을 치를 뻔하다 이 증언으로 겨우 살아났던 경험이 있었기에 당연히 왕의 부덕함 때문에 태풍이 생기는 건 개소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52] 후에 2부의 시간대쯤 가면 산림은 무능하여 출사를 못한 주제에 입만 살아 떠드는 멍청이 정도로 무시당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53] 서적판에서는 수양대군이 주역으로 점을 쳐봤는데 두 번이나 인재(人災)를 겪을 것이라 나와서 불안하니 첩이 몸을 지킬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서산군에게 권유하였다.[54] 작중 묘사로는 관절을 꺾어서 부수는 관절기다. 시간을 뛰어넘은 무술답게 양녕대군이 피박살 났다.[55] 비유상의 그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된장이다. 수양대군이 방문했을 때 마당의 장독대가 죄다 깨져있었다.[56] 효령대군을 필두로 종친들이 단체로 수양 집에 찾아와 수양 일가가 깜짝 놀랐다.[57] 아버지에 의해 첩을 빼앗기는 초유의 사태 이후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계속해서 막장짓을 하다가, 결국 서산윤(尹)에 이어 황계령(黃溪令)까지 강등당하고 자살을 시도하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58] 상술했듯 강간 사건이 가해자가 박살 나는 강간 미수로 완화되는 수준에 그쳤다. 당대의 법인 대명률대로 하자면 피해자인 첩도 종친인 시아버지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장을 맞고 유배를 당해야 했지만, 다행히 소식을 듣고 친히 국문을 한 세종이 참작을 해 주어 회초리로 때리는 태형으로 대체했고 그나마도 양녕대군에게 무시무시하게 분노한 세종의 모습을 눈치 긁은 형리가 별로 아프지도 않게 때리는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다.(물론 양녕대군은 펄펄 뛰었지만 세종의 호통에 본전도 못 찾고 찌그러졌다.) 이 일을 계기로 세종은 지나치게 가혹한 법률 대신 새 법률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원 역사대로라면 세조부터 시작해서 성종 때 완성되는 경국대전을 상왕이 된 후에 집필하게 된다.[59] 이 과정에서 걱정돼서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양녕대군에게 진짜로 의절 선언을 들었는데, 그 당시 양녕대군 상태가 완전히 광인 그 자체였던지라 다들 미쳐서 헛소리를 한 거라고 여기고 별말 없이 넘어간다.[60] 이때 데리고 간 도도의 후손들은 2부에서 궁궐 및 일부 권세가에서 애완동물로 키우고 있다고 언급되었으며, 현대 시점에서는 모리셔스의 도도는 원 역사에서처럼 씨가 말랐지만 대한 공화국의 박물관 등에서 기르고 있어 완전한 멸종은 피했다.[61] 수양대군과 절에 불사를 하러 다닐 때 반 농담으로 내가 얼마나 살 관상인가 하고 물어보는데, 역사를 알고 있는 수양대군이 처음에는 오래 살 관상이 아니라고 운을 뗀 다음 "그러니까 108세까진 힘들고 88세까지 살 것 같습니다" 하는 식으로 농을 건네자 웃으면서 오래 살 관상이었으면 동방삭만큼 사는 거냐며 만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씨가 되었는지 진짜로 108세까지 살았고, 현대에 돌아온 최영직은 나중에 효령대군의 수명을 보고 경악한다.[62] 효령대군이 수양대군을 끌어들이고, 문종이 수양대군의 행선지를 대식국(당시 오스만 투르크)로 정하자 자신이 콘스탄티니예까지 가게 될 운명임을 현대의 지식으로 기억해내 멘탈이 터진 수양대군이 형제들까지 순방에 끌어들여버렸다. 신하들 사이에서는,과거시험에서 대식국과의 교역을 주장해 문종에게 대식국 진출 뽐뿌를 넣어버린 한명회천하의 개쌍놈취급을 받게 되어 순방으로 생겨난 일거리 폭탄은 물론 저놈만큼은 꼭 순방에 포함시켜야 한다라는 종친과 신하들의 컨센서스로 순방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명회의 행선지는 섬이 많고 열대우림 지대인 조와국(자바, 지금의 인도네시아)가 되어버린다.[63] 당시의 겔와 겐뒨둡은 달라이 라마로 추대되기 전이었다.[64] 신미대사를 보곤 수양이 석총 드립을 쳤고,애드립에 이끌려 신미대사가 받아친것.[65] 정작 수양대군은 그닥 열정적인 불교도가 아니지만, 재산이 너무 많다고 적당히 처분할 겸 절에 시주하거나, 여진족을 종교적으로 흡수하기 위해 흑룡사를 건립하는 등 여러 업적을 세워 남들이 볼 땐 불교계의 든든한 우군이자 위인이나 다름없었다. 문종도 동생이 하는 일인 데다 국익에 도움이 되니 적당히 눈감아주기도 했고.[66] 개정 이전판에서는 차라리 집 대들보를 들라며 기겁하고 내수린으로 타박상 입은 남편 보고 뒷목잡고 이래저래 바가지를 긁지만, 세종의 병을 고친다는 이유를 알고는 남편을 걱정해 응원하기 시작한다.[67] 후일 회임하자 수양대군이 뱃속의 아들에게 '모든 역기들이 이름을 속삭여 줬겠지. 이제 서른쯤 되면 "입신체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 하면서 역기봉으로 날 때려눕힐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68] 수양대군이 입신체비의 창시자로서 수양자로 불릴 정도의 위인으로 인정받고 있고,(공자의 후손들이 문화대혁명 시절을 제외하면 왕조를 불문하고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과 비슷하다.) 도원군도 홍위와 어린 시절에 같이 배드민턴 치면서 놀던 사이라 개인적인 친분도 상당한데다 말년에 종계변무 해결을 위해 수양대군을 명나라에 두 번이나 사신으로 보냈다가 병세가 악화된 일이 많이 미안했는지 홍위가 수양대군의 직계 후손에게 예진원 도제조 자리를 물려주게 함으로써 대대손손 종친의 직위를 보장한 것. 그래서인지 근대 시점에서 수양대군의 직계 후손인 성림왕 이형은 아메리카의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가 이름만 듣고도 ‘수양자라는 사람의 직계 후손인 황족 중의 황족’이라고 알아볼 정도로 유명한 듯하다.[69] 언젠가부터 은근슬쩍 근이 킬로그램으로 바뀌면서 600kg에서 1000kg으로 졸지에 320~400kg가 더해진 저 세계의 역사학과 교수들에게 묵념(...)당연 그여파로 근대시점에서 등장하는 김구도 엄청난 근육덩어리가 되었다.[70] 처음 만들어졌을 땐 원 역사의 해당 시기에 만들어진 것과 같은 손바닥만한 건빵이였지만, 수양대군의 제안으로 현대의 것과 비슷한 크기로 줄어들면서 돌로 깨먹으려다 돌이 깨지는(...) 서양의 건빵과 달리 입안에 넣고 침으로 녹이면 되는 비교적 먹기 쉬운 물건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건빵을 본 수양대군은 현대인 시절에 군대에서 보급로가 폭설로 막혀 식사가 안 나와 건빵만 먹어댔던 기억 때문에 쓸만한 물건이라면서도 흉물이라고 평가한 것은 덤.[71] 배드민턴 한 세트도 제대로 못하고 중간에 기절할 정도, 보통 다섯 세트 정도는 해야 기절한다고 한다.[72] 당시 수양대군은 역사를 아는 이상 아예 홍위와 혼인시키는 방안까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73] 수양대군은 현대에서 일류 트레이너였던 만큼 여성회원 지도경험도 있었기에 당연히 여성에게 맞는 운동법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마땅히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지식을 풀지는 못하고 있었다.[74] 수양대군이 입신체비를 창안하겠다며 벌인 초반의 삽질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를 본 유성룡은 자신이 아는 근육에 미친(...) 영직이 녀석이 할법한 무식한 짓이라며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75] 말이 증인이지 추포하여 심문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동원했는지 눈가에 멍이 들어있었다.[76] 본인 왈, 사헌부 내에서도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보였으며 실제로도 대역기를 처음 들어보고 그 무게에 기겁하면서도 어거지로나마 들어올리는 괴력을 선보였다.[77] 세종은 이때의 아쉬움과 근육을 키우게 하면 신하들을 더 오래 굴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으로 입신체비를 더욱 퍼트리기로 결심한다.[78] 웹툰판에선 세종이 무시무시한 미소를 짓고 있기에 강렬한 신이 되었다. 수양대군의 살인미소는 세종에게서 이어져내려왔다.[79] 이룰 것을 다 이루고 죽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죽음으로서 신밀레를 탈출했기 때문이거나. 그 중 독자들은 후자(...)로 생각하고 있다.[80] 개성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왕릉을 보수한다고 하자 혹시 왕릉의 보물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자원한다. 그러나 이건 왕건 동상이 그쪽에 묻혀있는 걸 알고 있던 수양대군의 계획이었고, 몰래 왕릉을 도굴하다 왕건상을 파손시켜서 뭇매를 맞는 걸로 모자라 고려 왕실의 후손인 왕우지에게 문자 그대로 물어뜯기고 있던 걸 수양대군이 구해준다. 그리고 왕건 동상을 파낸 수양대군은 개성 사람들의 민심을 얻어 결과적으로 모든 불이익은 한명회에게 몰아지고 수양대군 입장에선 일석이조가 된다.[81] 이때 일종의 헬스노트인 근생부를 고안하기도 한다. 이 이름을 들은 김시습이 살생부 느낌이 난다고 하자 "떽! 무슨 흉악한 소리인가!"라고 일갈한다. 원 역사에서 본인이 살생부의 원조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82] 명, 야인, 일본 중 한 곳과의 대외정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제였다.[83] 이 와중에 정척이 인도에서 얻은 염초를 자랑하며 한명회를 충동질 한다. 이유는 상술했듯 뺑뺑이 돌리리려고.[84] 폴리네시아인과 교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압권이다. 폭풍에 쓸려서 겨우 섬에 상륙했으나 폴리네시아인 무리가 하카를 외치며 마나를 건 싸움을 걸어왔고, 여기서 만약 이에 응하지 않고 보총을 쏘거나 도망가게 되면 자기들은 잡혀 죽는다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한명회가 혼자 나서게 된다. 이에 폴리네시아인들은 자기들도 대전사를 보냈으나 이때 한명회는 입신체비를 통해 3대운동 800근의 경지에 오른 상태라 순식간에 이겨버렸고, 제일 덩치가 작은 자기도 못 이기면서 어떻게 우리들을 이기려 하냐는 식의 페이크를 쳐서 겨우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거하게 대접받고 배 수리까지 받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배에 실려있던 애물단지나 다름없던 구식 총통들을 선물로 줬는데, 이게 섬에서 더할나위없이 귀중한 금속인 구리였던지라 원주민들이 이 구리를 녹여서 무기를 만들어 기세등등하게 다른 부족들과 싸움을 일으키게 만들어 주변 섬들에게 적대당하게 되었고, 때문에 이후 찾아온 조선의 함대를 따라 조상들의 땅인 대만으로 순순히 따라가 귀화하게 되었다.[85] 정작 마젤란은 필리핀 인근에서 좌초하여 세계일주에 실패했다고 한다.[86]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던곳 만큼 고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왕씨대학살의 여파로 조정에 매우 비협조적인 지역이었다. 실제로 이 사태가 터졌을때 한명회와 같이 따라온 일꾼들은 개경 전체의 적개심으로 일꾼들은 스스로 북방 전가사변을 자처할정도로 시달렸고, 한명회는 세종이 불문에 붙여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만약 이게 다시 언급되면 한명회가 무사하지 못할 정도[87] 애초에 미주 개척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항해였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마침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고 먹을 게 없어 서로 식인까지 하는 아비규환의 지옥이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람 목숨이 먼저라는 명분을 핑계삼아 식량을 긁어모아 지원해줬다. 이 과정에서 통가 제국을 복속시킨 것은 덤[88] 이 계책의 진실은 적당히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감기 걸린 척하고 물러나려고 한 거였다. 그러나 임금은 친히 약제를 내려주고 북방으로 발령낸다.[89] 코르테스 대신 테노치티틀란을 무너뜨렸다.[90] 명나라가 이이제이를 한답시고 큐슈 내 명나라 점령지역의 각 세력들에게 직위를 남발해버리다 보니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질 않았고, 홍윤성은 싸우는 세력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렇게 8년 동안 죽인 사람만 3만 명.[91] 전장에서 광기에 휩싸여 적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명나라에서 공치사로 2품을 수여하자 더 심해졌다.[92]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과로로 말하자면 두 말 하면 서러울 수준이고 수 틀리면 주변 관료들에게 물귀신 짓거리를 자행하던 작자들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홍윤성의 광증을 보고 너 나 할 것 없이 기겁한 것이다.[93] 위장복 개념의 도입만 하더라도 세계 전쟁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이며, 근육겁박지계도 심리전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94] 역사개변된 현대로 돌아간 최영직이 박물관에 찾아가 홍윤성의 기록을 찾았을 땐 차마 PTSD로 인해 눈은 울면서 기괴하게 웃는다는 기괴한 모습
파일:울면서 웃는짤(공포영화 겟 아웃).jpg
을 그대로 묘사할 수 없어서 미화를 한 건지 해당 기록이 전해지지 않거나 아니면 극 사실주의의 조선 초상화도 도저히 제대로 묘사하기 힘들었는지 왜곡하여 남긴 초상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지 야사로 취급받은 건지 본 모습 대신 당당한 모습으로 호탕한 웃음을 짓는 모습의 인형이 놓여 있었다.
[95] 대만 원정에서 자식이 올해 8세라고 언급한다.[96] 근육조선 세계관의 조선과 러시아 제국은 우호적인 관계로 로마노프 황가의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가 조선의 세자비로 시집와서 사돈관계를 맺은 사이이다. 그렇기에 조선에 우호적인 시베리아 주민들이 로마노프 황가를 받아들여준 것이다.[97] 심지어 웹툰판에서는 자다가 잠시 정신줄을 놓았는지 잠꼬대로 서기 1434년을 언급하기까지 한다. 물론 시대 배경이 1400년대인 것은 맞지만 당시에는 당연히 서기로 햇수를 세지 않았다.[98] 네이버 시리즈 1장 9화 수정전 내용에서는 장영실 좀 써도 될까?라는 말도 나오며 도구취급이었다.[99] 세종이 운동을 하는 시간만큼 자신을 덜 혹사시킬 거라는 기대감과 세종도 운동으로 고생시킬 수 있다는 물귀신 심보가 섞인 듯하다.[100] 시험 제작 중이던 신형 가마를 수레로 개조해서 타고 내려갔는데, 동래 근처에서 부서지고 말아서 자칫했으면 주상전하가 타고 계실 때 부서졌으면 파직이었을 텐데 운이 좋았다며 안도하는 건 덤.[101] 당시 갓 발명되었던 주정을 떠올리며 '생선이 죽으면 내장에서 독이 생기는 건가?'라고 생각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것도 간접적으로 수양의 나비효과.[102] 같이 있던 성삼문, 신숙주는 일주일 정도 하다 때려쳤다.[103] 개정 이전판에서는 이름이 여러 번 간접적으로 언급되지만 끝내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104] 이 기이한 체질은 사실 고증으로 실록에 기록된 홍일동도 한 끼에 찐 닭 2마리, 물고기 국 3그릇,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는 대식가여서 명 사신을 접대하다 폭음으로 사망했을 때 사람들이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할 정도였지만, 평소에는 밥 대신 미숫가루만 먹는 식습관이 있었다고 한다.[105] 그렇다고 트롤링을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해결법이 단순무식하게 닥치고 근육인 근육뇌라 그런 것이다. 더 골때리는 건 입신체비로 단련된 육체 때문에 홍일동은 진짜로 그게 가능해서 말리기도 뭐하다는 점[106] 다만 이건 힘을 과시하기 위해 한 게 아니라 평소에 흔히 하던 짓이다.[107] 2부에서 건기로 인해 물이말라 인근 개척단의 농지를 습격해왔으며, 한번 농작물 맛을 본데다 교활하고 대규모 무리짓는 습성탓에 초반엔 고생했지만 전문 입신체비사들이 발톱을 막기위한 판금갑옷을 패용한채 철저히 공포를 심을 목적으로 내수린을 시행해 모조리 근육해서 공포를 심었다.[108] 사실 아버지는 가문의 힘을 총동원해서라도 최대한 지원해 면천시켜줄 생각으로 보낸 아끼는 자식이었는데 아버지의 뜻을 모르고 혼자 막나간 것. 나중에 한명회의 후계자로 따라다닐 적에 한명회가 율도 현령이 된 아들 걱정에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사재까지 털어가며 어마어마한 지원 물자를 바리바리 싸들고 율도까지 직접 항해해서 전해주는 걸 보고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으며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한다.[109] 원 역사에서는 조의제문이 무오사화가 터지는 원인 중 하나였지만, 여기서는 계유정난이 없는 세계관이다 보니 조의제문의 내용도 수양대군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자기 멋대로 입신체비 규정을 만들고 안 지키는 사람들을 돌려까는 내용이어서 후대에도 탄핵당할 만했다고 평가받는지라 악행이라고 보기도 뭐하다.[110] 신하에게 군(君)을 붙이는 건 큰 공을 세운 공신일 경우에 붙여준다.[111] 덕분에 그렇게 보기 힘든 독대가 작중에서 주구장창 나온다... 참고로 유일하게 면제되는 자는 금군 1명이라고 한다.[112] 이 때 수양대군은 전쟁 PTSD로 제대로 된 활동을 못 하고 있었는데, 한확 입장에서는 수양대군의 뜻을 오해해서 혼담을 거의 흐지부지시켰다.[113] 그가 작중에서 맡은 업무는 대양도 개척당시 책임자로 원정을 나간 정도다. 대양도의 무더운 기후에 탈진하기도 했지만 홍윤성의 활약 덕분에 개척은 성공적으로 끝냈고 대양도산 사탕수수로 몸보신을 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114] 새 왕이 즉위하는 만큼 신권을 억누르기 위해 품계만 높은 바지사장이나 다름없던 한확을 영의정에 올린 것.[115] 주인공은 첫번째엔 달자(유목민)들의 왕이라면 모를까 라고 대답하고 두번째는 납득, 세번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16] 손님(영직)은 있을 곳(수양대군)이 사라지면(죽으면) 집(현대)으로 돌아가기 마련. 이라는 의미. 즉 이 시점의 수양대군은 모르고 있으나 죽으면 원래 몸으로 돌아간다는 복선이 되었다.[117] 수양대군의 일화 중 등창 때문에 간 온천에서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 달라고 했는데 너무 시원해서 이후 동자승에게 네가 왕의 등을 밀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자, 동자승은 그러면 전하는 문수동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 사라졌다는 야사가 있다.[118] 하지만 왕에게 진상하고 효수하기 위해 흑우가 없는 사이에 관에서 도로 꺼내 목을 잘랐다고 한다.(...)[119] 웹툰판에선 수양이 힘으로 흑우를 제압하면서 말을 안 들으면 평생 마구간에서 종마로 살게하겠다고 협박하지만, 부하들이 흑우는 이미 거세된 말이라 알려주자 수양대군은 기가 막혀서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을 보고나서야 얌전해졌다.[120] 이 정책은 나중에 '서얼, 혹은 조상이 탄핵당한 사람들이 자진해서 미주나 여송 같은 격오지로 발령받는' 전통으로 바뀐다.[121] 대표적으로, 북방의 추위를 막기 위한 집을 구상하고 있을 때 형을 그냥 냅두면 하체운동이라는 빌미로 엄청 큰 돌덩어리들을 들고와 돌담을 짓는 개고생을 할 것 같아서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미리 선수치고 연구하다가 북방에 딱 맞는 벽돌집을 만들어낸다.[122] 때문에 시부카와 노리나오와 그의 일족이 표류해오자 정체를 눈치챘음에도 관직 싫고, 명나라 황제 알현은 더더욱 싫어 눈감아주고 폭설 대비 건축을 부탁했다.[123] 굵은 손목을 보며 골격부터 튼튼하다고 감탄했다.[124] 본인은 소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소젠의 불교 지식이 신미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해 신미 앞에서 고승 행세했다간 사기극이 죄다 들통날 수 있으므로 신미의 존재만으로도 고승 행세를 할 수 없게 된 것.[125] 원역사에서는 신숙주가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 세상을 떠난 비운의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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