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20:10:20

제툴리우 바르가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6a25, #009b3a 20%, #009b3a 80%, #006a25); color: #fedf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데오도루 다 폰세카 플로리아누 페이쇼투 프루덴치 지 모라이스 캄푸스 살리스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호드리기스 아우베스 아폰수 페나 닐루 페사냐 에르메스 다 폰세카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벤세슬라우 브라스 데우핑 모레이라 에피타시우 페소아 아르투르 베르나르지스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와싱톤 루이스 제툴리우 바르가스 조제 리냐리스 에우리쿠 가스파 두트라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툴리우 바르가스 카페 필류 카를루스 루스 네레우 하무스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주셀리누 쿠비체크 자니우 쿠아드루스 하니에리 마질리 주앙 굴라르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하니에리 마질리 카스텔루 브랑쿠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 에밀리우 가하스타주 메디시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에르네스투 가이제우 주앙 피게이레두 조제 사르네이 페르난두 콜로르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이타마르 프랑쿠 페르난두 카르도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지우마 호세프
제37대 제38대 제39대
미셰우 테메르 자이르 보우소나루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추증
페드루 알레이시우 · 탄크레두 네베스
}}}}}}}}}

제툴리우 바르가스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주앙 6세 시대 (1808~1821)
초대
페르난두 주제 포르투갈
2대
안토니우 지아라우주 이 아제베두
3대
주앙 파울루 베제하 지세이샤스
4대
토마즈 안토니우 지빌라노바 포르투갈
5대
동 지오구 지메네제스
페드루 왕자 섭정 시대 (1821~1822)
5대
동 지오구 지메네제스
6대
카에타누 핀투 지미란다 몬테네그루
7대
마르칭 프란시스쿠 히베이루 지안드라다
페드루 1세 시대 (1822~1831)
7대
마르칭 프란시스쿠 히베이루 지안드라다
8대
마누에우 자싱투 노게이라 다가마
9대
세바스치앙 루이즈 치노쿠 다시우바
10대
마리아누 주제 페레이라 다폰세카
11대
펠리즈베리투 칼데이라 브란트 폰치스 지올리베리아 호르타
12대
안토니우 루이즈 페레이라 다쿠냐
13대
마누에우 자싱투 노게이라 다가마
14대
주앙 세베리아누 마시에우 다코스타
15대
미구에우 칼몽 두핑 이 알메이다
16대
주제 클레멘치 페레이라
17대
주제 베르나르지누 바치스타 페레이라 지알메이다
18대
미구에우 칼몽 두핑 이 알메이다
19대
펠리즈베리투 칼데이라 브란트 폰치스 지올리베리아 호르타
20대
주제 안토니우 리스보아
21대
안토니우 프란시스쿠 카발칸치 지알부케르크
22대
마누에우 자싱투 노게이라 다가마
페드루 2세 시대 (1831~1889)
23대
주제 이나시우 보르게즈
24대
베르나르두 페레이라 지 바스콘셀루스
25대
조아킹 주제 호드리게스 토헤스
26대
안토니우 프란시스쿠 카발칸치 지알부케르크
27대
니콜라우 페레이라 지캄푸스 베르게이루
28대
칸지두 주제 지아라우주 비아나
29대
안토니우 핀투 치쇼호 다가마
30대
마누에우 두나시멘투 카스트로 이 시우바
31대
마누에우 알베즈 브랑쿠
32대
미구에우 칼몽 두핑 이 알메이다
33대
칸지두 바치스타 지올리베리아
34대
마누에우 알베즈 브랑쿠
35대
주제 안토니우 다시우바 마이아
36대
마르칭 프란시스쿠 히베이루 지안드라다
37대
미구에우 칼몽 두핑 이 알메이다
38대
조아킹 프란시스쿠 비아나
39대
마누에우 알베즈 브랑쿠
40대
안토니우 프란시스쿠 카발칸치 지알부케르크
초대 직무대행
주제 조아킹 페르난데스 토헤스
41대
마누네우 알베즈 브랑쿠
2대 직무대행
사투리누 지소우자 이 올리베이라 쿠티뉴
42대
마누네우 알베즈 브랑쿠
43대
안토니우 파울리누 림푸 지아브레우
44대
지아스 지카르발류
45대
프란시스쿠 지파울라 소우자 이 멜루
46대
페드루 지아라우주 리마
47대
주제 조아킹 페르난데스 토헤스
3대 직무대행
파울리누 주제 소아레즈 지소우자
47대
주제 조아킹 페르난데스 토헤스
4대 직무대행
마누에우 펠리자르두 지소우자 이 멜루
48대
오노리우 에르메투 카네이루 레앙
49대
안토니우 파울리누 림푸 지아브레우
50대
오노리우 에르메투 카네이루 레앙
51대
주앙 마우리시우 완델레이
52대
베르나르두 지소우자 프랑쿠
53대
프란시스쿠 지살레스 토헤스 오멩
54대
앙젤루 모니즈 다시우바 페하즈
55대
주제 마리아 다시우바 파라뉴스
56대
지아스 지카르발류
57대
안토니우 프란시스쿠 카발칸치 지알부케르크
58대
미구에우 칼몽 두핑 이 알메이다
59대
지아스 지카르발류
60대
카를루스 카네이루 지 캄푸스
61대
지아스 지카르발류
62대
프란시스쿠 지파울라 다실베이라 로부
63대
주앙 다시우바 카라웅
64대
자카리아스 지고이스 이 바스콘셀루스
65대
주제 조아킹 페르난데스 토헤스
66대
프란시스쿠 지살레스 토헤스 오멩
67대
주제 마리아 다시우바 파라뉴스
68대
주앙 마우리시우 완델레이
69대
주앙 린스 비레이라 칸산사웅 지시님부
70대
가스파르 다실베이라 마르칭스
71대
아폰수 셀수 지아시스 피게이레두
72대
주제 안토니우 사라비아
73대
마르칭뉴 알바레스 다시우바 캄푸스
74대
주앙 루스토사 다쿠냐 파라나구아
75대
라파예트 호드리게스 페레이라
76대
소우자 단타스
77대
주제 안토니우 사라비아
78대
프란시스투 벨리사리우 소아레즈 지소우자
79대
주앙 알프레두 코헤이아 지올리베리아
80대
아폰수 셀수 지아시스 피게이레두
5대 직무대행
칸지두 루이즈 마리아 지올리베리아
80대
아폰수 셀수 지아시스 피게이레두
공화국 시대 (1889~현재)
81대
후이 바르보사
82대
트리스탕 지알렌카 아라리페
83대
엔히키 페레이라 지루세나
직무대행
안탕 곤살베스 지파리아
84대
호드리기스 아우베스
직무대행
안탕 곤살베스 지파리아
85대
세제델루 코헤이아
86대
펠리스벨루 프리무 지올리베이라 프레이리
직무대행
알렉산드레 카시아누 두나시멘투
87대
호드리기스 아우베스
88대
베르나르지누 지캄푸스
89대
조아킹 무치뉴
90대
사비누 바호수
91대
레오폴두 지불롱이스
92대
다비드 모레송 캄피스타
93대
레오폴두 지불롱이스
94대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지살레스
직무대행
히바다비아 코헤이아
95대
히바다비아 코헤이아
96대
사비누 바호수
97
판지아 칼로게라스
98대
안토니우 카를루스 히베이루 지안드라다
직무대행
아우구스투 타바레즈 지리라
99대
아마루 카발칸치
100대
주앙 히베이루 지올리베리아 이 소자
101대
오메루 바치스타
102대
하파에우 지아브레우 상파이우 비다우
103대
아니바우 프레이리 다폰세카
104대
제툴리우 바르가스
105대
올리베이라 보텔류
106대
아게노르 라파예트 지호우리
107대
주제 마리아 휘태커
108대
오스발두 아라냐
109대
아르투르 지소우자 코스타
직무대행
올란두 반데리아 빌레라
직무대행
호메루 에스텔리타 카발칸치 페소아
직무대행
파울루 지리라 트라베즈
110
주제 피레스 두히우
111대
가스탕 비지가우
직무대행
오나우두 브란칸치
112대
페드루 루이즈 코헤이아 이 카스트로
직무대행
오스카 산타 마리아
직무대행
주제 비에이라 마샤두
직무대행
오비지우 지아브레우
113대
마누에우 길레르미 다실베이라 필류
114대
오라시우 라페르
직무대행
알베르투 안드라지 지케이루스
115대
오스발두 아라냐
116대
유제니우 구딘
직무대행
오타비우 구베이아 지불롱이스
117대
주제 마리아 휘태커
118대
마리우 레오폴두 페레이라 다카마라
119대
조제 마리아 아우키민
직무대행
세바스치앙 파에스 지알메이다
직무대행
주앙 지올리베이라 카스트로 비아나 주니오르
120대
루카스 로페즈
121대
세바스치앙 파에스 지알메이다
직무대행
마우리시우 샤가스 비칼류
직무대행
안토니우 카를루스 바셀로스
122대
클레멘치 마리아니
직무대행
애밀통 프리스투 파라이소
122대
클레멘치 마리아니
123대
왈테르 모레이라 살레스
직무대행
탄크레두 네베스
123대
왈테르 모레이라 살레스
직무대행
엔히키 도밍고스 히베이루 바르바로사
124대
프란시스투 지파울라 브로샤두 다호샤
125대
미구에우 칼몽 두핑 이 알메이다 소브리뉴
126대
산 치아구 단타스
직무대행
안토니우 발비누
127대
카르발류 핀투
직무대행
엘리우 비쿠두
128대
네이 네베스 갈바웅
직무대행
왈디르 하모스 보르게스
129대
오타비우 구베이아 지불롱이스
직무대행
호베르투 캄푸스
직무대행
에두아르두 로페즈 호드리게스
130대
안토니우 델핑 네투
직무대행
페르난두 히베이루 두발
130
안토니우 델핑 네투
131대
주제 플라비우 페코라
132대
마리우 엔히키 시몬센
133대
카를루스 헤인즈 리쉬비터
직무대행
마르시우 포르치스
134대
에르나니 갈베아스
직무대행
에두아르두 페레이라 지카르발류
직무대행
카를루스 비아카바
135대
프란시스쿠 도르넬레스
136대
질송 푸나루
137대
루이즈 카를루스 페레이라
138대
말리송 다노브레가
139대
젱이라 카르도수 지멜루
140대
마르실리우 마르케스 모레이라
141대
구스타부 크라우스
142대
파울루 호베르투 아다지
143대
엘리세우 헤젠지
144대
페르난두 카르도주
145대
루벤스 히쿠페루
146대
키루 고메즈
147대
페드루 말란
148대
안토니우 팔로치
149대
귀두 만테가
직무대행
베르나르드 아피
149대
귀두 만테가
150대
조아킹 레비
151대
네우송 바르바로사
152대
엔히키 메이렐레즈
153대
에두아르두 과르지아
154대
파울루 게데즈
155대
페르난두 아다지
}}}}}}}}}}}}

파일:SBT 로고.svg 선정 위대한 브라질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12년 7월 11일 브라질의 민영 방송사 SBT가 BBC의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을 바탕으로 브라질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브라질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df00> 1위 2위 3위 4위 5위
시쿠 샤비에르 아우베르투 산토스뒤몽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 제툴리우 바르가스 주셀리누 쿠비체크
<rowcolor=#ffdf00>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일톤 세나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페르난두 카르도주 펠레 치라뎅치스
11위~100위
<rowcolor=#ffdf00>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이르마 두우시 에지르 마세두 시쿠 아니지우 호나우두
<rowcolor=#ffdf00>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데르시 곤사우베스 지우다 아른스 호베르투 카를루스 주제 알렝카르 네이마르 주니오르
<rowcolor=#ffdf00>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에이키 바치스타 후이 바르보자 프레이 가우방 마누에우 자싱투 코엘류 오즈와우두 크루스
<rowcolor=#ffdf00>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실라스 말라파이아 페드루 2세 치쿠 멘지스 루이스 곤자가 헤나투 후수
<rowcolor=#ffdf00>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헤르베르트 지소자 파드리 시세루 지우마 호세프 탄크레두 네베스 루시아누 후키
<rowcolor=#ffdf00>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바우데미르 산치아구 에우데르 카마라 헤나투 아라강 호드리구 파루 슈샤
<rowcolor=#ffdf00>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마샤두 지 아시스 루앙 산타나 이베치 상갈루 엘리스 헤지나 마우아의 자작
<rowcolor=#ffdf00>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하우 세이샤스 레오네우 브리조우라 치리리카 구구 리베라투 호제리우 세니
<rowcolor=#ffdf00>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주제 지파이바 네투 카를루즈 드루몽 지안드라지 줌비 호미우두 히베이루 소아리스 파울루 프레이리
<rowcolor=#ffdf00>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이비 카마르구 몬테이루 로바투 호베르투 마리뉴 마르쿠스 마르셀루 로시
<rowcolor=#ffdf00>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지쿠 아마시우 마자로피 데데 울리시스 기마랑이스 헤이나우두 지아니키니
<rowcolor=#ffdf00>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카를루스 샤가스 조나스 아비비 카시아스 공작 안토니우 에르미리우 지모라이스 칸지두 론돈
<rowcolor=#ffdf00>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루아 블랑쿠 미셰우 텔로 가린샤 람피앙 클라우지아 레이치
<rowcolor=#ffdf00>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치스 마르쿠스 폰치스 페르난두 콜로르 주제 세하 소크라치스
<rowcolor=#ffdf00>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주제 루이스 다테나 호나우지뉴 조엘마 치쿠 부아르키 샤크리냐
<rowcolor=#ffdf00>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아마두 바치스타 윌리암 보나르 카주자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앤더슨 실바
<rowcolor=#ffdf00>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호베르투 랑데우 지모라 호마리우 조르지 아마두 호나우지 골리아스 이타마르 프랑쿠
<rowcolor=#ffdf00>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호베르투 주스투스 아나 파울라 발라당 비탈 브라질 조 소아리스 마리아 다페냐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브라질 합중국 제14·17대 대통령
제툴리우 도르넬리스 바르가스
Getúlio Dornelles Vargas
파일:Getulio_Vargas_(1930).jpg
<colbgcolor=#009B3A><colcolor=#FFD700> 출생 1882년 4월 19일
브라질 제국 히우그란지두술주 상보르자
사망 1954년 8월 24일 (향년 72세)
브라질 합중국 리우데자네이루 대통령 관저
재임기간 제14대 대통령
1930년 11월 3일 ~ 1945년 10월 29일
제17대 대통령
1951년 1월 31일 ~ 1954년 8월 24일
경력 재무부 장관 ,(1926~1927),
히우그란지두술주 주지사 ,(1927~1930),
브라질 제14대 대통령 ,(1930~1945),
히우그란지두술주 연방 상원의원 ,(1946~1951),
브라질 제17대 대통령 ,(1951~1954),
서명
파일:제툴리우 바르가스 서명.svg
파일:바르가스 2기.jpg
제17대 대통령(집권 2기) 공식 사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바르가스 정부 1기2.3. 바르가스 정부 2기
3. 평가4.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14대, 17대 대통령.

브라질 정치사에서 좋든 싫든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독재자 출신이지만 후술하듯 집권 2기 때는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는 점, 최후가 반대파에 떠밀린 자살이라는 점, 그리고 브라질의 사회적 후진성을 청산하고 경제와 사회인식을 끌어올린 업적도 어느 정도 있기에 명암이 갈리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82년, 브라질 남부 빰빠[1] 지역인 히우그란지두술 주에서 목장주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법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됐고, 1908년 주의회 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연방 하원의원, 재무장관을 지낸 후, 1928년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가 됐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커피 지주들이 주축이 된 상파울루 공화당과 미나스제라이스 공화당이 협약을 맺고 번갈아가면서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2], 1930년 대선에서 상파울루 출신의 와싱톤 루이스 대통령이 같은 주 출신의 줄리우 프레스치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양자의 동맹이 깨지게 된다.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였던 바르가스는 미나스제라이스의 지지를 받아 1930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그 해 7월 바르가스의 러닝메이트였던 부통령 후보 주앙 페소아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히우그란지두술과 미나스제라이스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어서 군부에 의한 10월 쿠데타가 일어났고 바르가스는 임시 대통령이 된다.

2.2. 바르가스 정부 1기

당시 브라질은 대공황의 여파로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으로, 브라질의 경제 윈동력이었던 커피 산업이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바르가스는 커피 가격을 상승시키기 위해 과도하게 많이 생산된 커피를 사들여 폐기하는 정책을 취했다. 1932년 상파울루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이는 진압되었다.

1934년 신헌법이 제정되고 바르가스는 1934년 4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30년대 브라질에서는 통합주의행동당(AIB)을 비롯한 파시즘 조직들과 민족해방동맹(ALN)을 결성한 공산주의자들이 세력을 불려 갔는데, 그 전부터 국가보안법 등을 제정해 이들의 충돌을 통제하려고 하던 바르가스 정부는 1935년 공산당의 봉기가 진압된 후 좌익 세력에 강경한 탄압을 가했다. 1937년 선거를 앞두고 바르가스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포르투갈 제2공화국을 모방하여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3]를 선포하고 전체주의 독재 정치를 하였다. 파시스트 통합주의자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였으나, 바르가스는 통합주의자들을 기용하지 않았고, 이에 통합주의자들은 대통령궁을 습격하여 바르가스를 쫓아내려 하였으나 진압당했다.

이후 바르가스는 더욱 강하게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하고, 산업화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교육에도 투자를 하였다.[4] 바르가스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을 탄압하고, 노동조합을 통제하면서도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정책 자체는 받아들여서 노동 관련 법을 제정하고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는 등의 친노동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대중을 향한 선전을 통해 노동자들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종통합 정책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백인과 흑인, 원주민들의 문화롤 조화롭게 융합해서 새로운 브라질 문화를 탄생시키자가 국가적인 모토로 자리매김하였고, 그리하여 이전까지 백인들에 의해 저급한 문화로 여겨졌던 삼바와 반대로 백인 일색의 스포츠였던 축구가 브라질 대다수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 아이콘이 된 것도 바르가스 시대의 일이었다.

브라질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브라질의 쿠데타에 우호적이었으나, 바르가스가 통합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등 국내 파시스트들과 거리를 두면서 양국 간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브라질은 1942년 1월 추축국과 관계를 끊고, 이후 독일 잠수함이 브라질 상선을 격침시키자 1942년 8월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연합국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였고, 브라질군이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 파병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브라질 내에서는 독재 국가가 연합국으로 참전하는 모순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5],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결국 바르가스는 1945년 선거 실시를 약속하였고, 자신도 노동계가 주도한 브라질 노동당(PTB)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10월, 그를 지지하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다. 군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브라질 제4공화국을 선포한다.

2.3. 바르가스 정부 2기

하지만 바르가스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퇴임 직후 히우그란지두술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1950년 대선에 출마해 브라질의 제17대 대통령이 된다. 바르가스는 차관을 들여와 농업 국가이던 브라질의 공업화를 추진하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심각해진 브라질의 인플레이션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53년 바르가스는 노동부 장관으로 노동계 인물인 주앙 굴라르를 임명했는데, 보수파들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바르가스는 커피에 대해 복수환율제를 도입해 이로 얻은 수익을 공업에 투자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미국과의 마찰을 빚게 된다.

1954년 바르가스 정부가 최저임금 100% 인상을 발표하자 보수파는 크게 반발했고, 이 와중에 바르가스의 측근이 반정부 정치인인 카를루스 라세르다[6]에 대한 암살 시도를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행히 라세르다는 살았지만, 브라질 공군 소령 루벤스 바즈(Rubens Vaz)가 이 과정에서 사망했고, 경찰 수사에 의하면 바르가스가 직접 관여한 증거는 찾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발전했다. 이에 바르가스는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임을 주장하며 저항했으나 1954년 8월 23일, 27명의 군 장성들이 서명한 대통령 사임 요구서가 국민들 앞에 발표되었고, 절망한 바르가스는 1954년 8월 24일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유언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몇 년간의 국제적인 경제금융단체들의 지배와 약탈이 있은 후에, 나는 자신을 꺾일 수 없는 혁명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나는 자유화 작업을 시작하였고 사회적 자유체제를 세웠다. 그러나 나는 사임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국민 편에서 통치하기 위해 돌아왔다. 나는 브라질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를 통해 우리의 부를 증진시켜 국민의 자유를 이룩하려고 했으나, 난동의 소용돌이는 시작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브라질 전기 일레트로브라스는 방해를 받아 거의 절망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민중이 독립되기를 원치도 않았다. 나는 브라질에 대한 약탈에 대항해 투쟁했고, 민중에 대한 약탈에 대해 투쟁했다. 나는 맨몸으로 투쟁했다. 증오나 불명예, 중상도 나의 정신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나는 국민들에게 나의 일생을 바쳤다. 이제 나의 죽음을 바치노라.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용히 영원의 길로 나의 첫걸음을 내디디며 삶을 떠나 역사에 묻히고자 한다.

이렇게 바르가스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이번엔 반대로 분노한 대중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여론이 반전되어 카페 필류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1955년 대선에서는 사회민주당의 주셀리누 쿠비체크가 대통령으로, 노동당의 주앙 굴라르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7]

3. 평가

오늘날 바르가스에 대한 평가는 브라질에서 엇갈리는 편으로, 브라질의 공업화를 선도하면서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의무교육을 대대적으로 도입했으며 인종차별과 여성차별 등의 악습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브라질 사회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긍정적인 평과 함께, 임기 전반기에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독재정치를 펼친데다가 2기 집권시에는 그래도 좀 정신 차리고 민주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인플레이션을 제대로 잡지 못한 점 때문에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바르가스는 분배 정책 등 좌클릭 정책을 펴고 노동자와 여성, 흑인들의 권리를 향상시켜서 브라질의 발전을 도모했지만, 한편으론 목장주 출신이라는 출신 성분 덕택인지 대지주들을 제압해서 집권했음에도 막상 토지개혁에는 미적거렸고, 덕택에 현재까지도 소수의 지주들이 브라질 농토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구조가 유지되어서 브라질 사회의 문제점인 극심한 빈부격차가 유지되었다는 한계점을 지적하는 평도 있다.[8]

전반적으로 1930년 군부의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장기 집권을 한 독재자이면서도, 동시에 소수 엘리트에 의한 과두 지배 체제를 무너뜨린 중남미 포퓰리즘의 선구자격이 되는 인물 중 하나기 때문에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도 있다. 이웃나라 아르헨티나후안 페론과 비교되기도 하는 인물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는 점은 미묘하다. 바르가스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제툴리우 바르가스 재단(Fundação Getulio Vargas, 이하 FGV)은 오늘날에도 중남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싱크탱크다.

브라질의 저명한 교육학자인 파울루 프레이리는 그의 저서인 페다고지에서 제툴리우 바르기스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며 반동적 엘리트들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다고 언급하였다. 일견 보기에는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제툴리우 바르가스의 정책 방향과 그 수혜 계층이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보면 나올 수 있는 언급이다.

비정상회담에 나왔던 브라질인 방송인인 카를로스 고리토는 바르가스가 독재자였던 건 맞고 그래서 브라질에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현대 브라질에 큰 영향력을 끼친 정치인인 건 분명하다고 이야기했다.

4. 매체에서

파일:제툴리우 바르가스(Hearts of Iron IV).jpg[9]
 
[1] 빰빠는 이 지역부터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동부까지 이어지는 지역인데, 쌀 농사로 유명하다. 다른 농사도 짓지만 벼농사에 유리한 기후라 쌀 생산량이 가장 많다.[2] 상파울루, 미나스제라이스 두 주가 맺은 협약으로 Cafe com Leite라고 부른다.[3]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국가 또는 체제라는 뜻[4] 이러한 문맹퇴치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어 문맹률을 크게 줄일수는 있었지만 시골 곳곳에 까지 학교가 세워지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바르가스 시대 말기에도 문맹률은 40%에 달했다.[5]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유럽 전선에 파병된 브라질 군인들 입장에선, '그럼 내 나라는...?'이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6] 당시 브라질 중도우파 정당인 민족민주연합(National Democratic Union)의 대표였다.[7] 1956년 1월까지가 바르가스의 정상적인 임기였다.[8] 사실 1960년대 초반 주앙 굴라르 시절 브라질 내에서도 토지개혁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군부독재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산되었으며, 1980년대 민주화 이후로 시도해봤지만 여러가지 난관 때문에 실질적으로 실행되지 않아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9] TOA DLC 이전까지 사용한 초상화.