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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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요시아키 |
가토 가문의 늘어뜨린 등나무(下り藤) 가몬 |
加藤嘉明 (かとうよしあきら/かとうよしあき)
(1563년 ~ 1631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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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침묵의 용장(沈勇の士).[1]일본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통칭은 마고로쿠(孫六).
2. 생애
원래 미카와 출신으로, 아버지 가토 노리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다가 장남 요시아키가 태어나던 해 일향종 신도들의 잇키에 가담했다가 실패했으며, 그대로 각처를 전전하게 된다.그러던 와중에 가토 카게야스의 추천으로 하시바 히데요시의 시동이 되면서, 히데요시 휘하로서 각지의 전투에 참가한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이기도 하며, 규슈의 시마즈 정벌이나 오다와라의 호조 정벌 등에 수군으로 참전했다.
임진왜란 당시도 불행히도 수군에 속해 싸우는 족족 박살났다. 이순신과 처음 만난 것이 안골포 해전에서이다. 정유재란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괴멸시키기는 했지만, 상대는 이순신이 아닌 원균이었다. 다만 이 전투에서 왼팔에 화살이 박히기는 했다. 그 밖에도 울산 왜성에 틀어박혀 쫄쫄 굶고있던 가토 기요마사 구출에 나서는 등의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 사망 후에는 무단파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지지파가 되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실각의 계기가 된 미츠나리 습격에도 참여했었다. 당연히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으로 참전하여 미츠나리 군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이요의 영지에도 무라카미 모토요시 등이 이끄는 모리군이 이요의 다이묘였던 고노 가문 잔당들과 연계해 공격했으나, 츠쿠다 카즈나리의 활약으로 막아냈다.
이요 마츠야마 번주로, 요시아키가 축성한 이요 마츠야마 성은 센고쿠 시대 최후의 명성(名城)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옆 영지의 도도 다카토라와는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도도 다카토라도 임진왜란에서 똑같은 인물에게 싸우는 족족 박살났다. 거기다 다카토라는 축성에 능한 것으로 유명한데 요시아키도 마츠야마 성에서 보이는 것처럼 축성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후에 아이즈 번의 가모 가문의 적통이 끊기면서 아이즈 번으로 전봉되는데,[2] 다테 마사무네를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당시 요시아키가 장시간에 걸쳐 개수한 마츠야마 성이 완성되기 직전이었고, 요시아키 또한 '저는 늙어서 이제 힘이 없다'는 이유로 고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대로 전봉 확정되었다. 요시아키의 아이즈 전봉을 막부에 추천한 이가 바로, 이웃집 웬수 도도 타카토라였다. 최초에는 다카토라 자신이 아이즈로 가기를 원했으나, 후에 요시아키를 추천했다. 이를 악의로 보아야할지 호의로 보아야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단 자신이 먼저 가려한 점이나, 공히 이요 20만 석에서 아이즈 40만 석으로 영지가 두 배 뻥튀기되는 상황을 보면, 요시아키의 이익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아예 순수한 호의로 보기도 애매한 것이, 요시아키가 기껏 공들여 놓은 마츠야마 성 완성 직전에 보내버린 걸 감안하면 내가 못 갈 바에야, 옆집 웬수 녀석이라도 안 보게 보내버리자는 심리는 아니었던지 대인군자인지, 아니면 그와 상반되는 소인배인지 진실은 저 너머에.
요시아키는 유언마저도 '아이즈를 내놓고, 옛 영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는듯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막장 아들 아키나리 대에서 가이에키[3] 당하면서 다른 의미로 소원이 이루어지기는 했다. 그래도 오미 미즈구치(近江水口) 2만 석으로 겨우겨우 다이묘의 위치를 지켰다.소위 호걸형의 인물을 싫어했는데, 이는 평소 요시아키의 발언으로도 알 수 있다.
'진짜 용사라 함은, 책임감이 강하되 성실하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허나 호걸이라는 부류는 이기고 있는 싸움에는 나서기를 좋아하면서도, 위기에는 쉬이 동료를 저버린다.'
이로 인해 가신인 반 나오유키[4]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가 군을 마음대로 출격시키자 대판 싸우고, 나오유키가 가토 가를 나온 이후에도 취직 방해까지 했다.
임진왜란 때 호랑이가 눈 앞에 나타나도 꼼짝도 하지 않아 모두 그 용기에 놀랐는데 알고보니 자고 있는 것이었다는 일화나, 손등에 담배불이 떨어져 타들어가는데도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는 일화 등이 전해진다.
3. 기타
소위 '나가하마 조'라 불리는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長浜城)주였을 시절 발탁한 시동 중에서는 거의 공기로 취급된다. 특히 성이 같은 가토 기요마사와 많이 헷갈리며 심지어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가토 기요마사와 이름이 바뀐 적이 있다. #현재 가토 요시아키는 직계후손이 남아있지 않다. 성이 같은 가토 기요마사가 본인 사후에 가문이 몰락한 것과 별개로 일단 직계후손 자체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2ch에서는 '수수한 가토 씨' 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특이한 투구로 유명한 전국시대 사무라이 중에서도 유독 독특한 투구를 자랑했는데, 고향의 특산물인 오징어(...)를 그대로 본 딴 투구를 애용했다.
4. 대중매체에서
-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그냥저냥 평범한 무장. 세키가하라 전투 즈음에야 이요 지역의 다이묘로 등장한다. 매우 작은 세력이지만 반 나오유키와 정치력이 높은 아다치 시게노부가 휘하로 나와 전투-내정 양쪽을 그나마 다 챙길 수는 있다.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게임 <태합입지전 5>에서는 특이하게 수군이 3레벨인데 어차피 일반 무사는 수군 기능이 높아봤자 잉여일 뿐이라 미묘하다. 내정 쪽은 건축이 2레벨인걸 제외하면 볼 게 없고 전투 쪽으로도 통솔이 68에 족경 / 기마 / 철포가 다 2레벨이라 역시 미묘.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나오기는 하는데 다른 세 사람(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토라, 구키 요시타카)에 비해 비중이 공기다. 대사 하나 없고 얼굴만 간간이 비추거나 내레이션으로 언급되는 걸로 끝. 하지만 74화에서 나뒹구는 장면도 나왔었다.
- 2014년 개봉한 영화 <명량>에서는 배우 김강일이 연기했다. 도도 다카토라의 부장으로 출연하는데 도도의 곁에서 몇 마디 거드는 존재이며 영화 초반부와 해전 종반부에 간헐적으로 모습을 보이나 딱히 무언가 하는 일은 없다.
- 김경진의 소설 <격류>에서는 명량 해전에 참전하는 일본 무장으로 등장.[5] 조선 수군 세력이 13척이라는 정보에 다들 승리를 장담하거나 혹은 그래도 이순신이니 조심하자 정도의 주장이 나오는 반면 혼자 야습할 것을 주장하는 신중파 중의 신중파로 나온다. 전투가 시작되자 후방에 위치한 상태에서 휘하 병력들을 편하게 쉬도록 하자 가신들은 다른 영주들 눈치보인다고 불만을 나타내지만 다른 영주들이 줄줄이 털려나가고 총대장인 도도 다카토라까지 부상입는 패전에 직면하자 그제서야 이럴걸 대비해 휴식을 취한 가토의 혜안에 감탄한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별다른 수가 있는건 아니었고 그나마 접근전을 하지 않고 총과 활로 사격만 퍼부어 조선 수군의 접근을 막았다. 물론 조선군의 화포 세례에 왕창 터져나갔지만 참패 당한 다른 영주들에 비해 그런대로 건제 단위는 유지하며 철수 호위를 그럭저럭해냈다.
- 한산: 용의 출현에도 등장한다. 배우는 김성균.[6] 특유의 오징어 모양 투구까지 재현되었다.[7] 작중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의뢰를 받은 쿠로다 칸베에의 도움을 받아 거북선의 대항마 역할을 할 철갑선을 구키 요시타카와 같이 가지고 온다. 그러나 와키자카와 출진 전까지 출정시간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다가 출전 직전, 와키자카파의 급습으로 인해 부하들을 다수 잃고 병선을 모두 빼앗긴 뒤 구키와 함께 철수한다.[8] 해당 영화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는 한산 리덕스에서는 비중이 약간 늘어나 있다. 초반부에 가토는 와키자카와 전라도를 나누기 싫어 출정을 꺼리고 대마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를 언급하는 칸베에의 설득에 따라 와키자카에게 합류했다가 배신당해 끌고 온 배를 모조리 뺏긴다. 구키는 대마도로 돌아가자 하나 가토는 전세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안골포 인근에 남기를 주장하고 구키도 이에 따른다. 이후 안골포 해전 한복판에 휘말려(...) 한산대첩에서 와키자카가 대패한 걸 실감한 가토는 웃는지 우는지 모르는 소리를 낸다.[9] 이에 구키가 차라리 잘됐다며, 패전의 책임은 와키자카에게 전부 돌리면 된다고 하자 가토는 갑자기 칼을 빼내 그에게 겨누며 나한테 죽기 싫으면 그 입을 닥치라고 말하는 걸 끝으로 퇴장한다.[10]
[1] 냉정 침착하고 견실한 성격으로 붙여진 별명.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의 승리가 확정되고 달아나는 서군 군사를 앞다투어 뒤쫓는 상황에서, 오직 요시아키의 군사만이 진형을 갖추어서 진격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이에야스마저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2] 가모령 60만 석을 전부 이어받지는 못하고 약 20만 석이 세 번으로 분할 독립해 40만 석을 받았다.[3] 改易: 영토나 성 등을 몰수당함.[4] '반단에몬'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무장. 후에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맹렬히 싸우다가 전사했다.[5] 후에 소설 <격류>를 바탕으로 한 소설 <임진왜란>에서도 등장한다.[6] 위의 명량때 역을 맡았던 김강일 배우는 구키 요시타카 역으로 출연하였다.[7] 여담으로 첫 등장시 흘러나오는 음악은 전작의 구루지마 테마음악이다.[8] 연회를 벌이고 있는 한밤중에 느닷없이 '오늘 자정' 출진이라고 못 박아버렸다. 즉, 와키자카는 애초에 가토와 함께 할 생각도 없이 본인 군대만 미리 전투 준비를 시킨 것.[9] 으!하!하!하!하!학! 으이하!하!학!학!핡!핰!핚! 까!깍!학학!학!핡!핡!핡![10] 와키자카가 난감해진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자랑이었던 철갑선을 비롯해 함대가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전부 격침당했으니 충격과 공포가 상당했던 듯하다. 게다가 사실 그 장면이 그 이순신 함대에 안골포 진지가 성대하게 포격당하는 상황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