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8a32b,#e8a32b><colcolor=#3e240d,#3e240d> 성인 다마스쿠스의 요한 Ἰωάννης ὁ Δαμασκηνός | Ioannes Damascenus | |
본명 | 유하나 이븐 만수르 이븐 사르준 |
출생 | 675년 혹은 676년 |
우마이야 칼리파국 다마스쿠스 | |
사망 | 749년 12월 4일 (향년 72~74세) |
우마이야 칼리파국 예루살렘 마르 사바 수도원 | |
사상 | 신플라톤주의 |
종교 | 그리스도교 |
축일 | 12월 4일 |
수호 | 약사, 성상학자, 신학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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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의 수도자,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작사가다.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그리고 루터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12월 4일.
2. 생애
7세기 중기 우마이야 칼리파국에서 요한은 무아위야 1세의 재무관인 사르준 이븐 만수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재 학계에서는 당시 요한의 가문은 아랍계 그리스도교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요한은 어린 시절 야지드 1세 칼리프와 친구였다.요한은 23세 때 아버지의 지시로 그리스인 전쟁 포로였던 코스마스를 선생으로 삼아 학문을 익혔다. 코스마스로부터 기하학, 논리학, 대수학, 신학, 음악, 천문학, 형이상학 등을 공부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요한은 다마스쿠스의 최고 참의원이 되었으나, 압드 알말릭의 반그리스도 성향 때문에 다마스쿠스를 떠났다.
그는 스승 코스마스와 함께 마르 사바 수도원에 들어가 그리스도교 관련 글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요한이 사제가 된 후 726년 동로마 제국에서는 성상 논쟁이 시작되었다. 요한은 성상 파괴의 강력한 지지자였지만, 레오 3세는 성상 숭배를 반대하지 않았고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일부 성상만을 파괴했다. 그는 749년 예루살렘에 위치한 마르 사바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사상
요한은 주로 편집과 변증을 했지만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요한이 쓴 《지식의 샘》은 당시 동방 정통신학의 체계화된 정점으로 그의 대표작이지만, 그의 독자적인 생각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이나 성육신과 달리 '성상은 경외와 숭배를 위해서만 사용되기 때문에 우상숭배적'이라는 그의 독자적인 생각은 성상 논쟁 때 동방교회 안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그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슬람 비평가이기도 했다. 이슬람은 이스마엘의 이단이고 쿠란이 구약성경을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