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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 |||
조선 추존 국왕 덕종 | 德宗 | |||
경릉 능침 | |||
출생 | 1438년 10월 12일[1] (음력 세종 20년 9월 15일) | ||
한성부 경복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책봉 | 1455년 9월 16일[A] (음력 세조 1년 7월 26일) | ||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사망 | 1457년 9월 29일[B] (향년 18세) (음력 세조 3년 9월 2일) | ||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정실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능묘 | 의묘(懿墓) → 경릉(敬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1455년 9월 16일[A] ~ 1457년 9월 29일[B] (음력 세조 1년 7월 26일 ~ 세조 3년 9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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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현동(賢同) → 숭(崇) → 장(暲) | ||
부모 | 부왕 세조 모후 정희왕후 | ||
형제자매 | 4남 1녀 중 장남 | ||
배우자 | 소혜왕후[6] | ||
후궁 | 귀인 권씨, 귀인 윤씨, 숙의 신씨 | ||
자녀 | 2남 1녀 | ||
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원명(原明) | ||
사당 | 효정묘(孝靖廟) | ||
군호 | 도원군(桃源君)[C] | ||
묘호 | 덕종(德宗) | ||
시호 | 조선: 의경세자(懿敬世子)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 (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8] 명: 회간(懷簡)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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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조의 적장자이자 성종의 아버지. 묘호는 '덕종(德宗)'. 왕손 시절 군호(작위)는 '도원군(桃源君)'.정실부인이 바로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수왕대비(소혜왕후) 한씨다. 1살 연상의 정실부인이였던 소혜왕후와는 5년간의 짧은 결혼 생활 동안 3명의 자녀들을 둘 만큼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슬하에 월산대군, 명숙공주, 잘산대군 등 2남 1녀를 두었다. 이외에 왕세자 시절 아버지 세조의 명으로 정식으로 간택한 귀인 권씨, 귀인 윤씨, 숙의 신씨 등 3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다. 자식복이 있어서 두 아들인 월산군과 자을산군(성종)은 학식과 덕망이 깊고 인품이 훌륭한 수재들이었고 두 형제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사후에 차남인 성종의 강력한 의지로 왕으로 추존되는데 조선 최초의 왕세자 출신 추존왕이기도 하다.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 정현왕후 윤씨의 시아버지이고 세종의 첫 손자이다. 단종의 사촌형이며[9] 연산군과 중종의 할아버지이다.
동생인 예종 다음의 왕들은 모두 덕종의 직계 후손이므로 덕종은 세조와 함께 조선 왕조의 중시조이다.
2. 생애
1438년(세종 20) 9월 15일, 아버지 진양(수양)대군(세조)과 어머니 낙랑부대부인(정희왕후) 윤씨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법도로 따지면 세자가 아닌 일반 왕자의 부인으로서 장차 분만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대궐 밖 저택으로 나가야 되었지만, 낙랑부대부인은 특히 양궁(세종과 소헌왕후)의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장남을 금중(禁中)에서 낳았다. 할아버지 세종의 첫 손자이며 친히 현동(賢同)이라는 아명을 하사받았고 세종이 친히 안고 데리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쏟아 다른 왕손과 달리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은 '숭(崇)'이었는데 후에 '장(暲)'으로 고쳤으며, 자는 '원명(原明)'이다. 1445년(세종 27년) '도원군(桃源君)'[C]에 봉해졌고 1455년(세조 즉위년), 아버지 수양대군이 사촌동생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으로 즉위하자 왕세자가 되었다. 그는 체격이 준수하면서 숙성(淑成)하고 용모가 단아했으며 의표(儀表)가 아름답고 온량(溫良) 공경(恭敬)하여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해서를 잘썼다. 의경세자는 아버지 세조와는 다르게 성품이 바르고 온화해서인지 생전에 가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평판이 좋았으며 어려서부터 예의가 바르고 착했다고 전해진다.의경세자는 학업을 즐기고 게으름이 없었으며 하루 3번씩 서연관[11]을 불러 강론(講論)하였다. 일찍이 서경(書經)을 읽다가 순전(舜典) 기형주(璣衡註)에 이르러 그 제도가 문자만으로는 해득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즉시 서연관과 더불어 간의대(簡儀臺)에 올라가 혼천의(渾天儀)를 관찰하고 서경(書經)에 실린 바와 더불어 참고하고 증험(證驗)하여 애체(礙滯)함이 없었다. 다른 모든 글을 읽을 때에도 다 그러하였으니 의심이 나면 반드시 묻고 물으면 반드시 살피었다. 세조가 직접 사부(師傅) · 빈객(賓客)과 서연관을 선임하여 교양하는 법을 다하였고 세조가 일찍이 "병진(兵陣)은 우리 가업이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친히 황석공(黃石公) 등의 서적을 주니 성훈(聖訓: 부왕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간직해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학업이 날로 진취(進就)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렀다. 세조가 일찍이 제릉(齊陵)[12]을 알현하고 인하여 대수(大蒐: 봄철에 크게 수렵을 행함)를 하였는데 세자에게 명하여 도성(都城)에 남아 지키게 하고 부절(符節)을 주어 일을 전결(專決)하게 하였더니 일이 모두 합당하였다.
1456년(세조 2년) 여름에 명나라 전 황제가 태감(太監) 윤봉(尹鳳) 등을 보내어 세조에게 고명(誥命)을 주었고 1457년(세조 3년) 여름에는 지금의 황제가 한림 수찬(翰林修撰) 진감(陳鑑) 등을 보내어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두 사신이 의경세자의 의관(儀觀)의 훌륭함과 예법의 자상함을 보고 다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매일 닭이 울면 양궁(兩宮)을 찾아 침소를 문안(問安)하고 시선(視膳)하며 화열(和悅)에 찬 효도를 다하였고 여러 숙부를 공경히 섬기고 형제간에는 신의 있는 우애를 행하였으며 좌우의 사람에 대해서는 어질면서 위엄이 있었고 사대부를 접대함에는 공손하면서 예절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이 없었다. 세조께서 일찍이 검약(儉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니 무릇 여마(輿馬)·의복의 차림을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도록 힘쓰고 사치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원량(元良: 세자)으로서 덕을 극진히 갖추어 민심이 귀의(歸依)하는 바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병약(病弱)하여 잔병치레를 자주 했고 1457년(세조 3년) 병이 크게 들어 세조의 명으로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 공작재(孔雀齋)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으며 의정부 당상관 및 6조 판서와 좌찬성 신숙주, 도승지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속한 쾌유를 기원하였다. 서예를 잘했던 병이 든 의경세자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예견하였던지 지필(紙筆)을 찾아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芍葯)이 주란(朱欄·붉은 칠을 한 난간)에 가득 찼네
명황(明皇)이 촉(蜀)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빈장(嬪裝·임금의 수청을 들던 궁녀)이야 있었건만 반겨보지 않았네.
라는 시(詩)를 썼는데[13] 세자를 간호하던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며 매우 걱정했다.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芍葯)이 주란(朱欄·붉은 칠을 한 난간)에 가득 찼네
명황(明皇)이 촉(蜀)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빈장(嬪裝·임금의 수청을 들던 궁녀)이야 있었건만 반겨보지 않았네.
세조와 의경세자는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를 가리지 않고, 늘 함께 다닐 정도로 가까운 부자 지간이였다. 그 예시로 의경세자가 병이 들었을 때 세조는 자신이 임금이 되기 전의 집인 사가에 세자를 보내 치료하도록 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조 스스로 거처를 옮겨 의약품을 챙기는 등, 친히 의경세자의 병구완을 했다. 10여 일 뒤 병세에 잠깐 차도를 보이자 세조는 세자를 돌본 측근들에게 후한 상급까지 내렸다. 어머니인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병이 깊어지자 화원에게 초상화를 그리라고 명했는데,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전에 그려두었던 장남의 초상화를 보면서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14]
이러한 노력에도 1457년(세조 3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는데, 세는나이로 계산하면 겨우 20대에 들어설 시기에 사망한 셈. 사후 아버지 세조로부터 의경세자(懿敬世子)[15]라는 시호를 받았다. 세조는 죽은 맏아들을 위해 친히 여러 차례 묘자리를 찾아 다니기까지 했는데[16], 세조가 의경세자를 얼마나 끔찍이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의경세자가 사망한 뒤 왕통은 그의 장남인 월산군이 아닌 동생인 예종에게 넘어갔으며, 이는 왕위 계승의 법칙인 종법제에서 어긋나는 행위였지만 딱히 반발은 없었다. 세조의 왕권이 워낙 강력하기도 했고 어린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하는 일을 거든 중신들로서도 종법을 따지며, 의경세자의 장남이지만 어린 월산군을 후계자로 밀어붙일 이유가 없었다. 또한, 세조가 의경세자와 그 가족을 매우 아낀 것은 사실이기에 주상이 세자를 홀대하고 차남을 총애해서 승계했다는 식의 뒷말도 나오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자가 승하한 지 11년후인 1468년(세조 13년) 예종에 왕위에 오르자 하루만에 세조가 사망하였고 1년후인 1469년(예종 1년) 예종마저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차남 성종의 즉위 이후인 1470년(성종 원년) 왕으로 추존되어 의경왕(懿敬王)이 되었다가 5년 뒤 대왕으로 추숭되고 명나라로부터 정식 시호를 받았으며 같은 해 덕종(德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차남인 성종은 태어난지 2달만에 아버지 의경세자를 여의여서 얼굴을 본 적이 없었지만, 평소에 아버지를 굉장히 그리워하고 사모했다고 한다. 성종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의경세자의 초상화를 처음 봤는데 이 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초상화를 그린 화원 최경에게 높은 벼슬을 제수하라고 명할 정도로 자신의 친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성종은 법적으로는 작은아버지 예종의 양자로 입적해 즉위하였지만,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위해서 왕으로 추존하고 결국 종묘에 봉안까지 하게 된다. 이 과정은 7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신하들의 반대 상소도 빗발쳤으나 성종의 확고한 의지로 밀어붙여서 일을 성사시킨다. 의경세자의 묘호를 정할 때 의정부와 6조의 참판 이상의 모든 고관들이 모여 장종(章宗)·효종(孝宗)·안종(安宗)으로 묘호를 올렸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성종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獻宗)으로 올리니 생전에 덕망과 인덕이 높았던 것을 고려해서 비로소 '덕종(德宗)'으로 정하고 왕으로 추존된다. 조선에서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은 왕세자가 임금으로 추존된 최초의 사례이다. 능은 경릉(敬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西五陵, 사적 제198호) 경내에 있다.
3. 가계도
4. 기타
- 할아버지 세종 재위기에 원손 및 세손은 큰아버지 문종의 독자인 단종이었지만 당시 도원군이었던 의경세자가 세종의 손자 중에서 맏이였다. 사촌지간인 의경세자와 단종은 3살 터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의경세자의 아버지 세조도 큰아버지 문종과 3살 터울의 형제지간이다.
- 단종을 몰아낸 것도 모자라서 살해한 것에 대한 업보로 세조의 형수(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저주를 내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야사에서는 이에 더해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를 향해 침을 뱉었고, 그 때문에 아버지 세조가 침이 뱉은 자리에 피부병(한센병)이 발병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숙주의 아내가 사육신을 배반한 신숙주를 부끄러이 여겨서 자결했다는 야사와 더불어 가장 많이 퍼진 야사. 그런데 실제로 의경세자는 단종이 죽기 1달 전에 죽었다. 신숙주의 아내도 사육신 사건이 터지기 전에 죽었다. 정사에 따르면 신숙주가 명나라 사절로 떠났을 때 수양대군이 "그대의 공로에 깊은 감사를 표하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대의 부인이 병으로 작고했소."란 편지를 직접 보냈다 한다.
- 왕위찬탈을 위해 아버지와 형이 임명한 고명대신들을 죽이고 형의 무덤을 파헤치고 조카까지 죽인 업보를 받았는지 덕종뿐만 아니라 아우 예종도 19세에 죽어 세조의 적자는 모두 같은 나이에 요절했다.[18] 또한 세조의 손자녀들인 월산대군(35세)과 성종(38세), 명숙공주(28세)도 그다지 오래 살지 못했다. 제안대군만이 오래 살며 부인과 해로했으나 대신 슬하에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제안대군은 육순에 도달한 나이에 사망) 이 때문인지 성종~연산군 시대에는 왕실에 유난히 '젊은 과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5. 대중매체
[1] 율리우스력 10월 3일.[A] 율리우스력 9월 7일.[B] 율리우스력 9월 20일.[A] [B] [6] 배우자가 각종 드라마에서도 그 유명한 인수대비이다.[C] 군호는 강원도 정선의 옛 지명인 도원군(桃源郡)에서 따왔다.[8] 굵은 글씨는 1475년 성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9] 동생이 아니다. 덕종의 아버지 세조는 단종의 아버지 문종보다 3살 어리지만 덕종(의경세자)이 단종보다 3살이 많다.[C] [11] 세자를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다. 보통 명망이 있는 신하들을 기용하고 세자의 스승이 되어 세자의 공부와 그 공부에 대한 평가를 한다. 그리고 이 신하들은 보통 종3품~정2품의 당상관으로 임명된다.[12] 세조의 증조할머니이자,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의 능[13] 본인의 시가 아니다. 이 시는 芍药開花憶牡丹(작약이 피니 모란을 떠올리다)이란 제목으로 북송의 왕우칭이라는 인물이 지은 시다. 실록에서도 "書古詩", 고시를 (베껴)썼다고 했지, 지은(作)것은 아니다.[14] 추후에 성종이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종묘에 봉안하려고 할 때 반대파에 맞서서 성종의 편이 되어주고 추존이 성사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15] 시호 '의경'은 아버지 세조가 직접 내린 것으로 '온화하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의(懿)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경계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는 의미이다.[16] 이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세조가 풍수지리에 있어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묘자리를 알아보는데도 관여한 바 있었다.[17] 박원종의 누나, 장경왕후의 이모이다.[18] 단, 서자들인 덕원군과 창원군은 무난히 20대를 넘기며 오래 살았다. 특히 덕원군은 세조의 적·서자를 포함한 4남 1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50세까지 살면서 가장 장수했다.[19]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와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2번이나 김종서 역할을 맡으면서 유동근의 얼굴을 한 수양대군에게도 당하고 김영철의 얼굴을 한 수양대군에게도 당하며 2번이나 의경세자의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죽임당한다.[20]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의경세자의 숙부인 안평대군 역.[21] 여기서는 성종도 연기해서 1인 2역.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소현세자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