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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02:01:07

오남학

파일:오남학.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쿠레야마 모우코(吳山猛浩), 모세이 난츠루(猛淸南鶴)
개명 오자문(吳自文)[1]
이명 오봉학(吳奉鶴)
본관 군위 오씨[2]
출생 1921년 4월 14일
전라남도 제주군 서중면 한남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3]
사망 1992년 4월 23일
일본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 자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69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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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1년 4월 14일 전라남도 제주군 서중면 한남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서 아버지 오병생(吳丙生, 1900. 3. 10 ~ ?)과 어머니 제주 양씨(1902. 5. 8 ~ ?)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4]

그는 19세 되던 1940년 일본 오사카시로 건너가 오요도구(大淀區) 혼조니시통2정목(本庄西通二丁目)에 거주하면서, 아버지 오병생이 경영하는 군수회사의 협력공장인 아사히화학 공업소에서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그러다가 1944년 12월 자재 구입을 위해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제국의 패전을 암시하는 소문을 들었고, 특히 같은 달 3일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에서 '암호명 : San Antonio # 3' 작전으로 나카지마 비행기 무사시노 제작소를 비롯해 도쿄 시내 및 항만 지역을 공습하여 184명의 사망자를 낸 것을 목격한 뒤 이듬해 1월 4일 여관연락선 타카히로마루(天裕丸)을 타고 귀향했다.

귀향하던 당일, 그는 1등 선실 부속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선실로 돌아가 쉬다가 오후 1시에 제주도 제주읍 건입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사는 마쓰야마 고이치(松山幸一) 등 2명에게 본인이 일본에서 들었던 소문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44년 12월 3일 도쿄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소속 폭격기 70대가 습격했을 때, 우에노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오미야역 부근에서 미군의 습격을 받아 정차했고, 사상자 20~30명을 오미야역에서 내리게 했는데 그 때 차장이 혼란에 빠진 승객들을 정리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2. 도쿄에서 공습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트럭 10여 대에 운반하였고, 사망자는 공원에서 단체로 화장했다고 한다.
3. 미군이 사이판을 습격했을 때, 일본 제국 측의 최고 지휘관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연합함대의 원조가 있으면 남태평양·서태평양을 확실히 격멸할 자신이 있으니 보내달라'는 전보를 치자, 도조 히데키는 '그대로 싸우라'는 전보로 대답했다. 이에 최고 지휘관은 '신중히 고려한 후 전보를 보내달라'고 전보를 쳤고, 도조 히데키는 다시 '이전과 같이 그대로 싸우라'는 전보를 보냈다. 최고 지휘관은 세 번째에 '비전투병은 어찌 할 것인가?'하는 전보를 보내자, 도조 히데키는 '함께 용감하게 싸우라'고 회답했다. 이때 최고 지휘관은 '우리 전부 다 죽을 것이니 도조 히데키 내각은 사퇴나 해라'고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4. 현지의 청년 장교들이 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비난하는 전보를 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5. 도조 히데키 수상이 총리직을 사퇴한 후 일본 군부에서 도조의 별장에 방화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소방차들이 출동하자 군부에서 소방관들의 활동을 방해해서 결국 별장이 홀랑 다 타버렸다고 한다.
6. 도조 히데키 수상은 우치다 노부야(內田信也)에게서 500만엔을 뇌물로 받고 그를 내각고문으로 임명해준 것이라고 한다.
7. 시마다 시게타로 전 해군 대신은 어느 날 습격당하여 부상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8. 나고야시에 있는 미쓰비시 항공기회사는 미군의 습격을 세 번 받아 모터 제작공장 1동이 소실되었고, 엔지니어들 중 미군과 내통한 자들은 전부 체포되어 처벌받았다고 한다.
9. 도쿄에 있는 나카지마 비행기의 모터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동원학생들 150여 명이 미군의 습격으로 인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한다.
10. 1944년 12월 3일 공중전에서 일본 제국 육군 비행전대 소속 전투기 15~16대가 미군에 의해 격추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귀향한 그는 12월 9일 오후 5시 남원면(현 남원읍) 남원리의 처가에서 장인어른인 정조원(鄭朝元)[5] 등 4명에게 마찬가지로 본인이 일본에서 들었던 소문들을 언급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44년 12월 3일 도쿄에서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소속 폭격기 70대가 공습을 했을 때, 기차 또한 습격을 당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2. 일본의 어느 비행기 제작회사가 미군의 공습으로 넓은 면적의 피해를 받았고, 이때 이 회사 엔지니어들 중 미군과 내통한 자들은 전부 체포되어 처벌받았다고 한다.
3. 도쿄에서 미군의 공습이 있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사망자들은 화물차로 운반하여 공원에서 단체로 화장을 하고 사망자의 유족들에게 시신을 인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같은 달 13일 오후 7시 제주도 서귀면 서귀리(현 서귀포시 서귀동) 로쿠시라이 슌조(六白井俊三)의 집에서도 로쿠시라이 슌조 등 3명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1. 도쿄에는 미군의 공습이 자주 있다.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사상자를 트럭 10여 대로 운반하고, 사망자의 시신은 공원에서 단체로 화장한다고 한다.
2. 나고야를 여행할 때 그 지역의 공습상황을 목격했는데, 미쓰비시공업소는 흔적도 없이 전부 파괴되어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인 17일 오후 1시 고향인 남원면 한남리에서 족숙(族叔)인 오봉희(吳奉禧, 1899. 2. 8 ~ 1952. 2. 11)[6]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1. 일본에서는 석유를 생산하는 곳이 2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석유가 부족해서 설탕으로 석유를 만들기 때문에 설탕도 부족하다고 한다.
2. 사이판의 총지휘관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연합함대의 원조가 있으면 사이판의 적을 격멸할 자신이 있다'는 전보를 쳤는데, 도조 히데키 수상은 그것을 내각에 발표하지 않고 '그대로 싸우라'는 전보로 회답했다. 이에 총지휘관이 '신중히 생각한 후에 전보를 보내라. 패전하면 어쩔 것인가'라고 전보를 치자,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재차 '그대로 싸우라'라고 회답했다. 이에 총지휘관은 '비전투병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전보를 쳤더니 도조 히데키 수상은 '함께 용감히 싸우라'는 대답을 했다. 이에 총지휘관은 '도조 히데키 내각은 사퇴나 해라'고 전보를 쳤다. 얼마 뒤 사이판에 남아 있던 일본군은 모두 죽고, 도조 히데키 내각도 총 사퇴했다고 한다.
3. 도조 히데키 수상은 100만 엔으로 별장을 지었으므로 당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가 도조 히데키 수상이 사직하자, 일본 군부에서 그 별장의 일부를 방화했다. 이때 소방차의 출동이 분명 있었지만, 소방관들의 활동을 군부에서 방해를 했다고 한다.
4. 도쿄에서 미군의 공습이 있었을 때 다수 발생한 사상자를 트럭 10여 대로 운반한 뒤 사망자들은 그 시신을 어느 공원에서 단체로 화장을 했다. 그리고 사망자의 유족들에게 그 시신을 인계하지 않았다고 한다.
5. 사이판의 청년 장교들이 도조 히데키 수상에게 비난하는 전보를 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6. 도조 히데키 수상이 우치다 노부야(內田信也)에게서 500만 엔을 뇌물로 받고 내각고문에 임명해준 사실을 뒤늦게 내각 각 성(省)에 알리긴 했었다는데, 이 과정에서도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7. 나고야시에 있는 미쓰비시 항공기 회사는 미군의 공습을 세 차례 받아 모터 제작공장 1동을 소실했는데, 이때 엔지니어들 중 미군과 내통한 자들이 전부 체포되어 처벌받았다고 한다.
8. 시마다 시게타로 전 해군대신은 어느 날 습격당하여 부상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9. 도쿄에 있는 나카지마 비행기 회사의 모터 제작공장도 미군의 공습을 받았는데, 이 공습으로 인해 이곳에서 일하던 근로동원학생 150여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고 한다.
10. 1944년 12월 3일 있었던 공중전에서 일본 제국 육군 비행전대 소속 전투기 15~16대가 미군에 의해 격추당했다.
11. 1944년 12월 3일 도쿄에서 미군 폭격기 70대의 공습이 있었을 때, 우에노역에서 오미야역으로 향하던 기차가 B-29 3기 편대의 공습을 받았다. 이때 죽거나 다친 사람 20~30명을 오미야역에서 내리게 했다.

그러나 얼마 뒤 위 사실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1945년 3월 1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육군형법 위반, 해군형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뒤 1992년 4월 23일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9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1] 1972년 개명했다고 한다.[2] 말파 17세 남(南) 항렬.[3] 오장훈두산 베어스 야구선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어머니 제주 양씨는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며, 아버지 오병생은 뒤에 후처 현씨를 들여 슬하에 남동생 오정길(吳禎吉, 1950. 9. 15 ~ )과 오무남(吳茂男, 1955. 4. 22 ~ )을 두었다.[5] 창씨명 테이무라 초겐(鄭村朝元). 오남학은 정조원의 딸 동래 정씨 정임수(1922. 12. 12 ~ )와 결혼했다.[6] 창씨명 쿠레야마 보키(吳山奉禧). 뒤에 한남리 이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