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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30 22:22:55

홍목

파일:홍목.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오야마 아쓰시(大山穆)
필명 오야마 유키노부(大山幸伸)
경문(敬文)
본관 부림 홍씨(缶林)[1]
출생 1920년 7월 15일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2] 910번지[3]
(現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910번지)
사망 1982년 1월 18일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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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목은 1920년 7월 15일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에서 아버지 홍형원(洪亨元, 1899 ~ 1966. 8. 21)[4]과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1900 ~ 1988. 8. 7)[5]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도 오모리(大森)구 미나미센조쿠(南千束)정에 거주했다.

그는 고학으로 도쿄부립제7중학교(東京府立第七中學校)[6]를 졸업할 쯤에 학우와 함께 히타치 제작소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받고 취업에 실패하였다. 이때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을 실감하였으며, 그 뒤 주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병약한 신체로 학업을 이어나가기가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인 여성과의 결혼에도 차질이 생기는 등 여러 악재에 시달렸다.[7]

그러던 중 그는 우선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것을 결심하고 고지마치구(麴町區) 구단상(九段上) 소재 고난(興南)학원에 입학하여 베트남어를 공부하던 중, 우연히 당시 베트남어 교사로 근무하던 베트남인 응오반민(Ngô Văn Minh, 吳文盟)에게서 베트남 민족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해 들었다. 또 응오반민 역시 베트남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애국지사인 것을 알게 되자,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베트남 민족운동의 연구에 몰두하여 그 투쟁 경력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조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를 포섭하고 그 중심이 될 만한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스승으로부터 입수한 베트남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의 저서 몇 권을 참고하여, 베트남 독립운동의 상황을 내용으로 한 책을 '오야마 유키노부(大山幸伸)'이라는 가명으로《印度支那動乱四十年史(인도차이나 동란 40년사)》[8][9]를 간행하고 이를 학생 및 지식층에 배포하여 독자를 규합할 것을 추진하였다.

이에 1943년 1월경 이 책을 간다구(神田區) 소재 군사교육출판사(軍事教育社)를 통해서 출판하여 일본 전역의 서점에 판매하고, 그해 11월 하순 약 2백부씩을 간다구 소재 조선인 식당인 흥아(興亞)식당·산해장(山海莊) 식당 등에서 조선인 손님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동지를 물색하여 마침내 오무라 마쓰시(大村松市)·김정웅(金正雄)·도요야마 히사오(豊山久雄) 등을 동지로 포섭하기에 이르렀다. 홍목은 자신의 숙소 등지에서 이들과 종종 만나 서로 민족적 열의를 드러내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독립운동 방침을 의논하고 동지 획득 및 포섭에 힘썼다.

이들이 의논한 사항과 독립운동 방침은 다음과 같다.
※ 운동 방침
이렇듯 이들은 종종 회합하여 협의 및 논담을 거듭하면서 서로 민족적 결의를 공고하게 하는 한였으며, 김정웅은 조선으로 귀국해서 또는 일본 본토 등지에서 하루카 다쓰오(東香達夫) 외 6명에 그 출판물을 배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동지로 포섭하였으며, 오바야시 마쓰시(大林松市)는 도요야마 히사오(豊山久雄) 외 몇 명을 지도하여 공감을 얻고 동지들의 회합에 참가시키기도 했다.

결국 홍목을 비롯한 관계자 4명은 1944년 4월 1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11월 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관할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1945년 3월 미 육군 항공대도쿄 대공습에 의해 경찰서가 파괴되면서 감독이 소홀해진 틈을 타 지하방공호를 탈출하여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귀국하였으며, 1982년 1월 18일 별세하였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1] 대율파-서면(西面)파 25세 흠(欽)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4촌 형 홍철진(洪喆鎭, 일명 홍덕흠(洪德欽), 1914. 4. 8 ~ ?), 4촌 남동생 홍찬흠(洪贊欽, 1925. 9. 7 ~ 1973. 5. 2), 홍희흠(洪憙欽, 1934. 1. 6 ~ ), 홍옥흠(洪玉欽, 초명 홍원옥(洪元鈺), 1938. 3. 20 ~ ), 홍세흠(洪世欽, 1945. 6. 29 ~ ), 홍관흠(洪寬欽, 초명 홍광옥(洪光鈺), 1951. 5. 16 ~ ), 4촌 여동생 홍옥흠(洪玉欽, 1935 ~ ) 등은 항렬자를 썼다.[2] 인근의 남산리·동산리와 함께 부림 홍씨 집성촌이다. 홍창식 전 육군고등군사법원장과 독립유공자 홍연흠·홍영우·홍창흠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이 지번은 부림 홍씨 애연당종중의 소재지이기도 하다.[4] 초명 홍향우(洪享佑).[5] 이태근(李泰根)의 딸이다.[6] 현 도쿄도립스미다가와 고등학교(東京都立墨田川高等學校).[7] 그러나 부림홍씨세보 상권 대율파 575쪽을 보면, 고쓰 쓰네요시(鄕津常吉)의 딸인 고쓰 지하루(鄕津千春, ? ~ 2001. 6. 4)가 그의 부인으로 기재되어 있어 결국 성혼한 듯하다.[8] 부록에 '학생독서조사표'라고 하여 학적 및 주소, 성명, 애독 희망서적, 기타 출판물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는 우편엽서 1매를 첨부하였음.[9] 현재도 일본의 고서방일본 국립 국회도서관 등에 책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