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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7 23:54:51

윤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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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6년(고종 3)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사망 1943년 12월 30일
본관 파평 윤씨[1]
옥여(玉汝) / 태봉(泰奉)
서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2. 생애

1. 개요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아버지 윤태규(尹泰奎)와 황수극(黃壽極)의 딸인 창원황씨(昌原黃氏) 사이에서 고종 3년(1866년)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우찬동(禹贊東)의 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윤량식은 젊었을 때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과거를 보는 데 필요한 학업을 폐지하고 궁벽(窮僻)한 시골에 은거(隱居)해 재주나 학식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었으며 스스로 늬우치고 경계했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등 137명이 참여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던 세칭 파리 장서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에 동참해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인 ‘한국유림송파리평화회서(韓國儒林送巴里平和會書)’에 124번째로 서명해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리는데 적극 가담했다.

1919년 4월 12일 경북 성주의 만세시위운동(萬歲示威運動)과 관련해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발각되면서 파리 장서 사건이 같이 발각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윤양식도 이때 발각돼 모진 고초를 겪었으며 1919년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궐석(闕席)한 채 징역 6월을 판결을 받았다.

1919년 8월 2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중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피고 두 사람은 유생(儒生)인데 대정 8년(1919년) 3월 초순 이름 있는 선비들이 유림에서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 중인 만국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에 관한 연명(連名)의 청원서를 제출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계획한 독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을 권유해 가맹시킬 무렵 각 위에 적힌 거주지 마을에서 김창숙 등이 가지고 온 취지의 청원서에 유생으로서 서명하거나 또는 대서(代書)할 것을 부탁했다.
또한 김창숙을 그대표자로 해 동인으로 해금 이 청원서를 가지고 동 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파리를 향해 출발하게 함과 동시에 역시 이와 동일한 것을 다수 작성해 조선 내 가 지방의조선인에게 배포함으로써 공공의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이하 생략"

옥고를 치른 뒤에도 자나 깨나 조국의 광복을 위해 초사(焦思)하다가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12월 30일 애석하게도 78세로 기세(棄世)했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창리(倉里) 뒤 저전산(楮田山) 임원(壬原)에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했다.


[1] 태위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