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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9월 3일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 |
사망 | 1938년 8월 15일 |
전라북도 완주군 | |
본관 | 광산 김씨 |
서훈 | 1993년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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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는 1894년 9월 3일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부친 김영성(金永聲)과 모친 김해 김씨의 4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1대조가 한성우윤을 지냈고 8대조는 한성좌윤을 지낼 만큼 명문가였고, 서천군에서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 그의 부친 김영성은 옆집에 사는 이상재와 친분이 두터웠고, 이상재가 1904년 황성기독청년회에 가입한 뒤 종지리에 교회를 세웠을 때 자금을 대주고 논산의 한 고가를 헐어 목재를 배로 싣고 와서 교회를 세웠다.
김갑수는 이러한 부친의 밑에서 5살 때 천자문을 떼고 11살 때 사서삼경을 익혔으며, 13살 때인 1907년 이상재의 주선으로 상경해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다니면서 YMCA 영어학교에서도 수학했고, 이상재의 서울 집에서 기숙하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1세 때인 1915년, 김갑수는 이상재의 권유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난양대학에서 여운형, 서병호 등과 함께 수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조선인 유학생회에 가담하여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1918년, 김갑수는 애국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잠입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다 한 한인 순사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해 다시 상하이에 건너갔고,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즉시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을 맡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손위 처남인 김인전과 만났고, 김인전의 여동생인 김정신과 결혼했다. 또한 그는 전북 출신의 의정원 의원 윤건중(尹建重)과 함께 임시정부 발행 국채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의 임피 등지에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1921년, 김갑수는 임시정부에서 파송하는 유학생 16명을 인솔하여 독일 유학길에 올라 베를린의 뷔이그즈대학에서 4년간 수학하며 물리학을 전공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인문학을 파고들며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되었지만, 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당시 그가 교재로 삼아 공부했던 물리학 서적과 미분과 적분을 다룬 수학 서적은 현재 후손인 김석중 씨가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유학 생활은 몹시 곤궁했고, 안중근의 동생인 안봉근의 주선으로 한 수도원에서 수개월간 기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공부에 몰두한 그는 고려학우회(高麗學友會) 회장을 맡아 68명의 유학생을 이끌었다. 1926년 조선으로 귀국한 그는 이상재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울에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일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미행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동흥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27년 윤건중의 권유로 다시 국내에 들어온 그는 전북 완주에서 설립된 봉우산업조합의 이사를 맡아 민족자본의 육성과 임시정부 자금 마련에 진력했다. 그러다 불의의 부상과 과로로 얻은 녹막염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938년 8월 15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생가 뒤편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김갑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