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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12:58

입신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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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
등장인물 / 조선 (1부 · 2부) 설정 (입신체비) 개변된 역사 / 조선 웹툰

1. 개요2. 상세3. 삼대운동4. 방법론
4.1. 상초충4.2. 하초충4.3. 소룡식
5. 문화
5.1. 수양팔근도5.2. 근육하다5.3. 승근도
6. 입신체비 용어
6.1. 일반 용어6.2. 기구6.3. 운동6.4. 내수린
6.4.1. 내수린 기술
6.5. 근면육연화기억술

1. 개요

입신체비(立身體備). 대체역사물 웹소설 《근육조선》에 등장하는 사상이자 운동으로 현대의 보디빌딩&웨이트 트레이닝 그 자체다. 한자로 음차되거나 아예 번안된 각종 헬스 용어를 구경하는 것도 이 소설의 쏠쏠한 재미.

2. 상세

수양대군에 빙의한 헬스 트레이너 최영직이 세종대왕의 몸을 직접 관리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보디빌딩, 헬스를 비롯한 생활체육 지식을 성리학적 사상으로 적절히 포장해 창시한 사상이다. 초기에는 수양대군이 홀로 구상하고 자료를 모으고 있었는데, 사헌부에서 왕족이 의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인다는 상소를 올려 세자인 문종이 불시에 찾아왔으나 아버지의 건강 회복을 목표로 하는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하게 된다.[1] 문종 합류 이후에는 육체 단련 부분은 수양대군이 맡고, 수양대군이나 최영직 모두 뛰어나지 않았던 성리학 이론 분야는 문종이 보충하고 다듬어 줬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기반으로 하여 '단순히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부모가 주신 몸을 더욱 튼튼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효." 라는 주장을 주요 골자로 내세웠다. 이게 성리학적 논지로 따져보면 결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상당히 막나가는 사상이라서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고, 수양대군도 이를 짐작하고 있어서 아버지 세종의 생일에 직접 삼대운동 총합 1000근을 들어 올리는 것을 왕실과 대소관료 모두에게 과시해 성과를 인정받는다. 결국 왕실의 권위 + 몸으로 입증한 결과 + 세종의 건강 회복이라는 세 가지 명분이 쌓인 덕분에 세종대왕이 직접 입신체비를 행하게 되었고, 세종의 당뇨가 회복되자 그 효능도 입증되었다. 또한 수양대군이 입신체비와 접목한 현대식 교육법[2]을 적용하면 과거 시험의 소과를 손쉽게 통과한다는 점 때문에 학문적으로도 뛰어나다는 것이 증명되어, 조선 중기 정도 되면 사대부 층에서 완전히 정착한다. 다만 수련하는 동안 대량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고, 당시로서는 뛰어난 공업 기술을 요구하는 운동기구가 필요하며, 수련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있어 양민 층에서는 간단한 개념이나 요소만이 정착되는 데 그친다.[3] 그래서 조선에서는 우람하게 단련된 몸이 고귀함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대한 제국 시점에서는 조선의 생산력이 향상되며 모든 국민에게 입신체비가 일반적인 문화로 정착된다.

작중 입신체비가 불러 온 긍정적인 효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입신체비를 제대로 하지 않는 불성실한 인물이나 악인들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필터링 역할을 하고 있다. 양반들은 몸을 단련하기 위해 육체 노동을 꺼리지 않게 되었고, 노비나 서얼처럼 낮은 출신이더라도 입신체비를 익힌다면 기준 이상의 성실함과 효성을 증명한 셈[4][5]이므로 이들도 출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철저한 실력 위주의 문화가 형성되어 신분제가 완화되었고, [6]입신체비로 대표되는 조선의 풍속만 따르면 나라나 피부색이 달라도 같은 동포 대접을 해 주다 보니 인종차별도 사라졌다. 또한 입신체비 덕분에 조선의 왕은 기본적으로 삼대 칠백오십 근(480kg)이상인 건장한 근육질인데, 그런 만큼 왕이 너무 건강해서[7] 잘 죽지 않아 왕위계승도 굉장히 안정적이다.[8] 세자는 20대를 넘기면서부터 입신체비와 함께 국정에도 일부 참여하여 실무경험을 쌓고,[9] 선왕이 50세를 넘기면 세자에게 양위하여 조언자 역할을 한다. 30세 정도까지 입신체비와 실무경험으로 단련된 세자는 충분히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고, 혹여나 미숙함으로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뒤에서 그걸 커버쳐 줄 수 있는 상왕의 존재 덕에 왕권이 굉장히 강력하다.[10]

한편 수양대군이 입신체비를 구상하며 기구도 같이 만들면서, 조선의 공업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단점이라면 철을 무진장 캐내느라 재정이 많이 든다는 건데, 철을 구하기 힘들다면 돌이나 나무로도 어설프게나마 제작이 가능하고,[11] 작중 조선의 엄청난 경제 규모가 충분히 버텨주기 때문에 상관은 없다. 원래 통짜로만 만들던 걸 수양대군은 비용 절감을 위해 모듈화까지 도입을 시도하는데, 자기 대에서는 이루지 못한다.[12]

이런 문화와 기술이 이어진 결과, 근육조선 세계관의 조선은 현실 미국급의 국력을 지녔으며, 인종차별 등 각종 폐해가 적고, 국민의 건강과 교육을 모두 챙긴 건강한 국가가 되었다.

이 모든 발전이 입신체비 덕분에 일어난 것인만큼, 세계관 속에서 입신체비는 그냥 체육이 아니라 조선의 유교 문화 그 자체다.[13] 입신체비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13경을 독파하는 수준의 유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므로, 조선식 유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근육에 혹해 그래서 입신체비를 받아들인 국가와 민족은 자연스럽게 조선화가 진행된다. 반대로 적극적 친조선 국가가 아니거나 유교 지식을 이해할 기반이 없는 나라에서는 퍼지지 않는다.[14] 예를 들어 일본은 "유교 =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을 사게 된 사건도 있었고, 전국시대엔 기초적 유교 서적만 독파하면 바로 관료로 스카우트 당하는지라 입신체비라는 "유교 심화 학문"을 파고들 여건이 별로 갖춰지지 않았다. 그래도 근대 일본 정도로 시간이 지나면 이 단련법으로 살아남은 사무라이가 있다. 그렇다고 일본이 조선화 정책을 펼친 것도 아니니, 입신체비가 퍼질 리가 없는 것이다.

1부 외전에서 조왕 주상진이 나라가 망한 마당에 효행이 무슨 의미냐고 한 걸 보면 조선에 넘어온 명나라 황실에선 퍼지지 않은 듯하다.

3. 삼대운동

입신체비 학문상 학력과 효행이 깊어질수록 근육이 늘어나는데[15], 그 경지를 나타내는 기준이 바로 의압(椅壓), 공좌(空坐), 시거(尸擧) 삼대운동의 총합이다.(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다들 적당히 직역한 것이다.) 수양대군이 진양대군 때 삼대운동 1000근(640kg)을 들었고 1200근(768kg)은 수양대군 때 들었다 해서 각각 진양근과 수양근이라 부르며 입신체비의 경지를 표현하는 용어가 되었다. 조선 유생들에게는 언쟁을 벌여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경우 삼대운동의 총합으로 승패를 겨루는 실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학풍이 있으며,[16] 삼대운동으로도 승패를 가릴 수 없는 경우에는 최후의 수단으로 서로의 내수린 실력을 겨룬다.

학식같이 객관화시키기 어려운 기준보다는 삼대운동 총합이나 내수린의 승패 같은 눈에 보이는 수치를 기준으로 삼기에 붕당논쟁 같은 지리멸렬한 정치싸움 없이 빠른 갈등 봉합과 정책 추진에 유리하지만, 입신체비를 하지 않는 서양권 학자와의 토론에선 논쟁의 경험치가 부족해서 밀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조정의 허가 하에 천주교를 허용하기 위한 교의 토론에서 서양 학자들에게 논쟁에서 밀렸고[17] 이를 계기로 천주교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4. 방법론

원래 역사의 학통이나 당파를 대체한다. 단련법 위주로 갈리지만 당론에 따라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원 역사의 붕당과 다르게 상호간의 교류도 활발하다.

계유정난 소멸과 종계변무 해결 등으로 확고한 정통성과 왕권을 갖추고 실리주의에 집중하게 된 만큼 유학 학파와 붕당이 갈리고 왕의 정통성에 신하들이 입을 모으는 사태는 없었지만, 장구한 유학 역사 아래 꽃피던 끝없는 키배토론과 탐구는 입신체비에 임하는 마음과 방법론에 대해서 갈래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신체비 계파의 나뉨은 현실의 독자 시선에서 보기에는 그저 개그포인트이지만, 한 독자는 이것이 의외로 진지한 논쟁거리로 비화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였다.[18]

4.1. 상초충

2부 주인공 유성룡의 스승 퇴계 이황이 이끄는 당파.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갈고 닦아 효를 드러내는 것이 입신체비이니 가장 잘 드러나는 상체의 단련이야말로 진정한 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체를 극한으로 단련한 만큼 상초충 당파의 입신체비사들은 어깨선을 감춰버리는 한복 특유의 라인을 왜곡시킬 정도로 우람한 상체 근육을 자랑한다.

물론 이황이 하체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상체의 중량을 받아낼 하체 또한 건물을 지을 때 기초를 쌓는 것처럼 챙겨야 한다는 정도로 존중해주고 있다. 그래서 유성룡이 입신체비를 시작할 당시 생활 활동을 많이 해서 하체가 튼튼했기에 이황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19] 사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장난이 아닌데, 이황은 3대 운동을 진양근(1000근)으로 들었는데 이 정도면 아무리 비중이 낮다고 해도 하체의 운동량도 장난이 아닌 수준이다. 이황이 전근대에 할 수 있는 벤치프레스의 극한을 찍고 400근(256kg)[20]을 들었다고 치면, 시거나 공좌도 300근씩은 했다는 뜻이다. 각각 190kg 언저리로 동네 헬스장 현역 관장이나 1타 회원만 가능한 수준.

어원은 상체를 위주로 운동하는 상체. 다만 근육조선에서는 채울 充 자를 쓴다.

4.2. 하초충

2부 주인공 유성룡의 장인 남명 조식이 이끄는 당파. 효도는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니 겸손함을 갖추고 드러나지 않게 효를 행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로 하체의 단련이야말로 진정한 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하초충 당파의 입신체비사들은 겉으로만 보기에는 당대 입신체비사들과 비교해 체격이 눈에 띄지는 않으나 입신체비를 위해 도포를 벗으면 우락부락한 하체 근육을 드러낸다고 한다. 특히 당파의 수장인 조식의 경우, 그야말로 대들보에 비유될 정도로 엄청난 경지를 자랑한다.[21]

삼대운동 중 공좌와 시거 두 개가 하체와 관련된 만큼 상초충보다 삼대운동을 올리기 쉽지만, 조식 본인은 겸손함을 위해 의압(벤치프레스)을 딱 100근에서 더 이상 높이지 않았으며, 그러고도 3대 천근 달성에 성공했다고 한다. 비율상 공좌 400근에 시거 500근인데 이는 스쾃 264kg에 데드 330kg로 운동기술, 영양학,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충분히 대회 수상권에 들 수 있는 기록이다. 조식은 벤치를 60kg 정도만 들었지만 정상적인 비중으로 운동했다면 벤치도 200kg는 칠 수 있는 것이 정상이고, 이 정도면 조선 중기 기록으로도 현대에 75kg급 메달권을 노릴 수 있는 수준이다.

어원은 하체를 위주로 운동하는 하체충.

4.3. 소룡식

근육조선의 율곡 이이가 창시해낸 새로운 입신체비. 체질적 문제로 근육량을 늘리지 못하여 방황하던 이이가 발상의 전환으로 벌크업 대신 절육과 분절에 집중하여 조각 같은 몸을 만들어내는 입신체비 법이다. 처음에는 이이 혼자 연구하는 수준이었으나, 유성룡이 합류하며[22] 학파가 형성된다.

이 방법으로 입신체비를 행한 사대부들은 자연스레 다른 사대부들에 비해 체구가 왜소하게 보이지만 도포 아래 감춰진 육신엔 극한으로 갈라진 근육이 세밀하게 압축되어 있다. 그 압도적인 자태를 본 유성룡이 현대시절 기억을 떠올려 무심코 이소룡이라는 한마디를 내뱉자, 주변에서 벌크업으로 펼쳐내는 입신체비사의 흑룡(세)과 대비되는 소룡이라며 자연히 소룡식 입신체비란 명칭으로 굳어진다.

소룡식 입신체비를 익힌 인물들은 조선 사대부 평균치보다 체격이 작아 보이게 되며, 이 때문에 유성룡을 모르는 외국인들이 근육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문관일 거라며 방심했다가 그에게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입신체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지만, 이때까지의 운동법 이상으로 몸에 큰 부담을 주는 운동 방식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상체파의 거두 이황은 율곡 이이와 이야기하던 중, 그의 주장을 듣고 몸을 보다가 대경하여 평소의 이지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대성일갈했으며 이이가 떠나고 마음을 추스린 후에도 "성공하면 대성할 것이나 실패하면 목숨이 위험할 것" 이라며 탄식 섞인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23] 실제로 이이는 후일 소룡식 입신체비의 부작용[24]으로 신체기능에 문제가 생겨 주화입마 60대의 나이로 빠르게 은퇴한다. 유성룡을 비롯한 다른 전수자들은 이이가 만들어낸 체계화된 루틴을 전수받았지만, 소룡식 입신체비의 창시자인 이이는 자신의 몸을 실험대로 삼아서 개선점을 찾아 왔던 탓에 그 마모가 매우 많이 쌓여갔기 때문이다.[25] 솔직히 은퇴이후 1~2년 안에 반동에 의한 고통으로 죽지 않은것으로도 기적이였으니 이이 본인도 어린 치기로 나이들어 불효하게 됬다며 자책했다.

5. 문화

5.1. 수양팔근도

삼대운동 천근을 넘어 천이백근을 달성한 수양대군의 성취를 남기기 위해 병풍에 수양대군의 몸을 그려낸 작품으로 현대의 보디빌딩 자세를 취한 수양대군의 모습을 당대 최고의 예술가 안평대군의 손을 거쳐 그려낸 역사 깊은 유물이다. 자연스레 수양대군이 알고 있던 보디빌딩의 9가지 포즈 중 7가지[26]+1가지

9가지 포즈에서 따온 7세 동작은
그리고 마지막 제8세는...

5.1.1. 흑룡세

파일:흑룡세.jpg
수양팔근도의 8번째 포즈. 일명 빅토리 포즈로, 양 팔을 들어올려 입신체비로 단련된 복근과 대흉근을 강조하는 포즈.

유래는 당연히 흑드라군. 본래 보디빌딩의 기본 포즈 9가지 중 빅토리 포즈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수양팔근도를 그릴 당시 장난기가 동한 수양대군이 빅토리 포즈 즉 흑드라군 자세를 흑룡세라 칭하며 남겨 팔근도의 마지막 포즈가 된다. 당연히 흑룡같지 않은데 왜 흑룡이냐는 타박을 들었지만, 장난기가 동한 수양대군은 끝까지 이를 관철하고 만다. 결국 왕자이자 창시자가 흑룡이라고 밀어붙이고 자주 써먹다 보니 흑룡으로 정착되고 만다.

이후 수양대군이 근육적인 업적을 선보일 때나 승리를 거머쥘 때마다 관중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흑룡세를 취한 덕분에[27], 조선 중기 즈음엔 자연스레 조선인들이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 취하는 포즈로 자리잡게 된다. 수양대군에게 내수린을 당해 쓰러진 타이순 칸은 흑룡의 두 눈이 자신을 노려본다며 몸서리치기도 한다.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멀찍이서 유성룡이 취한 흑룡세를 보고 저건 뭔 노루 얼굴을 형상화했냐고 까기도 하였다.[28]

한편 수양대군이 아프리카 마사이족 제자들에게 입신체비를 가르친 탓에 진짜 룡세가 탄생하기도 한다. 수양대군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레무아니들을 보며 흑요석 같은 몸으로 흑룡세를 펼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결국 2부와 에필로그에서 흑룡세는 조선-대한제국-대한공화국 연방의 유구한 승리선언 자세로 굳어진다.
[clearfix]

5.2. 근육하다

본 소설의 주제를 상징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요약하는 희대의 명문. 현대의 의미로 해석할 경우 "근육으로 참교육한다."는 뜻이 있으며, 더 나아가 "입신체비를 행한 사람이 누군가 큰 무례나 불경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분노해, 입신체비로 단련한 근육으로 이를 엄히 다스린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작중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난 조선인이나 조선식 입신체비를 배워 근육을 단련한 사람이 옷을 벗어던지고 우람한 근육을 드러내며 "지금부터 네놈을 근육하겠다!" 고 선언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으며, 그 뒤엔 각종 내수린 기술로 두들기고 집어던지면서 상대의 온몸에 수양자의 참된 가르침을 뼛속까지 새겨주는 훈훈한 결말이 기다린다.

시초는 배재당에서 수학하던 유생 중 한 명인 최 생원이 과거시험에서 문종이 즉흥적으로 낸 시험 주제를 맞닥뜨리고 뇌정지가 오자, 대뇌를 거치지 않고 "왜인은 통제해야 한다, 통제는 근육이다, 나는 근육을 통제했다, 그러니 왜인도 근육하면 충분하다."라는 골때리는 답안을 작성하여 낙방한 것. 하지만 특유의 강렬한 임팩트가 기억에 남았는지 이후 동기였던 윤사철이 노략질하러 왔다 털리고 도망친 후 잔꾀부리다 딱 걸린 왜구들을 근육하며 이 이 말을 인용한 것[29]을 시작으로 점차 조선인들 사이에서 참교육의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즈음에는 바다 건너 솔로몬 제국의 사람들도 똑같은 의미로 사용할 정도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30]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학살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대한 공화국이 참전한 뒤, 베를린 공방전에서 히틀러에게 보낸 최후 통첩이 Ich muskuliere dich(너를 근육하겠다)이었을 정도로 국제무대에서까지 쓰이는 유명한 표현이 된 듯하다. 다만 외교적 수사가 필요한 국제무대에서는 굉장히 과격한 뉘앙스의 선언인 탓에 상대가 전쟁범죄급의 무도한 짓을 저질렀을 때 쓴다. 대륙 3연합국이 선전포고도 없이 대한제국 요동에 가스탄을 쏘자 안 그래도 복잡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에 시달리던 차에 꼭지가 돈 건양제가 "네놈들을 근육하겠다."라고 개전선언을 날렸으며(무진천명대전), 히틀러는 아우슈비츠하다 딱 걸려서 결국 근육하겠다는 통첩을 받고 두려움에 떨다 자살한다.

의외로 비슷한 사례가 현실에도 있는데, 플라톤이 토론 중 자리에서 일어나 보디빌딩 포즈를 하여 산으로 가는 토론을 바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역 레슬링 대회에서 2회 입상하기도 했고, 플라톤이라는 별명부터가 (어깨가)'넓다'는 뜻이므로 입신체비와 내수린 설정의 모티브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5.3. 승근도

입신체비를 이용한 보드게임으로, 모티브는 승경도로 추정된다. 2부에서 상체파의 수장 이황과 하체파의 수장 조식의 대결로 처음 등장했다. 나이가 차면서 점점 내수린이 부담이 된 중년,혹은 은퇴한 노년 유학자들이 결투를 하기위해 새롭게 개발했는데 평범한 보드게임처럼 주사위를 굴려서 나아가는 건 동일하지만, 칸에 도착하면 자신의 중량에 맞춰 그 칸에 쓰여있는 입신체비를 해야 한다.[31] 골에 도착하거나 상대편의 체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 입신체비를 할 수 없다면 승리. 이황과 조식의 대결은 제자들과 함께하는 팀전이었기 때문에 유성룡이 적절하게 팀의 체력을 배분해 조식 측이 먼저 체력이 고갈되어 이황이 승리했다.
이후 유성룡이 현대의 부루마불을 참고해 새로운 승근도를 만들어낸다. 칸에 도착하면 입신체비를 하는 기존의 룰에 추가로 입신체비를 하면 땅을 점령할 수 있는 전략 요소가 추가되어, 주민 대부분이 입신체비를 즐기는 미주에서 상당히 유행했다.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조식의 승근도는 직계 제자들(유성룡과 정인홍)조차 인정하는 고난이도여서[32] 사장되었다.

6. 입신체비 용어

가나다순으로 정리한다.

6.1. 일반 용어

6.2. 기구

6.3. 운동

6.4. 내수린

耐守躪. 작중에서는 인내하고 지키며 짓밟다라는 뜻으로, 역사적 일화에 기반한 연극에 입신체비를 가미하여 창시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겸 호신술. 수양대군이 타이순 칸을 포위했을 때, 김종서가 완력으로 칸의 기를 꺾어놓자고 제안하자 수양대군이 프로레슬링 기술을 가져와 자신이 창안했다고 주장하며 타이순 칸을 농락했다. 내수린의 이름이 이렇게 된 이유는 아놀드 슈워제네거같은 영단어를 발음하려고 시도하면, '아논두 수와재내거'같이 한자어로 발음되는 보정이 걸려 발음이 이상하게 되어서 그렇다.

이후 효령대군의 생일잔치 때 조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여진족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미륵불이라 주장하는 폭군 궁예에 대적하는 태조 왕건신숭겸 2:1 핸디캡 태그매치"를 만들어내며 엔터테인먼트로도 발전한다.[33] 워낙 기괴스러운 광경이다 보니 세종과 효령대군이 술을 뿜긴 했지만, 무턱대고 야사를 소재로 삼아 역사 왜곡이 일어나게 만든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제지는 받지 않았다. 이는 연극의 내용이 감히 "왕"이나 "과인"을 입에 담지 않고, 조선에서도 충분히 존경받는 인물이던 왕건과 신숭겸을 존중한 덕에 명분적으로 충분히 방어할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34] 다만 세종은 수양에게 역사 인식을 어지럽힌 처벌(?)로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참여하도록 명한다.

어찌 되었건 화려한 눈요기거리임은 분명하다 보니,[35] 이를 계기로 한양을 넘어 지방까지도 내수린이 퍼져나가게 된다. 이후 유생들은 내수린을 호신술 삼아 단련하거나 선수로 활약하고, 양민들은 호쾌한 기술이 난무하는 연극을 즐기게 된다. 조선 중기 즈음에는 궁예와 왕건 말고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배경으로 하는 로얄 럼블 같은 규칙을 가진 내수린이 등장하는 등 더욱 다양화되었다. 내수린이 유행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자극이 덜한 남사당놀이는 살아남기 위해 극한까지 육체를 단련하여 서커스화된다.

내수린을 본 아이들이 기술을 따라하다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자 매 시합 전 선수들이 관중에게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집과 밖에서는 절대로 따라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거친 성격인 북인(여진족)들의 경우에는 의무적으로 내수린의 낙법을 가르친 후에야 일 할(10%)의 청년들만 다치고 있다고 한다. 그 전에는 30% 정도의 청년들이 내수린 때문에 다쳤다고.

프로레슬링은 어디까지나 짜고 치는 연극이다보니 실전성이 높다고 보기 힘들지만, 내수린을 행하는 조선인들의 평균 체격과 근육이 당시대 평균을 아득히 압도하는데다 사람이 던져지고 메쳐지는 호쾌함 때문에 상대의 사기를 팍팍 깎아버려[36] 실전 무술로도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입신체비사가 아니라면 절대 사람에게 사용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외적이나 짐승 등 죽여도 상관없는 대상에게는 마음껏 사용하면서 육체나 정신에 복구 불가능한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37]그결과 입신체비를 다지는 유생들이 몸으로하는 전투를 행하기 위한 무술로서 내수린을 채택한다.

풍속의 측면에서 내수린은 갈등 해소의 장치로 크게 활약한다. 정치적, 학문적 갈등이 빚어지고 3대 운동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내수린으로 승부를 본다고 보면 좋을 정도. 백성들 간의 지역 감정을 해소하는 데도 내수린이 쓰인다. 갈등을 꾹꾹 눌러쌓지 않고 몸을 섞어서 그때그때 풀어주니 갈등이 폭발할 새가 없다.

내수린 풍습 자체가 근육조선의 역사에 긍정적인 작용만 한 것은 아닌데, 결투 풍습이 사라져가는 현대까지 상대방과 의견 차이가 생기면 내수린을 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결투라고 봐도 무방할 풍습이 아직도 활발하게 남아있다는 것. 또한 말로 조율해야 하는 문제인데 조선 내에서는 내수린으로 해결해 버리다 보니 타국과의 외교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상대국과 내수린을 할 수도 없으니, 결국 분이 안 풀리면 조선 사신들끼리 내수린을 벌이기도 한다(...)

세계관 내 현대 한국에는 크게 세 가지의 내수린이 존재하는데, 역사적인 내용을 내수린을 통해 표현하는 '전통 내수린'[38], 친구들끼리 하는 '대련 내수린', 판크라티온 기반의 '연무 내수린'이 있다. WNE(World Naesurin Entertainment)라는 단체가 설립되어 운영될 정도로 인기 있는 문화가 된 듯하다.

6.4.1. 내수린 기술

6.5. 근면육연화기억술

수양대군이 입신체비를 창시하며 고안해 낸 교육법으로 한자로 勤勉毓聯和記憶術 이라고 쓰며 근면하게 기르고 연속으로 합친다는 거창한 뜻을 지녔지만 실상은 줄임말 그대로의 "근육기억술"이다. 입신체비와 공부를 동시에 행하는 교육 방법이다. 입신체비의 1회 움직임마다 중간중간 강사가 어떤 서적의 어느 구절을 물으면 그에 답을 하는데 틀리거나 대답이 없으면 바로 플레이트나 횟수가 추가된다. 하지만 입신체비의 휴식 시간이 되면 칼같이 휴식을 지키며 휴식시간이 지나 다시 시작하면 위의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보면 알겠지만, 상벌체계와 휴식을 동반한 반복학습법에 근육 단련을 결합한 셈이다.

수양대군은 이를 역기는 답을 알고 있는 법이다라고 표현한다.[39] 방법은 코미디에 가깝지만 정작 해보면 단순 암기라는 측면에서는 그 어떤 공부법보다 효율적이기에 자연스레 입신체비를 행한 유생이 과거 합격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입신체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다.

2부 시점에서는 유성룡이 미주 백성들을 가르치는 데 써먹는다. 기억이 잘 안나서 대답이 늦어지는 농민에게 플레이트를 들이밀자 기겁하며 바로 정답이 튀어나오는 효험을 보였다.


[1] (아령을 만들려고) 쇳덩어리를 모으고, (식이요법에 따른 성장 정도를 체크하기 위해) 도성 밖 빈민들을 만나는 등 정황 자체는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금부도사가 와서 확인한 결과 무기로 가치가 없는 지나치게 무거운 무쇠들이나 돌덩어리 같은 것밖에 없었고, 결국 수양대군이 직접 보고를 한다.[2] 충분한 영양 섭취, 운동 사이클과 동기화시킨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인 구획학습과 반복학습, 충분한 휴식을 통한 기억, 성과에 따라 횟수 또는 무게를 늘리거나 줄여주는 상벌 제도(소설에서는 이를 '공령은 답을 알고 있다.' 라고 포장된다.) 등이 그것이다.[3] 다만 일부 입신체비 동작들은 곡괭이질, 장작패기 같은 실생활과 접목시켜 농민들의 체력 단련용으로 활용되기도 한다.[4] 작중에서도 수양대군이 부리던 서얼 출신 하인이 입신체비에 대성하여 왕족이나 양반에게 사형 대접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훈련도감 훈련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인물이 즉석에서 면천되고 성까지 하사받는 케이스도 나온다.[5] 게다가 입신체비는 다른 학문과는 다르게 체형만 봐도 재능을 대강 짐작할 수 있기에 재능있는 자를 찾아내는 일이 매우 쉽다. 작중에서도 수양대군이나 그 제자들이 몸 좋은 하층민들에게 “너 재능있어 보이는데 입신체비 해보지 않을래?”라고 꼬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6] 이는 반대로 입신체비를 못하는 양반의 경우, 음서로 관직에 오르더라도 한직과 임기제 진급으로 가득 채워진 차라리 상놈으로 사는 게 더 나을 치욕스러운 커리어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된다.[7] 대를 이어 올수록 왕들의 체구가 커져 용상도 커지고 그걸 못 박아서 고정시켜 놔도 열 받으면 그걸 뽑아 던지는 왕이 나올 정도이며, 외전에서는 러시아 황녀와 결혼한 왕세자가 193cm의 괴승 라스푸틴이 하녀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제압하려다가 힘 조절에 실패한 아르젠틴 백브레이커를 걸어 버려서 그대로 며칠 뒤 사망하게 만들었을 정도이다. 제압이 죽이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8] 선왕에게 양위를 받지 못한 유일한 경우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건양제인데, 그의 경우 과로에 시달리던 선왕이 과로로 결국 사망하면서 양위받지 않고 즉위했다. 이 시대쯤 되면 광대해진 영토 때문에 평상시에도 하루 12시간 넘는 업무로 일 수면시간이 6시간 밖에 안 될 정도로 업무에 시달리던 상황이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2부의 주인공 유성룡이 신하는 60세가 넘으면 은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빈 소원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신하들은 적어도 60이 넘으면 은퇴를 할 수 있지만, 종친과 왕 자신은 이 소원의 밖에 있어서 다른 신하들보다 어마어마한 격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왕족들도 모두 공무에 시달렸던 탓에, 건양제가 황실을 폐지하려 하자 당시 종친들 전원이 '노동자들처럼 하루 8시간 자고 8시간 쉬고 8시간만 일하고 싶다'며 한 마음으로 찬성했다고 한다.[9] 이러지 못한 유일한 예가 목종 뿐인데. 당시 왕이 기근 관련해서 중원 국가의 패악질에 화병으로 가버린 바람에 경험없이 바로 왕이 되었고 그걸 근적들로 이루어진 예당의 비호로 매웠는데 결국 송시열이 이끌던 송당의 반발에 송시열을 유배 보내려다가 지력상소를 당하면서 하야하고 상왕으로 쫓겨난다.근육조선 판 예송논쟁[10] 참고로 원래 역사에도 이런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세종대왕. 세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큰아버지 정종과 아버지 태종이 멀쩡히 살아있던 데다가, 태종이 강한 왕권을 물려주기 위해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철저하게 제거한 지라 왕권이 엄청나게 강력했다. 즉, 세종대왕 때 수립된 막강한 왕권이 계유정난으로 상실되는 일이 없어지면서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왔다고 보면 된다.[11] 1부에서도 입신체비서를 읽은 사람들이 나무와 맷돌로 소역기를 만들어서 쓰기도 하고, 2부에서 이황이 유성룡에게 제일 처음 가르쳐준 것 중 하나가 대나무로 만든 봉과 석회, 모래, 자갈로 만든 공령을 합친 역기 제작법이었다. 철이 귀한 지역에서는 역기 절도 사건이 워낙 빈번해서 이런 식으로 역기를 만들어 쓴다고.[12] 수양대군의 개입으로 역사가 개변되어 원 역사의 조선 초기보다는 기술력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모듈화가 가능할 정도로 오차 없이 철물을 제작하는 건 엄청난 오버 테크놀로지였기 때문이다.[13] 초창기에는 그저 좀 새로운 학문 취급이었지만, 입신체비를 익힌 사람들은 현대식 공부법으로 과거 급제율도 높고 장수해서 고위 관료가 되는 비율도 높은데다, 개그로 포장되긴 했지만 입신체비로 고생한 사람들이 나만 당할 순 없다는 마인드로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입신체비로 끌어 들이면서 점차 입신체비가 대세이자 유교 그 자체가 된 것. 2부에서는 가톨릭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입신체비가 도입이 되었고, 심지어 입신체비의 수호성인까지 등장할 정도.[14] 다만 유교 국가라도 명나라에는 또 퍼지지 않았는데, 그냥 사람이 많으니까 무골이 많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수요가 없어서 그런다.[15] 그렇기 때문에 나이나 사고, 질병 등으로 인한 자연스런 쇠퇴가 아닌, 운동을 하지 않아 생기는 근손실은 최악의 불효로 여겨진다. 더 나아가 기름진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 살이 가득 찐 비만한 몸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죄악으로 취급한다.[16] 대한 공화국 시점에서도 김구가 우리는 사학과니까 언쟁으로 결론이 안 나면 삼대 운동으로 겨루면 된다.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저 학풍이 최소한 근대까지는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7] 이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논쟁 이후 조선 학자들끼리 내수린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18] 간단히 말하자면 일단 근육을 가꿔서 효를 실천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어떤 방향으로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다.[19] 유성룡이 인력거를 발명했을 당시 주변 인물들의 반응 중 '이황 선생님이 있었다면 하체운동에 좋다고 아주 기뻐했을 것'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상체를 중시하는 것이지 하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20] 벤치 200kg 이상이면 현대에도 대회 출전이 가능하다.[21] 조식의 딸들도 하초충이라 어마어마한 성욕과 색력을 자랑한탓에 첫째딸의 남편은 허리를 다쳐 3개월간 치료해야 했고 둘째딸의 남편은 피골이 상접할정도로 고생하다 제주도 쪽 관직을 자원했다는 핑계로 도망 갔을 지경. 그러다 보니 상초충에 소룡식까지 섭렵한 유성룡이었지만 유성룡이 조식의 딸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황은 그날부터 하체 단련을 죽어라고 시켰을 정도. 그리고 유성룡은 신혼 첫날밤부터 완전히 기가 빨려서 살아남으려고 하초충까지 섭렵, 조선 3대 입신체비론을 전부 화한 최초의 위인이 된다.[22]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헬창이 되기 싫었던 유성룡이 이이의 비교적 왜소한 모습을 보자 자신처럼 입신체비를 꺼리는 거라 생각해 그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이이의 입신체비는 입신체비 중에서도 가장 지옥 같은 길이었고, 그 실체를 알자 기겁해 후회한다.[23] 참고로 유성룡이 막 제자로 들어왔을 때 있었던 일이다.[24] 상시 절육 상태는 고도의 칼로리 제한을 항상 한다는 것인데 당연히 문제가 된다. 지방은 꼭 섭취해야 하는 필수 영양성분이다![25] 원역사의 이소룡도 이런 비슷한 이유로 고통받다가 요절했다.[26] 해당 링크 중 1번 라인업과 9번 모스트 머스큘러가 빠진 나머지 7가지다.[27] 어찌나 흑룡세에 취했는지 후일 만주에 지을 절 이름을 흑룡사라고 짓자 이징옥이 또 흑룡이냐고 히스테리를 부린다. 물론 수양대군은 흑룡강 근처니 흑룡사라고 얼버무리는 데 성공.[28] 다만 이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책략을 모조리 예상하고 카운터친 유성룡에게 엿을 단단히 먹은 상태였으므로 그냥 짜증 나서 막말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29] 193화[30] 레무아니의 후손이 시전하는 장면이 나왔다.[31] 예를 들어 칸에 의압(벤치프레스) 10회라고 적혀있으면 자기 삼대운동에 맞는 대역기를 들고 의압을 해야 한다.[32] 상체파와 하체파의 거두라고 불릴 정도로 입신체비의 달인인 두 사람이 제자들과 함께 팀전으로 진행했음에도 완주에 실패하고 한 쪽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졌다는 것 만으로도 그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다.[33] 이때 그 유명한 누가 기침소리 내었는가와 옴 마니 반베 훔, 관심법이 나왔다. 이 일이 발생한 후 동네 아이들이 궁예 흉내를 내고 다니는 바람에 승려들이 얼굴도 들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34] 실제로 세종 또한 긴관이 이 일을 두고 말썽을 일으키면 자신이 수양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성계는 공양왕에게 고려 국왕 자리를 양위 받고 그 이후 조선을 건국했기에, 조선 입장에서도 전조 고려를 세운 왕건은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말해서 왕건을 깎아내리면 이성계가 양위받은 것 까지 같이 묶여서 깎여나가기 때문.[35] 실제로 이를 봤던 효령대군은 다른 스토리로 내수린을 만들어 주기를 원했을 정도였다.[36] 실제로 수양대군과 타이순 칸의 내수린을 본 한 몽골 병사는 직접 당한 것도 아니면서 수양대군의 이야기만 해도 공포에 떨 정도로 트라우마가 생겼다.[37] 실제로 1부에선 진주에 침략해온 왜적을 유생과 아녀자들이 내수린과 입신체비로 갈고닦은 몸으로 근육해버렸고,2부에서 내수린 기술인 백브레이커를 당한 라스푸틴이 허리가 부러져 죽기도 했다.실제로 수양대군 본인 마저 적에게 쓰는건 문제 없지않겠냐는 말에 납득해버렸다.[38] 1부 외전에서 수양대군이 만든 전통 내수린인 궁예전을 유명 내수린 선수 두와인이 한다는 광고가 지나간다.[39] 소설 내에서는 공령(플레이트)에 손만 가져가도 경전 내용이 저절로 술술 나올 정도니 말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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