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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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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63> 후지산
[ruby(富, ruby=ふ)][ruby(士, ruby=じ)][ruby(山, ruby=さん)] | Mount Fuji
후지-하코네-이즈 국립공원의 일부
파일:카와구치호의 왕벚나무와 후지산.jpg
야마나시현 근방의 후지 5호에서 촬영한 후지산.
후지산의 가장 유명한 촬영 구도이다.
지도
위치
[[일본|]][[틀:국기|]][[틀:국기|]] 혼슈 주부 지방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스소노시・후지시・고텐바시・오야마초
야마나시현
나루사와무라 ・ 후지요시다시
높이 3,776m
분류 활화산
형태 성층 화산 (독립 산체)
지질학적 형성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
~ 약 1만년 전
쾨펜의 기후 구분 툰드라 기후 (ET, 정상 부근)
냉대 습윤 기후 (Dfa, Dfb, Dfc)
외국어 표기
한국어 후지산
부사산[1]
영어 Mt. Fuji (Fuji-san)
중국어 富士山 (Fùshìshān)

1. 개요2. 어원3. 지질4. 인문 역사5. 상징6. 관광7. 경치8. 대분화 가능성
8.1. 후지산 화산방재 대책협의회
9. 여담

[clearfix]

1. 개요

후지산(富士山)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2], 해발고도 3,776m의 성층 화산이자 활화산이다. 일본의 상징이자 일본인영산으로도 꼽힌다.

2. 어원

'후지(, 부사)'라는 이름의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다. 첫 번째는 타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 또는 카구야히메 이야기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카구야 공주가 달로 떠난 뒤에 카구야 공주에게 받은 불사약을 지금의 후지산에서 태워 없애게 하여 '후시산(不死山, 불사산)'으로 불리는 것도 있고, 2번째로는 같은 이야기로부터 후지산에서 태워 없앴다고 하여 'ふしの山(불의 산)'로 불리는 것도 있다.[3] 세번째로는 무지개의 발음인 '후시(フシ)'로부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 일본인에게서 후지산은 한국인들에게 백두산급으로 성지 취급 받으므로 '후지사마(후지님)'로도 불린다.

한국에서 후지산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서 '부사산'(부유한 선비의 산)이라고도 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후지산 산'이라고 써야 한다는 착각도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은 한자어 지명에서 '산', '강' 등의 의미를 지닌 원어를 제외한 부분이 한 글자인 경우에만 우리말의 '산, 강' 등에 해당하는 말을 덧붙이도록 한다.[4] 富士는 두 글자라 덧붙여 읽지 않으므로 후지산 산이 아니라 후지산이 외래어 표기법으로도 옳다.

3. 지질

후지산은 4층 구조다.

1천만 년 전까지 후지산이 있던 자리는 해저였다. 현재 혼슈야마나시현 북부(고후시 부근)가 당시에는 해안이었다. 필리핀해판이 점점 북상하자, 먼저 현 후지산의 북쪽과 동쪽에 있는 미사카 산지와 단사와 산지가 혼슈에 충돌하며 융기하였다. 이후 100만 년 전까지 화산 군도들이 줄줄이 혼슈에 충돌해 현 후지산의 모체가 되는 선(先) 고미타케 화산과 하코네 화산[5], 아시타카 화산이 만들어졌다. 당시 이즈 반도는 혼슈와 부딪히기 직전인 섬이었다.

수십만 년 전 이즈 반도가 혼슈와 충돌했다. 그 결과 후지산은 압력을 받아 거대한 폭발을 반복해 선 고미타케 화산은 5만 년 전에 고(古) 후지 화산이 새롭게 고미타케 화산 측면에서 분화해 고미타케 화산마저 덮어버렸다. 이 무렵 하코네 화산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칼데라를 생성하였고(아사노 호수), 아시타카산은 분화를 종료하였다. 하코네산도 분화를 멈춘 수천 년 전에는 신 후지 화산이 새로이 분화하여 현 후지산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2900년 전에는 고텐바 암설(지반붕괴) 사태로 고 후지 화산의 산체가 현 고텐바시까지 무너져 내렸다. 이후 3000~2000년 전까지 정상부에서 10차례 정도 분화한 이후로는 측면으로만 분화했다. 헤이안 시대에 조간 대분화(864년)를 비롯하여 여러 번 분화했지만 에도 시대의 호에이 대분화(1707년)를 끝으로 현재까지는 분화가 없다.

사진으로 보면 좀 작아보이지만 높이가 3,776m라 동네 뒷산 따위의 평범한 산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봉이고, 아시아-환태평양 화산대에서 보면 한라산(1,947m), 백두산(2,750m)보다 훨씬 높고, 뉴질랜드 아오랑기 쿡 산(3,754m)보다는 조금 더 높으며 타이완위산(옥산, 3,952m)보다는 낮다. 참고로 백두산에 천지 칼데라가 생기기 전 높이가 현재의 후지산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후지산의 아래에서 일본 사가미 해곡 대지진이 발생한 원인인 사가미 해곡과 난카이 지진의 원인인 난카이 해곡, 그리고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의 경계인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 이렇게 세 판경계가 서로 만난다. 즉, 지질학적으로 후지산 일대는 일본 해구와 마주하는 도호쿠 동부 지방과 더불어 일본 최악의 지진 위험 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인문 역사

전통적으로 신토에서 영봉(霊峰), 즉 신이 깃든다고 전해지는 신성한 산으로 대접받았으나 고대에 그 격은 지금보다는 낮았던 듯하다. 721년에 완성된 히타치국풍토기(常陸国風土記)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옛날 조상신께서 신들이 많은 곳을 다니시다가 스루가의 후지산에 도착하셨다. 해가 저물자 하룻밤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후지산신은 "추수제(新嘗祭)를 지내느라 금기를 지키는 중입니다. 오늘만은 양해해주십시오. 머물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상신은 원망하며 욕하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너의 조상인데 어찌 머물지 못하게 하느냐. 네가 사는 산은 살아있는 한 겨울에도 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서리가 끼며 추위가 덮쳐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지 않아 음식을 바치지도 않으리라."

이번에는 쓰쿠바산(筑波山)에 가셔서 부탁하시자, 쓰쿠바산신은 "오늘밤에 추수제를 하는 중입니다만, 조상님을 기분 상하게 해드릴 수는 없군요." 하면서 대접하여 모셨다. 그러자 조상신은 기뻐하며 축복의 노래를 부르셨다.

"사랑스럽구나, 후손아. 높게 섰는가, 신령의 궁전이여. 하늘과 땅, 해와 달이 무궁하듯이 사람들이 이 신성한 산에 올라 축하하리라. 음식은 풍부하고 우리 일족은 언제까지나 번성하여 즐거움이 무궁하리라."

이런 이유로 후지산은 눈이 와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나 쓰쿠바산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노래하고 춤추며 먹고 마시는 것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쓰쿠바산은 오늘날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있는 해발 877m짜리 산이다. 히타치국풍토기에서는 후지산의 위엄이나 위용으로 묘사하는 '높은 산 정상에 눈이 쌓인 모습'을 오히려 사람들이 오르기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저주로 보고 후지산보다 한참 높이가 낮은 쓰쿠바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것은 8세기 히타치 지방의 인식을 반영한 기록이겠지만 고대에는 후지산 신앙이 일본의 다른 모든 성산 신앙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한 가지 증거라고 하겠다.

센겐 신사에서 모시는 센겐 대신[6]이 후지산의 신령이다. 센겐 신사[7]는 이런 이유로 후지산을 모시는 후지신앙의 중심지로 취급된다. 후지 신앙은 무려 무려 조몬 시대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본 전역에 폭 넓게 퍼진 때는 화산활동이 활발해진 나라 시대 말인 듯하다. 적어도 헤이안 시대부터는 전국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신앙이었다. 후지산이 활화산이라 화산활동을 계속하자 산이 진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후지 신앙이 생기고 전파되었을 것이다.

에도 시대에 들어 에도(도쿄)가 막부의 수도가 되면서 간사이간토를 잇는 가도인 도카이도가 활발해졌고, 도로 중간에 보이는 후지산 역시 각종 예술 작품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수험도에서 유래한 종교단체 후지강(富士講)이 후지산 숭배인식을 퍼트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후지산은 신성한 산으로 숭배받기는 했지만 후지강이 이를 더욱 강화하고 대중화했다. 후지강은 후지산을 여신으로 간주했다. 과거 일본에서는 '후지산에 여자가 오르면 재앙이 닥친다.'고 오르지 못하게 했는데, 후지강은 '여신이 계신 산에 왜 여자가 못 오르냐?'면서 지속적으로 금기에 도전하여, 이는 점차 금기가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8]

4.1. 세계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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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 기념물
法隆寺地域の仏教建造物
1993년

히메지 성
姫路城
1994년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
古都京都の文化財(京都市、宇治市、大津市)
1995년

시라카와고고카야마 역사 마을
白川郷・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1996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원폭 돔)

原爆ドーム
1996년

이쓰쿠시마 신사
厳島神社
1998년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古都奈良の文化財
1999년

닛코의 신사와 사찰
日光の社寺
2000년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
2011년

히라이즈미
: 불교 정토 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정원, 고고 유적군

平泉 - 仏国土(浄土)を表す
建築 ・ 庭園及び考古学的遺跡群
2013년

후지 산
: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富士山 - 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2014년

토미오카 제사 공장과 관련 유적지
富岡製糸場と絹産業遺産群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2016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
- 近代建築運動への顕著な貢献
2017년

신이 사는 섬
무나카타 오키노섬과 관련 유산군

「神宿る島」宗像・沖ノ島と関連遺産群
2018년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산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2019년

모즈·후루이치 고분군
: 고대 일본의 무덤
百舌鳥・古市古墳群 - 古代日本の墳墓群
2021년

홋카이도 · 북도호쿠의 조몬 유적군
北海道・北東北の縄文遺跡群
2024년

사도 광산
佐渡金山
자연유산
1993년

야쿠섬
屋久島
1993년

시라카미 산지
白神山地
2005년

시레토코
知床
2011년

오가사와라 제도
小笠原諸島
2021년

아마미 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나와섬 북부와 이리오모테
奄美大島、徳之島、沖縄島北部及び西表島
}}}}}}}}} ||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후지 산(富士山),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영어 Fujisan, sacred place and source of artistic inspiration
일본어 富士山ー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프랑스어 Fujisan, lieu sacré et source d'inspiration artistique
국가·위치 일본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3년
등재기준 (iii)[9], (vi)[10]
지정번호 1418

2013년 6월 22일에 후지 산,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후지산 주변의 신사와 화산 지역 및 명승구들을 묶어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원래는 자연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했으나 등산로는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에 더해 등산로 화장실에 분뇨가 넘쳐 흐르는 등 자연훼손이 심하며, 지질학적으로 세계의 유명 산들에 비해 딱히 특별하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등재가 무산되었다. 일본 정부는 자연유산 등재를 위해 친환경 화장실을 등산로 주변에 세우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자연유산 등재는 퇴짜 맞았지만 일본은 환경 평가에 관대한 문화유산 등재에 재도전하여 결국 등재에 성공하였다. 후지산이 일본 문화의 중요한 상징이며 수많은 그림과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는 등 문화적인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11]

그러나 이전부터 후지산 환경 문제가 극성이었는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등산객들이 늘어나 환경 문제가 더 나빠졌고,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유네스코에서 등재 취소를 할 수 있다는 발표까지 나왔다. #

파일:attachment/후지산/富士山世界遺産登録.jpg

세계유산 등재 기념으로 구글 두들에 등장한 후지산.

5. 상징

파일:external/famouswonders.com/mount-fuji-with-a-shinkansen-and-sakura-blossoms-in-the-foreground.jpg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로, 벚꽃이 만발한 가운데 신칸센[12]이 앞쪽을 내달리고 있는 눈 덮인 후지산의 모습은 현대 일본의 경제 부흥을 상징한다. 다만 위 사진과 같은 구도는 후지산의 남쪽 부분, 즉 시즈오카현 쪽에서만 볼 수 있다. 북쪽인 야마나시현에서 보면 산 정상에 큰 균열이 나있다.

일본 민족의 영산이자 일본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일본 매체에서는 수도 없이 다루어 일일이 그 예를 들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인들은 새해 첫 꿈에서 후지산을 보면 매우 재수가 좋다고 한다. 대체로 3등이 가지, 2등이 매, 1등이 후지산이라고 여겨진다. 이는 이치후지니타카산나스비(一富士二)라는 관용어로 통한다. 또한 도쿄 수도권 외곽의 중산층 대상 중등형~고급형 주거 주택단지에서는 후지산이 잘 조망될 경우 프리미엄이 약간 붙는다.

이모지로도 존재한다. 🗻로 표기된다.

6. 관광

위치는 일본 혼슈야마나시현시즈오카현 사이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도쿄도가나가와현[13] 등은 물론이고 100 km 이상 떨어진 이바라키현이나 나가노현의 높은 곳에서도 보인다. 야마나시, 시즈오카 두 현의 경계를 걸치고 있어, 서로 후지산이 자기네 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즈오카현에서는 경치 문단에 나온 사진처럼 남쪽에서 본 후지산을 앞쪽, 북쪽에서 본 후지산을 뒤쪽이라 하고, 야마나시현에서는 그 반대로 북쪽에서 본 후지고코(富士五湖)와 함께 보이는 후지산을 앞쪽이라고 한다고.

일본에서는 신성한 산에 종교적 의미로 오를 경우 등산 대신 '등배(登拜)'라는 말을 쓰는데, 후지산도 등배의 대상이었다. 한국어에서도 사찰에 '참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비슷한 경우라고 하겠다. 세계 각지의 명산들에 비해 경사가 심하지 않고 등산로 관리가 잘 된 편이라서 국민 대다수가 오를 수 있어 이른바 '국민 산'으로 통한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별명일 뿐, 높이와 기후, 등산 소요시간 등을 고려하면 일개 동네 뒷산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무지막지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다.

유료도로인 스바루 라인을 이용하면 5고메(五合目, 5부 능선) 주차장까지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등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스바루 라인은 기본적으로 상시 개방이긴 하나, 날씨나 도로 상황에 따라 중간까지만 올라갈 수 있거나 아예 입구부터 전면 통제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주로 후지산 아래까지 눈이 내려 쌓이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이런 상황이 많이 생긴다. 어디까지 도로를 개방하는지는 그날그날 다른데 후지 스바루 라인 홈페이지에서 매일매일의 도로 개방 상황을 업데이트 해주고 있으니 혹시라도 가볼 생각이라면 참고하자.

다만 겨울에는 눈 때문에 5고메 주차장까지 개방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5고메는 해발고도로 따지면 대략 2,300m 정도 되는 지점으로,[14] 설령 등반을 하지 않고 5고메까지 차 타고만 왔다가 돌아갈 생각일지라도 옷을 잘 챙겨입도록 하자. 차 타고 5고메까지 올라왔다면 주차장에서 내리는 순간 산 아랫동네와 날씨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5고메(5부 능선)까지는 포장도로이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조건 등산로이므로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5고메에서부터 출발하면 당일치기 등반도 가능하다. 물론 5고메가 아니라 아예 처음(산 밑)부터 올라오는 등산로도 있다.

등산로는 여름인 7월과 8월에만 개방한다. 해마다 약간씩 개방 시기가 달라지지만 보통 7월 초에 개방하기 시작해서 9월 초(늦어도 9월 중순 이전)에 닫는다. 후지산의 높이가 워낙 높아서 7~8월이 아니면 정상까지 갔을 때 날씨가 너무 춥기 때문에, 정상 부근의 기온이 그나마 영상으로 올라오는 한여름(7~8월)에만 등반을 허용한다. 사실 기온도 기온이지만 문제도 있다. 후지산 등산로 사진에도 나오듯, 후지산은 6고메(해발 2,500m) 위로는 정말 나무 한 그루 없이 흙과 화산재로만 덮인 급경사를 고갯길 올라가듯이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등산로를 구분 짓는 선이 있긴 한데 난간도 아니고 그냥 철제 사슬이나 로프를 매달아 구분한 정도에 불과해서 상당히 위험하다. 나무가 있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나무마저 없으니 등산로 옆으로 빠지면 그냥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눈이 쌓였다면 등산객이 미끄러질 확률이 높으니 더 위험하다. 정상 부근까지 눈이 녹는 유일한 시기가 7~8월이므로 이때만 등반을 허용한다.

만약 등반에 도전할 생각이라면 준비를 잘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후지산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산지대라 일단 숨쉬는 것부터 힘들다. 우선 짐을 최대한 가볍게 하되, 반드시 외투를 챙긴다. 일단 등산로 출발지인 5고메(5부 능선)가 해발 2,200m라 여름에도 꽤 쌀쌀하고 8고메(8부 능선)[15]부터는 여름이어도 춥다. 등산 스틱이 없으면 5고메에서 금강장(金鋼杖)[16]이라는 나무 지팡이를 1천 엔 내외로 파니 꼭 하나 사가자.[17]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무가 없어서 햇볕을 막아줄 곳이 없고 햇볕도 무척 세기 때문에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히 바르거나 팔토시, 발라클라바로 최대한 노출을 가리는 게 좋다. 피부가 약한 사람이라면 썬크림을 떡칠해도 피부가 뒤집히니 꼭 잘 싸매야 한다. 그만큼 눈에 무리를 주는 자외선도 상당하니 선글라스나 고글도 지참하는게 좋다. 먹을거리로는 작으면서도 열량 높은 초콜릿이나 칼로리메이트 같은 간편식 위주로 챙기고, 에너지 젤리 같은 것도 챙겨주면 좋다. 일반적으로 120엔 정도 하는 이온음료(500 ml)가 5고메 자판기에서는 200엔, 7고메 산장에서는 500엔에 판매되기 때문에 마실 것도 많이 챙기는게 좋다. 생수의 가격도 동일. 등반은 아침 일찍(오전 6시 정도) 시작해야 일몰 전에 하산하기 편하다. 8고메 이상부터는 고산병 증상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할 것.

100엔짜리 동전을 여러 개 준비하도록 하자. 이유는 화장실 때문으로, 이용료가 무려 200엔이다! 이용자가 돈을 내는지 안 내는지 사람이 직접 감시하는 화장실도 있으나, 덩그러니 나무상자만 갖다놓고 돈 넣으라고 써놓은 화장실도 있다.[18] 우천 시 몸이 젖어 추울 때 화장실에 들어가서 휴식을 하기 좋다. 굳이 화장실에서 쉬는 이유는 산장은 휴식이 불가하고 숙박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보다 건조하기 때문에 화장실을 잘 안 가게 될 것이다. 공기가 건조해서 목이 엄청 마르므로 물을 많이 챙겨가고, 그래도 부족할 수 있으니 돈을 넉넉히 챙겨가자. 차편과 숙박비, 그리고 기타 비용을 합쳐 15만 원 정도는 경비를 확보해야 든든하게 등반할 수 있다.

후지산 정상은 상당히 춥다. 정상 부근에 있는 기상관측소 기록에 따르면 1월 평균기온 -18.2℃, 8월 평균기온 6.4℃로 여름을 제외하면 항상 영하권이라고 보면 되며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간다. 극단적으로는 1981년 2월에 -38℃를 기록한 적도 있다. 히타치국풍토기에 기록된 "네가 사는 산(후지산)은 살아있는 한 겨울에도 여름에도 눈이 내리고 서리가 끼며 추위가 덮치리라." 하는 구절대로이다.

일본 전역에 있는 센겐 신사(浅間神社)는 후지산신을 주신으로 모신다. 센겐 신사들은 후지산을 센겐(浅間) 님, 혹은 센겐 대신(大神)이라고 부르며 신앙대상으로 삼는데, 센겐이란 말이 화산을 뜻한다고 한다. 메이지 시기 신불분리령 이후로는 국가신토에 발맞춰, 센겐 신을 (일본서기고사기에 등장하는) 코노하나노사쿠야히메(木花之佐久夜毘売) 여신과 동일시하였다. 센겐 신사들의 본부는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富士宮市)에 있는 후지산혼구센겐 대사(富士山本宮浅間大社, 이하 센겐 대사). 후지산 꼭대기에도 센겐 대사에서 관리하는 신사들이 있다.

후지노미야 루트 등산로의 끝에는 '후지산정상 센겐 대사 오쿠미야(富士山頂上浅間大社奥宮, 이하 오쿠미야)'가 있다. 원래는 후지산 코보사(興法寺)가 있던 자리지만, 메이지 유신 시절 신불분리령으로 사찰이 사라지자 그 터에 센겐 대사가 오쿠미야를 세웠다. 센겐 대사 측도 오쿠미야를 말사가 아니라 또 다른 본사로 간주하는 듯하다. 오쿠미야 경내는 후지산 내에서도 특별보호지구로 따로 보호받는다는 듯. 은명수(銀明水)라고 불리는 약수가 근처에서 나와, 사람들이 받아가려고 한다.

요시다구치 루트의 끝에는 쿠스시 신사(久須志神社)가 있는데 오쿠미야의 말사지만 현판에는 '후지산정상 오쿠미야(富士山頂上奥宮)'라고 써 있다. 원래 쿠스시 신사에는 야쿠시지(藥師寺)라 하여 약사여래를 모시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약사여래의 약사(藥師/薬師)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쿠시. 그런데 메이지 시기에 신불분리령으로 (오쿠미야 터에 있던 코보사와 마찬가지로) 야쿠시사가 해체되자, 센겐 대사가 그 터에 새로이 신사를 세웠다. '야쿠시사'라는 본래의 이름에서 야쿠(藥/薬)를 '쿠스리'라고도 읽을 수 있으므로 여기서 쿠스(久須)를 따고, 시(師)와 발음이 같은 시(志)를 붙여 쿠스시 신사(久須志神社)라 이름을 지었다. 모시는 신은 오나무치(大穴牟遅, 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 두 신은 일본신화에서는 '국토를 만든 신'으로도 유명하고, 의약의 신이기도 하다. 약사여래를 모시던 절 터에 역시 의약의 신을 모신 것이다.

쿠스시 신사 북서쪽 가까이에는 금명수(金明水), 오쿠미야 가까이에는 은명수(銀明水)라는 약수가 나온다. 둘 다 각 신사에서 신찬에 올리는 데 쓰는데, 영험한 약수라 하여 등산객들이 받아가려고 한다. 신사에서 돈 받고 판다는 듯. 전설에 따르면 옛날 다이다라봇치라는 거인이 하룻밤 만에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을 만들겠다고 땅을 파서 흙을 쌓아올렸는데, 마지막 한 삽을 퍼올리려고 할 때 닭이 울어 그만 삽에서 흙을 흘렸다.

그때 쌓은 산이 후지산이고 신령이 흙을 푼 구덩이가 비와 호이며, 마지막에 흘린 흙이 비와 호 옆에 있는 미카미산(三上山), 즉 오미후지(近江富士)가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흙을 못 쌓았기 때문에 후지산 꼭대기가 평평해졌다. 다이다라봇치는 그 한 삽이 아까워서 비와 호의 물을 후지산으로 보냈는데, 그 호숫물이 금명수와 은명수라고 한다. 그리고 후지산 정상 가까이가 비와 호와 연결되어 호숫물이 금명수ㆍ은명수로 흘러나온다고. 일본 다도계에서는 오쿠미야에서 나오는 은명수가 유명하다고 한다. 과거에 약사여래를 모시는 사찰이 있던 것도 금명수ㆍ은명수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는 후지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보기도 한다.

근처에 자살 명소 주카이 숲이 있다. 단지 마경으로만이 아니라 물도 깨끗하기로 유명해서 이 곳에서 채취한 물이 생수로 팔리기도 한다.

일본에는 "후지산을 한 번도 오르지 않은 사람은 바보, 두 번 오른 사람 또한 바보(富士山に一度も登らぬ馬鹿、二度登る馬鹿)."라는 속담이 있다. 일본인들이 후지산을 사랑하는 마음과, 막상 올라가 보면 참 별 거 없는, 과대평가가 심한 곳이란 이중적인 뜻이 있다. 화산은 토양이 식생에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참 휑해서 가까이서 보는 풍경은 명성에 비해 별 것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이든 외국인이든 멀리서 보는 게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평이 대다수.

에도 시대 중엽, 신성한 산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금기 때문에 등산할 수 없는 여자나 몸이 약한 노인, 아이 등이 대리참배할 수 있도록 후지즈카(富士塚)라는 조그만 언덕을 만들기도 했다. 후지강 개조의 제자 타카다 토시로(高田藤四郎)가 남녀노소 후지산을 참배할 수 있도록 1780년 (오늘날 도쿄에 있는) 미즈이나리(水稲荷) 신사에 후지즈카를 만든 데서 시작하였다.[19] 우리나라식으로 말하면 조산(造山)의 일종이다. 후지즈카는 대부분 신사의 경내에 있는데, 특히 (후지산신령을 제신으로 모시는) 센겐신사에 소재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센겐신사가 아닌 신사에 후지즈카가 있는 경우 또한 상당하다.

현존하는 후지즈카는 오래되어 보아야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조성한 것이다. 몇몇 후지즈카는 일본의 중요유형민속문화재, 또는 각 지자체의 유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대에도 따로 후지즈카를 조성하기도 한다.

후지즈카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높이가 8-9 m 정도쯤 되면 큰 편이고 15 m에 달하는 것도 있다.[20] 작은 것은 높이가 고작 성인의 허리춤 정도에 불과하다. 어떤 후지즈카는 단순히 산 모양으로 흙과 돌 무더기를 쌓았을 뿐이지만, 어떤 후지즈카는 후지산에 있는 신사들이나 유명한 지역, 현재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 따위를 후지산에서 가지고 온 돌과 흙으로 제법 상세하게 재현하는 등 각양각색이다. 이런 후지즈카는 간토 지역에만 수백 곳이 넘는다고 한다.

신사에서 관리하는 후지즈카는 평상시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하다가 신사 측이 정한 특별한 날에만 '산 열기(山開き)'라 하여 들어가도록 허락하기도 한다. 후지산에 오르는 것을 등배(登拜)라 부르듯, 후지즈카에 오르는 것 또한 등배라 부르기도 한다. 신사들은 후지즈카의 꼭대기에 오르면 후자산 쪽을 향해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2024년 7월 1일부터 야마나시현에서 등산한 사람은 1인당 2천 엔씩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요시다 루트의 일일 유료 등산객을 4천 명으로 제한하는데, 그중 3천 명은 예약으로만 신청할 수 있다. 일일 최소 1천 명은 당일 현장에서 통행료를 받고 입산을 허가한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가나가와현 이세하라시에 있는 다이센산(大山)[21]과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후지산에 오른 사람은 오야마산에도 올라야 하고, 오야마산에 오른 사람은 후지산에도 올라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서구인으로서 후지산을 첫 등반한 사람은 초대 주일 영국 공사로 재직한 러더퍼드 올코크(1809-1907)이다. 그는 1860년 9월, 영국 외교관으로서 받은 특권을 이용하여 (본래라면 금지되었을) 후지산 등산을 하였다. 러더퍼드가 후지산 밑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일행이 거의 다이묘 행렬 수준이었다고 한다. 중간에 숙박을 했는데 오유(大湯) 간헐천의 뜨거운 물 때문에 러더퍼드가 기르던 스코티쉬 테리어 한 마리가 죽는 사고가 있었다. 죽은 개를 마을 사람들이 꽤 정성껏 묻어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러더퍼드는 후지산을 거창하게 등산하고 돌아왔지만, 서양인이 함부로 후지산에 올랐다고 하여 존황양이를 따르는 무사들이 분노했다. 그래서 1861년 1월에 양이파 무사들이 습격하여 주일 미국 공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헨리 휴스켄(Henry Heusken)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22]

7. 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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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의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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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바라본 후지산. 육안으로는 후지산이 저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다. 멀리서 망원렌즈로 줌을 당겨야 저렇게 보인다.[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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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하코네(元箱根)에서 쳐다본 모습. 바로 앞은 아시노 호수(芦ノ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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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쇼와 11년)에 발행된 대일본제국우편([ruby(大日本帝国郵便,ruby=ダイニホンテイコクユウビン)]) 후지산 우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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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엔권 지폐 뒷면의 '호수에 비친 후지산', 배경은 야마나시현후지5호 중 모토스 호수에서 바라본 풍경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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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과 신칸센 100계 전동차, 벚꽃. 서양 쪽에는 가장 잘 알려진 모습으로, 쇼와시대 중후반 일본의 경제번영 시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이다. 여러 사진사가 이 구도를 오마주했다. 버전에 따라서는 벚꽃 대신에 토네강의 철교가 들어가기도 한다. 시즈오카현 후지시 시민 복지 플라자 앞에 있는 밭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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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시현 로손 후치가와구치코 사무소점을 배경으로 후지산을 찍은 사진이 2022년말부터 유행하였다. 후지산과 편의점이라는 일본스러움이 화제가 된 것인데, 관광객이 너무 몰리자 결국 2024년 6월 후지산이 보이지 않도록 가림막 공사를 진행해 화제가 되었다가 3개월만인 8월 15일에 철거했다. 단체관광객 버스까지 와서 촬영하는 등 교통 및 안전문제가 심각했다고..

8. 대분화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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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상공에서 바라본 도쿄 도심.

후지산은 한동안 휴화산으로 분류되었지만 1975년 이후 명백한 활화산으로 재분류되었다. 역사적으로도 수 차례의 분화기록이 남아있어, 가까운 미래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도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과거에도 국가 궤멸 수준까지 안 간 걸로 보아 대규모 용암분출은 없었던 듯하다. 마지막으로 대분화가 일어난 시기는 1707년 연말. 이때 에도(현재 도쿄)까지 화산재가 밀어닥쳤으나 화산재 외 용암이 분출되진 않았다. 1707년이 일본의 연호로는 호에이(宝永) 4년이기 때문에 당시의 분화를 호에이 대분화(宝永大噴火)라고 부른다. 다만 이후로는 큰 화산활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기록이 별 일 없었다고 여길 것이 아닌 것이, 화산폭발은 정말 위험하다. 탐보라 화산 폭발로 6만-12만 명,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로 3만 6천여 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지산이 다시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산케이 신문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정황상 추정에 불과하지만, 대지진이 일어난 후 시즈오카현의 강진,[26] 하코네 화산대에서의 군발 지진을 근거로 삼았다. 다만 일본 기상청에서는 진원지가 다르고, 해당 지진과 후지산 폭발의 메커니즘이 다르다며 이러한 주장을 일축했다.[27]

2011년 8월 26일, 후지산 부근의 마을들에서 수돗물을 틀면 수돗물이 데워져서 나오고, 새들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다.

2011년 말과 2012년 초의 겨울에 후지산 꼭대기의 만년설이 녹았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후지산 정상 부근에 있는 만년설은 양이 매우 적고, 눈이 쌓인 부분 대다수는 만년설이 아니라 해와 계절마다 높이가 달라진다.[28] 물론 눈이 많이 녹긴 했지만 반드시 화산 폭발의 징조라고 할 수는 없다.

2013년 3월 30일, 후지산에서 이상징후가 포착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

난카이 지진과 묶이기도 한다. 1707년 (양력) 10월 28일 규모 8.6~8.7인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이를 호에이 대지진이라 부른다. 지진 피해는 도카이도, 기이 반도, 시코쿠까지 이르러 사망자만 2만 명 이상, 가옥 6만 호 파손, 쓰나미에 의한 유실 가옥이 2만 호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29] 49일 후인 1707년 (양력) 12월 16일 후지산이 VEI 5의 대규모로 분화했는데, 이것이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호에이 대분화'이다. 도카이, 도난카이, 난카이 대지진의 원인인 난카이 해곡의 출발점이 후지산이니, 후지산 분화와 난카이 해곡 대지진 간의 연관성이 깊음은 당연하다.

2014년에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후지산 대폭발을 가정한 재난대비 실전 훈련 또한 대규모로 진행하였다. 후지산이 3백 년 전처럼 대폭발한다면 흘러내리는 용암을 피해 가나가와현,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주민 75만 명이 피난길에 올라야 한다고 한다. 日, 후지산 폭발 가정한 재난대비 실전 훈련 이번 훈련은 일본 기상청이 분화를 1~2개월 전에 미리 예측해낸다는 가정 하에 실시했고, 온타케산 분화처럼 돌발적인 '수증기 폭발' 상황은 상정하지 않았다. 일본서 후지산 분화 대비 대규모 대피훈련

일본 정부가 후지산 폭발을 상정해 피해규모를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3시간 만에 도쿄 도심과 주변 도시들에 화산재가 도달해 자동차 및 철도운행이 정지되고 수도기능이 마비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日 후지산 폭발 시뮬레이션 결과 발표, "3시간 만에 도쿄 마비"

이 탓인지 일본에서는 후지산 분화 대비 세계 최초 화산보험 상품 또한 등장하였다고 한다. 일본서 후지산 분화대비 '보험' 등장…세계 최초 화산보험 상품

일본 정부는 과거 2004년 후지산방재검토위원회 보고서에서 화산이 분출하면 피해액 2조 5천억 엔(한화 24조 5천억 원)어치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30] 하지만 항공편이나 기타 운송 수단, 2차 인프라에 미치는 영향까지 계산하면 비용은 이를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어 실제 피해규모는 그 이상이리라 추정한다. # # 한편 후지산방재검토위원회는 사망자 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피해예상지역의 주민 수를 약 13만 6천 명으로 추산했다. 후지산 대폭발 언제일까?

2020년 말, 2012년에 이어 후지산의 눈이 다시 녹아서 대분화의 징조라는 말이 돌았는데,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후지산 주변 지역에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후지산에 눈이 내리지 않아 눈의 양이 줄어든 것이라 한다.

2022년 새해가 되자 일본에서는 지질학 전문가 그룹을 중심으로 올해 안에 후지산이 분화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3일 오전 야마나시 현 등 후지산 인근에서 잇따라 지진이 발생하였고, 일본 기상청은 "후지산 화산 활동과 관련이 없다"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이와 다른 견해를 내고 있다. 나가오 도시야스 도카이대학 해양연구소 객원교수는 "지난해 12월 이후 지진을 보면 후지산 주변에서 지진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조만간 후지산 분화가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으로, 올해 발생할 가능성도 제로(0)는 아니다"고 했다. 그는 이어 "후지산은 300년 간 분화가 일어나지 않아 내부에 강력한 힘이 축적돼 있다"며, "가까운 장래에 분화하는 것은 화산학자 100명 중 100명이 동의하는 대목"이라고도 했다.후지산, 올해 폭발할 수도....日 전문가들의 경고

후지산이 폭발한다면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로 예상된다. 하나는 864~866년에 일어난 분화처럼 화산 폭발로 마그마가 흘러내리는 경우, 또 다른 하나는 1707년 '호에이 대분화'처럼 화산재를 대량으로 뿜어내는 분화가 일어나는 경우이다. '후지산 대분화' 예상 시나리오 화산대에서 아이라·단자와 분화 때처럼 초거대 분화가 터지면 일본은 도쿄는 물론이고 수습하는 데 나라가 망할 판국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1억 2천만명 사망 시나리오 물론 판의 진동으로 한라산, 백두산까지 영향을 받아 터질 수 있으니 한국 입장에서도 바다 건너 불구경 상황은 아니다. 북에 백두산, 동에 후지산 우리나라는 안전할까?[31] 다만 바람의 방향상 백두산이나 후지산이 분화하더라도 한국은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8.1. 후지산 화산방재 대책협의회

일본어 - 富士山火山防災対策協議会
링크

2012년에 창설된 이 조직은 후지산 분화시 예상 피해 반경을 산출하고 주민들의 피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

구성멤버

2022년 3월 20일에는 피난 계획이 대폭 개정되었다. 이하 전문
개정의 기본 방침• 「피난 지연 제로를 목표로, 안전하게 피난할 가능성을 극대화」
  1. 광역 피난 계획이 의미하는 바
    • 후지산 화산에서는 피난 대상 범위가 광범위함에 따라 원활한 피난을 실시하기 위해 광역 피난 대상 범위에 공통되는 계획=광역 피난 계획을 후지산 화산 방재 대책 협의회에서 책정했다.
    • 또한 한 번의 분화에 영향 대상 범위인 3개 현 27개 시정촌의 전체 또는 대부분이 일제히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며 피난처는 자치단체 내의 구역 내에서 충분한 경우도 상정되어 시정촌의 구역 밖으로의 피난이 반드시 효과적인 피난이라고는 할 수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칭에서 시정촌 구역 외로의 피난 계획을 중심으로 한 계획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다.
2. 불확실성을 감안한 피난
• 화산 재해는 전조에서 분화까지 장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있거나 결과적으로 분화에 이르지 않는 경우도 상정된다.또 분화 후 몇 시간 만에 진정될지, 몇 년에 이를지도 예측하지 못해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
• 이를 위해 예상되는 화구 범위에서의 거리나 지리적 상황에 따라 분화 전 대피나 분화 후 대피뿐만 아니라 대피 대상 범위, 대피 개시 시기, 대피 대상자를 조합한 효과적인 대피 체제를 검토하기로 했다.
• 생명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시하면서 생활을 지키는 피난도 배려해 검토하기로 했다.
3. 요지원자(약자) 등의 피난 대책
• 지금까지의 계획에서는 일반 주민의 피난 방법에 관한 기술이 중심이 되어 피난 행동 요지원자(약자) 등에 대해서는 일반 주민보다 빠른 단계에 대피하는 것 외에 상세한 기술이 없었다.
• 고령자, 장애인 등 요지원자의 피난에서는 자동차에 의한 이동 불가결하며 요지원자가 확실히 피난할 수 있도록 한정된 자원(도로)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검토하기로 했다.
• 새로운 계획에서는 피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하여 피난행동 요지원자, 등산자 및 관광객에 관한 기술을 충실하게 하고 2022년도에 계속 검토하기로 하였다.
4. 피난수단의 재검토
• 기존에도 주민들이 일제히 자가용으로 대피할 경우 정체 발생이 우려됐다.
• 한편, 상단의 3과 같이 요지원자를 확실하게 대피시키기 위해서는 한정된 자원(도로)을 우선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으므로 일반 주민은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 대피방법에 대해서도 검토하기로 했다.
• 상기 1 및 2와 같이 대피처까지의 이동거리가 장거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예상되므로 분화 전 대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 주민은 원칙적으로 분화 후 인근 집결장소 또는 대피장소까지 도보로 대피함으로써 지역 전체적으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기로 했다.
(중략)
피난자 수 개정
개정 전 제2차 피난 대상 지역 추계 인구:16,274명 -> 개정 후 제2차 피난 대상 지역 추계 인구:1,160,923명
약 71.34배 증가
3시간 이내 용암 도달 예상 지역[33]
* 후지요시다시
* 미나미쓰루군 나루사와무라 촌
* 후지카와구치코마치
* 후지노미야시
* 후지시
* 스소노시
* 고텐바시

9. 여담

파일:후지산_여름.jpg

[1] 한국 한자음으로 읽었을 때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늦게는 대한민국 초기까지의 문헌에는 이 이름으로 나온다. 후지(사과)도 원어명은 히라가나 ふじ이지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후지산에서 따온 부사(富士)로 부른다.[2]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청으로부터 할양받은 타이완 섬에 더 높은 위산이 있었다. 일본은 후지산보다 높은 새로운 산이 생겼다고 하여 니타카 산(新高山, 니타카야마)이라소 이름붙였다. 진주만 공습 당시 공격 허가 암호였던 "니타카 산에 올라라 1208(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가 여기를 가리킨다.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국에게 패전한 일본은 타이완을 중국에게 돌려줘야만 하면서 일본국 영토 내 최고봉은 다시 후지산이 되었다.[3] 불(火)을 의미하는 고대 일본어 단어가 한국어와 관계 있는 '푸디~푸지'였는데 여기서 순음퇴화구개음화가 일어나 '후지'란 이름이 나왔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화산임을 감안할 때 일리 있는 설명이다. 이남덕 - 한국어 어원연구 4권.[4] 岳: 온타케산, 江: 주장강, 島: 도시마섬, 川: 하야카와강, 山: 위산산.[5] 당시에는 화산이 여러 개 모여 있었다.[6] 일반적으로 기기신화에 등장하는 코노하나노사쿠야히메를 뜻한다. 아이를 출산할 때 아이의 몸에서 타오른 불에 타죽었다는 신화가 전해지는데, 후지 신앙에서 코노하나노사쿠야히메는 불을 꺼트린 물의 신으로 대접받는다.[7]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에 있는 센겐 대사는 센겐 신사의 총본궁이다.[8] 일본에서는 비단 후지산뿐만 아니라 신성한 산이나 장소에 여자가 못 가게 하는 관습이 과거에는 많았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관습이 유지된다. 진언종의 성지 고야산도 19세기까지는 여자가 들어가지 못했고 교토부 아야베시에 있는 미센산(弥仙山)도 수험도의 성지로 19세기까지는 여자의 입산이 금지되었다. 1901년에 오모토의 개조 데구치 나오가 미센산에 짱박혔다가 인근 주민들에게 들킨 적이 있는데 법적으로는 금기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아 주민들은 나오에게 욕을 퍼붓고 경찰서에 데려갔을 정도였다. 후쿠오카현 무나카타시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오키노시마(沖ノ島)는 아직도 여자는 섬에 들어갈 수 없는 관습을 유지한다.[9]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10]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11] 후지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비슷한 사례로는 쿠로니아 모래톱이 있다.[12] 사진에 나온 신칸센은 100계 전동차이다.[13] 특히 에노시마에서의 경관이 유명하다. 에노시마의 풍경을 담은 고미술품 등을 보면 후지산이 그려진 작품이 상당히 많다.[14] 대한민국(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지리산, 한라산 정상보다도 높은 것이다.[15] 해발 3,300m 부근[16] 일본어로는 콘고즈에(こんごうづえ)라고 읽는다. 원래는 불교 수행자나 슈겐자 등이 여행하거나 순례할 때 쓰는 나무 지팡이. 시코쿠 88 사찰순례에서도 사람들이 금강장을 들고 다닌다. 원래는 금강저 중 독고저의 형상을 따서 만들었기 때문에 금강장이라고 이름한다고 한다.[17] 각 산장과 정상에서 300엔 남짓 돈을 내면 5고메에서 파는 금강장에 인두로 지져 스템프를 찍어주는데, 정상에서만이라도 스템프를 하나 찍기를 추천한다.[18] 후지산 정상 화장실은 감시 안 함.[19] 토야마번(富山藩: 오늘날 토야마시 일대)의 번주 마에다 마사토시(前田正甫)가 1702년 큰 정원을 만들면서 안에 후지산을 본뜬 조산(造山)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원 조경의 일부였을 뿐이므로 후지신앙의 일부인 후지즈카와는 차이가 있다. 이 조산은 이소베후지(磯部富士)라고 불렸으나 마사토시가 죽은 이후 관리가 되지 않아 이리저리 훼손되다가 1957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20] 그런데 후지즈카의 크기는 높이만이 아니라 조산의 지름까지 따지기 때문에 높이와 크기가 정 비례하지는 않는다.[21] 훈독으로 오야마라고도 부른다. 이세하라시(伊勢原市), 아츠기시(厚木市), 하다노시(秦野市) 사이에 있는 해발 1252 m짜리 산. 기원전 조몬 시대 제사용 토기가 산 정상에서 발견되는 등 유서 깊은 성산(聖山)인데, 아후리산(阿夫利, 雨降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산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오야마아후리신사(大山阿夫利神社)가 있는데, 오랫동안 일본불교와 습합되어 적어도 8세기부터는 '석존대권현石尊大権現 오야마사大山寺'라고 불리며 부동명왕을 모시는 절이 되었다. 그러다가 1868년 폐불훼석(廃仏毀釈) 때 불교와 분리되어 오야마사는 폐사되고 신토시설로 천수백여 년 만에 거듭났다.[22] 헨리 휴스켄의 묘가 도쿄 미나토구 코린사(光林寺)에 지금도 있다. 묘비 자체는 일본식인데 비면에 십자가와 영어 문장을 새겨 눈에 띈다.[23] 코쿠분지시부터 보인다고 한다. 그보다 앞인 니시도쿄시코가네이시에서는 안 보인다는 듯하다.[24] 망원렌즈로 인한 배경압축 현상이다.[25] 2024년부터 발행되는 1000엔권에서는 카츠시카 호쿠사이후지산 36경 중《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가 들어간다.[26] 후지산 바로 옆에서 발생했다.[27] 사실 1200여 년 전, 2011년 도호쿠 대지진과 진앙지가 같은 산리쿠 해역 지진(조칸 대지진) 발생 5년 전에 후지산이 대폭발을 일으킨 기록(조칸 대분화)이 있다.[28] 이 때문에 정상 개방은 눈이 대부분 녹는 6-8월 사이 여름에만 한다. 그래도 밤에는 영하로 내려갈 만큼 춥다고 한다.[29] #[30] 1707년에 호에이 대분화 때는 화산재로 인해 강이 오염되고, 이후 태풍이 올 때마다 퇴적된 화산재가 섞인 강물이 범람하면서 그야말로 평야가 진흙탕이 되어버렸다. 이 피해를 직격으로 얻어맞은 오다와라번은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아 영지를 막부에 반납해버렸다. 그리고 화산재가 섞인 강물이 태평양으로 다 빠져나가서 원래 모습을 찾기까지는 무려 70~80년이 걸렸다.[31] 백두산, 한라산뿐만 아니라 대만의 양명산이나 러시아 캄차카 반도, 미국 및 캐나다 서부에까지 영향을 줄 수도 있다.[32] 해당 지역 주민들은 긴급피난대상자이기에 자가용으로 피난해야한다.[33] 해당 지역 전부가 용암 피해를 입는다는 소리는 아니니 주의[34] 후지산 등산로를 合目로 나누는데 8번째 合目[35] 그런데 아키타 현의 후지는 자연산의 해발고도가 35m, 인공산은 0m이다. 후자의 경우 해수면보다 낮은 지대에 있기 때문. 물론 공식적으로 가장 낮은 후지로 인정받은 것은 전자다.[36] 원래 명칭은 垈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터산 내지는 테산으로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대전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유입된 인구가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어화된 것으로 보인다.[37] '부사동'은 광복 이후 음만 같은 '芙沙洞'으로 한자 표기가 바뀌었다.[38] 유명한 케이스로 일본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유아사 구라헤이에게 후지산이라고 디스당한 케이스가 있다.[39] 한국 속담에 비유 하자면 빛 좋은 개살구를 떠올리면 된다.[40] 정작 이때는 정상 등산로 개방을 하지 않는다.[41] 상기한 후지미라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은 지명에서 후지산이 보인다는 것을 암시한다. 덧붙여 이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후지산이 보인다는 전승이 있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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