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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도 안에는 오로지 하나의 의지만이 있다는 기독교 신학적 주장이다. 단성론의 일파로써 이단으로 취급되어 정죄되었다.2. 역사
단의론의 배경에는 단성론이 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라클리오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멸망할 뻔한 동로마를 기적적으로 중흥시켰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는, 이미 칼케돈 공의회 이래 단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성론파들이 근동, 즉 이집트, 시리아에 주류 세력으로 분포해 있었고 단성론파와 칼케돈파의 갈등은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다.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세르기우스는 단의설 신앙고백 문서인 에크테시스(Ekthesis)를 발표하여 그리스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신으로서의 본성 두 개가 다 있지만, 단일한 의지를 지닌다는 단의론으로, 예수에게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통 신앙과 같되, 하나의 단일한 의지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단성론자를 위한 일종의 배려로써 (합성론도 포함된) 단성론파와 칼케돈파(양성론)의 갈등을 봉합하려 한 것이다. 처음에는 로마의 호노리오 1세 교황도 지지하였고 마침내 제국의 교회가 신학적 일치를 이루나 했는데 후임 교황 요한 4세는 단의론을 단성론이 새끼를 친 것이라 비판하면서 단의론에 반대하였으며 이후의 교황들과 총대주교 역시 단의론을 부정하였다.
이후 이라클리우스 황제 재위 합성론을 믿는 시리아, 이집트가 이슬람 제국의 정복에 떨어진 이후 단의론의 필요성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라클라우스조차 결국 에크테시스를 부정하고 사망했다. 이라클리우스 사후 콘스탄스 2세 황제를 거쳐 콘스탄티노스 4세 시대에 가서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하여 예수에게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있다고 결의하였으며 단의론을 이단으로 단죄하여 배척함으로써 단의론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덤으로 단의론에 찬성했던 호노리오 교황도 파문해버렸다. 이로서 오랫동안 이어진 단의론 투쟁은 완전히 일단락 지어진다. 더불어 단성론 교회와 칼케돈 교회의 일치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합성론파는 칼케돈파와 완전히 분리되어 오리엔트 정교회가 되어버리고 현대까지 이어진다.
711년 동로마의 황제 필리피코스가 예전에 끝났던 단의론 신학 논쟁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는 즉위 후 자신이 단의론 신봉자임을 전격적으로 밝히고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결정, 즉 단의론 폐기를 거부하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공의회의 회의 장면을 묘사한 황궁의 그림을 치우고 밀리온 성문에 부착된 공의회의 장식판을 떼어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필리피코스의 단의론 부활 시도는 교황 콘스탄티노를 비롯한 제국 내외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으며 713년 필리피코스 황제가 폐위당하고 새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즉위하여 다시 정통신앙으로 복귀함에 따라 단의론의 짧은 중흥 시대는 끝났다. 이로써 단의론은 완전히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