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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00:12

그리스도론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이 문서는 가톨릭 교회의 그리스도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1. 개요
1.1. 출발점1.2. 목적1.3. 장소1.4. 주체
1.4.1. 교회 (칼 바르트의 견해)1.4.2. 믿음1.4.3. 기도1.4.4. 기법
1.5. 방법론
1.5.1. 상승적 그리스도론1.5.2. 하강적 그리스도론
1.6. 그리스도론의 내용 구분1.7. 그리스도론의 우선적 목적들
1.7.1. 성자가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갖는 고유한 관계1.7.2.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성부와 누리는 일치1.7.3.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맺는 관계1.7.4. 그리스도와 실재의 의미1.7.5. 그리스도와 악
1.8. 현대에 당면한 다양한 어려움
1.8.1. 사실에서 신앙으로1.8.2. 연속성의 문제1.8.3. 하느님의 현존을 간직한 교회1.8.4. 믿음의 단일함과 다원주의1.8.5. 그리스도와 타 종교들 간의 관계
1.9. 그리스도론에 대한 접근1.10. 정의
2. 성경의 그리스도론
2.1. 하느님 나라의 선포
2.1.1. 세례자 요한2.1.2. 예수의 세례2.1.3. 예수의 새로움2.1.4. 결정적 사건2.1.5. 구약의 약속들과 희망들2.1.6. 바실레이아2.1.7. 도래한, 도래하고 있는, 도래할 왕국2.1.8. 하느님 나라의 신학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내용2.1.9. 하느님 나라의 수취인들2.1.10. 진복팔단(眞福八端)2.1.11. 결론
2.2. 기적들
2.2.1. 치유와 구마2.2.2. 기적, 이적, 표징2.2.3. 기적들이 자리한 생생한 맥락2.2.4. 근본적인 문제들2.2.5. 신약에 있어서 기적의 다양한 의미2.2.6. 결론
2.3. 권위에 대한 주장과 정체성에 대한 칭호들
2.3.1. 암묵적 그리스도론
2.3.1.1. 예수의 권위와 자유2.3.1.2. 자기 승인2.3.1.3. 거룩한 제도들과의 관계2.3.1.4.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태도2.3.1.5. 하느님과의 관계
2.3.2. 명시적 그리스도론
2.3.2.1. 예수와 사도들 간의 관계2.3.2.2. 스승에 대한 칭호
2.3.3. 하느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예수
2.4. 죽음 직전 예수의 자의식
2.4.1. 갈릴래아의 위기2.4.2. 성전 입성2.4.3. 백성들과의 대면2.4.4. 최후의 만찬
2.4.4.1. 역사적 틀2.4.4.2. 사화들2.4.4.3. 행위와 말씀2.4.4.4. 의미
2.5. 예수의 죽음
2.5.1. 문제의 맥락2.5.2. 이야기의 원천들2.5.3. 삶과 죽음 사이의 연결
2.5.3.1. 불트만의 견해2.5.3.2. 쉬르만의 견해
2.5.4. 사건으로서의 죽음2.5.5. 십자가에 못 박힘이라는 죽음 형태2.5.6. 단죄와 죽음에 대한 책임2.5.7. 예수의 죽음의 의미2.5.8.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 강독2.5.9.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또 다른 해석들
2.6. 부활 기원의 사실들
2.6.1. 원천, 사실들과 표징들
2.6.1.1. 부활하신 분의 발현들: 1코린 15장2.6.1.2. 빈 무덤
2.6.2. 부활: 역사, 호교, 신학
2.7. 부활의 맥락, 어휘, 내용
2.7.1. 부활의 맥락: 종말적, 묵시적2.7.2. 부활의 어휘: 상징적 자리들2.7.3. 부활의 내용
2.7.3.1. 신학적 내용2.7.3.2. 그리스도론적 내용2.7.3.3. 사도적 내용2.7.3.4. 구원론적 내용2.7.3.5. 종말론적 내용2.7.3.6. 교회론적 내용
2.8.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접근
2.8.1. 교회 내에서부터
2.8.1.1. 성찬례2.8.1.2. 따름2.8.1.3. 실존적 그리스도인들
2.8.2. 인간의 근본 체험들로부터
2.8.2.1. 초월적인 길: 희망2.8.2.2. 인격적인 길: 사랑2.8.2.3. 역사적인 길: 정의
2.8.3. 부활: 인간의 생각과 열망을 넘어서는 하느님 사건과 신비
2.9. 성부의 계시자, 성령을 주시는 분, 교회를 일으키시는 분
2.9.1. 성령, 메시아, 성자2.9.2. 성령에 의해 자극되어 변모된 분이자 성령을 전파하는 분2.9.3. 파스카에서 삼위일체로
2.10.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이고 보편적인 특징
2.10.1. 종말론적 최후와 구원적 보편성2.10.2. 하늘에 오름, 지옥에 내려감, 영광과 심판 속에서 역사의 최종 완성
3. 교부 시대, 그리스도론적 공의회들
3.1. 역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3.1.1. 근원에 대한 전수3.1.2. 사도 계승과 교회적 중개3.1.3. 그리스도의 삼중적인 몸과 세상에서의 현존3.1.4. 그리스도를 전수하는 네 가지 형태3.1.5.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발전의 요인들3.1.6.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현존과 세상 안에서 그분의 현존
3.2. 신약 성경에서 2세기까지
3.2.1. 그리스도론의 초기 문화적 맥락3.2.2. 신약 성경에 있어서 두 개의 근본적 그리스도론3.2.3. 근본 문제들: 테올로기아와 오이코노미아3.2.4. 양자론, 양태론, 종속론3.2.5. 예언적, 천사적, 성령론적3.2.6. 안티오키아의 이냐티우스3.2.7. 유스티누스3.2.8. 사르데스의 멜리톤3.2.9. 이레네우스3.2.10. 테르툴리아누스3.2.11. 오리게네스3.2.12. 에비온주의3.2.13. 마르키온주의3.2.14. 가현설 / 영지주의
3.3. 4세기 신학의 그리스도론과 성령론
3.3.1. 콘스탄티누스의 교회3.3.2. 아리우스3.3.3. 니케아의 그리스도론3.3.4. 니케아의 영속적 의미3.3.5. 아리우스주의와 신학의 언사3.3.6. 아폴리나리스3.3.7. 아타나시우스3.3.8.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3.9. 삼위일체의 신비와 성령론의 빛 아래서

1. 개요

그리스도론 / Christology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16장 16절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본성(nature)과 사역(work)에 대해 다루는 기독교 신학의 한 분야이다.[1]

신학적으로 들어가면, 예수의 개인적인 생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전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선포하는 보편적 진리[2]에 대한 해명을 통해 예수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에 대해 설명하고 그 고백의 근거를 밝히는 신학 분야이다.

그리스도론이 다루는 대상은 총 3가지 인데, 첫 번째 대상은 예수로서, 이 고유한 이름이 가리키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다룬다. 두 번째 대상은 메시아로서,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구세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이룬 역할에 대해 다룬다. 세 번째 대상은 성자[3]로서, 그리스도론은 예수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해 주는 두 위격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다룬다.

유대교인들의 신앙이 야훼[4]를 향하듯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지향하는 대상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서 그에게 의지하여 그의 방식에 따라 믿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 점이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구별해주는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예언주의와 지혜의 형태를 구현했으며, 기도하는 사람, 신뢰와 순명, 친밀하고도 기쁨 가득한 태도를 갖는 가운데 자신을 구약 성경과의 연속선상에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예수가 하느님과 가졌던 관계는 새롭고 유일했다. 예수는 이미 하느님을 알고 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말하는 자의 권위에 힘입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예수에게 신앙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와 당시 종교적 상황 사이의 단절, 그리고 당대 이스라엘인들 편에서 그를 거부한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강한 인격적 태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훗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성자의 고유한 아들 됨이자 동일본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지닌 이런 고유한 신적 아들 됨에 대해 신앙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말한다.

1.1. 출발점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이자 지속적인 기준점은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역사다. 그리스도의 역사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는 가운데 그가 전한 메시지와 이룬 행적 그리고 그의 운명, 사람들의 결정을 수용한 그의 태도를 포함한다. 여기서 "예수의 운명"이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삶의 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외부에서 강제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존재와 자유를 선사하고 내면에서부터 인도한다. 즉, 외부에서 인간에게 오는 모든 것은 그에 대해 인간이 제시하는 응답과의 연관 아래서 내면에서부터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운명 지으며" 그리스도는 이러한 성부의 "파견/위임"을 받아들이고 응답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규정한 상황의 틀 안에서 성부가 맡긴 사명을 구현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실재, 즉 현세적 실재와 영원한 실재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구성한다. 그리스도는 인간 조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가르침,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론이 다루는 우선적인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역사에는 외적인 차원내적인 차원이 있다. 먼저 인간은 외적 측면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된다. 반면, 자신을 드러내는 자기 계시라는 내적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리스도론은 역사이자 역사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바로 그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신학의 한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개인적인 의식을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삼는 데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1.2. 목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라는 실재를 파악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자연스럽게 이런 작업에는 하느님, 인간, 세계에 대한 이해가 어우러져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의 영원한 성자로 제시된다. 성자는 강생[5]하여 성부와 성령을 계시하며 두 위격을 인간의 역사 안에서 견인한다.

그리스 교부들은 그리스도론이 다루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2가지 용어를 사용했다. 테올로기아[6]오이코노미아[7]가 그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에게 맡겨진 인류 구원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운명은 우리 인간의 운명을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의 저작 <교회사>[8]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하고자 하는 담화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오이코노미아, 테올로기아와 함께 시작된다. 사실, 교회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오이코노미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오이코노미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성하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적인 삶'이라는 지평에 두었으며 그의 역사를 성부, 성령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느님의 역사'로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느님, 즉 성부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인류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변화 - 테올로기아 - 이자 인간이 시간 가운데 이루는 변화 - 오이코노미아 - 이다. 만일 이 점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단순히 유대인들이 저지른 일련의 사건 또는 일반적인 신화 정도로 축소되고 만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가 성부, 성령과 맺는 영원한 관계, 그가 성부로부터 위임받은 구원 사명, 일정한 시간과 장소 안에서 그가 취한 현세적인 조건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다음의 3가지 요소는 불가분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 두 번째, "나를 위해 계신 그리스도". 세 번째, "당시 그곳에 계셨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원적인 사명을 위해 강생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드러났으며, 이러한 그의 사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역사에 자신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류를 삼위일체의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 널리 전해 주고, 그들 안에 내면화한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자 동시에 "나를 위해 계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중세기 말에 있었던 그리스도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왜곡과 축소에 직면해서, 개신교는 "나를 위한 그리스도", 즉 예수는 형이상학적인 수수께끼이기 전에 먼저 인간을 위한 복음 그 자체라는 사실을 회복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드러난다: "나의 예수", "나의 구속주", "나의 의로움". 이는 그리스도가 베푼 호의를 깨닫고 삶 속에서 그것을 구현하려는 원의가 강하게 드러난다.

강생한 성자의 인격은 구원의 가능성을 위한 바탕이 된다. 사실, 인간 구원의 요체는 사랑으로 계시되고 사람들이 맞아들인 하느님, 인간을 화해시키고 성화[9]시키는 바로 그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구원이고, 구원은 하느님에게 달려있다. 인간 존재가 지닌 원의는 자신이 지닌 획득 능력과 불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가 지닌 수용하기 위한 요청은 자신의 능동적인 잠재적 능력과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만이 그런 인간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체적인 창조된 인성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바라는 상태를 선취[10]하며, 새로운 인류의 근원적 원형[11]이 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최종적인 아담이며 생기 가득한 영이고 부활한 인류의 맏물이다.

1.3. 장소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그를 알려주는 가까운 장소는 무엇일까? 인간은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 말해주는 여러 작품과 유적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무엇보다도 그를 구속주로 전해 주는 사람들, 즉 교회 안에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단순히 역사를 통해 지속된 게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를 살아있는 분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통해 지속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믿는 이들의 증언과 삶을 통해 전해졌는데, 이는 단순히 가르침이나 모법이 양적인 차원에서 많이 전수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기준점을 바탕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총체적인 신앙이 옮겨 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발생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 각각의 새로운 신자와 더불어 탄생한다. 하느님은 믿음과 세례를 통해 인간 안에 새로운 실재를 만든다. 세례받은 각각의 신자는 신앙의 역사에 있어 새로운 출발점이며 그 편에서 절대적인 시작이 된다.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활동하고, 그로부터 출발해서 신자 각각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앞서 있었던 모든 신자들을 잇는 상속자이며 이와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 면전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자신이 절대적인 시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교회는 외적인 증언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현존하는 곳이자 그러한 현존이 공동체적으로 구현되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는 각 개인의 심리적인 회상보다 그리스도가 친히 제정한 공동체적이고, 성사적인 기억이 작용한다. 또한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면화하고 구현하며 널리 전하는 작용 주체로 사도[12]와 성령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교회는 창조된 세계 전체의 구원을 완성해 줄 미래를 지향한다. 전례는 그리스도교를 구성하는 실재들을 현실화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실재들을 대변해준다. 전례가 아니라면, 성경은 공허한 실재에 불과하고 생기도 없으며 효과도 내지 못할 것이다. 또 반면, 성경이 아니라면, 전례는 맹목적인 것이 될 것이며 해석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고 구현되며 숙고되는 정당하고 필수적인 장소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와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데 있어 출발점이자 규범이 되는 기준이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과 궁극적인 기준은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인 기준을 갖게 된다. 하나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중개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직접성이다. 교회가 하는 중개는 발견법적[13], 해석학적[14]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신자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공동체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온 공동체이자[15]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 곳곳에 퍼져서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살아가는 공동체다[16]

1.4. 주체

그리스도론의 주체는 신앙 그 자체다. 즉 그리스도론의 주체는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이 교회는 성령과 동일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다양한 지체로 이루어진 공동체이자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은총과 은사를 통해 강화된다.

오랜 세월을 통해 그리스도론이 견지해 온 단일함과 다양함은 그리스도의 신비 그 자체에 기인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분이자 우주 전체를 화해하는 분이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이해 가능성을 벗어나는 존재다. 그러나 오직 교회의 총체적인 믿음만큼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이해하고 표현 할 수 있다.

교회의 단일함은 성경이 정경으로 통일되는 데 있어 기원이 되었으며 교의를 하나로 모을 수 있게 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믿는 신비가 지닌 단일함과 이 신비를 탐구하고 해명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전망을 통합하는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 주었다. 신학자는 여러 직무와 은사가 동시에 공존하는 교회와 친교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며, 교회 안에는 사도로서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치유의 은사, 조력자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이 있다. 이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하며 그의 몸을 건설하기 위해 질서 지어져 있다.

교회, 믿음, 기도, 기법은 그리스도론을 작업하는 주체와 이 주체가 성찰하고자 하는 대상, 즉 살아 있는 그리스도 간에 실제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이 4가지 차원은 그리스도에게 실제적인 현존을 가능케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를 단순한 개념, 일종의 사물 또는 교의적인 정식이 아닌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하도록 중개하는 분으로 말할 수 있다.

1.4.1. 교회 (칼 바르트의 견해)

칼 바르트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문제가 되는 대상과 활동 영역에 현존하고 익숙한 자만 이 앎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학문의 주체가 교회라는 사실이 그러한 학문의 질과 연관된 교의[17] 개념과 관련해서 어떤 한계나 편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교의가 언급하는 대상과 활동[18]이 위임된 공동체이자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교의의 주체로 여기는 가운데, 교의를 배우든 가르치든, 교의를 다루는 곳은 다름 아닌 교회라는 영역이라고 말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교회 밖에 자리하는 가운데 교의에 대해 다루려는 사람은 교의라는 대상이 자신에게 이질적이라는 점을 즉시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첫걸음을 띤 후 방향을 잃거나 실패의 원인을 대면하게 된다 해도 결코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교의에 있어서 우리가 다루는 대상과 친밀해야 한다. 이는 제대로 교의에 접근하려면, 교회의 삶과 친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中

1.4.2. 믿음

믿음은 그리스도론을 수행하려는 주체에게 요청된 내적 조건이다. 그것은 그런 연구를 하기 위해 공동체로 하여금 공식적으로 수용하도록 법률적으로 강제하거나 위탁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지성'[19]과 그리스도의 '성령'[20]이라는 선물을 통해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와 객관적으로 일치하게 해 준다. 이와 더불어 믿음은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에게 속한다.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지성에 빛을 더해 주며 의지를 강화하고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반면 몇몇 현대 신학자들이 상기한 바 있는 후기 스콜라주의의 명제에 따르면, 믿음이 없어도 신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에 대한 계시를 수용하지 않은 채, 그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믿지도 않은 채, 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하느님을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축소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학은 오직 믿음과 사랑과 희망 가운데 이어지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인식의 결과를 통해 생겨난다.

믿음 없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와 연관된 일련의 사실과 관념, 요청과 제도에 대한 논리적인 일관성을 가리키는 단순한 개념적 구조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확실함과 새로운 객관적 생명을 소유하리라는 점을 보증해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충만이 소유하게 될 실재를 '미리 맛보는 것'을 '믿음'으로 보았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라는 객관적 질문은 이제 다음과 같은 주관적인 열쇠와 함께 우리에게 다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마태 16장 15절

1.4.3. 기도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자 동시에 믿음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이 믿음은 사랑의 말과 대화로 바뀐 믿음을 의미한다. 기도는 신학을 가능케 하는 가까운 조건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그 근간이 성부와의 친교에 있으며 그 친교의 중심이 기도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이 기능을 통해 그분을 성부로 인정하고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유비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의식과 기도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리스도교적인 기도는 다음과 같은 2가지 근본적인 표현을 갖고 있으며 이 둘은 서로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는 전례 거행이다. 성찬례, 또는 예배는 교회의 삶에 있어서 성사적인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자 인간을 위한 모든 은총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인 기억이자 공동체적인 기념으로서의 성찬례, 또는 예배는 각 개별 신자들의 삶 속에서 연장되고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동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각 신자들의 개인 기도에서 이루어진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부터 앙리 드 뤼박, 콩가르, 라너, 발타사르, 디트리히 본회퍼, 라칭거, 쿨만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에 있어서 원천으로 언제나 기도와 전례를 가리켰다.

1.4.4. 기법

그리스도론은 혼(魂)[21]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에 걸맞은 기법도 필요로 한다. 기법은 연구 대상을 이성적인 차원에서 세밀히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식의 총체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실성, 보편성, 구원하는 힘, 신적 조건이 어떻게 해서 상상 가능한 실재인지, 또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고 왜 중요한지 잘 보여 준다. 교회성, 합리성, 동시성은 진정한 신학자가 갖춰야 할 요건이다. 방법론은 대상에 대한 인식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대상을 규정하기도 한다. 모든 실재에 도달하려면 그에 맞는 개별적인 길이 필요하다.

모든 학문이 연구하는 대상에 적합한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론을 갖고 있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 위한 학문적 접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의식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의식 또한 모든 세대에 자신의 고유한 수준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시간 밖에" 있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역사 안에 자리매김한 인간 조건에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하는 가운에,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과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22]

1.5. 방법론

그리스도론을 위한 방법론은 다양하다. 각각의 학자는 그리스도의 역사와 신비가 지닌 개별적인 측면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이를 바탕으로 여타 모든 측면을 비롯해 그러한 측면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후대의 그리스도론은 이미 신약 성경을 통해 제공된 진로를 채택했다. 그것은 상승적 진로하강적 진로를 말한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공적인 등장과 함께 시작되며, 그를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교하는 분, 병자를 치유하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소개하는 가운데 전개되고, 부활과 더불어 끝난다. 마태오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는 연대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구약 성경에 대한 호소와 예수에게 부여한 칭호들에 있어서 동일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 두 복음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 그가 하느님과 더불어 갖는 관계, 무엇보다도 메시아로 등장한는 모습, 부활을 통해 주님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관련한 하느님의 행위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주요 사건 가운데 드러난다: 잉태, 세례, 부활.

그러나 만일 3개의 공관 복음만 있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특별히 호의를 보인 사람, 유대인이었지만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그 본성이 변화되어 신화[23]된 사람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를 비롯한 다른 서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비전을 제시해주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자이자 하느님 영광의 광채로서 하느님의 본질을 보여주는 모상[24]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필립비서로마서하강적이고 강생적 특징을 지닌 그리스도론을 담고 있으며, 이는 복음서에 담긴 여러 사화에 비해 수십 년 앞선다.

이처럼 신약 성경이 지닌 단일함은 이 2가지 그리스도론적인 전망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적 전망에서 그리스도론에 대한 연구는 상승적이며 발생적으로 점진적인 방법론을 강조하며, 그러한 전망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이 방법론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관련된 첫 번째 이론적 표현, 기원이 되는 공동체, 사용된 범주들에 대한 조사로부터 그리스도론은 시작한다. 이 방법론은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관련해서 첫 번째 제자 그룹과 교회가 거쳐 간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이 방법론의 출발점은 '예수의 역사'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역사와 그에 대한 믿음의 역사는 엄연히 다르다. 믿음은 부활과 함께 시작하지만, 예수의 역사는 그보다 30년 전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여러 학자에 따르면, 이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이해를 지향한다. 점진적인 이해 또는 진화적인 이해가 그것이다.

점진적인 이해는 이미 그 기원에 성경의 진술과 교회의 체험이 있다고 주장한다.[25] 이러한 언명[26]과 체험은 후대의 신학적 언명에서 개념적으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남으로써 명료하게 될 실재를 씨앗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다.

반면, 진화적인 이해[27]는 새로운 실재가 고안되었다고 본다. 즉, 유다적인 이해의 지평에서 본 예수-메시아가 그리스의 여러 신비 종교와 접촉함으로써 신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망에서 예수는 믿고 예배를 드려야할 신적 존재, 이교의 여러 신이나 군주들에게 부여하는 일련의 칭호로 불리는 신적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위의 2가지 이해는 상승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해석들이다. 하나는 예수의 역사성을 진지하게 취하는 정당한 이해로, 그의 생애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사실과 그의 부활에 대해 사도들이 견지해 온 희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는 교회의 실제적인 믿음을 그리스의 종교에 기원을 둔 산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망은 예수가 자신에 대해 가졌던 자의식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기원에 관한 공동체 의식과 단절되어 있다.

하강적 그리스도론은 삼위일체의 신비로부터 시작된다. 이 전망의 출발점은 강생에 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은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준비하며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인간의 마음속에 내면화하는 가운데 완성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교부[28]을 비롯해 후대의 토마스 아퀴나스, 칼 바르트, 발타사르는 이러한 하강적 그리스도론을 대표하는 탁월한 대변자들이다.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교부들[29]을 비롯해 후대의 여러 학자 가운데 판넨베르크, 라너는 상승적 그리스도론을 대변한다.

종합하여 정리해보자면, 상승적 그리스도론은 '예수학'으로 축소될 위험을 안고 있으며, 하강적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유다 혈통을 비롯해 그를 둘러싼 가정과 사회 그리고 심리와 관련된 모든 결정적 요소와 더불어 그의 인간적인 삶을 진지하게 반아들이지 않은 채, 초월적 질서의 영역에 머물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이 2가지 범주를 유의하며 상승적 그리스도론과 하강적 그리스도론을 완성할 수 있다.

1.5.1. 상승적 그리스도론

상승적 그리스도론은 유대인인 예수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더불어 사람들을 해방하는 활동을 시작했으며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직면했다. 또한, 그는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들을 통합했으며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를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이론적 메시지와 그에 따라 이루어진 역사 활동에 대한 추인[30] 이후에 일어났다. 그의 죽음은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를 의미한다. 반면, 그의 부활은 그에 대한 하느님의 승인을 의미한다. 상승적 그리스도론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 내포한 구원적 내용과 혁신적 파괴를 조금은 덜 강조한다.

1.5.2. 하강적 그리스도론

하강적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차원에서부터 시작해서 강생의 빛 아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세계에 동화되는 가운데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우리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붙잡아 주며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했다. 또한, 그는 인류의 죽음을 짊어지는 가운데 인류를 죄의 권세로부터 구해냈다. 강생은 신화적인 동시에 구원적인 특징을 갖는다. 사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그를 위해 마련한 목적에 인간이 이르려면, 죄로 인해 부패한 그 본성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강생한 그리스도의 존재 의의가 하느님과 세상 간의 일치라는 점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그의 존재 의의가 거의 "성취되었음"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하강적 그리스도론은 그의 죽음을 오직 죄를 위한 대속이라는 범주 아래에서만 바라보게 하는 유혹으로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그의 부활이 지닌 구원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강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에 보다 더 집중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더욱 일관되고 체계적인 하강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작업[31]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업적이자 수난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생애가 지닌 다양한 신비에 대한 광범위한 진술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1.6. 그리스도론의 내용 구분

그리스도론의 내용은 방법론과 연관되어 나뉜다. 어떤 부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의 2가지 논제를 엄격히 구분하는 분할이 그렇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업적에 관한 것이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론구원론이다. 이러한 용어들이 아니라면,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하느님"이 인간인지 규정하는 점을 다루는 진술에 머물고 말아 버린다. 그게 아니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가 문화, 윤리리, 철학, 종교와 관련해서 새로운 또는 다른 세상에 무엇을 전해 줄 수 있는지 다루는 데 국한되고 말아 버린다. 첫 번째 경우는 그리스도론의 지성주의적인 해석 방식이며, 두 번째 경우는 기능주의적인 해석 방식이다. 그러나 기능주의적인 해석 방식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만 봉사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질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또 2가지 해석 방식 모두, 원초적 핵심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의 선상에서 제시한 그리스도론의 내용에 대한 구분은 상당히 단순하다. 이러한 구분은 여러 공의회의 규범적인 해석과 신학자들의 해설을 바탕으로 성경의 여러 증언을 통해 제시된 것으로,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들 간의 연광성을 심화시키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이 방법론을 따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 바탕이 되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중심 주제, 즉 예수의 역사, 예수의 인격, 예수의 사명을 분명히 제시하고자 해야 한다.

1.7. 그리스도론의 우선적 목적들

그리스도론 분야에는 도달해야 할 본질적이고도 영속적인 목적들 또는 과제들이 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여타 모든 주제에 빛을 전해 준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모든 세대가 지닌 독특한 감수성, 새로운 문화적 지평, 상이한 역사적 맥락과 연관된 목적들도 있다. 하느님의 신비나 그리스도의 신비는 언제나 모두 독특한 시각 아래 감지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그러한 신비가 간직한 의미를 늘 충만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론이 분명히 해결해야 하는 주된 문제는 대표적으로 아래 5가지가 있다.

1.7.1. 성자가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갖는 고유한 관계

이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성부를 향해 바친 기도, 자녀적인 순명, 사명에 대한 헌신, 성부와 더불어 누린 상호 간의 앎과 사랑 그리고 권위와 판단은 그리스도론을 구성하는 주요 교의 주제와 역사를 잇는 접점들이다. 이에 관한 여러 공의회의 일관된 주장은 예수가 경험한 실재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교회의 의식은 그가 지녔던 역사적인 의식과 연속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유일신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유일신론을 급격히 위격화했다는 점도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성을 통해 하느님의 절대적인 현존을 실현하였으며 성부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확고히 했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주제들, 그리스도의 신성, 동일 본질, 선재와 같은 주제들이 해명된다.

1.7.2.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성부와 누리는 일치

예수의 역사는 세례를 받던 순간, 성부 하느님이 그를 메시아로 지명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는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예언자로 인정받았고, 결국에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성부에게 봉헌하며 사명을 완수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과 성령의 활동 그리고 성자의 희생 가운데 드러나는 성부의 개입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몇몇 학자들은 소위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적 신학[32]의 틀 안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자기실현과 그리스도의 죽음 사이의 연관성을 규명하려 했다. 또한, 같은 선상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역할과 영원불변한 하느님이 고통을 받았다는 점도 부각시키려 했다.

반면, 어떤 학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조성되었으며" 역사는 하느님 존재의 일부를 구성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망은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현재의 일부 신학적 성찰은 영지주의로 기우는 듯이 보인다.

1.7.3.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맺는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보편적인 구원에 대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운명이 모든 사람의 결정과는 독립적으로 그러한 결정에 앞서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에 앞서 그의 자유를 결정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운명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운명에 깊이 어우러져 들어간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도론에서는 '단체적 인격성'과 '대리'라는 개념에 호소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결코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언제나 목적으로 존중받아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대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주체의 자주성에 초점이 맞춰진 이런 인간학적 개념을 그리스도에 의해 이룩된 보편적 구원의 의미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학적 노선 주위에는 '이타성', '대리', 타인에 대한 '책임'같은 개념에 바탕을 둔, 그리고 '관계 안의 존재', 이웃을 '책임진 존재'라는 개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인간학적 노선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지닌 이런 구조적인 요청을 최고로 실현하였다. 이러한 전망에 따르면, 우리는 형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으로 간주된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가진 이웃에 대한 관계는 "~반대하는 실존"이 아니라 "~을 향한 실존"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의 성공이나 자주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며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림으로써 그 생명을 구원받는 새로운 사람이다.

1.7.4. 그리스도와 실재의 의미

그리스도론은 역사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중심에는 예수의 구체적인 모습이 자리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야기를 통해 제시되고 설화적이며 해석학적인 그리스도론에 의해 해명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실현되는 모든 질서, 즉 하느님, 우주, 인류, 이웃, 미래, 존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미가 드러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인간에게 실제적이고 복합적인 구원을 이뤄내는 이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론이 여전히 유효하려면 신학, 인간학, 형이상학을 포함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

1.7.5. 그리스도와 악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는 모든 종류의 악(惡), 즉 육체적, 도덕적, 사회적 악을 모두 접했다. 병자들을 치유하고 죄인들을 자비로 대하는 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당시의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해서 보인 행동이었다. 세상 안에 있는 악, 근본적인 악, 개인적인 소외, 사회적인 소외, 폭력, 극단적인 고독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런 배경 아래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통해 자신의 피조적[33] 조건을 받아들이고 자기 존재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했다.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충만히 행사했으며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자신의 아들 됨을 실현했다. 또한, 자신의 생명을 인류를 위한 중재 기도로 봉헌하는 가운데 모든 죄인과 형제적으로 연대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최고의 힘으로 계시하는 가운데 죽음을 향해 자신의 자유를 내어놓고 성령이 인간 내면에 선사하는 선물과 함께 죄와 죽음을 극복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기쁘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자유롭게 하는 실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실존의 부정적인 측면(악)을 넘어서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대면해야 한다. 그가 전한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생명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악, 죄, 인간의 부족함과의 연관 속에서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선사한 충만함과의 연관 속에서 보게 해 준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가장 본질적인 요소다. 악의 실체가 드러난 것과 죄에 대한 승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서 유래하는 결과다. 그러므로 악과 죄 그리고 죽음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인 부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근본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8. 현대에 당면한 다양한 어려움

오늘날 그리스도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1.8.1. 사실에서 신앙으로

"역사적 형태로 이루어진 우연적인 진리는 결코 이성적 형태로 된 필연적 진리를 입증할 증거가 되지 못한다. (⋯) 바로 이 점이 내가 가능한 한 있는 힘을 다해 시도해 봤지만 넘어서지 못하는 저주받은 구덩이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Writings> 中
레싱은 사실에서 신앙으로, 나자렛 사람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역사에서 교의로 넘어가는 것이 큰 어려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있어 온 어려움이며,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간은 초월과 역사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 '인간 존재 구조'를 받아들일 때에만 하느님이 이 세상에 드러낸 당신에 대한 계시와 현존의 표징들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역사에서 출발해서 신앙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역사 안에 선사한 당신 자신에 대한 다양한 표징 속에서 그분에 대한 계시를 읽어내야 한다.

1.8.2. 연속성의 문제

초세기의 여러 공의회가 정식화한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정의들과 신앙에 관한 초기 증언들 간에 과연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신앙에 관한 초기 증언들은 구원을 사건으로 묘사하며 그리스도를 구원 역할과 더불어 제시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적, 신적 본질에 대한 언명들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에 대한 묘사는 정의로, 사건에서 존재로, 이야기에서 논증으로 가야 할 필요에 직면했다. 결국 교회는 광범위한 차원에서 개념을 전이시키거나 메시지를 새로운 그릇에 담는 작업을 하게 됐다. 이 2가지 문화[34] 사이의 연속성을 입증하고 이러한 이행 과정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밝히는 것은 난해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일이다. 또 이러한 작업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서 복음이 간직한 진리를 보존할 수도 있다.

개념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성경의 여러 자료와 공의회의 정의들 간의 동질성은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실재를 아는 사람은 이 둘이 서로 깊이 일치한다는 사실, 두 문화가 제시한 분이 유일하고도 동일한 그리스도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1.8.3. 하느님의 현존을 간직한 교회

교회 없이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은 있을 수 없고, 구속력 있는 사도적 권위[35] 없이 그리스도교의 교회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교회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자유로부터 탄생한 열린 공동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각 개인의 위치를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갖는 권위와 연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율법에 직면해서 그리스도가 선포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획득해야 할 마지막 보루라고 여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그리스도의 법'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인격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몇몇 텍스트나, 일부 공의회의 결정 사항만 선호하면서 그리스도론을 구성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실재가 본래와 다르게 전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선사받은 것이다. 일정한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결정과 활동 그리고 그분의 말씀과 구체적인 요청들은 인간의 자유에 있어 절대적인 한계를 대변한다. 구체적이면서도 특별한 이 진리에 머무는 것, 심지어 그와 관련된 여러 정식에 충실한 것은 우리에 앞서 우리 밖에서부터 선사되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설정한 게 아니라 하느님이 선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도로부터 교회에 전수되어 온 구원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함께 구성하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으며, 그의 권위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해석된다. 하느님의 선물이자 빛인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진리에 대면해서 갖는 태도를 식별하고 심판하는 기준이 된다.

1.8.4. 믿음의 단일함과 다원주의

신약 성경 27권 중, 그리스도에 관한 유일한 복음서는 4권이다. 이를 고려해 볼 때, 상황은 변증법적이며, 이 모든 것은 유일한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단일함은 바로 그리스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획일적인 단일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들이 서로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 즉 다양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전망에서는 그리스도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모델 또는 패러다임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직 한 분의 그리스도만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가 이기주의와 불순명을 위한 빌미가 돼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복음에 더욱 잘 응답하고 형제들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1.8.5. 그리스도와 타 종교들 간의 관계

그리스도와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간의 관계에 대한 해답은 3가지 노선에서 접근되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노선인 구원적 다원주의는 신약 성경의 여러 본문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와의 관계가 배제된 그리스도에 대한 흔적, 강생한 말씀[36]으로부터 분리된 강생하지 않은 말씀의 활동에 대한 흔적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1.9. 그리스도론에 대한 접근

그리스도론과 관련해서 오늘날의 가톨릭적인 성찰은 다음 3가지로 드러난다: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인의 체험, 그리스도론과 사회적 실천, 그리스도론과 학문적 근거.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에게 접근할 수 있는 상이한 방식 또는 관심도 드러난다.

1.10. 정의

그리스도론은 신자들이 공동체 내에서 역사적인 합리성과 학문적 방법을 통해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이다. 그리고 이 선상에서 그리스도를 인류가 몸담고 사는 구원적 또는 비구원적 상황과 연관 짓는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상황의 중심에서 자신을 구원의 복음으로 선포했으며, 보편적인 진리의 성격을 갖는 로고스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역사 안에 존재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과제가 있다.

그리스도론은 자신의 한계와 과제들, 하느님의 신비에 직면한 인간 이성의 경계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역사의 경계를 넘어 오지만, 결코 어떤 학문이나 증명으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자유가 직면한 경계, 또한 인간 예수의 자유가 직면한 경계를 직시해야 한다.

2. 성경의 그리스도론

2.1. 하느님 나라의 선포

2.1.1. 세례자 요한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에 처음으로 자신을 공적인 차원에서 드러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러한 정화 예식은 당시 여러 종교를 비롯해 이스라엘의 신앙 실천에 통상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근본주의적 노선을 실천하고,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시행되던 종교 활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정화를 위한 욕조를 크게 늘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실천하던 세례는 새로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윤리적인 예식주의에서 마음의 회개를 향한 전이를 의미했으며,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을 향한 호소이기도 했다.

예수는 세례를 받는 가운데 요한의 염려와 권고를 함께 나누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요르단강에서의 이 사건 이외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개인적 관계가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 간에 부정할 수 없는 관계가 있었고,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무관심도 있었다는 정도만을 알 수 있다.

2.1.2. 예수의 세례

예수의 세례[37]는 구원 사건을 암시하는 상징과 음성을 유도하는 가운데 구약 성경의 신현[38]을 상기하는 용어들과 함께 묘사되었다. 공관 복음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버전들은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거나 공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이 예수로 하여금 성부에게 내적으로 순응하게 해 준 반면, 하늘에서 울린 성부의 음성은 군중 앞에서 그를 확증해 준 것이다.

성령은 세례, 도유와 함께 인간 예수의 메시아적인 형성과 그에 대한 자격 부여를 점진적으로 시작했다.[39] 또한 성령의 도유는 교부들의 그리스도론에서 열쇠가 되는 중심 주제였지만, 4세기를 기점으로 예수에 대한 양자[40] 입양적 이해의 위험에 직면하며 포기되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 도유된 자라는 것은 하느님이 그의 인성을 형성하고 그의 의식을 비추며 의지를 강하게 해 주고, 그가 받은 사명을 실현할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해 준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관 복음과 달리 요한 복음서는 처음부터 성령의 작용과 머무름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 편에서 성령의 파견에 대해 강조했다.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서가 각각 강조하는 측면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릴 수 있다.

2.1.3. 예수의 새로움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 중심 주제이자 새로운 측면은 인간의 역사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념은 예수의 설교 전체를 특징지으며, 그가 행하거나 그에게 벌어진 모든 사건 사이를 연결하는 개념으로 드러난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구원 역사의 한 국면에 종지부를 찍으며 또 다른 국면을 시작하게 해 준다. 그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활동이 유효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 된 것이다.

2.1.4. 결정적 사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들은 청취자들은 이제 결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은총의 때이지만, 동시에 모험의 때이기도 하다. 또한 그 순간에 있는 것은 큰 특전이다. 그 순간이 하느님 계획의 정점이자 약속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예수는 사람들에게 2가지 요청을 드러낸다. 기뻐하는 것, 그리고 회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을 선물로 받는 모든 특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게 될 위험을 수반한다. 따라서 극단적인 제공은 그 자체로 극단적인 위기 또한 수반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인간에 대한 심판을 동반한다.

2.1.5. 구약의 약속들과 희망들

하느님 나라가 점진적, 종말적으로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기쁜 소식은 계약의 주체인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와 기대 그리고 각 개인의 내면을 암시하는 굵직한 비유를 통해 표현된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에서 미래를 위한 약속으로 선포된 모든 것이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실현됐다고 전한다.

하느님은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준다. 마르코마태오는 예수가 전한 메시지의 초점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맞췄던 데 반해, 루카는 예수의 위에 머무는 성령의 선물에 초점을 맞췄다.

2.1.6. 바실레이아

그리스어 표현인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바실레이아 투 테우)는 '하느님의 나라'로 번역되며, 여기서 '바실레이아'라는 용어는 다양한 번역이 허용된다. 왕으로서의 하느님의 자격 또는 왕으로서의 위엄, 수하들에 대한 왕권 또는 통치권의 행사, 왕권이 행사되는 환경 또는 왕국. 역동적이고 공간적인 이 2가지 측면은 예수의 설교에 담겨 있으며 여러 비유를 통해 묘사되고 있다. 위의 3가지 의미 가운데 근본적인 것은 두 번째인 통치권이다.

예수가 전한 통치권 행사의 내용은 세례자 요한과 달리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무조건적인 제공에 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와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며, 커다란 특전과 행운으로 체험된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 나라는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2.1.7. 도래한, 도래하고 있는, 도래할 왕국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서의 정식들은 그 나라가 시간과 갖는 관계를 정확히 규정함에 있어 불규칙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는 2가지 핵심적인 동사가 있다. ἤγγικεν[41], 그리고 ἔφθασεν[42]이 그것이다. 첫 번째 동사는 근접성, 즉각성을 가리키는 데 반해, 두 번째 동사는 갑작스런 도착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2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이미 실현된 사건으로, 따라서 역사 내에 현존하는 사건이라는 해석(실현된 종말론), 그리고 예수 역시 일부분에 불과한 개방된 계획으로, 그를 훨씬 넘어서는 계획이라는 해석(실현 중에 있는 종말론). 왜냐하면 그 왕국에는 그리스도의 미래 공동체가 포함되어 있으며 우주 전체를 향해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루돌프 불트만의 견해대로, 하느님 나라는 수용을 요청하는 말 속에 담겨 있는 개인적인 호소로, 결단을 요구하며 개인을 신앙 앞에 또는 그에 대한 거부 앞에 두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실존적 종말론). 또 아니면 하느님 나라는 예수가 염두에 두었던, 그러나 자신의 실패와 더불어 사라져버린 곧 있게 될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선포였을지도 모른다(후속적 종말론)[43].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에 대한 표징들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 충만한 실재는 나중에서야 감지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전의 모든 역사는 미래의 충만함을 지향해 온 것이다. 그래서 풀러[44]예기적(豫期的) 종말론에 대해 말했다. 또한 플로롭스키[45]와 헌터[46]시작된 종말론에 대해 말했다. 카라구니스[47] 같은 경우에는 잠재적 종말론에 대해 말했다.[48]

이런 상이한 해석들은 예수의 신비에 있어서 결정적이지만 아직은 최종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실재가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정향되어 있으며 그 미래와 더불어 추인되고 완성될 것을 고대한다. 복음 사가들은 종말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광채가 이미 기적을 통해 선취되었고, 예수의 부활에서 실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요청받는다. 창조된 세계 전체가 하느님 자녀의 영광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과 구원된 인류 전체를 성부에게 내어드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는 충만하게 실현될 것이다.

2.1.8. 하느님 나라의 신학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내용

하느님 나라의 실제적인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예수는 그것을 분명히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설교, 기적, 관계, 우정과 더불어 그 나라를 실현해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내용은 3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신학적 내용, 종말론적 내용, 구원론적 내용.

우선 '하느님 나라'라는 이 비유는 각각의 복음 사가들에게 있어 다양한 의미의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마태오에게 있어서 이는 중심적인 관념을 대변한다. 마르코에게 있어서 이 왕국은 성자의 인격 자체를 가리킨다. 반면, 루카에게서는 예수 안에서 인류에게 제공된 커다란 새로움으로서의 영(Spiritus)의 관념이 우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비유의 빛 아래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통해 설명했으며, 그것은 다양한 가능성과 요청들을 가리킨다. 이 모든 것은 베커[49]가 하느님 나라 개념의 '그리스도론화'라고 부른 것을 공고히 해준다. 이는 이미 공관 복음에 있으며 요한에 의해 명시화 되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에게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 내용 역시 하느님이라고 언급하면서 끝맺게 해 준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시간과 연관되어 있으며 인간을 새로운 가능성과 요청 그리고 위험 앞에 놓아둔다. 여기서 핵심적인 측면은 신학적인 새로움으로, 종말론적인 새로움, 인간 마음의 변화, 하느님이 등장한 방식에 따라 삶을 일치시켜야 할 요청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자연의 결과도 아니고 문화의 산물도 아니다. 또한 우주적인 평화의 나라를 말하거나 목적성을 띠는 나라 또는 이미 실현된 유토피아를 말하지도 않는다. 예수가 설교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계획으로부터 유래하는 영적인 과정이지 단순히 인간 의식의 성숙에 의해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완성을 향해 진행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자유를 통합하는 시작된 실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재와 미래, 인간과 하느님, 마음과 사회를 모두 포괄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으며,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다.

하느님이 계시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내어준다는 사실로 인해, 역사는 자신의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충만함에 이르며 은총 선물과 그에 대한 요청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주석학자들은 예수의 설교에서 어떻게 신학과 종말론이 연관되는지 토론한 바 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하느님에 대한 독자적인 체험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거기서부터 역사를 향한 구원의 봉헌이 유래한다고 보았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예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과 자녀적인 호소를 하도록 부추긴 하느님의 긴급한 종말론적 개입에 대해 확신했다. 쉬르만[50], 예레미아스[51], 스힐레벡스[52]는 첫 번째 명제를 제안했으며, 메르클라인[53], 트릴링[54], 쉴로서[55] 같은 경우는 두 전망이 서로 불가분리적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가운데 첫 번째 명제의 색채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라는 실재들은 서로 동일시되지 않지만 서로를 내포하고 있으며, 불가분리적이다.

하느님 나라라는 실재는 예수 안에서 표현되고 주어지며 인격화되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명시적으로 예수와 동일시되지는 않는 불완전하거나 부분적인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교회는 그 세상 안에서 예수가 친히 맡겨 준 임무로 인해 그 나라를 대변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것, 그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와 거리가 먼 실재와 동일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 밖에서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장소, 시간 또는 개념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고, 예수 바깥에 머무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마르 4장 11절

하느님 나라라는 실재는 예수 자신과 교회를 포함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라는 실재를 제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일으켰다. 따라서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최고의 인간적인 희망을 완성시켰으며 부분적으로나마 구원을 선취했다. 이것은 시간적인 발생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회적, 정치적 실존의 형태와 관련 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단지 미래를 향해 언제나 긴장 속에 있는 충만한 실현의 시작이라고 말해야 한다. 역사가 개방되어 있고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한,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도래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1코린 15장 28절

2.1.9. 하느님 나라의 수취인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마태 11장 5절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의 수취인들은 "가난한 이들"이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인간의 개방성, 충만함을 향한 열망은, 인간의 나약함과 허물 그리고 궁핍함에 대한 인정을 넘어,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과 인격에 담긴 구원의 후광을 인식하도록 적합하게 준비해 준다.

예수가 전한 여러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는 우연히 발견한 값진 보물이자 진주로, 수고를 들여 정복해야 할 장소로, 초대받은 잔치로, 받을 만한 상급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언제나 감탄과 감사로 받는 선물이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가 전하는 사랑의 봉헌에 응답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결정적으로 실제적인 존재가 될 때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의 기도와 자녀적인 체험에 참여하는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된다. 인간은 오직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2.1.10. 진복팔단(眞福八端)

진복팔단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 예수의 인격과 동일한 복합성은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작용 방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초상화이자 인간 실존 형태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2.1.11. 결론

예수는 하느님이 은총이자 치유 그리고 역사 안으로 들어왔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이제 하느님은 예수의 인격과 활동 가운데 섭리적이고 사랑 가득한 아버지로 활동하고 계시된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약속과 기다림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가운데 자신의 메시지를 그런 약속과 기다림의 틀 안에 두었다. 그의 생애는 실현되고 있는 비유이며, 예수 자신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비유다.

모든 역사적 상황은 하느님 나라의 사절인 그리스도의 빛 아래 드러나고 해석된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은 그가 구원자이자 구속주임을 알게 된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세상에 대면하여 자녀로서의 자신 지위와 자유 책임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들 안에 하느님을 실현해 준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은총이자 동시에 드라마와 같다. 이제 그리스도 앞에서 죄가 드러나며, 그럼으로써 빛이 어두움을 넘어서게 된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온 빛으로 정의할 때 의도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빛은 심판이다. 하지만 예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 말씀은 인간을 하느님의 충만한 부성으로 인도해 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다면, 그 말씀은 심판이 되며, 인간은 다시금 피조물이라는 무한한 고독 속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은 선포되는 지복, 행복과는 반대로, 단죄하는 심판이 된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요한 12장 48절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요한의 개념, 구원이라는 바오로의 개념과 병행한다. 비록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본질적으로는 종말론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의 업적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구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하느님 나라가 영원한 생명과 구원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시간의 마지막에 경험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믿는 이들이 이미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카라구니스, <Kingdom of God> 中

하느님 나라라는 비유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다음의 3가지 차원을 포괄한다: 과거(예수 안에서 드러남), 현재(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의 여러 성사에 참여하는 가운데 소유하게 되는 담보로서), 미래에 대한 희망(세상을 완성하게 될 충만함으로서).

2.2. 기적들

2.2.1. 치유와 구마

예수의 공적 활동은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고 기적을 행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는 이와 동일한 과제를 사도들에게 위임했으며, 후에 사도들을 통해 교회로 전해지게 된다.

신약 성경은 예수가 이룬 기적 행위를 3가지 용어로 제시했다: 'δυνάμεις(뒤나메이스)[56], τέρατα(테라타)[57], σημεῖα(오에메이아)[58]. 이렇게 해서 다음의 3가지 차원이 분명하게 구분된다.예수의 활동에 지속적으로 동반하는 이 3가지 전망은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으며, 하느님은 이를 통해 예수를 자신이 보낸 이로 보증해준다.

2.2.2. 기적, 이적, 표징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2장 11절

2.2.3. 기적들이 자리한 생생한 맥락

복음서들은 예수의 기적을 총체적으로 소개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기적을 양식화하고 보편화하는 가운데 집약해서 보여 주었다. 반면, 각 개별 기적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복음 사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예수가 이룬 사실들, 했던 말들, 그리고 그의 운명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면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자신이 이룬 기적, 치유, 구마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 것일까?

기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도래했으며, 예수가 모든 사악한 힘을 쫓아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마태 12장 28절
이런 의미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언, 교회와 일치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빙성을 보여 주는 표징으로 기적을 평가했다. 하지만 기적들을 추인하는 요소는 우선적 요소에 비해 부차적이다. 기적을 추인하는 우선적 요소는 기적이 내포한 역동적, 구원적 실재를 사람들에게 통교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구원적 실재인 한에서 예수를 신뢰하게 해 주는 동기가 된다. 기적은 예수 안에서 우리 가운데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가 구현되는 것을 표현하는 가운데 예수를 오셔야 할 바로 그분과 동일시했다. 메시아로서 예수의 정체성, 하느님 나라의 도래, 하느님의 구원을 야기하는 표징들은 유일한 하나의 실재를 구성한다.

2.2.4. 근본적인 문제들

기적들과 관련해서 오늘날 다음의 2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1. 정말 그 기적들이 일어났을까? 2. 그게 가능한 일일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다음 2가지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이룬 기적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가운데 두드러져 드러나는 기적들은 구마와 치유가 있다. 악의 세력과 질병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와 품위에 대한 상실을 최고로 표현한 상황인데, 예수는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 그들의 지배권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예수가 이룬 기적들은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이 이룬 업적과 기적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이 교회의 삶 속에서 이룰 것을 미리 앞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적 사화들은 예수가 어떻게 자신을 신뢰한 사람들의 육체적, 심리적, 영적인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는 질병이나 악마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한 이론을 정식화하지 않았고, 교회 또한 기적에 대한 이론을 명확히 진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의 자비로운 태도와 병자를 치유하기 위한 개입은 그의 치유 능력이 그 인격과 연결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기적들은 개별적인 악들에 대한 승리로서 구체적인 순간과 장소에서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응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늘날의 인간들이 지닌 범주에 따라 복원될 수 없으며, 그 세계에서 직접 우리가 속한 세계로 이전될 수도 없다.

하지만 예수의 치유와 변모시키는 능력은 육체적, 심리적, 종교적 질서에서 계속 작용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치유되고, 재기하며, 자신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라는 최고의 품위와 자유 그리고 형제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우선적인 과제를 회복시켜 준다.

기적은 자연 법칙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은총을 통교하기 위해 이룬 자연 법칙에 대한 의미심장하고 역동적인 확장으로 이해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손 안에 피조물인 이 세상을 맡겼으며, 이 세상은 구체적인 어느 순간에 인간을 위한 계시의 표징이자 은총의 도구로서 창조주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기적은 하느님의 창조적 능력에서, '순종하는 능력'에서, 피조물의 수용 능력에서, 인간이 창조주께 드리는 신뢰에서 유래한다. 기적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지고함에서 유래하는 결실이다.

기적은 통상적인 인간의 삶과 자연의 흐름을 깨는 가운데 이를 갑자기 변화시키는 것으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또는 부르심으로 감지된다. 따라서 기적이 기적으로 인정되려면, 자연의 흐름을 비롯해 인간 문화에서 오는 업적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사건이 되게 해 주는 특별한 조건들이 검증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근본적인 기적[59]은 기원에 따라 그리고 그것이 지닌 보편적인 특징과 영속적인 의미에 따라 그 이후의 가능한 기적들과 구별된다.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은 이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분명하며, 비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증될 수 없거나 그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모든 진리와 의미를 보존할 수 있다. 기적과 사적 계시는 이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 특별한 선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승인할 의무가 없다.

2.2.5. 신약에 있어서 기적의 다양한 의미

신약 성경은 기적의 창시자를 하느님으로 여긴다. 만일 기적이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인간을 향한 선함을 드러내지 않는 사건이라면, 그것이 경탄할 만한 것이라 해도, 진정한 의미의 기적, 즉 하느님의 업적으로 간주될 수 없다.
기적은 예수의 의식과 자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적은 예수의 인격을 실현하는 사건으로 그의 마음을 드러내며 무한한 자비를 보여준다. 하느님이 기적의 원천이라면, 예수는 기적을 구현하는 분이며, 기적은 예수가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임을 입증한다. 사실상 기적과 예수의 인격을 따로 분리해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적의 우선적 목적은 인간을 전율케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가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도록 촉구하며 신적 의식을 통교하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기적은 수취인 자신에게 달려 있는 특별한 과정 속으로 수취인을 인도한다. 구체적인 사람들을 향해 있는 기적들은 모든 시대에 있어 고유하며 그 시대와 조화를 이룬다.
기적은 창조된 존재 안에 신적 권능이 새롭게 쇄도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또 다른 효과들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기적은 자연 법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 자신의 본질적 사명을 보다 잘 완수할 수 있게 해 주는 신적 실재의 증진을 의미한다. 그 사명이란 인간이 더욱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일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은총의 고유한 목적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기적은 하느님 안에서 완성된 인간의 삶이 어떠할지 예견하게 해 주는 섬광과도 같다. 어떤 의미에서 기적은 하느님의 결정적인 자기 통교를 증거하고 그 유효성을 확인하며 이를 앞당겨 실현한다. 또한 기적은 은총과 영광의 표징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적 개입의 결과이므로, 그것은 초본성적인 실재이다.
기적은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보증해 주며 이로써 그를 믿게 해 준다. 기적은 예수의 말씀이 일으키는 효과를 입증해 주며 세상에서 성부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성부로부터 직접 받은 권위에 힘입어 말하고 행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추인해준다.

기적은 인간이 고대해 마지않는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인류를 미리 보여 주는 표징으로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예수의 부활을 통해 미리 충만하게 선포되었다. 부활은 기적을 이해하게 해 주는 또 다른 중요한 해석의 열쇠다. 실제로 부활은 죽음과 질병, 죄로 인해 손상된 인류가 지닌 한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로서의 하느님의 강력한 활동을 절대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미래 인류의 원형이다.

2.2.6. 결론

예수는 기적의 빛 아래에서, 겸손한 의사요, 기적을 행하는 강력한 분이다.

한편으로 기적은 신앙을 전제로 하며 또한 신앙을 요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기적은 신앙을 가능케 하며 신앙을 양육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고 그리스도론이 없는 이른바 '그리스도의 치유'라는 것은 단순한 마술에 불과하며 인간에게 부적절하다. 기적과 신앙은 늘 서로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은 갈릴래아에서 있었던 예수의 시간에 유효했듯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의 시간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기적은 인간을 사로잡고 강요하는 절대적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기적은 그로 하여금 신적 실재를 향해 개방하게 해 주는 무엇이다. 기적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해 주는 매개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를 설교자이자 의사로 제시했으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중심 주제였다.

2.3. 권위에 대한 주장과 정체성에 대한 칭호들

2.3.1. 암묵적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과 사명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2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제시되었다.

우선, 역사 실증주의는 예수의 정체성이 여러 복음서와 사람들이 그에게 부여하는, 또 그 자신이 부여하는 정식과 칭호에 의해 표현된다고 보았다. 이 전망에서 예수의 메시지와 교회의 그리스도론 사이에는 전적인 상응 관계가 있게 된다. 반면, 역사적 회의론은 복음서들을 부활 이후에 교회가 정성을 들여 만든 텍스트로 보았다. 따라서 교회에 의해 제안된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설교와는 불연속적인 관계에 있다. 더 이상 설교하는 주체를 하느님 나라를 설교한 그 주체와 동일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최근 수십 년간 제3의 길이 모색되었는데, 이는 예수의 자의식과 교회가 그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의 연속성을 설정하는 데에 목표를 둔다. 이 전망은 "암묵적 그리스도론" 또는 "간접적 그리스도론", "구현되고 있는 그리스도론", "실현 중인 그리스도론"에 대해 말한다.

예수는 자신에 대해 장엄한 언명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는 명시적으로 신학이나 인간학 또는 그리스도론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위해 하느님을 대면하며 살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부터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받은 사명을 지극히 충실하게 완수했다. 그러므로 그의 인격과 그가 받은 명령에 대한 암묵적 개념은 그가 설교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 기도하고 우정을 맺으며 이웃을 대하는 방식, 미래를 대면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의 빛과 성령의 인도 아래 예수의 자의식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교회는 신약 성경에 담겨 있는 그에 관한 다양한 이름과 칭호들, 그리고 신경에 담긴 다양한 정식과 교의적 정의들을 통해 그러한 예수의 자의식을 표현한다.
2.3.1.1. 예수의 권위와 자유
예수의 공적인 활동을 특징짓는 요소에들에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드러나는 권위와 권력가들, 제도들, 상황들을 대면함에 있어 예수가 지녔던 자유를 들 수 있다. 예수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정당함의 근거, 자기 활동의 바탕, 자기 행동의 기준을 스스로 간직한 인물로 소개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새로움, 권위, 그리고 신용이라는 독특함이 담겨 있다.

예수의 권위는 예수와 공적인 권위자 사이에서 대비되어 드러나는 첫 번째 요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권위의 기원에 대해 해명하는 걸 거부했다. 그가 견지한 이 독특한 입장은 그 시대의 유력한 인물들[60] 그리고 그들의 정당함과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진다. 예수는 그 시대의 전통적인 모습 가운데 그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예언적 소명에 대한 체험이나 랍비로서의 자격 또는 특별한 지혜나 어떤 예외적인 신비 체험에 호소하지 않았다. 예수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남는 모든 것은 오직 그의 인격에 바탕을 둔 그의 자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2.3.1.2. 자기 승인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이 그 자체로 고유한 정당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거기에는 이사야 예언자의 경우처럼 어떤 신현(神顯)에 대한 흔적이나, 어떤 결정적인 내적 체험이 전혀 없다. 예수의 인격적인 권위는 그가 많은 담화를 하는 방식에서 표현된다. 그는 '아멘'이라는 말을 권위를 지닌 정식으로 개방적인 상태에 두었다. 또한 "아멘, 아멘"이라는 중복된 표현이 마태오 복음서에서 30번, 요한 복음서에서 25번, 마르코 복음서에서 13번, 루카 복음서에서 6번 드러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나'라고 하는 강조 표현이 선행하는 가운데 표현 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다." 이 표현은 탈출기에 소개된 야훼의 자기현시, 자기 신원 확인에 대한 반향처럼 드러나고 있다. 쉴리어[61]는 예수의 이런 말씀과 행동 안에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론을 통해 발전하게 될 근원적인 씨앗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2.3.1.3. 거룩한 제도들과의 관계
예수는 유대교의 여러 종교 제도와 관련해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그는 인간적인 전통에 직면해서 하느님의 본래 뜻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외적인 정결 대신 내적 지향의 순수함을 요구했다. 안식일에 관한 논쟁에서는 예수의 이중적인 태도가 강조되어 드러나고 있다.[62]

예수는 성전, 예배와 관련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는 성전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를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의 인격과 사명을 위해 상대화했다. 특히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육신을 새로운 인류를 위한 성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의 측면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다.

예수는 여러 구체적인 상황에서 율법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율법과 단절된 관계를 드러냈다. 어떤 경우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규정을 언급하며 율법을 추인했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반면, 또 다른 경우 그는 새로운 해석과 함께 율법을 변경했다.[63] 또 어떤 경우 그는 대조적이고 변증법적인 극복을 제안하기도 했다.[64]
2.3.1.4.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태도
예수가 세운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가져다주며 이를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의 종교적, 법적 체계에서 소외되고 그 체계 밖에 있는 사람들[65]을 품어 안는다. 예수가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선함과 관대함을 드러내는 인격적인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선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이 가장 소외되고 길 잃은 자녀, 죄인들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태도는 그러한 하느님의 특징적인 모습을 계시한다. 즉, 하느님의 특징적인 모습은 성자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비유는 예수가 계시하려 한 하느님에 대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죄인들과 우정을 맺고 식탁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용서하는 모습 역시 권위가 담긴 행동이자 말씀이며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서로를 내포하는 가운데 예수의 진면목을 해석하게 해 준다.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행동은 우선적으로 신학적이며 구원론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사회적, 윤리적 특징은 부차적으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예수는 결코 죄를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죄인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전해 주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초대하는 가운데 그로 하여금 자신을 대면하게 했다.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태도에는 그의 정체성과 권위에 대한 의식이 동시에 표현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2.3.1.5. 하느님과의 관계
예수는 지상의 삶 동안 하느님과 순명, 충실함, 기도로 특징 지어진 관계를 견지했다. 그는 특히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거나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근본적인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 성부에게 기도했다. 여러 복음서들은 '아빠'[66]라는 아람어로 예수와 성부 간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분위기를 집중적으로 표현했다. 이 용어는 그 이전의 전통에서는 상당히 드물었지만, 이는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예수의 의식에 대한 표현으로 교회 안에 정착되었다. 이는 예수가 성자로서 성부와 갖는 유일한 관계를 추인하는 표현으로, 성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직접적인 관계성을 보여준다. 후대의 그리스도론이 성자와 관련해서 언급하게 될 것은 예수의 기도와 말씀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아빠'는 그리스도론 전체에 있어서,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와 하느님 사이 상호 간의 앎 그리고 하느님을 계시하기 위한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는 행함의 질서가 아닌 존재의 질서에 속하는 범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러 복음서를 통해 증언된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이런 상호 간의 앎과 사랑 그리고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 신학은 '동일본질'(consubstatia)이라는 용어에 호소했다. 이는 성부와 성자 간에 있어 본성의 절대적인 동등함을 의미한다. 오직 하느님과 더불어 존재, 앎, 뜻을 공유하는 자만이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계시하는 이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생명을 공유하는 자, 하느님만이 절대적인 구속주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여러 가지 말이 아니라 사실들을 통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이나 정의에 호소할 필요 없이, 그가 맺는 다양한 관계로부터 출발해서 그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가 사람들과 더불어 맺었던 다양한 관계의 빛 아래 그의 자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맺었던 관계들에 대한 검토는 동시에 신학적이며 역사적인 관심을 간직하고 있다. 즉, 그것은 예수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며, 이와 동시에 왜 그가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 준다.

2.3.2. 명시적 그리스도론

모든 저자들은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 그리고 행동에 담겨 있는 암묵적 그리스도론을 인정함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명시적 그리스도론, 즉 예수 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선언함과 동시에 예언자적이고 메시아적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엄한 주장을 담고 있는 칭호들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명시적 그리스도론을 발견할 수 있는가?
2.3.2.1. 예수와 사도들 간의 관계
만일 예수가 메시아이며 성자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배제한다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공생활을 보내며 살았다는 점을 상상하기 힘들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삶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그들을 향한 메시지가 내포한 분명한 내용과 권위를 요청하며 동시에 그들을 파견한 분과 그에 해당하는 권위에 대한 인식도 요청한다. 제자들을 자신의 협력자로 여긴 예수는 자신의 신비를 전적으로 감추어 둘 수만은 없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 15장 15절

진정한 우정은 운명과 사명 그리고 인격을 공유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을 요청해야 한다. 명시적이라고 한 것은 예수의 인간적 성장이 그리스도론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명시적인 것은 여러 가지 사실들이 그리스도론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지연되고 점진적이라 해도, 예수의 사명과 그의 여정 그리고 사도들이 그의 인격에 통합되는 과정과 연관된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을 요청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수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건과 그러한 자의식을 해석하게 해 주는 그의 말씀들이 기여했다. 행함과 말씀이 배제된 예수에 대한 계시는 입증되지도 완성되지도 않은 채 남을 수밖에 없다. 말씀이 배제된 사실들은 혼자서는 걷어 낼 수 없는 철저한 어둠 속에 잠길 수밖에 없다.
2.3.2.2. 스승에 대한 칭호
그리스도에 관한 칭호들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해야 한다.

예수는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진 칭호들을 사용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그러한 칭호들을 재해석해서 받아들였다. 더욱이, 구약 성경에 제시된 여러 칭호들 정도로는 그의 정체성을 비롯해 그의 사명이 실현되는 방식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유대교 개념들을 투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67] 그렇다고 교회가 사용한 이후의 개념들을 예수에게 투사하는 것이나, 어떤 기준에서 예수가 그러한 개념에 '적합한지' 묻는 것도 의미가 없는 시도이다.

예수는 자신이 "성자라고 하는"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앎에 힘입어 구약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신에 대한 이해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자신에 대해 투사된 기대와 희망에 대해 "같은 형태"의 대답이 되는 걸 원치 않는 가운데, 메시아적 비밀, 예언자적 비밀, 지혜 문학적 비밀을 행사했다.

몇몇 학자들은 예수가 몇 가지 칭호들을 자신에게 직접 적용했다는 점을 부인한다.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그렇게 적용했다는 점을 배제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든 그러한 칭호들이 내포한 함의에 따라 그가 살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칭호들은 다음과 같다: 메시아, 야훼의 종, 사람의 아들, 성자,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열혈당원들의 혁명 운동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아이슬러[68]와 브랜든[69]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70] 물론 그들의 혁명 운동과 예수 사이에는 내용에 있어 어느 정도의 유사함이 있다. 그러나 열혈당원들이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했던 것에 반해, 예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다.
예수가 야훼의 종이라는 칭호를 자기 자신에게 직접 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적인 정체성을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종종 침묵과 행동의 결과를 통해 이를 더 잘 드러낼 수도 있다. 예수라고 하는 존재는 종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 주며 이를 실현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존재의 빛 아래 예수를 "하느님을 위한 인간이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쉬르만(Schürmann)은 예수의 운명과 그 존재의 뿌리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으로 "~을 위한 적극적 존재"[71]라는 표현을 고안해냈으며, 이 표현에는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한 선재 개념과 신적 존재 개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공관 복음은 82번이나 예수의 입에 사람의 아들(人子)이라는 칭호를 두었다. 이는 그의 자아와 동일시되는 강조 형태로 드러난다. 다른 사람들은 이 칭호를 결코 그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이 표현이 담고 있는 정확한 의미는 복합적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고, 다니엘서 7장에 등장하는 위엄 있는 인물을 상기시킬 수도 있다.

예수는 봉사자로서 모든 사람들을 동반하고 죽음 가운데 그들과 연대한 다음, 그들의 심판관이 될 것이다. 그가 재판석에 좌정하는 것은 외부에서 판결을 내리는 제3자의 권리 주장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심판하는 분이 드러내는 사랑과 진리에 대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신이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이들과 함께 그들의 역사를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선취하며 그들을 대리하고 대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지위를 박탈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공동 책임을 지고 그들에게 힘을 복돋아 줌으로써 하느님 자녀로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많은 표징들과 명시적인 칭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 온전히 다 보여 주지는 못한다. 또한 그것이 예수와 관련해서 교회가 나중에 알게 된 모든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그의 정체성은 부활과 성령 강림을 통해 충만하게 계시되기 전까지는 어두움 속에 남아 있었다. 예수의 태도와 메시지 그리고 명시적인 말씀들이 교회가 견지하는 명시적 그리스도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증언들은 구약 성경의 전망이라는 틀에서 그것이 내포한 최소한의 가치로 인도되지만, 동시에 훗날 교회에 의해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을 미리 앞서 보여 주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복음서들을 전해 준 교회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증거에 의해 움직였다. 즉, 하느님 나라를 설교한 예수와 교회가 부활하신 분으로 선포한 그리스도는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러 본문들의 빛 아래 이런 연속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노력은 교회가 "또 다른 예수"를 만들 수도 있었다고 하는 의혹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합당한 것으로 사료되는 이런 의심을 서로 분리된 본문들에 대한 주석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전체 공동체를 위해 근본이 되는 본문으로서의 복음서를 이해함으로써 그러한 의심을 극복할 수 있다.

2.3.3. 하느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예수

다양한 제도와 사람들, 이스라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 그리고 경이로운 표징들은 당시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표현된 것을 넘어서는 권위에 대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는 선조들(모세), 규범적인 지혜(솔로몬), 거룩한 장소(성전) 앞에 자신을 두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권위를 결코 명시적으로 정당화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의식, 하느님의 권위와 심판을 보증하는 보증인(대리자)으로 행동하였다. 예수는 청중 앞에서 오직 하느님만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하느님을 대신하지 않고, 자신 안에서 자신을 통해 호라동하는 하느님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하느님의 행동'이었다.

교회는 하느님과 예수 간에 있는 이러한 구원적 행동의 일치를 '본성의 일치'로 표현했다. 사도행전은 구약 성경에서 오직 야훼께 유보된 표현과 칭호 그리고 구원적인 효과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 바오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총과 평화라는 메시아적인 선물들을 귀속시키는 가운데 거의 모든 자신의 서간을 시작했다. 복음 사가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가운데 개입하는 하느님의 구원적인 현존과 연관된 가치가, 예수가 지상의 삶을 거치는 동안 이룬 각각의 행동에서 똑같이 선취된 것으로 보았다.

2.4. 죽음 직전 예수의 자의식

2.4.1. 갈릴래아의 위기

예수의 삶은 갈릴래아에서의 활동[72]과 예루살렘에서의 수난[73]이라는 2개의 극(極)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복음 사가들은 지리적 요소와 신학을 통합해서 제시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2개의 공간과 2가지 차원 사이의 간격에서 다양한 담화와 의견을 통해 예수의 사명에 대한 완성을 특징짓게 될 고통과 폭력에 대한 강렬한 직감으로서의 예수의 메시아적 의식을 보여 주었다.

갈릴래아에서 머무는 시간은 2개의 계기를 포함한다. 우선, 기적으로 인해 흥분한 군중의 열정적인 수용, 그 다음으로 그들이 실망한 채 멀어지는 순간이 그것이다. 마르코가 제시한 종합적 내용은 특히 예수의 밀도 깊은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의 명성이 퍼져 나가고 많은 군중이 그의 곁에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중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지극히 특징적이며, 모든 복음 사가는 이 사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은 이 사화를 성찬례의 전조로 본 반면, 마르코는 군중을 향한 예수의 연민 어린 행동으로 보았다. 이때 군중은 예수를 민중 봉기를 지휘할 인물, 정치적 메시아와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가졌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가 군중이 자신을 억지로 데려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갔다는 말로 이 사화를 마무리한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는 어쩔 수 없이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내포한 의미를 명시적으로 보여줘야 했다. 그의 사명이 지향하는 목적은 이스라엘을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일으키고 통합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동포들이 이를 잘못 해석함으로써 이 사명이 위협받게 되자 그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홀로 있어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이와 동시에 진심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그 권위를 대면해야 할 필요도 느꼈다.

이 시기에 다음과 같은 3가지 새로운 상황이 조성된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보다 강도 있게 가르쳤으며, 수난에 대한 예고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고, 거룩한 변모 사건이 있었다. 부활 사건 이후 편집된 그의 죽음에 대한 설교는 그의 생애에 있어 결정적 전환점이 된 죽음과 관련해서 예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교회의 증언과 통합시켜 준다. 거의 감정이 배제된 이 예리한 주장들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신빙성과 이를 통한 예수의 의식 또한 보장해준다. 그러나 이는 후대 신학에서 제시될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루카는 베드로의 고백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예수의 초대, 그리고 거룩한 변모 간에 엄밀한 연관성을 설정했다. 부활의 선취로 이해되는 변모 사건이 내포한 의미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하느님 편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현으로서의 의미와, 그 사건에 함께한 사도들과 관련해서 예수를 추인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루카는 예수의 운명을 '탈출' 그리고 '승천' 개념과 함께 특징지었다. 해방을 향한 탈출 그리고 영광을 향한 승천은 수난에서 그리고 수난을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2.4.2. 성전 입성

파스카 축제 즈음해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떠나 성전으로 갔다. 예수가 이 거룩한 도시에 개선하는 자로 입성하는 것은 민족적인, 정치적인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억과 공격적인 희망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는 성전에서 상징적인 행위를 하였는데 이는 실현되고 있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언자들이 하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갖는 중요성은 예수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기성 종교 제도에 대항해서 이 일을 했다는 데 있다. 성전은 이 제도를 대변하는 최고의 상징이자 의미심장한 장소였다. 표징으로 드러난 이 행위는 여타 수많은 담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해석이 제시됐다.

위에서 혁명적 해석을 제외한다면 다른 3가지 해석들은 같은 실재를 드러내는 다양한 모습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수는 구원 제도들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 그것이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인격 안에서 실현되는 것에 호소하는 가운데 이 제도들을 대했다.

2.4.3. 백성들과의 대면

적대자들이 예수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는 그들이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사실을 제시했다. 당시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자신을 예언자적인 연속선상에 두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살인을 저지른 포도원 지기 비유[74]에 대해 전하는 가운데 그들을 향해 거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러한 상황은 매우 위중했다. 왜냐하면 이 경우 파견된 이는 마지막 사람이기 때문이다. 포도원 지기 비유는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 상속자로 소개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운명과 예수의 사명은 서로 동일시되어 드러나고 있으며 백성의 지도자들은 생명과 죽음을 결정 짓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한편에서는 예수의 자의식이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동기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딜레마는 근본적이다. 이전의 모든 역사를 예수와 연관 짓고 그의 권리 요구를 받아들이며 그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의 미래를 위한 결정적 표현인 '성자'라는 용어가 등장함으로써 이 비유의 중요성은 더해 간다. 이 용어가 예수로부터 직접 유래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의 자기이해와 교회에 의해 표현된 해석 간의 확실한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시대 유다이즘에 대한 최고 전문가인 찰스워스[75]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메시아의 칭호가 초대 공동체에 의해 창안됐다는 견해는 불가능하며, 초기 그리스도론과 신약 성경의 신학도 예수와 함께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2.4.4.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은 새로운 실재를 세우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 새로운 실재는 봉헌된 그의 삶에서부터 자유롭게 솟아나왔으며 미래를 규정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은 계약이라는 선행 형태에 이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게 된다.

2가지 표징이 예수의 공생활과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표현을 마감한다. 그때부터 침묵과 수난은 말씀과 행동 대신에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행위는 모든 형식적 선언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예수는 말씀만으로 자신의 구원 계획을 선언한 게 아니라 자신의 생애와 더불어 이 계획을 실현했다. 구원론은 그의 행적에 내포되어 있다.
2.4.4.1. 역사적 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거행이라는 틀 안에 들어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해방 행위에 대한 기억이자, 계약에 대한 기념이며, 메시아에 대한 고대이고, 종말론적 왕국에 대한 선취다. 또한 이 만찬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이라는 맥락 안에 있다. 다시 말해 최후의 만찬의 모든 사건과 그 이후 이어지는 사실들은 파스카적인 틀과 제자의 배반이라는 2가지 근본적인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바오로의 전승이나 요한의 전승은 모두 이 2가지 계기를 연결시키고 있다.

공관 복음은 예수가 한 최후의 만찬을 파스카 만찬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이 일은 니산달 14일에 있었으므로, 예수는 니산달 15일, 즉 파스카 축제일에 십자가에 못 박혔을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날에 있었던 중대한 처형은, 비록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라 해도, 아주 위중한 경우에 일어나곤 했다. 반면 요한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만찬이 아니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가 파스카 축제의 준비일인 14일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사가는 거기서 다른 의미를 읽어 들였다. 즉, 축제 저녁에 봉헌하도록 정해진 어린양들을 성전에서 도살하는 바로 그 시간에 파스카의 새로운 어린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자들은 최후의 만찬이 파스카 만찬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아무튼 파스카 축제의 상황과 그 반향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을 이해함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2.4.4.2. 사화들
마태 26, 26-29과 마르 14, 22-25은 본래 수난 사화에 상응하는 듯이 보이며 상당히 역사적인 관심을 담고 있다. 다른 한편에는 1코린 11, 23-29과 루카 22, 19-20이 있는데, 이 텍스트들은 전례적인 기원과 축제를 거행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성찬례 거행에 수반되는 사화들로서 성찬례가 내포한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 같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축자적 내용만 재구성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교회는 이 텍스트들의 진실을 예수의 말씀 자체에 대한 복원과 구술적인 반복이 아니라 이 텍스트들의 객관적인 의도에 맡겼다. 이 객관적인 의도는 직접적인 증언들에 대한 신빙성과 성령의 활동 그리고 사도들의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자와 어구 그 자체만 보면, 이 사화들은 최후의 만찬을 유다적인 파스카와의 연속선상에 두고 있으며 교회의 성찬례를 앞서 취하고 있다. 예수가 한 마지막 식사는 파스카 이전에 그가 죄인들, 소외된 이들, 세리들과 한 식사 그리고 훗날 부활한 후에 제자들과 더불어 하게 될 식사를 통해 연장되는 일련의 식사에 있어서 최고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최종적인 완성에 대한 선취로서 사람들과 더불어 음식을 먹고 운명을 나누는 것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확장된다. 예수가 자신의 생애 동안 나눈 우정과 용서 그리고 호의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가운데 죽음 안에서 지속적으로 선사되고 있다.
2.4.4.3. 행위와 말씀
최후의 만찬 예식은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행위, 음식, 가재도구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예수는 몇 가지 최소한의 요소들을 바꿨으며 거기에 최고의 실재를 도입해 넣었다. 즉, 자신의 인격적인 실존을 빵과 포도주에 결합해 음식과 음료수로 바꿨다. 여기서 드러나는 커다란 새로움은 행위와 말씀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며, 열쇠가 되는 요소들은 쪼개진 빵과 흘린 피로, 이는 몸과 피를 담고 있는 실제적인 상징들이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이제 예수는 닥쳐오는 죽음에 직면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폭력으로 쪼개지고 부어지기 전에 성부를 향한 찬미에 자신을 모아들이며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쪼개진 몸과 땅에 스며들 정도로 흘린 피를 선취하는 말씀이다. 또한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희생이자 계약으로 제시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예수는 사람들의 배반에 대해 성부가 자신에게 맡겨 준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자유로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가운데 응답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과된 운명을 그저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식탁을 주재하고 축복을 선언하는 가장으로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운명에 참여하게 했으며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보여 준 그 사랑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중재의 바탕이 되게 했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몸과 피, 즉 자신의 인격을 내어 주었다.
2.4.4.4. 의미
예수가 이룬 행위는 한편으로 권위와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표징이며, 다른 한편으로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메시아적인 잔치를 선취하는 표징이다. 교회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구약 성경의 근본 모티브에 비추어 예수의 행위와 의도를 해석한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 간의 연관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약과 희생 행위를 발견하게 해 준다. 계약 신학과 파스카 신학은 서로 일치해서 이루어지며,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인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계약 마지막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신적인 생명을 허락하는 가운데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수단을 친히 선사했다. 그러므로 속죄하는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며, 그리스도가 흘린 피는 인간이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고 생명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계약의 피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지녔던 이해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대해 그가 지닌 확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는 최종적인 메신저, 종말론적인 구원의 중개자라는 자기 이해를 드러내는 최고의 표현이다. 예수의 속죄적인 죽음은 하느님 나라의 설교에 대한 양자택일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그러한 설교에 따른 귀결이며, 이 메시지를 새로운 역사적-구원적 상황 가운데 완성으로 이끄는 관문이다.
이 계약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향해 결정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규정한다. 또한 이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의로움을 허락하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 안에 율법을 내면화한다.
예수 스스로가 '야훼의 종'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가 보여 준 태도는 이사야에 의해 묘사된 그 인물에 상당히 근접한다. 이사야서 53장의 의미를 살펴보면, 예수는 곧 다가올 죽음을 바라보며 곧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가운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룬다. 그는 야훼의 종으로서 자신의 고통과 더불어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한다.

예레미아스, 쉬르만 같은 경우는 최후의 만찬 행위에서 예수가 "~위해 존재하는" 자신의 실존을 최고로 실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 이전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만찬 이후에 뒤따른 그의 죽음 사이를 이어 주는 접점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그의 죽음 모두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성찬례는 시간적 관점에서 예수의 종착점이자 의미의 관점에서는 예수 실존의 궁극적 지점이다. 동시에 그것은 교회라는 실재의 출발점이자 이 실재를 지탱해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교회는 예수의 피를 통해 새로이 탄생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성찬례가 사람들을 위한 예수 자신의 봉헌과 희생 그리고 인류와의 결속으로부터 탄생한 한에서, 그것은 교회의 바탕이 된다. 또한 교회는 성찬례 안에서 성숙을 위한 자신의 영속적인 샘을 갖는다. 성찬례와 교회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을 드러내는 2가지 표현 방식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바탕 짓는다.

만일 성찬례 거행을 통해 신자들의 공동체가 제도적, 경험적으로 매일 새롭게 설립되지 않는다면,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은 인간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 성찬례는 신자 공동체로 하여금 예수의 재림이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영원히 현실화하는 구원적인 실재라는 점을 알게 해 준다. 하느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된 예수는 "빵을 쪼개실 때" 자신을 알아보게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현존한다. 성찬례 거행은 예수를 살아있는 분이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분으로 알게 해 준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실현되기 시작한 종말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가운데 도래해야 하는 것으로 체험한다. 예수의 즉각적인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해체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전례 거행을 통한 주님과의 만남에서 충만과 완성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

2.5. 예수의 죽음

예수의 죽음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될 수 있다.

2.5.1. 문제의 맥락

예수의 죽음은 그의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교의 원천 자료를 비롯해 유다와 로마의 원천 자료들은 동일하게 그의 죽음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비록 이 자료들은 그의 죽음이 일어난 원인과 책임에 대한 해석에서 입장이 다르지만, 적어도 이 죽음의 유형[76]에 대해서는 모두 일치한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이 사실은 예수 이전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후 교회의 역사의 빛 아래 이해되어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죽음은 그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죽음은 교회가 탄생하는 시작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결코 철회될 수 없고 영속적이며, 걸림돌이 되지만 동시에 핵심적인 사안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할 수 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영광의 주님으로 증언하려면 그에 합당한 해석과 신앙이 필요하다.

예수의 죽음은 역사적인 사실인 한에서 예수와 관련된 다양한 상황과 제도, 그리고 인물의 범위 내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의 죽음에 대해 변호할 수 없다 해도, 적어도 일련의 요소들을 바탕으로 이해될 수는 있다. 정신적인 나태함과 반(反)셈족적인 편견은 오랜 세월 동안 예수의 죽음을 자동적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정당화하고 유대인들이 사악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들에게 투사해 왔다.

예수는 언제나 생명에 대해 말했으며, 자연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인간을 하느님의 벗이자 모상으로 여기며 기쁨 가운데 찬사를 보냈다. 그의 죽음은 오랜 구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자유로운 행위와 인간적 결단에서 유래한 결과였다. 그는 이런 오랜 구상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지했으며, 더 나아가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사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실현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부정적 세력들, 폭력, 사람들의 죄, 죽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과 충돌해야 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 죽음, 부활은 이 사건의 해석학적 필수 계기이며, 이 3가지 계기는 서로가 서로를 비춘다.

복음 사가들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체험에 의해 움직였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에게 눈길을 돌리고자 했다. 이처럼 그들은 2가지 관점을 바탕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수수께끼를 파헤치려 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의 지상 생애에 있어 3가지 국면[77]을 구성하는 이러한 대조의 틀이 보다 오래된 해석의 틀을 이루고 있으며, 부활 이후의 공동체는 그에 힘입어 예수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알아들으려 했음을 주장하게 된다.

만일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는 문화적, 사회적 모순을 덧입게 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그와 똑같은 운명을 겪은 수많은 사람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부활은 그에 선행하는 모든 사실들을 무효화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하나로 묶어 주고 승인하며 보편화하는 가운데 거기에 구원적인 의미를 부여해 준다. 비록 몇 가지 역사적인 요소들이 부활을 무의미의 그늘 속에 버려둔다 해도, 또 다른 요소들은 예수를 최종적인 영광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그의 안에서 이룬 결정적인 시간, 최고의 개입을 엿보게 하는 한에서 이 부활을 충만히 해명해 준다. 이처럼 초기 신앙 고백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실존을 구성하는 다른 자료들을 간과하는 가운데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 있다.

2.5.2. 이야기의 원천들

수난 사화들은 공관 복음이나 요한 복음서 모두에 있어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물론 각각의 복음 사가들은 자신의 고유한 흔적을 자신의 복음에 남겨 놓았다. 그렇다면 여러 수난 사화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지향과 동기는 무엇인가?

마태오는 이러한 공통적인 스키마의 범주 내에서 예수의 메시아성과 그 권위를 강조했다. 반면 마르코는 야훼의 종과 마찬가지로 침묵과 버림받은 상태에서 죽어야 했던 상황 이상으로 신적 아들 됨을 강조했으며, 루카는 예수가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섬세함과 애정을 보여 주었다. 요한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예수가 지닌 위엄을 강조했다.

2.5.3. 삶과 죽음 사이의 연결

파스카의 체험은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를 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흩어진 이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의 창설을 위한,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위한 봉헌 제물로 새롭게 발견하게 해 준다.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최고로 계시된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류는 그의 죽음을 통해 구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5.3.1. 불트만의 견해
"예수의 심리적 이미지를 재구성하려 할 때 겪게 되는 가장 큰 당혹스러움은 예수께서 자신의 마지막, 즉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우리에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분이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따라서 정치범으로 돌아가셨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형 집행을 그분이 하신 활동에 뒤따르는 본질적인 결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은 그분이 하신 활동을 정치적으로 바라본 사람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그분의 운명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다. 만일 우리가 보았듯이 그렇게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이 절망 속에 죽어 갈 수도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루돌프 불트만, <Das Verhältnis der urchristlichen Christusbotschaft zum historischen Jesus> 中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위와 유사한 주장들은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켰다. 불트만은 예수가 살해된 외적인 이유를 그가 죽게 된 내적인 이유와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전망에서 볼 때 그의 생애는 여타 다른 사람들의 뜻에 온전히 맡겨진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반면, 모든 그리스도교적인 원천 사료에 따르면, 핵심적인 것은 예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한 일에 있다. 그의 사명은 사람들을 위해 방향 지어져 있고 또한 그들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지만, 그들이 그의 사명을 이루는 궁극적인 바탕도 그 사명의 첫 번째 기원도 될 수는 없다. 예수의 사명에 있어서 기원이자 바탕이며 그것이 지향해야 할 미래는 오직 성부에게 있다.

불트만은 역사적으로 볼 때 복음의 원천들이 그리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해서, 설령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해 그리고 메시아로서 자신이 위임받은 명령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해도, 그리스도교는 그런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적인 명제를 주장했다. 더 나아가 불트만은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적인 역할이 그가 겪은 최종적인 파멸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구원 사명을 그 사명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그 누구에게 맡겨줄 수 있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교회가 알고 있고 고백하는 교의적인 명제와 그리스도가 알고 있는 것 사이에 연계점을 설정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다.

불트만은 예수의 말씀 자체, 예수의 행동 자체, 예수의 죽음 자체, 예수의 인격 자체를 복구하기 위해 개신교 실증주의를 거슬러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직면해서, 먼저 사도들의 증언, 신자 공동체, 마지막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증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역사적인 면에서나 신학적인 면에서나 총체적으로 예수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전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진리는 서로 구분될 수 있지만 결코 분리될 수는 없다. 인류는 그리스도의 말씀, 기적, 죽음, 그리고 인격에 결코 직접 다가갈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중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중개는 전수될 수 있고 해석될 수 있으며 검증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실재여야 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신이 겪게 될 죽음이 지닌 의미와 그 목적 그리고 그 죽음이 일으키는 보편적인 효과에 대해 분명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에 반하는 경우, 그것은 하느님이 예수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동시에 이 과정에서 예수가 소외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2.5.3.2. 쉬르만의 견해
하인츠 쉬르만은 "~을 위한 존재" 그리고 최상의 봉사(희생)라는 개념들을 활용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단계들을 제시했다.

2.5.4. 사건으로서의 죽음

근본적으로 예수의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날짜와 시간부터 시작해서 그의 죽음과 관련된 많은 구체적인 사안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마르코가 제시한 연대에 따르면, 예수는 금요일에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날은 유대인들이 파스카를 기념하는 날로 니산달 15일이며, 처형된 시간은 로마인들의 시간으로 3시경[78]에 해당된다. 반면, 요한이 전하는 연대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시간은 금요일이 맞지만, 파스카 전날이며 처형된 시간은 6시경[79]이다. 예수가 죽은 날짜, 그 과정, 여러 권력자들의 개입, 그의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법적-도덕적 책임, 유대인들의 법,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소송 규범의 준수 문제, 유대인들 편에서 '칼의 법'[80]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 등 이 모든 것은 어느 정도 어슴푸레한 상태에 남아 있다.

공관 복음은 예수가 단죄된 원인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즉, 성전에서 종교 지도자들을 자극한 일, 자신을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주장한 일이 그러하다. 반면, 요한 복음서는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 원인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를 보존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 예수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은 특히 그의 업적에서 오는 말씀에 있었다. 예수는 이를 통해 4가지 차원에서 도전을 제시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 4가지 도전에 직면해서 예수를 철저히 거부했다. 만일 예수가 산다면, 유대교는 망할 것이다. 만일 유대교가 지속되길 원한다면, 예수가 사라져야 하는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예측불가한 정치적 반향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예수라고 하는 설교자의 모습이 로마인들에게 민중 봉기를 일으킬 희망으로 보여서는 안 되었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야파 대사제의 말에 따라, 민족 전체가 망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게 더 좋은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나스와 카야파 그리고 산헤드린 편에서 한 죄수의 심문이 엄밀히 말해 법적인 의미의 소송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종교적인 동기로 사형이 언도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만일 종교적인 동기로 사형이 언도되었다면, 그리고 유대인들이 '칼의 법'을 시행할 권한이 있었다면, 예수는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예수는 성전 모독, 신성 모독, 마술, 군중을 현혹함, 이스라엘에 혼란을 야기함이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이는 특히 후기 랍비 전승에서 추론할 수 있다. 후기 랍비 전승은 그의 죽음에 대한 합법성을 추인하고 있다.

예수를 로마 법정에 서게 한 가장 중요한 기소 이유는 정치적인 선동과 폭동에 있었다.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들의 왕이라 주장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것은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사형을 청했고 빌라도는 이를 승인했다. 사실,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어떠한 죄목도 찾아내지 못해 그에 대한 단죄를 거부했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법을 사용하도록 요구했다. 종교적인 이유든 정치적인 이유든, 판결 이유는 다르다 해도 모두 다 유다이즘과 로마를 위협한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는 제거되었다.

2.5.5. 십자가에 못 박힘이라는 죽음 형태

십자가형은 최고의 형벌들[81] 중에서도 으뜸가는 형벌이다. 그래서 이 형벌은 아주 위중한 경우에만 적용됐다. 또한 이 형벌은 상류층이 아닌 하위층 사람들에게만, 외국인들의 반란과 노예들의 폭동 같은 경우에만 부과된 형벌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생겨나 정치적/군사적 형벌로 그리스인과 로마인들 사이에 퍼진 십자가형은 죄수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 모욕의 형태로 간주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의 피가 땅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그가 나무에 매달린 바로 그날 시신을 묻도록 했다. 이게 바로 예수를 위해 준비된 치욕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의 운명과 연대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최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2.5.6. 단죄와 죽음에 대한 책임

복음서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단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만 지우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서들과 신약 성경 이후 시대의 미쉬나[82] 모음집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와 관련해서 정당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인 문서로 간주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그 어떤 진지한 논거도 여러 수난 사화들이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도 입증하지 못했다. 이 수난 사화에는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빌라도를 비롯한 로마인들이라고 하는 두 그룹이 예수의 죽음에 엮어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통해 역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신약 성경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탓을 언제나 유대인들에게 돌리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이 죽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해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모든 것의 진정한 주인공이 하느님이었다고 숙고하는 가운데 유대인들에게 죄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사도 3장 17-18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 그리고 그 백성의 구성원들을 구분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히 언급한 바 있다. 이와 동시에 공의회는 예수의 죽음에 있어 중요한 것은 누가 그를 살해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죽었으며 왜 죽었는가 하는 점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보편적인 운명의 빛 아래, 결국 우리는 그의 수난에 있어서 우리 각자가 지닌 책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무죄함과 침묵 그리고 죽음의 고통 가운데 하는 중재 기도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기에 이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한 예수의 기도, 제자를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는 모습, 죽음의 고통 속에서 성부를 신뢰하며 자신을 그분의 손에 내어 맡기는 모습을 통해 예수의 운명은 마무리 된다. 모든 복음 사가들은 예수가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 그의 입에 서로 다른 표현을 담았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이 그러해야 하듯이, 그는 시편과 더불어 기도하였다.
불트만이 주장하듯이, 이 3개의 인용구는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절망 속에서 죽었는지를 판별하게 해 주는 결정적인 구절이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이 어떻게 자신의 업적을 끝낼 수 있게 해 주었는지 인지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외침을 언급하고 있는 마르코와 마태오는 하느님이 그를 부활시켜 주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반역을 표하는 듯이 보이는 이 구절들은 사실 신심 깊은 유대인들의 마지막 순간을 동반하는 시편의 첫 구절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느님이 의인을 구하는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화로, 여기서 등장하는 의인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공동체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주님에게 감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시편의 첫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그 구절이 담긴 시편 전체를 언급하는 것과 같다.

2.5.7. 예수의 죽음의 의미

범죄자로 처형된 예수의 죽음은 외견상 그의 모든 메시아적인 주장이 거부됐음을 의미한다. 그를 따르던 추종자 그룹마저도 그 스승의 행동을 연장해 주지는 못했다. 이런 절망적인 결말은 예수가 시작한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부정적인 반향을 사람들 사이에서 일으켰다. 그러나 사람들의 역사적인 심판은 부활과 더불어 뒤집히고 말았다. 부활은 하느님의 종말적 행위이자 심판이며 표명으로, 죽음에 직면해서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분으로 확증해 주며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에 참여하게 해 준다.

예수의 죽음은 신약 성경에서 '넘겨주다'라는 동사와 함께 해석되는 가운데 하나로 합류하는 3가지 자유, 즉 사람들의 자유, 그리스도의 자유, 하느님의 자유에서 기인하는 결과로 드러난다. 이 3가지 중에 그 어떤 자유도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다른 자유로 전가시킬 수도 없다.
예수의 죽음은 그가 하느님 앞에서 인간적인 자유를 행사한 것이다. 칼 라너가 지적하듯이, 그것은 언제나 인간과 화해한 하느님의 영원한 결정을 공표한 것이다. 시간과 인간의 자유가 지닌 새로움은 자유롭게 인간의 역사 안으로 어우러져 들어가는 하느님과 교감하는 창조적인 단서로, 존재 질서가 아니라 인격의 질서에서 인간을 건드린다.
만일 예수의 죽음이 그의 자유와 관계 없이 하느님의 용서를 드러내는 계기이자 장소 또는 표징일 뿐이라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논리에 알맞지 않으며 인간 예수의 품위를 손상할 뿐이다. 이는 강생의 논리 자체에 모순된다.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은 자신의 영원한 결정에 힘입어 인간을 배제한 채, 예언자들이나 심지어 강생을 통해 자신의 결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 홀로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신 분으로 드러날 뿐이다.* c) 예수의 죽음에는 성부의 자유도 어우러져 들어간다. 예수의 죽음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인 한에서 그것은 많은 이들을 위한 봉사이자 희생이며, 성부의 선물이다. 성부는 그리스도의 모든 형제들을 위해 자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역사적인 필요 때문에 일어난 것도 도덕적인 형벌도 법적인 요청도 아니다. 하느님은 이 죽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건네주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에 관한 모든 상승적(άνάβασις) 이해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하강(κατάβασις)과 선물을 전제로 한다.

2.5.8.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 강독

예수의 죽음은 강생이 결정적인 완성에 이른 것을 의미하며,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의 결정적인 이름이 삶에 있어서 최고로 실현되었음을 뜻한다. 예수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가운데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였다. 그러므로 3가지 차원에서 예수의 죽음을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틀 안에서 예수의 죽음이 지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결정적 의미가 드러난다. 하느님은 죽음을 겪는 피조물과의 계약에 충실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고자 사람이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보편적인 추상적 사실에서[83] 개별적인 구체적 사실로[84] 옮겨가는 가운데 이 점을 언급한 바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블레즈 파스칼은 그리스도가 모든 개별 인간을 위해 탄생하고 죽음의 고통을 겪었다는 점을 주저 없이 말했다.
"다시 눈을 뜬 인간, 하느님께서는 너를 위해 인간이 되셨다. 깨어나라, 오 자고 있는 인간이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눈을 떠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춰 주시리니. 다시 말하거니와, 하느님께서 너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아우구스티누스, <설교> 中
"죽음의 고통 속에서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을 위해 몇 방울의 피를 흘립니다."
블레즈 파스칼, <예수의 신비> 中

초대 교회 당시 메시아의 죽음이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물음에 이론적인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는 오랜 시간과 여정이 필요했다. 신자들은 성경의 빛 아래 스승이신 예수의 일부 말씀과 최후의 만찬에서 행한 그의 행동을 바탕으로 마침내 그런 비극적인 결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의 수난에 대한 다음과 같은 4가지 해석의 시도를 구별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관점의 빛 아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폭력에 의한 죽음이었으며, 전기적인 죽음이었다. 반면, 신학적인 전망에서 볼 때, 그의 죽음은 성부가 위임한 임무이자 그가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구원론적인 전망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피를 선사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2.5.9.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또 다른 해석들

신약 성경이 제시한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87] 이외에도, 오랜 역사 내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상이한 이해와 조화를 이루는 또 다른 해석들이 제시되어 왔다.

2.6. 부활 기원의 사실들

복음서들을 비롯해 기타 여러 신약 성경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부활 사화를 발견할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처럼 검증 가능한 것이 아니다. 반면, 부활한 예수의 이전 삶에 대한 여러 증언에서 발현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또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부활한 예수와의 일련의 만남 속에서 그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을 예수의 발현에 직면해서 아직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두 번째 순간이 돼서야 그가 바로 자신들이 알았던 바로 그 예수이며, 그가 이제 변모된 몸과 더불어 새로운 실재 형태 아래 드러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러한 발현 그리고 이와 함께 그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가 부활했고 하느님이 그를 신임하는 가운데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면서 그를 추인하였다는 확신에 이르게 됐다.

2.6.1. 원천, 사실들과 표징들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원천들은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2.6.1.1. 부활하신 분의 발현들: 1코린 15장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1코린 15, 3-8
부활과 관련해서 가장 오래된 정식 이상으로 근본적인 정식은 1코린 15,3-8에 담긴 내용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정식을 다마스쿠스 또는 예루살렘의 첫 번째 공동체로부터 모았으며, 그 시점은 대략 그리스도가 죽은 지 3년에서 6년이 됐을 때로 추정한다. 이 정식은 모든 사도와 공동체들의 신앙 고백이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것은 그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규범으로 받아들여져 오던 것이다.

사중으로 구조화된 이 정식은 신앙을 바탕 짓는 3가지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전해 주고 있다. 표징들을 포함해서 그러한 사실들은 발현의 수취인들이 이해한 내적인 말씀의 빛 아래,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억의 빛 아래, 성경 텍스트들에 대한 재강독의 빛 아래 해석되었다. 부활과 관련된 사실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들은 전통과 제도 그리고 삶의 여러 형태 안에서 수용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이 3가지 측면들은 다음과 같은 3가지 해석의 형태와 연관된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 죄 때문에 죽었고 / 성경에 따라 / 사흗날에 부활하였다.

발현의 직접적인 수취인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부활한 주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도록 길을 열어 주고 있으며, 이들은 부활한 주님이라는 고유한 실재를 바탕으로 자신의 체험을 다변화했다. 이러한 2가지 계기들은 서로 동일시될 수 없다. 그들의 체험은 구성된 것이지 구성하는 주체가 아니다. ὤφθη(드러나다)라는 그리스어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번역을 허용한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3가지 형태 모두 허용될 수 있는 번역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부적절하게 보이는 것은 첫 번째 해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활의 증인들에게 직접적인 주도권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세 번째 해석이다. 왜냐하면 선행하는 동사들 역시 그리스도를 주체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그리스도가 발현하였고, 자신을 보게 하고, 자신을 보도록 허용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신의 회심 체험을 "보다", "알게 되다", "계시하다", "그리스도에 의해"라는 표현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와 열두 사도를 비롯해 오백 명의 형제들, 그리고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 연관해서 제시한 여러 발현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이 텍스트는 사실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해석을 전해 준다.
부활은 "셋째 날" 또는 "사흘 후"에 일어났다. 이 정식은 연대기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그 의미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즉, 여기서 말하는 사흘이 죽은 시점부터 정확히 부활의 순간까지의 기간을 말하는지, 또는 죽은 시점부터 발현의 순간까지의 기간을 말하는지, 또는 죽은 시점부터 무덤이 비어 있음을 인지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지 특정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또한 이것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즉, 하느님께서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의인을 위해 시의적절하게 개입해서 그를 구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하느님이 죽음의 전리품이 되고 만 예수를 도우러 온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부활은 시간을 넘어 던져진 종말적 사건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안에 축소될 수 없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이중적인 차원을 갖는 하나의 행위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이중적인 행위인 것은 죽음의 우선적이고도 주된 주체는 예수인데 반해, 부활의 우선적이고 주된 주체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성부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예수의 절대적인 순명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행위는 죽음이다. 이와 반대로 예수를 향한 성부의 절대적인 충실함과 수용 그리고 긍정의 표현은 부활이다. 부활에 있어서 관건은 단지 예수의 자유와 인격적인 불멸성이 지속되는 것 또는 그 영이 본래의 신적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예수의 인격 전체로 돌아서는 하느님의 재창조 행위다.

부활 발현 사화들은 발현과 관련된 모든 본질적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반면, 구체적인 사안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단일함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유사한 다양성은 발현이 간직한 진실을 보장해 주는 최대한의 장치로 작동한다. 단순한 하나의 스키마로 환원되기에는 어려운 다양한 이야기와 표현들로 구성된 진정한 발현의 좌표는 예수라는 실재를 우리에게 만화경적인 방식으로 소개해 준다.

부활한 예수의 실재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분이라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발현 사화들은 부활한 예수가 이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지점, 인류가 몸담고 있는 이 역사와 연계되는 지점을 구성한다. 그를 만나고 교감했던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입증한 게 아니라 단지 그를 증언하려 했을 뿐이다. 그들은 이를 위해 부활의 빛 아래 예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재구성했다. 예수는 그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 진면목을 드러냈으며, 그들은 그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변화되었으며, 그를 증언하기 위해 파견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자신들이 감지한 실재를 향한, 그리고 자신들이 받은 사명을 향한 강렬한 인격적인 투신을 보게 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이 환영이나 환시 또는 꿈이 아닌지 되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후 그들의 삶이 보여 준 진정성은 그들의 선포에 있어 기원이 되는 체험이 참되다는 것을 보장해 준다.

예수의 발현은 다음과 같이 체험하고 이해될 수 있다.
2.6.1.2. 빈 무덤
여러 복음서는 발현과 함께 빈 무덤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시신이 없다는 부정적인 사실에 부활이라는 긍정적인 실재를 바탕 지으려 하지는 않았다. 살아 있는 예수와의 만남이라는 그 이전의 경험과 그 이후의 경험의 빛 아래 볼 때, 시신의 부재는 그 나름의 무게를 갖고 드러난다. 이에 대해 요한은 "보고 믿었다"[90]. 하지만, 표징 그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지향하는 실재를 자동으로 입증하지 못한다. 즉, 시신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그 사람이 살아서 다른 곳에 있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한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해서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는 셈족의 맥락[91]에서 볼 때, 부활의 메시지는 시신이 있는 상태에서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러하다. 인간은 몸이며, 몸은 인간이 세상, 하느님과 더불어 맺는 분명하고도 친교적인 관계 안에서 자신을 중개하는 요소다. 그러므로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긍정을 내포하는 것으로, 그의 전체적인 생애와 구성적인 육체성이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다.

2.6.2. 부활: 역사, 호교, 신학

부활한 예수의 발현은 외적인 실재이자 그를 체험한 사람들에 선행하는 분으로 감지되었다. 그들의 증언은 지상의 예수에 대한 성찰에서 유래한 결실만도 아니며, 그의 죽음이 보편적인 중요성을 띤다는 데 대한 인식에서 유래한 결실만도 아니고, 그의 모범을 다시 걸어가야 한다는 데 대한 확신에서 유래한 결실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느님이 세상 안에 객관적으로 개입하였다는 데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결실이다.

그러므로 슈트라우스[92]가 발현에 부여하는 심리학적인 해석만으로는 거기에 담긴 깊은 의미를 충분히 끌어낼 수 없다. 불트만은 예수가 케리그마 가운데 부활하였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센[93]은 부활은 예수라는 주제가 계속해서 유효하며 그 후속적인 결과를 갖게 되리란 사실을 단순히 의미한다고 보았다. 반면, 스힐레벡스는 은총으로 체험되고 부활로 제시된 회심 과정에 대해 말했다. 페쉬[94]는 지상적인 예수를 부활의 창시자로 보았으며, 브로어[95], 올리히[96], 페어베옌[97] 역시 그와 같은 노선에 있었다. 뤼데만[98] 같은 경우는 부활한 예수의 실재를 부정하는 가운데 극한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부활한 그리스도가 아닌 역사의 예수에 따라 신앙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부활한 예수와 관련해서 발현이나 빈 무덤 모두 어떠한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고 보았다.

부활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2가지 잘못된 이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부활과 관련한 바람직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와 예수의 생애 그리고 부활 사건 간에는 본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 예수는 구약 성경의 전통 안에서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 하느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구약 성경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죽은 이들의 부활과 대면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 중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는 그가 하느님이 개입함으로써 자신을 즉각적인 죽음에서 구해낼 수 있다는 점에 의존해 있음을 의미한다. 부활에 대한 선포들은 성부를 향한 순명과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온전히 봉헌한 그의 삶 전체와 깊은 일관성을 갖고 있다.

부활 사화들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의 고백에 있어 바탕이 되는 첫 번째 증언들이 간직한 객관적인 가치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그런 증언들이 내포한 절도 있는 자발성은, 자신을 이성적으로 납득 가능한 논증으로 제시하려 하지 않는 가운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구조적인 나약함을 강력한 힘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변화시킨다. 이 표징은 그러한 증언들을 넘어 그것이 증언하는 실재로 그리스도인을 데려간다.

부활은 역사적/주석학적 관점에서 연구되었다. 무엇보다도 부활의 검증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가장 노력함으로써 부활을 물질적인 사실의 수준으로 자리매김하게끔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원천 자료들을 제시하는 독특한 측면은 그늘 가운데 놔두었다. 그것은 단순히 이전 역사에 대한 연장이나 부정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부활한 예수는 미래 세계를 폭발적으로 드러낸 분이자 그 세계를 대변하는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이 세계를 건드리는 종말론적인 실재로, 이는 부활의 결과를 통해 검증 가능하다. 예수는 실재이자 역사이지만 시간과 사멸에 연관된 세속적인 역사성의 방식에 따라 그런 것은 아니다. 텍스트들은 긍정적인 역사에 관한 문서로 자세히 조사되었는데, 여기서 관건은 진술과 진술되는 것, 진술된 실재와 그 실재를 진술하는 사람이 서로 불가분리적이라는 데 있다.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들이 없다면 예수의 부활은 없다. 그를 증언하는 사람을 통하지 않은 채, 그에 대해 증언하는 해석이 배재된 채, 선포된 실재가 요청하는 바와 동조하지 않은 채 부활한 예수에게 다가갈 수는 없다.

부활은 호교론적 관점에서도 연구되었다. 이 노선은 부활을 공생활 동안 예수가 이룬 기적들과 비슷한 기적 중에 하나로 축소했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결정적으로 인증하는 최고의 기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여타 다른 기적들과 비슷한 기적 이전에 최고의 기적으로, 그것은 신비다. 만일 부활을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그리고 성령 강림과 교회에로부터 분리한다면, 그것은 결코 해독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고 만다. 부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된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믿음을 향한 초대가 된다. 이론적으로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부활은 완전히 독창적인 사실이다.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의미에서 오직 예수만이 부활한 이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고유한 특징으로서 그에 대한 믿음을 바탕 짓는 진정한 힘은 부활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하느님과 그리스도, 인간 삶의 의미, 역사의 목적, 모든 실재를 비롯해 모든 사람의 구원에 대한 언명으로 알아들을 때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다.

부활은 신학의 역사에서 종종 부차적인 차원으로 남겨지곤 했다. 동방 교회는 강생을 구원의 중심적 사실이라는 관점에서 집중했으며, 그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신성, 위격적 결합과 관련된 이론적 문제들에 집중했다. 반면, 서방 교회 입장에서는 구원론적 차원에 우선권을 부여했다.[99] 결국 근대로 들어와 특히 호교론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스승인 예수의 행적과 설교, 사회적 예언자이자 개혁가로서의 그의 활동을 선호하며 접근했다. 마지막으로, 20세기로 들어와 부활이 그리스도교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 그리고 신앙과 그리스도론을 위해 부활이 지닌 탁월한 의미를 재평가하기에 이른다.

2.7. 부활의 맥락, 어휘, 내용

예수에 대한 이해 과정이 발현과 더불어 끝난 것은 아니다. 발현은 멈췄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그의 실제적 현존이 감소하진 않았다. 예수가 등장하는 방식은 끝났지만 다른 방식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신약 성경과 오늘의 교회는 생기 가득한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이 온전히 드러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예수는 다시 돌아와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머물겠다고 약속하였다.

2.7.1. 부활의 맥락: 종말적, 묵시적

부활에 대한 성찰은 목격 증인들이 알았던 예수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교회 안에서 이루는 그의 활동에 대한 대한 체험으로부터, 구약 성경 텍스트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일련의 요소들에 대한 종합은 첫 번째 수준에서 종말론적인 좌표를 생겨나게 했다. 부활은 세상의 종말이라는 지평 안에 자리매김하고 이해되었다. 이 선상에서 묵시 문학은 우선적으로 그리스도론의 모체로, 그다음에는 모든 신학의 어머니로 언급되었다. 예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집단적인 차원에서 모두 묵시 문학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로 간주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세말에 올 것이다. 이제 이 전망에서 예수를 종말적인 심판관과 동일시하는 가운데 부활은 주님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추인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부활은 예수를 하느님의 종말적 증인이자 하느님 나라의 심판관이 되게 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부활은 완성된 창조 세계 전체에 부여하게 될 새로운 존재 상태를 선취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그 이전의 생물학적인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100] 예수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 신약 성경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말하면서 결코 '비오스'(βίος)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조에'(ζωή)라는 말을 사용했다. '비오스'는 사멸할 자들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조에'는 완전하며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가 취한 새로운 생명은 단순히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실재의 쇄신이다.

2.7.2. 부활의 어휘: 상징적 자리들

부활은 다수의 언어 그리고 상징 세계를 통해 이해된다. 신약 성경은 상징 세계와 더불어 부활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는 실재를 담고 있으며, 이 실재의 형태는 언어적인 형태에 의해 암시된다. 상징 분야는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표현 가운데 하나는 능동적 의미와 수동적 의미의 그리스어 동사 '에게리오'(ἐγείρω)와 '아니스테미'(ἀνίστημι)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스테미'에서 부활을 의미하는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가 유래한다. 이 말에는 죽음에서 '들어 올린다', 잠에서 '깨운다'는 개념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상황을 묘사하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예수가 쓰러져 잠을 자고 있으며 죽었다는 점, 죽은 자들의 지역에서 죽음에 사로잡혀 있거나 제지당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 다른 표현은 '영광',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용어에서 유래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이 말들은 십자가의 부활에 연관되어 있으며 구약 성경의 '카봇'(כָּבוֹד), '독사'(δόξα)라는 용어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말은 예수가 합체된 신적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예수가 죽음을 거슬러 얻은 승리, 하느님의 생명과 권능에 대한 그의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 표현 방식은 성부 오른편으로 '들어 올리다', '들어 올림'이라는 용어와 연관된다. 이 선상에서 들어 올리는 하느님의 행위는 모든 이들의 이름으로 죽음을 맛보며 수난 가운데 고통 받는 종의 운명을 실현한 이의 비천함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은 가장 비천하게 된 예수를 자신이 누리는 영광의 지위까지 들어 올렸다. 신적 형상으로 존재하던 분의 '자기 비움'(κένωσις)은 지옥으로 내려가는 모습 속에서 그 최고 표현을 갖게 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지옥에 내려감은 연속적인 두 가지 상태인가? 아니면 예수가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부활하기 이전에 죽은 자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해 한 유일한 행위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을 의미하는가?

또 다른 모델은 예수가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소생되는 것'으로 부활을 설명한다. 루카와 바오로는 예전에 죽고 이제 살아 있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주석학자들은 두 사도 모두 그리스인 청중들에게는 낯선 부활에 관한 용어를 분명히 피하고자 했으며, 부활이 생명적-생기적인 의미로 해석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고 평가한다. 신약 성경은 부활을 언급함에 있어 검증 가능한 생명의 형태를 가리키는 '비오스', '아나비오스'(αναβίος)란 용어에 의지하지 않았다. 부활은 생명의 복원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질적인 차원에서의 변모를 의미한다.

가장 단순한 진술은 주님(κύριος)이신 예수를 선포하며 그에 합당한 흠숭을 올리는 것이다. 이는 다양한 신앙 고백 안으로 들어갔다. 예수는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주님으로 세워졌다. 하느님의 권위를 수행하며 그 생명을 통교하는 분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를 소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아드님(Filius Dei)과 의화(iustificatio)라는 표현을 들 수 있다. 하느님은 성령의 힘과 함께 예수의 진면목을 드러내었다.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 성자는 부패를 경험할 수 없다.

모든 명시적인 자리 가운데 '부활'이란 말이 우세하게 드러난다. 부활은 그 이전에 있었던 죽음과의 대조를 다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세말에 이루어지길 고대하는 우주적인 부활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실제적인 복합성을 이해하려면 그밖에 모든 의미의 영역들이 필요하다. 이 사건의 실제적인 복합성으로 인해 이 사건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들 역시 복합적이다.

부활의 언어는 오직 교회의 전체적인 삶에 의해 대변되는 언어 체계 안에서만 그러한 표현들이 충만한 의미를 갖는다. 다른 언어 체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부활의 언어는 고백하는 주체, 고백의 행위 그리고 고백을 거행하는 교회 영역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고백된 실재는 그 전제 조건이자 결과로 이 3가지 요소를 통해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교회의 믿음을 바탕 지으며, 교회의 믿음은 부활에 신빙성, 의미, 진리를 부여한다. 부활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본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부활의 사실은 입증될 수 없고 단지 하나의 측면 아래 드러나는 계시의 결실이자, 다른 측면 아래 드러나는 믿음의 결실로 감지될 수 있을 뿐이다. 믿음은 그 믿음을 일으키는 사실들과 표징들에 바탕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구상되는 것은 개인의 결실이다. 신적 자유의 선물이 선행하고 인간적 자유의 응답이 그 뒤를 따른다. 오직 새로운 인간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인간', '종말적 아담', '선취된 미래'인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을 알 수 있다.

2.7.3. 부활의 내용

2.7.3.1. 신학적 내용
예수의 존재와 활동 전체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고려되고 있다. 하느님은 먼저 표징과 기적을 통해 그 안에서 활동하고, 이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통해 그의 죽음과 더불어 구원 계획을 실현하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의화를 위해 그를 부활시키는 가운데 다시 추인하였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설교와 부활 이후 공동체 간의 연속성이 드러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통해 일한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다. 부활은 하느님이 이미 그 이전의 역사에서 자신에 대해 드러낸 바 있는 것을 급진적으로 진전시키는 가운데 이룬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다.

야훼의 구원 행위와 예수의 증언,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설교 사이에는 연속성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질서에서 인간 창조가 완성에 이르리라는 것을 믿음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느님에 대해 제시한 정의,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정의에 대한 추인이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느님은 예수의 육화된 존재 안에서 활동한다. 예수가 성자로서 성부와 더불어 갖는 관계는 종속이 배제된 상호 관계를 말한다. 동시에 성자의 활동이 고려되지 않은 성자에 대한 성부의 활동 또한 없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하려 했듯이, 예수가 부활에서 완전히 수동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활의 주체가 예수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다양한 정식은 신약 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은 세상에 다가오는 하느님의 접근 방식을 최고로 드러낸 형태다. 그것은 세상의 일부분을 신적 생명과 통합한 최고의 모습이기도 하다. 부활한 예수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생명 자체 품어진 인류를 대변한다. 이는 창조된 세계와 강생을 최고의 완성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하느님의 활동은 인간을 최고로 변모시키며 세상의 흐름을 바꿔 놓는다. 이로써 세상은 긍정적이고 철회 불가한 형태로 자신의 목적을 향해 방향 지어졌다. 아직 도래해야 할 것은 이미 시작된 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2.7.3.2. 그리스도론적 내용
만일 부활이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활동이자 말씀이라면, 이런 하느님의 활동과 말씀은 예수에게 부어진다. 예수는 이를 받는 주체다. 하느님의 활동은 구성적이며 믿을 수 있으며 해석학적이고 신현이다.

a) 부활의 내용은 예수의 육화된 존재됨을 구성한다. 하느님은 부활을 통해 성자의 육화된 구성적 차원을 완성으로 이끈다. 이로써 성자는 자신의 영원한 인격이 실현되고, 성령의 활동에 충만히 부합하며, 영원한 하느님에 의해 결정적으로 규정된 인성과 더불어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 형태를 소유한다. 이와 관련해서 발타사르[101]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그리스도론은 예수께서 당신의 지상 생애만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삶 이전부터 이미 그러하셨던 자신의 존재가 되신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평가해야 한다. 이 점에서 모순을 보는 사람은 복음의 선포를 귀 기울여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 또한 이해할 수 없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Mysterium Paschale: The Mystery of Easter> 中
이미 영원으로부터 비육체적인 말씀이었던 분은 육화된 말씀인 한에서도 충만하게 그러하다. 두 말씀은 결국 하나의 존재이지만, 역사적인 위격은 그렇게 되는 가운데, 존재에 도달하는 가운데, 인간적/현세적 존재 안에서 실현되는 가운데 세워졌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예수가 부활을 통해 메시아/그리스도, 주님, 성자로 세워졌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 열쇠와 같은 구실을 하는 텍스트는 로마 1, 1-4로, 여기서 지속적인 주체는 "그분의 아드님"으로 드러난다. 이 텍스트는 2가지 진술을 담고 있다. 하나는 겸손하게 된 역사적 지위를 가리키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영광스럽게 된 지위를 가리킨다. 주석학적인 면에서 볼 때 2가지 해석은 모두 가능하다.
b) 부활의 내용은 신뢰할 만하다. 부활은 하느님의 심판으로서, 하느님은 이 심판과 더불어 예수를 심판한 자들 앞에서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하느님은 인간 예수의 말이 자신의 말씀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하느님은 그 말씀 뒤에 있었으며, 예수의 메시지는 부활의 순간에 신성한 가치를 획득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수의 모든 말씀을 쉼 없이 찾고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이제 그의 말씀을 부활한 분의 말씀으로 성찰하고 새롭게 귀 기울이게 됐다. 소급해 보자면, 부활은 예수의 인격을 성자의 인격으로 확증하며, 그의 말씀을 성부가 보낸 사자의 말씀으로 확증해 준다.

c) 부활의 내용은 해석학적이다. 랍비들이 그랬듯이 예수는 자기 메시지의 근거를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에 두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구약 성경을 상기하는 가운데 전승이 일상적인 삶에 적용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자신의 고유한 입장을 고수했다. 부활은 구약 성경에 대한 그의 설명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지혜 문학 전승과 랍비 전승에 대한 그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선포한 사건이다. 그 이전의 모든 말씀은 '율법'이었지만, 이제 그의 말씀은 은총과 진리다. 구약 성경은 예수 앞에서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위함에 있어 그 절대적인 가치를 잃어버린다. 이제 구약 성경의 궁극적인 의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d) 신현(神顯)적 내용.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의 발현과 지속적인 현존을 통해 부활은 사도들의 의식에 스승인 예수의 참된 정체성을 일깨워 주었다. 즉, 하느님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부활은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예수에게 있어 새로운 실재를 위한 구성적 사건이자 그에 대한 사도들의 새로운 의식을 일으킨 사건이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지성으로는 인식될 수 없다. 오직 믿음만이 신자로 하여금 예수가 있는 동일한 질서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그를 예수와 같은 본성이 되게 해 준다. 하느님은 과거에 몇몇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도록 허락하였다. 반면, 오늘날 우리를 포함해서 그밖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를 믿게 하는 선물을 허락하였다. 그를 보고 메시아로 알아본 사람의 지복이 있다. 그러나 그를 보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그를 믿는 사람에게 이와 동일한 지복이 확장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오직 계시와 은총의 결실일 수 있다.
2.7.3.3. 사도적 내용
만일 부활이 실제적인 시작을 구성하지 않는다면, 죽음 역시 실제적인 마지막이 될 수 없다. 또한 만일 죽음이 인간 역사의 완성자인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행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고유한 내용과 진정한 바탕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의 유일한 능동적 주체는 하느님이고, 그리스도는 수동적 주체이다. 그러나 또한 사도들이 예수와 그 존재의 새로움을 알아보는 가운데, 부활한 분을 자신들이 알았던 분과 동일시하고 부활한 분을 유령과 구분하며 그를 하느님 나라를 실현한 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님 편에서 사도들을 비추고 그들의 방향을 재정립해 주며 그들을 적합하게 해 주기 위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 된다. 그러므로 부활한 분을 만난 사도들은 더 이상 예수가 설교하였던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인격화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발견이나 계시 또는 회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베푼 하느님의 창조 활동이다.

오직 부활의 빛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느님의 지혜이자 권능으로 해석하게 함으로써 십자가에 대해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이며 호의적이 되게 해 준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더 이상 사도들에게 스캔들의 동기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외적인 사실일 뿐이다. 부활은 이 사실을 사도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신적 의미의 원리로 만들었다. 부활은 이 사실을 사도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신적 의미의 원리로 만들었다. 부활의 증인들이 제시하는 외적인 입증 이상으로, 하느님이 사도들의 마음을 비춰 주기 위해 활용한 내적 권능과 말씀이 여기서 개입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고 사랑하며, 하느님 나라를 해석하게 해야 한다.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이고 종말적인 새로움에는 사도들이라는 주체들의 쇄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오직 주체들이 대상과 같은 본질이 될 때 우리는 알압볼 수도 있고 믿을 수도 있다.
2.7.3.4. 구원론적 내용
예수의 부활은 우주적인 부활의 시작으로 이해되고 제안된다. 왜냐하면 이 부활과 더불어 시간의 마지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 맺어진 맏물이다. 따라서 그에 뒤이어 모든 사람들 역시 부활하게 될 것이다. 부활을 기점으로 그리스도의 운명과 사람들의 운명은 불가분리적인 관계 가운데 있게 되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죽은 자들이 부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자동적으로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면, 따라서 우리의 부활이 아니라면, 우리 신앙은 헛될 것이며, 우리는 결코 의화되지 못한 채 우리가 범한 죄 속에 남고 말 것이다.

하느님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희망의 하느님, 위로와 평화의 하느님, 우리 의화의 하느님으로 계시된다. 또한 부활한 예수는 세상과 죄에 대해 심판할 때 우리를 옹호해 줄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 거룩함, 권능의 회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참으로 누구인지 드러내는 가운데 그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그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지체들을 위한 힘이자 약속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활은 부활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해 주었다. 그리스도인 실존은 그리스도 부활의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해 죽음이라는 그의 운명에 참여한다. 하느님은 이미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우리었다. 이제 모든 것은 인류가 그와 일치하는 가운데 이루려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세례와 성찬례는 객관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를 바탕으로 향주덕과 윤리적 실현 그리고 종말적인 희망을 통해 실존적인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셨던 바로 그분께서 하느님에 의해 구원되셨기에, 또한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의지를 역사적인 차원에서 실제적이고 철회 불가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드러내셨기에, 우리는 구원되었다."
칼 라너,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中
2.7.3.5. 종말론적 내용
부활은 역사의 완성이자 역사의 마지막을 앞서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완성은 파괴의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업적에 의한 세상의 화해를 말한다. 바로 여기에 창조된 세계의 모든 의미가 있다. 이는 시초부터 완성을 향해 방향 지어진 과정과 맞물려 있다. 하느님은 이 과정의 완성에서 절대적이고 철회 불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을 피조물에게 내어 준다. 이는 최종적인 부활의 상태에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예수는 이 최종적인 부활의 표징이자 원인이며 이를 선취한 분이다. 부활은 종말에 대한 예변법[102]이며 이와 함께 우주의 역사를 이해하게 하는 열쇠가 된다.
2.7.3.6. 교회론적 내용
예수의 부활은 그의 죽음 이후 흩어진 사람들과 그를 부인한 사람들을 확정적이고 선교적인 공동체로 만들어 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예수의 인격과 그가 선포한 메시지를 자신들의 설교에 담았다. 예수의 말씀과 교회의 케리그마는 유일한 복음을 형성하기 위해 서로 하나가 된다. 부활은 그리스도교와 교회 그리고 신약 성경의 발생적인 원리를 대변한다. 때문에 부활은 그리스도교 실재 전체를 끌어들이고 해명해 주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결정적인 계시인 한에서 부활은 신학의 제1단어이자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을 해명해 주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

2.8.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접근

2.8.1. 교회 내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다시 자리매김하지 않게 하기 위해 상상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의 시대와는 상당히 다르며 많은 거리를 두고 있다. 종말적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인성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 안에 잠기기 위해 시간으로부터 나온다. 바로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그는 역사의 현시점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현존한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파스카 날 아침에 제자들에게 현존하였듯이 그렇게 오늘 우리들에게도 현존한다. 그리고 그와의 만남은 교회의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다양한 근본적인 체험들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이자 인간의 근본적인 열망과 필요에 대한 응답으로 감지된다.
2.8.1.1. 성찬례
신약 성경에 나오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의 발현은 전례적인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빵을 쪼개는 것은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을 위해 유보된 특별한 장소로 드러난다. 예수의 역사적인 삶에 대한 고마운 기억이자 부활한 예수와 동일화된 한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세례와 성찬례를 통해 형성된다. 만일 세례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운명과 일치하게 해 준다면, 성찬례는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업적에서 맺어진 구원적인 열매에 참여하게 해 주며, 이와 동시에 그의 몸인 교회에 합체시켜 준다. 또한, 성찬례는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격과 친교를 나누고 그의 계시에 다가서게 해 준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에서 루카는 전례적인 용어에 호소했다. 그는 빵을 쪼개는 것에 대해 언급했으며, 예수가 빵을 뗄 때에 두 여행자들이 그를 알아보게 되었듯이, 이어서 모든 사람도 그리스도가 빵을 쪼개는 성찬례에서 그를 알아보게 되리란 것과 그야말로 분배된 빵임을 알게 되리란 점도 지적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있었던 예수의 발현은 제자들에게 그의 이전 생애를 상기시켜 주었으며, 그들을 사도들의 공동체로 보냈다. 이러한 그들의 귀환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체험에 대한 선포가 시작되었다.
2.8.1.2. 따름
복음에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복음에 의해 촉발된 앎과 체험 그리고 행동에서 오는 열매를 향유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삶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은 과학적인 인식이나 심리학적인 조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현존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될 때 생기는 열매다.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현존, 그리스도의 심오한 계시는 바오로 사도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이 되고 세상 안에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게 하며 자신을 기꺼이 하느님께 맡길 수 있게 해 주었다.
2.8.1.3. 실존적 그리스도인들
믿음과 희망과 사랑[103]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세례를 통해 받은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시작되며,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선물들에 힘입어 그리스도에 관한 다양한 실재들에 대해 충만한 인식에 이른다.

2.8.2. 인간의 근본 체험들로부터

믿음 이전에 인간을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닌 의미와 내용으로 방향 지어 주는 근본적인 인간의 체험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사람이 간직한, 삶을 실패하지 않고 싶다는 내적 열망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가 전한 부활의 메시지는 공허한 것에 기대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실들, 그의 가르침, 그의 인품과 삶의 방식 등 이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인간은 자신이 간직한 근원적인 희망을 해독하고 부활에 이르는 인간학적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
2.8.2.1. 초월적인 길: 희망
의미의 충만함을 향한 긴장으로서의 희망은 정의 그 자체로 볼 때 죽음에 대항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다. 자신의 유한함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인간은 누군가 자신의 육체성 안에서 철저히 생애와 계획성을 추인해 주길 고대한다. 이러한 차원들은 극복되고 정화되며 실현되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염원을 구체화하고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쇄신된 최종적인 존재로 변모시켜야 한다는 필요를 통해 암묵적으로 부활을 감지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초월적인 필요와 함께 자신의 부활에 대한 희망의 행위를 특히 자유로운 수용이나 거부의 형태로 완성하게 된다. 사실 모든 인간은 책임이 수반된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에서 최종적인 것을 향한 질서 가운데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가 지닌 함의를 주제화하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리고 신앙으로 이를 받아들이든 좌절한 채 거부하든 상관없이, 이러한 주장을 경험하게 된다."
칼 라너,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中
2.8.2.2. 인격적인 길: 사랑
인격적인 사랑이, 정서적이고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타인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단순한 소유 충동이 아닐 때, 그것은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과 그를 향한 절대적인 희망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희망은 서로 불가분리적이다.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기쁨과 고통을 제공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없다. 사랑은 부활이라고 하는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을 미리 앞서 보여 준다. 만일 사랑이 삶에서 드러나는 최고의 실재라고 한다면, 부활한 존재는 이미 그 정점에서 선취되어 드러난다. 하느님이 활동을 시작하는 곳에서 마지막 말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사랑에 속하게 된다. 부활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2.8.2.3. 역사적인 길: 정의
메츠[104]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기억이 내포한 인간학적인 의미를 밝힌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기억은 맹목적인 또는 전체주의적인 모든 권력 앞에서 무한한 비판적 힘을 갖고 있다. 우리가 무죄한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한, 돈과 권력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그들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는 못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선포는 어떻게 하느님이 신성 모독자이자 불의한 자로 거부된 이의 정당함을 입증해 주고 그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었는지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은 역사에서 무익한 자로 거부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억이자 동시에 약속이다. 하느님은 모든 겉모습과 권력을 넘어 거짓과 이데올로기 이상으로 인간과 정의를 감시한다. 인간은 이러한 근본적인 인간학적 경험을 통해 단순히 어떤 증거가 아니라 적어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적 언명과의 연결 고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사전적인 성찰도, 그 이후 이어지는 그 어떤 역사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진리를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교회에 대한 철학과 역사적 활동은 이성을 신앙으로 방향 지어 줄 수 있지만, 신앙을 생성할 수는 없다. 하느님 편에서나 인간 편에서 모두 자유와 사랑은 실제적인 자료이자 개인적인 은총이지만, 어떤 이론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떤 실천으로 환원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8.3. 부활: 인간의 생각과 열망을 넘어서는 하느님 사건과 신비

그리스도교는 결코 부활을 인간적인 성찰이나 필요성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라 구체적인 주체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새로운 행위로 제시해 왔다. 그리고 이 선상에서 긍정적인 내용과 목적으로 경험된 그 이전의 그의 운명과 연계하는 가운데, 부활이 모든 가능한 체험을 넘어 모든 겉모양을 거슬러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부활 메시지는 부활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한에서 형이상학, 인간학, 신학을 전제로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결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의 표징이자 원인으로 바꿔 주시는 한에서, 부활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개인적 죽음이 인류 전체를 위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모든 개별적인 요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을 개인의 역사로 고정시키며 이 부활을 해석의 전통의 빛 아래 해명해 준다. 그러한 요소들은 그의 부활을 보편적인 개념이나 인간의 공통적인 희망으로 축소시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부활이 상상될 수 있고 수용될 수 있으려면, 형이상학이나 역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종의 실존 형태와 도덕이 필요하다. 이 선상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는 자기 존재의 동일한 형상을 실현한 분으로 승인된다. 복음과 진복팔단은 인간의 염원을 정화시키고 그 폭을 넓혀 준다. 더 나아가 인간의 주도권을 완성시켜 준다. 예수처럼 되기 위해 아름다운 모험을 대면하는 사람은 새로운 인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인류에 있어서 안타깝게도 역사는 자신의 모든 어두운 현실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무죄한 나약함과 비폭력을 통해 더욱 더 전능한 분, 그 어떤 의인보다도 훨씬 더 의로운 분으로 드러난다.

부활의 메시지와 부활한 그리스도가 늘 실제로 현존한다는 메시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 메시지가 내포한 합리적인 특징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를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와 이 자유를 매료하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오는 귀결이다.

2.9. 성부의 계시자, 성령을 주시는 분, 교회를 일으키시는 분

부활은 세상에 하느님의 영을 넘치도록 부어 준다. 즉, 부활은 예수의 인성에, 그리고 그의 인성을 통해 사도들과 교회 그리고 우주 전체에 하느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 준다.

2.9.1. 성령, 메시아, 성자

메시아는 영의 도유를 받는데, 바로 예수 위에 영이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가 곧 메시아다. 신약 성경에서 이러한 연관성은 루카와 요한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다시 기억되고 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소개된 포도주는 새로운 구원의 국면[105]을 그 이전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물[106]과 구별해 준다. 또한, 영의 세례는 사자들 가운데 마지막 사자인 성자를 여타 모든 사자와 구별해 준다. 그들은 성자에 앞서 온 사람들로서 단지 물로 세례를 베풀 뿐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예수를 하느님 나라의 사자와 동일시하는 가운데 그의 공생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전해 준다. 루카는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그를 메시아의 사명을 받고 영에 의해 도유된 분으로 규정지었다. 이어서 드러나게 될 여러 가지 표징들은 그가 하느님의 영을 간직한 분(루카), 메시아이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분(마태오, 마르코)임을 보증해 준다. 예수는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한 분이다. 그는 하느님의 영을 간직한 분이자 그 영에 의해 변화된 분이며, 다음으로 그 영을 선사해 주는 분이다.

2.9.2. 성령에 의해 자극되어 변모된 분이자 성령을 전파하는 분

예수의 모습이 군중을 매료시킨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움직여졌기 때문이다. 이 영의 권능을 통해 그의 사명을 보증하는 표징들이 생겨났다. 성령이야말로 사명을 통해 예수에게 자격을 부여하고 그 사명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는 가운데, 그를 추인하고 움직이며 힘을 불어넣어 준다.

예수의 인격을 영원한 성자로 정의한 신학은 그에 관한 다음 2가지 전망을 서로 연결해야 한다. 첫 번째 전망은 인류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활동을 말씀의 인격에 부여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신성과 인성을 혼합하거나 동일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107] 두 번째 전망은 신성과 인성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으로, 이 노선은 인간 예수에 대한 성령의 활동에서 오는 결과로 그의 인성과 신성이 같은 본질을 누린다고 보았다.[108] 예수의 신적 위격과 인성 간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 간의 삼위일체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활동과 유비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성령은 바로 이 인성을 성자의 인격에 적합하게 하고 그가 자신의 사명을 매일 알게 함으로써 이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이렇게 해서 말씀의 영원한 위격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적 노선의 정당한 염려와 인간 예수의 역사와 성장 그리고 지속적인 쇄신에 대한 안티오키아적 노선의 염려가 통합된다.

예수의 지상적 실존 가운데 활동한 성령은 이제 예수의 인성을 변모시키는 가운데 부활에 개입한다. 그러나 성령은 인간 예수를 소유하지 않고 그에 대한 권능을 행사한다. 이는 그를 획득하는 게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 주는 선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성령은 마리아의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기원에 있어 근본적이다. 그는 메시아의 여정을 마련해 준다. 또한 성령은 부활을 통해 예수의 보편적인 구원 업적을 완성에 이르게 한다.

신학이 성부와 성령 간의 영원한 관계들을 분명하게 해명한 후에야, 두 위격이 시간 안에서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관계들도 해명할 수 있다. 즉, 두 위격이 삼위일체 안에서 갖는 관계, 그리고 인간인 예수와 갖는 관계가 그것이다. 성부 하느님은 성령 가운데 자신을 예수에게 서사하며, 성령은 인간인 예수가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그에게 신적인 형상과 권능을 선사한다. 인간 예수는 바로 이런 성령의 선물에 힘입어 자신의 인간적 실존을 통해 인격적인 충만함에 이르고 성부를 계시할 수 있는 투명함을 갖추게 된다. 이로써 그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유일한 하느님의 모상이자 메시아이며 성자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격화된 구원이다. 그는 구원된 인류, 즉 완결되고 완성된 인류로 불가역적으로 하느님 앞에 있다. 또한 그는 구원하는 인류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연대하며, 모든 이들과 더불어 공유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성령과 예수 사이에 있는 삼중적인 관계다.
여러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생애는 성령의 활동에 의해 비추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다음과 같은 목적을 향해 방향 지어졌다. 즉, 성령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요한은 하나의 시선을 통해 예수의 삼중적인 실재를 끌어안고 있다. 즉, 성령이 그의 위에 머무는 것,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리라는 것, 그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받은 충만한 성령을 모든 사람 위에 부어 주도록 예정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선사하는 충만한 성령으로 살게 될 것이다.

루카와 요한에게 있어 성령이 부어지는 것은 서로 다르게 드러난다.

2.9.3. 파스카에서 삼위일체로

부활은 창조주이자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에 대한 계시의 정점이다. 또한 부활은 그리스도를 성자로 계시하며, 성령을 하느님 안에서 일치와 사랑의 원리이자 사람들을 위한 일치와 사랑의 원리가 되었음을 계시한다. 보편적인 구원의 표징이자 원인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의 창조 계획의 완성이다. 사실, 창조의 최종 목적은 인간에게 신적 생명을 충만하게 통교하는 데 있다. 이러한 통교는 인간을 삼위일체의 신비 안으로 인도하고 통합시켜 준다.

이러한 전망은 최근 수십 년간 부활에서 출발해서 삼위일체를 해석하기 위해 전념한 신학에서 이루어진 발전을 해명해 준다. 수난이 죽음을 내포하며, 성부를 향한 이행이 예수를 성자로서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내포하고, 동시에 성령의 선물을 내포하는 한에서, 부활은 삼위일체를 해명하는 열쇠가 된다. 이 새로운 연구는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해서 삼위일체를 인간 정신과의 유비 가운데,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유일한 주체가 차별화되어 실현된 것으로 숙고함으로써 인간 주체를 구성하는 단일함과 영원함에 함축된 실재로 보려는 사색적인 노력을 잠시 유보시켰다. 이 선상에서 성 빅토르의 리카르두스[110]가 삼위일체에 적용한 사랑의 유비[111]도 한편에 놓아두었다.

반면, 역사적으로는 부활 사건에서 완결된 하느님의 계시를 바라보고 거기서부터 내재적 삼위일체와 성부/성자/성령으로서의 그 영원함을 숙고하고자 했다. 발타사르와 뒤렐[112]은 각각 다른 측면에서 부활 사건에 드러난 삼위일체의 신비를 바탕 지으려 했으며, 그들은 이 분야에서 선구자들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신학적 원리로부터 시작했다. 만일 하느님이 말씀과 활동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다면, 그의 최고 계시는 사람을 위한 하느님으로서의 활동이 최고로 드러나는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최고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는 십자가와 부활이므로, 삼위일체 세 위격의 활동이 표현되고 계시되는 곳 역시 그곳이어야 한다. 삼위일체와 부활은 불가분리적이다.[113] 삼위일체의 계시는 구체적으로 부활 사건에서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범신론에, 다른 한편으로는 비본질주의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성령의 활동에 대해 다시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성령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인격이 지닌 육화적 형태, 즉 인성을 통해 드러나는 그 인격의 표현과 관련해서 살펴 보아야 한다. 이 육화된 인격은 완성과 충만 그리고 완결을 향한 실제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성령은 성자의 인격과 그의 인적 본성을 중개한다. 이는 마치 성령이 영원으로부터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을 중개하는 분인 것과 같다. 성자의 역사는 성부를 어우러져 들어가게 하며 성령에 의해 완결된다. 이렇듯 서로 완결하고 계시하는 운동에서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계시가 완성된다.

부활의 신비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관상하기 위한 거울이 된다. 한 위격의 심연은 다른 위격의 심연에서 반영되어 드러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 위격의 광채는 다른 위격의 광채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신학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리킨 목표에 이르게 된다. 그 목표란 인간이 자연적으로 아는 것들과의 유비를 통해, 다양한 신비들과 인간의 최종 목적 간에 존재하는 관계를 통해 신적 실재들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것이다.

최근 연구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전의 성찰이 지닌 성서적, 실제적 근거의 불충분함을 분명히 지적하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신비에서 세 위격의 실제적이고도 능동적인 현존을 재발견하도록 밀어붙였다. 그 극단적인 형태에 있어서 드러나는 변증적 설명은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근거로 인해 받아들여질 수 없다. 스콜라적인 설명은 하느님을 우리 역사의 실제적인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하며, 하느님이 그 역사를 받아 내지 않는 가운데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입증하지도 못한다. 헤겔은 철학적, 신학적 계몽주의를 넘어서는 가운데, 어떤 경우에는 소박하게 또 다른 경우에는 본질적인 것을 망각한 채, 그리스도교를 최고의 역사가인 하느님에 대한 종교로 지적하고 어떻게 그리스도가 역사 안에서부터 바로 그 역사를 생기 있게 하는지 지적하는 가운데, 신학을 위해 봉사했다. 절대자인 하느님은 역사 자체 안에서부터, 따라서 죽음 안에서부터 그렇게 계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이 새로운 전망을 충만히 통합한 조직 신학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신약 성경은 성부와 성자를 멀어지게 할 수 있는 죽음의 틀에서 어떤 식으로든 두 위격을 언급하지 않으며, 성부가 성자의 죽음을 거의 직접 원했던 것처럼 언급하지도 않는다. 성부는 성자를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는 가운데 성자를 세상에 내어 주었다. 또한 바로 이 육 안에서부터 죄와 죽음의 논리를 뒤집었다. 이러한 일치와 차이로부터 출발해서, 그리고 구원 활동에 있어서 드러나는 상호성과 등위성에서부터 출발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숙고해야 한다. 이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사랑인 하느님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되기 위함이다.

순수 철학적인 기준에서 바라본 이러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은 2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2.10.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이고 보편적인 특징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구성한다. 동서방의 모든 다양한 신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핵심 교리에 여타 다른 조항들을 첨가했다: 지옥에 내려가심 / 하늘로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심 /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 이런 표현들이 간직한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2.10.1. 종말론적 최후와 구원적 보편성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가 그의 말씀과 인격에 의해, 다양한 표징과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변모시켜 주는 능력에 의해, 재창조와 용서의 질서 안에서 새로운 은총의 시대에 하느님과의 화해에 의해 역사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에 있다.

반면 사도들의 설교에 있어서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의 권세가들이 죽인 바로 그 예수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부활하였다. 그는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었다. 하느님은 그를 주님이자 메시아로 세우는 가운데 죽은 이들로부터 일으켰다. 이는 예수가 완전히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제 인간을 구속하던 모든 것은 다 부서지고 말았다.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의화를 위한 부활이라는 원초적인 케리그마는 후대의 신경에 첨가된 여러 조항들과 다음과 같이 연결되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적/보편적 의미, 그 종말론적 가치를 선포했다. 종말론적 가치라 함은 그것이 엄밀히 말해 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세속적인 실재들이 지닌 다양한 차원들을 훨씬 넘어선다. 종말론적 실재는 새로운 창조, 최종적이며 최고의 실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실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숙고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와 같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시공간적 범주들에 적응하지만 언제나 이러한 범주들을 초월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 편에서 극단적인 가능성을 의미한다. 반면, 부활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편에서의 극단적인 가능성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내포한 종말론적인 차원이며 그 보편적인 의미로, 신경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식들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수렴적, 충만적 차원은 신약 성경에서 여타 다른 범주들과 함께 표현되었다. 모든 장소는 예수와 더불어 하느님의 현존으로 채워졌으며, 모든 시간은 하느님의 성화하는 실재에 근접하게 되었다. 예수는 시간을 완결하고 장소를 충만하게 하는 당사자이다. 그리스도의 물질적 육체를 가시적으로 연장하며 성화하는 자신의 권능이 표현되는 장소인 교회는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한다.

그리스도로부터 따로 분리된 상태에서, 인식 가능하고 친절하며 호의 가득하고 화해시켜 주는 하느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부는 모든 권위와 구원, 모든 진리와 심판을 그리스도에게 맡겨 주었다. 이제 그 어떤 수수께끼도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에 놀랄 것도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성부에게 영광을 올리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는 주님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지고의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인간적인 장소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다.

2.10.2. 하늘에 오름, 지옥에 내려감, 영광과 심판 속에서 역사의 최종 완성

신경의 여러 조항이 갖는 실질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지닌 보편성과 결정적 특징을 통해 형성되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이제 시공간을 초월하며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분으로 선포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곳의 주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면, 히브리서는 모든 시대의 주님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파스카 신비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모든 국면까지 그리고 모든 필요까지 확장된다. 신경에 있는 이 조항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이 지닌 보편성, 연대성, 효과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텍스트와 교의 텍스트는 시간적이거나 지형학적인 문제에 직접 대답하지 않는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마르틴 루터는 이미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간 사건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바 있다. 최근에는 발타사르가 인류의 죄로 인해 야기된 고독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그리스도가 철저히 나누었다는 표현으로 이 신비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저 아래의 장소들'을 방문했고, 거기서부터 승리자로 귀환하였다는 것은 그 어떤 고독도 거리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인간을 결정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떼어 낼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킨다. 성자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겪었으며 마침내 극복하였다. 고대 교회는 성찬례와 세례 예식에서 이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성토요일은 이 2가지 측면을 위한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구원 사건의 실제적인 내용과 표현 형식 간의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이제 이러한 조항들이 지닌 본질적인 중요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인류와 동떨어진 분이 아니다. 그는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그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있는 분이며 인류와 우주가 세말에 그의 안에서 그와 함께 통합되고 수렴되기 전까지는 '맏이이자 머리로서' 불완전한 분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심연이 인간을 위협하는 모든 것에 대해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지옥에 내려가심). 또한 그는 상위의 세력들을 패배시키고 그들을 인간에게 복종시켜 주었다. 그는 인간 위에서 탁월하게 통치한다(승천). 그는 하느님의 진리가 간직한 내용을 복원하였으며, 자신이 선포한 복음에 따라(마지막 오심) 그 진리의 기준들을 실행할 것이다(심판). 이미 왔으며 장차 돌아올 분은 온전히 같은 분으로, 세상 창조 이전에 선재하였으며 세상을 창조한 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선재와 창조 활동, 역사적 파견과 완성-완결하는 역할은 서로 통합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최종적으로 하느님과 다시 이어주었다(승천). 그는 어떠한 항변도 없이 죽음을 없애기 위해 죽음을 체험하였으며, 모든 이를 해방시켜 주는 자신의 승리를 모두에게 선포하기 위해 죽은 이들을 방문하였다(지옥에 내려가심).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하느님, 영원한 성자, 세상의 창조주로 고백한다(선재와 세상의 그리스도론적 구성). 따라서 그는 또한 마지막에 올 때에 정의를 회복하고 심판하는 가운데 세상을 완성/완결할 것이다(파루시아)[115].

3. 교부 시대, 그리스도론적 공의회들

3.1. 역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결코 사멸할 그의 지상 생애로 끝나지 않으며, 그를 인격으로 알아본 현대인들 사이에 일으킨 인상만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그의 현존과 영향은 지속되었으며 그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교회의 성찰과 더불어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세대에 걸쳐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동시대적인 모습으로 소개되곤 했다. 그들은 그의 업적을 성사적인 형태로 거행했으며 언제나 더 잘 그를 알고자 노력해 왔다.

3.1.1. 근원에 대한 전수

역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의 바탕은 교회 안에 살아있는 전승이었다. 이 전승은 사도적인 설교, 성사적인 거행, 공동 생활, 성령에 대한 체험, 신자들의 증언, 선교 활동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표징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결코 과거 속에서 철저히 규명되지 못했다. 성부의 업적으로 인해 영광스럽게 됨으로써 그리스도는 영원한 현재 가운데 존재하게 되었다. 이는 깊은 친밀함으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과 함께 관계를 맺게 해 준다. 근원에 대한 역사와 초대 교회의 삶은 그 이후 이어지는 모든 세대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는 역동적인 2개의 극이다. 많은 문헌과 기념물들이 그리스도가 '어제' 발설한 말씀, 그가 '한 번으로 영원히' 말씀하고 행한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사도, 성령, 성사들은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에게 전해 주는 말씀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3.1.2. 사도 계승과 교회적 중개

그리스도는 사도들의 중개를 통해 자신을 세상을 위한 생명으로 통교한다. 그의 말씀은 사도 공동체의 경청과 이해 그리고 해석 가운데 생명을 얻게 된다.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기억, 적용, 해석은 사도 시대에 이루어지고 신약 성경에 쌓이는 가운데 종결되지 않는다. 사도 전승은 교회 전체의 역사와 교회가 전해 준 규범에 대한 전승을 배제한 채 결코 이해될 수 없다. 교회의 규범 전승은 이를 보장하는 그 최종적인 바탕과 구조를 주교 계승에 두고 있다. 또한 이 주교 계승은 성사적으로 실현된다. 사도들을 계승하는 것은 신약 성경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설립된 각 공동체를 통치하는 주교들이다. 하느님은 그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를 맡겨 두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마법적인 신탁의 말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말씀'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전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전수 없이는 기원에 대한 말이 있을 수 없으며, 규범을 바탕으로 한 해석 없이 권위 있는 전수 역시 있을 수 없다. 모든 기억과 서술에는 해석이 담겨 있다.

교회는 예수의 실존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건 그리고 신약 성경에 담겨 있는 바 그대로 표현된 그 기원에 대한 사도 전승에 호소하고 있다. 교회는 성경에 담긴 말씀을 하느님의 계시로 수용하는 가운데 이를 자신의 생명을 위한 원천이자 기준으로 여긴다. 그러나 말씀은 해석되고 현실화될 것을 요구한다. 교회는 매일의 강론과 장엄한 규정을 통해 그 말씀을 해석하는 가운데, 자신을 그 말씀의 봉사자로 여기며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하게 하고 이로써 그들 가운데 믿음에 대한 순명을 촉진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결코 지성에 의해 비춰진 의지로부터 생겨나는 이성적인 동의를 배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론의 역사는 우선적으로 성경, 즉 구약과 신약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본 해석의 역사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해 준다. 또한 이와 동시에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과거의 사건이자 동시에 오늘 살아 있는 분으로 만나게 해 준다. 그리스도는 강생함으로써 세상과 같은 본질을 취하였으며,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과 권능에 통합됨으로써 모든 시대와 더불어 동시대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성령, 사도, 성찬례의 선물과 더불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고 자신과 더불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가운데 함께 친밀한 관계에 참여하게 해 주었다.

그리스도론의 우선적인 문제는 그의 인물됨을 규명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위한 의미와는 별개로 규명될 수 있는 분도, 계속해서 그를 메시아요 주님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공동체 밖에서 규명될 수 있는 분도 아니다. 순수 자유주의자, 순수 개신교도는 어떠한 교의도 배제한 채 모든 권위 있는 해석에 선행하는, 사멸할 이 현세의 삶 속에서 투명하게 드러나는 적나라한 모습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노력으로 재발견하기 위해 또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케리그마에 대한 공동체적인 선포 가운데 그의 실존적인 메시지를 포착하기 위해 시간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톨릭 교회는 언제나 전승에 맡겨져 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그 기원과 연결되지만 언제나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 사도적 권위, 전체 공동체의 충실한 의식과 함께 있다.

3.1.3. 그리스도의 삼중적인 몸과 세상에서의 현존

지금으로서는 역사 안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을 알 수 없으며, 그의 성체적인 몸 그리고 교회적인 몸과 별개로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3가지 몸은 세상 안에 육화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유일하면서도 차별화된 표현을 구성한다. 그리스도론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실재 간의 상호 이해의 역사다.
이 3가지 실재는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인식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과 진배없다. 첫 번째 계약의 백성 없이, 교회 없이, 그리고 성체 없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가 우리를 위해 어떤 분이며 어떤 분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앎을 과거의 증언과 현재의 체험을 통해 받는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배제한 과거의 증언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한 과거의 객관성을 배제한 오늘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맹목적일 수 있고 수많은 힘과 마술 그리고 환영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증언과 체험은 그 자체로 다함이 없지만,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희망을 향해 개방되어 있다.

3.1.4. 그리스도를 전수하는 네 가지 형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간으로 드러나는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적인 실재에 대한 4가지 방식의 전수가 이루어진다. 이 넷은 서로를 내포하며 상호 작용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공의회의 규정과 그리스도론적인 체계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해 주지만 그렇다고 그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실재를 꿰뚫어 보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라는 실재는 절대적으로 우리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비 앞에 직면해 있다. 이는 계시되기 이전에는 결코 감지될 수 없는 것으로, 계시된 후에야 오직 인간 이성에 힘입어 추론되고 해명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느님이 철회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최고 목적인 한에서 하느님에 대한 태생적인 앎을 소유하므로, 그는 이 신비 앞에서 일정한 동질성을 향유한다.

3.1.5.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발전의 요인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구원에 관한 사도 전승의 발전은 교회의 삶이 간직한 내적 요소들을 비롯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요소들의 영향 그리고 이 요소들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교회의 내부적인 환경은 신앙 고백과 그리스도론의 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자극을 주었다. 여러 보편 공의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구조적인 이해를 위해 기여했다. 이런 공의회들뿐만 아니라 사도적인 케리그마 명제, 전례 거행, 신앙생활, 예술, 영적 체험, 신학적 성찰은 근본적이고도 결정적이다. 교회의 신학자들은 먼저 랍비 주석에, 그다음에는 삼위일체, 강생, 구원의 신비를 통찰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시대의 사상가들의 철학적 논리에 도움을 호소했다.

그다음으로 외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중에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주요 요소로 들 수 있다. 그리스 문화와의 만남, 교회와 로마 제국과의 협력,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그리고 철학적 관념론의 문화적 기여, 근대의 실증주의적이고도 과학기술적인 전망, 좀 더 최근에는 토착화, 대화, 에큐메니즘적인 비교에 대한 요청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제3세계를 향한 개방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무관하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 과정에서 각각의 언어는 독특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자신의 해석적인 범주를 제시했다.

3.1.6.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현존과 세상 안에서 그분의 현존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어지는 이해의 역사를 묘사함에 있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되는 사안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한 성자인 그리스도의 존재론적인 구성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가운데 있는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생 신학이 전부는 아니다. 이 사안이 내포한 본질적인 관심사의 다른 극은 우리의 구원과 전체적인 인간의 역사를 위해 있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다. 또한 구원론은 역사를 다시 읽어들이는 순간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론은 선재한 말씀에 대한 신학이자 세상 종말 이후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된 성자에 대한 신학이기도 하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철학적 그리스도론은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리스도론의 역사는 근본적인 3가지 커다란 국면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먼저 이 3가지 국면 간에는 강조점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드러나고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3.2. 신약 성경에서 2세기까지

3.2.1. 그리스도론의 초기 문화적 맥락

1세기 후반에 이르러 히브리 공동체와 그리스 공동체 같은 지역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성경 본문이 집필되고 이어서 신약 정경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유다이즘, 헬레니즘과 접촉했다. 이 두 사상은 당시 청자들의 태도를 미리 규정짓는 거대한 2개의 문화로서,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가 경청되고 수용되기 위해 선교사들이 염두에 둬야 하는 바탕이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처음으로 유다 회당에서 그리고 그 후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116]에서 설교했다고 전한다. 또한 루카 복음 사가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사도적, 선교적 방향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유다인과 그리스인"이라는 정식을 종종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이를 통해 당시의 모든 종교, 문화 세계를 가리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론은 눈앞의 이 2가지 문화 세계를 갖는 가운데 숙고되었다. 교회를 형성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 안에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가져왔으며, 여기서부터 출발해 그리스도에 대해 성찰했다. 이러한 지평에서 볼 때, 히브리적인 묵시를 비롯해 의견을 달리하는 에세네파,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헬레니즘화된 유다이즘[117]이 미친 영향에 대한 인식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더 나아가, 이교 문명에서부터 직접 생겨난 여러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제3의 영적인 극을 형성했으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가르침을 숙고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적인 원체험이 이 3개의 세계와 만나는 가운데 생겨났으며, 기원들에 대한 역사적 서술, 이스라엘의 성경에 대한 언급, 그리스적인 개념들을 통한 정식화, 독특한 철학 용어들을 혼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문화가 신앙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의 내용을 왜곡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보편적인 구원자로 소개한다. 이런 담화는 역사적 설화에 의해 움직여지는 가운데 그 궁극적인 근거로, 그 비옥함과 의미로 인도해 주는 형이상학적 숙고에 온전히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진리, 보편성, 결정적 특성에 대해 숙고하고 표현할 때,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며 '헬레니즘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2.2. 신약 성경에 있어서 두 개의 근본적 그리스도론

신약 성경은 역사적 차원을 넘어서는 다양한 언명과 범주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나 살았지만 동시에 존재의 증여자로서 창조적인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오는 구원이지만 동시에 세상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위격은 단일함 가운데 하느님의 충만함, 우주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플레로마'(πλήρωμα), 즉 완전함 자체이다.

그리스도론의 핵심은 지상적 예수와 오늘날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사도들에 의해 인식된 인간 예수와 하느님의 영원하신 아드님 사이의 일치에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주님이고 육신 가운데 있는 말씀이라는 정식은 단순한 히브리적, 역사적, 수평적 전망에서 신학적, 수직적, 종말론적 강독으로 이행하게 해 준다.

3.2.3. 근본 문제들: 테올로기아[118]와 오이코노미아[119]

그리스도론의 본질적인 과제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런 한에서 하느님이시다."라는 명제의 의미를 명료화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새로움과 유다적인 유일신론과 하느님의 초월성 간에 연계를 설정하기 위한 지적 추론 과정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위격은 서로 불가분리적인 실재다. 이 두 실재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두 세기 동안 신학적 성찰의 중심 대상으로, 그에 대한 해결책을 니케아 공의회[120]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121]에서 찾았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 계획의 역사적 실현에 대해 성찰하면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구성이란 전망에서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론은 다음과 같은 2가지 근본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하나는 신적인 삼위일체의 신비를 기점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예수에게 도달하고 그를 강생한 성자로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의 생애와 부활을 기점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그를 메시아이자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두 실재 사이에 흐르는 상호 관계가 명료화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4세기 말이 돼서야 신경을 구성하는 성부에 대한 신앙, 성자에 대한 신앙, 성령에 대한 신앙 간의 연계점이 만족할 만한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강생은 교회 안에서 경험된 신앙의 논리에서나 유대인들, 이방인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견지해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2가지 사안이자 문제다. 교회의 교부들은 유대교와의 대화에서 구약 성경에 호소했으며, 이를 위해 구약 성경에서 드러나는 세 신적 위격에 대한 징후들과 이를 선취하는 요소들을 모으려 했다. 구약 성경의 계시에 대한 호소와 관련된 대표적인 예로는 유스티누스의 <트리폰과의 대화>가 있다.

3.2.4. 양자론, 양태론, 종속론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유일신적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며, 교회가 말하는 세 위격은 결코 '삼신론'이 아닌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적 이해를 전제로 한다. 역사적으로 성부와 예수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비잔티움의 테오도레투스, 사모사타의 파울루스는 예수가 본성적으로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성령 또는 말씀이 그 위에 내려왔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성부가 그를 성자로 받아들이거나 양자로 입양했다고 보았다. 이들은 예수와 관련해서 그의 인품과 윤리적 모범만을 강조했다. 그들은 하느님이 예수가 이룬 공로에 따라 그를 신적 지위로 들어 올려 주고 덕행을 상급으로 주었다고 보았다.
양태론은 상반된 극단적 입장에 자리하고 있다. 노에투스,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는 양자론에 의해 허용된 이원론을 거슬러 최고의 원리로서의 신적 단일함을 요청했다. 그들에 따르면, 유일한 하나의 신적 원리만 존재할 뿐, 성부, 성자, 성령이란 이름은 오직 다양한 양태들을 보여 주며, 근본적으로 단일한 신적 실재는 이 양태들 아래 또는 역사 안에서 수행하는 직무 아래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 결과, 예수의 수난은 성부인 한에서 사람들을 위해 수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개념은 소위 말하는 성부 수난설이 있으며, 이는 명백히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는 성부, 성자, 성령 간의 실제적인 차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양태론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은 동일하고 유일한 신적 주체를 가리킨다. 단지 우리의 역사가 이 이름들을 나눌 뿐, 그 영원한 실재는 나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종속론은 양자론와 양태론 모두에 근접하지만, 그 출발점과 관심은 사뭇 다르다. 이 이론은 절대적인 하느님과 물질세계 사이의 중간 실재 역할을 수행하는 그리스 개념인 데미우르고스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세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며, 이 선상에서 우주와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초월성이 보존되고 있다. 종속론자들은 양자론과 양태론의 중도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말씀'을 영원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창조된 세계 내에서 하느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자 성부의 중개자나 대리자로 여겼다. 때문에 말씀의 본성은 언제나 하느님과 다르다. 아리우스주의는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가톨릭 교회의 대답은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제시되었다. 그에 따르면, 말씀은 언제나 하느님 곁에 있었다. 성자는 영원한 출산[122]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 시간적인 창조를 통해 시작되지 않았다. 그의 본성은 모든 면에서 성부의 본성과 똑같다. 말씀이 성부와 유일하게 다른 것은, 말씀이 성부로부터 유래했으며 성부를 향해 방향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위대한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으며 본성/본질의 단일함위격들의 삼성(三性)으로 표현된 성자의 동일본질과 성령의 동일본질은 하느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의 도착점을 대변한다.

3.2.5. 예언적, 천사적, 성령론적

당시 그리스도론적인 문제는 개방된 채로 남아 있었다. 이 선상에서 제기된 문제는 신적 조건과 인간적 실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성과 새로움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전승"의 이름 아래 수집된 작품 전체를 통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에는 그것이 생겨난 문화적 지평, 예측 불가한 상호 간의 연결을 정확히 설정하지 못했다. 물론 그 작품들은 일관된 전망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위 일반적으로 말해 '사도 교부들'로 통칭되는 작품들[123]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인 영향 아래 있었던 구약의 위경들[124], 신약의 위경들[125]을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인 전망은 특히 그리스도를 그 이전의 유다이즘과 직접적인 연속선상에 두는 가운데 그 특성이 드러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새로운 내용을 향해 열린 구약 성경의 계시를 완성하는 분으로 드러나지만 이 계시는 종결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전망은 다음과 같이 그의 특징을 반영하는 속성들과 함께 그리스도가 소개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율법이며 계약이고, 새로운 탈출이며 시작이고 이름이며, 천사이고 영이다. 또한 그는 성자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의 안에 성령이 거하기 때문이다. 다니엘루[126], 론지네커[127]는 거기서 지배적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론적 이미지들과 동기들뿐만 아니라 예수에게 부여된 독특한 메시아적 형태를 규격화해서 제시했다. 이 전망은 강생과 관련된 여러 특정 주제 다운데 예수의 '자기 비움', '하강'의 차원, 동방 박사들이 따라갔던 별의 의미, 요르단 강에서 예수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강조했다. 구원론에서는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간 사건과 승천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들은 2-3세기에 신경에 들어갈 만큼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이레네우스 같은 소위 '아시아 교부들'로 분류되는 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므로 소위 '유다계-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구약 성경적, 중간사적 전망에서 그리스도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다시 드러난다. 이 노선은 그리스도를 "이미 알려진 분"을 완성하기 위해 온 메시아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새로움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이렇게 해서 부족한 3가지 해석이 생겨났는데, 이 해석들은 절대적으로 간주되는 가운데 이단이 되고 말았다.
이 전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특별한 카리스마를 갖춘 참된 예언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순수 인간이다. 이는 훗날 에비온주의 추종자들에게 귀속되었고 이단이 된다.
이 전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가브리엘 천사와 미카엘 천사의 선상에 자리한다. 또한 성령도 일개 천사와 동일시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지배적인 시도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규정하기보다 그 사명을 설명하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노선을 따르는 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마지막 천사', 하느님의 '최고 사자'로 정의한다.
스토아 학파적인 의미에서 보면, '프네우마'(πνεύμα)란 그리스어는 하층,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분여된 실체로 이해된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성자의 신성에 있어서 바탕으로 이해되거나 성자, 성령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성령론적 그리스도론은 많은 경우, 거의 일종의 양자입양설의 형태를 띠며, 이는 성령의 독특한 활동이나 임재의 결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제시된 각각의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나는 실제적이고 영속적인 어떤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후대에 이루어진 발전의 빛 아래 비춰 볼 때, 이러한 그리스도론들은 불충분하거나 구체적으로 부족하다. 이러한 그리스도론들이 내포하고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은 정당한 직무 그리스도론에 의해 오늘날 복원되었다.

3.2.6. 안티오키아의 이냐티우스

1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냐티우스(Ignatius)는 자신이 쓴 일련의 서간과 함께 바오로 사도와 요한 사도의 그리스도론을 떠받치는 근본적인 주제들에 대한 종합을 제시했다. 그의 출발점은 분명 신약 성경이지만, 그리스적인 개념들, 그중에서도 특히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경륜(經綸)에 호소하기도 했다.

클레멘스는 하느님에 관해 숙고하듯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숙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냐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분은 이렇듯 지혜로우십니다."
이냐티우스, <스미르나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中
또한 이냐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사색과 혼합한 이단들을 거슬러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여러분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가능합니다."
이냐티우스, <트랄레스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中

이냐티우스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2.7. 유스티누스

철학자이자 순교자며 호교 교부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대변자인 유스티누스는 새로운 그리스도론적 전망을 제공했다. 그는 자신의 <트리폰과의 대화>에서 예언의 가치에 대해, 그리고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사실에 대해 논했다. 또한 그는 이교도들의 사상과 관련해서 철학이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자신의 완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결코 철학의 외투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를 향한 자신의 회심을 자신이 언제나 추구해 왔던 진리에 이르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살아 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철학 간의 교량 역할을 '로고스'(λόγος) 개념에 위임했다. 이러한 범주는 2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하나는 이해 불가한 신성과 세상 사이를 연결해 준다. 다른 하나는, 신성에서 인간 그리고 우주에 이르기 까지 모든 실재가 비록 수많은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해도, 그 모든 실재에 이해 가능한 구조를 부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맏이이심을 배웠으며, 모든 인류가 참여하는 로고스임을 이미 입증한 바 있다. 로고스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비록 소크라테스와 헤라클리토스 같은 그리스인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이교인들로 판명되었다 해도, 만일 그들이 로고스에 따라 살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유스티누스, <첫째 호교론> 中

유스티누스는 소위 '말씀의 신학자들'로 불리게 될 학자 그룹에 속했다. 이들은 말씀의 출산을 하느님의 내밀한 내면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발출'로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발출이 어떤 개념인지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유스티누스가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감에 있어 활용한 그리스 세계의 우주론적 전망은 그의 언어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가 그리스도를 그 전망에서 언급한 데미우르고스와 연관해서 설명했는지, 아니면 언급된 것이 단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 그분의 아드님, 엄밀히 말해 오직 그분만이 성자, 말씀이라고 불린다. 그분은 피조물이 있기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으며 낳음을 받으셨다. 시초에 성부께서 그분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지어 주셔을 때, 그분이 받으신 도유로 인해 그리스도라 불렸으며,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 만물을 지어 주셨기 때문이다."
유스티누스, <둘째 호교론> 中

유스티누스는 철학을 비롯해 제반 실재에 대한 다른 이해의 틀들과 비교해서 그리스도교가 갖는 우위를 훗날 로고스의 '강생'이라고 부르게 될 것에 바탕 지었다. 말씀은 삼중적인 정식과 함께 언급된 우리의 인성을 취하였다. 이러한 유스티누스의 정식[132]은 이레네우스의 정식에서 동등한 가치를 갖고 드러난다. 또한 유스티누스는 하느님 안에 내재하며 세상 안에서 발설된 로고스의 그리스도론과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편적 의미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를 선대 역사의 계승자이자 이후 오게 될 역사를 비추는 종교로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완전한 몸으로, 그에 비해 여타 모든 피조물들은 일부분 또는 단편일 뿐이다. 그리스도가 오기 이전의 모든 지식과 덕행은 이 말씀의 씨앗들일 뿐이다. 그러한 실재들은 이 말씀이 육화하고 사람이 되는 것을 보는 가운데 그 말씀 안에서 비로소 밝히 드러나게 된다.

3.2.8. 사르데스의 멜리톤

사르데스의 멜리톤은 2세기 말의 가장 중요한 저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쓴 <파스카 강론>은 그의 그리스도론을 잘 보여준다. 그는 처음으로 그리스도론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단일체로서의 파스카 신비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이와 함께 파스카 신비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성부에게 귀환하는 여정에서 우리의 구원의 원인이자 강생한 주님의 신비를 완성한 사건으로 보았다. 멜리톤은 파스카가 지닌 이중적인 어원의 의미를 제시했다. 히브리어 '파샤'[133]와 그리스어 '파스카'[134]가 그것이다. 텍스트의 우선적인 관심은 구원론적이며, 그다음으로 역사적이고 신학적이며, 마지막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론적이다. 그에 따르면, 구약 성경에 제시된 모든 예표나 인물들은 신약 성경에 소개된 그대로 실현되어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 가운데 현존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지 그리고 그의 수난의 일부를 미리 보여 준다. 그리하여 율법은 말씀이 된다.

멜리톤은 '육화하다'(σαρκοω)라는 동사를 처음 사용한 저술가다. 이 용어는 수동태 '육화되다'(σαρκοποιεω)로 유스티누스에 의해 준비된 바 있다. 그리스도는 강생(육화)을 통해 하느님이자 인간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멜리톤의 작품에는 하느님에 대한 진술들과 인간에 대한 진술들을 대립시키기 위한 문장들이 축적되어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지닌 이중성에 대한 언명은 미래를 선취하는 관용구들을 통해 표현된다. 신약 성경의 찬가적 문학 장르와 감사문은 멜리톤에게서 경이롭게 연장되는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일련의 긴 칭호를 적용하면서 거의 교훈적인 설명으로 확장되고 있다.

3.2.9. 이레네우스

이레네우스는 '구원 신학'의 선구자이자 예형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비롯해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가장 많이 인용한 교부로 손꼽힌다. '구원 역사 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이레네우스처럼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구원 역사와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원이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재림까지 이르는 노선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이렇듯 분명하게 인정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스도를 우주의 기원과 형성의 관계에서 그리고 철학과의 관계에서 본 호교론자들과 달리, 이레네우스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구원론적 차원에서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신과 그리스도 그리고 세상의 기원을 앎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금 근원적인 충만함에 통합되도록 했으며, '플레로마'[135], '에온'[136], '오그도아드'[137]에 관한 복합적인 사색과 영지주의적 그리스도론이라는 광범위한 복합적 체계를 대면하면서 그리스도론을 단순화하고 명료하게 제시했다.

이레네우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진리에 관한 장소와 기준의 문제를 제시했다. 그는 이를 신앙 규범 또는 진리 조항에,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 주교들의 계승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는 진리에 대한 공적이고 식별 가능한 표현에, 예언자들과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을 불가해소적인 차원에서 하나로 연결하는 전망에 위임하는 가운데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대답했다.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신앙을 받고 동시에 교회가 이 신앙을 자기 자녀들에게 분배하는 한에서, 이 신앙은 참되고 생생하다."
이레네우스, <이단 논박> 中

성찬례적 지점해석학적 지점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레네우스가 살던 시대에도 그리스도론을 구성하는 2가지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그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정초되고 구원론적으로도 유효한 그리스도론의 근본 원리들을 복원했다. 하느님의 유일한 구원 경륜 개념은 이레네우스의 사상 전체를 지배했다. 그는 구원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논리를 강조하는 가운데 그 역사를 해석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단일함, 그리스도의 단일함, 인간의 단일함,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갖는 단일함이었다. 그는 칼케돈 공의회의 정식에 앞서 "그리스도는 한 분이며 동일한 분이시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이 신적 계획의 시작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 계획을 종합하고 역사 가운데 드러내며 이를 완성으로 이끌고 수렴했다. 이레네우스는 '수렴' 개념을 바오로 사도로부터 취했다.

이레네우스는 강생과 구원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보았다.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신화시켜 줄 수 있다. 여기서 교부 신학 전체를 인도하는 원리가 드러난다. 구원은 어떤 외적인 작용의 결과도, 신적 결정의 결과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획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가운데 이루어진 결과로서, 하느님이 사멸할 인간의 육신 일부를 취하는 가운데 그의 불멸할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하느님은 인간 구원의 동인이자 내용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들이 구원될 수 있었겠는가?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께 이를 수 있겠는가?"
이레네우스, <이단 논박> 中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계시자이며, 구속주이고 성화자이다. 이는 두 위격이 서로에게 속한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정식들은 훗날 인간 예수의 위격적 구조를 규정할 때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2개의 본성 이론을 향한 병행 명제들[138]이 등장했다. 이레네우스는 후대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를 표현하게 될 어휘의 일부[139]를 미리 취하기도 했다. 이 모든 성찰은 역사적인 지평 위에서 구원론적인 의도로 이루어졌다. 즉, 이레네우스는 이를 통해 하느님이 강생 가운데 인간과 함께 이룬 신적 교환을 통해 인간 전체의 구원이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려했다.

그러나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안에서 성찰된 인간학을 제시하진 못했다. 그는 종종 이분법적 인간학을 제시했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삼분법적 인간학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πνεύμα)이 인간을 구성하는 근원적 요소인지에 대해 정확히 규정하지 않았으며, 또 다른 경우에는 완전한 인간에게 통교된 신적 요소처럼 드러나기도 했다.
"완전한 인간은 세 가지 실재로 구성되어 있다: 육, 영혼, 영. 이 셋 가운데 하나, 즉 영(πνεύμα)은 구원하고 형상을 부여한다. 반면, 다른 하나, 즉 육(σάρξ)은 구원되고 형상을 부여받는다. 마지막으로, 다른 하나, 즉 영혼(Ψυχή)은 이 두 실재를 중개하는 요소다."
이레네우스, <이단 논박> 中

3.2.10. 테르툴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교적 다신론,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고백을 위태롭게 하는 단일신론,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주의에 직면해서 수사학적이고 법률적인 양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2가지 상태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규정하기 위한 일련의 신학 정식들을 옹호하는 대변자가 되었다. 그는 이를 위해 실체(substantia), 위격(persona), 단일함(unitas) 같은 개념에 호소했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일한 신성을 지닌 삼위일체[140]에 대해 말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위격(persona)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세 위격, 하나의 실체[141]라는 정식을 처음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호교론>에서 이교인들은 대면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가 신적 단일함을 위한 다른 선택지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으며, 강생이 간직한 의미를 보여 주고자 했다. 또 다른 기본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프락세아스 반박>이 지향하는 목적은 신적 단일함을 강생과 연결 짓는 데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이 두 진리를 배격하는 단일신론으로부터 이를 보호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가 지닌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이중적인 실재를 언급하기 위해 종종 영(Spiritus)과 육(caro)이라는 관용구에 호소했다. 그리스도의 구성을 해명하기 위해 사용된 영과 육이라는 이항식은 서로 구별되고 혼동되지 않는 2개의 실체를 가리키기 위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두 실체에 대한 조사는 인간과 하느님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육을, 다른 한편으로 영을 (⋯)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이러한 상태들의 고유함은 분명 각각의 본성에 있어 동등하며, 영에 있어서나 육에 있어서 믿음 자체에 의해 준비된다. 하느님의 영의 능력들은 하느님을 입증하며, 인간의 정념들은 육을 입증한다."
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육신론> 中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레네우스와 함께 반(反)가현설적인 염려를 공유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육신을 구원의 장소로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밖에서부터 제공된 구원은 인간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원초적인 형태를 원상태로 복원하고, 영향이 실현되는 인간 내부의 장소인 '사르크스'[142]에서부터 '하마르티아'[143]의 권세를 쳐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강생이 아니라면 인간의 상태가 형이상학적인 타락 상태, 근원적 악, 원초적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할 수 없다.

당시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하느님이 생식과 출산, 수난과 십자가형이라는 굴욕을 거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당시에는 여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부여한 인간학적인 단성설이 그 문화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처럼 극단으로 치우친 문화의 영향을 극복하기 전까지,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론이 내포한 현실적인 감각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육신에 대한 거부'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대(對) 마르키온 논박>과 <그리스도의 육신론>에서 몇 개의 놀라운 단락을 제공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도전적인 차원은 유한함과 죄의 영역에 사는 본성적 인간의 분명한 사실을 뒤집어엎는다.
"또 다른 광기, 즉 하느님에 대한 무레와 고통의 광기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을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르키온은 이 역시 배제했다. 태어나거나 죽는 것 또는 육신이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보다 더 하느님에게 부당하고 우리가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 그러나 진리의 살인자여, 이제 내게 대답하시오. 진정 하느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오? 진정 하느님은 돌아가시거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오?"
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의 육신론> 中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모두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그리스도를 선취하는 존재이자 초안으로서의 인간 창조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강생 가운데 인간에게 충만한 실재를 부여해 주었다. 절대적인 창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강생으로부터 '분리되고' 강생이 배제된 채 완전한 창조는 있을 수 없다. 마지막 아담이 아니라면 첫 번째 아담은 상상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해서 창조되었다.

3.2.11. 오리게네스

오리게네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거대한 신학적 종합을 이뤄 낸 인물이다. 그는 성경 주석가였지만 동시에 형이상학가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그는 후대 신비 신학의 직관과 성찰을 앞서 제시한 영성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교회 안에서' 이루어 냈다. 오리게네스는 자신의 조직적인 작품 <원리론>에서 그리스도론의 내용들을 정확히 규정했으며 그것이 내포한 의미와 근거들을 분석했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론의 내용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설정한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원리론> 제1부를 통해 삼위일체 안에서 로고스에 대해 다뤘다.[144] 반면, 제2부에서는 강생에 대해 다뤘다.[145] 강생에 대해 다룬 장은 이론적인 문제를 역사적인 문제와 구별하면서 시작했다.
"이제 우리의 주님이자 구원자의 강생에 대해, 즉 그분이 어떻게 인간이 되셨고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서 사셨는지에 대해 다뤄야 할 때다."
오리게네스, <원리론> 中

로고스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2개의 노선으로 제시되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하게 주장했으며, 다른 하나는 성부에게만 근원적 존재, 근원적 선성(善性)이라는 칭호들을 부여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제2의 하느님'으로 명명했다. 이 선성의 모상인 성자는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하다.[146] 그 자체로 정통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이와 비슷한 텍스트들은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항한 일련의 논쟁에서 부정적인 하중을 부과하게 된다. 결국 오리게네스는 이 논쟁에서 종속론[147]으로 고발당했다. 그는 '하느님-인간'(θεάνθρωπος)[148]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다. 이 표현은 후대 신학 용어에서 핵심적인 열쇠가 되는 이항식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실체 또는 자립체의 분명한 형상이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 신학 전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하강적인 전망 안에 두었으며, 이 선상에서 그리스도를 하느님 안에 자리매김하고 하느님을 통해 이해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평가절하 할 위험을 안고 있었으나,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에게 인간적인 영혼이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설정한 공헌이 크다. 이는 성경에서도 드러나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신학적 성찰에서 제기된 요청이기도 했다. 하느님과 육체 사이의 합일은 영혼의 중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영혼은 말씀과 인간 육체라는 두 실재 사이에 대한 연결을 설정한다. 오리게네스는 인간 전체를 취한 말씀에 대해 말할 때 그 자체로 완전한 영이 아닌 연속적이며 분리된 형태로서의 영에 의해 일으켜진 인성을 상상하는 가운데 말씀을 염두에 두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혼에 대한 이해는 영혼들의 선재 개념으로 인해 과도한 부담을 갖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과 달리 완전무결한 거룩함과 함께 선 자체인 하느님에게 언제나 충실하며 그와 일치해 있지만, 사실 그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과 같은 본성을 지녀야 한다. 영혼과 말씀 간의 일치는 변모적 일치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느끼고 행하며 이해하는 모든 것에 하느님이 있으며, 그는 하느님과 확고하게 일치해 있다.

1941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오리게네스의 작품 <헤라클리데스와의 대화>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답했다. "'아버지, 당신 손에 제 영을 맡기나이다'라는 복음 구절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에게 있어 '영'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대답은 미래를 위해 결정적이었다. "그리스도는 인간 전체를 취하셨다." 만일 인간이 육체, 영혼, 영으로 구성되었다면, 그리스도 역시 이 3가지 요소를 취하여야 했다. 이 세 요소는 삼중적인 인간학에 상응한다. 그럼에도 이 언명의 바탕은 결정적이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취하여야 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총체적인 인간 전체는 구원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전체가 그리스도에 의해 취해지지 않았다면, 인간 전체는 구원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오리게네스의 철학적 방향이 영원한 말씀,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 따라서 계시자에 대한 성찰에 집중되었다 해도, 또한 그는 훗날 '예수 신비학'이라 불리게 될 성찰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것은 예수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그의 행위와 성심이 간직한 감정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인성에 대한 관상을 의미한다. 오리게네스 그리스도론의 한계 중에는 그리스도의 영혼의 선재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는 영혼들의 선재에 관한 일반적인 명제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이다. 시초부터 말씀과의 일치는 합체(ενσωμάτωση) 과정을 통해 시간 속에서 형태를 취한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말씀과 관련해서 이룬 공로와 사랑의 선택을 바탕으로 그의 영혼과 말씀 간의 일치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영혼은 죄를 범하지 않은 유일한 영혼이었다. 제2의 하느님이신 말씀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주장은 영혼들의 선재와 만유회복(ἀποκατάστασις)에 관한 그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그의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남은 부분들에 대한 수용을 주저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론은 본질적으로 정통적이다.

3.2.12. 에비온주의

에비온주의[149]는 2세기에 그리스도를 모세의 율법과 유다이즘적인 희망에 의해 허용된 가능성과 한계 내로 축소시킨 신학 체계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을 초월하지 않으며, 예수가 동정녀로부터 탄생했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가운데 그를 단순히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보았다. 또한 이들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신자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히폴리투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에비온'에서 한 분파의 창시자를 보고자 했으며, 오리게네스는 이 말의 어원적 의미를 심리학적인 수준에서 바꿨다. 즉, 이들을 '에비온주의자들'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상 그들이 지적인 면에서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한 분이며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체험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통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 유대인들은 예수의 예언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의 위격이 지닌 신적 초월성은 거부했다. 더 나아가, 창세기 1장이 묘사하는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 있는 심연이 그 자체만으로는 예수를 단순히 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해결책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순수 인간'(ψηλος ανθρωπος)이란 표현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이 표현은 교부 시대가 다할 때까지 여러 신학자들과 공의회들을 통해 다시 취해졌다.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일 뿐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사실상 에비온주의자들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그룹 밖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양자입양설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후대에 사모사타의 파울루스에게 기원을 둔 양자입양설과 비슷하다. 이러한 이단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이원론적 이해의 논리[150]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전망은 유다계 그리스도교, 아리우스주의, 이슬람, 자유주의 등에서 발전해 갔으며 결국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했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의 <교회사>에서 이들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3.2.13. 마르키온주의

에비온주의의 대척점에 바로 마르키온주의가 있다. 이는 그리스도를 구약 성경의 하느님과 역사 그리고 윤리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 대립하도록 주장했다. 마르키온이 새로운 교회를 창설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예수의 메시지의 순수함을 복원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구약 성경에서 계시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 사이를 단절시켰다. 이 세상의 창조주인 구약 성경의 하느님은 폭력적이고 사악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자비의 하느님은 전혀 양립될 수 없다. 창조는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구원의 질서와는 결코 통합될 수 없다. 각각의 하느님이 지닌 특징들은 그의 작품 <대립명제>에서 규정되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하느님은 율법을 선포하며, 신약의 하느님은 복음을 선포한다. 한 분은 의로운 분이며, 다른 한 분은 자비로운 분이다. 또한 한 분은 심판관인 데 반해, 다른 한 분은 구속주이다. 바오로 사도를 그리스도교 계시와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기준으로 여긴 마르키온은 카타리파와 구원론적 이원론의 선구자였다. 이 두 사상은 각자 고유한 형태 아래 구원 업적에 집중했지만, 창조 업적은 간과했다.

이처럼 마르키온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구약 성경의 하느님 사이를 대립시키는 가운데 구약 성경 전체를 유보시켰으며, 신약 성경 중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선상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 활동을 강조하는 텍스트들만을 다시 취해서 읽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신이 보기에 유다이즘적인 진술들을 견지하고 있는 언명들은 배제했다. 교회는 이 지점에서 비록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이 보기에 그리스도의 계시를 권위 있고 규범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작품들의 목록을 제시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성경의 정경 목록이 처음으로 완전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를 결정적인 방식으로 완결했다.

마르키온 이후 루터와 하르낙 또한 구약 성경과 유대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예수를 그의 민족 그리고 그가 태어난 역사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은 그 논리적인 귀결로 정경으로부터 구약 성경을 배제하고 예수를 그의 교회로부터 어느 정도 분리시키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2개의 심연 사이에 자리하며, 자신이 생겨난 뿌리를 박탈당하며, 이로 인해 생겨난 결과를 수용하게 된다.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보면, 그는 온전히 홀로 그리스도 앞에 있으며, 그리스도 역시 혼자이게 된다.

3.2.14. 가현설 / 영지주의

가현설-영지주의는 복음이 대면해야 했던 헬레니즘의 대답이었다. 신성 그리고 신들의 절대적 초월성 개념과 창조 개념의 부재는 헬레니스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세상 간의 관계를 오직 외적인 드러남, 대략적인 훑어봄, 섬광, 접근, 가려짐의 방식 안에서 숙고하게 했다. 이 전망에서는 신적 존재의 현현에 대해 상상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의 강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이교에서 하느님의 드러남은 형체(빛과 형상)를 통해 완성된다. 반면, 유대교에서는 말씀(예언과 파견)을 통해 완성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위격(성자의 강생과 성령이 부어짐)을 통해 완성된다.

이 전망에 따르면, 이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의 본래 뜻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쇠락하거나 이미 단죄되었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부터 2가지 위중한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이중적인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에 따르면 우월한 세계에 거주하는 초월적 그리스도와 그런 그의 껍데기인 가시적인 또 다른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있어 강생, 수난, 십자가에 못 박힘과 같은 사건은 그 진리의 힘을 잃어버리게 했으며, 인류를 위한 구원적인 힘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초월적인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당시 내려왔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떠났다.

발렌티누스, 마르키온, 아펠레, 바실리데스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을 공유했다. 발렌티누스의 영지(靈智)[151]는 근본적으로 가현설적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겉모양만 예수일 뿐이며, 그의 인성은 영적이고 그의 몸 역시 영적이다. 그의 몸은 겉으로 보기에만 죽었을 뿐이다. 바실리데스는 마르코 복음서의 어느 구절을 활용하는 가운데, 키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던 순간 그리스도가 사라졌으며, 바로 시몬이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교 창조 개념의 최종적인 실현은 강생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창조 개념이 거부될 때, 하느님과 세상 간의 심연은 메울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 세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단지 2가지 선택만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영원한 원리들에 대한 철저한 이원론이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적 본성에 대한 범신론[152]이 그것이다. 범신론은 신적 실재와 우주 간에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지주의는 2세기 전체를 지배했다. 이레네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러한 사상에 대해 제시한 그리스도교적인 대답을 대변한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에서 탄생한 첫 번째 거대한 또 다른 이론적 선택지였다. 그것은 역사, 교회 공동체 그리고 신앙의 내용에 대한 긍정적 정의와의 단절을 전제로 하는 구원에 대한 제안이자 사상 체계였다. 영지주의 이단과 철학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들은 교회가 제시한 앎의 형태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긴 앎의 형태를 표현했다.

3.3. 4세기 신학의 그리스도론과 성령론

3.3.1. 콘스탄티누스의 교회

어떤 의미에서 4세기는 신앙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이 결정적으로 확정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정체성 역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다수성을 내포한 단일함을 간직한 유일신론을 제시하는 가운데 자신을 영원히 유대교와 구별했으며, 다신론과도 구별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와 관련해서 보면 상당한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갈레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관용령이 선포되었으며, 밀라노 칙령을 통해 콘스탄티누스 1세리키니우스 황제가 종교에 대한 자유를 허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교회에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조성했다. 또한, 이 선상에서 이제 종교는 정치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안정은 교회의 내적인 일치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는 대다수 주교에 대한 임명과 공의회 소집을 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박해의 폭풍우가 지나가자 곤란한 물음이 제기되었다.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했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같은 2개의 입장이 충돌했다. 하나는 그들이 공동체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엄격한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이 참회의 여정을 거친 후 다시 받아들이는 관용적인 입장이다. 북아프리카에 있었던 도나투스파와 이집트 리코폴리의 주교였던 멜레티우스는 엄격한 노선을 견지했다.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이러한 분열은 장차 발생할 그리스도론 논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제시된 공개적인 지지를 통한 종교적 관용과 더불어 광범위한 안정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외적인 자유가 허용됨에 동시에 즉시 내적인 자유를 부분적으로 잃어버릴 위험에 직면했다. 로마 제국 황제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전망에서 첫 번째 정치 신학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신론이 군주제적인 정치 개념을 정당화하지 못하듯이, 하느님 안에서 위격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삼위일체적인 신앙 고백이 삼두정치나 민주정치 체제에 어떠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3.3.2. 아리우스

4세기 전반은 아리우스라는 이름과 니케아 공의회라는 사건으로 점철되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단하게 그에 관한 몇 가지 측면을 검토해야 한다.
26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리우스는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누스 문하에서 양성받았다. 루키아누스는 성경학자로 활동했으며 312년에 순교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언제나 긍정적인 색채를 띤 성경에 대한 축자적 해석으로 특징지어져 있으며, 이 선상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같은 위대한 성경 주석가들이 활동했다. 신학 분야에서는 로고스와 성부 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있어 종속론적인 색채를 띠는 가운데 차별화되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153] 시대에 멜레티우스 분파를 받아들였다. 그 후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의 후계자인 알렉산데르 주교의 대답을 야기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지적인 환경은 필론의 성경 주석, 오리게네스의 신학, 스토아 사상, 신플라톤주의, 특히 플로티누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리우스는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로부터 실마리를 취하면서 "세 휘포스타시스[154]"(존재/지성/영혼)모델에 따른 삼위일체 신학을 제시했다. 포르피리오스는 이를 <원리들로서의 세 휘포스타시스에 대하여>라고 명명했다. 세 휘포스타시스는 현존하는 3개의 개별적 실재와 같다. 그들은 동일한 본성에 참여하고 그들 간에는 서로 구별되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란 용어는 신학적인 용례에서 취해진 것과 같은 의미로 철학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페소 공의회, 그리고 칼케돈 공의회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이르러서야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신적 실체의 개별적 특징을 가리키는 지시어로,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격'(persona)을 가리키기 위해 정확하게 규정된다. 더 나아가, 플로티누스의 사상 체계에서는 제2휘포스타시스와 제3휘포스타시스가 제1휘포스타시스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선상에서 성자와 성령은 제1원천과 동일한 권능을 갖지 않으며, 동일한 품격과 본성도 갖지 않으므로 제1원천과는 비교될 수 없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구약 성경이 선포한 지혜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지혜는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 되는 피조물이며 하느님과 여타 모든 피조물 간의 중개 역할을 한다. 다음은 아리우스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대한 종합이다.

3.3.3. 니케아의 그리스도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종교적-사회적 일치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는 250-300명의 주교들이 대거 참석했다. 전승에 따르면, 318명이 여기에 참석했다고 전해 오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종들을 표상하는 숫자와 연관된 상징적인 숫자일 뿐이다. 이미 교회의 일치를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개입한 바 있는 코르도바의 주교 오시우스는 서방을 대표하는 4명의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로마의 주교실베스테르 1세는 자신을 대신해서 특사를 보냈다. 이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로마 주교좌는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공의회의 명예 의장을 맡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회사를 했으며 오시우스 주교가 교회적 차원의 의장을 맡아 공의회를 주재했다.

공의회는 신경과 20개 조항을 제시했는데, 여기서 신경의 구조는 삼위일체적이다. 이는 교부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앙 규범의 빛 아래 성경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을 정하는 데 있었음을 의미한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일어난 충돌은 근본적으로 성경 해석의 문제, 즉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텍스트들에 대한 해석학적 문제였다.

성부에 대한 언명들은 전통적인 정식들을 다시 취했다. 반면, 성령과 관련해서는 세례 정식에 아무것도 추가되지 않았다. 성자에 관한 조항은 아리우스의 진술을 거슬러 싸우기 위한 목적으로 확장되었다. 여기서 출발점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다. 이는 언제나 그리스도론의 바탕이자 강점이었다. 성경은 전반적으로 예수를 성자로 규정했다. 오직 요한만이 그를 '말씀'으로 불렀다. 이런 예수의 아들 됨은 하느님이 성자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낳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신적 출산과 인간적 출산 간에는 절대적인 동등함도 없고 절대적인 차이도 없다. 그것은 출산이라는 인간적인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적 출산에서는 성부와 성자 간의 분리가 없기 때문이다. 신적 출산은 육체적인 의미의 출산이 아니며, 정신적인 의미의 출산도 아니다. 그러나 '출산'(generatio)이란 용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용어를 포기한다면, '창조'(creatio) 개념만 남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예수를 성자로 보는 성경의 관점에 충실해야 한다.

하느님은 예수를 부활시키는 가운데 그를 성자로 입증했으며 이와 함께 자신을 성부로 계시하였다. 하느님은 부활 행위와 함께 예수의 영원한 아들 됨을 계시하였다. 그리고 이 선상에서 그러한 아들 됨을 그의 인성에 확장하였다. 완성에 이른 그의 인성은 신적이고 영원하며 사멸하지 않을 생명에 통합되었다. 예수는 성자이므로, 그는 하느님의 존재에 속하며, 따라서 그는 죽음을 능가한다. 하느님은 성자의 부활을 통해 동일본질성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다. 성부는 성자의 구성적 시작이지 시간적 시작이 아니다. 니케아 공의회의 언명들은 이러한 빛 아래 이해된다.
이러한 긍정적인 진술에 이어 신앙의 진리와 양립할 수 없는, 즉 교회적인 친교로부터 배젱되는 모든 언명들을 배제하는 정식이 뒤따른다. 그리고 마지막 파문은 신앙 고백을 부정적으로 완결한다. 거기에는 아리우스가 주장한 명제들이 종합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성자는 "아직 아무것도 없던 때에 있었으며", "만들어지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무(無)로부터 만들어졌으며", "성부와는 다른 본질 또는 휘포스타시스로부터 유래했고", "불안정하거나 다른 것으로 변화될 수 있다."

3.3.4. 니케아의 영속적 의미

니케아 공의회는 그 행위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결정적이었다.
a) 해석학적 의미
니케아 공의회는 성경을 해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했다. 성경은 그 내용에 있어서 늘 분명한 것은 아니며 그 자체로 해석되는 것도 아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가 제시한 성경 주석보다 훨씬 더 나은 성경 주석을 제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의해 표현된 신앙 규범과 사도 전승의 빛 아래 문제가 된 새로운 사안들에 대해 대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에 대한 헬레니즘화를 말하지는 않는다. 니케아 공의회는 당시의 인간 이성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인간적인 용어와 개념을 확장했다. 육이 말씀을 표현한 순간부터 인간적인 말들은 신비를 언급할 수 있게 되었다.
268년에 개최된 안티오키아 공의회에서 사모사타의 파울루스가 '동일본질'에 부여한 의미로 인해 거부된 이 용어는 이제 텍스트 내에서 전개되는 내적 작용의 결과로 드러나는 특정한 의미로서 사용되었다. 니케아 정식이 지닌 실제적 한계는 이 용어가 파문 정식에서 '우시아'[156](ουσία)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를 동일시하는 가운데 자칫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직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이 용어가 일으킨 즉각적인 반향을 넘어서 그것이 내포한 깊은 뜻이 분명히 드러났다. 교회는 신비의 독특한 차원을 새로운 용어들과 더불어 정착시킨 다음, 이를 거룩하고 필요 불가결하며 당연한 것으로 계속 보존했다. 그럼으로써 이제 신자의 의식은 이를 걷어치울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용어들이 비록 그 기원에 있어서 성경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문화적 지평과는 다른 문화적 지평 가운데 형되었다 해도, 그 용어들은 그대로 유지된다.
b) 신학적 의미
더 이상 성자인 그리스도를 배제한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동일한 구성에 속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사랑 안에서 구성적이고 출산적인 소통을 이루는 분이다. 즉, 하느님은 자신 안을 향해 그리고 외부를 향해 소통한다.
한 처음에 침묵이 있었던 게 아니라 말씀이 있었다. 하느님의 영원한 내적 통교는 강생과 더불어 세상에 드러난다. 하느님은 예수의 인간적 실존에 자신을 각인하는 가운데 예수를 통해 모든 사람 안에 자신을 각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하느님을 충만하게 인식할 수 없고, 충만하게 참여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부성과 성자의 아들 됨에 대한 신뢰는 부활 사건을 통해 일어난다.
c) 구원론적 의미
니케아 공의회는 충만한 예수의 인성은 충만한 인류 구원을 위한 조건임을 전제하고 있는 '파문 정식'에 암묵적으로 내푸된 예수의 인간적인 영혼에 관한 일부 사안을 분명히 규정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는 이미 명시적으로 이 점을 언급한 바 있다. 니케아 공의회의 언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신학적이고 삼위일체적이며, 그 동기는 구원론적이다.
d) 교회론적 의미
교회와 관련해서 볼 때 성경은 자주적인 실재가 될 수 없다. 그 기원에 있어서 자주적일 수 없으며, 그 후 이어지는 해석에 있어서도 자주적일 수 없다.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 강독은 근원적인 문자적 의미를 복원해 주는 한에서 필수적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여기에는 '교회적인' 강독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 2가지 성경 강독은 서로가 서로를 요청한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 근본주의적 태도와 축자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서는 안 된다. 두 입장 모두 이미 낡아빠진 과거와 죽은 문자에 하느님의 말씀을 묶어 둘 뿐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복음서에 대한 권위 있고 이해 가능하며 구원적인 차원을 고려한 재강독의 가능성을 제공하려 했다.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사항은 교회 안에 서서히 수용되었으며 신학적인 차원에서는 복합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제한된 상태에서 수용되었다. 동방에서는 5세기 중반 이상까지도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우세했으며, 서방에서는 아퀼레이아 시노드[157]가 아리우스주의자의 모든 잔재를 일소했다. 그러나 고트족의 서방 침입과 함께 아리우스주의는 다시 꽃피웠다. 고트족은 민족적 증표로 급진적인 아리우스주의를 표방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에 아리우스주의를 강제했다. 이렇게 새로운 박해가 일어났으며,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반달족이, 스페인에서는 서고트족이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주도했다. 그러나 서고트 왕국의 국왕인 레카레두스 1세가 제3차 톨레도 공의회[158]와 더불어 가톨릭으로 회심함으로써 스페인에서의 가톨릭 신앙은 부흥하게 된다.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만들어진 그리스도론적인 신앙 고백은 교회의 첫 번째 교의적인 정의였으며 계속해서 가장 권위 있는 교회 문헌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개념, 그리스도와 하느님 간의 관계,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본성을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대체하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으로 하느님 자신과 같은 동일본질이다. 가톨릭 신앙은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주요 공의회와 신학들은 이 점을 계속해서 천명했다. 이후의 모든 선언들은 이 니케아 신앙을 각 시대에 적절한 해석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3.3.5. 아리우스주의와 신학의 언사

아리우스주의는 두 시기 동안 생존했다. 첫 번째 시기는 잠재적인 시기이며, 두 번째 시기는 확장되고 공고해진 시기다. 338년부터 357년까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의 통치 아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정치적인 혜택을 누렸으며 권좌를 차지하고 여러 시노드들을 개최했다. 이로 인해 360년경에 이르러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지배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새로운 실재들을 묘사하고 규정함에 있어서 용어상의 명료함이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모든 사람이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만들어진 정식을 같은 방식으로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의 양태론적인 형태로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동일한 분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니케아 정식에 대한 해석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본질의 동등성을 인정하지 않는 아리우스주의(이원론)와 두 분이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양태론(일원론) 사이에서 요동쳤다. 동방 주교들의 그리스도론적인 정식은 특히 4세기에 저명한 두 인물, 마르켈루스와 포티누스를 인용했다.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속한다는 사실을 부인했으며, 그리스도를 성부와 구별되는 위격으로 간주하지 않고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서의 '프로소폰'(πρόσωπον), 즉 '마스크/역할' 또는 '얼굴'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 선상에서 그리스도가 그 역할을 끝내고 나면 그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보았다. 니케아의 교의를 이와 비슷하게 해석하는 것은 성자를 비롯해 삼위일체의 위격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호모우시오스'[159](ὁμο-ούσιος)를 고백하는 니케아 교부들과 비교해 볼 때 아리우스주의 그룹들의 주장은 상당히 달랐다. 아노모이파[160] 추종자들은 성자가 피조물이므로 성부와는 전혀 닮지 않다고 보며 성부와 성자 간의 동등함을 배제했다. 호모이우시오스파 추종자들은 성부와 성자 간의 유사함에 대해서는 주장했지만, 둘 사이의 동등함은 배제했다. 에우노미우스[161]는 이 이단 그룹의 수장이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이들에 맞서 예수의 신성뿐만 아니라 성령이 성부, 성자와 더불어 맺는 관계에 대해, 즉 하느님의 신비 자체에 대해 숙고 했다. 이렇게 해서 한편으로는 부정 신학[162]이, 다른 한편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용어가 생겨나게 된다. 이 용어는 하느님에게 있어 유일한 본성과 3가지 관계에 대해, 즉 본질의 단일함과 위격들의 삼성에 대해 말하게 해 준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동일본질'을 '하나의 본질과 3개의 휘포스타시스'로 대체했는데, 이는 그들이 아리우스주의뿐만 아니라 사벨리우스주의[163]에도 맞섰기 때문이다.

3.3.6. 아폴리나리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늘 예수의 인성에 대한 로고스의 지배적인 역할과 신화 활동에 대해 언급해 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에게서 활동의 자주적인 인간적 원리인 지성과 의지를 허용하는 데 대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들은 말씀/육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강생의 신비 전체를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 지점에 아폴리나리스 편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영혼에 대한 부정이 자리한다. 그에 따르면, 그 자체로 완전한 2개의 원리는 서로 일치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만일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한다면, 그것은 완전자가 완전자와 일치하는 것으로 둘이 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2개의 핵심적 직관이 자리하고 있다.
아폴리나리스는 계속해서 언급하길, 그리스도는 인간이 됨으로써, 충만하게 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충만하게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과 인간 간의 결합을 하느님과 인간 육체 간의 구성(σύνθεσις)으로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말씀이 인간 영혼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에게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은 영과 인간의 육 사이의 결합으로 이해되었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의 단일함을 가리키기 위해 '휘포스타시스'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 용어를 구체적으로 '본성'이란 용어와 차별화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다음 세기에 심각하게 잘못된 정식이 출현되도록 장려했다. 이 정식에 대해 심지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조차 대단한 권위를 부여하는 가운데 이 정식을 아타나시우스의 것으로 여겼다.

3.3.7.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작품 <이교도 반박>, <하느님 말씀의 육화와 아리우스파 반박>과 더불어 신학적인 면에서 4세기의 중심적 인물로 드러난다. 비록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초기 여러 작품이 '동일본질' 개념에 기초하지는 않았지만, 생의 마지막 시기에는 이 용어를 자기 신학을 증명하는 표식으로 삼았다. 그는 말씀이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 그리고 성부와 성자 간에는 단일함이 있지만 동시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인격 이외에도 강생의 이유들을 해명함으로써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질문에 보다 완벽한 대답을 제공하며 그리스도의 업적을 분석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교육학적/교육적 전망, 도덕적/예형적 전망, 법률적/속죄적 전망, 신비적/신화적 전망이라는 구원에 대한 다양한 전망을 제시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신화되게 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다는 궁극적 측면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이 은총과 인간의 신화가 마치 기계적이며 자동적인 어떤 것, 본성적 질서에 속한 어떤 것으로 이해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강생을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강생한 성자와의 표징과 연결해 준 선물로 이해했다. 그것은 자유와 사랑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인격적이고도 불가역적인 선물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작품 <육화에 관해 아폴리나리스 반박>에서 다음과 같이 강생의 3가지 중심적인 구원론적 동기를 제시했다. 우선, 강생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며(계시), 하느님 면전에서 인간의 죄스러운 상황이 극복되었고(구원), 하느님의 신적인 위격적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고(신화) 그는 보았다.

3.3.8.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4세기 후반부에는 성부와 성자 간의 삼위일체적 관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령의 본성에 대한 성찰이 심화되어 갔다. 당시 이 과정에서 '우시아'(ουσία)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같은 용어들을 명료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휘포스타시스는 아래에 있다, 지탱하다, 실재하다와 같은 동사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명사형인 휘포스타시스는 일종의 '침전된' 것, '침전, 퇴적'을 의미한다. 즉, 아래에서부터 참된 실재를 지탱하는 그 무엇을 일컫는다. 라틴인들은 이를 실체(sub-stantia) 또는 기체(sub-positum)라고 부르게 된다. 오리게네스에게 있어서 이 개념은 반(反)사벨리우스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하느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실재를 가리켰다. 한편, 루피누스는 오리게네스의 <원리론>에 대한 라틴 전통에서 '실체' 또는 '자립체'(subsistentia)라는 용어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이 이중적인 의미는 불명료성의 원천이 되고 말았고, 로마의 디오니시우스는 오리게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가 사용한 이 표현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카파도키아 교부인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안을 이룩했다.
<다마수스편>[168]은 구원론적인 동기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의 완전함과 인성의 완전함을 결정적으로 명확히 했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하느님이자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 구원의 성사를 설명하는 것이다.

'성령피조설주의자들' 또는 '마케도니우스주의자들'은 성령의 신성을 부인했다. 이와 관련해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가 성자의 신성에 관해 갖는 의미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여러 범주들과 더불어 작용하는 가운데 신경의 세 번째 조항이 발전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혹을 사지 않고 거부되지 않도록 '동일본질' 용어를 생략했다. 이 공의회는 성령이 성부, 성자와 더불어 역동적으로 동일하고 거룩하다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만일 성령이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갖지 못했다면, 계시자이자 성화자인 성령은 우리를 성화하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는 죄 중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파문은 성자,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조들을 열거했으며, 그 결과 이 사조를 따르는 이들을 교회의 친교로부터 배제했다. 또한 예수의 인성(육체/영혼/정신)에 대한 완전함을 언급하는 가운데 아폴리나리스주의의 모든 잔재를 배제했다.

3.3.9. 삼위일체의 신비와 성령론의 빛 아래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공식 문헌들은 전해 오지 않는다. 텍스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 서한[169]에 포함되어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칼케돈 공의회의 문헌에 담겨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이다. 실제로 이 공의회는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예언자[170]에 대해 말하는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이원론적인 이해와 같은 비(非)그리스도교적인 전망을 배제했으며, 삼위일체적 하느님을 그리스도교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천명했다. 구약 성경의 '루아하'(רוּחַ)와 그리스적 개념인 '프네우마'(πνεύμα)와 '엔투시아스모스'(ἐνθουσιασμός)는 서로 다르다. 성자가 보내 달라고 청하였을 때 성부가 파견한 진리의 성령, 그리스도의 영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구성적 실재에 속하는 것으로, 하느님은 성령이다.

삼위일체는 그리스도론의 바탕이자 필수적인 틀이다. 성부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도 없다. 또한, 성령 하느님이 배제된 그리스도 역시 상상할 수 없다. 성령론이 없는 그리스도론은 있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론이 없는 성령론 역시 있을 수 없다. 이 둘은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신학이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에는 신적 존재의 단일함과 더불어 위격들의 삼성이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Christology #[2] λόγος(로고스)[3] Filius[4] 유대교의 반(反)삼위일체적 하느님을 말한다.[5] 降生,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6] θεολογία,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더불어 맺는 관계[7] οἰκονομία,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시간 안에서 이룬 업적[8] Historia ecclesiastica[9] 聖化[10] 先取, 남보다 먼저 가짐[11] 原型, 본보기가 되는 형태[12] 이는 그리스도교 교파마다 차이가 있다.[13] 교회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다.[14] 교회는 우리에게 객관적인 해석을 위한 조건들을 제공해 준다.[15] 동시적 특성[16] 공시적 특성[17] 성서와 성전에 기초를 둔 믿을 교리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받은 권한으로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가르치는 진리들.[18] 이는 엄밀히 말해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19] νους(누스)[20] πνεύμα(프네우마)[21]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 믿음, 기도[22] 이를 동시성이라 부른다.[23] 神化[24] Imago[25] 아빠, 퀴리오스, 예배 등[26] 참이나 거짓의 값이 확정될 수 있는 논제.[27] 바우어, 부쎄, 종교 역사학파 등[28] 아타나시우스, 키릴로스[29]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테오도레투스, 요한 크리소스토모[30] 지나간 사실을 소급하여 추후에 인정함.[31] 예를 들어,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3부[32] 헤겔, 위르겐 몰트만, 융엘, 에브도키모브, 발타사르, 뒤렐 등[33] 被造的[34] 기능적이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문화, 형이상학적이고 개념 중심적인 문화[35] 이는 몇몇 개신교에서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36] Logos[37] 이 사건에서 은총이 본성을 만나고 신적 사명이 위임되고 있다.[38] 神顯, 하느님의 나타남[39] 사도 10, 37-38 참고[40] 養子[41] 엥기켄, "가깝다", "곧 온다"[42] 에프타센, "갑자기 도래했다", "현재한다"[43] 알베르트 슈바이처[44] Charles E. Fuller, 침례회 목사[45] Georges Florovsky, 러시아 정교회 사제[46] Archibald Macbride Hunter, 애버딘 대학교 신학부 교수[47] Chrys C Caragounis, 룬드 대학교 신약학 교수[48] 카라구니스의 "Kingdom of God" 참조.[49] Karl Josef Becker, 독일의 추기경[50] Heinz Schürmann, 독일 가톨릭 신학자[51] Joachim Jeremias, 독일 루터교회 신학자[52] Edward Schillebeeckx, 벨기에의 도미니코회 신학자[53] Helmut Merklein, 독일 가톨릭 신학자[54] Wolfgang Trilling,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55] Marianne Schlosser,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56] 기적[57] 이적[58] 표징[59] 예수의 기적과 사도 시대의 기적[60] 랍비, 예언자, 현자, 신비가 등[61] Heinrich Schlier,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62] 원칙에 대한 준수,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안식일이 내포한 우선적 의미[63] 율법을 모든 이에게 확장하는 가운데 이웃 사랑에 대한 의무를 보다 철저히 제시했다. (루카 10,25-37)[64] 순전히 율법적인 정의에 비해 훨씬 큰 정의를 요청하며 자신의 말을 옛 율법에 대립해서 제시했다: "~라고 하지만, 나는 ~라고 말한다." (마태 5-7)[65] 세리, 죄인, 이방인, 창녀[66] abba[67] 예수의 새로운 면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68] Robert Eisler,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박식가[69] S. G. F. Brandon, 영국의 성공회 사제[70]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몇은 그쪽 출신이었을 수도 있다.[71] proexistenia activa[72]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와 기적들[73] 재판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74] 마르코 복음서 12장[75] James H. Charlesworth,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76] 십자가형[77] 활동, 죽음, 부활[78] 오늘날의 시간으로는 오전 9시.[79] 오늘날의 시간으로는 정오.[80] ius gladii, 중죄에 대해 형벌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81] summa supplicia[82]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교의 형성과 유대인 생활의 조직에 크게 기여한 성경 주석 모음집이다. 서기 70년부터 약 150년 동안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83] 로마 8, 32[84] 갈라 2, 20[85] 1세기에서 2세기에 활동한 유대교 학자이자 현자[86] 아람어 번역 구약 성경[87] 그리스도론적, 신학적, 구원론적.[88] operatio ad extra[89] κῆρυγμα, 설교(전달자로서 선포하다)[90] 요한 20, 8[91] 반면, 그리스 세계는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인간을 분석해서 보았다.[92] David Friedrich Strauß,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93] Willi Marxsen,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94] Rudolf Johannes Pesch,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95] Ingo Broer,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96] Karl-Heinz Ohlig,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97] Hansjürgen Verweyen,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98] Gerd Lüdemann,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99] 예수의 죽음을 보상과 대속으로 보았다.[100] 라자로의 부활을 예로 들 수 있다.[101] Hans Urs von Balthasar,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102] 반대론을 예상하여 반박해두는 법[103] 향주삼덕[104] Johann Baptist Metz,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105] 신약 성경[106] 구약 성경[107] 알렉산드리아적 노선[108] 안티오키아적 노선[109] spiratio[110] 중세 성 빅토르 수도원의 장상[111] 사랑하는 자 / 사랑받는 자 / 사랑[112] François-Xavier Durrwell,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113] 발타사르는 변증 신학의 선상에서 다음과 같은 원리에 따라 움직였다: 예수의 생애에서 드러난 실재와 현실화는 예수의 실재와 현실화를 바탕 짓고 거기서 표현되는 삼위일체 내적 실재와 관계들에 대한 계시다. 성부에 대한 순명, 거리를 둠, 복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사는 그가 성부 안에 영원한 기원을 갖고 있으며 그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다음과 같은 명제가 나온다. "예수의 부활은 성부와 성자 간의 영원한 관계 속에 있던 신비를 세상에 실현한 사건이다." 뒤렐은 게속해서 동일한 기준을 따랐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적 위격들 간에 존재하는 관계를 실현하고 계시하는 활동으로서의 부활에 대해 언급했다.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신비를 세상에 실현하는 한에서,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이 성령 안에서 성부이며, 성령은 성부가 자신의 말씀을 출산하는 힘이라는 진리를 계시한다."[114] 몰트만은 이 상황을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단절, 성부와 성자 간의 포기 또는 실제적인 대립으로 이해했다. 이는 죽음과 생명을 같은 차원에 두는 위험과 함께,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있어 고유한 부정성의 표현으로 설명할 정도로, 그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115] παρουσία, 그리스도의 재림[116] 고대 아테네의 재판 장소[117] 그리스도교를 비롯해 그리스도론이 생겨날 무렵,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헬레니즘 문화가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118] 삼위일체[119] 강생[120]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121] 성부, 성자에 대한 성령의 동등성[122] generatio eterna[123] 클레멘스서, 디다케, 바르나바의 편지, 헤르마스의 목자[124] 이사야의 승천, 에녹 1서, 열두 선조들의 증언[125] 베드로 복음, 야고보 원복음, 히브리인들의 복음, 이집트인들의 복음, 사도들의 편지, 베드로 묵시록[126] Jean-Guenolé-Marie Daniélou, 프랑스의 예수회 출신 추기경[127] Richard N. Longenecker,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128]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적 주장[129] 육체[130] 창조되지 않은[131] 태어나다[132] 육, 로고스, 영혼[133] 이집트에서의 탈출, 이해으로 성부를 향해 그리스도가 이행하는 것에 적용된다.[134] 그리스도의 수난을 언급하는 '고통받다'를 의미하는 παθεῖν에서 유래[135] 완전함[136] 영원함[137] 영지주의의 주요 개념 중 하나[138] "말씀의 직무에 따르면, 말씀은 만물 가운데 완전한 분이다. 왜냐하면 말씀께서는 전능하시며 참인간이시기 때문이다." - <이단 논박> 中[139] 육화, 전율, 일치, 혼합, 거주, 취함[140] Trinitas unius Divinitatis[141] tres personae, una substantia[142][143] 근본적인 죄[144] 성자의 고유한 것에 대하여[145] 성자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 경륜에 대하여[146] "하느님 아버지 안에 본디의 선이 있고, 거기에서 아들이 태어나고 성령이 나옴으로써 자신들 안에서 그 선의 본성을 의심 없이 재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원천에 존재하는 이 선의 본성에서 아들이 태어나고 성령이 나온다" - <원리론> 中[147] 성자는 성부에게 본질과 존재에서 종속된다는 주장[148] 테안트로포스[149] '가난한 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ebion'에서 유래했다.[150] 하느님과 그의 예언자만이 존재한는 논리.[151] gnosis, 앎[152] 플로티누스[153]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루스[154] ὑπόστασις, 위격[155] 정념과 감정, 기쁨과 고통[156] 본질[157] 381년[158] 589년[159]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질이다.(동일본질)[160] 급진적 아리우스파[161] (Eunomius, ?~395) 미시아의 치지쿠스에 살던 후기 아리우스파의 지도자[162] 하느님은 이해 불가하며 그분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좋은 방식은 그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그분을 흠숭하는 가운데 침묵하는 것[163] 양태론적 단일신론[164] 이는 '파이데이아'라는 그리스적인 주제였지만, 이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에 의해 상당히 절대화된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이라는 주제를 의미하기도 했다.[165] διδάσκαλος, 교사[166] 본질[167] 675년[168] Tomus Damasi, 374년에 다마소 1세 교황이 동방 교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단편집[169] 382년[170] 모세, 그리스도 또는 무함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