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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생의 박사(Doctor Incarnationis)
1. 개요
생몰연대: 376 - 444[1]성인 달력에서는 가톨릭, 루터교회, 콥트교회에서는 6월 27일, 정교회에서는 1월 18일 또는 6월 9일
성공회에서는 6월 28일이다.
이름은 키릴로스(코이네 희랍어), 키릴루스(고전 라틴어), 치릴루스(교회 라틴어), 치릴로(한국 가톨릭 성인명) 등으로 읽는다.
2. 생애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신학자 중 한 명이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교회 라틴어 발음을 따른 '치릴로', 한국 정교회와 한국 콥트 정교회에서는 '키릴로스'로 표기한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며, 선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테오필로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삼촌에 의하여 사제 서품을 받았다. 403년에는 테오필로스를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를 단죄한 느티나무골 주교회의(Σύνοδος ἐπί Δρῦν, Synodus ad Quercum)[2]에 참석하였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로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를 반대하였다.412년 10월 15일 테오필로스가 사망하자 성 키릴로스는 사흘 후에 테오필로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한국 나이로 33세에 그리스도교의 5대 중심지 중 하나이자, 당시 신학에서 사실상 에이스 노릇을 하고 있던[3]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다.
잘난 삼촌 때문에 높으신 분이 된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로 보이겠지만, 그의 진정한 역량은 총대주교 자리에 있으면서 드러난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네스토리오스인데,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이단인 네스토리우스파의 수장이다. 키릴로스를 포함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단죄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물론 후대에 교부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결과로는, 네스토리우스가 기존에 알려진 수준의 극단적인 이단은 아니고 오히려 네스토리우스가 '말하고자 한 의도'는 키릴루스 및 에페소 공의회가 '말하고자 한 의도'와 조화될 수 있거나 '큰' 충돌까지는 없다고 보지만, '말하고자 한 의도'의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신학 정식'에서는 양자가 충돌한 건 분명하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의 진짜 문제는 '그리스도론에 대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해'라는 성서학적 문제라기보다는 '공동의 신학 정식을 도출해내고 일치를 확인'하는 교회론적 문제였다. 현대에는 기존 권위에 대한 반발과 일종의 '상식 타파의 상식' 수준에서 '순진한 신학자 네스토리우스'와 '교활한 정치인 키릴루스'라는 이분법 프레임으로 이를 설명하는 오류들이 많지만, '두 명의 고집 센 신학자가 근본적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신학 정식 합의를 못해서 한 명이 단죄된 사건'이 에페소 공의회의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키릴루스가 고집 센 토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네스토리우스는 한술 더 떴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에페소 공의회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키릴루스는 AD 433년에 자신과 네스토리우스를 중재하는 신학 정식에 동의를 함으로써, 언어적 합의에 있어서 전적으로 고집 센 신학자였던 것도 아니다.
키릴루스 총대주교의 적수들 중의 한 사람은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바로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였다. 키릴루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피해자의 편을 들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유혹을 받는 사람은 키릴루스를 가차 없이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키릴루스가 그들에게는 박해자처럼 보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의 비극"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키릴루스는 좋은 역할을 맡지 못했다. 이미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을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음모에 대해 격렬하게 불평하였다. 그러나 키릴루스의 성격 중에 어떤 것은 네스토리우스와 당대의 그의 추종자들과 현대의 추종자들에게 어느 정도 옳다고 인정받는 것같이 보여 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때때로 키릴루스에게 "절제"가 부족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그것은 키릴루스의 적이 그에게 충고하는 바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안에 대한 그의 독단적인 간섭, 에페소 공의회에서 증명해 준 그의 조급함과 성급함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으며, 그의 많은 음모들은 우리에게 심지어 악판 효양이 될 수도 있다. 기꺼이 우리는 옛 사람인 틸레몽의 판단을 반복하고자 한다. "키릴루스는 거룩한 사람이지만, 그의 모든 행동들이 마찬가지로 거룩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L.S. Le Nain de Tillemont, 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Ecclésiastique XIV, Paris, 1709, 541.)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성격의 결합이 무엇이었든, 진리에 대한 걱정과 믿음을 향한 열망만이 성 키릴루스를 움직였다는 것이다. 텍스트 안의 어느 것도 그가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는 비난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주도권을 알렉산드리아가 가지도록 하고, 그의 적들을 제압하고 말살하려는 의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키릴루스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너무 많은 조급함을 보여주었지만, 나중에는 인내와 강단을 보여주었으며,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다.
확실히 키릴루스 주교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엄격했다. 그러나 우리가 재고해야 할 433년의 협상에서, 키릴루스는 반응을 할 때 절제함을 보여줄 줄 알았고, 평화 때문에 그에게 소중한, 하지만 논란이 될 여지가 있는 정식들을 포기할 줄 알았다. 그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그의 주적이었던 네스토리우스와 화해하기 위해 자신을 반대하는 다른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가 평화 조약 체결에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진실이다.
요컨대 키릴루스는 설교가이며 사목자로서, 그리고 성경주석가이며 신학자로서 네스토리우스를 훨씬 능가하는 사람이었다.
Ignacio Ortiz de Urbina,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Les conciles de Nicée et de Constantinople 324 et 381, 황치헌 옮김,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 pp.51-53.
실제로 키릴루스가 동의한 433년의 일치정식을 보면, 키릴루스가 단지 신학정식에서 기꺼이 양보할 의도가 있었음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지닌 완전한 인간이시며, 모든 시대 이전에 신성에 따라 아버지에게 나셨으며, 마지막 날에 우리 때무에, 우리 구원을 위해 인성에 따라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바로 이분께서 신성에 따라서는 성부와 본질이 같으시며homoousios, 인성에 따라서는 우리와 본질이 같으심을homoousios 고백합니다. 두 본성이 일치되었기henōsis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분이신 그리스도, 한 분이신 아들, 한 분이신 주님을 고백합니다. 이 일치는 혼합된 것이 아니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거룩한 동정녀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ókos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이신 말씀이 육과 인간이 되셨으며, 잉태되신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취한 성전(聖殿)을 자신과 일치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와 안티오키아 교회에 속한 주교들의 일치 정식〉, 433년 봄[4]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와 안티오키아 교회에 속한 주교들의 일치 정식〉, 433년 봄[4]
치릴로의 노선을 따라 에페소 공의확 만든 이 "교의적 기준"은 433년에 작성된 소위 일처정식 안에서 비로소 꽃을 피운다. 이 정식 안에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두 학파의 그리스도론이 어느 정도 접접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 정식은 에페소와 칼케돈을 근본적으로 이어주는 "에페소 신경"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 정식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유일한 주체, 두 본성의 결합을 표현할 때 synápheia를 쓰지 않고 hénōsis를 쓰는 것, 육화 때의 로고스의 주도권,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 Theotókos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이나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두 본성의 구분, 두 본성의 한 실체''prósópon 안에서의 결합) 모두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고 동일본질(homooúsios)이라는 표현을 성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한다. 이 정식의 중요성은 서로 다른 두 사조가 각각의 용어를 고집하지 않고 서로 공감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신앙을 일관성 있게 표현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안젤로 아마토Amato Card. Angelo, S.D.B., 《예수 그리스도》Gesú il Signore (2008) , 김관희 옮김,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2014, pp.474-475.
이 정식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유일한 주체, 두 본성의 결합을 표현할 때 synápheia를 쓰지 않고 hénōsis를 쓰는 것, 육화 때의 로고스의 주도권,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 Theotókos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이나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두 본성의 구분, 두 본성의 한 실체''prósópon 안에서의 결합) 모두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고 동일본질(homooúsios)이라는 표현을 성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도 적용한다. 이 정식의 중요성은 서로 다른 두 사조가 각각의 용어를 고집하지 않고 서로 공감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신앙을 일관성 있게 표현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안젤로 아마토Amato Card. Angelo, S.D.B., 《예수 그리스도》Gesú il Signore (2008) , 김관희 옮김,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2014, pp.474-475.
이후 키릴로스는 결국 1883년에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후계자들은 키릴로스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2개의 본성'이 결합하여 '하나의 위격, 하나의 본성'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를 합성론이라고 한다.[5] 이 주장은 '하나의 위격, 2개의 본성'이라는 결론이 난 칼케돈 공의회에 의해서 단죄되었다.[6]
3. 히파티아 살해 연관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대신학자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게 금기시 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히파티아는 당대 명성 높던 여성 수학자였다. 기록을 보면 대단히 유명한 학자였고, 많은 사람이 사랑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키릴로스는 당시 총독이던 오레스테스와 권력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명망이 높던 히파티아가 오레스테스와 친한 것이 눈엣가시로 여겨졌다. 이에 키릴로스 진영에선 히파티아가 이교도 마녀라는 흑색 선전을 하였다. 결국 이를 실제로 믿은 그리스도교 광신도들이 히파티아를 납치한 후 산채로 피부를 벗기는 고문을 하여 죽였다.
키릴로스는 이 일로 1년 가량 근신해야 했지만, 1년 후 다시 교회 고위직으로 복귀하였다.
당시에는 '키릴로스가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일로 비난할 수 없다'고 넘어갔다. 하지만 후대에 와서는 직접 지시했을 거라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다. 상세한 내용은 히파티아 항목을 참고.
[1]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해당 성인의 생몰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와 있지만 가톨릭/성공회/루터교회에서는 380 ~ 444, 콥트교/루터교회에서는 400 ~ 444이라고 나와 있다.[2] 떡갈나무 시노드로 번역되기도 한다.[3]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의 플라톤'이라 불리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을 비롯해 그 이전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옮겨와 살던 곳으로 유대인 공동체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고, '70인역(셉투아진타)'이라는 이름으로 히브리어 성경(구약)이 최초로 그리스어로 번역된 곳인데다 기독교 전래 이전부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당시 지중해 세계의 학문의 중심지였다. 더군다나 로마 제국 시대에조차 이집트 속주는 다른 로마 제국 속주들과는 달리 황제 직할령이었으니 정치적으로도 자부심이 만만찮았다.[4] 본문 출처: 하인리히 덴칭거Heinrich Denzinger,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ㆍ선언 편람》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제44판, 이성효 등 번역,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4, 제272항[5] 단성론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6] 다만 그렇다고 키릴로스의 주장 그 자체가 합성론인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키릴로스가 좀 아리까리하게 적어두었는데, 정통파와 합성론자들은 서로 키릴로스의 글을 인용하며 서로를 반박했다. 다만 요즘에는 합성론(오리엔트 정교회)과 정통파(가톨릭 및 정교회) 간에는 그냥 표현의 차이 정도만 있는게 아니냐는 의견이 점점 힘을 얻고 있어서 종파 간 대화가 활발히 진행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