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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7 00:58:13

경상우수영


파일:조선군 좌독기_White.svg 조선 수군 수영
삼도수군통제영 휘하 수영 삼도수군통어영 휘하 수영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충청수영 경기수영 황해수영
경상우도수군절도사영
삼도수군통제영

慶尙右道水軍節度使營兼三道水軍統制營
파일:경상우도수영수역.jpg
경상우도수군절도사영의 관할 수역.
<colcolor=#fff> 위치 <colbgcolor=#fff,#191919>경상도
지휘 수군절도사수군통제사

1. 개요2. 상세3. 수영 소재지4. 관할지역 및 예하 관포
4.1. 관할지역4.2. 예하 관포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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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우도수군절도사영(慶尙右道水軍節度使營), 줄여서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은 조선 시대 경상도의 서쪽에 존재하던 수군절도사영이다. 경상우수영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통영)을 겸임했다. 지휘관은 정3품 당상관인 수군절도사이다. 조선의 경상우도[1] 해안을 방어하는 경상우수군의 본영으로 현재의 창원, 거제, 통영이 차례로 수영소재지였으며, 오늘날 통영시의 이름은 이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상세

경상우도 지역은 고대부터 서해와 일본으로 가는 중요한 항로였다. 변한가야 시절 김해에서 생산된 철은 낙랑대방으로 갈 땐 거제도와 통영 사이 해협인 견내량을 지나 서진하고 일본으로 갈 땐 거제 동부 연안이나 견내량을 지나 거제 서부 연안을 따라 남하하다 거제도 남단에서 해류를 타고 대마도로 건너갔다.[2] 고려 ‧ 조선 때도 이곳은 낙동강-견내량을 통과해 개성 ‧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이 통과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고 이를 노리는 일본의 왜구 및 정규군의 침입 루트 역시 주로 거제도 남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의 시작을 알린 1350년 충정왕 2월의 침입 역시 마찬가지였다.[3]

또한 원나라의 일본원정 때 고려 수군이 출정했던 지역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격퇴한 고려 수군의 주둔지이자 대마도 정벌의 출정지로 조선이 건국되고 태종이 수군을 재편성하며 경상우수군이 창설되었다.

이런 이유로 경상우수군은 가장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법제상으로 경상 우수영은 약 75척 ~ 100여 척의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의 함선을 합친 수(약 50척 ~ 60여척)보다 더 많다.

또 고려 통신사나 전기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는 해안을 따라 최대한 남서쪽인 거제 지세포나 다대포에서[4] 출발해 대마도 북단에 도착하는 연안항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사절단이 경상우수영 예하 진영에서 머물렀다.

임진왜란 때는 하필이면 원균이 경상우수사였다. 원균은 그 많은 전력을 보유하고도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태반을 와해시켰다가 옥포 해전에서 4척 한산도 대첩에서 10여 척이 참전한다.[5] 이후 칠천량 해전 전까지 계속 증강했으나 초기의 전력만큼 복구시키지는 못한다. 칠천량 패전 이후로 경상우수영이었던 오아포와 삼도수군통제영이었던 한산도 두억포는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임진왜란의 휴전 협정 기간 동안 권준이 임명됐다가, 원균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 사직하였다. 이후 배설이 임명되었다가 명량 해전 직전 도주하자, 해전 이후 무의공 이순신이 후임 경상우수사가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경상 우수사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여 오늘날의 해군본부 격인 삼도수군통제영(통영)의 역할도 겸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해산되었다.

3. 수영 소재지

1415년 웅천현 제포[6] 창설 → 회원현 합포[7]거제현 산련포[8] → 1418년 거제현 탑포[9] → 1465년 거제현 오아포[10] → 1593년 거제현 한산도 두억포(통제영과 통합)[11] → 1599년 거제현 오아포 → 1604년 거제현 두룡포[12] → 1894년 9월 폐지

4. 관할지역 및 예하 관포

4.1. 관할지역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구역 지역부터 낙동강 지역까지를 관할 지역으로 하고 있다. 조선 개국 초기 일원화 된 수군 지휘체계를 가지고 있던 경상도 지역은 1413년 낙동강을 경계로 낙동강 서측(경상우도)에 수군도절제사를 두면서 경상우수영이 신설되었다.

조선 초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경상우수영의 편제는 거제 오아포에 경상우수영이 있었으며, 총 8개의 진(가배량, 제포, 영등포, 견내량, 번계, 구량량, 적량, 노량)이 위치해 있었다.

이후 세조 시대 진관체제의 정착으로 개편이 이뤄지는데, 개편된 편제는 1개의 첨사진(제포), 9개의 만호진(옥포, 평산포, 지세포, 영등포, 사량, 당포, 조라포, 적량, 안골포)으로 이뤄졌다.

중종시기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으로 인해 2차 편제개편이 이뤄지며, 2차 개편을 통해 기존 제포의 첨사진이 만호진으로 격하되고, 서측에 미조항, 동측에 가덕에 2개의 첨사진과 12개의 만호진(평산포, 제포, 영등포, 사량, 당포, 적량, 천성포, 가배량, 옥포, 지세포, 조라포, 안골포)으로 편성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수군이 편성된 고을이 포함된 8관(하동, 곤양, 남해, 사천, 고성, 진해, 거제, 웅천), 16포(가덕진, 천성포, 제포, 안골포, 영등포, 율포, 옥포, 조라포, 지세포, 가배량, 당포, 사량, 소비포, 적량, 미조항, 평산포)로 구성되었다.

왜란 이후 경상우수영이 삼도수군통제영과 겸영되면서 첨사진이 2개에서 4개(미조항, 가덕진, 적량, 귀산)로 증가하였고, 11개의 만호진(평산포, 제포, 영등포, 사량, 당포, 천성보, 가배량, 옥포, 지세포, 조라포, 안골포), 5개의 별장, 2개의 권관이 설치되면서 폐영될 때까지 이 체제가 유지되었다.

4.2. 예하 관포

<신증동국여지승람 기준>
-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시기의 진포 위치로 임진왜란 시기와 동일하지 않다

<임진왜란 전후>

5. 관련 문서


[1] 서부 경상도[2] 부산에서 쓰시마로 직항하는 항로는 17세기부터 활성화 된다. 이는 대한해협의 강한 해류와 편서풍으로 인해 대마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동해로 떠내려가 버리는 위험이 커서 대마도와 가까우면서도 최대한 남쪽인 거제 남단에서 출발하는게 안전했기 때문이다. 또 해류를 타고 가기 때문에 항해 속도도 빨랐다.[3] 예외적으로 임진왜란의 경우는 일본군의 전략적 목표가 한양을 점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북상하기 좋은 부산에 상륙한 것이다.[4] 현재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5] 다만 이는 왜군에게 전선이 넘어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도 있었다.[6] 현 지명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7] 현 지명 창원시 마산합포구[8] 현 지명 거제시 거제면 법동리 산달도[9] 현 지명 거제시 동부면 탑포리[10] 현 지명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 탑포와 오아포 두 포구는 직선상으로 3km 떨어져있다. 그런데 145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이미 오아포가 경상우수영으로 나온다.[11] 현 지명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12] 현 지명 통영시 문화동, 1618년 고성현 두룡포로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