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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한산도 대첩 閑山島 大捷 | ||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 ||
▲ 한산도 대첩 기록화 | ||
시기 | 1592년 (선조 25년) 8월 14일 그레고리력 (1592년 음력 7월 8일) | |
장소 | 조선 견내량 한산도 앞 바다 (現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거제대교 앞 일대) | |
원인 | 남해안 제해권 확보 및 장악을 위한 조선과 일본의 결전 | |
교전국 |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승 | 일본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이순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최고지휘관)[1] 원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 지휘관 와키자카 야스하루 (최고지휘관) |
참전자 이순신 (방답첨사) 권준 (순천부사) 배흥립 (흥양현감) 정운 (녹도만호) 정걸 (전라좌수영 경장) 어영담 (광양현감) 김완 (사도첨사) 우치적 (영등포만호) 한백록 (지세포만호) 이운룡 (옥포만호) 이영남 (율포만호) 송희립 선거이 기효근 (남해현령) 황세득 (장흥부사) | 참전자 와키자카 사효에 † 와타나베 시치에몬 † 마나베 사마노조 †[2] | |
병력 | 조선 전선: 58척 - 판옥선: 56척 - 전라좌수영: 24척 - 전라우수영: 25척 - 경상우수영: 7척 - 거북선: 2척 | 일본 전선: 73척 - 아타케부네: 36척 - 세키부네: 24척 - 고바야부네: 13척 |
피해 | 사상자: 13명 - 전사자: 3명 - 부상자: 10명 | 대장선 침몰 최고지휘관 부상 아타케부네 35척 침몰 세키부네 17척 침몰 고바야부네 7척 침몰 사상자 미상 |
결과 | 조선의 압도적 승리 | |
영향 | * 조선 수군의 남해안 제해권 확보[3] * 도요토미 히데요시 해전 금지령 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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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산도 대첩(閑山島 大捷) 또는 견내량 대첩(見乃梁 大捷)은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승전 중 하나로,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내해에서 발발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간의 전투이다.임진왜란의 전황이 바뀌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전투 중 하나로 이 대첩의 결과로 일본 수군이 계획한 수륙병진을 완전히 수포로 만들었다. 특히 이때의 패전으로 해상보급로가 끊겨 평양까지 승승장구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이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을 받지 못하여 평양성에 눌러앉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전라도를 공격하는 왜군도 수군의 도움을 받지 못해 움직임이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2. 배경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난중일기, 7월 초8일 기사
난중일기, 7월 초8일 기사
선조 25년(1592), 5월과 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로 이어지는 일본 함대를 상대로 일방적인 토벌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에 해안에서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버리는 것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주둔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 요시타카와 그 외 가토 요시아키 등 3인을 소집하여 군대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8월 12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 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세했다. 참고로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원균이 자침시킨 경상우수영 판옥선만 해도 편제기준 70여 척, 기록상 56척 이상이다.[4]
3. 전개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
6월 14일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이미 휘하의 1500명으로 조선군 5만을 격퇴한 용인 전투에서의 경험을 통해 조선군의 전략을 과소평가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월 7일,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했다. 그날 저녁 무렵에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한 조선 수군은 8일 한산도 근해에서 이를 확인했다.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
일본군의 세력은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전의 해전처럼 항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형태로 전투를 치르기엔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 데다 조류의 흐름도 역류[5]여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함대 간의 전면전이 불가피하자 조선군은 한산도 근해에서 적들을 유인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대여섯 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군 함대를 전체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시작으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식견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매복을 의심할 상황이었지만, 와키자카는 조선군을 업신여기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전선을 추격해 넓은 바다로 진입했다. 와키자카의 함대가 들어서자 한산도 좌우의 섬에서 대기하던 조선 측 전선들은 3개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을 형성하였고, 일본 수군을 포위한 뒤 십자포화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7월 7일 가라시마[6] 앞쪽으로 배를 밀어 나아가니 마침 해협 안에 판옥선 4~5척이 있는 것을 보고 조총을 쏘며 반각 정도 싸움을 걸었다. 판옥선이 슬금슬금 뒤로 빼는 것을 빈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여서 3리 정도 쫓아갔을 무렵이었다. 판옥선이 막 해협을 지나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한번에 키를 돌려 잡고는 큰 배를 양쪽으로 벌려 세워 아군의 배를 둘러쌌다. 이는 유인하여 무찌르는 계책임이 분명했다. 아군의 배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적은 큰 배, 아군은 작은 배이므로 당해내기 힘들어서 원래 온 해협으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적의 판옥선이 밀어붙여 와서는 아군 배에 호로쿠비야[7]를 던져넣어 곧 배가 불타올랐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신인 와키자카 사효에, 와타나베 시치에몬을 시작으로 이름 있는 자 여럿이 전사했다.
와키자카기(脇坂記) 중
적은 큰 배, 아군은 작은 배이므로 당해내기 힘들어서 원래 온 해협으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적의 판옥선이 밀어붙여 와서는 아군 배에 호로쿠비야[7]를 던져넣어 곧 배가 불타올랐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신인 와키자카 사효에, 와타나베 시치에몬을 시작으로 이름 있는 자 여럿이 전사했다.
와키자카기(脇坂記) 중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 학익진 대형의 판옥선이 십자포화를 퍼붓는 장면. |
때마침 역방향으로 해류가 바뀌었고, 조선 수군은 이에 총통과 화전(火箭)을 쏘며 전진했다. 전 방향에서 날아드는 탄망[8]에 주력선인 세키부네(관선)는 물론이고 일본군 내 주요 가신들이 탄 아타케부네(안택선)까지 줄줄이 격침되고, 일본군은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9] 40척이 넘는 전선을 잃었다. 심지어 지휘관인 와키자카 본인도 지휘선을 관통한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후 와키자카의 잔존 부대는 200-400여 명 정도가 한산도에 배를 내버려둔 채 도망쳤으며, 다른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은 멀리서 해전을 관망하다가 일본군의 전선이 모두 격침당하자 퇴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야스하루는 노 수가 많은 쾌속선으로 갈아탔다. 기동이 자유로우며 선체가 무사하다고는 하나 갑옷에 화살을 맞는 등 구사일생의 위기에 빠졌다. 적선이 쫓아오며 계속 불화살을 쏘아대니 야스하루의 고속선은 마침내 김해로 철수했다. 적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부하 200여 명은 육지에서 50정[10] 떨어진 작은 섬에 잠시 배를 대고 상륙했는데, 판옥선이 쫓아와 아군 배를 불살라버렸다.
마나베 사마노조라는 자는 당일 그 배의 선장이었는데, 그 배가 불타버린 이상 목숨을 건져봐야 별 수가 없고, 군중에서 다시 아군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여 할복해 죽고 말았다.
와키자카기 중
마나베 사마노조라는 자는 당일 그 배의 선장이었는데, 그 배가 불타버린 이상 목숨을 건져봐야 별 수가 없고, 군중에서 다시 아군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여 할복해 죽고 말았다.
와키자카기 중
와키자카는 한산도에 상륙했는데 마지막 남은 배를 판옥선이 쫓아와 불태우고 가버렸고, 오고 갈 데가 없는 상황에 절망한 선장마저 자살했다. 죽음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뒤에 남아 있던 구키, 가토도 와키자카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쫓아오지만, 이들도 조선수군에 패배했다.[11]
가라시마의 작은 섬에[12] 올라와 있던 나카쓰카사[13]와 그 가신들은 13일간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불탄 배의 널빤지로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올라가려 하였다. 판옥선이 물러나는 틈을 잘 보고 있었는데, 가라시마 밖에 일본의 병선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 판옥선이 갑자기 물러났다. 그 틈에 5~6명씩 뗏목에 타고 그 섬으로부터 육지로 오던 중 판옥선이 다시 키를 돌려 와서 바닷가에서 (아군) 10여 명을 사살했다. 남은 자는 200여 명 남짓이었다. 겨우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나 목숨을 건져 김해로 돌아왔다.
와키자카기 중
와키자카기 중
와키자카는 그야말로 눈물나는 모험을 벌여 간신히 김해로 도주에 성공했다. 13일이나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살아남고, 먼바다에 뜬 적의 눈치를 보다가 뗏목을 만들어 한산도에서 거제도로 5㎞를 건너간 뒤 다시 거제에서 육로와 수로를 병행해 김해로 탈출했다. 여담이지만 와키자카가 먹었던 미역은 보통 미역이 아니라, 견내량 돌미역이라 불리는 통영 거제 지역 특산물이다. 조정에 진상할 정도로 고급품이었으며, 이순신과 수군 장병들도 틈틈이 채취하여 군량으로 댔다. 와키자카는 본의 아니게 조선의 특산물을 실컷 먹고 돌아온 셈.[14]
와키자카를 살아 도망가게 만들어 준 것은 원균의 탓이다. 견내량파왜병장을 보면 전라 좌도와 우도 수군은 군량이 떨어지고 금산의 적이 전주에 도착했다는 기별이 잇따라 닥치자 본진으로 회군을 결정하였고, 한산도에 몰린 적은 경상우수사가 처리하고 급수를 통고할 것을 약속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원균은 이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와키자카를 포함한 남은 왜군을 도주하게 만든 것이다. 참고로 경상우수영의 본진은 거제도 가배진으로[15] 눈 뜨면 보이는 정면이 한산도이다. 부산포파왜병장에서는 원균이 왜적이 많이 온다고 잘못듣고 포위를 풀었기 때문에 한산의 왜적이 뗏목을 만들어 모두 거제로 건너가 버렸다고 하는 바, 이를 들은 이순신이 통분해 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 기록들이 한국처럼 데이터베이스화가 되어 있지 않다 보니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료들이어서 그렇지, 시점을 일본 입장으로 돌려서 보면 조선의 판옥선이 순식간에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로 보이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의 판옥선을 마주치자마자 제원 차이에 압도당했으며,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유재란 때는 기존의 배들보다 훨씬 크게 만든다.
4. 결과
이제까지 늘 수세적인 입지에서 정박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 주된 전투방식이었던 조선 수군에게 이 해전은 처음으로 벌인 방어전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라도를 지키는 방어전으로 그치지 않고, 해상에서 포위섬멸을 감행하는 놀라운 전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일본 수군의 공세를 완전히 분쇄시켰다.일본군에게 있어서는,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 함대에 대하여 일본 수군이 처음으로 행한 공세적 작전이자, 이치, 웅치, 전주성, 진주성 등으로 이어질 전라도 공방전의 보급을 담당할 일본 수군에게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이 한 번의 공세에 너무 많은 변수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해전의 참패는 일본군에게 있어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전략 단계에서부터 조선 점령을 좌절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참패를 겪은 일본군은 이틀 뒤인 10일 안골포 해전에서 뒤따라 출격한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까지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총 100척 이상에 달하는 대함대가 고작 사흘 만에 수장당하는 치명타를 입었다.
조선 수군은 안골포 해전 이후 가덕도를 지나 김해에서 부산 몰운대까지 진출해 함대를 길게 늘어뜨려놓아 위엄을 보이도록 했는데, 일본군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견내량파왜병장은 탐망군 허수광의 보고에서 김해의 늙은 중이 말한 바 양산과 김해의 낙동강 일대에 왜선 백여척이 주둔해 있었는데 안골포의 접전 때 포 소리를 듣고는 간밤에 모두 도망쳐버렸다고 하였다.
이에 더 이상 해상 전투에서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대신 해안선 방어를 하라는 뜻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완전히 되찾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해의 제해권은 매우 중요했다. 한반도의 강들은 대부분 서해로 흐르는데, 일본 수군이 남해에 있는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돌파하고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한다면, 한반도에 있는 일본 육군의 보급이 매우 용이해진다.[16] 이는 일본군도 잘 아는 사실이었기에 서해를 장악한 이후의 육군 보급을 계획하고, 수군 주력의 대부분을 투입하면서 남해의 제해권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손에 쥐고 넘겨주지 않았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 육군에게도 큰 타격을 가한 셈이다. 여기에 더해 권율이 이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전라도를 지켜내는데 성공하게 되는데, 이로인해 경상도에서 급하게 진군을 해버린 일본은 전선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어 조선 침공에 실패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서해를 통한 수륙병진이라는 목표가 완전히 좌절됨과 더불어 이순신 함대의 4차 출동에는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는 일본의 본진 부산까지 습격당했다. 이렇게 일본군이 해상 요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명나라군의 참전과 더불어 일본의 임진왜란의 큰 패인이 되었다. 애초 계획이었던 육군과 수군이 같이 진격한다는 수륙병진전략이 깨진 것이다.
또한 한산도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의병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해안가에서 거주하던 백성들은 해상의병이 되어 이순신과 함께 싸우거나 지형과 바닷물의 흐름을 알려주어 전략을 짤 때 큰 도움이 되었다.[17]
또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당도했을 때 우리 진영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우리 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18]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제 싸움[19]에서 패하면서 한 팔이 꺾였기 때문에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성을 점령하였을지라도 군세가 외로워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에 군량을 조달하고 명령을 전달하여 중흥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동과 천진 등지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와서 구원하여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이 싸움의 공이다.
"우리 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18]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제 싸움[19]에서 패하면서 한 팔이 꺾였기 때문에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성을 점령하였을지라도 군세가 외로워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에 군량을 조달하고 명령을 전달하여 중흥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동과 천진 등지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와서 구원하여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이 싸움의 공이다.
한편 전후 논공 행상을 위해 비변사가 선조에게 포상을 논의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 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1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
선조의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 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1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
얼핏 사소한 에피소드이지만, 와키자카는 분노와 회한으로 부들거리던 중 조선의 정찰선을 하나 발견하고 승조원을 깡그리 학살한 뒤 선장을 포로로 끌고 왔지만 그 선장이 탈주해 적진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자를 거제도에서 판옥선 대함대를 이끈 적장으로 전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임진왜란의 해전 중에서도 명량 해전, 노량 해전과 함께 매우 유명한 해전이어서,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는 높은 확률로 등장한다. 다만 다른 두 해전과는 달리 극적인 면에서는 영 부족한 감이 있다 보니,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지나치게 띄워주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불멸의 이순신. 아무래도 이 대첩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선 와키자카를 실제보다 고평가하는 것이 가장 간편하기 때문이다.또한 일부 창작물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조선 수군의 학익진을 보고 '이건 대체 무슨 진형이냐?'라며 놀라기도 하는데, 학익진이란 진형 자체는 육전에서는 고대부터 사용한 진형이라서 일본 장수들도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정 이런 감정을 표현한다면 '육지도 아니고 함대로 학익진을 펴다니,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라며 한탄하는 묘사가 더욱 고증에 가깝다. 불멸의 이순신과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와키자카가 학익진에 대해 잘 아는 묘사가 나와 약점을 간파하고, 비웃는 연출을 하였다. 일본내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을 상대로 학익진을 펼쳤다가 박살난 전투로 유명하다. 한산: 용의 출현에서도 와키자카가 학익진을 보고 앞서 언급한 이에야스와 신겐의 전투를 예로 들며 비웃는다.
5.1. KBS 역사스페셜
5.2. 드라마
5.2.1.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 19화에서 옥포 해전, 당포 해전에 이어서 다루었다. 그런데 앞의 해전 장면을 너무 짜깁기한 느낌에 이순신의 거짓 퇴각 후 학익진을 펼치는 전략 표현이 미흡한 점이 흠이다. 더구나 이 드라마에서 원균이 용장
5.2.2.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원균이 부산포에서 배에 불을 지르고 추하게 도망친 뒤 바로 이순신에게 찾아가 이순신의 등 뒤에 숨었다. 시종일관 이순신 혼자만의 지휘와 능력으로 승리한 전투로 묘사되었는데, 원균은 사실상의 구경꾼이나 다름없었다. 학익진도 이순신 혼자의 전체 통제 하에 전라 좌수영의 병력과 경상 우수영의 병력이 움직여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원균의 그 경상 우수사 직함이 이 전투에서는 사실상 바지사장이나 다름없게 되었다.5.2.3.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 한산도 해전 예고1, KBS |
불멸의 이순신 한산도 해전 예고2, KBS |
KBS DRAMA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올린 주요 장면.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73회 후반 ~ 74회에서 나왔으며 임진왜란의 전투 장면 중 가장 훌륭한 묘사로 꼽힌다. 소규모 함대를 내보내 일본군을 유인하는 장면과 일자진으로 가장한 뒤 거짓 후퇴하는 장면, 연합 수군의 학익진 구성, 화려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드는 포탄 등을 CG로 잘 표현했으며 이순신 역의 김명민과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의 김명수, 장평(코헤이) 역을 맡은 조재완의 열연 또한 각각 인상적이다.[20]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오류가 있는데, 와키자카가 매복시킨 함대가 양옆에서 튀어나와 쌈싸먹듯 포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판옥선이 일본군 함선보다 속도가 느리다는 점을 생각하면, 진짜 저랬으면 학익진을 펴기도 전에 조선군은 백병전에 휘말려 대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레이션은 학익진을 '이순신만의 창의적인 진형'이라고 소개하지만, 학익진은 실제로 일본에서도 사용된 육지에서는 흔한 전술이었다. 극중의 와키자카도 제 입으로 '학익진은 아군의 수가 적군에 비해 많을 때 쓰는 진형이거늘, 고작 20척으로, 70여 척의 내 함대를 감싸겠단 말이야? 게다가 학익진의 생명은 측면이거늘, 측면을 비워두고 학익진을 폈다 하겠는가?'라며 학익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복해 있던 조선 수군이 갑자기 등장하며 학익진을 형성하는 모습과 이렇게 형성된 쌍학익진에서 사방으로 화포가 날아가는 CG는 그야말로 장관을 보여주며, 때를 맞춰 돌격하는 거북선 역시 백미이다. 이후 판옥선의 한쪽 면이 포탄이 떨어진 틈을 타 와키자카가 작전대로 돌격하는데, 이에 이순신은 판옥선의 기동성을 이용해 반대 방향으로 돌려 반대편에서 화포를 발사하여 와키자카의 허를 찌르는 전술을 보여주었다. 조선군의 포격 거리만 좁혀준 셈이 된 와키자카는 완전히 정줄을 놓아버린다. 또 한산 대첩의 승전의 원인을 이순신과 휘하 장수들뿐만 아니라 노를 젓는 격군 등 일반 백성들의 공까지 함께 조명하고 있다.
말 그대로 가루가 되도록 박살이 난 와키자카 및 일본군은 가까스로 근처 바닷가에 상륙했고, 와키자카는 전투 말미 이순신이 쏜 화살로 인해 부상 입은 상태에서 부장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다.[21] 그러다가 와키자카는 패배는 사무라이의 수치며 이런 치욕적인 패배는 사무라이로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할복하려고 옆에 있던 부장 마나베에게 카이샤쿠를 부탁하지만 마나베는 여기서 죽으면 정말 이순신에게 지는 거라며, 살아서 지금의 수치를 견디고 뒷날을 도모해 다시 이순신에게 복수하는 것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길이라고 말려서 겨우 자살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나베는 한산도 대첩 방영 회차 말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 불려가서 와키자카가 보는 눈 앞에서 와타나베과 더불어 강제 할복(사실상 참수형)했다. 거기에 도요토미는 자신을 죽여달라는 와키자카의 말을 쿨하게 거부하면서 도요토미의 잔혹함과 비극성이 더욱 극대화됐다.
드라마 외적인 부분으로 보면 당시 불멸의 이순신과 시청률 경쟁을 하던 제5공화국과 정면 대결을 한 셈이기도 하다. 한산도 대첩 분량을 방영할 당시 제5공화국에서도 가장 화제를 모은 12.12 군사반란 분량을 방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2.4. 징비록
KBS DRAMA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올린 영상. |
퇴각하나 싶었더니 양 섬에 숨겨놓은 함대들로 학익진을 펼쳐서 포위했다. 학익진을 펴는 조선 수군을 보면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게 무슨 진형이냐?"면서[22] 황당해한다. 그 뒤에 부장이 "계속 진격하면 저 진형에 포위당할 것 같습니다."라며 퇴각하려 하자 와키자카는 친히 칼을 빼들고 "죽고 싶으냐"란 말과 동시에 "전열을 갖추라"고 지시했고, 이에 이순신은 포격으로 응수한다.
결과는 한 척 한 척 쌈싸먹혀 깔끔하게 지워졌고, 결국 함대가 박살나는 것을 벙찐 채 지켜보다가 부하의 간언으로 후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순신은 곱게 놓아준 전용 샌드백과는 달리 이번에는 추격을 명하여 완전히 섬멸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24화에서 전후가 나왔는데, 히데요시는 빡쳐서 내관을 직접 베어버렸고, 섬에 표류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 부하들과 있는 와키자카의 참상은 그야말로 눈 뜨고 못볼 지경.
덤으로 옥포 해전에 이어서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풀버전으로 나왔다.
5.2.5. 임진왜란 1592
제2화에서 등장한다. 사천 해전 편처럼 근거리 직접 사격으로 묘사한 것 외에는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편. 그런데 전투 묘사에서 문제가 많다. 실제 한산도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피해는 위에 나온 것처럼 매우 미미했다. 그런데 이기남이 탄 귀선이 집중 사격을 당해서 이기남 등이 쓰러지는 등 거북선이 거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질 정도로 큰 피해를 입는다. 또한 첫 포격 당시의 거리는 겨우 50보이고 180도 선회 후 2차 포격을 가하기 직전 일본군이 도선을 시도할 정도로 접근을 허용한다. 조선 수군은 전쟁 초기부터 꾸준히 도선 백병전을 시도했고 김완이 적장의 수급을 취하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쪽 고증이 더 낫다. 당연히 순수 칼질 쏨씨로는 일본군이 조선 수군보다 몇 배는 나으니, 화포사격으로 적을 무력화시켰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긴 하지만.5.3. 영화
5.3.1. 명량
에필로그에서 아주 짤막하게 표현된다. 안개가 낀 견내량에서 거북선이 천천히 접근하고, 일본군이 '저건 대체 뭐지?'라고 의아하게 여긴다. 이후 거북선의 용머리가 나와서 화포를 쏘는 것으로 끝.5.3.2. 한산: 용의 출현
영화 《한산: 용의 출현》 메인 예고편. |
2020년 5월 중순. 주요 배우진이 공개되었다. # 원균[23]과 이억기[24]가 모두 등장하며, 전작에 출연한 준사, 임준영, 나대용,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도 재등장한다.[25] 이외에도 어영담[26], 정보름[27], 마나베[28]가 새 인물로 출연한다. 한산도 대첩을 다루는 작품으로 임난초의 전투와 학익진과 와키자카 야스하루와의 대결을 주로 다루고 있다. 에필로그로 안골포 해전과 부산포 전투도 말엽에 잠시 나온다.
2022년 12월 초, 넷플릭스에 "한산 리덕스"라는 이름으로 감독판(150분짜리)이 공개되었다.
6. 기타
- 명칭은 한산도 대첩으로 굳어졌지만 과거에는 견내량 싸움 또는 거제 싸움으로 불렸다.[29] 한산도를 기점으로 싸운 게 아닌, 견내량에 정박중인 왜군을 꾀어다가 한산 앞바다에서 수몰시킨 전투의 개요를 생각하면 한산도 대첩이라는 말보다는 견내량 해전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은 표현이긴 하다.[30]
-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영지규모 및 동원병력을 근거로 그가 대규모의 함대를 운용했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논란이 존재했다. 다이묘들은 영지규모 1만 석당 병력 250~ 500명 정도 동원이 가능했는데, 와키자카는 석고가 3만 석 규모인 영주로서 일본 사료[31]에 기록된 조선 출병 병력은 약 1500명 정도였다. 이전에 참전했던 오다와라 포위전 등에서도 엇비슷한 병력을 동원하기 때문에, 와키자카가 갑자기 더 큰 병력으로 수군을 이끌고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베시마 가문의 문서에 따르면 와키자카의 부대는 선봉대가 조선에 상륙한 이후로 우키타 히데이에의 진영에 소속한다는 기록이 있고 해전 당시 격파한 적선에서 노역하는 조선인 포로들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 포로들과 와키자카 본인과 우키다 히데이에의 수군 세력,[32] 그리고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은 세토 내해 동부 해적 세력들, 용인 등 내륙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 인부들이 포함된 숫자일 가능성이 있다.[33]
와키자카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같이 출전한 안골포 해전보다도 많은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 근해에 나타났으므로, 상당한 전력을 갖춘 함대가 출전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이전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마주한 일본 수군들 중 규모가 제일 컸다.
- 견내량은 폭이 좁기 때문에 대함대가 한데 뭉쳐서 진군하기 어려우므로 길게 늘어서서 돌진해야 했다. 일본 수군이 완전히 몰살당했음은 조선 수군이 반포위 진형을 갖추었는데도 일본 수군이 그 안에 머리를 들이밀고 나서도 계속 돌진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지상전에서 이런 반포위 진형의 약점이 중앙돌파이고 조선 수군의 취약점이자 일본 수군 최대의 장기가 근접전이기 때문에, 이미 전황이 안 좋고 일부 피해를 보더라도 중앙돌파를 하겠다는 의도였던 듯하다. 게다가 일본의 안택선은 조선의 판옥선과 달리 밑바닥이 좁아 속도는 빠르지만 선회력이 떨어지기에 그런 상황에서 회군하다가 피해만 더 입느니 일점 돌파를 강행한 와키자카의 선택이 그리 틀린 것이라 보기도 어럽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어서 정말 참혹했다.
- 와키자카는 이 전투에서 실로 참담한 패전을 겪었음에도 이를 모두 정직하게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에 전했다. 허세는 기본이요, 무공은 마구 부풀리고 패배는 애써 축소했던[34] 당시의 무사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이었고, 그 덕분에 한산도 대첩 전후 일본 측 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 KBS 역사스페셜의 일본 측에서 바라본 이순신과 일본 측의 이순신 관련 사료들을 탐구하는 에피소드에서 와키자카 가문의 현 당주이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4대손인 와키자카 겐지 씨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와키자카는 이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본국에 돌아와서도 집안 사람들이 한산도 해전이 일어난 날만 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먹지 않고 미역만 먹도록 했다고 하며, 그 전통이 무려 500년이 지난 자신의 대까지 남아 있어서 자신은 한산도 대첩 날을 '집안 사람들이 미역만 먹는 날'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 와키자카의 영지였던 효고현 아와지에는 이 해전에서 전사한 30여 명의 명복을 비는 고려진타사중공양석비(高麗陣打死衆供養石碑)가 세워져 넋을 달랜다.
- 칼의 노래 1권 권말에 수록된 연보에는 "마나베가 패잔병 500여 명을 이끌고 무인도에 상륙했다가 나갈 곳이 없어서 할복 자살했고, 병사들은 다 굶어 죽은 듯하다."라고 했다. 소설 본문에 이와 같은 서술이 있었다면 각색으로 볼 수 있지만,[35]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해야 할 연보에 이와 같은 서술이 있으므로 오류이다.
- 의외로 한산도 대첩은 한국사 3대 대첩 중 가장 규모가 작은데, 이것은 그냥 일본군이 거란군이나 수나라군보다 적었기 때문이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만 명이 아니라 10만 명이었든 20만 명이었든 낚여서 포위망 안으로 걸어들어간 이상 궤멸은 확정된 전투였다. 그리고 을지문덕이나 강감찬은 대군을 단 한 번의 전투로 박살냈지만, 이순신은 수십 번의 전투를 전승하는 방식으로 일본군을 몰락시켰기 때문에[36]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이 벌인 무수한 전투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결전 한 번으로 다 무너뜨린 강감찬이나 을지문덕과 비교해서는 곤란하다.[37] 애초에 을지문덕과 강감찬은 한 나라의 총사령관(조선으로 치면 도원수) 역할을 역임했지만, 이순신은 야전사령관에 불과했다. 따라서 을지문덕과 강감찬은 전쟁 전체를 지휘해서 각자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으로 이어지는 판도를 짤 수 있었지만, 이순신은 그럴 권한이 없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 , 행주 대첩, 진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흔히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강감찬의 귀주 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이라 불린다.[38] 한국사 3대 대첩 중 유일한 해전이자, 유일하게 남한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 전라 좌수영이 있던 전라남도 여수시에는 종고산(鐘鼓山)이라는 해발 199미터짜리 나지막한 산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이기던 날, 이 산에서 종(鐘)소리 같기도 하고 북(鼓)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나서 사흘간 이어졌기 때문에 이순신이 산 이름을 '종고산'이라고 붙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이 전투의 전사자 3명 중 1명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웅천 현감 허일의 아들인 허곤이다.
- KBS 시사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원균 후손을 초빙하여 원균을 재평가하겠다고 권율을 모욕하는 짓을 보여주었고 마치 원균이 뛰어난 인물인양 띄워주며 한산도 대첩의 승리는 이순신 공도 있지만 사실 원균이 없었으면 이기지 못했을 거라는 답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세한 건 역사저널 그날/비판 역사왜곡 참고.
한산도 대첩에서 와키자카를 비롯한 왜군들을 놓쳐, 원균이 이순신이 파직된 뒤에 사령부를 기생집으로 개조시킨것과 원균을 선무 공신으로 세운 건 신하들이 다 반대해도 이순신 견제책으로 선조가 억지로 올렸다는 건은 죽어도 말은 안 한다.[39]
[1] 당시 이순신은 아직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전략은 모두 이순신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사실상 최고지휘관이었다.[2] 할복[3] 부산 제외. 제해권 확보는 정확하게 안골포 해전 승리 이후지만 한산도 대첩이 크게 평가받는 이유는 이때 교전한 와키자카 야스하루 휘하 병력이 일본군 주력인 까닭이다. 안골포 해전은 한산도 대첩 직후 벌어진 해전으로 이순신의 3차 출동 중 두번째 해전이다. 3차 출동의 승첩을 알리는 이순신의 견내량 파왜병장에는 한산대첩과 같이 안골포 해전 승리 역시 함께 기록됐다.[4] 이것이 원균이 이순신에게 열등의식을 품은 근본적인 이유이다. 당시 조선 수군은 일본을 주적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경상우수영의 함대가 가장 규모가 컸다. 따라서 같은 수사라고 하더라도 발언권이나 대우가 또한 다른 수영의 수사들보다 높았는데, 원균은 그 많은 함대를 한 번에 말아먹고 튀어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최고대우를 받는 사령관이라고 하더라도 휘하에 함대가 없으니 아무 의미가 없는 직위가 되어버렸고, 패전 장수라는 불명예까지 안았기에 이순신의 휘하에서 종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열등감이 폭발하고 본인의 기존 성품까지 겹쳐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만 이순신도 난중일기에 함선 몇백 척이 느닷없이 부산으로 들이닥쳐서 시작된 전쟁이니만큼, 그 상황에서 함선을 자침시켰다는 건 지휘관이 누구였어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고 기록한 바가 있다. 다만 그 이후의 행보가 더 큰 문제였다는 것.[5] 물론 명량 해전이 일어난 울돌목처럼 극심한 조류는 아니지만 조선 수군에게 불리했다.[6] 거제도의 일본 측 명칭. 명칭 그대로 가라섬이란 뜻이며, 고대 가라(가야)시절부터 부르던 이름으로 가야와 일본을 배로 왕래하던 곳이다.[7] 화약이 담긴 폭발탄. 이름은 '히야', 즉 불화살이지만 화살보다는 주로 구체 형태의 포탄인 '호로쿠다마' 형태로 발사했다. 비격진천뢰, 진천뢰, 질려포통, 신기전 등 각종 조선측 화약무기를 뭉뚱그려 이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8] 교차사격, 일명 십자포화라고도 불리는 이 전술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공식적으로 명명되었다. 그보다 수백 년 전에 이 전술을 시전했으니 왜군에게는 충격과 공포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9]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이 때 조선 측에서는 수병 '10명'이 부상, 3명이 전사했다.[10] 1정은 109 m, 즉 50정은 5.45 km이다.[11] 이것이 안골포 해전으로, 와키자카기에도 정확히 언급되었다.[12] 한산도. 이순신은 견내량파왜병장에서 왜군 400여명이 배를 버리고 한산도에 상륙하였고, 안골포 해전 이후 7월 12일 한산도로 돌아와보니 왜군들이 연일 굶어서 잘 걷지도 못한 채 해안가에서 졸고 있었고,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져 갈 길이 없다고 적었다.#[13]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관명.[14] 지금도 와키자카의 후손들은 한산도 대첩이 일어난 날이면 하루종일 미역만 먹는다고 한다.[15] 현주소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16] 비단 보급뿐만이 아니라 강을 끼고있는 성은 대표적으로 진주성이 있는데 만일 제해권을 이순신이 거머쥐고 있지 않았다면 수륙 협공으로 진주대첩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고 행주 대첩 또한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17] 이 해상 의병들은 나중에 명량해전 때도 이순신과 함께 하였는데, 이순신이 육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하는 데도 따르지 않고 판옥선 뒤에 배를 대어 배가 많아보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18] 쉽게 말해 '지원군이 도착하면 의주까지 점령할 텐데, 이제 선조 니가 갈 데가 어디 있겠냐.'고 비아냥댄 것이다.[19] 한산도 대첩을 말한다. 당시 한산도는 거제현 소속의 섬이었다.[20] 여담이지만 같은 시간대에 방영되던 MBC의 제5공화국도 12.12 사태의 절정이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이 탱크를 끌고 서울로 입성하는 에피소드였는데, 두 작품 모두 프라임 타임에서 시청률 경쟁을 하던 때라 스포츠 신문에선 한산도 대첩 VS 광화문 탱크라는 헤드라인을 뽑기도 했었다.[21] 간신히 살아 섬에 도착했다는 묘사를 하기 위해 와키자카는 투구와 갑옷 장식이 사라지고, 몸과 얼굴 군데군데에 상처가 있다.[22] 정황상 정말로 이 진형을 모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여기서 갑자기 학익진이라고??" 수준의 뉘앙스로 보는 편이 낫다.[23] 배우는 손현주[24] 배우는 공명(배우). 전작에선 서성광이 연기했다. 이순신이 보는 환영의 모습으로 잠시 등장.[25] 다만 배우들은 모두 교체되었다. 준사는 원래 안골포 해전에서 투항하나 작중에서는 사천 해전 때 포로로 잡힌 후 투항한 걸로 변경됐다. 한산도 대첩 당시에는 붙잡은 왜장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서 그냥 베어버렸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통역이 가능한 항왜를 대동하지 않았었다.[26] 배우는 안성기.[27] 배우는 김향기. 전작에서 이정현이 연기한 '정씨'와 동일인물.[28] 배우는 조재윤. 한산도 대첩에 출전했다가 할복한 마나베 사마노조.[29] 한산도 대첩의 승리를 보고하는 이순신의 장계가 견내량파왜병장이다. 그리고 난중일기에서는 거제 싸움으로 많이 나온다.[30] 일부 책에서는 견내량 해전과 안골포 해전을 합쳐 한산도 대첩으로 말하기도 한다. 안골포 해전이 견내량 해전 직후 곧바로 일어났기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개는 분리해서 보는 시각이 많다.[31] 대표적으로 1924년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임진왜란기 일본 서신이 수록된 일본전사 조선역(日本戰史 朝鮮役)이 자주 인용된다.[32] 우키다는 57만 석 규모인 다이묘였으므로 위 계산법대로라면 최소 1만 5천 명에서 최대 3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우키다가 하데요시에게 직접 조선군 토벌을 명받은 부하에게 병력을 지원해준다는 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다. 오히려 저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를 그리 많지도 않은 와키자카 개인병력에게만 맡긴다는 게 상당히 무리이다.[33] 임진왜란 시절, 일본 수군에 소속된 배를 조종하는 선원(가령 배 아래 선실에서 노를 젓는 격꾼들)이나 기타 필요한 인부들은 모두 일본에서 따로 징발해서 조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한산도 대첩에서 죽은 일본군 중에서는 전투원뿐만 아니라 일본인 선원이나 일본인 인부들도 포함되었다고 봐야 적절하다. 그런데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계급차별이 매우 심해서, 전투원이 아닌 비전투원들은 군인의 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렇게 비전투원을 멸시하는 성향은 일본에서 매우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2차 세계대전 때에도 일본에서는 "보급병이 군인이면 잠자리도 새다."라는 말이 나돌아다닐 정도였다.[34] 다양한 주인을 섬기기를 미덕으로 여긴 센고쿠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무사들이 자기 이력서라고 할 수 있는 전공기록을 과장하기란 이미 문화나 다름없었다. 모범적인 무사라고 알려진 가토도 공을 부풀리거나 거짓 보고를 하다가 걸리기도 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미움을 받은 것도 이런 문화와 관련이 있는데, 이시다는 이런 과장되고 부풀려진 공적을 잡아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했기 때문.[35] 실제 조선 수군이 해전을 한산도에서 벌인 것엔 이런 계산 또한 있었다. 근처에 무인도뿐이라 패잔병이 표류하더라도 식량을 구하기도, 탈출하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당시의 조선군 시점에선 첩보가 정확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있다.[36] 그러니까, 정말 가능성은 낮지만 김천일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면 김천일이 을지문덕이나 강감찬과 유사하게 보였을 것이다.[37] 사실 살수대첩이나 귀주대첩은 한번이 결전을 통해 적을 완전히 전멸시킨 전투로 유명하지만 한산도 대첩은 오히려 어느 쪽이냐 하면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적에게 피해를 누적시키는 것으로 그 피해 자체보다는 전략적인 의미가 더 강조되는 편이다.[38] 여기에 권율의 행주 대첩이 포함되어 4대 대첩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살수, 귀주, 한산도 대첩이 각각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전투들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행주 대첩은 조선 시대의 대표 전투인 한산도 대첩에 밀려 주로 3대 대첩으로 많이 언급된다.[39] 여담이지만 여수시의 이순신 광장에 이순신을 도운 사람들 중에 원균 비석도 있다. 당연히 원균의 악명을 아는 여수시민들은 이 비석의 철거를 요구하였으나 대학의 이순신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한산도 대첩을 가지고 이순신을 도왔다고 변호했다. 결국 유야무야 되어 현재도 여수시 광장에 이순신을 도운 사람 원균 비석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