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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9:05:24

토지 개혁

1. 개요2. 중요성3. 지역별 양상
3.1. 아시아
3.1.1. 대한민국3.1.2. 북한 3.1.3. 일본3.1.4. 중국3.1.5. 대만3.1.6. 베트남3.1.7. 필리핀3.1.8. 캄보디아3.1.9. 이란3.1.10. 인도
3.2. 유럽
3.2.1. 영국, 아일랜드3.2.2. 독일3.2.3. 러시아3.2.4. 프랑스3.2.5. 스페인, 포르투갈3.2.6. 이탈리아3.2.7. 오스트리아, 헝가리3.2.8. 발칸 반도
3.3. 아메리카
3.3.1. 미국3.3.2. 멕시코3.3.3. 칠레3.3.4. 과테말라3.3.5. 브라질
3.4. 아프리카
3.4.1. 이집트3.4.2. 에티오피아3.4.3. 짐바브웨3.4.4. 남아프리카 공화국
4. 참고 문헌 및 자료

1. 개요

토지개혁(, land reform)은 한 사회토지 소유 구조를 대대적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주된 의미에서의 토지개혁은 전근대적인 소작제를 타파하고 현대적인 구조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토지개혁의 목적은 특정 계층에 몰린 재산의 재분배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 완화, 봉건적인 소작제 타파로 인한 근대화, 토지기반 경제(토지자본 및 노동력)를 산업기반 경제(산업자본 및 노동력)로 전환하여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산업화 등에 있다. 그러나 토지개혁 과정에서 일어나는 구 소유권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와 재산 갈등은 계급 투쟁적인 면을 불러와 지역사회와 나라에 심대한 영향을 끼첬기 때문에 매우 정치적인 과정을 수반했고 격렬한 논쟁과 다툼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었다.[1]

토지개혁에 성공하여 국가와 사회가 안정되고 산업화로 이행하여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패하면 경제 악화는 물론 각종 갈등범죄 내지는 내전, 반란, 혁명 등 사회 불안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았기에 시대국가를 막론하고 매우 민감한 정책이었다. 영국이나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처럼 토지개혁 없이 소작농들을 바로 도시 노동자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성장한 사례도 있지만, 보통 자체 산업 발전 잠재력이 매우 높아 농촌에 불만세력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이촌향도가 활발했거나 식민지 이주 등으로 소작농들의 불만을 해소시킬 수 있었던 사례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인클로저 운동은 사실상 북한이나 중국의 토지개혁 못지 않을 정도로 피비린내나는 진압과 학살을 동반했는데, 시대가 이른 시대라서 그 참상이 잊힌 편에 가깝다.[2]

2. 중요성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산업구조를 다각화하고 기초 인프라를 닦아놓는 것이 필수적이다. 중진국에 입성한 상태라면 이미 과포화 상태인 도심을 벗어나 저발전지역의 토지를 다른 용도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 농경사회에서 최소 중상류층에 기존 권력과도 연줄이 있는 대지주와 충돌하게 된다.

대지주는 이미 해당 사회에서 토지를 통한 부 & 경작권을 통한 권력 & 권력의 세습을 통한 정통성을 동시에 가진 계층이지만, 동시에 농지를 소유만 하는 소유주로서 농지 경영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저 소작농의 수확 중 대부분을 가져가기에 농업 생산성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대지주들은 자본가는 물론 노동자와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 대지주 입장에서 자본가들은 소중한 농토를 공단으로 뒤엎고 미래의 소작농을 산업노동자로 뺏어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자본가 입장에서는 많은 농업 지역의 잉여노동력을 산업노동자로 흡수해야 했고, 또 농업 생산성을 저해하는 대지주가 사라져 식량 가격이 떨어져야 노동자에게 저임금을 줘도 버틸 수 있다.[3]

이런 토지개혁이 지지부진한 채로 중진국까지 진입했을 시, 이 대지주들은 선진국 상류층급의 부와 이를 훨씬 상회하는 지역권력까지 가진 무소불위의 존재로 등극하고 만다. 이미 전근대 사회부터 대지주들은 농지를 소유만 하는 소유주로서 농지 경영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저 소작농의 수확 중 대부분을 가져갈 뿐인 불로소득자들인데 이런 구조가 중진국이 되어서도 고착되어버리고 만다. 설령 수출을 한다고 해도 이런 주요 수출품 조차 대지주의 토지와 소작농을 통해 생산된 1차산업 계열이 되며 바나나 공화국화를 급속도로 가속화시킬 수도 있다.

때문에 토지개혁에 실패할 경우 남는 운명이란, 생산성이 낮은 1차산업을 정치적 이유로 계속 유지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뭘 하고 싶어도 이미 대지주들이 정치적 수단까지 동원해서 훼방을 놓기 때문. 결국 해당 국가는 1차산업보다 생산성이 높은 모든 산업을 융성할 토지 자체를 구하는 것이 힘들다 보니 발전이 지체된다. 심지어 그 1차 산업마저도 2차, 3차 산업이 발전한 다른 선진국에 비해 극히 비효율적이다.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2차 산업, 3차 산업도 1차 산업의 생산성에 기여하기 때문이다.[4] 세계 최대의 농업국가는 전국토의 반이 농지인 인도가 아니라 2차, 3차산업이 극도로 발달한 미국이고, 1차산업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2차, 3차 산업도 발달해 농업으로 선진국이 된 뉴질랜드 같은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타개책이 별로 없다. 이미 부 & 권력 & 사회적 인망을 모두 가지고 있는 대지주들이 경제 발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일은 워낙 후진국이라서 나라 전체의 인프라가 극도로 열악하고 이로 인해서 최소한의 1차산업조차 어렵거나, 경쟁력이 부족해 개혁요인을 찾아다닐 경우에 한정되기에 이들에게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유재산권 보장을 이미 헌법에 박은 국가라면 '원론적으론' 토지개혁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사태를 극복하려면 지주계급을 적대시하는 새로운 지도층이 나서서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토지개혁을 하던가, 아니면 피지배계층에서 혁명이 일어나 지주를 포함한 기존체제를 붕괴시키고 토지분배를 단행하던가 같은 대격변을 유발하는 방법 뿐인데, 이 또한 자칫 잘못하면 새로운 중진국 함정에 빠지기 쉽다. 만약 쿠데타가 잘못되었거나 사회적 갈등이 길어져 내전까지 벌어지는 경우에는 중진국 함정 정도를 넘어 실패국가로 퇴보해버리는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는만큼 리스크 또한 매우 크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 말고는 지주층을 축출할 수가 없다보니 해당 국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자주 처하곤 한다.

물론 토지개혁으로 일어나는 토지의 몰수와 재분배가 재산권이나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로 이어질 수는 있으나,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이나 사회학자 모두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토지의 특수성을 고려해야한다는 의견을 많이 내놓고 있다.

상대적 후발주자로서 대단히 성공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일구어냈다고 평가받는 국가는 다음과 같이 얼마 되지 않으며, 모두들 극단적인 사회격변으로 인해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들 경우는 모두 거대하면서 상대적으로 단기적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치권을 휘어잡은 국가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토지개혁을 진행하였으며, 토지개혁 완료 후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3. 지역별 양상

2차 대전 종전이후 세계 각지의 신생 국민국가 건설열기와 토지개혁에 대한 거센 요구가 폭발하였다. 새로운 새계질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미-소 양국은 이 흐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두 국가는 세계대전을 파시즘vs민주주의의 대결로 정의하였고 그런 만큼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확산을 명분으로 개입하였다. 소련은 동구권과 북한 등 자국의 양향권하에 있는 지역은 인민민주주의적 토지개혁을 강력히 후원했고 미국도 이에 질세라 공산혁명의 팽창을 예방하고 자유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토지개혁에 개입했다.(montgomery 1984:117-118, 127-131)

동아시아는 토지개혁이 비교적 빠르고 확실하게 진행되었다. 중국공산주의 사상에 따라 인민재판으로 지주들을 때려잡아서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북한은 아예 공산주의 사상을 거스르며 땅을 농민에게 주는 척을 했고, 여기서 따온 것은 인민재판이나 지주를 숙청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집단농장화와 과도한 세금 납부로 인해 사실상 국가가 지주역할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 성과가 저해되었다. 동아시아, 특히 일본의 토지개혁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자 하던 이유와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해서였다. 한국도 농지개혁법 통과 당시에 지주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7] 대만국공내전 당시 국민당이 민심을 잃고 패주한 이유가 토지개혁 실패에 있었다는 점을 교훈삼아 철저하게 토지개혁을 진행했다. 일본도 GHQ 치하에서 토지개혁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몽골은 애시당초부터 토지개혁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았는데 유목민 특성상 수시로 이동하는것이 당연했고 농업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토지개혁을 하지 않았는데 기를수 있는 가축의 수를 제한하는 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몸살을 전혀 앓지 않은 것은 아니다(허를러깅 처이발상 참고).

동남아시아는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 대표적인 실패 사례는 중남미와 사회문화적 환경이 비슷한 필리핀인데,[8] 워낙 섬이 많고 전통적으로 중앙정부의 행정력 및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부실했던 데다가 지속적인 독재자의 출현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토지개혁을 제대로 이행할 기회마저 부족해서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지주-소작제가 그대로 남아있다.

중남미도 저마다 사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이루어진다 해도 이촌향도와 미진한 산업화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점이 발생한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 과테말라처럼 토지개혁이 미국에 의해 좌절된 경우도 있을 지경이라서 현재도 심각한 빈부격차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사실 미국에서 중남미 토지개혁에 대해 아예 신경을 안 쓴 건 아니었지만 반공주의를 내세우면 독재정권도 거리낌 없이 지원했기 때문에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9] 그나마 노선이 변화한 것은 1980년대지만 이때도 외채탕감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나중에 일이 터지고 나서야 외채탕감에 나서는 등 병맛스러운 면이 많았다.

3.1. 아시아

3.1.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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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북한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오고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가장 먼저 하던 것이 토지개혁이었다. 소련군정의 지원아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했으며 지주 출신이나 비공산계 인민위원들로부터 그 가혹성이 지적되었으나 김일성의 강압으로 1946년 3월 5일~4월 13일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북한 측은 토지개혁을 시작하면서 "9만여 명의 고용농민, 빈농민으로 구성된 1만 2천여 개의 농촌위원회를 조직하고 불과 20여일 만에 전격적으로 토지분배사업을 실시했다"고 발표했으며, 토지개혁을 총결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확대위원회의 성명에서 김일성은 "일본인과 민족반역자 그리고 5정보 이상의 땅을 소유한 지주 및 부재지주 등 5만여 호의 지주로부터 몰수한 9만 1,390정보의 토지와 1만 4,477 동의 가옥과 대지 그리고 4,658두의 농우와 농기구 등을 72만 4,522호의 농민에게 무상분배했다"고 밝혔다. #

무상분배라고 하지만 농민에겐 토지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 주어졌고 매매, 임대 등은 엄하게 금지되었다. 토지 몰수와 분배의 실무는 빈농과 머슴, 농업 노동자들로 구성된 농민위원회가 맡았다. 실무에 대한 지식이 낮을 수는 있으나, 신분이 낮은 사람을 특별히 출세시킨 것이라 그가 아니면 출세가 힘들 것이기에 김일성의 명령을 시행시키고 기존 권력층을 제압하는데는 김일성 입장에서 이들이 안성맞춤이었다. 김일성 정권은 저항하는 유산가와 지주들을 친일파, 반동분자로 몰아 닥치는대로 학살하거나 오지로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해서 빈민들과 소작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때 당시의 상황은 소설가 황순원카인의 후예에 잘 묘사된다.

이러한 토지개혁에 대해 북한에서 지주, 유산가 층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각지에서 시위와 저항이 일어났다. 그러나 소농민들은 자신이 바라지 못할 것을 얻는 것이 아닌가, 괜히 죄 짓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은 지주가 없어야 우리가 산다는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아가며 숙청을 요구하는 북한 정권에 협조하면서, 반항하는 사람들이 북한 정권과 소련군정의 무력에 의해 진압되고 지주층까지도 처음에는 소련군과 총격전까지 벌일 정도로 심하게 저항하다가 무력이 약했기에 대거 남한으로 월남한다.#[10] 북에 남은 지주층과 우익들은 산으로 들어가서 저항하거나 공산당에 복종하는 척 하다가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의 북진이 일어나자 보복으로 공산당과 좌익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이들의 유격대, 자경단신천군 사건이나 각지의 학살 사건의 원인이 된다.

김일성을 '인간사랑의 최대 화신'이라며 미화하는 북한 내부에서도 김일성의 토지개혁이 동유럽과 다르게 폭력적인 부분, 정치적 숙청의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동유럽이 오히려 너무 무르게 토지개혁을 했다는 주장이다. 김일성을 따르지 않으면 다 적이고, 북한 내부에서도 처음에는 농민들이 지주가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도 열성적인 기회주의자를 가려서 뽑고서는 그들을 시켜 지주나 대농은 다 착취한 놈들이고, 인민의 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토지몰수대상과 방법을 우리 나라의 구체적실정에 맞게 독창적으로 규정하시였다.
토지몰수대상과 방법은 반제반봉건적사회경제개혁의 요구에 맞게 규정하여야 한다. 반제반봉건적사회경제개혁의 요구는 제국주의잔재세력과 봉건세력을 청산하고 봉건적소작제를 철저히 없애버리는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토지의 몰수대상을 제국주의적, 봉건적착취에 리용되는 모든 토지 즉 외래제국주의자들과 민족반역자들의 토지, 5정보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소작을 주면서 놀고먹던자들을 지주로 규정하시고 지주들에 대해서는 그가 가지고있던 땅과 부림소, 농기구, 살림집, 관개시설을 비롯한 전체 재산을 다 몰수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계속 소작주던 토지들도 몰수대상으로 규정하시였다.
제국주의적, 봉건적착취에 리용되는 모든 토지는 무상으로 몰수하여야 한다.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에 대한 착취자들의 소유는 인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강도적수탈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므로 수탈자들로부터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는것은 응당하고 가장 혁명적인 방법으로 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상몰수의 원칙에서 외래제국주의자들과 민족반역자들의 토지, 지주의 토지, 계속 소작을 주던 토지들을 다 무상몰수하도록 하시였다.
그러나 이전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을 비롯한 일부 나라들에서는 토지몰수규모를 바로정하지 못하고 일부는 유상몰수를 한것으로 하여 토지개혁의 철저성을 보장하지 못하였다.
일부 나라들에서는 토지소유한도를 바로 규정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많은 토지가 착취자들의 수중에 남아있게 하였으며 일부를 유상몰수하거나 유상분배하여 착취자들의 계급적지반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불철저한 몰수방법이 적용된 이전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을 비롯한 일부 나라들의 농촌들에는 토지개혁이후 착취계급의 경제적지반이 적지 않게 남아있게 되였으며 청산당한 지주계급은 그것을 공간으로 하여 외래제국주의자들의 지원밑에 착취제도를 복귀하여 제땅을 도로 찾으려고 발악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밝히신 토지개혁에 관한 사상의 독창성,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손영석, 2021.10.27.

이러한 토지개혁의 결과로 강한 지지기반을 얻은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떠오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 25%에 달하는 현물조세를 슬그머니 물리고 애국미헌납운동으로 쌀을 뜯어가서, 의외로 땅을 불하받은 소작인들의 소출은 크지 않았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북한정권은 협동농장 제도를 실시하여 배분했던 경작권을 회수하고 공산화를 실시하여 북한에서 자영농은 사라진다. 농지개혁법 문서에 따르면 협동조합에서 땅을 받은 농민이 집단 탈퇴하는 등의 저항이 있거나 몰래 텃밭을 만드는 저항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본인도 이에 대한 언급을 한다. 북한 농민은 토지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 이행하는 력사적 행정은 치열한 계급투쟁을 동반합니다. 쓰딸린이 말한 바와 같이 죽어가는 계급이 자발적으로 력사무대에서 물러간 일은 일찌기 없었으며 죽어가는 부르죠아지가 자체의 생존을 고수하기 위하여 마지막 발악을 하지 않은 경우는 아직도 력사에 있어본 일이 없습니다. 공화국 북반부에서 민주개혁의 결과 청산된 지주계급과 예속자본가, 친일분자, 민족반역자 기타 반동분자들은 과거의 자기 처지를 회복하려는 망상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자기의 착취자의 본성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김일성, “당원들속에서 계급교양사업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 (로동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보고, 1955년 4월 1일) #

그러나 이런 저항은 실패했는데 첫번째로 지주계층의 다수가 월남하거나 토지개혁을 준비하며 만든 준군사조직인 농촌 자위대에 의해 저항 운동이 탄압받아 더 이상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이 되지 못했고, 둘째로는 6.25 전쟁으로 청년층 인구가 많이 희생된 상황에서 힘을 합쳐서라도 농사를 해야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생산성을 따지니 뭐니 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세번째로는 전후복구 과정에서 소련의 농기계 지원과 소련식 농업 기술의 도입으로 협동농장 제도가 정착 됐기 때문이다.

이외에는 북한의 토지개혁은 완전히 실패했고 남한보다 덜 진보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지주에게 있던 토지소유권이 조선노동당, 정확히는 김씨 일가로 옮겨갔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2012년 4월 20일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교육원 강연에서 "이북주민들의 삶을 개선하려면 협동농장들을 해체하고 농지개혁을 실시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 3일 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특별작전행동소조 혁명무력의 특별행동이 곧 개시된다>라는 통고에서 '주제넘는 소리를 또다시 줴쳐댔다(씨부렁댔다[11]).'고 험담한 바가 있다. 전문[12] 그러나 동년 6월 5일 자유아시아방송에서는 조선족 사업가의 말을 빌려 "북한이 중국의 토지개혁 모델을 검토하면서도 중국식으로 토지를 개인에게 분배하는 형태가 아니라 대규모 협동농장을 소단위로 쪼개 규모를 소형화하려고 한다"고 전하면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농지개혁' 등 중국식 개혁·개방 촉구 발언 이후 협동농장 개혁 시도를 일단 접었다고 주장했다. #

3.1.3. 일본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고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각종 개혁정책이 실시되었는데, 개중 토지개혁의 주된 목표는 일본제국 기득권의 큰 축인 지주제를 해체하는 것이었다.[13] 정책의 구체적 목표는 자작농을 육성하고, 쌀로 납부하던 소작료를 화폐로 지불하는 금납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1945년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의 농지 조정법은 전국 260만 헥타르(정보)의 농지중에서 100만 헥타르(정보)를 자작농지로 바꾸도록 계획되었다. 1차 토지개혁으로도 불리는 이 법안은 부재지주의 농지 전체, 재촌지주의 농지 중 5정보를 초과하는 농지를 소작료의 40배의[14] 가격으로 소작농의 희망에 따라 판매하도록 하는 법안이었다. 1차 개혁안은 국가가 개입한 유상몰수가 아닌 지주와 소작농간 직접 거래를 유도하는 식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1946년 정책 중간에 GHQ가 개입하게 되어 2차 토지개혁이란 이름으로 훨씬 강력하게 실시되었는데, 1정보가 넘는 소유지를 전부 유상몰수대상으로 설정하고[15] 모조리 매수한 결과 당초 설정된 100만 헥타르보다 훨씬 더 많은 192만 핵타르의 농지가 자작지로 확보되었다. 이에 따라 1941년 자작농이 27.5%, 자소작농이 40.9%, 소작농이 28%에 달하는 구성이 1949년에 가면 자작농이 55.0%로 전체중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자소작농은 27.8에 소작에 크게 의존하는 소소작농과 순수소작농은 각각 7.3%와 7.8%등으로 크게 감소하였다. 이후 1965년 사토 에이사쿠 내각은 당시 몰수당한 지주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는 농지보상법을 통과시켰다.

3.1.4. 중국

신나라 왕망의 토지개혁이나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의 토지개혁인 천조전묘제도는 결국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대륙 국민정부 시절 중국국민당은 토지개혁법안을 만들어 놓고 지주-소작 관계의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만들기 위해 농토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려 했으나, 행정력이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지주 계급의 반발을 의식하여 실시하지 못했다.[16] 중국의 토지개혁은 중국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하는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이 와중에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저항하는 지주들을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에 붙여 처형했다.[17] 이 토지개혁으로 인한 학살에는 국민당 잔당이나 국민당에 협력하던 흑사회, 기관원도 포함되어있지만 대부분 중소 부농이나 지주였다. 희생자 수치에 대해서 저우언라이가 83만명, 마오쩌둥이 인정한 수치만 해도 2~3백만명이고 학자에 따라서 1~6백만명, 여타 학술적, 중국 통계에 따르면 20만에서 500만명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영문위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지주들이 패주하는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망명가거나 영국령 홍콩, 포르투갈령 마카오로 도피했다.

국민당의 개혁법안은 농민에게 농토를 나눠주어 소작농민들을 자영농민으로 전환해 육성하고자 하는 방식이었고, 공산당도 처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하였으나 1956년에 토지를 국유화하고 집단 농장제로 전향, 국가가 관리하는 농토에서 농민들이 일괄적으로 농사를 짓고 일정한 양의 수확물을 분배받는 공동 자산, 공동소유, 공동 관리의 공산주의 개념이었다. 그러다가 이러한 운영방식의 폐단[18]이 발견되면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로는 집단농장을 폐지하고 토지 임대 정책으로 타협하게 되었다. 토지는 여전히 국가 소유이지만 약간의 임대료를 내고 농민에게 임대, 생산 수익은 농민들이 챙겨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실상의 자영농화 이후에야 중국의 기근 문제는 잦아들었다.

현재도 중국의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정부는 그를 필요에 의해 임대해줄 뿐이다.[19] 대개 70년 단위로 임대한다.

3.1.5. 대만

1945년 이전 대만의 토지 소유 상황은 한반도와 비슷하게 현지 및 일본인 지주가 대부분의 농토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소작농과 지주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형성되어 여러 문제를 낳고 있었다.

중화민국이 대만을 접수하고 국부천대를 한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농업개발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 소작으로 인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1949년에 소작료 감액 조치를 시행했다. 소작료 감액 조치는 1947년 미군정이 남한에 행한 것처럼 소작료 상한을 37.5%로 낮추는 것이었으며[20] 기타 잡다한 목적으로 지주들이 소작농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조치를 토대로 한 계약의 개정과 이행에 모두 정부가 관여함으로써 조치의 이행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전쟁 이전 일본인 및 일본 관련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를 전부 농민들에게 불하했다.

1953년에는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 계획을 확정해 한국의 농지개혁법처럼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논 3정보 혹은 밭 6정보)를 보유한 지주들에게 농지를 매각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토지는 저렴한 가격에 소작농들에게 불하되었다.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지주에 대한 보상은 70%가 현물로 지불되는 토지증권으로, 그리고 나머지 30%가 정부기업주식으로 지불되었다. 정부기업주식은 대부분 정부 소유 공장의 주식이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지주들이 산업자본가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물론 지주들은 불만을 가졌지만 총칼로 찍어누르던 국민당 독재 시절이라 토지개혁을 받아들여야 했다.

대만에서의 토지 개혁은 전후 혼란과 2.28 사건 등으로 국민당에 적대적이었던 대만 민심을 어느 정도 돌려놓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3.1.6. 베트남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지배 하에 착취당하며 프랑스인과 가톨릭교도 베트남인으로 구성된 지주 위주의 사회가 되었다. 특히 코친차이나라고도 불렸던 메콩강 삼각주 지역은 식민화 이전 낮았던 인구밀도와 풍요로운 환경이 겹치며 친프랑스 지주 위주 개척이 진행되어 농촌 인구의 40%가 무토지 소작농인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호찌민이 이끄는 공산주의 베트민 독립군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 유격전을 전개하며 도망 지주들의 토지를 재분배해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이는 농촌의 공산주의 지지 확대에 무엇보다도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재분배가 공산주의 이념에 근거했던 만큼 토지 소유권은 베트민이 확보하고 경작권을 분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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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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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종결되고 제네바 합의에 따라 1954년 베트남은 독립을 얻어냈지만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베트민의 북베트남은 베트민 게릴라 시기의 재분배에서 만족하지 않고 이웃나라 중국과 같이 무리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을 그대로 들여와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강압적인 무상몰수와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방식에 농민과 노동자들이 반발하면서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시위와 파업 등 강력한 저항이 벌어졌고,[21] 그 과정에서 군경의 진압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결국 북베트남의 초대 주석이던 호찌민도 결국 과오를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22] 토지개혁은 1956년에 일단락되었고 이후 공산 정부는 농민들을 협동농장으로 재조직화해 집산화를 추진하였다. 1986년 경에는 구 북베트남 지역 농촌의 90% 이상이 집단농장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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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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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바오다이베트남국을 계승한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권유에 따라 토지개혁을 시도하였다. 토지 임대료를 1/4로 규제하고 토지보유 상한선을 넘기는 토지를 유상몰수 유상분배하는 개혁안이 시행되었으나, 보유 상한선이 100헥타르로 너무 높았고 시행 과정에서 행정적인 부패와 비효율이 너무 심했기에 남베트남 전체 농지의 10% 미만인 24만 4000헥타르만이 분배되었다. 베트남 최악의 지주 위주 사회구조로 인해 공산주의 지지가 매우 높았던 메콩강 삼각주의 농민들은 베트민의 토지개혁과 남베트남 정부를 비교하며 실망했고 1960년 이후 베트콩이 이 틈을 타고 들어가 베트민식으로 토지를 재분배하고 게릴라전을 시도했다. 농민들 눈에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베트콩을 토벌한 지역은 재분배가 철회되고 지주들이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이후인 1967년, 농업운동가 로이 프로스터만(Roy L. Prosterman)은 미국이 토지보상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남베트남에 자영농 토지 개혁을 진행하자고 건의했다. 필요 예산이 베트남 전쟁 한달 전비보다 적다는 데에 솔깃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고 미국의 보상금 지원하에 1970년 남베트남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은 Land to the Tiller(토지를 경작자에게)라는 이름의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이 개혁은 토지 보유 상한선을 15헥타르로 잡고 베트콩이 이미 분배한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1975년 경에는 경자유전 비율이 40%까지 올라가는 등 지주 계급을 사실상 없애는 수준으로 재분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고질적인 문제인 부정부패와 행정력 부족으로 비용 대비 효과가 낮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시기적으로도 이미 너무 늦었기 때문에 1975년 남베트남은 멸망하고 베트남은 베트민 공산주의 정권하에 통일된다.

하지만 통일 후 구 남베트남 지역의 집산화는 더디게 진행되어 1986년, 북부와는 대조적으로 메콩강 삼각주 지역의 협동농장 비율은 5.1%에 불과했다. 남부 농민들은 암시장에 농산물을 적극적으로 내다파는 등 집산화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교란했다. 결국 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베트남 정부는 집산화의 실패를 시인하고 도이머이 경제정책을 시행해 중국처럼 소유권을 국가가, 경작권을 개인이 가지는 형식으로 자영농을 인정하게 되었다.

3.1.7. 필리핀

필리핀은 스페인 통치기 시기부터 역시 스페인령이었던 남미와 유사한 지주 중심의 토지 체계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는 미국 지배기에도 청산되지 못하였다. 1901년 미국-필리핀 전쟁이 일단락 지어진후 필리핀 군도 도민정청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가톨릭 교회 소유 토지를 몰수하고 그렇게 넓어진 국유지를 경제적 자유주의에 의거해 미국 본토의 민간 투자자들에게 판매하는 정책을 폈다. 다만 미국 본토의 농업에 해가 될 것을 우려한 미 의회는 개인 소유 토지 상한을 16헥타르, 미국 법인 보유 토지 상한을 1024헥타르로 지정하였다.

이후 필리핀 자치령이 수립되자 자치령 초대 대통령 마누엘 케손은 1933년 라이스 셰어 테넌시법(Rice Share Tenancy Act of 1933)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고리대금 규제, 지주-소작농 분익 비율 규정, 소작농 축출 금지 등의 소작권 보호를 골자로 하였으나 지주 중심인 지방 의회 다수가 청원해야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케손 대통령은 루손 섬 중부에 시행을 명령하여 이에 대응하였고 1946년 독립을 선언한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은 필리핀 전역에 법률 적용 확장을 선포하였으나 지주들이 법의 허점을 빠져나갔기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미국 지배기에 토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였기에 독립 이후로도 필리핀 정부는 꾸준히 토지개혁 시도를 하였으나 지주 계급이 정계, 재계, 사법부 등 기득권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 상[23] 추진이 매우 지지부진하였고 현재까지도 필리핀의 사회 구조는 소작제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이다.

독립 후 최초로 공포된 본격적인 토지개혁 법안은 라몬 막사이사이 정권기에 실시된 1955년 토지개혁법이다. 토지 재분배를 주장하는 농촌의 무장 반군과 미국의 개혁 압박으로 인해 만들어진 이 법은 자영농 소유 토지 상한을 6헥타르로 잡고 자영농 체제의 확립을 처음으로 목표삼았으나 개인 지주 보유 토지 상한선을 300헥타르, 법인 소유 토지 상한선을 600헥타르로 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지주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는 온건한 개혁이었기에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거기에 더해 생산량 기준으로 보상액을 일괄적으로 지정하지 않고 지주와 소작농 개개인간에 '공정한 보상액'을 협의하도록 하였기에 재분배 속도가 터무니없이 느렸고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높았다. 국가 기관은 보상금 마련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지주가 토지 수용을 거부할 때에, 다수 소작농의 청원이 있을 경우에만 개입하도록 명시하여 매우 제한적이었다. 1955 토지법은 의의가 적지는 않으나 조항에 지주 계급의 이권을 보호하는 독소조항이 많이 삽입되어있고 이로 인해 이후의 토지개혁에도 장애물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3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은 좀 더 진보한 토지개혁 법안을 의회로 송부하였는데 상원에서 지주 정치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받았기에 양원을 통과한 이후에는 내용이 크게 후퇴해 있었다. 이 법은 자영농 위주 사회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토지 자본의 산업 자본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명시하였고 국가기관의 개입을 강화하는 등의 진보가 존재하였다. 특히 개인 지주 소유 토지 상한선이 75헥타르로 1955 토지법의 300헥타르에 비해 크게 낮아진 데다가 소작권 보호 조항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국가기관의 개입 조건이 완화되고 직접 개입이 법제화되었을 지라도 지주-소작농 직접 협상에서 지주와 국가기관의 협상으로 변화하였을 뿐 생산량 기준 보상액을 법으로 지정하지 않고 개개 지주와 '공정한 보상액'을 협상한다는 기본 기조는 변하지 않았기에 큰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상한선이 낮아졌으나 여전히 지주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고 분익소작농을 정액소작농으로, 다시 자영농으로 전환시킨다는 온건한 계획[24]을 추진해 경자유전의 원칙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1971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63 농지개혁법의 성과가 매우 미미하여 특히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불만이 누적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필리핀 농업개혁법을 공포하였다. 이 법안은 농민들의 협동조합 결성을 지원하여 지주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하였고 농업금융을 정비하는 등 기존 법안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보완했고 소작권 보호를 강화하였다. 또한 지주 보유 토지의 상한선을 24헥타르로 대폭 낮추었고 토지청을 농지개혁부로 승격하여 추진 동력을 높였다. 마르코스는 또한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본격적으로 독재자로 군림하며 대통령 포고 27호 농민 해방 포고령을 반포하였다. 이 포고령은 자영농 보유 상한을 7헥타르로 높였고 보상액을 평균 수확량의 2.5배로 명시하였으며 재분배 받은 농민이 채무 불이행시 농업조합에서 우선 대납하도록 지시하여 농민 지원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법안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고 1948년 47.3%였던 소작농과 자소작농 비율은 지지부진한 재분배와 인구 폭증, 소가족화 등이 겹치며 1980년 48.2%로 오히려 증가해버렸다. 자소작지와 소작지 면적 비중 역시 1939년 37.3%에서 1980년 37.4%로 독립 이전과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많은 법을 통과시켰음에도 지지부진한 이유는 기득권을 장악한 지주 세력이 법을 지주에 유리하게 왜곡시키고 농민의 불만이 점증되면 그때야 조금씩 개선해주는 실태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예를 들어, 정부의 개입이 일부 소작농과 차지인의 청원으로 가능하도록 개정 된 것은 1971년에서야였고[25], 1972년에 와서야 지주와의 협상 없이 평년 소출을 기준으로 하는 보상액이 책정되었다. 토지개혁 구역 역시 초반엔 예외 지구가 많다가 점진적으로 확장되었으며 농지전용의 예외조항이 너무 광범위해 지주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매우 많았다. 부재지주의 토지 소유와 상한선 무시시 처벌 조항 역시 포함되어있지 않았고 보상액의 이자율인 매년 6% 역시 영세농들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높았다.

이후 1987년 에드사 혁명으로 마르코스가 퇴진한 후 집권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1988 종합농지개혁법을 시행하였다. 이 법은 지주, 법인, 자영농 모두 토지 보유 상한선을 5헥타르로 잡고 발효 후 5년 이내에 재분배를 완료하도록 하는 등 진보도 존재하였으나 여전히 정액소작농화 사업을 병행 추진하였고 '공정한 보상액' 합의 기준을 명시하면서 1972 포고령보다 오히려 퇴보한 면도 있다. 1988 토지법은 역대 토지개혁 중에서는 가장 큰 성과를 이루었고 피델 라모스,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정권 등을 거치며 꾸준히 보완되었다. 하지만 지주 가문 출신이었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행정명령 229호로 토지 재분배 대신 대농장 법인화 후 주식 재분배로 갈음할 수 있게 허용해주며 개혁이 크게 퇴보하였다.[26] 그렇다보니 현재도 필리핀의 토지개혁은 완수되지 못한 상황이다.

3.1.8. 캄보디아

본래 크메르 공화국 시절 때만 해도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의 득을 많이 본 기득권들이 대지주로 군림하고 있었고 사실상 베트남 공화국과 다를 바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킬링필드를 통해 문자 그대로 국가 전체를 석기시대로 회귀시키는 수준의 파괴를 자행하면서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은 사실상 소멸되어버렸다.

크메르 루주의 잔혹한 독재가 종식된 이후 훈 센 총리 주도하에 캄보디아가 복구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빈부격차가 늘어나고 새로운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 캄보디아의 수 많은 토지들이 외국인들에게 팔려나가게 되었던 것. 이는 훈 센이 주도한 것으로 외환을 유치하기 위해 자국의 토지를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부동산 매물로 내놓았던 것이었다. 캄보디아 전국토의 45% 이상이 외국인의 소유가 되어버렸으며 수 십만의 자국민들이 정부에 의해 강제퇴거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

3.1.9. 이란

팔라비 왕조 당시 팔라비 2세의 주도 하에 백색혁명이 시작되어 토지개혁도 같이 시작되었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국토의 60%를 차지하는 황야를 외국 기술자를 초빙하여 녹화하는 한편, 토지귀족을 약화시키기 위해 지주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민들에게 나눠주려 했다.

이 토지개혁은 지금도 여러 설이 분분하다. 백색혁명 당시의 토지개혁이 성공적이어서 많은 빈민들이 소작을 철폐하고 자영농이 됐다는 긍정적인 통계도 있으나 전체 농민의 절반 정도만 혜택을 받았고 그나마도 분배된 농토가 7헥타르 미만이라 식구에 비해 부족하거나 관개시설을 할 자금이 부족해 유효하게 활용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더해서 소작 시절엔 안 물리던 세금, 종자값, 물값, 시설비용 등이 추가로 발생하고 전통적인 지주하에서 소작인들에게 제공하던 건강과 교육 같은 서비스도 없애버렸다. 동시기에 미국과 협정을 맺어 미국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촌의 경제력은 많이 쇠퇴했다. 결국 소농민들은 받은 토지를 협동농장에 매각하고 도시로 흘러들어와 슬럼이 형성됐으며 이는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었고 동시에 이슬람 근본주의가 심해지는 효과를 제공했다. 복잡한 토지 소유 문제는 이란 혁명 이후 1990년대까지 이어젔다.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주였던 모스크와 성직자들의 토지를 몰수해서 분배한 것 때문에 이슬람교의 반발을 사 후에 이란 혁명의 원인이 됐다고 평가하는 설도 있다.## 호메이니도 팔라비 2세의 토지개혁에 반대해 폭동을 일으켰다가 망명을 한 사례이다.##

현 이란 신정은 모스크의 토지몰수에 반발한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팔라비 2세의 개혁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지만 팔라비 2세의 개혁을 긍정하는 측에선 토지개혁이 인민을 착취하는 지주와 모스크 세력을 억제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여 이란 근대화의 큰 성과라고 평가한다.

3.1.10. 인도

영국령 인도 시기 인도 토지의 대다수는 소수의 지주와 라자(토후왕)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다른 지역과는 대비되는 인도 특유의 토지 소유 구조인 자민다르(Zamindar)가 존재해 이후 토지개혁 논의에 영향을 주었다. 자민다르는 본래 무굴 제국 시기 일정 지역의 징세권을 국가로부터 받은 징세청부업자들이었는데[27] 토지에 어떠한 권리도 의무도 없다보니 지역이 황폐해질 정도로 착취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1793년 찰스 콘월리스 후작[28]이 이끄는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 당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징세권을 토지 소유권으로 인정해 자민다르를 지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제도는 영국 지배의 본거지 벵골에서 시작해 북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영국령 인도에는 지역의 소규모 지주와 토호 위에 대지주 자민다르가 존재하는 독특한 사회구조가 형성되었다. 영국 지배하의 기득권이 된 대지주 자민다리들은 이후 영국 통치의 주구로 기능한다.

한편, 시간이 흘러 인도 독립운동이 활성화되고 이를 위해 인도 국민회의가 설립된다. 본디 국민회의는 민족주의를 비롯한 근대 사상을 배워온 지식인과 부르주아 중심의 조직이었으나 마하트마 간디가 농민을 대변하는 여러 의제를 내세우며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자 많은 농민들이 이를 따른다. 농민들은 국민회의에 가입하며 조직화되었고 독립운동의 주요 참여 세력이 되었다. 한편 농민운동이 성장하며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시야를 지닌 이들도 늘어나 중상류층 중심의 국민회의에 불만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민회의 조직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농민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고 국민회의 내 좌익 농민운동가들이 이에 참여, 1936년 전인도농민연맹(All India Kisan Sabha,AIKS)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농민운동의 활성화가 인도 독립 쟁취에 큰 영향을 주었고 비록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독립 후 국민회의 정권의 토지개혁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게 된다. 한편 이슬람계 농민단체도 여럿 등장해 무슬림 빈농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들은 힌두교도 지주가 있는 이슬람 다수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고 이슬람 분리주의와 연계되어있어 힌두교 세력과 싸우기도 했다. 지주들은 농촌 문제에 종교 갈등이 복잡하게 꼬였다는 상황을 이용해 불만을 돌리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2차대전 종전 후 독립운동과 함께 농민운동은 더욱 거세져갔다. 특히 전쟁 기간 중 벵골 대기근을 겪은 벵골지방은 테바가 운동(Tebhaga Movement)이라는 소작료 헌실화 운동을 전개했고 타 지역보다 억압적인 체제를 가진 하이데라바드 왕국이 잔존하고 있었던 텔랑가나 지역에서도 큰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영국 당국과 이를 이어받은 국민회의 인도 정부는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시도를 군경을 이용해 때려 잡은 후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창한다. 독립 후 기존에 친영파였던 지주, 자민다르, 고리대금업자 등의 여러 기득권 세력이 인도 국민회의에 참여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국민회의의 토지개혁안은 이들의 입김이 강력하게 들어갔다. 전인도농민연맹을 비롯한 농민운동 세력이 강력했고 또 독립에도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자민다리 해체에 한정된 개혁이 아닌 소작보호권 강화와 보유상한선을 정하는 급진적 개혁이 강령으로 채택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철저히 지켜지진 않았다.

1950년 시작된 토지개혁은 자민다르 폐지, 소작 보호권 강화, 토지보유 최고한도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독립 이전 자치의회 시기부터 지방자치와 내각제가 자리잡힌 인도 특성상 실질적 법집행은 주정부가 맡았다. 하지만 당시 국민회의 중앙정계는 산업부르주아와 지식인들이, 주정부는 토호와 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현실로 인해 이는 개혁의 불철저로 이어졌다. 자민다르 해체의 경우, 산업 자본가들과 지역 지주들 모두 원하고 있던 바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잘 진행되었다. 자민다르들에게 자경 토지는 보유가 허락되었는데 이 기준이 상당히 느슨하게 잡혀 직접, 혹은 가족이 감독하는 토지나 자본주의 고용 형식의 농장도 자경지로 인정받았다. 이로 인해 개혁 당시 자민다르 소유 토지의 1/4에 달하는 2560만 헥타르의 토지가 몰수를 벗어났고 자민다르는 지주 혹은 자본주의 농장 경영자로 탈바꿈해 살아남았다. 몰수된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하기 위해 소작농들은 취득료를 내야 했는데 기존 소작료의 10~15배에 달했다. 마디아프라데시 같이 취득료가 싼 지역은 기존 소작료에 버금가는 지세를 납부해야 했다. 이렇게 얻은 취득료는 몰수 보상을 위해 옛 자민다르들에게 지급되었다. 토지를 새로 취득한 이들은 자연스레 납부 여력이 있는 부농들 위주였고 진짜 소작농 상당수는 여러 편법 속에서 그대로 소작농으로 남던가 아니면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

지주들은 소작 계약이 구두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악용하고 소작지를 자경지로 속여 신고해 소작권 보호 조치도 쉽게 빠져나갔다. 지역의 토호들은 미비한 행정과 우호적인 주정부를 이용해 법망을 이리저리 피하며 소작농 보호 조치들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켰고 토지개혁 열풍이 꺼진 1960년대 이후 다시 분배된 토지를 재병합해갔다. 소작료 경감법이 통과되어 소작료를 기존의 50%에서 20~25%로 낮춰야 했으나 농촌 인구가 과잉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지켜지지 않았고 각지에서 50% 소작료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지주가 자경을 포기한 땅을 소작농이 사들일 수 있었으나 국가에서 직접 분배하지 않고 소작농 개개인에게 맡기는 식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당시 빈농들의 낮은 교육수준과 맞물려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토지보유 상한선 역시 몰수의 예외로 지정된 농장이 너무 많았던 데다가 가족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상한선을 결정하여 소유권을 가족들에게 쪼개서 넘겨 회피할 수 있었다. 결국 국가 주도의 토지개혁은 지주와 토호들을 그보다 상층부의 자민다리로부터 해방시키는 역할만 했을 뿐 실제 빈농들에게 끼친 효과는 미미했고 오히려 법망을 피하려는 지주들의 농간으로 평균 소작 계약 기간이 짧아지는 경우마저 늘었다. 전인도농민연맹은 토지개혁 당시 지주들이 자경하겠다는 명목으로 소작농을 쫓아내자 반발하는 투쟁을 벌였지만 이후 자민다르 폐지로 토지소유농들이 이득을 보며 의견이 갈라졌고 운동 동력을 잃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인도는 농업 문제와 빈부격차가 매우 심하고 낙살라이트같은 반군들이 지금도 개혁을 요구하며 할거중이다. 한편, 인도 공산당이 집권한 케랄라 지역은 중앙정부보다 훨씬 과격한 토지개혁을 진행해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고 친공산주의 진영과 좌익 계통으로부터 개발도상국의 모범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비슷하게 공산당이 집권한 서벵골 지역은 1978년부터 바르가 작전(Operation Barga)을 진행해 소작 현황을 행정적으로 조사, 등록했고 소작농 보호법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데에 성공했다.

3.2. 유럽

3.2.1. 영국, 아일랜드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발상지 영국은 토지개혁 없이 선진화에 성공한 사례이다. 영국의 소작농들은 토지 재분배와 자영농화를 겪지 않고 2차 인클로저 운동으로 이촌향도하여 도시 노동자로 흡수되었다. 장자상속제를 시행해 토지가 분할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현재도 영국 토지의 1/3을 귀족 계층이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타국처럼 공산주의의 준동이나 심각한 사회 문제를 겪지는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토지개혁 무용론이나 토지개혁이 오히려 이촌향도를 저하해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어왔다. 사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농민들이 해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자연스레 해결된 예에 가깝기는 했다. 현대에도 영국의 토지 소유 집중은 지속되고 있으며 녹색당(잉글랜드 웨일스)녹색당(스코틀랜드)에서는 헨리 조지가 주창한 토지 가치세를 통해 토지와 계급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 중이다.

소작농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던 곳은 영국령 아일랜드였다. 제임스 1세올리버 크롬웰 등 근세 영국의 개신교 지배자들은 기후 문제로 식민 정착에 불리해 토착 가톨릭 게일 부족들이 산개해있던 당시의 아일랜드 사회를 못마땅해했고 잉글랜드 개신교도들에게 아일랜드 땅을 분봉해 개신교 부재지주가 가톨릭 소작농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억압적인 사회구조와 가톨릭 차별 하에서 아일랜드인들은 핍박받았고 결정적으로 1847년 아일랜드 대기근을 겪으며 반영감정이 폭발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억압적인 아일랜드 사회 구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본 윌리엄 글래드스턴 내각과 영국 자유당은 1870년 퇴거시 배상금을 지불받을 수 있게 하는 등 아일랜드 소작농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지주들은 법안을 피해갈 방안을 찾아내 실질 효과는 미미했고 임대료와 배상금 분쟁이 거세지며 토지 전쟁(Land war)이라 부르는 정치 갈등으로 이어졌다. 글래드스턴의 1870 토지법은 현대에는 실질적 효과보다는 자유방임주의 완화라는 상징적 의미, 아일랜드인의 토지문제 인식 각성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주로 높게 평가받는다.

이후 영국 자유당은 1881년 아일랜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토지 법원을 설립하고 소작권을 더욱 강력히 보장, 점진적으로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통한 자영농화를 꾀하는 법을 시행시켰다.[29] 영국 정치권은 이후로도 아일랜드의 정치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 1885년, 1887년, 1903년 3차례의 개혁 법안을 추가로 통과시켜 재분배 속도를 더욱 높였다. 추가로 자영농 재정착을 위해 주택 건설 및 보급 법안도 진행되었고 최종적으로 1923년 갓 독립한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의 법안이 시행된 이후 1929년 자영농 비중이 97.4%까지 올라갔다. 이후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영국에 1938년 토지 배상금을 일괄 지불하며 토지 관련 채무 문제까지 해결되었다. 이후 독립 아일랜드는 토지로 인한 사회 모순의 문제 없이 무난히 선진국으로 성장해 2003년 식민 지배국 영국의 1인당 GDP를 추월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스코틀랜드하이랜드 지방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어 크로프트(Croft)라고 부르는 전통 소작농들이 경작지를 잃고 쫓겨나는 하이랜드 클리어런스(Highland clearance) 현상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아일랜드 대기근과 비슷한 시기 하이랜드 역시 감자 기근을 겪고 1870 아일랜드 토지법의 선례를 따라 스코틀랜드에서도 1886년 크로프터즈 홀딩스 법이 제정되어 소작 보호권이 보편화되었다. 이후 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설립 이후 2000년에는 봉건제의 잔재를 폐지하고 현대적 계약관계로 대체하는 법이, 2003년에는 개방 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을 보장하고 지역 크로프트 공동체가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매입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점진적 토지개혁법이 통과되었다. 이후로도 이를 보완하는 법안이 꾸준히 입안되었다. 이러한 개혁 시도들은 현대 협동조합 진보운동의 영향을 받아 자영농화보다는 토지 공동체화를 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3.2.2. 독일

역사적으로 독일의 토지개혁은 많으나[30] 현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구 동독지역의 융커들에 대한 토지개혁이다.[31] 독일어로 토지개혁을 의미하는 Boden Reform 자체가 이 당시 동독의 토지개혁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간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 지배층이었던 지주 귀족인 융커들에 대한 기반을 완전히 뿌리 뽑아버렸다.

동프로이센, 폴란드로 넘어간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역은 아예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로 극소수만을 제외하고 싹 쓸려나가서 토지개혁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동독지역의 소련 점령 지역이었다.

소련 군정은 2차 대전 이후 100헥타르 이상에 대한 모든 사유재산을 불인정하고 강제로 몰수하여 소작농들에게 배분했다가 이후 협동농장이나 공공 부동산 소유로 국유화해버렸다. 반항하는 많은 융커들은 나치 전범으로 몰리거나 반동 분자로 몰려 체포되어 구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었으며 상당수가 서독으로 도망가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남은 융커들은 재산을 뺏기는걸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전쟁의 여파로 성한 건물도 별로 없었지만 소련은 융커들의 장원 건물도 완전히 부셔버렸다. 이 같은 문제는 분단 시절 내내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었으나 독일 재통일 이후 동독 지역 융커들의 재산을 돌려 달라는 민사소송이 각지에서 일어나면서 불거지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케이스가 하노버 왕조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소송이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독일 통일 이후 옛 재산 회복 문제가 구 동프로이센 지역이나 소련과의 외교마찰이 있을까 우려하였고 또한 융커 출신을 제외한 나머지 동독인들이 옛 주인에게 집이나 기업, 공장시설 등을 순순히 내주고 싶어할리는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1990년 맺은 독일 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2+4 조약)을 준수하여 모든 민사소송을 기각하였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는 2006년까지 소송을 이어갔으나 결국 패소하고 2008년 연방 대법원에서 모든 공식적인 회생 청원을 기각한 후 현재 재산 환수 소송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다만 일부 옛소유주들은 현재 재산을 동원해 옛 부동산을 임차하거나 매입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2021년 9월 베를린 한정으로, 부동산 회사들이 소유한 주택을 유상몰수해서 공유화 하는 부동산 개혁 투표가 치러질 예정이다.# 계획에 따르면 몰수한 주택을 다시 사유화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며 몰수의 대가로 부동산 회사들에 손해배상을 하게 된다. 이 규모를 '도이체 보넨 등 몰수' 시민행동은 80억유로(한화 11조원), 베를린 시는 379억유로(52조원)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이 투표의 법적 이행 의무는 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권고 내지는 촉구 같은 성격이 될 것이며 결정은 새로 구성된 시의회가 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3.2.3. 러시아

근세 러시아 제국은 낮은 인구밀도와 크림 칸국을 비롯한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난동 등으로 인해 재판(再版) 농노제가 확립되었고 이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유목민으로부터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집단주의 분위기가 확립되며 농촌 사회 역시 농업 공동체 미르(мир)로 편성되었다. 미르는 제국 시골의 하부구조로 기능하며 농촌의 안정 및 빈농의 생존에 큰 역할을 했지만 평등주의적 토지 재분배는 농민들로 하여금 생산력 향상 의욕을 저하시키고 많은 농지를 분배받기 위한 출산만을 부추겼고, 보수적인 미르의 분위기는 신기술 도입을 방해했다. 전근대적이고 억압적인 농노제와 농촌 발전을 가로막는 미르 시스템으로 인해 러시아는 체급과 국력 대비 매우 부실한 내부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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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그 유명한 농노 해방과 대규모 토지개혁이 러시아의 원조 토지개혁으로 꼽힌다. 이 토지개혁은 긍정적인 의의도 있었고 불완전한 부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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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표트르 스톨리핀이 토지 개혁(농민의 미르 탈퇴 허용과 온건한 토지 재분배를 통한 자영농 육성)을 실시해 죽어가던 러시아 제국을 살리려 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고 1차 대전이 터지면서 스톨리핀 개혁은 둔화되었고 러시아 혁명이 터진 뒤, 상황이 급변한다.

농민들은 2월 혁명이 터지자, 귀족들의 토지를 빼앗고 스톨리핀 개혁을 무효화시켰다. 레닌의 소련 정권은 남아 있는 부유층과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 한 다음, 토지령을 발표하여 농민들에게 몰수한 토지를 분배했다. 적백내전 동안, 생존의 위기를 겪던 소련은 전시 공산주의를 시행해 농민들의 생산물을 무자비하게 징발했고 이것은 농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낳았다. 또한 1917년의 이상 기후, 1921년의 가뭄은 농가에 치명타를 날렸고 티푸스를 비롯한 전염병까지 나돌아 500만 명이 죽었다.

적백내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농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신경제 정책, 속칭 NEP를 시행했다. 네프 시기 동안 소련의 경제는 크게 성장하고 전쟁의 피해도 상당 부분 회복했으나, 농산물과 공산품의 가격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가위 위기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낮은 농산물 수매 가격과 낮은 공산품 공급량 때문에 농민들은 시장에 농산물을 내놓지 않았고, 이 때문에 도시에서는 식량난이 터졌다. 이에 노동자들은 소련 정권에 불만을 터뜨렸고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들의 커다란 분노를 접한 소련 정권은 노 · 농 동맹 기조를 유지하고 네프를 이어나갈지, 아니면 네프를 폐기하고 중공업화를 밀어붙일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스탈린, 부하린 등의 네프 유지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소련은 일단 네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입장을 바꾸어 급진적인 중공업화를 위한 강력한 농업 집단화를 시행했다. 집단 농장에 가게 되면 토지와 가축을 뺏긴 채로 기존보다 훨씬 더 낮은 대우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농민들은 가축을 도살하고 집산화에 저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농민들의 저항에 철권으로 응답했고 엄청난 수의 농민들이 희생된 끝에 농업 집산화는 정착된다.[32]

집단화 이후, 농민들이 생산하는 재화를 거의 다 갈취할 수 있게 된 스탈린은 이를 기반으로 삼아 중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고, 그 결과 소련은 10여년 만에 세계적인 공업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농업의 생산성은 소련 당국의 기대에 못미쳤고. 스탈린 사후에 농민에 대한 차별 철폐 및 처녀지 개간 운동 등으로 절대적인 농업생산량은 크게 늘어났기는 했지만, 이촌향도 현상은 꾸준히 진행되어 소련 후기 들어서는 노동력 부족현상에 직면하였고, 암만 농민들의 대우가 향상되었다 한들, 절대적인 생산성 자체는 서방 농장에 비해서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 당국에서 골머리를 앓아야했다.

소련이 해체된 뒤부터는 옐친의 급진적 시장 경제화 정책으로 집단 농장들이 민영화되고 개인 영농으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소련 후기부터 집단 농장들은 정부 보조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기생적 경제 조직이 되었고 스탈린의 집단화 이후부터 소련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무척이나 낮았다. 그래서 집단 농장의 해체는 이러한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할 방안으로 인식되었으나, 실질적으로 대다수 집단농장은 소련 붕괴 이후로도 그 겉 껍데기만 기업농이나 농업협동조합으로 바뀐 채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농업 공동체 미르에 익숙했고 옐친 시기 초인플레이션에 직면했던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서는 자기 토지를 소유한다해도 소련초기와는 사회환경이 너무 달라져서 시골 토지 자체 보유 자체가 큰 돈이 되지 않는데다가 소규모 영세농으로 전락함에 대한 공포와 집단농장이 제공하던 복지 시스템의 붕괴를 걱정하는 시선이 더욱 지배적이었기에 자영농화 개혁에 대한 열의가 낮았다.

대다수 농장이 소련 시절의 집단농장 시스템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돌아갔었고, 예금자산도 이미 휴지조각이 되어버린지라 낮은 생산성과 농가 소득 문제가 오래도록 러시아의 농민들을 괴롭혔다. 자영농이 합법화 되었기 때문에 조금씩 그 비율이 증가하였지만 속도가 턱없이 느려 자영농가가 차지하는 토지는 2005년에 전체 농지의 20%, 2013년에는 38%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2005년 러시아 총 농업 생산량의 59%가 전체 농경지의 20%에 불과한 자영농 토지에서 비롯되어 자영농의 효율성을 증명하였다.

3.2.4. 프랑스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1789년, 국민 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고 [33] 1790년에는 탈레랑의 제안을 받아들여 몰수한 성직자 토지를 경매에 부쳐 토지 개혁과 재원 확보를 꾀했다. [34] 1792년, 국민공회를 장악하고 있던 산악파 자코뱅은 망명한 귀족과 부르주아의 토지를 몰수한 후, 매각했다. 1793년에는 토지를 작은 단위로 쪼개 매각하는 것을 유도하고 구매자가 10년 할부로 토지 구매 대금을 납부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했다. 1796년, 총재 정부는 지불 유예 기간을 3년으로 단축하고 분할 매각을 금지해 소농들의 토지 구매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후, 총재 정부를 무너뜨린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의 조치들을 무력화하고 1813년에 공유지를 매각하여 소농들의 토지 구매가 활성화되었다.

프랑스 혁명기에 이뤄진 토지 매각은 프랑스 전체 농지의 약 30%를 차지하던 자영농의 토지 보유량을 약 50%까지 늘렸고, 혁명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매각 조건이 농민들에게 상당한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었고 아시냐의 평가 절하 덕분에 이전 보다 더욱 많은 이들이 토지 매매에 뛰어들 수 있었다. 중농, 부농, 심지어는 일부 소농들이 토지 매매에서 많은 이득을 보았다. 개별적으로 토지를 구매하기 힘든 조건에 놓여 있던 소농들의 경우, 상당수 지역에서 소농들이 연합해 토지를 공동 구매하거나 분할 구매가 가능하단 점을 노려 개인적으로 약간의 토지를 사들였다.

이러한 토지 개혁은 빈농과 농업 노동자의 숫자를 줄이고 자영농의 숫자를 늘렸으며 이촌향도를 완화했다. 일부 사례지만, 몇몇 도시 빈민들은 농촌으로 재이주해 농업 노동자가 되거나 농촌에 산재한 수공업 공방과 소규모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도시 근교 지역의 토지를 중심으로 부르주아들의 토지 매수가 활발해 부르주아 소유 토지가 혁명 이전보다 2배 이상 폭증했다. 이는 자영농의 토지 보유량 증가에 비해 대단히 극적인 수준의 변화였다. 그래서 혁명 정부의 토지 개혁은 성직자와 귀족의 토지가 부르주아의 것으로 명의 이전했을 뿐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눈 앞의 토지를 부르주아들에게 빼앗긴 농민들의 실망감과 박탈감은 성직자에 대한 지지도와 부르주아의 토지 구매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던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슈앙파에 대한 지지가 급증하고 방데 전쟁이 일어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서부의 농민들은 타 지역에서 온 부르주아들이 농민의 것이 되어야 할 토지를 마구 사들이는 것을 불편해 했다. 심지어는 이에 대한 불만과 갈등이 폭발해 토지 매각에 참여한 부르주아들이 린치를 당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토지 개혁으로도 농촌 빈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고, 분익 소작제(Metayage) 또한 잔존했다. 혁명 정부의 토지 매매는 지나치게 빠르게 이뤄져서 상당한 규모의 토지가 외상과 신용 거래로 팔려 나갔고, 이러한 문제 때문에 혁명 정부는 예상한 것만큼의 재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망명한 귀족들이 가족이나 대리인을 통해 몰수된 토지를 구매하려 했고, 이러한 시도가 상당 부분 성공해서 개혁의 성과를 저해했다. 게다가,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뒤에는 혁명기에 이뤄진 토지 소유권 전환을 무효화하고 싶어하던 루이 18세 아직 매각되지 않은 몰수 토지를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35]

이러한 결과 때문에 영국식 인클로저 운동을 자본주의 경제 성장의 필수 요건으로 여기는 학자들은 토지 개혁이 프랑스의 성장을 방해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토지 문제로 몸살을 앓은 스페인, 이탈리아 등과는 달리 이후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국을 유지했고 현재도 프랑스는 자영농 강국으로 유명하다. 애초에 인클로저 운동을 자본주의와 연관지은 관점 자체가 세계사 교과서에 아직도 쓰여있는 것과 달리 매우 낡은 관점이다.

3.2.5. 스페인, 포르투갈

20세기 초 스페인은 지역별로 다른 토지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안달루시아엑스트레마두라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신음하고 있었다.[36] 갈리시아아스투리아스를 위시한 북부 지역은 인구 과잉과 영구소작농들의 토지 전대 문제 등으로 인하여 토지가 너무 잘게 쪼개져 있었다. 한편 카탈루냐는 프랑스와 비슷한 분익소작제가 포도농(rabassa morta)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일부 지역은 전통적 소작제에서 벗어나 일용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주의 영농을 시행하고 있었다. 상당수 농촌 지역이 실업과 사회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토지 개혁을 보완해줘야 하는 농촌 금융 또한 미흡한 상태였다.

이러던 중 1931년 알폰소 13세가 퇴위하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다. 당시 스페인에는 거의 모든 이념들이 정당을 만들며 난립해 신생 공화국에 참여하거나 신정부를 거부하였고 이런 세력의 파편화와 급조로 인한 정당의 취약함은 이후 공화국의 혼란과 내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국 노동 연맹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과 스페인 공산당은 부르주아의 공화국 정부를 냉소하며 토지 집산화 혁명을 꿈꿨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중앙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역시 궁극적으론 자영농 창출보단 토지 국유화와 집산화를 추구했다. 한편 중도파 공화주의자들은 토지개혁을 통한 사회 개혁과 정권 안정이라는 큰 틀에는 공감했지만 개혁의 정도와 좌파와의 협력 여부를 놓고 사분오열하였다.[37]CEDA를 세우게 될 우파들도 의견이 갈린 건 마찬가지로, 히메네스 페르난데스를 비롯한 토지개혁에 온정적인 가톨릭 공동체주의부터 농민당을 비롯한, 토지개혁에 가장 반대가 심했던 지주세력도 존재했고 팔랑헤와 같이 파시즘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그보다 오른편엔 공화국을 반대하는 왕당파와 카를리스타 세력이 있었다.

우선 제헌의회 수립 이전 출범한 임시정부는 소작 보호령과 일용 농업노동자 보호령 등의 임시조처를 취하고 토지개혁 입법은 제헌의회로 넘겼다. 제헌의회와 공화-사회 연립 정식 정부 출범 후 여러 정치세력에서 토지 개혁안이 제안되었으나 그 정도와 소유권의 사회화 논쟁 등으로 시간이 지체되었다. 의회 내 지주 세력의 조직적인 이의 제기를 비롯한 반대 활동 또한 지연에 영향을 끼쳤다. 결국 1932년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로 의회가 충격받고 나서야 농업부 장관 마르셀리노 도밍고의 안을 바탕으로 토지개혁안[38]이 통과된다. 하지만 이 법안은 협상과 타협 과정에서 여러 규정이 모호해졌기 때문에 좌익 세력들은 이 법안으론 농촌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거라고 냉소했다. 반대편에서는 수용 대상 토지와 적용 지역이 광범위하게 잡혀 중소지주들을 적으로 돌려버리는 실책을 범하였다. 한편 토지 재분배의 실무를 맡은 토지개혁청은 관료제와 비효율적인 정치 충돌, 정치인들의 무관심으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소작법, 경작강화령, 농업금융법안 등의 보조 법안 또한 이 시기에 논의되었고 특히 정부 조사관이 지정한 미경작지에 소작농들을 의무적으로 정착시키게 한 경작강화령은 당시 토지개혁법보다 더 큰 성과를 보였다.

1933년 카사스비에하스 사건의 여파로 공화-사회 연합이 실각하고 레룩스의 급진공화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레룩스 총리와 급진공화당은 전 정권 농업 법안의 '사회주의적'인 부분을 제거하는 온건한 방향의 수정을 기획하였으나 1933 총선에서 큰 의석을 확보한 CEDA는 헌법의 소유권 문제를 들며 개혁 반대를 시도하며 내각에 압력을 넣었다. 결국 경작강화령은 후퇴하고 행정구역령[39]은 폐지, 카탈루냐 지방정부의 차지계약법[40] 제정 시도 또한 막혔다. 토지개혁의 철회를 보며 좌절한 사회주의자들은 급진화되었고 차지계약법으로 인해 카탈루냐 분리독립 세력과의 갈등도 확산되었다. 한편 1934년 CEDA 의원들이 급진공화당 내각에 참여하면서 농업부 장관이 된 히메네스 페르난데스는 가톨릭 공동체주의에 의거해 소지주들을 보호하고 반역자 토지 몰수 조치의 철회등을 담은 새로운 토지개혁안을 추진했으나 당시 CEDA를 이끌던 힐 로블레스와 CEDA 당론은 페르난데스 보다는 대지주들의 주장을 따랐기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페르난데스의 사퇴 후 후임 농업부장관 니카시오 벨라요스의 주도로 사실상 개혁 취소나 다름없는 토지개혁 개정안이 통과된다. 개정안 통과 전까진 1932년의 토지개혁이 유지되었으나 토지개혁청 미지원 등으로 사실상 개혁 중지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1936년 중도보수 정권이 부정부패 스캔들로 몰락하고 좌익 공화주의자들, 스페인 사회노동당[41], 스페인 공산당[42]등의 좌익 세력은 인민전선을 만들어 정권을 탈환했다. 마누엘 아사냐의 인민전선 정권은 1932년 토지개혁을 부활시키고 공화-사회 연립정권 당시 미적거리다 개혁을 성사시키지 못한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듯 재분배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미 좌우익의 갈등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격화되어 결국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공화국 지역에서는 국민파 지지 지주와 도망간 지주의 땅을 몰수해 재분배 하는 것이 활성화되었고 아나키즘의 영향이 짙은 집산화 조직 역시 공화국 정부의 통제가 약해진 틈을 타 각지에 자리하게 된다. 한편 국민파 지역에서는 토지개혁의 성과를 청산하고 소작법과 경작강화령등으로 정착한 소작농들을 쫓아내는 작업을 거듭해 농촌 사회구조는 왕정 시절로 되돌아가게 된다. 결국 내전은 국민파의 승리로 끝나고 토지 개혁과 공화파 지방의 재분배 시도는 최종적으로 실패했고, 시골의 유효노동력은 이후 이촌향도 진행과 해외이민으로 흡수된다. 지금도 대토지 지역이었던 안달루시아, 엑스트레마두라 등의 남부 지역은 귀족 지주들이 다국적 기업농으로 바뀐 채로 가난한 지역으로 남아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2공화국 시대때는 인구과잉이 문제점이었다면 이촌향도가 진행된 이후로는 인구과소가 문제점이라는것이다.

한편, 레콘키스타라는 유사한 역사를 보유한 포르투갈 역시 북부는 자영농, 남부는 대지주 중심의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안토니우 살라자르 정권을 무너트리고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은 남부 알렌테주(Alentejo) 지역 등의 대토지를 협동조합과 농민 공동체에게 분배하는 시도를 하였으나, 1977년 우파 정권이 집권하며 정책 상당수가 회귀하여 토지가 대지주 손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현재도 포르투갈은 북부 자영농, 남부 대지주 위주의 토지 소유를 보이고 있다.

3.2.6.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통일 이후로도 프랑스 혁명 시 있었던 것과 같은 토지 분배 혹은 소작권 보호가 미비했고 특히 남부를 중심으로 이러한 사회구조가 빈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 대토지 소작제 중심의 남부와 북부 일부지역(포강 유역 및 해안가 습지대)를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실라법, 스트랄초법, 시칠리아법으로 구성된 토지개혁안은 지주 토지 중 미개간지를 유상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남부의 지주 중심의 지배 구도를 없애는 데에 성공했다. 5~30 헥타르의 토지가 농민들에게 분배되었으며 300 헥타르 이상의 토지 보유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물론 이러한 토지개혁이 마냥 곱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는데 이탈리아 공산당의 시칠리아 지부장이었던 지롤라모 리 카우시는 지주의 토지 중 100헥타르만 남겨두고 재분배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큰 호응을 얻어 1947년 전국 총선거에서 좌파 세력이 크게 승리하자 시칠리아에선 이러한 사태에 큰 불만을 품고 좌파/소작인 세력을 반대하는 우익 세력과 지주들이 산적, 마피아와 연합하여 좌익들을 공격하여 마구 살해한 '포르텔라 델라 지네스트라 학살'이 터지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 본토에도 알려져 수많은 좌우파 폭력을 낳게 되는 원인이 된다.[43]

한편으로는 법 제정[44] 및 시행 중 지주 세력의 입김이 많이 반영되었고 행정 비효율 등으로 인해 계획 실현이 흐지부지 된 지역도 많았다. 또한 농민들에게 나눠준 토지가 부족해 토지를 받지 못한 농민이나 너무 적게 받은 농민들이 많았고 이들의 경우 비슷한 시기 입안된 농지대출법을 이용해 농지를 구매해야만 했다. 그리고 후행작업인 관개 인프라 설치의 미비로 이렇게 받은 농지의 상당수도 황무지였다. 이후 경제기적을 겪으며 남부의 빈농들은 북부 및 타 서유럽 국가로 이주하며 인구 과밀의 해소 및 송금을 통한 극단적 빈곤의 완화를 겪었으나 이제는 인구 과소로 인한 경제 개발 실패가 남부의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3.2.7.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은 제국의 지배 민족이 다수인 지역으로, 1차대전 이후 지배계층이던 독일인과 헝가리인을 쫓아내고 개혁을 수행한 타 동구권과는 달리 (오히려 해당 지역에서 지주들이 쫓겨와 정착하던 와중인 만큼) 정치적으로 대지주 척결이 힘들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간기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지역에서 유의미한 개혁이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전간기 을 비롯한 도시 지역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였으나[45], 농촌 지역에까지 파급이 미치지는 못하였다.

두 나라의 차이는 2차대전 종전 이후에 극명하게 드러났다. 공산권에 편입된 헝가리는 동유럽 2세계의 보편적인 루트인 집산화 토지개혁을 거쳤다가 동유럽 혁명 이후 자영농화 되며 대지주 중심의 체계를 벗어나나, 사실상 친서방인 중립국으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대지주 토지 몰수보다는 소규모 자영농을 지원하여 농가 소득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정책이 이루어졌다. 원래부터 푸스타 평원 지대에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이 많았던 헝가리와는 달리 알프스 산악지역인 오스트리아는 대지주보단 영세농이 많았던 관계로 이러한 정책은 큰 갈등 없이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3.2.8. 발칸 반도

역사적으로 오스만 투르크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은 발칸 반도 지역은 제국의 지배계층인 독일인, 헝가리인, 이슬람교도 지주가 많이 존재하는 지역[46]이었다. 그러나 현지 토착 지주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존재하였고, 이러한 배경은 이 지역의 토지개혁 양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발칸의 각국은 독립한 이후 민족국가 수립의 목적을 겸해, 옛 제국의 지배층이던 독일인, 헝가리인, 이슬람교도 지주들을 쫓아내고 토착 민족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개혁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민족주의 여론을 등에 업고 지주들을 외국으로 쫓아낼 수 있었기에 타 국가들 대비 상당히 손쉽게 이루어졌으나, 현지인 귀족 지주 역시 존재하였기에 이들 대상으로 일부 보상이 이루어지는 유상몰수 역시 진행되었다. 이러한 개혁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그리스 왕국의 1917 토지개혁법[47],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1919 토지개혁법[48], 루마니아 왕국의 1921 토지개혁법[49], 불가리아 왕국의 1920 토지개혁법[50] 등을 들 수 있다. 알바니아 왕국의 경우, 정치 혼란과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인해 공산화 전까지 유의미한 개혁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각국은 독립된 민족 국가로써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51]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그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발칸 지역이 공산화되며 개인 토지들이 무상 몰수되고 집단농장으로 재분배되었다. 농민이 직접 협동조합처럼 집단 농장을 운영하는 자주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제외하면, 소련식 집단농장 시스템이 도입되며 발칸의 각 국가들은 타 동구권과 유사한 토지 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권이 붕괴되며 발칸 각국의 토지 제도는 자영농화되나, 그 과정에서 부패 및 개혁의 미진, 구 공산당 관료들의 토지 확보 등이 문제가 된 사례가 존재한다.

3.3. 아메리카

3.3.1. 미국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홈스테드 법(Homestead Acts)을 통과시킨다.[52] 서부의 넓은 미개발지를 분배해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해 시행된 이 법은 최소 5년동안 그 땅에서 농사를 짓는 조건으로 정착 희망자에게 160에이커씩 서부의 국유 미개발지를 분배하였다. 토지 재분배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 법을 통해 서부 개척에 뛰어든 서민층과 이민자들은 서부에서 자영농으로 정착할 수 있었고 미국 면적 10%에 달하는 1억 6천만 에이커의 땅을 평등하게 분배해 무분별한 대농장 지주 양성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1976년 홈스테드법은 최종적으로 종료되었고 예외적으로 알래스카에서만 1986년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흑인 노예들은 1865년 완전히 해방될 때 까지 홈스테드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남북 전쟁 막바지인 1865년 1월, 군정장관 윌리엄 테쿰세 셔먼은 점령지의 노예농장을 몰수해 흑인 해방노예들에게 40에이커와 노새 한마리씩을 분배한다는 칙령을 선포했으나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대통령 직을 물려받은 앤드루 존슨은 재건 법령 제1조로 이를 무효화시키고 땅을 농장주들에게 반환했다. 이후 1866년 남부 홈스테드 법(Southern Homestead Act of 1866)이 실행되면서 남부의 공유지를 흑인들에게 판매했으나 빈곤한 흑인들이 구매하기에는 땅값이 너무 비쌌고 혜택이 크게 돌아가지는 못했다. 결국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흑인들은 옛 농장주들의 땅에서 소작을 해야만 했고 흑인 인권 향상과 남부 사회구조 변화를 일으킬 기회였던 남부 토지개혁은 실패한다.

한편 토지를 부족의 공공재로 취급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백인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 1887년 도스 법(Dawes Act)이 실행되었다. 이를 통해 부족 공유지가 원주민 자영농들의 사유지로 분할되었지만 상당수 토지가 유휴지로 취급받으며 백인들의 손에 들어가 원주민 소유 토지의 총량이 9000만 에이커 정도 감소하였다. 미국의 원주민 지배가 축출 및 토지 강탈에서 고유 사회구조 파괴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법이다.

3.3.2. 멕시코

멕시코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후 멕시코로 이주한 콩키스타도르들은 지역 원주민 공동체를 봉건적으로 지배하는 엔코미엔다(Encomienda)를 설치했다. 스페인 중앙정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원주민을 보호하고 멕시코 지역에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콩키스타도르들을 통제하고 엔코미엔다를 해체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으나 현지 유럽인들이 부과한 과중한 노동과 전염병 등으로 원주민 인구는 급감했기 때문에 이는 실패했다. 결국 원주민 공동체가 사라진 빈 땅에는 유럽계 크리오요들이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기반으로 아시엔다(Hacienda)라 부르는 대농장을 설치했고 원주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이로써 멕시코 또한 다른 중남미 지역처럼 대지주 위주 사회가 뿌리박혔다.

멕시코가 독립한 이후로도 토지개혁은 실현되지 않았다. 1855년 후안 알바레스와 베니토 후아레스가 이끄는 자유당이 산타 안나를 축출한 이후 자유주의 신정부는 여러 진보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 일환으로 1856년 레르도 법(Ley Lerdo)이라 부르는 토지개혁 법안이 시행되었다. 레르도 법은 프랑스 혁명기의 토지개혁을 모델로 하여 가톨릭 교회와 원주민 공동체 소유 토지를 강제로 유상몰수하여 판매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당시 멕시코 소작농들은 땅을 구매하기에 너무 빈곤했고 레르도 법으로 몰수한 토지는 대지주와 엘리트층 수중으로 떨어졌다. 결국 자유당의 개혁은 원주민 공동체가 파괴되고 대농장이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1876년부터 34년 동안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사실상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멕시코를 지배했다. 디아스는 농업 효율화와 자본주의 이행을 모토로 삼아 대농장주를 지원하고 외국인(특히 미국인)의 멕시코 토지 구매를 장려하며 크리오요와 외국인 지주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대농장 사회를 만들었다. 서민층과 소작농들은 디아스 시기 토지 손실을 크게 겪어 땅 없는 순수소작농의 비중이 크게 올라갔다.

1910년 멕시코 혁명으로 디아스 정권이 종식되었다.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등의 농민 출신 혁명 지도자들은 토지개혁에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스레 지주 권력은 혁명을 겪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혁명을 이끈 프란시스코 마데로 대통령은 토지개혁에 미온적이었고 이후 1914년, 쿠데타로 마데로를 쫓아낸 독재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를 물리치는 혁명을 주도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역시 토지개혁을 꺼리며 정권을 잡은 후 사파타를 제거했다.

대지주 출신 카란사는 토지개혁을 거부했으나 중도파 알바로 오브레곤과 사파타 암살 후에도 여전히 봉기를 포기하지 않은 판초 비야는 개혁을 요구하며 카란사 행정부를 압박했다. 카란사는 원주민 토지공동체에서 비롯된 멕시코식 농업 공동체 에히도(ejido)[53] 개념을 꺼내들며 개혁을 실시하지만 실질적으로 농민에게 유리한 변화를 틀어막고 지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려 했다.

오브레곤은 카란사와의 사이가 틀어진 후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성공해 대통령에 취임하는 데에 성공했다. 혁명의 최후 승리자가 된 오브레곤은 사파타가 실시한 모렐로스 주 토지개혁을 인정하며 사파티스타를 진정시키고 판초 비야에게 토지를 수여할 것을 약속하며 비야의 반란 또한 끝냈다. 이후 오브레곤은 에히도에 기반한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나 우선순위를 높게 두지 않아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오브레곤 이후 대통령이 된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는 에히도보다는 자영농 위주의 사회를 이상적으로 여겼으나 오브레곤의 개혁을 그대로 이어나갔다. 개혁 속도는 여전히 지지부진했고 카예스의 산업화 플랜은 에히도와 소농들보다는 대지주 기업농들에게 이득이 되었다.

오브레곤이 시작한 토지개혁이 활성화되고 대부분의 토지가 분배 완료된 시기는 1934년 농업법이 통과된 라사로 카르데나스 집권기였다. 카르데나스는 공동체 단위로 땅을 받았지만 내부적으로는 개별 영농을 시행하는 기존의 에히도보다 집단농장처럼 돌아가는 집단 에히도에 지원금을 더욱 주며 집산화를 장려하였다. 한편 디아스 시기 이후로 꾸준히 증가한 미국인 소유 토지의 몰수로 인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카르데나스 재임 기간동안 총 18만 제곱 킬로미터의 토지가 재분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멕시코의 에히도는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 하락하고 식량 자급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994년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정권기 멕시코가 NAFTA에 가입하며 에히도 제도를 폐지하고 지주의 소유권과 매매권 행사를 인정해, 멕시코의 토지개혁은 막을 내렸다. 현재 멕시코 농민들의 대다수는 자기 토지를 가지고 있으나 그 양이 너무 적어 지주의 농장에서 소작을 하거나 공장 노동을 하며 수입을 벌충해야 하는 자소작농 상태이다.

3.3.3. 칠레

20세기 초 거대한 장원인 아시엔다를 중심으로한 대토지 장원 농업 체계였던 칠레의 농업은 열악한 소작인들과 농장 노동자들의 생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30년대 칠레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한 요구가 일어났으나 공업화를 중시한 정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한편 점차적으로 줄어드는 농업 생산량을 해결하기 위해 1950년대부터 농업 부분에 대한 투자와 토지개혁에 대한 진보 계층의 여론이 수립되었다.

1962년 호르헤 알레산드리 대통령의 농지개혁법이 처음으로 통과되었다. 이 법은 국유지를 재분배하는 개혁안이었다. 1967년에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정부가 농민 조직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새로운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농업개혁공사인 CORA를 설치하여 토지개혁을 시행해나갔고, 1400개의 농장과 350만 헥타르의 토지가 국유화 되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집권하자 농지개혁은 더 강화됐는데 아옌데는 80헥타르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사회주의적인 농지개혁을 밀어붙였다. 아옌데는 최대한 빨리 대토지 농장 체계를 해체 하는데 중점을 두었는데 1970년에서 1973년까지 대지주로부터 4691개의 부동산과 장원을 몰수했다. 이는 칠레 토지 사유재산의 약 1/5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또 농장주에게 돈을 받지 않고 일하는 대신 농장 일부를 얻어서 생활하는 농장/목장 노동자들인 인퀼리노 제도도 없앴다.

한편 토지분배 과정에서 이때 대지주들과 농민 조직간에 충돌이 있어 폭력적인 점거와 몰수 방식이 있었고 1972년 대법원은 대지주들에 대한 토지소유권을 보장하는 판결을 통과시켰다.

칠레 토지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다르게 몰수된 토지가 대부분의 소작인들에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소작농에게 땅을 준게 아니고, 국가가 몰수해서 집단농장으로 만든 뒤 경작권만 분배한 것이다.[54]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혁명 과정이 필요 없는 칠레에서는 굳이 소유권을 나누어 주어서 인민들 지지를 얻을 필요가 없었고, 바로 농업 집산화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 집산화는 국가가 시골의 탈자본화와 농업 생산품의 가격 지정, 상품의 상업화 등등 모든것을 국유화하고 그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필연적으로 생산성의 하락을 가져왔고 구리 광산 국유화로 미국,영국 등의 제재를 받는 상황에서 칠레 경제에 더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칠레 정부는 1973년말에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으며 그 수치는 5억 5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경제 혼란과 농촌에서 지주와 농민조직간의 갈등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은 정정 불안을 가져다 주었고 결국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아옌데 정권은 붕괴한다.

집권한 피노체트는 아옌데의 토지개혁을 비판하고 1974년부터 개인소유권에 기초한 가족농 육성을 목적으로 집단농장 농지를 분배함으로써 농지개혁을 마무리하였다. 1976년까지 10만 9,000호의 농가와 67,000명의 마푸체(Mapuche) 원주민 후손이 소농으로서의 재산권을 부여받았다. 농지개혁을 마무리한 결과 몰수되었던 농지의 33%는 이전 소유자에게로 되돌려졌으나, 41%는 소농가에게로, 그리고 나머지는 경매로 처분(16%)되거나 공공기관(10%)으로 이전되었다. 농지개혁이 마무리되면서 CORA는 1978년에 폐지되었고, 1980년에 농지 임대와 분할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농지시장에 대한 유연성이 제고되었다.출처 칠레의 주요 산업 Kiep-Kotra 김진오,성기주 53페이지

3.3.4. 과테말라

과테말라의 독재자 호르헤 우비코의 폭정이 1944년에 끝났다. 후안 호세 아레바로 정권 하에서 국방장관이었던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은 원래 군부 출신의 국방장관이었지만 진보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인사였다.

1950년 과테말라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은 미국의 과일 농산물 회사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농토 독점과 대지주들의 대토지 소유를 개혁하고 문맹퇴치와 인디오들의 권리 신장을 적극적으로 외쳤으며 이리하여 그가 이끄는 혁명행동당은 총선에서도 압승하게 된다. 이는 '과테말라 혁명' 으로 불리게 됐으며 급진적인 개혁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농토를 압수한 것은 미국 회사의 사유재산을 압류한 것으로, 배상은 단지 토지평가금액만을 배상했다. 왜냐하면 당시 이 농토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놀리고 있었는데 이는 그로미셸 종 바나나를 괴롭히고 있는 파나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미국 정부의 가치 평가 배상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UFC의 결정적인 반발을 사게되었다. 과테말라 정부에서야 놀리고 있는 땅이니 있는 그대로 평가했다지만 회사측 입장에서는 터무니 없는 헐값에 정부가 뺏았다는 것이다. UFC는 회사의 로비력을 총동원해 워싱턴의 정치인들에게 각종 로비를 했으며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하코보 정권을 사회주의 혁명 정권으로 규정했다. 결국 미국 정부와 CIA는 과테말라 군부의 전직 대령이었던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부추겨 PBSUCCESS 작전이라는 1954년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과테말라군은 480명 규모의 초기 쿠데타군을 거의 제압했으나 미국의 용병부대가 본격적으로 참전하자 미군과 강한 연계가 있던 군부의 반공인사들과 고위 장교들이 전투에 참가하길 거부하고, 미군과 싸우기를 꺼리는 심리를 노린 CIA의 라디오 방송 심리전에 넘어가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정권은 군부에 버림받고 붕괴했으며, 토지개혁도 실패로 돌아간다.

카를로스 아르마스의 쿠데타는 성공했지만 지지 기반이나 정당성이 전무했기에 대통령이 되자마자 농지개혁 무산에 분노한 농민들의 반란, 군부의 항복에 실망한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미국의 괴뢰짓에 대한 민족주의 세력의 반발, 좌파 노조의 봉기, 정치적 숙청에 맞선 야권의 반발이 합쳐져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아르마스는 집권 3년만인 1957년 좌파 동조자인 경호원의 배신으로 암살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에도 군부 정권은 붕괴하지 않고 미구엘 이디고라스 푸엔테스가 집권하여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소련이 지원해주는 쿠바, 니카라과를 비롯한 공산권이 좌익 게릴라를 지원하여 과테말라는 자그마치 36년간의 과테말라 내전에 시달리게 된다.

3.3.5. 브라질

브라질은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봉건적인 토지 수여 세스마리아(sesmaria)와 식민 정복자들의 지주화로 대지주 사회가 정착하였다. 현재까지 토지 집중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여 전체 토지 소유자의 2.8%가 전체 농지의 56.7%를 차지하고 있고 62.2%의 인구는 단지 7.9%의 땅을 나눠가지고 있는 극심한 불평등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사회 전반의 빈부격차를 불러오고 이로 인한 치안 악화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등, 브라질의 미래를 좀먹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왔다.

1822년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한 후, 1850년 토지 소유의 기본 원칙을 다루는 법(Lei de Terras)이 공포되었는데, 토지 무단 점유를 엄히 처벌하고 토지 집중을 부추기는 등 대지주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근대적 토지 제도 확립과 황실 재정 확충을 위해, 브라질 황실은 식민지 시절 포르투갈 왕실이 봉건적으로 수여한 영지들을 일괄적으로 거두어들인 다음 황실이 독점적으로 주도하는 공매를 통해 다시 원 지주들에게 소유권을 확립시켜주는 식의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랬기에 1850 토지법은 미국처럼 유럽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자영농을 육성하기 보다는 기존 지주들의 대농장 소유가 더 공고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황제 페드루 2세와 황태녀 이자베우 공주는 당시 브라질에 보편적이었던 노예제에 문제의식을 가져, 1886년 60세 이상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고 1888년 노예제를 완전 폐지하였다. 대지주들은 이에 반발해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을 앞세워 1889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황실을 축출, 브라질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대지주들은 노예제를 복구하는데에는 실패하였으나 권력을 장악해 상파울루주의 커피 농장주와 미나스제라이스주의 낙농업자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카페 콩 레이치(café com leite) 시대를 열었다. 1공화국 정부는 지방자치를 명목으로 귀속 토지들을 대지주의 영향력이 강한 각 주정부에 나누어 주었고 이를 틈타 농업 엘리트들은 주정부가 관리하는 땅문서를 위조해 자신들의 농장을 넓혀나갔다.

1930년, 히우그란지두술 출신의 제툴리우 바르가스는 상파울루의 독주에 반발한 미나스제라이스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바르가스 시대를 열어 1945년까지 독재를 펼쳤다. 바르가스는 개발독재자임에도 최저임금 도입, 노동권 보장 등의 친노동자 정책을 펴는 면을 보였지만 토지개혁을 공약했으면서도 이를 실현하지는 못했다. 1945년 바르가스 정권이 무너지고 다음해 1946년엔 브라질 제4공화국이 수립된 후, 1961년에는 친토지개혁 성향인 주앙 굴라르가 대통령이 되었다.[55] 굴라르는 우선 1962년 토지개혁 감독청 SUPRA를 설치하고 1963년에는 농촌 노동자법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1964년 본격적인 토지개혁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려 하였으나 대지주의 지원을 받는 군부는 1964년 브라질 쿠데타를 일으켜 이를 무산시켰다.

쿠데타 이후 카스텔루 브랑쿠 장군이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며 브라질 군사정권 시대가 시작되었다. 친기득권이었던 군사정부는 소작농들의 토지개혁 요구를 억압했고 상공업 경제 성장에서는 성과를 보였지만 농업현대화를 명목으로 대농장을 밀어주며 대지주들의 농지 소유 비중이 증가해 농업 분야는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었다. 또한 아마조니아 난개발을 실시해 농업 엘리트들의 대농장 확대를 돕고 주요 불만계층이었던 북동부 빈농들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진행하였다. 아마존 개발 정책을 틈타 엘리트 대농장주들은 서류 위조를 통해 자신들의 농장을 더더욱 넓혀나갔다.

반독재 민중 운동의 결과, 1985년 군사 정부가 끝나고 조제 사르네이가 대통령이 되며 토지개혁 시도가 다시 시작되었다. 사르네이 정부는 1986년 국가토지개혁계획을 입안하고 1988년 신 연방헌법에 토지 수용과 관련된 조항을 삽입해 토지 개혁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사르네이와 이타마르 프랑쿠 정권기 농지 재분배와 농민 정착이 꾸준히 진행되었으나 기득권의 반발과 소유권과 관련한 헌법 해석 관련 논쟁으로 지지부진한 개혁 속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2003년 집권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토지개혁을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임을 강조하며 대통령이 되었지만 외부 경제 사정과 기득권층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큰 개혁을 진행하지는 못했고, 집권 2기 후반인 2008년부터 2010년까지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대지주들의 아마존 난개발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 반토지개혁이라는 비난을 받는 등 여러 한계를 노출했다. 현재에도 브라질의 토지개혁 시도와 요구는 지속중이지만 문제 해결은 요원한 상황이다.

한편 브라질 빈농들은 1930년대부터 꾸준히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저항을 벌였고 이는 1984년 창립된 무토지 농민운동(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 MST)으로 이어졌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은 무토지 농민운동은 대지주 소유의 유휴 토지를 점거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농촌 복지 시설 구축과 농민 재교육 등의 사회 운동 역시 벌이고 있다. 지주 세력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농촌 민주 연맹(União Democrática Ruralista)을 결성하고 농장에 무장 경비원들을 고용하였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브라질의 사회적 갈등은 1996년 카라자스 학살을 비롯한 무력 충돌로 비화되곤 한다.

3.4. 아프리카

3.4.1. 이집트

1952년 무함마드 나기브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집트 왕국을 무너트리고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신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나세르는 당시 이집트의 토지 집중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유상몰수 유상분배 토지개혁을 추진한다. 200 페단 (약 27 헥타르) 이상의 토지보유가 법으로 금지되었고 토지 임대료 상한선, 최소 임대 기간 설정, 농업 노동자 최저임금, 농업협동조합 창설 등으로 구성된 개혁법안은 아스완 댐 건설 등과 함께 나세르의 대표적인 내정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1958년 토지 몰수 보상 채권의 이자율과 상환 기간을 재설정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혁의 효과가 제한적이라 전체 경작 가능 토지의 15%만이 재분배되었고 이집트가 점차 도시화되며 효과가 떨어졌다. 결국 1980년대 안와르 사다트 집권기에 토지개혁법이 철폐되며 이집트의 토지개혁은 막을 내린다.

3.4.2. 에티오피아

파시스트 이탈리아짧은 강점기간을 제외하면 식민지배를 겪지 않은 에티오피아 제국은 전통 질서에 기반한 복잡한 토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암하라인 권역 등 원조 에티오피아에 해당하는 북부 고원 지역은 씨족과 혈연에 기반한 토지 공동체 시스템인 리스트(rist)나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보유한 토지인 세몬(semon)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메넬리크 2세의 정복으로 에티오피아에 편입된 오로모인 지역 등 남부 고원은 정복지를 국유지(마데리아, maderia)로 편입 후 측근과 유력 관리,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분봉하며 지주 - 소작농 시스템인 게바르(gebar)가 정착하였다. 그렇다보니 북부는 소작농 비중이 7~16% 정도로 매우 미미했으나 남부는 암하라인 지주들이 토착민을 소작 지배하는 시스템이 자리잡아 농촌 인구의 37~73%가 소작농이었다. 한편 고원의 암하라인들이 말라리아와 기후 문제로 접근을 꺼린 동아프리카 지구대오가덴 지방 등 저지대는 토착 부족들이 반농반목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말라리아가 퇴치되기 시작하며 아파르족소말리인이 거주하는 저지대에 관개농업이 가능해지고 암하라인 엘리트와 다국적 농업기업이 대농장을 짓기 시작하며 지역의 반농반목 문화가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남부의 소작제가 높은 소작료와 부실한 농업 현대화등의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북부의 리스트 제도는 인구 증가로 인한 토지 파편화와 토지 매매 제한, 현대화 지연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며 1960년대 에티오피아 사회에 토지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개혁에 미온적이었는데, 이는 지주 대다수가 황족과 황실 지지층이었던데다가 북부의 리스트 농민 중 개혁과 토지 등록에 저항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4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쿠데타가 일어나며 제정은 폐지되고 군사정부 데르그(Derg)가 정권을 잡았다. 멩기스투는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토지개혁을 진행하며 토지 소유권을 전부 국유화시키고 각 농가당 최대 10헥타르 땅의 경작권을 부여했다. 반자본주의의 기치하에 토지 매각, 저당, 교환, 상속, 임대가 모두 금지되었으며 평등주의 이념을 따라 지역에 새로 이주한 이들에게 토지를 평등하게 나눠주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도시의 토지와 주택 역시 전부 국유화되었다. 데르그 정부는 농업 집산화를 추진해 농민들을 협동조합으로 조직화하고 국영 집단농장을 꾸준히 확대시켰다.

데르그의 사회주의적 토지개혁은 봉건적 질서를 타파하고 농민에게 좀 더 유리한 사회구조를 제공해주었다. 그렇기에 소작제에 허덕이던 남부에서는 개혁을 환영했으나 북부의 리스트 농민들은 농업 국유화에 반발하며 제국 시절 에티오피아의 중심이었던 북부는 멩기스투 정권에 가장 격렬히 저항하는 지역이 되었다.[56] 저지대는 개혁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지역으로 기존 부족의 방목지에 대한 법적 권리를 인정받는 형식으로 개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평등주의적 토지 제도는 인구 폭증과 결합되며 토지 파편화로 이어졌고[57] 농민들은 부족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토지를 거래했다. '레드 테러'라고 불리운 멩기스투 정권의 폭압성은 농업 정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공산주의 이념에 기반한 식량 강제 징발과 인구압 해소를 명목으로 강제 이주 및 재정착 정책 등이 시행되어 개혁의 호오와는 별개로 데르그의 인기는 남부에서도 매우 낮았다.

결국 공산권이 몰락과 반군 준동이 겹치고 농민들의 비공식 토지 거래를 막을 수 없게 된 1990년, 데르그의 후신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 정부는 혼합 경제 프로그램을 발표하며 토지 임차, 차지, 양도등을 허락하게 되나 여전히 경직된 제도로 인해 실효성은 낮은 조치였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91년, 멩기스투는 멜레스 제나위의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반군에게 패배해 멩기스투 독재정권은 무너지게 된다. 많은 이들이 탈공산화 개혁을 기대했으나 EPRDF 역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사회 평등과 보유의 안정성을 명목으로 자영농화와 토지 소유권 인정 대신 상속, 증여, 양도가 가능한 국유 토지 무상 임대를 기반으로 한 중국식에 가까운 토지제도가 도입되었다. 도시의 건축용 필지 역시 국유 토지의 차지권과 건물 건설권을 국가 주도 경매에 부치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토지 문제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토지의 파편화와 비대한 국가 관리 조직의 부패 등에 의거하여 자영농을 요구하고 있다. 2018년 아비 아머드 알리 총리가 권력을 잡고 멜레스 제나위의 잔재를 일소하였으나 토지 문제보다는 티그라이 전쟁 등의 정치적 혼란 해결이 더욱 중요한 상황인지라 현재까지 눈에 띄는 개혁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3.4.3. 짐바브웨

짐바브웨 토지개혁은 식민지배와 백인 농장주들에 대한 저항, 인종갈등이 겹치면서 유럽-아프리카 문제의 주된 갈등 중 하나로 다뤄진다.

1965년 로디지아가 영국에서 일방적으로 독립한 이래 이언 스미스의 백인 정권은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백인들에게 굉장히 유리하고 비옥한 토지를 할당하는 등 차별적 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토지정책은 짐바브웨의 흑인 투쟁을 가속화 시켰으며 결국 로디지아 내전이 발발하였다.

1980년 로디지아가 붕괴하고 랭카스터 하우스 협정을 통해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흑인 정권은 짐바브웨 공화국을 정식으로 출범했다.

독립 당시 1%의 백인 농장주가 전체 토지의 70%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는 흑인 생계형 빈민,소작농들에게 크나큰 불만으로 다가왔다. 로버트 무가베는 처음엔 공산주의식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실시하려고 했으나 영국과 백인 농장주들의 반발로 랭카스터 하우스 협정에 따라 유상몰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전쟁때 피폐해진 것도 있고 1987년까지 계속된 개혁정책으로 백인들의 토지소유는 20%가량 줄어들었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부터 무가베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플레이션이 높아지고 경제난과 식량난 때문에 흑백갈등이 다시 심해젔다. 또 90년대초 랭카스터 하우스 협정이 만료되고 영국의 유상몰수를 위한 자금 지원이 끊기자 무가베는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흑인 농민들 편을 들어 백인 농장주에 대한 강압적인 토지 몰수 정책을 다시 실시하였다. 즉 지지율이 떨어져 가는 정권 유지를 위해 토지개혁을 하나의 카드로 활용한 것이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영국과 서구권을 달군 짐바브웨 토지개혁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내전 당시 흑인 참전 군인[58]들을 중심으로 독립 후에도 오랫동안 무소불위의 경제권력을 휘둘러오던 백인들에 대한 강제적인 토지 몰수가 시행됐다. 이 시기에 수많은 백인 농장주들이 폭행-고문-살해 당하고 짐바브웨에서 추방됐으며 재산을 빼앗겼다. 물론 백인 농장주들에 대한 문제도 있었는데 이들 지주들은 흑인 농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백인 민병대가 사적제재를 가하는등 백인의 횡포도 문제였다. 이렇게 이들에게 쌓인 불만이 터저나온 것이다. 여하간 추방된 백인 농장주들은 남아공이나 영국으로 가서 여론을 움직였으며 영국과 서구권의 국제 제재가 이어지면서 한때 남아공의 빵바구니로 불리던 짐바브웨의 농업 생산량과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농장주들에게서 빼앗은 토지를 분배 받은 흑인들은 백인들의 귀환이나 토지개혁을 되돌리는 것에 대해선 철저히 반대하고 있으며 무가베가 독재를 했든, 경제정책을 실패했든, 선진 농업기술로 짐바브웨 농업을 지탱하던 백인 농장주들의 탈출로 인해 농업 생산성이 엉망이 됐든, 백인 식민세력에 대한 증오와 토지개혁에 대한 옹호는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 백인 농장주들도 귀환이나 토지 회복은 포기하고 대신 금전적 배상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일부는 여전히 귀환과 토지회복을 원하는 층도 있다고 한다.[59]

결국 로버트 무가베 정권이 붕괴하고 에머슨 음낭가과[60]가 대통령이 된 후 짐바브웨는 2020년에 과거의 무상몰수로 인한 손해를 백인 농장주들에게 배상하는 방안을 결정했다. 배상 금액이 무려 35억 달러(약 4 2000억 원)이다![61] 기사 영국 네티즌들은 무가베의 경제 파탄과 부정부패[62]를 빌미로 '현 짐바브웨 정부가 백인 농부들에게 보상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중.[63] 데일리 메일 기사 웃기게도 영국 언론들은 과거에 짐바브웨의 독립유공자 보훈 연금이 짐바브웨 경제의 파탄 요인 중 하나라고 진지하게 주장했던 주제에[64] 백인 농장주에 대한 배상금으로 짐바브웨 경제가 망가질 거라는 주장은 전혀 안 하고 있다.(...) 설령 그 독립유공자 대우가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의 원인이 된 독립유공자 후손 공무원 30% 할당급으로 진짜 과도한 게 맞더라도 그 이상으로 과도한 배상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3.4.4. 남아프리카 공화국

유럽인의 도착 이전, 남아프리카 지역 서부 건조지대에는 코이산족이 목축과 수렵채집 위주의 생활을 영위했고 동부에는 반투족이 정착하여 거주하였다. 이 중 농업에 불리한 드라켄즈버그 산맥 북쪽 고원지대에는 목축 위주의 소토족, 츠와나족 등 소토-츠와나 제족이 거주하였고 산맥 남쪽의 풍요로운 아열대기후 지역에는 농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줄루족, 코사족 등 응구니계 종족이 정착하였다. 이들은 토지의 사적 소유가 아닌 부족 중심의 자원 공유사상을 지니고 있었고 추장과 촌장이 부족원들에게 관습적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625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얀 반 리베크의 주도하에 케이프타운을 개척하며 네덜란드령 케이프 식민지를 건설, 유럽인의 식민지배 시대를 시작하였다. 네덜란드인들과 위그노 등의 개신교도들로 구성된 식민 개척자들은 내륙의 코이산족을 몰아내며 사적 소유 토지를 넓혀나갔다. 그들은 코이산족을 노동자로 부리고 인도, 동남아 등 아시아에서 노예를 끌고 와 상류층처럼 군림하며 중남미와 유사한 인종 카스트제를 확립하였다. 백인 소유 토지에 종속된 하층 노동자로 전락한 코이산족과 아시아계들은 백인들과 혼혈되며 케이프 컬러드의 조상이 되었다. 케이프 식민지는 확장을 거듭하며 코사족 등 동부의 반투계 종족들과 만나게 되는데 반투족들은 코이산족보다 복속이 힘들었기에 식민지의 확장은 1차로 저지되었다. 이렇게 남아공 서부 지역은 유색인종이 하층민으로 노동하는 백인 소유 토지 다수 지역이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케이프 식민지의 지배권은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갔다. 당시 국제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도하던 영국은 노예 수입을 금지하고 케이프 식민지내 코이산족의 권리를 확립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고 보어인들은 인종 카스트제를 뒤흔드는 이러한 조치에 격렬히 반발하였다. 영국 식민당국과 보어인들의 마찰은 더더욱 거세져 보어인들은 그레이트 트렉(Great Trek)이라 불리는 대이동을 단행해 동부 반투족 지역으로 대규모 이주를 단행하였다. 마침 반투족 지역은 줄루족샤카대왕이 줄루 왕국을 건국해 정복 전쟁을 벌이는 음페카네(Mfecane)로 혼란했기에 보어인들의 침투는 성공해, 트란스발 공화국, 오라녜 자유국, 나탈 공화국이 남아공 동부에 건국되었다. 보어계 공화국들은 반투족들의 땅을 상당수 빼앗았고 반투계 부족 공동체 토지는 백인 토지와 확실히 구분된 채 쪼그라들었다. 한편 케이프의 영국 식민정부는 보어인들과 줄루 왕국의 정복으로 쫓겨난 피난민들을 위해 보류지 개념을 도입해 피난온 반투 공동체가 거주하게끔 하였다.

영국과 보어인들의 갈등은 결국 1880년 보어 전쟁을 일으켰고 영국은 보어인 게릴라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초토화 작전과 강제수용소를 이용한 끝에 전쟁에서 승리, 보어계 공화국들을 멸망시키고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이와 동시에 동부의 반투 부족 땅도 보류지로 분류되었다. 이후 영국은 1910년 케이프, 트란스발, 오렌지, 나탈 4개 식민지를 통합해 남아프리카 연방을 설립, 자치권을 부여하며 아프리카너 엘리트들과 타협해 선거 규정 및 토지 소유 비중 등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강화시켰다. 특히 1913년 통과된 원주민 토지법(Natives Land Act)은 흑인이 거주하는 보류지를 남아공 영토 전체의 10% 정도로 제한하고 흑인의 토지 거래를 제한하였으며 백인 소유 토지에서 흑인 소작농을 쫓아내 소작보호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무토지 임금노동자로 전락시켰다. 보류지 내에서는 정책적으로 근대 농업 기술이 도입되고 신탁업체를 통한 간접적인 보류지 확장도 허용되긴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1937년 흑인의 도시지역 토지 구매가 금지되었다. 이후 여러 인종분리 법안들이 통과되며 1948년부터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정립되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 정부는 기본적으로 도시 흑인들을 쫓아내 소웨토를 비롯한 흑인 게토와 반투스탄에 강제로 수용시키고 신탁업체를 통한 보류지 확장 또한 폐지시켜 최대한 반투계 흑인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흑인 재정착지에 거주하는 값싼 노동력을 백인 소유 광산, 농장, 공장에서 임금노동자로 부려먹을 수 있게끔 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아공의 농지는 백인 소유 근대적 상업 농장과 반투스탄의 전통적 부족 공동체 토지로 이원화되었다. 이는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가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시킬 때까지 지속되었다. 1991년 데 클레르크 정권의 토지개혁 백서는 기존의 인종차별 법안을 철폐하고 흑인의 법적 권리를 평등하게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으나, 백인 소유 토지의 강제몰수를 거부하고 흑인 부족 공동체의 토지 관습을 강화하기보다는 흑인 사회에도 근대적 토지 사적 소유를 널리 퍼트리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신헌법 제정 중 기존 백인 정권과 아프리카 국민회의간의 협상 과정에서 사유재산 보호 조항의 삽입이 결정되며 토지 강제 몰수는 위헌이 되었다.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집권한 넬슨 만델라는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식민 강탈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시정을 목표로 하여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개혁은 1913년 원주민 토지법 시행 이후 몰수당한 토지에 대한 보상, 소작농 및 농촌 임금노동자의 소작보호권 및 고용 안정성 확보, 백인 토지 재분배를 목표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헌법에 사유재산권 보호가 명시되어있고 만델라가 화해와 공존을 모토로 삼았던 터라 강제적 몰수가 행해지지 않은 자발적 판매자 - 자발적 구매자 매매에 정부 보조금만 제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대다수 백인 농장주들이 토지 판매에 응할 리 없었고 재분배 토지량은 전체 거래 토지량의 3%를 밑돌았다. 이마저 1999년, 토지문제부 장관이 교체되고 세계은행신자유주의적 조언을 받아들이며 빈민 토지 구입 보조금이 철폐되고 백인 상업농을 보존하는 식으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강탈 토지 반환 역시 보상 조정을 청구한 이들 대다수가 문맹이었던데다가 거의 80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꼬인 복잡한 이권 관계를 해결하느라 토지청구위원회의 판결이 굉장히 더뎠고 개발 프로젝트에 장애물만 된다는 의견이 많아 대부분의 청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소작농과 임금노동자를 위한 보유권 확보 또한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만델라를 뒤이은 타보 음베키칼레마 모틀란테 정권기에 여러 정책전환이 시도되었다. 2000년에는 보조금 제도를 부족 공동체 대신 흑인 개별농에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개혁하여 현대적인 흑인 상업농을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보조금 액수는 여전히 한참 부족하였고 재분배 후속 정착 지원 조치 역시 미흡했다. 여러 이권 관계자들의 비판에 직면한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2005년, 자발적 판매자 - 자발적 구매자 원칙 철폐를 합의하고 정부가 수용 토지를 직구매 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후속 조치 미흡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여 재분배와 지역 사회 개발을 밀접히 연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예산을 증액시킨 만큼 토지 가격이 오르는 바람에 2010년까지 전체 농지 중 6.9%만이 재분배되었다. 2014년까지 30%의 농지를 재분배하겠다는 계획에 한참 미달한 수치였고 결국 남아공 정부는 토지개혁 실패선언을 하였다. 이후 제이컵 주마시릴 라마포사 집권기에도 남아공 정부는 토지개혁을 포기하지 않고 여러 정책 변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한편 반투족 특유의 공동체 부족 문화 역시 토지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데에 기여한다. 반투 부족들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지를 소유 및 매매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부족 소유 토지를 추장과 촌장, 가장이 필요에 따라 관습적으로 분할 배분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는 흑인 토지로 인정되었던 보류지와 반투스탄에서 꾸준히 인정되어왔으며 지금도 지속중이다. 추장들은 토지 분배에서 나오는 자신들의 관습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토지 정책에 의견 표명을 해왔고 공동체 토지권 법제화 시도에 반발해왔다. 한편, 만델라 정권기에는 보조금 액수가 적어 공동체 단위로, 혹은 비슷한 처지의 여러 빈민들이 모여 보조금을 공동 출자해 공동체 단위로 재정착하곤 했는데 특히 후자의 경우 전통과 추장의 권위가 없는 인위적 공동체라는 특성상 여러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으론 전통적으로 남아공 토지 소유 및 분배권은 남성에게 인정되어 여성은 남성의 경제력에 종속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젠더 문제 관점에서 접근하여 토지개혁에 성차별 시정을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존재한다.

4. 참고 문헌 및 자료



[1] 산업화가 되기 전까지 전근대적 산업체계 국가의 국민들의 대부분의 재산은 농업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토지개혁은 곧 중대한 사유재산 문제이자 생존권에 직결되는 문제였다.[2] 더군다나 다른 토지개혁이 기득권을 학살한것과 달리 인클로저 운동은 약자를 학살했으며, 미국 같은 경우는 원주민을 학살했다.[3] 2차산업 이후를 대표하는 노동자와 자본가는 대지주를 상대로는 "새로운 경제 구조&우리의 일자리를 위해 너희의 부와 권력, 그리고 지역 기반을 모조리 뱉어내라" 라는 도저히 정상적인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제안을 낼 수 밖에 없다.[4] 농기계, 농업토목, 농업금융, 농업교통&운수, 농산물 무역, 농업 연구개발 등[5] 6.25 전쟁 발발 이전 월남한 사람들 중 대략 절반이 이 과정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지주 및 그 가족들이었고 나머지 반은 교회를 뺏기고 탄압과 학살에서 살아남은 개신교인들이었다.[6] 중일전쟁의 경우 국민당과 일본군 모두 면까지 장악할 능력이 안 되었으며, 둘 다 (일단은) 지주의 권익에 우호적이었고, 또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조건으로 인정해주었기에 상대적으로 지주의 피해가 적었다. 공산당의 토지개혁 당시 수많은 지주들이 홍콩과 대만으로 피난했다.[7] 이는 한국 전쟁의 여파이기도 하다. 특히나 호남의 지주들은 토지개혁이라기보다 전쟁 때문에 몰락했다. 토지개혁을 거의 끝마친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인 1950년 6월 23일이었다. 이틀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토지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땅을 버려둔 채 피란길에 오른 지주는 먹고살기 위해 지가증권을 헐값에 넘겨야만 했다. #[8] 중남미와 같이 필리핀도 원래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필리핀이라는 국명 자체가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에서 따온 것. 때문에 두 곳 모두 스페인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와서 비슷할 수밖에 없다.[9] 오죽하면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조차도 이승만 정권 시기에 시행된 한국의 농지개혁법이 가장 성공한 사례라고 인정했을 정도.[10] 이때 월남한 지주층과 우익들, 기독교인 등이 지금도 한국사회의 축을 이루는 강력한 반공 보수층이 됐으며 북한이라면 아직도 치를 떨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들 중에 일부는 서북청년단 같은 단체를 만들어 남한의 좌익이나 억울하게 엮인 사람들에 대해 무자비한 백색테러를 가하는 복수귀가 되었다. 결국 남한에도 엄청난 피해를 주고 무고한 희생을 늘린 셈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문제라면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지주-소작제에 대한 시스템의 문제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모두가 납득할만한 면밀한 경제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북한은 공산혁명적 건국상황이라는 특수성을 악용하여 숙청 기반을 마련하여 권력을 강화하고자 한 김일성과 이 조치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소련군정의 주도로 그들이 어떤 죄상이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재산을 모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정한 처분이나 절차적 정당성 없이 지주와 자산가, 기독교인, 기타 우익세력들을 반동으로 몰아 숙청해버리는 가장 극단적인 정책을 취한 것이다. 특히 이 중 기독교인들 같은 경우 소위 '인민을 착취'한다고 주장하는 대지주나 자산가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여하간 이때 일어났던 토지개혁의 여파와 6.25 전쟁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남북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 '줴치다'는 '쥐어치다'의 북한식 표기 중 하나인데, 그 쥐어치다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정말로 유의어가 이 뜻이다. 비속어를 저렇게 써놓았다는 뜻이다.[12] 여기서 '리명박 쥐새끼'라는 드립이 남한에서 유명세를 탔다.[13] 일본 근대화의 시작점인 메이지 유신 시기, 프랑스 민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소작권 보호 조항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등 유신 세력은 친지주 정책을 폈다. 소작제로 인한 농촌 빈곤과 농업 생산량 저하도 사회구조 개선으로 풀기보다는 산미증식계획, 빈농 만주 이주, 남미 이민 장려 등으로 처리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본제국의 지주친화적 법체계와 사회구조는 조선, 대만등 식민지에도 착취적인 소작제가 뿌리내리게 하였다.[14] 이는 논의 경우로 밭은 48배의 가격으로 판매했다.[15] 인구밀도가 낮은 홋카이도만 예외적으로 농지보유 상한선이 4정보였다.[16]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은 향토 신사층의 민심 이반과 동요로 이루어졌고 자연스레 중화민국의 지역 군벌들도 현지 지주층이거나 그들과 깊게 엮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군벌들을 추스려 통일 정부의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던 국민당 정권 입장에서는 지역 군벌을 완전히 제압하기 전까진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었다. 군벌 문제가 사라지고 계엄령을 기반으로 한 독재권력을 확보한 국부천대 이후 대만의 토지개혁은 반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17] 참고로 중국의 지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지주가 아니라, 혈연 등으로 뭉친 중소지주들 내지 부농들이었다. 이 토지개혁에 반대하여 일부 지주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게릴라전까지 불사하며 공산당과 맞서 싸웠지만 결국 진압되었다.[18] 적게 일하나 많이 일하나 분배받는 양은 똑같기 때문에 결국 농민들의 노동의욕 저하를 일으킨다. 특히 대약진 운동 당시 중앙통제와 배급제의 비효율이 크게 드러났다.[19] 이러한 임대 수익은 중국 지방정부의 주요 세입원이기도 하다.[20] 대만도 한반도처럼 일제시대에는 병작반수제가 일반적이었다.[21] 토지개혁 과정에서 공산당 정권에 협조적이었던 중농, 빈농까지 지주 유산 계급으로 몰아 죽이거나 감금할 정도였다.[22] 본래 호찌민은 토지개혁과 사유재산 금지 등 공산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농민, 노동자들의 반대 시위가 벌어지자 초반에 정책 완화와 피해 보상 대책을 제시하며 이를 평화적으로 수습하려 했으나, 사태가 무마되기는 커녕 자칫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신생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 사태로까지 악화되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무력진압을 단행했다.[23] 일례로 필리핀의 부재지주 소유 대농장을 연구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많이 주목받곤 하는 Hacienda Luisita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일가의 소유이다.[24] 분익소작농은 소출에 따라 지주와 비율을 나누는 방식이고 정액소작농은 소출과 관계없이 정해진 임금을 받는 방식이다. 정액소작농화가 1963년에 갑자기 시행된 것은 아니고 1954년에 이미 추진되던 법률을 토지개혁법의 일부로 편입한 것이다.[25] 1963 농지개혁법은 소작농의 1/3 ~ 1/2의 청원이 있을 때만 개입 가능하였다.[26] 이는 Hacienda Luisita를 소유한 친정 코후앙코 가문 친척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27] 앙투안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앙시앵 레짐 프랑스의 징세청부업자들과 비슷했다.[28] 미국 독립전쟁에서 진압군 총 사령관을 맡은 콘월리스 본인이다.[29] 다만 늘어나던 무력 충돌 해결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구속한 강제력법(Coercion act) 또한 시행되었다.[30] 나폴레옹 전쟁의 충격을 겪은 프로이센이 1807~1811년 간 시행한 슈타인-하르덴베르크 개혁 내부에 봉건제 및 농노제 철폐가 존재하였으나, 토지 재분배 면에서는 큰 소득을 보이지 못해 융커 대지주 중심의 토지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유의미하게 존재하던 중소 자영농들을 봉건적 의무에서 해방시키고 중앙집권적 행정 도입에 성공한 성과가 존재한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사회주의의 융성과 함께 토지 재분배 관련 논의가 존재하였으나 정치 혼란속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는 못하였다.[31] 서독 쪽 융커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지주 지위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논외. 단 분단 이전부터 엘베강 서쪽엔 융커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데다가 독일 경제가 공업국가로 완전히 재편되면서 영향력은 매우 미미하다.[32]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부농(쿨라크)란 이유로 총살당하고 수백만이 넘는 농민들이 강제 이주당했다. 그리고 농업 집단화에 가장 강하게 저항한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해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33] 혁명 직전의 프랑스는 절대왕정과 중앙집권제가 정착된지 오래되어 봉건제 사회는 아니었다. 국민 의회가 지칭한 봉건제는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온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전근대적인 구습, 절대왕정의 잔재를 없애버리겠다는 선언이었다.[34] 이 때 몰수 토지로 발행한 채권이 그 유명한 아시냐이다.[35] 루이 18세는 혁명 이전으로 회귀해 토지를 전부 귀족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했지만, 그랬다간 2차 프랑스 혁명이 터질 게 뻔했기 때문에 정부가 소유한 몰수 토지를 반환해주는 우회적인 조치를 취했다.[36] 레콘키스타로 재정복된 지역이라는 역사적 맥락 상, 귀족들과 기사들에게 분배된 토지 비중이 높았고, 지형과 기후 역시 대토지 농업에 유리한 면이 있었다.[37] 마누엘 아사냐와 마르셀리노 도밍고를 비롯한 좌파 공화주의자들은 사회노동당과의 연정을 이루었지만 알레한드로 레룩스의 급진공화당(PRR)은 이에 반대해 공화주의 연합에서 탈퇴, 우파 CEDA와 손잡고 1933년에 성립된 중도우파 내각을 주도했다.[38] 법안에 명시된 부류의 토지들을 유가증권으로 유상 몰수해서 재분배해 자영농을 양성하는 법안이었다.[39] 임시정부의 임시 조처로 시행된 법으로 타 지역에서 온 농업 일용노동자의 고용을 금지하는 법이었다.[40] 분익소작농들의 농지 매입과 자영농화를 촉진하는 법이었다.[41] 인민전선 수립 과정에서 가장 갈등이 심했지만 결국 공화 좌파와 공산당 모두 손 잡게 된다.[42] 코민테른의 지시와 파시즘의 발흥 등으로 기존의 혁명론을 버리고 타 좌익세력과 연대하게 된다.[43] 이후에도 마피아/역사 항목을 보듯 이 시기 마피아들이 기존 구체제 인사들과 연합해서 정치깡패 노릇을 하면서 좌파들을 제재하고 범죄조직의 기틀을 쌓았다. 애초에 이탈리아 마피아 자체가 남부의 지주 및 중간 차지농 세력이 고용한 자경단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아 토지개혁 반대세력과 한몸인 일이 부지기수였다.[44] 당시 집권 및 개혁 주도 세력인 기독교민주당(이탈리아)의 남부 지주층 지지율 유지 문제 등으로 인해 개혁 내용이 어중간해졌다.[45] 빈 특유의 임대주택 중심의 주거 시스템이 자리잡힌 게 이 당시 제국의 해체로 인한 주택 수요 감소와 주택 공동체 운동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 때문이다.[46]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함께 한 세월이 긴 슬로베니아는 독일인(다만 지형적인 사유로 원래부터 대지주보단 자영농이 많은 지역이었고, 존재하는 대토지도 현지인 소유 비중이 높아 독일인 지주가 많다고 보긴 힘들었다. 지형 문제로 자영농이 많았던 건 오스트리아 독일계 다수 본토 지역도 마찬가지.),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던 크로아티아, 보이보디나,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헝가리인,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나머지 발칸 지역은 이슬람교도 지주가 많았다.[47] 실제 개혁은 1923년에 이루어졌다.[48] 비세르비아계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이주민에게 토지 점유 우선권을 부여하여 훗날의 비극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49] 그 이전, 1864년에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의 주도 하에 농노제 폐지가 진행된 바 있다. 당시 토지 재분배도 시도되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50] 독립 직후 1878년에 개혁 시도가 존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개혁은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의 주도하에 1920년에 법이 통과된 후, 1921년에 시행되었다.[51] 부정적인 면으로는, 발칸 전쟁 등을 통해 제국 하에서 섞여살던 타 민족에 대한 강제 추방 및 제노사이드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지주 추방은 학살로 인한 인구 변동 및 민족국가화에 힘입어 진행되었다.[52] 남북 전쟁 이전에도 비슷한 법안이 계속 발의되었으나 서부에 노예제 대농장을 양성하고 싶어한 남부 주들의 반발로 번번히 거부당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해 남부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자 비로소 통과시킬 수 있었다.[53] 식민지 시기 엔코미엔다처럼 토지 소유권은 기존의 지주가 갖되 해당 토지 소작농들이 국가에 농업공동체 설립 신청을 하면 국가가 검토를 거쳐 설립을 허락해주고 소작권과 경작 상속권을 보호해주는 방식이다.[54] 소유권이 아예 분배가 안된건 아니고 9669가구 100만 헥타르 정도는 이전이 되었다.출처 122페이지 다만 일부는 대토지 소유자 농지에 불법 점거 형태가 많았다고 한다.[55] 굴라르의 토지개혁과 좌익 개혁에 반대한 엘리트들의 공작으로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국가 체제가 내각제로 바뀌며 실권없는 대통령이 되었으나 1963년 대통령제 복귀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대통령 권한을 완전히 회복하였다.[56] 귀족과 정교회가 거점으로 삼고 있던 고잠, 곤다르 등의 북부 몇몇 지역에서는 정부의 토지 측량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인근 농민들을 무력으로 협박해 지대를 취득해가는 일도 있었다. 한편 1983년 에티오피아 대기근이 북부 중심으로 진행되자 멩기스투 정권은 당시 반군이 준동하던 북부를 손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제를 방기하고 기근을 키웠다.[57] 아디스아바바 근교 농촌지대는 농가당 평균 보유 농지가 1헥타르 정도에 불과했다. 논농사 지대가 아닌 이상 최소 5헥타르는 있어야 자영농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매우 부족한 땅이다.[58] 짐바브웨 입장에서는 독립유공자다.[59] 물론 이런 행각들에 대한 짐바브웨 흑인들의 여론은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반환 소송에 대한 한국인들의 여론 그 이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현 짐바브웨 정부도 토지 배상은 포기하고 금전적 배상으로 대체했는데 문제는 그것도 짐바브웨 입장에서는 감당이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60] 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시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를 넘어 어릴 적에 백인 농장주들에게 전재산이나 다름없던 토지를 뺏긴 적이 있다.[61] 2020년 짐바브웨의 GDP가 215.1억 달러(약 25.8조 원)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려 짐바브웨 GDP의 16.3%(!!!)를 배상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짐바브웨의 경제 꼴이 말이 아니라 30년 장기 국채를 발행해 보상을 진행할 예정이며, 보상액의 절반은 1년 안에 지급하고 나머지는 5년 안에 지급하기로 했다고 한다.[62] 실제로 토지개혁으로 몰수한 백인 농장주의 토지 상당수가 백인들에게 핍박받은 흑인 농부들이 아닌 무가베와 그 측근들에게 넘어갔다.[63] 이는 일본 극우들이 친일파 재산 환수법이 발표되자 한국은 야만국이라며 반발한 것과 일맥상통한다.[64] 찌라시 언론사가 아닌 정론 언론사들까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