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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19 15:32:54

채섬환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효진(孝進) / 후곡(后谷)
본관 인천 채씨[1]
출생 1874년 10월 3일
경상도 함창현 수하면 여물리
(現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여물리 423번지[2])
사망 1944년 10월 20일[3] (향년 70세)
경상북도 상주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33호
상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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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4년 10월 3일 경상도 함창현 수하면 여물리(現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여물리 423번지)에서 아버지 채세필(蔡世弼, 1843. 1. 21. ~ 1904. 1. 20.)과 어머니 평산 신씨(? ~ ?. 2. 23.)[4]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7년 7월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국권 회복을 위해 이강년 의진에 입대하여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충청북도 청풍군 북면 성내리(현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까치성[5]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중 이강년 의병대장이 중상을 입어 결국 체포되고 의진이 무너지자, 몸을 피해 각지를 전전하다가 곧 귀향했다.

그 뒤 문경군(現 문경시)에 거주하는 이강년 의병장 유족들의 생계를 돌보는 한편, 고향 상주군에 양파정(兩坡亭)을 짓고 서당을 열어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44년 10월 20일 별세했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2005년 7월 7일에는 상주시에서 이안면 소암리 550-3번지에 만세동산을 조성하고 채섬환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그의 유해는 당초 상주시 외서면 가곡리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11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소감공파(少監公派)-인천군 종파(仁川君宗派) 29세 환(奐) 항렬.[2] 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이 지번의 필지는 1913년 3월 20일 토지조사사업 당시로부터 줄곧 채섬환 자신의 소유였다.[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참조. 대전현충원묘적부, 인천채씨족보 6권 146쪽에는 9월 3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신재규(申在樛)의 딸이다.[5] 현재의 작성산(鵲城山). 이곳 사람들은 까치성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