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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5:26:23

윤성하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해인(海仁)
본관 해남 윤씨[1]
출생 1911년 6월 5일
전라남도 해남군 녹산면 중리
(現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상가리 중리마을 368번지[2])
사망 1949년 5월 29일[3]
전라남도 해남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463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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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孤山) 윤선도의 10대손이다.[4]

2. 생애

1911년 6월 5일 전라남도 해남군 녹산면 중리(現 해남군 삼산면 상가리 중리마을 368번지)에서 아버지 윤원효(尹元孝, 1856. 9. 22 ~ 1940. 3. 11)[5]와 어머니 김해 김씨(1881. 3. 2 ~ 1965. 1. 4)[6]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해남군 삼산면 상가리 16번지, 광주군 광주면 백두정 16번지에 거주했으며, 광주군 광주면 향사리(現 광주광역시 남구 사직동)에 있던 형 윤영하(尹英夏, 1893. 5. 18 ~ 1979. 6. 23)의 집에 기거하면서 광주농업학교를 다녔다.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달 12일 장재성(張載性)과 장석천 등은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해 항일독립시위로 전환했다. 윤성하는 이에 호응해 당일 광주농업학교 학생 200여명과 함께 제2차 가두시위에 참가하여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등을 표어로 내세우며 광주고등보통학교 부근까지 행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약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930년 7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 동시에 면소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금고형 4개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9년 5월 29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3년 4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에 이장되었다.

[1] 어초은공파(漁樵隱公派) 26세 하(夏) 항렬.[2] 1914년 12월 15일 토지조사사업 당시 이 지번의 필지는 윤성하의 아버지 윤원효(尹元孝, 족보명 윤주욱(尹柱旭), 1856. 9. 22 ~ 1940. 3. 11)의 소유였다.[3] 해남윤씨대동보 권4 47쪽에는 5월 19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윤선도의 장남 윤인미(尹仁美, 1607. 3. 15 ~ 1674. 4. 25)의 후손이다.[5] 족보명 윤주욱(尹柱旭).[6] 김소혁(金昭赫)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