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래아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게임 캐릭터에 대한 내용은 갈릴레아 문서 참고하십시오.히브리어 | הַגָּלִיל | |
아랍어 | الجليل | |
아람어 | ܓܠܝܠܐ | |
그리스어 | Γαλιλαία(Galilaia) | |
라틴어 | Galilaea | |
영어 | Galilee | |
한국어 | 공동번역 성서 | 갈릴래아/갈릴리 |
가톨릭 | 갈릴래아 | |
개신교 | 갈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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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반트에 있는 지역으로 남쪽으로는 카르멜 산(해발 525.4 m)과 길보아 산, 북쪽으로는 레바논의 리타니 강, 동쪽으로는 갈릴래아 호와 요르단 강,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접해 있다. 대부분 지역이 이스라엘에 속해있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후기 코이네 그리스어 및 교회 라틴어 발음에 따라 '갈릴래아'로 표기하고, 한국 개신교에서는 영어에 따라 '갈릴리'라 표기한다. 공동번역 성서에서 열왕기와 여호수아에서는 '갈릴리'로 적혀있으며, 그 외에는 '갈릴래아' 표기가 사용되었다.다른 이름으로는 킨네렛(민수 34,11), 겐네사렛(루가 5,1), 티베리아스(요한 6,1)라 한다. 현지 아랍인들은 알-잘릴이라 부른다.
2. 역사
12지파 |
성경에 따르면 갈리래아는 과거 히브리인의 12지파 가운데 아셀과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다. 열왕기상 9절에 솔로몬이 페니키아 동맹이었던 티레의 왕 히람에게 보상으로 갈리래아의 성읍 20곳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아시리아는 갈릴래아를 점령하고 그곳의 히브리인들을 추방해버린다. 이후 갈릴래아에는 이투레아인(Itureans)이나 페니키아인과 같은 외부인들이 이주한다.
기원전 168~135년 팔레스타인 지역 | |
갈릴래아 | |
사마리아 | |
유대 |
유대 지역 하스몬 왕조의 아리스토불로스 1세는 갈릴래아를 정복한다. 하스몬 왕조가 갈릴래아를 지배하면서 유대 지역 출신 유대인들이 갈릴래아로 이주하거나(참고), 이투레아인 등의 기존 갈릴래아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면서(참고) 갈릴래아는 유대인 문화권으로 변한다. 갈릴래아가 유대화되면서 갈릴래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하러 가는 등 유대 지역과의 인구 왕래가 잦아지게 된다. 그런데, 갈릴래아와 유대 사이에는 이 지도처럼 사마리아인들의 사마리아가 있어서 서로 교류를 하려면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지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갈릴래아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등의 충돌도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탓에, 갈릴래아는 다양한 문화가 섞인 일종의 다문화 사회를 형성했다. 물론 이 다문화라는 게 21세기 샌프란시스코 같은 의미의 다문화는 아니었지만, 유다인 마을들과 그리스인 마을들이 인접해 있었으며, 갈릴래아 사람들은 이중언어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a growing body of evidence indicates that Greek language and culture had made significant inroads into first-century Galilee. The situation described by scholars is that of a thoroughly bilingual society, in which Aramaic and Greek were both spoken among the working classes.
축적된 증거는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가 1세기 갈릴래아에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이 묘사하는 당시 사회는 아람어와 그리스어가 노동 계급에서 동시에 사용되던 철저한 이중언어 사회였다.
-《The Ignatius Catholic Study Bible》, The Letter of Saint Jude, Introduction
예수가 살았던 나자렛 마을 역시도 북서쪽로 겨우 6km만 가면 그리스풍 도시인 세포리스가 있었다.축적된 증거는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가 1세기 갈릴래아에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이 묘사하는 당시 사회는 아람어와 그리스어가 노동 계급에서 동시에 사용되던 철저한 이중언어 사회였다.
-《The Ignatius Catholic Study Bible》, The Letter of Saint Jude,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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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하스몬 왕조가 멸망하고 헤로데 왕조가 들어선다. 기원전 4년 헤로데가 사망한 뒤 그의 영토는 아들 셋과 여동생에게 분할된다. 갈릴래아는 페레아와 함께 헤로데 안티파스가 물려받는다. 그후 서기 30년경에 나자렛 출신이던 예수가 공생애 활동하는 주 무대가 된다.
기원후 39년 헤로데 안티파스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폐위당한 뒤 갈릴래아와 페레아는 40년, 그의 조카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의 손에 들어간다. 41년 아그리파스 1세가 유대 왕위에 오르고, 44년 그가 사망하면서 갈릴래아와 페레아는 유다이아 속주에 편입되어 로마 제국의 직할령이 된다.
기원후 50년 갈릴래아 | 제1차 유대-로마 전쟁(기원후 66년~73년) |
제1차 유대 로마 전쟁이 발발하고, 유대인 다수 지역인 갈릴래아 역시 전쟁에 휘말린다. 당시 로마의 장군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67년 갈릴래아를 침략하여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다.
132년 유다이아 속주에서 바르 코크바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을 일으키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대규모 군사를 소집하여 이를 진압한다. 하드리아누스는 135년에 유다이아 속주의 명칭을 '팔라이스티나(Palaestina)'로 변경하면서 시리아 속주와 통합하여 새롭게 시리아 팔라이스티나(Syria Palaestina) 속주로 개편한다. 따라서 갈릴래아 역시 시리아 팔라이스티나 속주로 이어진다.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의 팽창으로 레반트를 이슬람 세력에 내주면서 갈릴래아 역시 정통 칼리파조의 손에 들어간다. 이후 갈릴래아는 차례대로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이흐시드 왕조, 파티마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갈릴래아는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가 된다. 십자군이 철수하고 아이유브 왕조와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면서 갈릴래아도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기에 아랍계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흥하여 반세기 가까이 팔레스타인 대부분과 레바논 남부를 지배한다.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세우고 갈릴래아도 위임통치령에 속하게 되며, 이후 이스라엘의 영토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