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6:30:59

박재근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영언(韺彦) / 운석당(雲石堂)
본관 밀양 박씨[2]
출생 1870년(고종 7) 1월 6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 도원동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3]
사망 1955년 5월 26일
묘소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마을
상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1년 4월 15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에서 아버지 유학(幼學) 박종항(朴宗恒)[4]과 어머니 창녕 조씨[5] 사이에서 태어났다.

큰외삼촌인 송와 조익승(松窩 曺益承)[6]의 영향으로 일찍이 만구 이종기(晩求 李種杞)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뒤 온릉 참봉(종9품)에 제수되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21번지 소재 조선 제11대 중종왕비 단경왕후 신씨의 능을 관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초대 대통령 이승만 등과 대한독립을 모의하였으며,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과 김창숙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영남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이들은 '파리장서'를 통해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고종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독립청원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박재근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그후 달성군 현풍면에서 영업중이던 약국의 문을 닫고 조랑말을 타고 고령군, 성주군, 경기도 경성부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였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5년 5월 26일 향년 85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촌 뒤편 아버지묘 좌편(左便) 건좌(乾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행로난 (行路亂) 등 한시집(漢詩集), 각종 의서(醫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문, 대구 한시(漢詩)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壯元)한 한시 등 20여점이 유고(遺稿)로 전해진다.


[1]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본명은 朴根으로 표기한다.[2] 충간공파. 족보명은 박진근(朴瑨根).[3]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김용판 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족보명 박인흠(朴仁欽).[5] 태복경공파 조석관(曺錫寬)의 외동딸로,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씨실마을 출신이다.파일:박재근외가족보.jpg[6] 조익승 또한 만구 이종기(晩求 李種杞)의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