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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09:44:17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파일:알렉산드리아의 필로.jpg
이름 필론 Φίλων(그리스식 이름) / 필로 Philo (라틴어 음역)
예디디아יְדִידְיָה(유대식 이름)
출생 기원전 15년에서 기원전 10년 사이
아이깁투스 속주 알렉산드리아
사망 45년에서 50년 사이
아이깁투스 속주 알렉산드리아
직업 유대 철학자

1. 개요2. 생애3. 저서4. 필로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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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세기와 1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철학자. 유대교와 철학적 이성의 결합을 시도한 최초의 유대 철학자로, 기독교신학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

2. 생애

기원전 15년에서 기원전 10년 사이에 아이깁투스(이집트) 속주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의 가문은 혈통의 고귀함에서 다른 모든 가문을 능가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의 집안은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기 전에 유대 왕국에서 고위 관직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형제로 세금 징수관을 역임한 알렉산드로스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리시마코스는 지중해 동방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로, 유대 왕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의 아내에게 막대한 대출을 해주고 예루살렘 성전의 큰 성문 9개를 덮는 금과 은을 기증했다. 또한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의 오랜 친구였다고 하며, 클라우디우스 1세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를 보필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티투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를 낳았는데, 이 인물은 66~69년 아이깁투스 장관을 맡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로마를 위해 싸웠고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티투스를 보좌했다.

그는 일찍부터 그리스 체육관에 등록하여 체육을 익히는 한편 그리스식 철학을 숙지했다. 그는 저서에서 광범위한 그리스 작가를 언급했으며, 그리스 수사학파의 기법을 잘 알았다. 당시 교양 있는 그리스인들이 흔히 그렇듯 극장에 자주 찾아갔지만, 정작 연극의 내용보다는 연극을 바라보는 청중의 열정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는 권투 대회를 예리하게 관찰했고 전차 경주에도 참가했으며, 호화로운 오락과 값비싼 만찬에 대해서도 종종 언급했다. 유대식 교육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의 교육 방식은 그리스인의 것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헬레니즘에 빠져들어 전통 유대교를 부정한 '유대 헬레니즘 주의자'가 아니며 유대교에서 정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필수적인 과업이라고 여겼다. 그는 저서에서 예루살렘에 순례했다고 밝혔지만, 언제 그랬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렇듯 그리스 문화에 흠뻑 빠지면서도 유대인의 문화 역시 따르려 했기 때문에, 종종 정체성 위기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저서에서 세속적 근심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사색하고 싶은 욕망을 종종 드러냈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참고 살기 힘들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사해 일대의 수도원 공동체에 살았던 유대 종파인 에세네파가 도시에 만연한 죄악을 피해 농경 생활을 하고 부를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칭찬했다.

3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이 로마 황제를 신으로 받들지 않는 유대인들을 반역자라고 규탄하며 폭동을 일으켜 수많은 이들을 학살했다.(38년 알렉산드리아 폭동) 이에 필로는 칼리굴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유대인들을 보호해주고 그리스인들을 처벌해줄 것을 요청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저서에서 칼리굴라와 대면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황제는 젊은 나이에도 무척 총명하고 재치가 많은 인물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신들 얘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고 그리스 대표자들의 편만 들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마지막 날에 유대 사절단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는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것만큼 악질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어리석은 민족인 건 확실하다. 내가 신의 본질을 상속한 것을 믿지 않는다니 말이다.”

필로는 사절 임무가 실패했다고 여기고 낙담했지만, 칼리굴라는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지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황제는 그리스인들의 학살을 방관한 아이깁투스 장관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를 해임하고 새 장관을 세워서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다시는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40년 칼리굴라가 갈리아에서 게르만족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리스인들이 승리를 기념해 제단을 만들었을 때 일부 유대인들이 제단을 허문 사건이 벌어지자, 칼리굴라는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유대인 회랑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페트로니우스는 그랬다간 유대인들이 반발하여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황제의 명령을 가능한 한 미뤘다. 황제는 총독의 명령 불이행에 분노하여 긴급서한을 보내 빨리 시행하라고 촉구하며, 끝까지 시행하지 않는다면 자살하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서한이 도착한 41년에 칼리굴라가 암살당했고, 페트로니우스는 칼리굴라의 명령을 파기했다. 필로는 45~50년 즈음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저서

필로는 당대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방대한 저서를 출간했는데, 그 주제는 성경 해석, 철학 또는 종교 사색, 현실에서의 삶에 대한 숙고 등 3가지로 나뉜다. 그는 모세의 생애를 상세히 서술했고 모세오경의 특정 구절이나 주제를 다뤘는데, 특히 창세기에 대한 해설과 모세오경의 율법에 대한 해설은 현대 유대교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철학에서는 '현명한 자만이 자유롭다'라는 스토아 학파의 이론에 반대하며 "모든 선한 사람이 자유롭다"라고 주장했으며, 유대인들이 나병에 걸렸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추방되었다는 그리스 학자 아피온의 주장을 비롯한 반유대주의 성향의 주장에 대한 반박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저서는 유대인들에게 철저히 배척되었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전폭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고 예루살렘 함락을 도운 그의 집안을 변절자로 간주한 것에 비해, 기독교인들은 그의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써먹기에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라고 여긴 기독교인이었을 거라고 여겼다.

당대에 명망높은 유대인 철학자였기 때문인지, 그가 쓴 것으로 위장한 저서들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 중 하나인 <성서 유물(Biblical Antiquities)>은 아담에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죽음까지 유대인의 역사를 상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산쿠니아톤이란 저서에선 페니키아 신화를 다루었는데 당시 페니키아와 그리스 신들이 동일시되던 흔적을 볼 수 있다.

4. 필로의 철학

필로의 철학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학파, 키니코스 학파, 스토아 학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플라톤의 철학을 기본으로 삼았기에, 히에로니무스 등 여러 기독교 교부들은 "플라톤을 필로화하거나 필로를 플라톤화한다"라는 당시에 널리 알려진 격언을 인용하곤 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우주론과 도덕론을 전수받았고,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숫자, 특히 7의 신비성과 불멸성을 숙지했고, 키니코스 학파로부터 현실을 냉철하게 살피는 안목을 전수받았다. 그는 다른 어떤 학파보다 스토아 학파의 용어를 자주 사용했지만, 그들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필로는 자연의 법칙을 정지시킬 수 있는 신의 섭리를 주장했다. 이는 신 역시 불변하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그리스 철학과 대비되는 견해다. 그는 신이 세상을 창조한 뒤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채 세상에 특별한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한편,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자신의 유대 신학과 독창적인 방식으로 조화시켰다. 그는 이데아를 신의 영원한 생각으로 가정했으며, 신은 이 생각을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실제 존재로 창조했다고 봤다. 또한 그는 신이 인간에게 신비한 사랑을 심어줬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신을 닮아간다고 밝혔다.

필로는 창세기 1장에서 신이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했던 것을 근거로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보조원들을 두었으며, 이들이 신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린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서도 로고스(Logos)는 신 다음으로 으뜸가는 존재로, 비물질적이고 신의 적절한 형상이며, 불멸의 존재이지만 신의 권한을 위임받았을 뿐 신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할 수는 없다고 한다. 또한 로고스는 전 세계에 퍼져서 인간의 사고를 담는 그릇으로 활동하며, 인류를 대변하는 변호인의 기능과 세계를 향한 신의 사절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한다. 필로는 민수기 22장 31절에서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여기 와서 이스라엘인을 저주해달라"라는 초대를 받고 모압으로 향하던 예언자 발람의 앞을 가로막은 하느님의 사자가 바로 인간의 양심 역할을 하는 로고스의 현시라고 해석했다.

일부 학자들은 필로가 "enthousiasmos(하나 안에 신을 가짐)"이라는 용어를 포함해 이교와 신비주의 숭배자들의 용어를 사용한 것을 근거로 그가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라 신비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그 용어들은 당시에 일반적인 연설이나 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일 뿐이며, 이것만으로 필로의 유대 신앙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는 아마도 유대교에 대한 신비주의적 설명을 통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신앙을 유지하고 이방인들이 유대교를 쉽게 받아들이길 희망했을 것이다. 그는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의 한 사람으로,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신학적 어려움, 특히 의인화[1]에 직면한 사람들을 비판했으며, 율법에 대한 비유적 해석을 과도하게 하여 "단지 비유일 뿐이니 더 이상 순종할 필요가 없다"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비판했다.

필로는 플라톤처럼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여겼고, 이를 탈출하여 물질에서 영원한 세계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달리 인간이 '신의 섭리'를 따른다면 자신의 본성과 자연의 법칙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완벽한 행복은 덕을 쌓기 위한 인간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오기 때문에 인간성과 종교적 믿음 모두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정치 이론에도 자신만의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정부의 가장 좋은 형태는 민주정이라는 언급을 종종 했지만, '폭도들에 의해 좌우되는' 중우정치는 최악이라고 여겼다. 그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한 정부 아래에서 정당한 질서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정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가 민주적 헌법 아래 단일 국가가 된다면 세상은 평온해지고 만민이 행복해질 거라고 밝혔다.


[1] 인간의 특성으로 하느님을 묘사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