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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1:55:40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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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The Battle of Stamford Bridge)
파일:Battle_of_Stamford_Bridge,_full.png
날짜
1066년 9월 25일
장소
잉글랜드 이스트라이딩오브요크셔 주 스탬퍼드 브리지[1]
교전국 노르웨이 왕국
오크니 백국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하랄 3세 하르드라다
토스티그 고드윈슨†
해럴드 고드윈슨
병력 규모 9,000명, 수송선 300척15,000명 이하
피해 규모 6,000명, 선박 다수 손실5,000명 이하
결과
노르웨이의 잉글랜드 침공 좌절
기타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의 잉글랜드 침공

1. 개요2. 배경3. 전투4. 전투 이후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1066년 9월 25일 잉글랜드 북부 요크에서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가 노르웨이의 하랄 3세와 토스티그에 맞서 싸워 승리한 역사적인 전투이다.

2. 배경

참회왕 에드워드가 명확한 후계자 지명없이 승하하자 못난 동생인 노섬브리아 백작 토스티그를 쫓아내고 모르카르(morcar)를 세워 지지를 받은 해럴드가 재빠르게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토스티그는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를 꼬셔서 함께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다른 배경은 해럴드 2세, 하랄 3세, 헤이스팅스 전투 문서 참조.

노르웨이의 하랄 3세는 함대를 크게 일으켜 300척이나 되는 선단을 모았다. 그리고 오크니 제도에서 증원군과 합류하고 9월에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해서 토스티그의 군대와도 합류했다. 약 7,000명에서 9,000명의 병력을 모은 하랄 3세는 여름 끝자락에 잉글랜드 북부 요크를 향해 오즈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9월 20일 요크 외곽에서 하랄 3세는 풀포드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머시아의 백작 에드윈과 그의 형제인 노섬브리아 백작 모르카르가 이끄는 잉글랜드 북부 군대를 격파한 후 요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상륙지인 리칼로 되돌아간 하랄 3세는 노섬브리아와 협상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잉글랜드 왕위 찬탈을 위한 지원과 요크셔에 더 많은 포로를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해럴드 2세는 허스칼(후스카를)과 전사들을 이끌고 주야로 달렸다. 그의 군대는 런던에서 요크셔까지 약 298km를 4일만에 주파해 9월 25일에 요크를 지나 노르웨이군과 접촉했다. 노르웨이군은 잉글랜드군이 코앞까지 와서 보일 때까지 그들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했다.

스탬퍼드 브리지의 정확한 위치나, 그곳에 실제로 다리나 마을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장소는 더원트 강과 옛 로마 가도가 있었던 Battle Flat이라고 한다.

3. 전투

스노리 스튀르들뤼손의 사가에 따르면 전투 직전에 잉글랜드 진영에서 이름모를 한 기병이 다가와 토스티그에게 하랄 3세 하르드라다에게 맞서면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토스티그는 그렇다면 내 형제 해롤드 왕은 하르드라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물었다. 기병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잉글랜드 땅 6~7피트. 그는 키가 크니까."[2]
그리고 잉글랜드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 기병의 용감함에 감탄한 하랄 3세 하르드라다는 토스티그에게 저 기병이 누구인 줄 아는가 물었더니 토스티그는 해롤드 2세 본인이라고 대답했다.

노르웨이군이 정확히 어디에 배치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투는 다리를 기점으로 나뉘는데, 기록마다 조금씩 달라서 잉글랜드군이 다리를 건너기 전의 싸움에서 하랄 3세와 토스티그가 죽었다고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잉글랜드군이 기습하자 노르웨이군은 빠르게 방어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대부분의 잉글랜드군이 도착하자 서쪽의 노르웨이군은 죽거나 다리 너머로 도망쳤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좁은 다리를 건너는데 시간을 잡아먹어서 진군이 지연되고 있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거인 도끼병이 홀로 다리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혼자서 40명의 잉글랜드군 병사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그러자 잉글랜드군은 호빗처럼 반쪽짜리 통에 올라타 강물을 타고 내려가 다리의 널판지 사이로 창을 찔러넣어 그 도끼병을 쓰러뜨렸다.[3] 그 동안 노르웨이군은 방패벽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향해 잉글랜드군이 쏟아져 들어와 돌격했다. 양측은 수 시간 동안 격렬하게 싸웠지만 갑옷을 버린 노르웨이군이 불리해졌다. 곧 노르웨이군이 흐트러지자 방패벽은 무너졌고 결국 측면이 포위되어 하랄 3세는 목에 화살이 꿰뚫려 죽고, 토스티그도 죽었다.

전투 후반에 리칼을 지키고 있었던 하랄 3세의 사위인 외스테인 오레가 이끄는 함대가 지원을 와서 반격했고, 그 반격이 잠시나마 잉글랜드군을 저지했지만 곧 압도당하여 오레도 죽었다.

결국 노르웨이군은 패배하여 도주했다. 사가에 따르면 잉글랜드군에 쫓길 때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고, 수 많은 사상자로 인해 50년 동안 그 자리에 백골이 남았다고 한다.

4. 전투 이후

해럴드 2세는 전사한 하랄 3세의 아들인 올라프와 오크니 백작 폴, 그리고 살아남은 노르웨이군과 강화했는데, 그들은 떠난 이후 다시는 잉글랜드를 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노르웨이군의 생존자들은 24척 밖에 남지 않은 배로 돌아갔는데 이 귀환길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오크니 제도로 철수해서 겨울을 보냈고, 다음해 봄에 올라프는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결국 노르웨이는 올라프와 그의 동생 망누스가 왕위를 두고 벌인 싸움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 3일 뒤인 9월 28일.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서식스의 페번시 만에 상륙했고, 해럴드 2세가 이를 요격하기 위해 또다시 남쪽으로 달려갔다.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3주가 안된 1066년 10월 14일에 해럴드 2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4]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를 기념하는 노르웨이 민요가 있다.#

5. 대중매체


[1] 영국 북런던에 위치한 스템퍼드 브리지와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상관없다.[2] 즉 해롤드 왕이 하랄 3세 하르드라다에게 줄 수 있는 땅은 약 2m 길이의 무덤 자리밖에 없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죽기 싫으면 꺼져라".[3] 이것도 판본에 따라 다르다.[4] 이 노르망디의 기원이 프랑스 땅에 정착한 바이킹이기에 이들 역시 바이킹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사실 몇 세대가 흘러 사실상 완전한 프랑스인이 된 상태였기에 프랑스인으로 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