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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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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서게르만족) 스웨덴인 (북게르만족)
파일:external/wiki.verbix.com/MapGermanicEurope.gif
게르만계 언어 분포

1. 개요2. 개념의 정립3. 특징과 스테레오타입4. 역사
4.1. 고대4.2. 게르만족의 대이동4.3. 중세4.4. 근현대
5. 오해
5.1. 바이킹?5.2. 독일인?
6. 게르만족 위주의 국가
6.1. 서게르만족과 북게르만족이 각각 주류가 아닌 나라에서 북게르만족과 서게르만족이 각각 분포하는 지역
7. 고대 게르만족 인물
7.1. 서로마 제국의 게르만족 인물들
8. 게르만족 관련 문화

1. 개요

BC 8세기에서 AD 세기에 활동했던 민족이다. 인도유럽어족 중에 게르만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총칭하고, 우리가 흔히 아는 독일어권영어권 백인들의 뿌리가 된 민족이다.

게르만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 수 없다. 게르마니아라는 지명은 게르마니인의 땅이라는 뜻이지만, 게르만의 어원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타키투스의 관련 기록에 따르면 그는 게르마니아(게르만)라는 명칭이 꽤 새로운 호칭이라고 말했다. 그는 게르만이 라인강 서쪽의 퉁그리족이라는 부족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점차 의미가 확장되어 그쪽 방면의 민족집단 전체를 일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확실하지는 않지만 라인강 동쪽의 어느 부족에게서 게르만이라는 명칭이 유래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2. 개념의 정립

오늘날의 미국 백인, 영국인, 호주인, 뉴질랜드인, 캐나다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스위스인[1] 등이 해당된다.

지금은 게르만족들이 역사를 거치며 섞여서 다양한 민족으로 호칭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에서 '게르만'이라고 하면 주로 4세기의 민족대이동 이전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게르마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원시 게르만 민족을 뜻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부족은 원시 씨족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최근의 연구 성과는 같은 부족으로 묶인 집단도 굉장히 다원화된 구성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부족의 이름은 주로 정치적인 주도권을 지닌 소수 집단에 의해 정해지는 편이었다.

사용 언어와 인종을 기준으로 비교적 넓게 나뉜 민족 개념은 'nation'보다는 'ethnic group'에 가까우며, 통일 국가와 절대왕정 체제를 이룩한 프랑스와 달리 작은 소국가로 분열이 이어졌던 독일게르만어파를 기준으로 'ethnic group' 개념으로서의 게르만 민족을 내세우며 민족 국가의 틀을 잡는 데 이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3. 특징과 스테레오타입

흔히 게르만족 하면 금발을 떠올린다. 하지만 모든 게르만족이 금발이란 생각은 편견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에서 게르만족의 나라 하면 1순위로 먼저 떠올리는 독일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같은 지역의 게르만계 국가들은 금발보다는 갈색 머리나 흑발도 많이 보이고 남서유럽의 라틴족, 동유럽의 슬라브족 같은 다른 유럽 민족들에게서도 금발은 많이 나타나고 금발 외에도 적발 같은 다양한 색깔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제2차 세계 대전을 유발한 독일 나치 정권의 최고지도자인 히틀러괴링, 괴벨스, 힘러 같은 다른 나치 정권 당시 독일의 정치인들도 흑발이었으며.[2] 백설공주와 맬린공주 등 그림 형제의 그림 동화로 유명한 독일 옛이야기 속의 공주 여주인공들도 매체나 일러스트에 따라서 흑발로 묘사된다.[3] 즉 애초에 게르만족이라는 것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동일한 씨족 집단이 아니기에 모든 게르만인이 금발이라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오류라 할 수 있다.[4]

영화 등으로 인해 게르만족은 야만인들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들도 농경을 중시하는 정주민족이긴 매한가지였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의 저서인 로마인 이야기에서 게르만족이 고원의 기마민족이라고 서술했지만, 엄연히 틀린 설명으로 게르만족은 기본적으로 정착해서 농사를 짓는 농경민이었다.[5] 다만 기후적, 토양적 요인 탓에 목축과 사냥의 비중이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건 사실이다.[6]

북해로 대표되는 바다를 낀 민족들이 많았고 당연히 해산물 섭취 역시 많았다. 주로 청어대구를 많이 먹었으며, 이외에는 이나 홍합같은 조개류와 새우, 바닷가재, 게 등 갑각류도 먹어왔다. 그러나 다른 해양민족들과 달리 오징어 등 두족류가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해조류도 거의 먹지 않았다. 이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영미권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미국, 영국, 호주 등지에서는 두족류와 해조류를 거의 먹지 않는다. 하필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게 게르만 계통 문화권이면서 초강대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영미권이다 보니 이들의 문화가 사실상 표준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서양인은 두족류(문어, 낙지)를 먹지 않는다'라는 인식의 주된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개인차가 있긴 하나, 한국에서는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대체로 질서나 원리 원칙을 크게 강조하는 등 합리적인 걸 좋아하고,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널리 퍼졌다. 결벽증이 심해서 항상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는 고정관념도 있다.[7]

종교는 역사적으로는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에서 개신교가 주류였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독일 남부에선 가톨릭이 주류였다. 대표적 개신교 교파는 북유럽 일대의 루터교회영국성공회, 감리회가 있으며 이 중 영국계 개신교단들인 성공회 등은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해 아시아오세아니아에도 진출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도 교세가 크다. 다만 네덜란드 개신교가 19세기 후반부터 감소하고, 동독이 공산화되고, 개신교 측이 소폭 많았던 스위스의 개신교 역시 감소하면서 역사적 개신교 우위 지역은 줄어든 상태이다. 현대에는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가톨릭 비율이 더 높다. 독일의 경우는 가톨릭과 개신교 비율이 거의 비슷비슷한 편.[8]

현대의 게르만 국가들을 생각하면 의외라 여겨질 수도 있는데 라틴계 민족들에 비해 게르만계 민족들은 전통적으로 부계 사회 성향이 강한 편이었고 이로 인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중세시대의 상속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살리카법이다.[9] 다만 현대에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부계사회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편이다. 출산율의 경우, 과거에는 남동유럽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1960년대 이후로는 피임약이 빠르게 보급되고[10] 기독교적 가치관이 많이 축소되면서 애들을 잘 안 낳는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먼나라 이웃나라 만화에서도 이러한 1970년대의 시대상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2010년대에는 크레디트 스위스나 OECD의 조사 결과 때문에 받는 소득은 평등하지만 쌓아놓은 자산을 보면 빈부격차가 매우 심각한 나라들이란 인식도 생겨났다(...). 특히 독일스웨덴.[11]

교실에서 수업을 받거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등의 환경에 있을 때 본인에게 불편함이 느껴지면 다른 옵션을 요구하기보다 그 환경을 거부하고 돌아가 버리는 일이 잦다. 남녀 공통으로 적용되기는 하는데 여성층에서 좀 더 나타나는 편이다. 이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의 영국에 그 뿌리가 있는 오늘날 미국인들에게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수업을 받는데 본인에게 다소 부담이 되거나 버거우면 '나는 이 수업을 들을 수 없음' 내지는 '나는 이 과제를 해낼 수 없음'을 어필하고 바리바리 책가방을 싸서 교실을 나가는 모습을 쉽사리 볼 수 있다. 이때 그 수업이 학원 등 본인이 직접 등록해서 듣는 사교육이면 매우 높은 확률로 수강을 취소하고 환불을 받으려는 모습도 나타난다.

이는 라틴족이 주류 민족인 남유럽중남미 문화권과 매우 대비되는 모습인데[12] 이는 오늘날 많은 게르만계 국가 국민들이 불편한 상황에서(타인에 의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독일인, 스위스인 등 내륙 게르만계 사람들의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가 시간 관념이 엄격하다는 것인데 이의 연장선상이다. 시간을 알뜰살뜰하게 쓰는 것을 중요시하는 문화적 경향상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수업이나 서비스 환경은 이미 그 자체로 시간 낭비인 상황으로 간주, 강력한 거부 의사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에 따른 환불도 마찬가지 논리로 '이 수업/서비스를 다시 받을 때 또 이 같은 환경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음'에 의거, '따라서 굳이 불확실한 상황에 시간을 걸고 싶지 않음'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되어 쉽사리 환불 등의 후속 조치로 이어진다.

4. 역사

4.1. 고대

파일:북유럽 청동기 시대 사회.png
청동기 시대의 게르만족
파일:FjiRqkOWIAEXI0R.jpg
기원전 50년~ 기원후 300년 사이의 게르만족의 분포도
파일:1280px-Germanic_tribes_settlements_750BC-1AD.svg.png
고대 게르만족의 이동
기원전 750년 이전
기원전 750년과 기원후 1년 사이
기원후 100년까지
기원후 100년 이후

독일을 영어로 Germany라 부르다 보니 현 독일 지역이 이들의 주 영역이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본래 게르만족은 전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왔다. 기원전 700년 이전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안과 유틀란드 반도에서만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300년 사이 스칸디나비아의 기온이 내려가자 게르만족은 대거 발트해를 남하하여 발트해 남안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후 남하를 계속하여 켈트족을 몰아내고 중부유럽을 차지하여 정주하게 된다.

기원전 120년 유틀란드 반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 등이 살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로마와 맞닥뜨리게 된다. 로마는 이들이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수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전멸하고 집정관이 연이어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로마는 기원전 105년 무려 12개 군단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 명이 전사하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13] 이에 로마 시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국가적 위기를 맞은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도하에 로마의 사회 체제를 뒤엎는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그런데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곧장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갈리아를 유랑하면서 선주민들과 전투를 치르며 전력을 소모하다가 급기야는 분열되고 말았다.[14] 한편 로마군은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직업군인화되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분열된 게르만족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탈리아로 접근해 오자 로마군은 기원전 102년 마르세유 인근에서 테우토니족을 격퇴했고, 이어 기원전 101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느라 약화된 킴브리족을 밀라노 인근에서 섬멸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전멸했고 여자들과 어린이는 자결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용병화되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킴브리 전쟁 참조.
파일:Germanic_dialects_ca._AD_1.png
기원후 1년경 게르만어의 분포
북게르만어
북해 게르만어[15]
저지 프랑크어[16]
고지 독일어[17]
동게르만어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과의 경계를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확장하기 위해 11개 군단을 투입하여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게르마니아 정복 사업을 펼친다.(게르마니아 전쟁) 그러나 서기 9년에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면서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게 되고 로마와 게르만족의 국경은 라인 강도나우 강으로 확정된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에도 게르만족과 로마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국경으로 마주하면서 수시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3세기에는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고트족, 프랑크족, 알레마니족[18]이 로마를 공격하여 로마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19] 동시에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 조심스러운 교류가 진행되기 시작되어 게르만족은 로마 사회로 조심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범위는 굉장히 넓었고 그 속에 많은 부족들이 있었으므로 로마는 일부 게르만족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다른 일부 게르만족과는 동맹을 맺는 식의 정책을 쓰며 게르만족을 다루었다.

4세기에 들어설 무렵엔 게르만 족과 로마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진척되어 용병으로 당시 이미 상당히 와해되어버린 로마의 국방제도를 메워주기도 하고, 로마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한 변경지대에 대신 이주하여 그 땅을 경작하고 세금을 내기도 했다. 한편 수세기에 걸친 교류를 통해 게르만족과 로마와의 문화, 문명적 수준 차이가 점점 좁아졌다. 피터 히더의 '로마 제국과 유럽의 탄생' 중 2장 '세계화와 게르마니'에 의하면 4세기 들어서는 군사를 전담하는 귀족 종사단, 즉 초보적인 형태의 장교단이 형성되었고 그들 중에서 좀 더 뛰어난 자들이 부족/종족 전체를 이끄는 부족장/왕이 되었다. 즉 부족장/왕 입장에서 이들은 잠재적인 경쟁자였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들 중에서 본인의 위치에 도전하려는 것이 보이거나, 그런 것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실력과 인망이 빼어나게 좋았던 경우 내분이 있었으며 심하게는 내전도 있었다. 로마가 이들 간의 갈등관계를 이용해서 같은 게르만 부족/종족 내 디바이드 앤 룰을 성공시킨 사례도 더러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저 귀족 종사단은 부족장/왕이 되기 위한 일종의 예비 인재풀이라서, 여러 부족/종족을 한꺼번에 통제하는 부족장/왕이 상설직이 아니라 이전의 아르미니우스나 옆 갈리아의 베르킨게토릭스와 같은 특출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거했던 나머지, 이들이 죽고 나서 이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던 일은 없어졌다. 지도자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나이가 충분히 차 있으면서 리더십이 되면 성공적으로 세습하는 것이고, 리더십이 없거나 나이가 너무 어리면 귀족 종사단 중 실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이 새로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20] 즉 일가 내 세습이 정착되지는 않았다 해도 부족장 내지 왕 자리는 예전과 달리 상설직으로 정착되었어서 정치적으로 훨씬 더 안정되었고 결집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발전한 게르만족은 로마에게는 종전보다 훨씬 강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렇게 되니 귀족 종사단과 그 밑의 평민과의 사회경제적 차이는 종전에 비해서 점점 벌어졌다고도 한다. 또한 제국과의 국경인 라인 강 혹은 다뉴브 강 한가운데에서 로마 황제들과 선상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로마 황제와 1:1로 회담을 하는 것은 제정 초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4.2. 게르만족의 대이동

4세기 후반, 동방에서 훈족이 나타나자 난리가 나버렸다. 갑자기 동쪽에서 훈족이 나타나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연맹왕국 비스무리한 것까지 형성하면서 게르만족 중 가장 잘나가던 동고트족을 휙 밀어버리자 이들이 서진하면서 주변의 여타 게르만족들을 도미노 쓰러뜨리듯 밀어버렸고,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이로 인해 로마의 영토 각지에 게르만족들이 자리를 잡아 각자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대표적인 왕국들은 아래와 같다.
파일:3039fbd4294657528f48aa1c69beb1c6.jpg
476년 말의 유럽
특히, 이러한 왕국들 중 가장 눈에 띄는건 프랑크 왕국인데 짧은 이동거리와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는 클로비스가 시작한 로마 카톨릭 개종, 경제적 관점에선 대서양 근처 영토장악 후 곡창지대라는 지리적 우월함에 힘입어 주변 국가의 왕실들과 혼인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움직임이 번영의 이유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로마는 후에 여러모로 골치아픈 이들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게 잘 먹히지 않은 게, 로마도 인력 부족이라서 이들이라도 받아들여 머릿수를 채워야 했던 안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족째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전사를 군에 편입시켜 계속 인력을 충원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적, 물적 자원은 동로마 지역이 풍부한데 그 지역은 절반 이상이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치 전선에 그게 투입되어야 하는지라(...). 이때 로마 병사들이나 지휘관들이 게르만족이기 때문에 이들을 막지 않았다는 것은 전형적인 편견이다.

실제로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등의 게르만계 로마인들이 라틴계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해가며 분투하기도 했다. 애초에 게르만족은 단일 민족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며,[21] 같은 게르만족이라도 전근대 시대에는 같은 부족이 아니면 그냥 남일 정도로 철저한 부족 사회였는데,[22] 당연히 그 내부에서 친(親) 로마파 부족과 반(反) 로마파 부족은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일례로, 고트족은 서로 같은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각각 서고트족동고트족으로 갈리면서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동고트족은 훈족에게 정복당한 뒤로 뒷날 훈 제국이 붕괴된 뒤에 동고트 왕국을 세워 독립하기 전까지 그들과 함께 따라다녔다. 그 결과로 카탈라우눔 전투와 같이 로마 제국의 운명이 걸린 큰 전투에서 같은 고트족끼리 칼끝을 겨누는 일도 비일비재했다.(서고트는 로마 편, 동고트는 훈족 편)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라틴족 또한 로마 제국 말기의 시점에서는 단일 민족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로마의 이탈리아반도 통일 이전에는 하나의 라틴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이후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및 다른 문화권(이베리아 반도,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 등)으로의 팽창을 통해 라틴족은 보다 더 다양한 혈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사치와 퇴폐에 빠진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들을 쓰게 되어 차츰 군사력이 저하되어 기강이 빠져 결국 망했다는 것은 틀린 해석이다. 로마군의 중추를 형성했던 게르만족들은 적어도 4세기까진 대부분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으로서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던 상비군이었고, 게르만족 출신 병사들과 장교들은 전반적으로 로마에 대단한 충성을 바쳤다.

당시의 로마 제국 내의 게르만족들의 삶은 이랬다. 게르만족들 중에서 귀족이거나 부유한 상인이나 지주쯤 되는 유력자의 자녀들은 로마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볼모로 붙들려서 수도인 로마로 보내졌다.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에는 그곳으로 보내졌는데, 이 볼모 생활은 강제적으로 유폐된 생활이 아니었다. 오히려 볼모들은 사실상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으로 간주되었고, 이곳에서 로마식 교육을 받은 후에 로마 제국의 고관대작으로 임용되어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23] 때가 되어 족장의 자리를 물려받거나 가업을 잇기 위해 출신 부족의 영토로 귀국할 때에는 그야말로 금의환향이 따로 없었다. 엄청난 액수의 퇴직금, (명목상이나마) 제국 고위 인사임을 인증해주는 직인, 부족민들에게 나누어줄 각종 로마산 선물과 줄줄이 붙은 호위병을 대동하고 온 유력자 자녀를 게르만 족이라면 너도나도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부족 내 영향력이나 발언권이 강한 상류층에서부터 반로마 감정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24] 예나 지금이나 자기 자녀가 다니는 회사가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 회사가 복지나 위신을 세워준다면 더더욱.

물론 이는 꼭 게르만족들에게만 한 정책은 아니고, 유대인이나, 켈트족, 아랍인 등의 여러 비(非) 라틴계, 비 그리스계 민족들에게 두루두루 실행된 정책이었으므로, 로마 제국의 역사에는 이 정책의 혜택을 받고 출세하여 로마에 충성한 이민족 출신자에 대한 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유대인 출신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의 피가 반쯤 섞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시대를 잘 타서 아예 황제로 즉위하기까지 한 아랍인 장군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 그 수가 매우 많다. 먼 훗날 서로마가 멸망한 후 동로마 시대에는 심지어 게르만족(고트족) 출신 로마 황제도 1명 나왔다.

용병이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건 로마 제국의 재정이 엄청나게 취약해져 로마군 중 부족 단위로 편제되어 싸우는 단위들이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지, 게르만족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제국에 인력을 공급해주고 제국을 경모했던 게르만족이 아니었더라면, 제국의 서부 경계는 이미 3세기에 붕괴했을 것이 분명하다.[25]

즉, 처음에 게르만족이 로마에 들어왔을 때는 "내 밥그릇"이 아니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게르만족이 로마에 정착해 군역도 하고 농경도 하며 살아가는 사이 게르만=로마, 다시 말해 게르만족 입장에선 "내 밥그릇"이 된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내 것이 아니라면 빼앗으려 들거나 아니면 그게 망하거나 말거나 나한테 피해 없다면 내버려두고 말지만 그게 곧 내 것이 된다면 더더욱 애착을 가지게 되어 관리하려고 들게 된다. 이것과 마찬가지인 상식적 논리이다. 그런데 게르만족이 이제 자기와 동일시된 로마 제국을 즉, 자기 밥그릇을 지키지 않고 망하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게르만족 입장에서 로마 제국이란 맨 처음 이주해 들어갈 당시 초창기에는 남의 나라였겠지만 시간이 지나 이젠 지켜야 될 나의 조국, 내 나라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라틴족으로 구성된 군단병들이 라틴족에서 게르만족으로 변화되면서 엄격한 기강과 국가에 충성을 보이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는 건 "전통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냥 "틀린 얘기"다. 군단병의 구성 다수가 "이탈리아인"이 아니게 된 시기는 이미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부족 단위로 고용되는 게르만족이 무시할 수 없게 통제 불가능이 되는 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에서부터의 일이다.

후기 로마군의 전술 변화는 게르만족이 로마군의 주력취급을 받으면서 로마인들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보이기가 어려운 게 결코 아니라, 역으로 "로마군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게르만족이 보여줬고, 이에 대한 대응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게르만족이 야만적이고 무식해서가 아니다.

사치에 퇴폐에 빠져 서로마가 게르만족 용병들을 쓰다가 무너졌다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오류로, 역사와는 무관한 얘기다.

이 시기 게르만족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기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가 있다.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재미있는 게르만의 풍습이 하나 나오는데, 전사의 키와 힘이 동정을 유지하는 기간에 비례해서 커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일찍 잃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도 했고, 성경험이 늦을수록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26] 그들 사이에서는 가장 오래 동정을 지킨 자가 가장 큰 칭찬을 받았다(...). 토이토부르크 승리의 비결 대마법사, 대현자 이런 풍습은 켈트족에게도 있어서 동정인 사람을 우대했다고 한다.

한편, 서로마 각지에 정착하고 나서도 6세기의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상황이라 주화, 직함 등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제국의 권위를 일정 부분 빌렸었다. 의존도가 가장 약했던, 즉 반대로 독립성이 가장 강했던 것은 반달 왕국이었는데, 동서로마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이겼으며(특히 468년의 소위 Cape Bon 전투에서 1천 척도 넘는 동서로마 합동 해군을 꺾었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또한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과 가장 물리적으로 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이탈리아 및 달마티아의 오도아케르 정권 및 동고트 왕국은 그 반대였는데, 구 서로마의 중심지라 현지의 구 서로마인들의 영향력이 다른 곳보다 더욱 강했고, 또한 게르만 국가들 중 가장 콘스탄티노플과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탓에 동로마 정부의 비위를 완전히 거스르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로마와의 결전이 임박했거나 혹은 이미 전쟁 중이었던 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차이가 확 드러난다. 반달의 겔리메르는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폐위된 힐데릭을 복위시키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둘 다 거절하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것은 우리 내부의 문제다. 군주라면 누구나 자기 일에 신경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항변하여 당신이나 나나 같은 군주라는 독자의식을 드러냈으나, 동고트의 토틸라와 테이아는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차마 당장 침략해온 적군의 수괴(...)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의로 주화를 발행할 수는 없으니) 명목상으로 제국의 산하 종족 혹은 세력으로서 조약/동맹(foedus)을 제국과 최초로 맺었던, 즉 동고트 왕국이 세워지던 493년 당시의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를 주화에 꼬박꼬박 넣어서 발행했다.[27]

4.3.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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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인의 정착

8세기와 11세기 사이에는 북유럽에서 온 게르만족인 노르드인(바이킹)들이 전 유럽을 휘저었다. 게르만족은 원래 북유럽에서 왔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동족간의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미 유럽 각지에 자리잡고 기독교화된 게르만족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북유럽의 게르만족은 애당초 동질성이 거의 없어진 남남이나 다름없었다.

잉글랜드에선 바이킹들이 지배시기인 데인로(Danelaw)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에는 바이킹 지배가 두 번 있었는데, 9세기에는 웨식스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바이킹에게 정복당하고, 11세기에는 크누트 대왕이 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덴마크, 노르웨이와 합하여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을 세웠다. 이 시기 영어는 같은 게르만계 언어라는 동질성 때문에 북게르만어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북게르만계 어휘가 영어에 남아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롤로가 북쪽 해안에 정착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이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프랑스의 문화를 받아들여 프랑스화하였고, 노르만족이라 불렸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인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를 정복하는데, 노르만족까지 바이킹으로 친다면 잉글랜드는 총 3번에 걸쳐 바이킹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노르만 족 정복자인 로베르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에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더 나아가 노르만 족 기사들은 십자군 전쟁안티오키아 공국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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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기아인이 세운 루스 카간국

한편 동쪽으로 간 바이킹들은 우크라이나 일대를 정복하였고, 정복자 류리크의 후손들은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바이킹들은 더 남하하여 동로마 제국에서 바랑인 친위대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노르망디 공국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에는 앵글로색슨족 출신의 바랑인 친위대원도 늘어났다.

4.4. 근현대

옛날에는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있었지만, 후대에 프랑크 왕국 등 통일 국가가 생기면서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먼 타지에 왕국을 따로 차린 경우 현지인들과 동화되어 사라졌다. 현지인들에게 공격당하여 멸망하거나, 점령지에서 철수한 나라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이킹들이 오늘날의 캐나다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지역을 침공하여 세운 식민지인 빈란드[28]노르망디 공국잉글랜드 침공 직전에 잉글랜드를 공격한 노르웨이가 대표적이다[29]. 그래도 프랑크 왕국과 독일 왕국에선 부족 공국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언어나 지명 측면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게르만 부족들은 아래를 들 수 있다.
중세가 끝나고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독일 북부,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서유럽 북부, 북유럽의 게르만 국가들이 각각 개신교 교파들을 국교 혹은 그에 준하는 문화적 기반으로 삼게 되었고[30] 이후에도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게 되면서 (북부)게르만족 = 개신교라는 인식도 생기게 되었다.[31] 한편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독일의 바이에른 주, 벨기에, 스위스의 아펜첼이너로덴 주 같은 경우 국왕이나 영주가 종교개혁 세력과 반목한 역사적 이유 등으로 인해 가톨릭이 주류인 편이다. 물론 현재는 유럽의 전체적인 추세가 그렇듯 세속화가 많이 진행된 데다가 전통적인 개신교 다수 지역인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비율이 역전되어 종교로 스테레오 타입을 적용하긴 여러모로 난점이 많다. 그러나 문화적인 부분에서는 여전히 구별이 가능한데, 개신교가 주류였던 지역은 전통의상이나 요리 등이 가톨릭 지역보다 대개 간소한 편이다.

5. 오해

5.1. 바이킹?

바이킹은 노르드족(북유럽에 살았던 게르만족)이다. 즉, 게르만족 일부가 바이킹이 된 것이다. 게르만족(AD 1세기 이전 ~ BC 8세기 활동)은 바이킹(BC 8~11세기)보다 훨씬 먼저 등장했다. 게르만족은 서유럽과 동유럽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미국의 건국이나 대영제국 시기의 식민지 정책 등으로 인해 앵글로 색슨족과 바이킹과 같은 게르만족들이 침략자에다가 야만인이라는 이미지로 알려져있는데 바이킹은 게르만족의 하나일 뿐으로 모든 게르만족이 북유럽에서 남하했거나 바이킹인 것은 아니다.

5.2. 독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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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은 게르만족의 일부일 뿐이지, 독일인이 게르만족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German'이라는 영어 표기 때문에 게르만족을 '독일 민족'과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로는 독일인(German)과 구분하여 게르만 족을 Germanic이라 부른다. 물론 이탈리아어라틴어에서 독일을 Germania라고 부르니 Germany라는 영어 표현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독일어프랑스어에서 독일을 부르는 명칭인 Deutschland와 Allemagne은 영어 이름 Germany보다는 게르만과 더 명확하게 구분된다.

영어 표현과는 별개로 "게르만족은 원래 현대의 독일 지역에서 살았으니 독일이 게르만족을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위에서 서술했듯 원래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유틀란트 반도에서 기원하였다. 굳이 출신 지역으로 따지자면 북유럽노르드인들이 원조 게르만족에 가깝다는 것이다.[34][35] 게다가 독일인들의 경우 게르만족 혈통만 있는 게 아니다. 게르만족 남하 이전에는 켈트족이란계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로마 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현 독일 중남부 지역은 로마의 라틴족도 많이 진출하였다. 또한 동방식민운동으로 원래 서슬라브족, 발트족이 살던 엘베강 동쪽이 독일화됨에 따라 서슬라브족이나 발트족 혈통도 있다.

사실 독일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로마군단에 맞선 토이부르크 숲의 게르만족에서 찾게 된 것은 근대부터의 일이고, 근세까지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란 명칭에서처럼 로마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먼 변방의 촌놈이라 여겨지던 프로이센이 폭풍성장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후예인 오스트리아 제국을 배제한 독일통일을 달성하고 적극적인 독일민족주의를 밀게 되면서 정체성이 구체화된 것이다.

다만 근대 이후 민족주의로 인해 민족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그 이전에는 민족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인터넷상의 일부 주장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근대 민족주의 열풍으로 민족 정체성이 강화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지역별 차이가 있을지언정 명백히 존재했다. 유럽의 경우 중세 시대에는 민족 정체성 위에 기독교도라는 더 상위의 정체성이 존재했고 또 같은 민족 내에서도 부족, 지역간의 정체성이 강하게 있었지만, 민족적, 언어적 정체성도 분명히 존재했다. 중세 시절부터 독일인들 사이에서 그들만의 나름대로 분명한 민족 정체성이 있었다는 점은 역사학계에서도 상당부분 인정된다. 9세기 프랑크 왕국이 분열한 후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지만, 독일인들은 카롤링거 가문의 대가 끊기자마자 918년 국명을 동프랑크 왕국에서 독일 왕국(Regnum Teutonicum, Kingdom of Germany)으로 바꾸었다. 이후 독일 왕국이 확장되는 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섰으나, 근본적으로 게르만족 고유의 전통과 관습을 중시했다. 몇몇 게르만의 풍습을 로마에 맞게 바꾸기도 했지만 주요한 관습들은 게르만족의 전통을 따랐다. 살리카법은 물론이거니와 황제 선출 방식 또한 고대 로마 제국과 달리 게르만족이 부족 사회 시절 족장을 뽑던 방식을 계승 발전시켜 신성 로마 제국만의 선제후 제도를 완성했다. 제국의 근간이 되는 군사 제도 역시 고대 로마 제국의 레기온과는 완전히 다른 게르만족 부족 전통에서 발전된 종사제에 기반한 봉건 질서에 따른 군사 제도를 확립했다.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독일 왕국은 여전히 존재하며 같은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도 독일이 이탈리아, 보헤미아와 명백히 다르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말이나 제도에서도 크게 구체화되어 있는 부분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표면적으로 세계 제국을 표방했고, 독일 말고도 이탈리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등을 제후국으로 두었지만, 이탈리아인 등은 사실상 이등 국민에 해당했고, 독일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일등 국민이었다. 일단 황제는 독일 귀족만 될 수 있었고, 황제를 뽑는 선제후 역시 독일 귀족들만 될 수 있었다. 처음에 황제를 뽑던 선제후는 독일 5대 부족 공국 공작들이었는데, 나중에는 독일의 공국들이 쪼개졌지만 처음에 황제를 뽑았던 5대 부족 공국은 사실상 거의 독일의 전 부족을 망라했다. 반면 이탈리아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신민임에도 황제 선출에 전혀 관여할 수 없었고 독일에서 파견된 제후나 그 대리인들이 간섭하지 않고 이탈리아인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면 다행인 처지였다. 보헤미아인들은 나중에 선제후 투표권을 얻었지만, 보헤미아 왕국이 독일 왕국 아래 제후국이 되는 형태였다. 즉 보헤미아왕은 독일왕의 봉신이었고, 보헤미아왕은 독일의 다른 공작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제후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철저히 독일인들에 의해 굴러갔고, 15세기에는 여전히 이탈리아나 다른 민족들이 제국에 상당히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공식 국명을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으로 확정했다.

6. 게르만족 위주의 국가

6.1. 서게르만족과 북게르만족이 각각 주류가 아닌 나라에서 북게르만족과 서게르만족이 각각 분포하는 지역

7. 고대 게르만족 인물

7.1. 서로마 제국의 게르만족 인물들

8. 게르만족 관련 문화



[1] 다만 모든 스위스인이 게르만족은 아니다. 스위스 내에서도 독일계는 게르만족이고 프랑스계와 이탈리아계와 로만슈계는 라틴족이며, 이렇게 언어가 다양하다 보니 일부 스위스 민족주의자들은 정식 국명을 Helvetica라고 표기하는 등 현대 스위스인이 켈트계 민족인 헬베티족의 후손임을 강조하여 켈트족 정체성이 강하다.[2] 슬라브족도 지역에 따라서 흑발이나 갈발을 띠는 사람도 더러 있다. 특히 불가리아,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등 발칸반도 국가들의 경우 슬라브계 민족이면서도 그리스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남유럽 국가들이나 인도처럼 어두운 머리색, 눈색, 검은 피부를 띠는 사람도 많이 있다.[3] 맬린공주는 2차 창작물이나 동화책들마다 달라서 흑발 또는 금발로 반반씩 그려지기도 하지만 백설공주는 거의 십중팔구 흑발로 그려진다.[4] 마찬가지로 라틴족, 슬라브족, 켈트족 등의 유럽의 다른 주류 민족집단들도 유전적으로 항상 일치하는 씨족 집단의 개념이 아니었다. 이는 비단 이쪽뿐만이 아니라 고대의 대부분의 민족집단들이 다 이랬다. 한민족 역시 마찬가지.[5] 오히려 진짜 기마민족은 게르만족의 동쪽인 동유럽에서 살았던 사르마티아족이다.[6] 굳이 비교를 하자면 게르만족은 동아시아의 말갈족, 여진족, 숙신퉁구스인들과 가장 유사하다. 순수한 유목민족인 몽골인이나 튀르크족과 유사했던 고대~중세 초기 유럽의 민족은 마자르족이다.[7] 단,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는 비교적 적당주의라는 이미지가 있다. 상대적으로 군국주의 국가였던 프로이센이 다스렸던 북독일 지방이 그런 이미지가 더 강하다.[8]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의 비종교화는 가톨릭과 개신교 공통의 골칫거리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개신교 측에서 더 격렬하게 발생하는 중.[9] 다만, 이 법은 사실상 소멸했다가 프랑스에서 몇백년 만에 재발굴해서 다시 나오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법도 모든 게르만족들이 가지고 있던 법은 아니라서 잉글랜드 왕국이나 북게르만계 국가들은 여왕이나 여성이면서도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여럿 나온적 있다.[10] 사실 꼭 1960년대에 처음 생긴 현상은 아니고 1910년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의 혼란상이 이어지며 출산율이 크게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한동안 출산율이 크게 반등하다가 196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11] 스웨덴독일 둘 다 복지정책은 매우 잘돼있어 아무리 경제적으로 몰락해도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거나 집에서 굶어죽는 일은 없지만, 독일의 경우, 노동자들의 급여에 관한 법률이 매우 막장이라서 최저시급도 안되는 돈을 받으며 일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상황이다.[12] 남유럽 사람들은 오히려 한국인 등 동아시아인과 비슷한 때도 있고 상기한 수업 거부의 상황에서 대놓고 환불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냥 돈을 버리더라도 수업을 째고 인생을 즐길 만큼 태평한 때가 많다.[13] 다만 국내에서는 아라우시오 전투의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고대 로마사를 다룬 베스트셀러인 로마인 이야기에서 아라우시오 전투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로마인 이야기가 출간되기 전의 국내에서는 로마사나 게르만족 역사를 비롯한 고대 서양사에 대한 지식 자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실정이었다.[14] 왜 이들이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았느냐면,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로마에 대한 정복과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한 곳에서의 정착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의 게르만족은 유목민이 아니라 농경민이었고, 따라서 유랑 생활을 오래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선주민과의 무력 충돌이 있거나 말거나 정착지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필요한 전쟁은 부담되는 일이었다.[15] 영어의 뿌리[16] 네덜란드어의 뿌리[17] 표준독일어의 뿌리[18] 알레마니족은 프랑스어에서 독일을 칭하는 알마뉴의 어원이 되었다.[19] 다만 게르만족이 열세이다 보니 로마와는 전면전으로 나가지는 못했고 주로 게릴라전으로 나갔다. 왜냐면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 간의 인구 격차가 매우 컷다. 일례로 로마는 인구가 6천만의 대제국이었지만 게르만족은 대이동이 시작되는 시기에도 인구가 100만도 안되는 75만에 불과했다.[20] 즉 세습이 어느 정도 인정되되, 절대적인 원리가 아니라는 면에서 로마 제국과 거의 같다.[21] 예나 지금이나, 게르만족이란 인도유럽어족게르만어파 계열 언어를 쓰는 유럽계 민족들을 싸잡아 부르는 말이다.[22] 이런 일은 꼭 전근대 시대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몽골도 그랬다.[23] 물론 이 때 로마의 군사기술, 정치조직 등을 배워서 돌아가고 나서는 그것을 게르만 사회에 접목시켰고, 이게 세대마다 반복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며 게르만 사회가 로마 사회를 점점 따라잡게 되었다. 이 때는 현대의 무어의 법칙처럼 로마가 기술발전에 박차를 가해서 더 기술력의 차이를 벌릴 수도 없는 전근대였다.[24] 동맹시 전쟁 직후 이탈리아 자체가 로마를 수도로 하여 해외 식민지를 거느리는 '본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기 이전, 라틴/이탈리아 동맹시들에서도 이와 같은 과정으로 상류층들은 로마에 포섭되어 친로마 성향이었던 반면, 로마가 각지에서 벌이고 다니는 전쟁에 그저 끌려다니던(작전권, 군령권, 외교관계 등은 동맹시에 전혀 없었고 로마가 독점했다) 일반인들은 반로마 성향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25] 애초에 게르만족이 없으면 제국의 서부 경계가 위험할 이유 따윈 없었을 거라는 얘긴 근거가 없다. 이런 말이 실제로 가능하려면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족이 없어진 뒤 게르마니아가 무인지경으로 남아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게르마니아 같은 거대한 땅덩어리가 무인지경으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게르만족이 없어졌다면 그 자리에 슬라브족이나 훈족 같은 또다른 야만인들이 빈 땅을 채웠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로마를 멸망시킨 건 게르만족이 아니라 슬라브족이나 훈족이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게르마니아의 모든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부족들도 많았다. 후기에 게르만족들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자국 내 게르만족의 공이 매우 컸다.[26]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지하게 부연하자면, 유전이나 섭식상의 이유로 2차 성징이 빨리 나오면 성장판이 일찍 닫히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동정을 지키는 것 내지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과 힘 또는 집단이 높이 평가하는 성질을 습득하는 것이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해 찾기 어렵지 않다.[27] 움베르토 에코 편저 중세 I의 60p에는 ''왕국들'은 곧 자국의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하지만 황제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제국과 갈등을 빚을 때에도 왕의 이름을 동전에 넣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현재의 제국 통치자를 과거의 통치자로, 예를 들어 최초로 '포이두스'(foedus)를 맺었던 황제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와 테이아가[101] 아나스타시우스의 이름으로 대체한 솔리두스 금화가 바로 그러하다.'[28] 래브라도 반도에 있던 바이킹들의 거주지 또는 전초기지였던 랑스 오 메도스현지 원주민들에게 함락당하면서, 바이킹계 이주민들이 모두 북아메리카 본토를 떠나 그린란드로 철수해버렸다.[29] 당시 노르웨이의 왕인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와중에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침공이 실패로 끝났다. 다만 이쪽은 현지인들도 게르만족이였다.[30] 독일 북부와 북유럽은 루터교회, 잉글랜드성공회, 네덜란드스위스개혁교회.[31] 사실 유럽에서 20세기 초까지 개신교가 우세했던 지역에는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헝가리 동부 등 게르만족이 주류 민족이 아닌 지역도 포함되긴 한다.[32] 이 시절을 다룬 드라마가 바로 영드 '라스트 킹덤'이다.[33] 유럽에서 튀르크 버전 고트족이라고 볼 수 있는 케이스가 불가리아헝가리에 있는데, 해당 국가들은 그 기원이 튀르크 문화권에 있거나 그렇게 추정되고 있으며 각국의 주민들 또한 자신들이 튀르크 제민족의 후예라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언어학적으로는 더 이상 튀르크 문화권이 아닌 상황이다. 불가리아는 불가르 칸국의 후신인 불가리아 제1제국이 기원일뿐더러 불가리아 제1제국 초기에는 분명 튀르크계 국가로서의 성향이 강했고, 헝가리는 그 기원인 마자르족이 우랄화된 훈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아직까지도 적지 않게 남아있으며, 불가리아와 헝가리 모두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진짜로 튀르크 문화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국가 모두 더 이상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언어가 주류가 아닌 상황인데, 현대 불가리아어인도유럽어족 슬라브어파 남슬라브어군으로 튀르크어족과는 계통적으로 완전히 다르며, 그나마 튀르크어족과의 거리가 가까운 편인 현대 헝가리어조차도 튀르크어족이 아닌 우랄어족이다.[34] 덴마크어에서 독일을 가리키는 단어가 '튀스크란'(tyskland)인데, 유틀란트 반도 최북단을 가리키는 '튀'(thy)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곳에 살던 부족들이 남하하여 지금의 독일을 세웠다는 의미.[35] 굳이 따지자면 유틀란트 반도의 남부가 독일 땅이긴 한데 독일 전체 면적의 5% 수준이다(...) 인구도 함부르크까지 포함해야 독일 인구의 6% 정도에 불과하다.[독일어권] 서게르만어군 언어인 독일어모국어로 사용하는 독일어권 국가이다.[독일어권] [독일어권] [독일어권] [40] 다만 스위스 자체가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며 스위스 서부지역은 프랑스어, 남부지역은 이탈리아어, 동부와 내륙, 북부지역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다언어 국가이다.[41] 아일랜드는 대체로 켈트족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아일랜드도 잉글랜드 못지않게 바이킹이나 노르만족앵글로색슨족이 많이 이주해 온 국가 중 하나다. 언어학적으로도 이미 전 국민이 게르만어파 중 하나인 영어를 사용하니 어찌 보면 게르만족 국가가 맞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잉글랜드계 아일랜드인도 많긴 하지만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은 켈트에 가까운 편.[42] 앵글로색슨족도 게르만족에 포함된다. 언어학적으로만 따지면 영어가 주류 언어로 되어버린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도 게르만족에 포함시킬 수 있다. 한편 잉글랜드 주민들도 앵글로색슨족과 켈트족, 노르만족 등의 혈통이 섞여 있다. 잉글랜드 주민의 혈통에서 앵글로색슨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1/3 정도라고 한다.[43] 스코틀랜드는 켈트계 국가이기도 하지만 글래스고-에딘버러 일대 로우랜드 지방은 중세 전성기(High Middle Ages)부터 켈트계의 영향력보다 잉글랜드나 노르망디에서 올라온 게르만계 세력들의 영향력이 더 컸다. 14-15세기쯤 되면 이 저지대 지방은 확고하게 현대까지도 다른 독자적 언어냐, 방언이냐 말이 많은 스코트어가 대다수 언어가 됐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언어와 상관없이 켈트족의 정체성이 강한 편이다.[독일어권] [45] 다민족 국가지만 건국의 주체가 영국에서 이주한 앵글로색슨계 정착민들이고, 그외 독일계, 네덜란드계, 스웨덴계, 덴마크계, 노르웨이계, 스위스계 등 게르만계 백인이 미국내 민족들 중 가장 많다. 세계 3위 인구대국인 점을 감안한다면, 세계에서 게르만인이 제일 많은 국가다.[46] 전통적으로는 동게르만족으로 분류되어 왔으나 이들의 언어는 서게르만어파인 고지 독일어와 같은 계열이다.[47] 노르만족이라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르만족은 프랑스화된 노르드인을 칭한다.[48] 어디까지나 정체성의 측면으로, 생물학적으로 유전자가 단절됐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서고트족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와 그리스(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함)에, 원거주지인 크림 반도에 남은 크림 고트족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내지는 크림 타타르족과 튀르키예인(후손들 중 일부가 러시아의 지배를 피해 크림 반도를 떠나 지금의 튀르키예 땅으로 망명)에, 반달족은 북아프리카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에 동화되었다. 서고트족 중에서도 오늘날 프랑스 땅이 된 서고트 왕국 북동쪽 변방에 살던 이들은 프랑스에 동화되었고, 서고트 왕국 멸망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들은 훗날 후손들이 무어인들을 따라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북아프리카로 이주하면서 북아프리카 아랍인의 조상들 중 하나가 되었다. 반달족 중에서도 사르데냐시칠리아에 살던 이들은 이탈리아에, 코르시카에 살던 이들은 프랑스에 동화되었다. 북유럽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기트족은 북게르만족이나 핀인에 동화되었다.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한 후 역시 이탈리아에 동화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여기서 절멸이라는 표현은 절대로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다.[49] 네덜란드계가 주류인 네덜란드 문화권이다. 다만 일부 네덜란드계 주민들은 과거에 있었던 벨기에의 네덜란드어 배제·프랑스어 우대 정책 때문에 프랑스계 벨기에인에 동화되기도 했다.[50]독일 제국령 지역이라서 독일어를 쓰는 독일계 주민들이 많다.[51]룩셈부르크 공국령 지역이라서 룩셈부르크어가 쓰이기도 하나, 현재는 프랑스어권에 잠식된 탓에 룩셈부르크어 사용이 해당 지역에서 완전히 없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52] 앞의 두 지역은 구 오스트리아령 지역이라서 오스트리아계 주민들이 살며, 뒤의 두 지역은 독일계 스위스인 혈통의 주민들이 산다.[53] 독일어의 페르젠탈 방언이 많이 쓰이던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페르젠탈 방언 화자가 약 2200명에 불과해서 페르젠탈 방언이 사실상 사어가 될 위기에 놓인 상태다.[54] 독일과의 접경지라서 독일계 주민들이 소수 거주한다.[55] 프랑스라는 국명 자체가 프랑크족에서 유래했지만 현대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라틴족(남부)이나 켈트족(북부) 정체성이 더 강하다. 언어로 보면 라틴계지만 혈통상으로는 프랑크족 혈통이 많이 섞였다.[56] 프랑스에 병합되기 전에는 반은 프랑스어권이고 반은 독일어권인 지역이었으며, 독일 제국에 병합된 후에는 훗날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다시 프랑스령이 되기 전까지 독일 본토인이 이주해오기도 했다.[57] 1930년대까지 네덜란드어가 통용되던 마을이었다. 본래 플란데런의 일부였기 때문이다.[58] 됭케르크처럼 본래 플란데런의 일부였으며, 그에 따라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소수 거주한다. 그리고 지리상 잉글랜드와 가깝다 보니 백년전쟁의 영향으로 1347년부터 1558년까지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으며, 프랑스가 탈환한 후에도 잉글랜드와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오늘날 채널 터널의 프랑스 쪽 출입구도 칼레에 있음), 잉글랜드계 주민들도 소수 거주한다.[59] 됭케르크와 칼레처럼 플란데런의 일부였기 때문에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거주한다.[60] 칼레와 더불어 잉글랜드인들이 많이 이주해온 곳이며,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세워진 이래로 사실상 잉글랜드와 한 나라였던 역사가 있다.[61] 벨기에의 뤽상부르와 더불어 프랑스어권 내 룩셈부르크어권 지역이다.[62] 동방식민운동,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소수의 독일계 주민들이 산다. 폴란드어의 실롱스크 방언 또한 독일어의 영향을 받았다.[63] 크라쿠프 대공국 시절에 이주해온 오스트리아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64] 해당 지역들은 헝가리 내에서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계 주민들의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65] 크로아티아에서 오스트리아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66] 동방식민운동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소수의 독일계 주민들이 산다. 다만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종식을 각각 거치면서 조상의 나라인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는 독일계 주민들이 속출한 탓에 트란실바니아의 독일계 주민 인구가 급감했다. 현재는 루마니아가 유럽연합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한 것의 영향으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트란실바니아 독일인들이 루마니아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67] 알타이 지방과 옴스크 주는 독일계 러시아인(정확히는 볼가 독일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독일인 민족구역이 설정되어 있다.[68]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소련으로 넘어간 후 명칭이 칼리닌그라드로 바뀌게 되었다. 오늘날 칼리닌그라드 지역의 독일인들이 대부분 본토로 추방되었고 그나마 남은 독일인들도 러시아계 이주민들에게 혼혈,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공식 통계상으로 독일계 인구가 0.6%로 나오는 등 해당 지역에서 독일인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의외로 큰 규모의 독일인 마을이 존재한다. 오죽하면 칼리닌그라드의 독일계 주민들 사이에서 칼리닌그라드 인구의 0.6%가 독일계라는 통계 자체가 러시아 정부에서 칼리닌그라드의 분리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일부러 독일계 인구를 실제보다 축소하여 발표한 결과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69] 카자흐스탄에서 독일계 카자흐스탄인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들이다.[70] 키르기스스탄에서 독일계 키르기스스탄인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들이다.[71] 흑인(정확히는 흑인 하면 떠오르는 인종인 니그로이드가 아니라 남아공을 포함한 남부 아프리카에 많이 사는 카포이드)계 주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이지만 해당 지역에는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영국계 백인이 많이 산다. 남아공 자체가 4개 지역(케이프, 나탈, 트란스발, 오라녜 자유국)이 통합한 국가인 만큼 인종 구성이 다양한데, 더반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콰줄루나탈에는 영국계가, 구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주, 즉 오늘날의 림포포주, 하우텡주, 그리고 자유주에는 아프리카너계가 다수인 시골 지역들이 많다. 당장 하우텡주 주도인 프리토리아만 해도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너 백인이다. 그리고 남아공 서부 지역에는 흑인과 서게르만계 백인(보어인 또는 영국계)의 혼혈인 컬러드가 많이 산다.[72] 하르다프 주와 카라스 주는 나미비아에서 아프리카너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며, 에롱고 주와 코마스 주는 나미비아에서 독일계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그리고 에롱고 주와 코마스 주 또한 하르다프 주와 카라스 주만큼은 아니어도 아프리카너 인구가 많은 편이다.[73] 로버트 무가베의 백인 탄압으로 백인 인구가 거의 증발하다시피 한 짐바브웨에서 그나마 백인 인구가 많은 곳이다. 로디지아 시절부터 대대로 살아온 영국계 백인들이 대다수이지만 남아공에서 이주해온 아프리카너도 일부 존재한다.[74] 잠비아와 짐바브웨는 과거에 똑같이 로디지아라는 지명으로 불렸으며(잠비아는 북로디지아, 짐바브웨는 남로디지아), 영국계 백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 영향으로 현대 잠비아는 짐바브웨와의 국경지대에 영국계 백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75] 나미비아가 아프리카너 및 독일계 인구가 많은 나라인 관계로 해당 지역에 아프리카너와 독일계가 거주한다.[76] 보츠와나 내에서 백인(특히 영국계와 아프리카너) 인구가 많은 지역들이다.[77] 독일계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많이 산다.[78] 독일계 재세례파 신자들이 거주한다.[79] 라틴족인 스페인계 백인들도 많고 멕시코계 미국인이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경우도 있지만, 미국 본토에서 밀려나 멕시코로 이주해온 서게르만계 미국 백인후손들도 있다.[80] 해당 지역들은 독일계 주민들이 많아서 독일어가 쓰인다.[81] 독일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한다. 해당 지역은 독일계 인구가 많은 남아메리카 내에서 특히 독일계 인구가 많은 곳이다.[82] 독일계 주민들이 대표적인 소수민족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내에서도 특히 독일계 주민들의 인구가 많은 곳이다. 산타크루스 주는 독일 제국에서 이민온 독일인들의 후손이 많으며, 라팜파 주와 엔트레리오스 주는 러시아 제국에서 이민온 독일계 러시아인들의 후손이 많다.[83] 서게르만계 민족인 구미계도민이 거주한다.[84]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의 영향으로 해당 지역에 스웨덴계 주민들이 살며 이들은 스웨덴어를 사용한다. 특히 핀란드의 속령인 올란드 제도는 아예 스웨덴어만 공용어다. 핀란드의 다수종교가 루터교회인 것도 핀란드를 지배하던 스웨덴이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에서 루터교회로 개종한 것의 영향이다. 덤으로 우랄어족 계열인 토착 핀란드인 정체성을 가진 대다수 핀란드인들도 조상 대대로 이루어진 북게르만족과의 혼혈로 인해 북게르만족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85] 덴마크와의 접경지역이기 때문에 소수의 덴마크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86] 스웨덴령 포메른 시절에 이주해온 스웨덴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87] 노르망디와 아래의 채널 제도는 바이킹 출신인 롤로가 세운 옛 노르망디 공국의 영지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노르망디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유독 북유럽 색채가 강한 편이다.[88]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는 현재 스코틀랜드에 속해 있으나 원래 바이킹의 이주 이후 노르웨이의 영토였던 지역인데 15세기에 칼마르 연합의 이름하에 동군연합 관계인 덴마크가 정략결혼 지참금으로 넘겨준 곳이다. 채널 제도는 노르망디 공국의 영지였던 곳이고 현재도 영국 왕실령이다.[89] 서게르만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잉글랜드와 켈트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지도 북게르만족이 많이 이주해왔다.[90] 상술한 노르망디와 채널 제도처럼 노르만족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한다.[91] 콜라 반도에 있는 주이며, 노르웨이계 이주민의 후손인 콜라 노르웨이인이 산다. 하지만 이들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탓에 언젠가 지워질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다.[92] 이곳에 정착한 주민들은 대부분 옛 바이킹들의 후손이라서 키가 크고 금발벽안이 많다.[93] 북유럽과 유사한 기후 때문에 스웨덴계 미국인들과 노르웨이계 미국인들이 많이 산다.[94] 덴마크계 미국인들이 많이 산다.[95] 퀘벡 주에 많이 사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대체로 조상이 프랑스 북부 지역 출신인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라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에서 캐나다로 건너온 노르만족의 후손들도 많은 편이다.[96] 퀘벡 주와 온타리오 주는 스웨덴계 캐나다인들이 살고 있다.[97] 아이슬란드계 캐나다인들이 많이 거주한다.[98] 앨버타 주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는 캐나다에서 노르웨이계 캐나다인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99] 노르웨이계 호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들이며, 태즈메이니아의 경우 덴마크계 호주인들도 많이 거주한다.[100] 노르웨이계 뉴질랜드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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